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그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릴 지껄인 걸까.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몇 번이나 되뇌고선. 이렇게 주제넘은 짓을 저지르다니, 나는 미쳤다. 계속되는 행운에 그만 정신이 나가 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 저어…….”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키이스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반대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키이스가 내게서 몸을 빼내고 당장 꺼지라고 고함을 지를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 고작 몇 번 몸을 섞었다고 이런 주제넘은 짓을 하다니.
아, 신이시여.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그러나 키이스의 입술이 나를 덮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지 못했다. 다짜고짜 들어온 혀가 내 입 안을 온통 휘젓고 내 혀를 얽으며 문질렀을 때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계속해서 키스가 이어져 물을 수가 없었다. 미처 뭔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키이스가 나를 안은 채 드러누웠다. 덕분에 그의 몸 위로 올라가 버린 나는 당황해 일어나려 했으나 허리를 꽉 끌어안겨 실패하고 말았다.
“……으, 으응.”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아 뭉개진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키이스는 연거푸 내게 키스하고 고개를 들려고 하면 머리를 잡아 다시 혀를 섞고 몸을 비틀려고 하면 다른 팔로 허리를 안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온몸이 그에게 묶여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위와 아래로 동시에 범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래를 난폭하게 들쑤시면서 위는 탐욕스럽게 빨아 댔다. 흘러넘친 타액이 내 입에서 키이스의 입가로 흘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격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나는 산소가 모자라 급하게 숨을 헐떡여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키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래쪽을 드나드는 페니스는 뜨겁고 무자비했다. 내 허리를 잡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미친 듯이 드나들었다. 나는 키이스의 위에서 다리를 넓게 벌리고 꽉 막힌 신음만 연달아 뱉어 냈다. 키이스가 안을 쑤시고 나갈 때마다 내 안에서 터지는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내리며 내 가랑이를 지나 키이스의 고간을 흠뻑 적셨다.
“……!”
머리를 움켜쥐고 입술을 꽉 맞문 채 키이스는 페니스를 끝까지 처박았다. 배 속으로 뜨거운 게 쏟아부어졌다. 나는 가늘게 떨며 키이스의 정액을 받아 냈다. 퍼부어지는 양이 평소보다 더 많았다. 계속해서 흘러들어 오는 그것은 내 안을 흠뻑 적시고 깊숙이 스며들었다.
코끝에서 단내가 흘렀다.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였다. 그의 몸에서 나는 것과 안으로 흘러들어 온 정액의 향이 희미하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했다. 어쩌면 키이스와 나누는 키스에서, 숨결에서 전해지는 향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향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왜 갑자기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간신히 사정을 끝마치고 키이스가 내 머리를 놓아주었다. 허리를 안은 팔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숨을 헐떡였다. 멍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키이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풀어지더니 그의 손이 내 엉덩이를 잡았다. 천천히 주무르는 손길은 마치 감촉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내 쪽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키이스가 엉덩이를 쥐었다 놓을 때마다 맞물린 구멍이 벌어지며 조금씩 체액과 뒤섞인 정액이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그의 가랑이 사이를 적시는 걸 떠올리자 나는 너무나 부끄럽게도 욕정이 일어났다. 파렴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흥분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감사하게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는지 앞에서 뭔가가 흐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에 그랬다면 키이스의 배를 내 체액으로 흠뻑 적셔 버렸겠지.
“……아.”
과격한 상상에 그만 흥분해 버렸다. 키이스가 천천히 아래를 문질렀다. 맞닿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감각에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밭은 호흡을 입 안에서 연거푸 내쉬었지만 그런 나를 내버려 둔 채 키이스는 느긋하게 그곳을 비비며 나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아, 하아…… 아.”
나는 온몸을 떨며 도달했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그와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더한 쾌감이 나를 발가락까지 저리게 만들었다. 나는 키이스의 위에서 움칠거리며 여운을 즐겼다. 내 고백에 키이스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었다.
* * *
“피크닉 말씀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하고 상대방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몇 분께 의향을 여쭈었는데,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피트먼 씨도 참가해 주신다면 정말 도움이 되겠는데요…….]
이어서 그가 말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라고 한 사람들의 리스트는 나 역시 아는 이름들이었다. 그중 몇은 대학 시절부터 함께했던 동문이자 사교 모임의 멤버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가입했던 클럽의 멤버들과 동일한 사교 모임의 멤버는 그를 포함해 10여 명에 불과했는데, 졸업 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폴로 팀을 비롯해 여러 가지 모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소소하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폴로 경기를 하면 좋았을걸.
내심 생각했던 나는 일단 말을 전하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얼마 전 다른 주에서 있었던 허리케인으로 어마어마한 재난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연일 신문과 TV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를 봐도 어디나 비슷한 얘기였다. 이럴 때 기부 파티를 열거나 후원을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이번에도 역시 관련 기관을 통해 기부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피크닉과 같은 야외 활동은 예상치 못했다.
노크를 한 후 사무실에 들어간 나는 곧바로 내용을 전달했다. 거절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을 때 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고 해.”
뜻밖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참석자 명단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만…….”
대부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는 했습니다, 하고 덧붙인 나를 키이스는 비웃었다.
“뻔한 리스트일 텐데 굳이 그걸 기다려야 해?”
“……아뇨.”
나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다행히 키이스는 짧게 웃었다. 그냥 대수롭지 않은 농담을 한 것처럼. 내심 안도하는 내게 그가 가볍게 한 손을 까딱여 이리 오라는 표시를 했다. 동시에 심장이 덜컹했다. 주말 내내 저 남자와 침대에만 있었다. 이제 나는 저 남자의 아주 작은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나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문을 돌아보았다. 올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잠그고 오겠습니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을 속삭인 후 나는 몸을 돌렸다. 문을 잠그는 내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철컥, 무겁고도 차가운 소리가 유난히 세게 귀를 때렸다. 천천히 돌아서자 키이스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씩 그를 향해 걸어갔다.
키이스도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조여들듯이 아파 왔다. 마침내 책상을 돌아서 그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심장이 완전히 타버려 사라진 것처럼 귀가 멍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한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 손을 잡았다.
아.
체온이 맞닿는 순간 저절로 탄식이 흘렀다. 그렇게 수없이 몸을 겹쳤는데도 이 남자는 단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렇게나 애타게 만들 수 있구나.
끌어당기는 대로 순순히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곧바로 입술이 겹쳐지고, 굶주린 것처럼 혀를 얽으며 키이스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미끄러진 손이 바지춤에 닿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문득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게 느껴졌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입지 말라고 했잖아, 귀찮게.”
그제야 키이스가 말한 게 나의 속옷 그 자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브리프건 트렁크건 상관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는데 내가 둔했던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애써 회피했던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안 입을 수는.”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초조해졌지만 그렇다고 키스를 다시 조를 타이밍은 아니었다. 대신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제안했다.
“입으로, 해 드릴까요?”
예전의 나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겐 그 정도의 수치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가 내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전부였지만. 나는 일부러 대담하게 그를 유혹했다.
“그쪽이 더 합리적일 것 같은데.”
키이스가 내 턱을 지그시 잡았다. 슬쩍 엄지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입은 맥없이 벌어졌다. 키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서 손을 뗐을 뿐이다. 그것은 곧 승낙, 어쩌면 명령과 같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닌 데다 나는 최근에도 키이스의 욕실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그의 물건을 입에 물었었다. 입 안으로 느껴지던 미끈한 수분과 묵직한 두께가 되살아나자 몸 안쪽이 욱신거렸다. 주말 동안 우리가 얼마나 방탕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흥분하는지 또한.
나는 넓게 벌어진 키이스의 다리 사이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의 지퍼를 내렸다. 긴장한 손끝이 떨렸지만 그만큼 달아올랐다. 키이스는 가만히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더욱 나를 애타게 만들었다.
마침내 흥분한 페니스를 밖으로 끄집어냈을 때, 나는 그만 깊이 탄식하고 말았다.
“……으응.”
한껏 벌린 입 안에 그것을 머금자 꽉 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제법 익숙하게 숨을 나누어 쉬며 조금씩 페니스를 삼켰다. 목 안 가득히 차오르는 감각에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키이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그런 건 곧 아무래도 상관없게 됐다.
“후우…….”
내 위에서 키이스가 만족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그의 것을 빨아들였다. 차마 다 삼키지 못한 부분은 손으로 잡고 쓰다듬으며 뿌리 끝에 연결된 짙은 체모까지 어루만졌다.
입가로 타액과 함께 쿠퍼액이 흘러넘쳤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키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숨을 멈췄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곧바로 내 머리를 눌렀다. 나는 억지로 페니스를 한계까지 삼켜야 했다. 하아, 하고 키이스가 내 목구멍 안에 사정했다. 나는 목울대를 꿀꺽거리며 넘겼지만 넘치는 정액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사정을 마친 키이스가 내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제 그의 페니스를 뱉어도 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나는 잠시 더 괴로움을 참아 냈다.
하아, 하아.
한계에 다다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나자 타액에 섞인 체액이 나와 키이스의 성기에 길게 이어졌다. 그의 것을 핥아 주고 싶었지만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티슈를 뽑아 앞을 정리했다. 지퍼를 올렸던 그는 앞섶에 작게 얼룩이 남아 버린 것을 발견하고 멈칫하는 듯했으나 이내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때까지 키이스의 여유 있는 뒤처리를 바라보며 그저 책상 서랍에 머리를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멍한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키이스가 새로운 티슈를 빼 손을 내밀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내 입가를 비롯해 얼굴 여기저기에 묻은 지저분한 체액을 닦아 주었다.
입 안에 든 것을 뱉으라는 듯이 턱에 티슈를 받쳤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꿀꺽, 남아있는 정액을 삼켜 버린 나를 보고 키이스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넋이 나가 있을 게 분명한 내 얼굴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리 와.”
그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따르는 대신 엉거주춤 몸을 움직여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동양인들은 바닥에 앉는 게 더 편한가?”
키이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섹스도 하지 않으면서 무릎에 앉는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얘기였으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심스럽게 얼굴을 비볐다. 키이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득 얼굴로 내려온 손이 내 뺨을 덧그리더니 고개를 들게 했다. 시키는 대로 그를 올려다보자 키이스는 최근 계속 그랬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키스를 할 거라는 걸 알았다. 나는 눈을 감고 한껏 허리를 폈다. 곧이어 입술이 닿았다. 그는 다정하게 내게 키스했다.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윽고 고개를 든 키이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네 안은 최고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키이스는 미소 지었다. 만약에 그가 다시 지퍼를 내리라고 했으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 남자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는 이제 됐다는 듯이 내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기대게 한 것이 전부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계속해서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응.”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목과 어깨에 내려앉는 키스에 나는 잠에서 깼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누워 있자 등 뒤에서 키이스가 웃었다. 낮은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숨결에 나는 오싹 기분 좋은 소름을 느꼈다.
“……좋은 아침이에요.”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인사를 했다. 키이스는 대답 대신 내 가랑이 사이로 손을 내려 한쪽 다리를 열었다. 당연한 듯이 안으로 들어온 묵직한 페니스에 나는 눈을 감고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줄곧 키이스의 침대에서 잤다. 정확하게는 섹스 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는 표현이 맞다.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키이스의 굵은 허벅지에 눌린 다리를 빼내는 것은 정말로 힘이 들었다. 게다가 간신히 성공해 휘청거리며 방으로 돌아간 날은 어김없이 키이스의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회사에 가면 엉덩이를 때리거나 난폭하게 삽입을 하곤 했다.
키이스에게 엉덩이를 맞으면서 흥분하는 나도 무척 곤란하지만.
미처 일어나지 못해 아침까지 키이스와 함께 있는 날에는 이렇게 이른 섹스를 나눴다. 키이스는 아침이면 당연히 발기하는 자신의 성기를 내 안에 넣는 것뿐이다. 그저 편리하니까 나를 옆에서 재우는 거겠지. 하고 싶을 때 편하게 넣을 수 있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이 깰 때까지 내 몸을 만지고 깨물며 키스하는 그의 행동은 그저 섹스만이 이유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사소한 애무에 몸이 달아올라 당연하게 아래는 젖어 버리고, 키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하아…… 아.”
나는 들뜬 숨결을 쏟아 내며 뒤흔들렸다. 키이스는 밤과는 달리 느긋하게 안을 쳐 대며 내 어깨를 물고 향기를 맡았다. 아프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아래를 슬며시 조여 그를 재촉했다. 곧바로 키이스가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그대로 치골을 문지르며 주름을 자극하는 바람에 나는 밭은 숨을 거칠게 뱉어 냈다.
“으으응…….”
내 안에 깊숙이 사정했을 때, 나는 만족의 신음을 길게 내질렀다. 거친 숨을 들썩이는 내 뒤에서 키이스가 연거푸 키스했다. 목에, 어깨에, 귀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어깨를 움츠리며 웃자 저절로 아래가 조여들었다. 키이스는 짧게 신음하더니 곧 내 턱을 잡아 돌리고 입술에 키스했다.
“망할, 안 가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신음처럼 뱉은 욕설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무 생각도 없는 나를 보며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키이스가 손을 움직여 내 페니스를 잡았다.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손장난을 치는 것처럼 건성으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선 행사잖아, 오늘.”
“아…….”
나는 납득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신음을 흘렸다. 다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키이스는 계속해서 내 앞을 주무르며 목에 키스를 했다.
“백만 달러 정도면 안 가도 되겠지?”
나는 간신히 머리를 움직여 대답했다.
“원래…… 그 정도, 내시겠다고.”
“하아.”
한숨과 함께 키이스가 손에 힘을 줬다. 이번엔 아파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긴장해 아래를 바짝 조이고 부들부들 떨자 그는 그제야 손을 늦췄다.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나는 원망이 섞인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키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술에 키스했다.
아, 하고 탄식했다. 나는 결코 이 남자한테는 당할 수가 없어.
앞은 물론이고 내 몸 전부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맡겨 버렸다. 키이스는 마음껏 나를 만지고 깨물고 박아 대며 거의 한 시간여를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었다. 마침내 깊은 한숨과 함께 내 안에서 성기를 빼냈을 때, 그것은 내 애액과 정액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내 아랫도리에서 그의 성기로 이어진 체액이 끊어지자 내 배 속에서 흘러나온 그것이 가랑이 사이를 흠뻑 적셨다.
다른 때보다 아침이 길고 집요했던 것은 오늘이 휴일이기 때문이었다. 키이스가 나가고 나면 오전 내내 잠만 잘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밀려오는 피곤에 못 이겨 깜빡 잠이 들려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
놀라 잠시나마 눈이 번쩍 떠졌다. 키이스는 그런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도 씻어야지.”
“저도, 가는 겁니까?”
휴일인데요, 하는 말을 내심 덧붙였지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설마 나에게 파트너도 없이 혼자 가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물론.”
다급하게 부정했던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저를 파트너로…… 정말이십니까?”
키이스는 여전히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누가 있어?”
그의 말이 맞다. 하려면 진작에 파트너를 구했어야 했다. 다른 때라면 내가 알아서 미리 챙겼을 텐데,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당연히 나를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만 그의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는데 갑자기 몸 전체에서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벅찬 기분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후에야 비로소 나는 간신히 속삭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렵게 그 말만을 한 내게 키이스는 말했다. 웃음이 섞인 음성으로.
“천만에.”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를 안은 채 욕실로 향했다. 함께 씻고 나와 방에서 식사를 한 후 저택을 떠날 때까지,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다.
*
*
“응, 으응, 응.”
거듭되는 키스에 나는 끊임없이 신음을 흘렸다. 입가로 타고 흐르는 타액을 키이스가 혀로 핥아 올리더니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까부터 계속 그는 고의로 페로몬을 쏟아붓고 있었다. 나는 차에 타자마자 시작된 키스와 함께 페로몬의 홍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흥분했지만 신기하게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래가 슬쩍 젖는 것 같은 기분은 있었으나 애가 달아 키이스에게 매달리거나, 바지를 못 쓰게 될까 봐 걱정을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있는 힘껏 자신을 억누른 덕분이기도 했다.
하아, 하아.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운전사가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고 말한 다음이었다. 운전석과 차단이 되어 있는 탓에 마이크로 짧게 안내를 한 그는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키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키이스는 내 머리에 코를 묻고 일부러인 듯 깊게 숨을 쉬었다. 나를 자신의 페로몬에 흠뻑 절여 놓고 그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나는 그저 넋을 잃고 그의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가 멈춘 후에도 얼마간 우리는 내리지 못했다. 숨을 가다듬고 나서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을 정리했지만 내 상기된 얼굴이 어느 정도 평소처럼 되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키이스는 내게 물을 건네주었다. 이런 자리에서 발작을 일으키면 곤란하기 때문에 미리 스튜어드가 준 약까지 먹은 다음에야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억제제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먹지 말라던 키이스의 말을 떠올리기도 했고 어차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괜찮아, 최대한 키이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돼.
나는 스스로에게 당부하며 급히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쾌청했다. 나는 가능한 한 키이스의 옆에 머물며 상황을 살폈다. 참석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미리 받았었다. 그중에는 그날 난교 파티에서 본 자들도 몇 있었다. 다시 그들을 봤을 때 내가 과연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차마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게 마지막 남은 과제죠.>
스튜어드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었다.
<그 단계를 통과한다면 다 나았다고 생각해도 돼요.>
하고.
이런 장소에서 그들이 어떤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그런 상황이었고, 오해를 할 만했고, 나도 경계심이 부족했으니까.
만약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키이스는 또다시 내게 같은 말을 할까.
순간적으로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황급히 확인해 보니 주최 측에서 온 전화였다.
“네, 이쪽은 도착했고 준비 중입니다. 피트먼 씨도 함께 오셨고요…….”
나는 슬쩍 키이스 쪽을 훔쳐봤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른 참석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시합이 끝난 뒤 시상식이나 모금은 모두 참석하실 겁니다. 네, 저희 쪽에서 백만 달러 정도 기부하는 것으로…….”
주최 측은 유치한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숨바꼭질이었다. 도대체 다 자란 성인들을 모아 놓고 뭐 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분위기는 사뭇 예상과 달랐다. 제법 들뜬 기색의 사람들이 종종 보이기도 하고 오가는 인사말에는 다른 속셈이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공개적인 맞선이라든가.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해 집안끼리 정해 놓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키이스를 혼자 보냈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급하게 파트너를 찾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여기 온 것을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거기다 키이스가 나에게 같이 오자고 했어.
어딜 봐도 심상치 않은 자선 파티는 어쩌면 그저 명목상의 행사인지도 모른다. 주객전도로 보일 만큼 사람들의 속셈이 들여다보였다.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나는 고개를 돌려 키이스 쪽을 바라봤다. 그저 보기만 하는데도 심장이 들뜨고 피가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헉!”
갑자기 어깨를 잡혀 확 돌려세워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상대의 정체를 알자 더더욱 놀랐다. 거기엔 너무나 익숙한, 웃는 얼굴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연우 아냐? 잘 지냈어?”
그레이슨이었다. 크게 눈을 뜬 내게 그의 달큼한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레이슨은 언제나처럼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엔 정말 상처받았어. 매정하기도 하지, 어떻게 날 보자마자 달아날 수가 있어?”
그는 항상 그렇듯이 농담을 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숨이 가빠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약은 이미 먹었어.
나는 약통을 열어 입 안에 마구 털어 넣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아까처럼 키이스가 서 있었다. 아직 내 쪽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나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넌 성가셔.>
순간 떠오른 그의 말에 갑자기 피가 차가워졌다. 귀찮게 해서는 안 돼. 절대 성가시게 굴어서 나에게 질리게 만들면…….
“연우?”
그레이슨은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꺼풀을 깜박이지도 않고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반복했다. 천천히 내가 평정을 되찾는 것을 그레이슨은 가만히 지켜봤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간신히 숨을 가라앉히고 나자 그레이슨이 물었다. 아까부터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레이슨이 두려웠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유지한 채 그에게 인사를 했다.
“……네, 죄송합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밀러 씨.”
“그레이슨.”
가볍게 정정해 준 그레이슨이 다시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운이 좋네. 키이스를 따라온 거야?”
“네.”
나는 짧고 간단히 대답했다. 바로 정답이었기 때문에 더할 말이 없었다. 그레이슨은 가볍게 말했다.
“이봐, 안심해. 갑자기 덮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이어서 그는 히죽 웃었다.
“오늘은 알렉스도 없어.”
나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경계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위험을 자초할 때도 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네, 하고 대답했다. 문득 바람이 불어 그레이슨의 향기가 한층 진하게 느껴졌다. 키이스의 향기나 그레이슨의 향기나 내게는 그저 달콤할 뿐이다. 그런데 누구냐에 따라서 이렇게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니.
문득 그레이슨이 내가 키이스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턱을 추켜올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 남자가 떠들어 봤자 달라질 것도 없다. 어차피 키이스는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한 적은 없었지만 그 뒤로도 여전히 날 안는 걸 보면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실수로 한 고백이 오히려 득이 되어 버린 걸 수도.
그때는 패닉에 빠질 정도로 당황했지만 덕분에 그레이슨을 앞에 두고도 좀 더 대담해질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럼 이만, 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그레이슨이 내 말을 가로채 물었다.
“키이스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았어?”
“네.”
이번에도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물론 그것이 나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레이슨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그래서 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련히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적막하다고 느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 속에서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먼저 입을 열면 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는 대화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았다. 대부분 이런 식이면 포기하지만 그레이슨은 달랐다. 불쾌한 기색은커녕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웃는 얼굴로 그는 물었다.
“누군데?”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밀러 씨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흐응.”
그레이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생각지 못한 반응이라 나는 내심 의아해졌다.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그가 쓱 고개를 내려 내 목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나는 놀라 소리치며 펄쩍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은 게 전부였다.
“오메가 아니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레이슨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얼마나 붙어 있었으면 오메가한테서 극알파 향기가 나?”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키이스는 노골적으로 내게 페로몬을 쏟아 냈다. 키스하고 몸을 만지면서 퍼부어지는 페로몬에 속수무책으로 절여졌던 기억이 떠오르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트먼 씨의, 비서니까요.”
나는 간신히 태연한 척 말했지만 그만 목소리가 새고 말았다. 황급히 헛기침을 해 음성을 가다듬는 나를 보며 그레이슨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어떻게 이 자리를 벗어나면 되지, 하고 고민했을 때 그레이슨이 물었다.
“나오미와는 완전히 끝난 거야?”
“피트먼 씨의 지시였습니다.”
딱딱한 대답에 그는 “오” 하고 안타까운 척 감탄사를 뱉었다.
“불쌍한 나오미. 친구로서 위로해 줘야겠군. 마침 나와 같이 왔는데, 인사라도 할래?”
“파커 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급히 다물었다. 자칫하다가 말꼬리를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파커 씨와 친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어째서 이 남자가 거기에 있었던 건지를 포함해 슬쩍 찔러 봤지만 그는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세상의 모든 미인은 나의 친구거든.”
그레이슨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나오미와는 아아주 깊은 사이지.”
“아, 네. 그러시겠죠.”
나는 심드렁하게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런 나를 보며 그레이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러트는 잘 보냈어?”
“러트요?”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나를 보고 그레이슨이 웃었다. 긴 손가락이 느긋하게 풍성한 금발을 쓸어 넘겼다.
“그래, 이때쯤이 키이스의 주기였던 것 같은데. 이번엔 특히 상태가 안 좋지 않았어? 어땠어?”
다 안다는 듯이 묻는 말은 정말로 알아서 그런 건지 그저 떠보는 건지 짐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무심코 말해 버렸다.
“오메가의 발정기처럼 극알파도 컨디션이 변하는 줄은 몰랐죠.”
갑자기 그레이슨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하고 나서 나는 키이스가 내게 했던 폭언을 내가 안에 담아 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레이슨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맙소사. 자학하지 마, 연우.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그야말로 알파에겐 축복이라고. 신이여, 감사합니다. 오메가를 찬양하라!”
대성당에서 기도문을 외듯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사뭇 경건하게 읊은 그에게 나는 무뚝뚝하게 지적했다.
“자학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피트먼 씨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그레이슨은 놀란 듯하더니 곧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정말 어째서 극알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나 오만하고 매너가 없는 걸까.”
본인도 극알파면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어 보이는데.
어쨌든 그레이슨의 말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여전히 웃으며 그는 말했다.
“러트 기간이 되면 여러 가지로 컨디션이 나빠지는 건 사실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말을 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언제나처럼 묵묵히 묻어 놓는 것뿐이었다. 그레이슨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러트 기간에 제대로 페로몬을 빼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기억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그는 짧게 웃더니 말했다.
“듣기로는 나오미와 꽤 오래 안 했다던데. 페로몬이 쌓여서 뭔가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했더니 잠잠하더라고. 아니면 급하게 상대를 구해서 해결했나? 쉽지 않았을 텐데.”
“……왜요?”
나도 모르게 되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레이슨은 놀리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연우는 벌써 몇 년이나 그의 비서를 했으면서 키이스가 러트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양이지?”
나는 곧바로 말을 받았다.
“특별한 일 없이 항상 난잡하게 사시니까요.”
“하하하하.”
그레이슨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것은 단지 키이스에 한정된 얘기인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남자도 문란하기로는 뒤지지 않았다. 비록 저렇게 자신과는 무관한 얘기인 것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지만.
“평소엔 그렇게 보냈었지, 연우도 아는 것처럼. 그런데 이번 러트는 특별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까지 키이스는 페로몬이 쌓이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안 그래?’ 하듯이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궁금한 걸까.
나는 내심 생각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 건지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그레이슨은 계속해서 내 속을 떠보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입으로 자백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알기로 키이스는 내게 정리하라고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계속 나오미를 만났었다. 그런데 기억이 군데군데 끊길 정도로 페로몬이 쌓였다면 이미 그 전부터 관계가 없었다는 말이 되고 그레이슨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어째서 나오미와 관계를 맺지 않았던 걸까, 또 그게 얼마나 오래됐던 걸까.
너무나 궁금했지만 그것에 대해 추궁하자니 내가 궁색해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대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자 그레이슨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재미없네, 연우.”
그 말을 듣자 문득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층 가득히 퍼져 있던 페로몬의 향. 평소보다 진하다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지난번 선상 파티에서 보니까…… 피트먼 씨는 다른 분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던데요.”
말로만 듣던 극알파들의 난교 파티를 직접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키이스가 가는 파티 중에 그런 파티가 종종 섞여 있었을 것이다.
짐작은 하고 있으면서도 정확히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언제나 사교 파티라 구분을 하는 게 어려웠고 굳이 그것을 일일이 구분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초대받은 파티나 키이스가 참석하기로 한 모임을 스케줄상으로 정리해 알려 주면 되었으니까.
“그 녀석은 여럿이 함께하는 섹스는 좋아하지 않아. 그냥 순서가 돼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만든 것뿐이지. 파티에 올 때도 항상 파트너와 자리를 따로 갖는다고.”
그레이슨의 말에 문득 안심했다가 이내 씁쓸해졌다. 이게 뭐라고 안심을 한단 말인가. 그레이슨은 그런 내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념을 했다.
“그나마 키이스는 양반이야. 오메가라고 해도 여자면 자잖아? 뭐, 베타를 더 선호하긴 하지만. 내 동생은 오메가라고 하면 여자고 남자고 상관없이 경기를 일으키면서 지구 끝까지 달아난단 말이야.”
그레이슨은 웃으며 가볍게 동생의 험담을 했다. 하아, 하고 고개를 내저은 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언젠가 뇌가 전부 망가져서 미쳐 죽을 거야, 멍청한 녀석.”
딱히 할 말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후, 하고 그레이슨이 연기를 뱉어 냈다.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보라는 듯이 그레이슨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날…… 저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파티의 목적에 대해선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은 겁니까?”
마지막 말은 원망이 섞이고 말았다. 그레이슨은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고를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이상한 방법으로 내게 툭 말만 던져 놓고 가 버린 건 왜일까.
나중에 나를 구해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확실히 말만 해 주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미연에 방지를 했을 것이다. 키이스야 항상 그랬다 쳐도 그레이슨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는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해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미리 얘기해 줬다가 혹시나 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파티는 누가 진행하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해맑게 웃는 얼굴에 나는 그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남자는 얼마나 간악한가. 이렇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일 따위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해치울 남자.
거기에 내가 재수 없게 걸려 버렸다.
나는 올라오는 화를 삭이느라 심호흡을 했다. 이 남자에 비하면 키이스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비교를 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키이스는 최소한 속을 감추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정말로 시커멓고 영리한 까마귀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이 남자가 무서워졌다.
“어머, 연우. 오랜만이에요.”
갑자기 끼어든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나오미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파커 씨.”
선뜻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당연한 듯이 허그를 했다.
“잘 지냈어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네…… 잘 지내셨습니까?”
어색하게 되묻자 나오미는 웃으며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사이좋게 지냈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또 그레이슨이 뭔가 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뇨, 하고는 말할 수 없어서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슨이 대신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최선을 다해 친하게 지냈지. 자, 나한테 상을 줄 거지?”
“기다려요, 급하긴.”
나오미는 웃으며 그레이슨을 슬쩍 밀었다. 둘은 어느 모로 보나 단순한 친구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내심 궁금해져 물었다.
“저, 두 분은 언제부터…….”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오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에도 봤잖아요? 가까워진 건 그 전부터였지만.”
“피트먼 씨를 만나는 도중에요?”
나는 당황해 되물었다. 그러자 나오미는 깔깔 웃었다.
“설마,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로 대담하진 않아요. 키이스가 나를 부른 지가 오래돼서 슬슬 헤어질 때가 됐나,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파티에서 그레이슨을 만났죠.”
“네에…….”
뒤늦게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결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황급히 그 건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는데 나오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놓고 간 선물은 확인했어요. 그런데 그 영화, 정말 제가 해도 되겠어요? 이미지가 안 맞을 것 같은데.”
그녀에게 제안한 영화의 배역은 평생 한 남자만을 그리워하며 사는 지고지순한 캐릭터였다.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나오미에게 돌아갈 배역은 아니었다. 나는 키이스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연기력이 좋으니 충분히 소화할 거라고, 또 이미지 반전 때문에 오히려 화제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키이스가 내 연기를 칭찬하다니, 정말 감사하네요.”
나오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이별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레이슨을 만나고 있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그레이슨의 팔에 달라붙어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나오미가 계속해서 말했다.
“서류에 사인은 해 뒀어요. 사무실로 보내 드리죠.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요, 연우. 아쉽네요.”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을 나는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영화 기대하겠습니다.”
나오미는 웃더니 그레이슨을 향해 물었다.
“상대역이 체이스 밀러라는데. 잡아먹어도 될까요?”
전혀 농담 같지 않은 그녀의 말에 그레이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로 유쾌한 듯이.
“제발 그렇게 해 줘.”
그리고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이 베타라서 다행이야. 표식을 남기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어째서죠?”
나오미의 물음에 그레이슨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잖아, 섹스하는 상대와 결혼할 상대는 구분해야지.”
순간 나오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의 말은 곧 ‘너와는 격이 달라’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나오미가 어떤 기분일지 아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극알파들의 오만한 폄훼의 말을 나만큼이나 많이 들어 본 사람도 흔치 않을 테니까.
혹시 내일 아침 신문에 그레이슨 밀러의 사망 소식이 실리는 건 아닐까.
섬뜩한 상상과 함께 ‘사건 현장에 있었던 피트먼의 비서가 증언한다’ 따위의 작은 타이틀이 뒤따라 떠올랐다. 급격히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
이내 느껴지는 달큼한 향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키이스가 나를 안고 머리 위에서 말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키이스.”
그레이슨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나오미는 급하게 표정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두 분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 행사를 주최하신 브라운 씨가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만나러 가시죠. 그럼 파커 씨, 밀러 씨, 다음에 또. 피트먼 씨, 이쪽입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키이스와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내심 그레이슨이 걱정되는 한편 자업자득이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키이스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아?”
“네?”
나도 모르게 되물으며 얼굴을 들자 키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뒤늦게 아, 하고 깨달은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약을 먹었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피트먼 씨가 근처에 계셨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여차하면 즉시 도와주셨을 테니까요.”
귓가가 화끈거렸다. 묘하게도 키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당혹스러워져 시선을 헤매다 어렵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키이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을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얼마나 우스울까.
하지만 키이스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비웃기는커녕 놀랍게도, 내게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눈을 둥그렇게 뜨자 키이스가 말했다.
“그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이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솟아올랐다. 이 남자는 설령 내가 지구 끝에서 부른다고 해도 와 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믿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분명히 그렇게 해 줄 거라고.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려 했지만 가슴이 벅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주최 측에서 뭔가를 한다는 신호였다. 키이스가 고개를 돌리고, 나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다.
두서없이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간이식으로 만든 단상에 오른 브라운 씨가 짧은 인사말을 시작했다. 지루한 소개와 이런저런 말들이 이어지는데, 키이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달아날까?”
“네?”
무심코 되물었지만 키이스는 그냥 내 팔을 잡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나는 급하게 뛰듯이 그를 쫓아갔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이 벅찼다. 뭔가 은밀한 놀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우리의 일탈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이대로 키이스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너무나 맑았다. 시원한 바람에 섞여 키이스의 달큼한 향기가 정신을 어지럽히고, 발밑에 닿는 잔디는 너무나 부드럽고, 내 팔을 잡은 손은 뜨거웠다. 어쩌면 이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나는 꿈처럼 생각했다.
“아!”
불시에 몸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곧바로 품 안 가득히 나를 안은 키이스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쉿.”
그는 작은 소리로 내게 조용히 할 것을 당부했지만 불필요한 행위였다. 나는 뺨에 맞닿은 키이스의 체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말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가슴에 반쯤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조금은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꼭 끌어안긴 채 몸을 웅크렸다. 우리는 작은 토끼 굴 같은 은신처에서 한껏 달라붙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키이스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굳이 숨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어렴풋이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키이스와 단둘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은 달콤한 착각이 나를 끝없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속삭였다.
“흥분했어?”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내 귀에는 확실하게 들어왔다.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들었다. 반쯤 그늘진 그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은 아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흥분한 것을 그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고백했다.
“……네.”
당신을 원해요, 하고 나는 작게 소곤거렸다. 이렇게 대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남은 게 오직 나와 키이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로 그랬다. 내 세상엔 오직 키이스밖에 없었다. 그리고 키이스 또한 나와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 어떻게 이런 키스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매달렸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지만 이내 다시 맞물렸다. 키이스의 입술을 핥고 지그시 깨물었다. 키스는 끝없이 달았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키이스가 입술을 맞댄 채 물었다.
“왜 그래?”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아랫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키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술을 덮쳤다. 그가 멈칫한 것은 내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을 때였다. 곧바로 체모가 닿자 그는 입술을 떼고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입지 말라고, 하셔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고백하자 그는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잠시나마 고민하는데, 곧이어 키이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응.”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신음했다. 키이스는 느긋하게 내 앞을 주무르며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잘했어.”
내 귀를 지그시 물었다 놓으며 그가 속삭였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만족의 웃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졌다. 키이스가 바랐던 대로 지퍼를 내리자마자 그는 손쉽게 내 가장 은밀한 곳을 더듬을 수 있었다. 나는 키이스가 좀 더 움직이기 쉽도록 허리를 들었다. 곧바로 손가락이 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와 그 뒤의 구멍을 찾았다.
능숙하게 주름을 문지르는 단단한 손가락에 저절로 숨결이 가빠졌다. 키이스의 목을 끌어안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이 그는 나를 바닥에 눕히고 위로 올라왔다. 바닥에 가득 깔린 이끼는 부드럽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셔츠는 머리 위로 벗겨지고, 바지는 한쪽 발목에 걸쳐져 나는 순식간에 나체가 되어 버렸다.
벗은 몸 위로 키이스가 몸을 겹쳤다. 불공평하게도 그는 고작 바지 지퍼를 내린 게 전부였다. 나는 작게 투정을 부렸다.
“이건 공정하지 못해요.”
“어째서?”
키이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내 코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나만, 다 벗겨 놓고…….”
부끄러워 잦아드는 목소리에 키이스는 보란 듯이 다리를 열며 말했다.
“너는 만져야 할 곳이 많잖아.”
“아……!”
느릿하게 들어오는 성기에 긴 탄식을 내뱉자 그는 속삭였다.
“젖는 곳도 많고.”
뒤이어 그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키이스가 들어올 때마다 짧은 비명을 연달아 내질렀다. 아래가 유난히 젖어 들었다. 아래쪽에서 들리는 찌걱이는 소리가 작은 은신처 안 곳곳에 울려 퍼졌다.
나는 키이스의 목에 팔을 둘러 꼭 끌어안았다. 아래쪽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남자의 전부가 갖고 싶었다. 마치 생각이 통한 것처럼 그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널 전부 먹어 버리고 싶어.”
증명이라도 하듯이 키이스는 내 목에 이를 세웠다. 진심으로 물어뜯는 바람에 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아래쪽을 힘껏 조여 버렸다. 키이스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내 목을 놓아주었다.
“아프잖아.”
가볍게 이마를 부딪친 그가 불평을 했다. 나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저도 아팠어요.”
보란 듯이 고개를 젖혀 방금 전 물린 목을 드러냈지만 키이스는 오히려 뻔뻔하게 말했다.
“그나마 참은 거야.”
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남자는 정말로 나를 먹어 치웠을까?
두려운 한편 알 수 없는 흥분이 올라왔다. 그도 역시 내 마음을 알았는지 짧게 웃었다.
“그래, 언젠가는 정말로 먹어 버릴지도 몰라. 요즘은 내가 정말…… 미친 것 같거든.”
키이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생각밖에 안 해. 머릿속에 온통 너라고, 믿을 수 있겠어?”
그것은 마치 항복이야, 하고 선언하는 듯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키이스는 다 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너한테 이 짓을 하는 것밖에 안 떠올라. 맙소사,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키이스는 나를 비난하는 듯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쾌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 후에야 비로소 나는 말을 했다.
“……저도, 그래요.”
갈라진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키이스가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한 번 더 고백했다.
“저도, 하루 종일…… 당신 생각만 해요.”
키이스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나만큼은 아닐걸.”
곧이어 키이스가 다시 내게 키스하며 몸을 움직였다. 아, 하고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가가 달아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너무나 강하게 깨달았다.
키이스는 나를 사랑해.
머릿속에 폭죽이 울려 퍼지고 온통 세상이 번쩍거렸다. 나와 같아. 몇 번이나 생각을 되새겼다. 내가 그렇듯이 이 남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다급하게 그의 등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아래를 드나드는 키이스의 움직임에 따라 정신없이 요동치며 손끝을 세웠다. 계속해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키이스는 낮은 욕설과 함께 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버렸다. 그의 촘촘한 등 근육에 손끝을 세워 꽉 붙잡았다. 어깨를 깨물고 허리에 다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맙소사,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다니.
나는 미칠 듯한 감동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찼다. 더 이상 신음을 참지 않았지만 키이스 역시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역시 거친 숨과 함께 연이어 신음을 뱉어 내며 내 얼굴 곳곳에 키스하고 목을 깨물었다.
“아, 하아, 아, 키이스, 키이스……!”
나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온몸을 떨었다. 키이스 역시 내 이름을 불렀다. 연우, 그의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속삭임에 나는 한없이 젖어 들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함께 뒹굴었다. 그와 나의 위치가 바뀌고, 나는 키이스의 몸 위에 엎드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아래에서 키이스가 난폭하게 허리 짓을 하고, 나는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교성을 질렀다.
다시 위치가 바뀌었다. 내 위로 올라온 키이스는 슬쩍 빠진 성기를 한 번에 뿌리까지 처박았다.
“아……!”
긴 비명이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배 속에 쏘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체액에 정신이 돌아왔다. 키이스가 내 위에서 가늘게 전율하며 깊숙이 사정했다. 꽉 맞물린 곳에서 정액이 흐르지 않도록 나는 온 힘을 다해 아래를 조였다. 키이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안에 전부 쏟아 냈다.
아직 숨결이 거칠었지만 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살며시 잡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이 남자처럼 멍한 표정일까? 이렇게나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나는 눈을 감고 키스했다. 키이스가 내 입 안에 주저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목을 끌어안고 키스에 열중하면서, 나는 넘치는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 * *
엉망이 된 옷을 대충 주워 입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자선 행사 따위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렴풋이 생각을 떠올리긴 했다. 하지만 이미 기부금은 냈고, 그 뒤는 알 바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친 건 키이스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도 내내 키스하고 몸을 더듬거렸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저절로 숨이 가빠졌다. 대담하게도 키이스의 무릎 위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끊임없이 키스했다. 그런 나의 버릇없는 행위를 키이스는 그냥 내버려 뒀다. 오히려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계속해 달아오른 구멍을 지분거리며 나를 희롱했다. 마침내 차가 저택에 도착해 키이스가 나를 놓아줬을 때, 그의 손은 내 음탕한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키이스는 나를 두 팔에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당연한 듯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대로 안긴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벅찬 기분과는 별개로 부끄러움에 키이스의 어깨에 최대한 얼굴을 묻었지만 그것도 그의 방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문을 닫자마자 키이스는 곧바로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에 나를 내려놓자마자 위로 올라와 연거푸 키스했다. 나는 기꺼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벌렸다. 대충 걸쳐 있던 바지는 지퍼도 버튼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는 손쉽게 내게서 바지를 벗겨 버렸다.
문득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어깨를 움츠리기도 전에 키이스가 내 위로 몸을 겹치고, 다시 키스를 했다.
차 안에서부터 계속 참고 있었을 텐데도 그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내 아래는 충분히 젖어 있었다. 새삼 길들일 필요도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쉽게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애가 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애원하고 말았다.
“제발…….”
“제발, 뭐?”
키이스는 장난하듯 물었다. 보란 듯이 젖은 곳을 귀두로 슥 문지르는 바람에 나는 그만 자지러졌다.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키이스가 짧게 웃었다. 하지만 원망할 틈도 없이 그가 입술을 겹쳤다. 곧이어 발기한 성기가 내 안에 들어오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키이스는 천천히, 여유 있게 내 안을 드나들며 몇 번이고 키스하고 쓰다듬었다. 유두를 지분거리기도 하고, 허리를 간질이기도 하고, 엉덩이를 움켜쥐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내 안을 드나들었다.
아래쪽에서 질척이는 소리는 점점 더 진해졌다.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키이스의 성기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하아…….”
마침내 키이스가 깊은 탄식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내 배 속 가득히 쏟아 내면서 그는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의 정액을 받으며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아래쪽을 꽉 물었다. 키이스는 힘들이지 않고 사정을 마쳤다.
문득 그가 미소를 지었다. 쪽, 하고 칭찬이라도 하듯이 내 뺨에 키스를 하더니 갑자기 내 몸을 안고 돌아누웠다. 덕분에 나는 그대로 반 바퀴 굴러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아래는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또다시 하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키이스는 그대로 있었다.
사정이 끝났는데도 그가 페니스를 꺼내지 않고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어쩔 땐 그대로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이스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수면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내 쪽에서 빼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역시 내 안에 성기를 넣은 채 후희를 즐기는 그를 나는 그냥 내버려 뒀다. 오히려 간간이 아래를 조이며 그의 쾌감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음…….”
살며시 물고 있는 곳을 빨아들이자 키이스는 눈을 감고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너무나 선명해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키이스가 가만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감자 잠시 뒤 입술이 맞닿았다. 아래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키이스의 성기가 다시 발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키스에 응답하며 그가 완전히 기운을 되찾기를 기다렸다.
문득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표정에 드러나고 말았는지 키이스가 물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뭔가 생각나서.”
“뭔데?”
키이스가 묻는 말에 나는 짓궂게 대답했다.
“분명히 섹스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누군가가 있었는데 말이죠. 좋아하지 않는데도 무척 많이 하는 것 같아서요.”
그가 멈칫하는 것이 몸 안쪽에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떨었다. 키이스는 곧 아무렇지 않게 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네가 유혹을 하잖아.”
나는 순간 기가 막혀 항의했다.
“그럴 틈도 안 주신 걸로 아는데요?”
“했어, 네가.”
키이스는 의미심장하게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온몸으로 말했잖아, 나와 자고 싶다고.”
다른 때였다면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쑥스러울 뿐이었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내게 자신감을 주다니 이상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웃으며 덧붙였다.
“난 유혹에 넘어간 거야.”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나는 심술궂게 물었다.
“남자와는 자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놓고, 이젠 제가 유혹해서 넘어왔다고요?”
키이스는 짧게 소리 내어 웃더니 내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래, 왜 진작에 너와 자지 않았을까.”
속삭임에 이어 다시 키스가 이어지고, 나는 눈을 감았다.
드러난 피부로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뒤늦게 온몸의 체온이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부르르 몸을 떨자 키이스가 나를 끌어안고 물었다.
“추워?”
“네.”
목소리도 가늘게 진동했다. 키이스는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키이스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안, 정말 뜨거워.”
키이스는 탄식하며 내 목에 키스했다.
“맙소사, 이건 정말, 굉장해…….”
그는 연거푸 신음하며 내 안을 드나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키이스는 흥분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최대한 키이스를 만족시키려 노력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나를 안아 일으켜 앉은 채로 삽입했을 때였다. 등으로 찬 바람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온몸에 오한이 일어났다.
“아…….”
나는 밭은 숨을 뱉어 내며 전신을 떨었다. 열이 오르려는 게 분명했다. 뒤늦게 감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런 나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부르르 떠는 내 몸이 저절로 안쪽을 진동시켜 그의 것을 자극하는 바람에 완전히 이성이 나가 버렸다.
“……망할, 세상에!”
키이스가 거칠게 욕설을 뱉어 내며 고개를 젖혔다. 이렇게나 흥분한 그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현기증과 오한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을 덜덜 떨며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게 전부였다. 추위 탓에 전신에 힘이 들어가 긴장이 풀어지질 않았다.
그런 내 상태를 그는 내가 자신을 유혹하는 거라고 오해하고 말았다. 그 증거로 내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 격렬하게 아래를 쳐 대기 시작했다.
뇌가 머릿속에서 진동하며 사방으로 튀어 다니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고 현기증을 이겨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그가 내 안에 사정했지만 그저 어렴풋하기만 했다. 내 몸이 훨씬 더 뜨거웠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열이 오르는지 오한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런 내 상태에 아주 만족했다. 떨고 있는 나를 떼어 놓더니 아래를 연결한 채로 한쪽 다리를 밀어 올려 몸의 방향을 바꿨다. 뒤에서 허리를 안고 그대로 나를 눕히더니 다시 격하게 내 안을 드나들었다. 나는 엎드린 채 엉덩이만을 치켜들고 그의 성기를 받았다.
오한은 계속됐다. 너무 춥고, 너무 아프고, 너무 괴로웠다. 발작처럼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다시 몸을 돌려 마주 본 키이스의 얼굴은 지금껏 본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상태였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곧바로 그가 내게 입술을 겹치고 깊게 키스했다.
“저,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옮으면…….”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나는 말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괜찮아. 뜨거워서 더 좋아.”
그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 키이스까지 아프면 어떡하지. 나는 걱정이 됐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자꾸만 멀어져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나는 의식을 잃은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 * *
“콜록, 콜록.”
거칠게 터져 나오는 기침에 머릿속이 찌르르 울려 왔다. 나는 극심한 두통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꼭 감았다. 반사적으로 고인 눈물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손발이 차갑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덜덜 떨며 이를 맞부딪쳤다.
“울지 말아요, 열이 더 오릅니다.”
사무적이면서도 조용한 음성에 나는 약간이나마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여전히 온몸을 웅크리고 덜덜 떠는 내 위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심하게 감기를 앓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괜찮겠습니까? 폐렴이 생긴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이 목소린 찰스인가?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일단 두고 보자는 얘기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약을 드릴 테니 때마다 챙겨 드시고, 수분 공급이 중요하니까 수액이 끊기지 않도록 연결해 주시고요……. 혹시 내일까지 열이 내리지 않으면 제게 연락해 주십시오.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번엔 키이스의 주치의인 것 같았다. 이름이 뭐였지?
나는 생각을 떠올려 봤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덜덜 떨기만 하는 내게 찰스가 말했다.
“연우, 내 말 들립니까? 히터를 최대한 틀어 놨으니 곧 따뜻해질 겁니다. 지금은 열이 올라서 어쩔 수 없으니 조금만 견뎌 봐요. 알겠습니까?”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음성이었지만 왠지 나를 걱정해 주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노력은 했다. 다시 잠으로 빠져들면서 문득 생각했다.
키이스는?
궁금했지만 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 없는 게 당연하다. 출근을 했겠지. 오늘 스케줄이 뭐였지? 중요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엠마가 잘 처리해 줄까?
빨리 나아서 내일은 꼭 출근을…….
생각을 하다 말고 나는 잠이 들었다.
* * *
차가운 체온에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 내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는 듯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게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은 얼마간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키이스.’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해도 입 안이 바짝 말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키이스는 짧게 혀를 차더니 돌아섰다.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내 시야에 그가 티테이블 위에 놓인 포트를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글라스에 물을 따른 키이스가 몸을 돌렸다. 내게 물을 가져다주려고 했다는 걸 알자 저절로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부축을 받아 반쯤 일어나 앉은 후에야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열 때문인지 입 안이 화끈거리고 목은 바짝 말랐다. 한 잔의 물을 다 마신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고맙, 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빈 잔을 받아 들었다.
“더 줄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고스럽게도 한 차례 더 왕복을 했다. 나는 침대에 편안히 앉아 마치 꿈을 꾸는 기분으로 키이스가 직접 물을 따라 내게 가져다주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
“하아.”
두 번째 잔도 전부 다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키이스는 빈 잔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내 얼굴을 살폈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베스트를 완벽하게 갖춘 슈트 차림이었다. 나는 변함없이 근사한 키이스를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내게 키스를 하려는 것이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했다. 애석하게도 내 뺨에 입술을 문질러 버린 키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감기가 옮으면…….”
“감기 같은 게 걸릴 리가 없잖아.”
키이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내뱉었다. 하지만, 하고 입을 열었으나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키이스가 곧바로 내게 입술을 겹쳤기 때문이다. 열 때문에 멍한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 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으로 들어온 혀를 받아들였다. 혀를 움직일 기운도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자 내 입 안을 핥고 애무했던 키이스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직도 뜨거운데.”
“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키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다.
“입으로 해 드릴까요……?”
도저히 아래로는 할 자신이 없었다. 입은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하며 말하자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잘못 말했나? 이게 아니었나?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나를 보며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부추기지 마, 빌어먹을. 지금 참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나는 무안해져 사과했다. 키이스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쉬어.”
그는 곧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 했다.
“키이스!”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키이스는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만 그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는 걸 깨달은 것은 눈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키이스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내 말을 기다리며 서 있는 그를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회사는…… 괜찮았습니까? 갑자기 결근을 하게 돼서 엠마한테 미리 얘기를 못 해 줬는데…….”
엠마를 믿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을 것이다.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내가 감싸 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는데, 키이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
짧은 한 마디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고 급하게 할 말을 찾는데 뜻밖에도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몸은 언제쯤 낫는 거지?”
그런 걸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사라도 정확한 대답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급하게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을 내뱉었다.
“내일은, 나을 겁니다. 그러면…… 저어, 원하시는 건 뭐든.”
가뜩이나 열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아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키이스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조마조마해하며 반응을 기다리는데, 그의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뭐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키이스가 웃고 있었다. 왠지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네.”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기대하지.”
나는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거라곤 힘없이 마주 웃는 게 전부였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물으려 했으나 키이스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찰스를 기다렸다.
잠시 뒤 시간에 맞춰 들어온 그는 낮에 그랬듯이 수프와 약을 챙겨 주었다. 스푼을 들 힘도 없어서 애를 먹는 내게 찰스는 고맙게도 직접 그것을 떠먹여 주었다.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작게 중얼거리자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것도 제 일이니 괜찮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아침보다는 좀 나았다. 약을 먹으니 내일은 더 좋아지겠지. 내심 생각했던 나는 곧이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저, 키이스에게…… 약을 챙겨 줘야 할 것 같은데요.”
“피트먼 씨한테요? 어떤 약 말씀입니까?”
찰스의 물음에 나는 부끄러운 것을 참고 대답했다.
“감기약을…… 저한테서 옮았을지도 모릅니다. 저어…… 좀 전에, 방에 다녀갔으니까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단어를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찰스는 곧바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극알파에게 감기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몰랐습니까? 극알파들은 질병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이 아파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찰스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한 차례 나를 훑어보았다. 당황한 내게 그는 말을 이었다.
“감기에 걸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니까 일일이 알려 줘야 한다는 얘깁니다. 다음부터는 이럴 때 섹스는 하지 않는 거라고 얘길 하십시오. 일단 이번에는 제가 언질을 드렸습니다.”
너무나 태연하게 하는 말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찰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감기가 나을 때까지는 가능한 한 접촉을 삼가시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일단은 몸이 낫는 게 먼저니까요. 연우도 앞으로는 적당히 거절하는 게 좋습니다. 무조건 다 받아 주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질 겁니다. 기본적으로 극알파들의 체력을 일반인들이 감당한다는 건 무리죠.”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트먼 씨는 아침에 연우가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서 이상하다고 말하더군요. 열이 104도(섭씨 40도)가 넘는데 그냥 몸이 좀 뜨겁다고만 생각하시더란 말입니다. 병이 나 앓아눕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으니 아예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대신 그때그때 얘기를 해서 주의를 환기해야 합니다. 그건 연우가 해야 할 일이죠.”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지만 천연덕스럽게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배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가 떠먹여 주는 수프를 억지로 다 먹은 후 약까지 삼키고 다시 잠을 청하는 게 전부였다. 어서 빨리 감기가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 *
몇 번이나 자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내 상태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체온을 확인한 찰스는 가능한 한 침대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 뒤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안부를 물었다. 두통을 앓으면서도 어서 빨리 잠들기만 기다렸다. 어서 잠에 빠져들어서 이 고통을 잊었으면 좋겠다. 나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끙끙 앓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나는 열 때문에 멍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키이스가 보스턴으로 출장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게 언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출장 준비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는, 호텔은……. 예약이 제대로 됐는지 다시 확인을 하고……. 엠마에게, 전화를…….
“……?”
뭔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감각에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또다시 오르는 열에 들떠 간신히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흐릿한 시야는 몇 번의 노력 끝에야 비로소 형체를 담아냈다.
“……키이스?”
내가 생각하기에도 힘없이 잦아드는 음성이었다. 키이스는 나를 내려다보다 조용히 물었다.
“아직도 아파?”
나는 잠시 대답을 생각했다. 문득 찰스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쯤 나을 거라고 나는 키이스에게 장담했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왠지 무안해졌으나 찰스의 조언대로 솔직히 말했다.
“네…… 아직, 열이…… 나는 것.”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기침을 했다. 키이스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몇 차례 기침을 토해 낸 후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와 숨을 헐떡이는 내게 그가 물컵을 내밀었다. 간신히 도움을 받아 목을 축이고 난 후 나는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다시 눕혀 주었다.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그는 출근 전 내 방에 들른 모양이었다. 엠마가 조금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희미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찰스가 약을 먹으라고 깨웠을 때였다. 나는 마른기침 사이로 간신히 말을 했다.
“엠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자 찰스는 이미 다 안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출장에 관련한 일입니까? 피트먼 씨는 어제 보스턴에 도착해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데요.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잤나? 그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는 내게 찰스는 약과 물컵을 건네주며 말했다.
“엠마가 잘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연우는 병이 낫는 게 먼저니 다 잊고 푹 쉬어요. 피트먼 씨는 사흘 뒤에나 돌아올 겁니다.”
그의 말이 맞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달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당부한 후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내내 잠만 잤다. 간간이 찰스가 깨워 약을 먹였지만 먹고 나서는 또다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꼬박 며칠을 더 앓고 난 후, 나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피트먼 씨의 일정이 하루 미뤄졌다고요?”
스케줄을 확인한 나는 찰스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네, 하고 말을 이었다.
“원래는 어제가 돌아오시는 날이었는데, 스케줄을 바꿔 하루 더 묵으셨습니다. 그쪽에 볼일이 생긴 모양이더군요.”
날짜를 보니 그의 말이 옳았다. 내가 그렇게 오래 아팠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그의 갑작스러운 일정이 뭐였을지 궁금했다. 생각을 떠올려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키이스가 갑자기 스케줄을 바꾸는 일은 흔하게 있었다. 엠마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걸 생각하니 어서 출근을 해서 일을 덜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연우.”
찰스는 걱정스러운 듯이 당부했다. 나는 네, 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오랜만에 침대를 벗어나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식사도 제법 많이 했다. 아직 현기증이 남아 있긴 했지만 평소보다 천천히 조심해서 걸으면 괜찮았다. 그보다 키이스에게 내가 다 나았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마음껏 키스해야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키이스를 남몰래 좋아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마치 이제 막 그에 대한 연정을 앓기 시작한 것처럼 애가 끓었다. 오랜만에 그를 볼 생각에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키이스 없이 저택을 나와 회사까지 가는 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두려움은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키이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
*
“어머, 연우! 괜찮아요? 감기가 아주 심하게 걸렸다던데. 세상에, 이렇게 마르다니.”
엠마는 나를 보자마자 연달아 감탄사를 뱉어 냈다. 나는 뒤따라 반갑게 일어서는 제인과 레이첼에게 번갈아 인사를 한 후 엠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서 미안합니다. 일은 괜찮았습니까?”
엠마는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네, 행사는 잘 끝났어요.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 연우.”
“다행이군요.”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키이스는 한 번도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출장을 갔으니 일이 바빴을 테고, 어차피 나는 계속 약을 먹고 잠들었으니 그가 전화를 했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다행이에요, 갑자기 일정을 늘리는 바람에 지금 스케줄을 어떻게 짜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엠마의 말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다정히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 때문에 모두 힘들었을 테니 번갈아 휴가라도 다녀오세요. 피트먼 씨에게는 제가 허락을 구할 테니…….”
“그래도 되나요?”
눈이 번쩍 뜨인 제인을 흘긋 노려본 레이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연우, 이제 막 출근을 한 거잖아요? 몸이 좀 더 좋아지면 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아요. 마음은 고맙지만 우린 괜찮으니까 그건 나중에 해요.”
“그래요. 급하지 않아요, 그런 건. 대신 나중에 휴가를 쓸 때 이틀 정도 더 보너스를 준다면 좋겠어요.”
엠마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공항에 나가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도착 시간이 몇 시였죠?”
“오후 5시예요. 괜찮겠어요, 연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제 일이니까.”
키이스는 지금쯤 비행기에 타고 있을까?
나는 오랜만에 그를 볼 생각에 자꾸만 들뜨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일부러 바쁘게 스케줄을 정리하고, 전화를 돌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단히 보고를 듣고 수습을 하며 정신없이 보냈는데도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 * *
공항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쏟아지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았다. 나는 까다로운 신분 확인을 거쳐 VIP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몇 번씩 거울을 봤지만 그래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또다시 나는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가 매무새를 확인했다. 얼굴은 달아오른 채 식을 줄을 몰랐다. 준비된 다과는 전혀 건드리지도 못했다.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 키이스는 나를 보고 놀랄까? 기뻐할까?
뛰어가 키스를 해도 될까?
붉게 상기된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이 어딘지 음탕해 보였다. 하지만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당했다. 그를 원하는 걸 이젠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나의 욕망에 기꺼이 응해 줄 것이다. 키이스도 나만큼 원하겠지? 벌써 며칠 동안 하질 못했으니까.
내 입술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던 키이스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약속했던 대로 입으로 해 줄까?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참을 수 있을까? 이런 곳에서 하면 민폐겠지?
아, 어서 빨리 만나고 싶어.
나는 끓어오르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초조하게 몇 번을 서성거렸다. 절대 이 마음은 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 때는 이렇게 애가 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자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욕망에 눈이 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키이스에게 눈이 먼 거겠지.
나는 내심 정정했다. 뒤늦게 감기를 원망했을 때,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이스?
저절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황급히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상기된 얼굴은 어떻게 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향을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를 유혹하는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키이스가 내 목에 코를 묻고 몇 번이나 깊게 들이켜던 나의 향기. 나는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닫혔던 문을 열었다. 이대로 곧바로 그에게 키스를 할 것이다. 내 얼굴을 보면 놀라겠지? 기뻐할까? 아, 내게 키스를 퍼붓겠지.
“키이스…….”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일 먼저 내가 느낀 것은 너무나 익숙한 그의 향기였다. 나를 흥분시키는, 너무나 달콤한 키이스의 페로몬.
그의 모습을 본 것은 그다음이었다.
키이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커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무릎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풍만한 육체는 익히 보아 왔던 키이스의 취향 그대로였다. 반쯤 벗겨진 유니폼으로 나는 그녀가 스튜어디스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공항에서 만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출장지에서부터 같이 왔을 수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키이스가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키스하며 몸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