소설리스트

22화 (23/77)

22

침실은 고요했다.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던 질척이는 소리라든가 신음, 비명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들리는 것은 키이스의 깊은 숨소리뿐이었다. 마치 아기의 그것처럼 고요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숨소리였다.

‘저, 피트먼 씨……?’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봤지만 역시나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 그의 어깨를 잡아 조금 흔들었다. 여전히 키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나는 난감해졌다. 생각을 떠올리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이 키이스에게 결박당한 것처럼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안간힘을 써 뒤척여 봤으나 허리가 흔들리자 내게서는 비명이, 키이스에게서는 신음이 나왔다.

헉.

아래가 또다시 단단하게 굳어지는 감각에 나는 숨을 삼켰다. 이 남자는 자면서도 내 안에서 발기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직도 이 남자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동안 계속된 상황에 배 속을 채운 감각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뒤늦게 안쪽의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자극하면 이 남자는 곧바로 눈을 뜨고 또다시 내게 박아 댈 것 같았다. 더 한다면 정말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키이스의 아래에 깔려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찰스였다. 순간 나는 당황해 숨을 삼켰지만 그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런 동요 없이 곧장 침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찰스는 긴장한 나를 향해 고작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그의 도움으로 나는 간신히 키이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막 아래에서 빠져나가려는 나의 허리를 키이스가 귀신같이 알고 끌어안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내 팔의 힘이 풀리고, 나는 기다시피 침대 위를 헤엄쳐 나왔으나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저런.”

찰스가 짧은 감탄사를 뱉고 나를 일으켜 줬다. 나는 그만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찰스가 욕실에서 가운을 가져와 내게 덮어 주었다. 곧이어 나는 훌쩍 그에게 안겨 내 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는 내 방에서 끙끙 앓고 키이스는 잠이 든 채 다시 시간이 흘렀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러트가 끝나고 나면 극알파들은 깊은 수면에 빠져든다고 한다. 길게는 3일까지도 잔다고 하는데, 키이스는 만 이틀 만에 깨어났다.

키이스가 눈을 뜬 날 다른 메이드에게서 보고를 받은 찰스는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대부분은 반나절이면 깨시는데 이번엔 오래 주무셨군요.”

호사스럽게도 침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나는 그만 무안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찰스는 여전히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때보다 격한 러트를 보내셨으니 어쩔 수 없겠죠. 연우 탓이 아닙니다.”

안심하려는 찰나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아니지, 연우 탓이 맞군요.”

무슨 얘기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키이스의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를 거들어 주던 찰스가 키이스에게로 가 버린 후 나는 혼자서 남은 식사를 마저 마쳤다. 찰스가 미리 지시를 한 듯 얼마간 지나 들어온 것은 에밀리였다. 그녀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태도로 내게 후식으로 뭘 먹을 거냐고 물어보더니 좀 더 쉬라며 격려해 준 뒤 빈 식기를 들고 사라졌다.

뒤늦게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온 집안사람들이 내가 키이스와 섹스한 것을 알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괜찮아, 히트사이클에 알파와 자는 오메가들은 세상에 먼지만큼이나 많아.

이 많은 먼지들이 다 나처럼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 오메가인 것은 아닐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 뒤 내 방에 들어온 고용인들의 태도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내 앞에서는 평정을 가장했다. 나 또한 모른 척 평소처럼 그들을 대했다.

다음 날 출근을 할 거라는 키이스의 말을 찰스가 전한 건 그날 저녁이었다. 그와 함께 찰스는 넌지시 덧붙였다.

“피트먼 씨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몇 군데 기억이 끊겨 있는 것 같습니다. 러트라고 해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요…….”

찰스는 흐음, 하고 덧붙였다.

“최근 관계를 갖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랬나? 나는 날짜를 되짚어 봤다. 나오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언제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솔직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는……. 보름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어쨌든 주치의에게 물었더니 페로몬이 쌓여서 그런 거라고 하더군요.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심각하게 기억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앞으로 연우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내게 어서 키이스의 상대를 찾으라고 재촉하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그저 네,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번 일은 그저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나였기 때문에 키이스는 나와 러트를 보낸 것이다. 남자와는 자지 않는다는 철칙까지 깨 버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곧 찰스가 나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몸은 어느 정도 침대 밖으로 나와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를 방에서 한 이유는 오직 키이스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동안 전화로 회사의 상황을 확인했고, 보고서도 작성했다. 키이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그가 휴가를 갔을 때와 같은 비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고 엠마에게서 들었다.

[연우는 괜찮아요? 혹시 피트먼 씨가 무리하게 만든 건 아닌지 싶어서.]

난데없이 날벼락처럼 상황을 정리해야 했을 텐데도 엠마는 나를 걱정해 줬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네, 미안합니다. 갑자기 히트사이클이 와 버려서 출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중간에 주말이 낀 탓에 결근이 1주일이나 된 이유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대신 꼭 신세를 갚겠다는 말을 하자 엠마는 여느 때처럼 웃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이해하니까.]

그리고 그녀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오빠도 오메가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그게 오면 얼마나 난감한지 잘 알죠.]

엠마가 베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오빠도 베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심 선입견을 갖고 있던 자신을 슬쩍 타박했다. 나부터도 집안 전체가 베타인데 유일한 오메가면서 당연히 그럴 거라고 판단하다니.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뒤늦게 오빠가 경호원이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오메가도 경호원을 할 수가 있나? 페로몬 때문에 힘들 것 같은데.

당장 키이스의 경호원을 채용할 때도 오메가는 기본적으로 배제되기 일쑤였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곧 생각을 접어 버리고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 또다시 날이 밝았다.

* * *

“네, 그 건에 대해서는 오후에 회의를 열어 결정을 내릴 겁니다. 긍정적인 쪽으로 말씀드리고 싶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제가 말씀드리기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메모한 것을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똑, 박자를 맞춰 두드린 후 문을 열자 담배를 피우며 가죽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는 키이스의 옆모습이 보였다. 나는 똑바로 사무실을 가로질러 걸어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섰다.

“체이스 밀러 씨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지난번 요구했던 사항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서 오늘 회의 결과에 따라 답변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스케줄이 없고 다른 스케줄은 내일부터 전부 끼워 넣었습니다. 원하시는 일정이 있으시다면 회의가 끝난 후 하나 정도는 넣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듯이 나는 기다렸다. 키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흘긋 나를 쳐다본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장이 꽉 막히는 듯했다. 마치 실험실의 개처럼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순식간에 아래가 달아오르고 몸속이 욱신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에게 키스하고 아래를 벌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나는 울며 애원할 뻔했다. 제발 내게 박아 달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저 책상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키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 역시 내 생각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토록 발정하는 나를.

극알파인 키이스가 아니라 내가 짐승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후, 하고 연기를 뱉어 낸 그가 줄어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가 봐.”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한 후 몸을 돌려 나왔다. 일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외면한 채 문을 닫았다.

후우.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처음 얼굴을 보게 된 키이스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페로몬 향은 이전처럼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러트 기간 동안 잔뜩 쏟아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러트가 끝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페로몬에 휘둘릴 일은 없었다. 당분간은.

함께 차를 타고 왔지만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나누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 일은 그저 돌발적인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멍하니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간신히 출근해 보니 회사는 마비 상태였다. 키이스는 물론이고 나까지 종적을 감춰 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찰스가 비서실에 긴급 사태임을 알리고 최대한 스케줄을 조정하라고 대신 지시를 내린 덕분에 어느 정도 무마가 되긴 했다.

그동안 키이스와 나는 내내 침실에서 미친 듯이 박아 대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많이 섹스를 한 것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아직도 가랑이 사이가 얼얼하고 다리가 잘 오므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 온몸이 부서진 것처럼 아팠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히트사이클이 지난 후 하루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놀라울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이래서 알파나 오메가들이 그토록 격하게 시기를 거치면서도 멀쩡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는 처음이라 몸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인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누워 있긴 했다. 안쪽은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이 됐지만 정작 허리나 다리가 버티질 못했다. 무릎을 세우는 것도 힘겨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곤 했다.

그렇게 아팠는데 현재는 그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불편함이 있는 게 전부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것은 키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내 위에 엎드린 채 깊은숨을 몰아쉬던 그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아랫도리가 맞물려 있던 느낌 또한.

새삼스럽게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몸 안쪽에서 열이 올랐다. 문득 뜻밖의 향기가 느껴졌다.

내게서 나는 오메가의 향이었다.

나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급히 팔을 들어 몸의 여기저기에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 분명히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오메가는 나뿐이다. 무엇보다 손목 안쪽에 코를 가져가는 순간 느껴진 청량하면서도 은은한 향기는 부정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사정 후 정액에서 풍기는 향기가 아닌 이렇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자신의 향을 맡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메가 특유의 향기였지만 그것이 내게서 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오메가들은 모두들 자신의 향기를 맡고 있을까? 나만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어째서?

뒤늦게 나는 오늘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그래서일까? 하지만 예전에도 약을 깜빡 잊고 안 먹었을 때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이렇게 스스로 향을 느낀 적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나는 두려워졌다. 용량 이상의 약을 먹다 갑자기 끊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페로몬 향이 반대로 더 강해졌나?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화’라고 말하는 현상으로, 처음 섹스를 한 오메가에게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라는 것을 당시의 나는 몰랐다. 본격적으로 알파를 유혹하기 위해 스스로 향을 발산한다는 것을. 나는 그저 혼란에 빠져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키이스가 몰랐으면 좋겠는데.

표식을 새기면 그의 향기는 특별해진다고 하지.

나는 문득 생각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내가 표식을 새기면 나는 그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오메가가 될 것이다. 그는 내 향기 말고는 맡을 수 없게 될 테니까. 오직 그 하나만을 유혹하는 향기. 평생 나만의 것이 될 내 알파.

그게 키이스일 리는 없겠지.

나는 생각하며 가방을 뒤져 약을 꺼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또다시 향이 난다고 나를 비난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후우.

약효가 돌길 기다리며 나는 수시로 손목의 향기를 확인했다. 나중에는 코가 무뎌져 좀처럼 알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손목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 * *

퇴근을 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점심 식사는 휘태커가 사다 준 샌드위치로 때웠다. 나는 그동안에도 회의록을 정리하고 다음 날 스케줄을 조정하고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다른 손에는 전화기를 든 채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지난 일이 떠올랐으나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키이스가 러트 내내 나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던 일이나, 연거푸 내 안에 사정을 했던 일이나, 내가 울며 그에게 매달릴 때마다 다정하게 키스를 해 줬던 기억들은 떠올릴 때마다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지만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따금 아랫도리가 화끈거린다거나 다리가 이전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감각마저도 없었다면 나는 진실로 내가 페로몬에 미쳐 환상을 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무심한 키이스의 태도는 또 그만큼 내게 현실을 깨닫게 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가는 도중에도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히 내게 말해 주는 듯했다. 넌 그저 한 차례 러트를 때운 섹스 상대에 불과해, 하고.

나는 일부러 키이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브리프 케이스에서 태블릿을 꺼내 일에 집중했다.

회사에서 짠 스케줄을 다시 점검한 나는 우선 급한 스케줄을 분류해 앞쪽에 배치하고 남은 일정은 다시 끼워 넣는 식으로 대충 정리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방에서 혼자 조용히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할 일을 떠올리는 동안 차는 조용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키이스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으나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기만 할 뿐 전혀 말이 없었다. 그것 또한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묵묵히 태블릿을 뒤적이며 일만 계속했다.

“오셨습니까. 피트먼 씨, 연우.”

현관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찰스가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짧은 고갯짓만 남기고 그냥 스쳐 가는 키이스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네, 하고 마주 인사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키이스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동안 그의 발소리와 뒤를 따르는 내 발소리만이 단조롭게 울려 퍼졌다.

키이스가 계단 위에 다다랐을 때 상황은 돌변했다.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나는 갑자기 그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뭔가 시킬 일이라도 생각난 걸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입을 열었을 때, 키이스가 내 팔을 붙잡았다.

“……?”

나는 갑자기 그에게 이끌려 계단을 훌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이스는 평소보다 빠르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키이스가 멈춰 선 곳은 그의 방 앞이었다. 나는 그가 선뜻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어리둥절하게 보기만 했다. 먼저 들어간 키이스가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놀라 숨을 삼키며 날듯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동시에 온몸이 벽에 부딪쳤다.

“……!”

곧바로 키이스가 나를 밀어붙이고 키스를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난데없이 맞닿은 입술에 나는 놀라 그저 거친 숨만 들이켰다. 키이스는 벌어진 내 입 안으로 당연한 듯이 혀를 섞으며 입술을 누르고 빨아들였다.

떨어지는가 싶으면 곧바로 다시 와서 맞물리고, 또 혀가 섞이고, 입술을 핥고, 다시 맞물렸다. 얼마나 다급하게 이어졌는지 치아가 부딪쳐 입술이 찢어져서 희미하게 피 맛이 났다. 거듭되는 키스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키이스가 거친 숨결 사이로 고백했다.

“맙소사, 하루 종일 이 생각만 했어.”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키이스가 짧게 웃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맞아. 돌아 버리는 줄 알았지.”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깊은 키스에 이어 하반신이 눌렸다. 그의 흥분이 명백하게 전해졌다.

나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아찔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이건 페로몬 때문인가? 키이스가 그토록 비난하던 내 오메가 향 때문인가?

언뜻 내게서 풍기던 페로몬 향기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약을 먹었는데.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데. 양이 적었나? 더 먹었어야 했을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아!”

갑자기 키이스가 내 셔츠를 밀어 올리고 드러난 유두를 엄지로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놀라고 들뜬 탄성이 터져 나왔다. 키이스는 곧바로 입술을 내려 내 유두를 깨물었다. 아픈데 흥분했다. 조금씩 열이 모이던 아래쪽이 바로 곤두서고 말았다. 나는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내 앞에 키이스가 무릎을 꿇었다. 또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그에게 밀려 바닥에 누워 버렸다.

셔츠는 겨드랑이까지 밀려 올라와 있는데 넥타이를 풀지도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키이스는 탄식처럼 맙소사, 하고 속삭였다. 나는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그는 넋을 잃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결은 거칠었다. 마치 나를 향해 욕정하는 것처럼.

키이스가 내게 몸을 겹쳐 왔을 때도 나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그저 섹스를 할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다. 그게 누구든 이 남자는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급한 손길은 현실이었다. 키이스는 머리 위로 셔츠를 벗어 버리더니 곧바로 다시 내게 입술을 겹쳤다.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 넥타이를 끌어당기고, 연이어 셔츠를 벗겨 버렸다.

러트가 왔을 때도 이 정도로 서둘렀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남자가 지금 나를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확연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나 아래를 부풀리고, 내 살을 더듬고, 입술을 지분거리고, 당장 들어오려는 듯이 구멍을 문지르면서.

“그, 그만둬요!”

나는 다급하게 그를 밀어내려 했다. 키이스가 멈칫하고 나를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짜증스러운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질려 가늘게 항의했다.

“남자랑은, 자지 않잖아요……. 그때, 그때는 피트먼 씨한테 러트가 왔었고, 마침 내가 오메가라서, 내 페로몬 때문에, 그래서,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써 단어를 나열했다. 용케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시험해 보자고. 내가 맨정신인데도 너와 잘 수 있을지.”

“……!”

생각지 못한 대답에 나는 경악했다. 그런 내 반응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이 드러난 피부에 키이스가 키스했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을 태울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유두를 아프게 깨물었다.

“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키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세워 유두를 붙잡고 깨물며 혀로 문질러 핥았다.

“아, 아파…… 그만!”

나는 애원했지만 키이스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거짓말.”

그는 보란 듯이 내 바지를 잡아 끌어 내렸다. 훤하게 드러난 엉덩이 사이로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그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키이스는 거만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벌써 아래가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무릎을 잡아 넓게 벌린 키이스가 거리낌 없이 내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약 때문에 발기하지 못한 페니스가 단단하게 굳어져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떨림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부들거리며 경련하는 무릎을 힘주어 고정한 그는 내게 확인시켰다.

“넣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젖어 놓고서, 그만하라고?”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정할 수 없는 페니스 대신 뒤가 흠뻑 젖어 버린 것 같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죄송…… 합니다, 약을 먹었…… 는데…….”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 소리가 도막도막 끊어졌다. 키이스는 또다시 소리 없이 나를 비웃었다. 그걸 본 순간 눈가가 시큰해졌다. 미처 어쩔 틈도 없이 눈물이 주륵 흘렀다.

“왜 그래?”

키이스가 눈가에 키스를 하며 물었다. 나는 떨리는 숨결 사이로 말했다.

“또 나를…… 탓하려고.”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내 목소리에 저절로 원망이 실렸다.

“매번, 저를 비난하지 않습니까. 항상…… 항상 나 때문이라고.”

언제나 그랬다. 멋대로 키스하고 나를 원망하고, 또 키스하고 또 원망하고.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상처 입힌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나는 마음이 아파 눈을 감아 버렸다. 또다시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아, 나는 이렇게나 상처받았었구나.

그토록 외면하고 있던 진심을 나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가늘게 흐느낌이 이어졌다.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나중 얘기야.”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그는 급했고, 나를 원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넓게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키이스가 자리를 잡았다. 흠뻑 젖은 입구에 그의 부풀어 오른 성기가 닿았다. 귀두가 문질러지는 감각에 나는 흠칫 놀랐다. 키이스는 천천히 애무하듯 그곳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감각을 나는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몸을 열고 들어왔던 그때처럼 벌써부터 몸 안쪽이 기대에 차 욱신거렸다. 구멍이 저절로 벌어져 움칠거리자 키이스는 그대로 멈춰서 잠시 기다렸다. 내가 결국 항복하고 그를 끌어안는 순간을. 그리고 역시나 나는 졌다.

“키이스…….”

울먹이며 두 손을 내밀자 키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입으로 말해 봐, 원하는 걸.”

“아!”

의미심장하게 아래를 찌르는 바람에 나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들어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멈췄다. 이런 상황에서 참을 수 있다니 뜻밖에도 나는 키이스의 인내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물론 전혀 기쁘지 않았다.

“넣…… 어, 주세요…….”

“그리고?”

나는 꿀꺽, 소리 내어 침을 삼킨 후 애원했다.

“안에, 사정해 줘…….”

키이스가 엷게 웃더니 잘했어, 하고 내게 키스했다.

“아아……!”

그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탄식처럼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고개를 크게 젖히고 눈을 감자 키이스가 내 목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접촉은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곧이어 그는 이를 세우고, 거칠게 빨아들이며 허리를 움직였다. 목에서 난폭한 마찰음을 내며 살을 물어 댈 때마다 흥분한 페니스가 내 안으로 쑥쑥 들어왔다. 무릎을 오므리기는커녕 그의 몸에 가로막혀 허벅지가 점점 더 넓게 벌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키이스가 아래를 쳐 댈 때마다 애액이 흥건히 흘러내리며 음탕한 소리를 냈다.

“아, 아아, 아, 으, 조, 좋아, 아, 하아, 아!”

거친 신음이 호흡만큼이나 짧고 가쁘게 터져 나왔다. 키이스는 온몸으로 내 몸을 내리누르며 안을 들쑤셨다. 나는 압박감에 숨이 막히면서도 다른 이유로 섬뜩했다. 갑자기 발밑이 훅 꺼져 깊이를 알 수 없는 싱크홀에 떨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튀어 나갈 것처럼 공포스러웠지만 그 이유는 쾌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느껴도 되는 걸까. 이렇게까지 흥분해도 되는 걸까. 이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 쾌감 다음엔 뭐가 있을까.

세상이 끝나 버릴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키이스에게 매달렸다.

“무서워……!”

나도 모르게 고백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키이스가 멈칫했다. 내 얼굴을 보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꼭 껴안은 채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 어떻, 어떡해…… 어떡해.”

“괜찮아.”

키이스가 속삭이며 나를 품에 가득히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키이스는 나를 꼭 안은 채 몸을 굴렸다. 삽시간에 내가 그의 위로 올라갔다. 나는 놀라 다급하게 키이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키이스는 더욱 힘을 줘 내 등을 끌어당기고 다리를 휘감았다. 다리가 각기 그에게 얽히고 몸은 팔 안에 갇혀 결박당했다. 넝쿨에 온몸이 묶여 버린 것 같았다. 나를 꼼짝도 못 하게 붙잡은 채 키이스는 오직 허리만을 움직여 안을 드나들었다. 굵은 페니스가 얕지만 격하게 지분거리며 구멍을 문지를 때마다 내 입에서는 멈출 수 없는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는 건 불가능했다. 키이스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두꺼운 팔이 내 몸을 옭아매고, 긴 다리가 내 다리를 얽매고. 아, 이토록 두려운데 이렇게 흥분하다니.

난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

“키이스……!”

나는 오열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래를 빈틈없이 맞물린 채 키이스가 사정했다. 한숨과 함께 가늘게 떨 때마다 배 속 깊은 곳에서 그의 단내가 풍겨 왔다. 마침내 사정을 마친 키이스가 내 이마에 키스했다. 아주 잘했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정을 하지 않고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마치 몇 번을 쏟아 낸 것처럼 기분 좋은 탈력감이 느껴졌다. 억제제를 먹고도 이렇게 섹스를 나눌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쾌감을 느낀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데, 불현듯 그가 다리를 풀었다.

허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키이스는 내 허리를 안고 그대로 일어섰다. 연결된 곳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조여들었다. 뒤늦게 나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 맞물린 곳을 꽉 물었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나를 안은 채 키이스가 침대로 향했다. 키이스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혔지만 여전히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또한 당연히 내 위에 누워 버렸다.

다시 키스를 하며 키이스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섹스와는 전혀 달랐다. 느긋하면서도 완만하게 아래를 드나드는 움직임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입술을 맞물린 채 키이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내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멍한 나의 팔을 들어 목을 끌어안게 한 뒤 키이스는 깊숙이 내 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곧바로 그가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왔다.

“아…….”

나는 가늘게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맞닿은 곳에 짙고 까슬한 체모와 묵직한 음낭이 느껴졌다. 무심코 나는 아래를 꽉 조였다. 키이스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슬그머니 시선을 올리자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좋아.”

혼잣말처럼 키이스가 중얼거렸다. 곧이어 내 목과 얼굴과 입술에 번갈아 키스했지만 아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내 안에 그대로 머문 채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자연스럽게 긴장했다가 이완되는 감각을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이스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졌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여유가 넘치면서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몸 안쪽이 간질거렸지만 차마 맨정신으로 조를 수가 없었다. 망설이면서도 애타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을 때, 키이스가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래를 세게 쳤다.

“아!”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자 한 번에 끝까지 밀어 넣은 키이스가 엷게 웃었다. 덜덜 떠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는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 난폭한 소리와 함께 굵은 성기가 거침없이 드나들었다. 아, 나는 참지 못하고 교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벌써 이 남자는 내 몸 곳곳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애타게, 이렇게 미칠 것처럼 철저하게 나를 함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으, 으응, 응, 응응, 으, 응.”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은 채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오직 내 모든 감각을 아래에만 집중했다. 배 속을 가득 채우고 물러나고, 입구를 교묘하게 문지르고, 아, 또다시 들어오고. 나는 가쁜 숨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 단단한 어깨에 선연한 잇자국이 새겨졌다. 나는 더 세게 이를 세워 물어뜯었다. 불현듯 입 안으로 흐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갑자기 키이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깊은 만족의 한숨과 함께 그가 내 안에 사정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안에 페니스를 묻은 채 내 조임을 즐기며 그 자극으로 또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밤새 계속됐다. 은근히 안을 문지르며 느긋하게 쳐 대는가 싶다가 갑자기 격하게 움직여 사정하고, 또 내 안에 머물며 발기를 기다리고, 또다시 안을 드나들었다.

배 속에 가득 찬 정액이 키이스가 움직일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흘러내렸다.

*

*

잠결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는 뒤늦게 잠이 들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허리에 둘러진 팔의 존재를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키이스는 내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키이스는 섹스 상대와 자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피곤했나? 아니면 그저 나를 깨워 내보내는 게 귀찮았을 뿐인가?

어쩌면 내가 잠결에 투정이라도 부렸을지 모른다. 키이스가 어쩔 수 없이 날 내버려 뒀을 지도.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 중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어서 나가야 한다. 키이스가 눈을 뜨면 곧바로 짜증을 낼 것이다.

방으로 돌아가야 돼…….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무심코 몸을 움직였다 허리가 빠질 것 같은 통증에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삼켰다. 전에는 찰스가 와서 나를 도와줬다. 작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럴 기미가 전혀 없었다. 나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간신히 침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아, 하아.

나는 키이스가 깰까 봐 두려워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내 옷가지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나마 귀퉁이가 조금이라도 올라와 있는 옷들은 잡기가 쉬웠다. 바닥에 뱀처럼 달라붙어 있는 넥타이는 두어 번 시도했다가 포기해 버렸다. 찰스가 알아서 갖다 줄 것이다. 도저히 거기까지 허리를 숙일 수가 없었다.

아프기도 하고 아래쪽에 말라붙은 정액 때문에 불편하기도 해서 움직일 때마다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옷조차 입을 수 없어 주워 든 옷을 들어 간신히 앞만 가렸다. 이제 남은 것은 복도에서 누군가 마주치지 않기만 빌 뿐이었다.

끼이…….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키이스의 눈치를 보며 고작 해야 몸이 빠져나갈 정도의 틈만 만들었다. 조심조심 문을 닫을 때까지도 키이스는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간신히 내 방에 도착했을 때는 등 뒤로 식은땀이 밸 정도였다. 나는 그제야 마음껏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냈다.

“아, 아으…… 으.”

아무렇게나 옷을 내던지고 즉시 후회했다. 최소한 의자에 걸쳐 두기라도 할걸.

하지만 다시 그것을 주워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 욕실로 향했다. 찬장을 열자 상비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 진통제와 감기약을 꺼냈다. 먹고 한숨 자면 훨씬 나아질 것이다. 히트사이클이 아니라서인지 몸 안의 깊은 곳까지 욱신거렸다. 아래는 부끄러울 정도로 젖어 드는데도 이렇게나 아픈 건 내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약을 먹고 잠시 벽에 기대어 쉬는 동안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슬며시 몸 안으로 열이 올라왔다. 아픈데도 내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오메가로서 처음 알게 된 섹스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렁텅이로 기꺼이 나를 내던지게 만들었다.

이게 쾌감이라는 거구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시 숨결이 거칠어진 건 아까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열기를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아슬아슬한 두려움을 그냥 내버려 뒀다. 무서운데, 죽도록 무서운데 심장은 미친 듯이 흥분한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히트사이클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느끼는 것은 단지 내가 오메가이기 때문일까?

언젠가 나오미가 키이스의 테크닉을 극찬했던 것이 기억났다. 아니면 상대가 저 남자라서일까?

“아…….”

해답을 찾는 것을 포기한 채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손안에 들어왔다.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실컷 뒤로 가 버린 주제에 이제 와서 발기라니.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익숙하게 앞을 훑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해 온 그대로.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아무리 맹렬히 쓸어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키이스와 관계를 맺는 도중에 한 번도 사정하지 못했지만 나는 몇 번이나 오르가슴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발기가 가능한데도 사정을 하지 못하다니.

결국 나는 인정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작에 뒤에서 흐르는 애액으로 가랑이 사이가 흠뻑 젖어 들고 있었으니까. 배 속에 머물러 있던 남은 정액이 애액과 함께 작은 덩어리를 이루며 흘러내렸다.

“하아…….”

몇 번이고 앞을 흔들어 간신히 쥐어짜듯이 사정을 했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기운 없는 손을 뻗어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씻겨 내려가는 내 쓸모없는 정액을 무심히 바라보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알아 버렸다. 이 쾌감을.

일그러진 표정의 얼굴이 나를 마주 보았다.

어떡하지.

나는 멍하니 나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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