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77)

27

“……비우신 일정은 모두 다시 조정했습니다. 이 중에서 변경하실 사항이 있으시면 체크해 주십시오. 오후에 있을 회의 자료는 이쪽입니다. 점심 전에 확인해 주시고 보완은 회의 전에 끝내서 보고하겠습니다. 여기, 참고하실 자료입니다.”

나는 두꺼운 서류철을 책상 위에 놓고 그에게 쭉 밀어 주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위에 누워서 키이스와 미친 듯이 섹스를 했던 바로 그 책상이었다. 곧이어 프로필 사진들이 담긴 얇은 서류철을 올려놓자 키이스가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이게 뭐냐는 듯이.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피트먼 씨 취향의 상대로 몇 명 찾아봤습니다. 보시고 선택하시면 그쪽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이봐.”

그럼, 하고 물러나려는 나를 키이스가 불러 세웠다.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키이스는 찌푸린 얼굴로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어 차례 두드렸다.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던 그가 손가락 너머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거칠게 내뱉는 음성에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오늘 스케줄을 보고드렸고, 하실 일들을 정리해 드렸고, 마지막으로 여가를 함께 보내실 상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문제라도?” 하고 나는 덧붙였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라고는 없이. 키이스는 기가 막힌 듯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키이스의 방에서 나온 이후 나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내가 쓰던 방을 정리했다.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출근 준비까지 전부 마쳤다. 차에 타고 나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키이스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내가 약간의 변덕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표정이 바로 증거였다.

“이건 또 무슨……. 아아, 알았어. 이 중에서 고르면 되나?”

키이스는 건성으로 페이지를 뒤적이더니 하나를 짚어 내 쪽으로 툭 밀어냈다. 누가 봐도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분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만나시겠습니까? 호텔로 예약을 잡을까요?”

키이스는 한쪽 손을 들었다 놓은 게 전부였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나는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일정이 없으시니 7시에 호텔로 오시도록 전하겠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룸에 준비를 해 두면 됩니까?”

키이스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에겐 이 모든 게 장난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마치 까다로운 고양이가 손가락을 할퀴며 작은 앙탈을 부리는 것을 마음 넓게 보아 넘기는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물론 그는 나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저 고용주일 뿐.

“알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왔으나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대신 브리프 케이스를 열어 가져온 상자를 꺼냈다.

다시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키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짐작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똑바로 걸어가 그의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

조용한 음성에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주셨던 시계입니다.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줬던 물건을 돌려받는 것은 그에게는 처음 있는 경험일 것이다. 나는 내가 마음을 써서 준비했던 선물을 되돌려 받았을 때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던지를 떠올렸다. 물론 이 남자는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전 섹스 상대로부터는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하.”

키이스는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대로 물러나려는 내게 그가 상자를 손가락 끝으로 짚어 밀어 버렸다. 그것은 책상을 가로지르고 내게서 멀지 않은 거리에서 멈춰 섰다.

“난 줘. 그러니까 가져가.”

“싫습니다.”

나는 딱딱하게 거절했다.

“서로 즐긴 건데 굳이 한쪽이 뭔가를 줄 이유가 없습니다. 받을 이유도 없고.”

“가져가라고, 당장.”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내가 그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무척 불쾌한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상자를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슈트의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펜을 들어 수표책에 숫자를 썼다. 키이스는 내가 여백을 채우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듯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서명을 마친 수표를 그의 앞으로 쭉 밀어 주었다. 키이스가 수표를 내려다보았다. 금액은 정확히 20,000달러였다. 그저 시선만을 올려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저와 섹스를 해 주신 데 대한 대가입니다. 제게 시계를 지불하셨지만 전 피트먼 씨만큼 많이 하지 않았고 마지막 섹스는 제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행위였으니 제외했습니다.”

키이스는 이제 기가 찬 탄성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아예 넋이 나간 듯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던 그가 다시 수표를 내려다봤다. 수표 한쪽의 지급 사유에는 명백히 ‘SEX’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 나한테, 화대를 지불한 거야?”

키이스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금액은 그 정도입니다만, 적다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는데요.”

키이스가 책상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얗게 관절이 일어난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지금 어마어마하게 화가 났다. 나를 때릴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의도치 않은 페로몬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달콤한 향내에 정신이 어지러워지려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다잡았다.

키이스가 손을 폈다. 그는 나를 때리는 대신 수표를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수표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다. 어차피 내 통장에는 20,000달러나 되는 돈은 없었다.

수표를 찢으면서 키이스는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표가 잘게 조각나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키이스가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시계가 든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키이스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

퉁,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똑바로 서서 말했다.

“그럼 계산은 끝났으니 이만 나가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한 후 사무실을 벗어났지만 키이스는 이번에는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 간단히 할 일을 알려 준 후 키이스가 고른 상대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을 메일로 보냈다. 이제 그들은 알아서 그녀에게 줄 보석을 골라 선물하고 말을 전할 것이다. 그나마 관계가 끝난 상대에게 찾아가 곤란한 말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내게 줄 보석이나 선물을 골라야 했을까?

시니컬하게 떠올렸던 나는 곧 무표정으로 되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

*

아침에 나올 때 내가 쓰던 방은 모두 정리를 해 놓고 왔다. 머무는 동안 물건이 많이 늘었지만 키이스가 사 준 것은 전부 그대로 남겨 놨다. 애초에 가져간 것이라고는 브리프 케이스와 슈트 한 벌이 전부였다. 내가 쓰던 물건들을 버리기 쉽도록 한쪽에 정리해 두었다.

유일하게 내가 그 집에서 가져가기로 한 것은 억제제였다. 욕실의 찬장에 쌓여 있는 약들 중에서 진통제와 억제제를 꺼냈다. 한 통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싶은 걸 참고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최대치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진통제와 함께 삼킨 후 잠시 동안 침대에 앉아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유독 머리가 멍하고 몸이 무거운 이유는 뻔했다. 빌어먹을 페로몬. 다시 베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문득 스튜어드가 생각났다. 그는 그런 실험은 안 하고 있을까?

키이스는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저 사랑에 눈이 멀어 그렇게 멋대로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도 그저 다른 극알파와 다를 게 없었는데.

멍하니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 해가 떠올랐다. 출근을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고 싶었으나 현실은 냉담했다. 내겐 갚아야 할 빚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이었다. 학비를 대 주어야 하고 그들이 자라 결혼할 때가 되면 오빠이자 장남으로서 상당 부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당장 실직을 해 버리면 다음 직장을 찾을 동안 비자를 연장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 구직 활동을 할 자신도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었지만 이곳만큼 급여나 조건이 좋은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외국인이라는 제약까지 더한다면 더더욱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이스가 나를 해고할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최소한 당분간은.

냉정하게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나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이제 와서 내 자존심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나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

*

“엠마, 오늘 혹시 바쁩니까?”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일부러 비서실까지 내려가 물었다. 자리를 정리하던 그녀는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별일은 없어요. 추가로 할 일이라도 있나요?”

혹시나 야근을 하라고 그럴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이 레이첼과 제인이 잔뜩 긴장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괜찮다면 집까지 절 태워다 줄 수 있을까 해서요. 대신 제가 저녁을 사겠습니다.”

“어머!”

제인이 탄성을 지르고, 곧이어 레이첼이 팔꿈치로 격하게 그녀를 찔렀다.

“그럼 저흰 먼저 퇴근할게요.”

레이첼이 재빨리 핸드백을 들며 말했다. 제인 또한 서둘러 인사를 했다. 엠마는 간단히 손을 흔들어 준 후 다시 내게로 시선을 향했다.

“물론 바래다주는 건 괜찮아요, 연우. 하지만 굳이 식사까지 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사고 싶습니다. 엠마에겐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고, 저도 오늘 저녁 식사를 해야 하니까요.”

웃으며 말하자 그녀 역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거라면 좋아요. 실은 출장 내내 피트먼 씨 눈치를 보느라 정말 피곤했거든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던 엠마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다니, 이제 더 이상 피트먼 씨 댁에 머물지 않는 건가요?”

“네.”

나는 대답했다.

“이젠 괜찮습니다. 다 나았어요.”

“어머, 다행이네요.”

엠마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1층에서 만날까요? 차를 빼 올게요.”

“네,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한 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슈트의 재킷을 걸치고 있는 키이스가 보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호텔로 곧바로 가시면 됩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따로 퇴근하겠습니다.”

키이스가 멈칫했다. 나는 그럼,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후 곧바로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스튜어드가 준 약을 먹었다. 플라세보가 아닌 진짜였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동안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우.”

마침 현관에서 기다리던 휘태커가 말을 걸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인사를 했다.

“피트먼 씨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웬일로 오늘은 혼자 내려왔습니까? 뭔가 전달할 사항이라도?”

휘태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피트먼 씨는 오늘 새로운 상대와 호텔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으니 일정이 끝난 후 귀가하시면 됩니다.”

“네?”

휘태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짧은 인사만 남긴 후 선뜻 걸음을 옮겼다.

전에도 혼자 차를 타고 회사를 벗어난 적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다시 키이스의 도움을 받고 말았지만. 그 후 이렇게 혼자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가는 일은 처음이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낯선 공간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생소하면서도 외로운 감정이 느껴져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엠마가 탄 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조수석의 문을 직접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태리 요리 괜찮습니까? 괜찮은 곳을 알아 뒀는데요.”

내 말에 엠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해요. 기대가 되네요.”

“다행이군요.”

곧이어 그녀는 능숙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 미러로 언뜻 키이스가 보인 듯했으나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혹시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뜻밖에도 이후의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잡다한 얘기를 나누다가 엠마의 도움을 받아 내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택시를 탈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내일은 어떻게든 스스로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할 생각이었다. 스튜어드가 준 약도 있었고, 전보다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무엇보다 설사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다시 발작이 온다고 해도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는 더 이상 내겐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젠 정말로 나 혼자서 이 상황을 견뎌 내야 하는 거니까.

* * *

다음 날 출근한 키이스는 불쾌한 기분을 역력히 드러내며 내 책상을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준비했던 서류를 들고 정확히 10분 뒤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키이스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깊은 미간의 주름을 새기고서.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향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선뜻 걸음을 옮겼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선 내가 평이한 음성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동안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내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별도로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나는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나는 흘긋 벽의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1분이 더 흐른 뒤 입을 열었다.

“없으시다면 이만…….”

“너.”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예의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실 뿐이었다.

후, 길게 연기를 뱉어 낸 그가 마침내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사무적으로 대답하자 그는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지금 나한테 요구하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 알았으니까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봐, 섬이야? 비행기? 요트? 라스베이거스를 통째로 사 줄까? 대체 너와의 섹스 한 번에 현상금을 얼마나 걸어 놓은 거냐고.”

키이스는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 남자가 나와 자겠다고 이렇게 딜을 하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냉담한 시선으로 타인의 일을 관찰하듯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피트먼 씨에게 요구하는 건 없습니다. 그냥 제가 원해서 잤었고, 이제 더 이상 원하지 않으니까 안 자겠다고 한 것뿐입니다.”

“그걸 나한테 믿으라고?”

“믿든 안 믿든 그건 피트먼 씨의 선택이죠. 다만 제가 피트먼 씨와 자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속을 읽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 남자는 애초에 내가 왜 자신과 잤는지조차 모를 테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키이스가 곧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너한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히려 절 가볍게 포기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

키이스는 말이 없어졌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냉소가 사라졌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일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사무실을 나올 때까지 키이스가 다시 나를 불러 세우는 일은 없었다.

* * *

한동안은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키이스와 나는 최소한 겉으로는 이전과 똑같았다. 그는 나를 무시하며 이따금씩 빈정거리고, 나는 무심하게 한 귀로 그의 말들을 흘려보내며 맡은 일을 처리하는 그저 그런 일상.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키이스는 그날 이후로 개인적인 일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내 몸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상대를 바꿔 가며 자고, 질리면 새로운 상대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나는 때가 되면 알아서 그에게 리스트를 찾아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내 ‘주제 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다. 우린 끝났다. 애초에 끝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쩌다 한때 섹스를 했고 이젠 안 할 뿐이다.

그 뒤로 몇 번 엠마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기에 편한 상대였다. 아픈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고 살고 있는 엠마는 그동안 친구를 만나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그다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가끔 그녀가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나 또한 그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함께 일한 몇 년 동안보다 최근 한 달 사이에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빠에게 아이가 있다고요?”

주말이 되어 최근 오픈한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는 물었다. 그녀는 네, 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이쪽에 일을 따서 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조카가 지금 저희 집에 와 있어요. 쪼그만 게 보고 싶다고 우는데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죠.”

엠마는 씁쓸하게 말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

“사진 보여 드릴까요? 아주 귀여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를 자식만큼이나 예뻐하는 팔불출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엠마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사생활에 대해 얘기할 때는 으레 우울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와우.”

사진을 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엠마가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활짝 웃고 있는 금발의 아이는 지금껏 본 그 어떤 아이보다 예뻤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남자애죠?”

“네.”

엠마는 흐뭇한 얼굴로 사진을 황홀하게 내려다봤다. 곧 아쉬운 듯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를 보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오빠가 오메가라고 했죠? 아이를 낳을 때 힘들어하진 않았습니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임신한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불쑥 아이를 안고 나타났거든요. 원래 직업이 그래서 두문불출하거든요. 자주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연락이 아예 끊길 때도 많고. 그러다 보니 또 일을 하러 간 줄 알았죠, 설마 아이를 낳으러 갔을 줄은.”

뭔가 느낌이 묘했다. 이런 걸 물어도 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엠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조쉬답지 않은 일이에요. 조쉬는 정말 철저한 성격이거든요, 빈틈이 없어요. 하이스쿨 당시에 쿼터백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올 A를 받을 정도였다고요. 그런데 상대 알파가 누군지도 모르고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 일은.”

오메가가 히트사이클에 이성을 잃고 모르는 상대와 하룻밤을 보냈다가 임신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상대가 알아서 피임을 해 주면 좋을 텐데 그 정도로 매너가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도 운이었다. 엠마의 오빠는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수도.

“아이가 생긴다는 건 어떤 걸까요.”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엠마는 글쎄요,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카도 이렇게 예쁜데 자기 자식이라면 더 예쁘겠죠? 조쉬만 해도 피트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거든요. 같이 있으면 주변을 보지 못할 정도예요.”

“……그렇군요.”

나로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조카를 보려면 최소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고 내 아이를 낳는 것 역시 언제가 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마침 디저트가 나오고, 우린 화제를 바꿨다.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이만 갈까요?”

벌써 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래다준 후 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거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게다가 엠마가 사는 주택가에서 내 집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나는 피곤함을 느끼며 계속해서 차를 타고 달려갔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는 끝도 없이 긴 거리를 혼자 달리는 것은 언제나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은 한층 더했다.

“아차.”

갑자기 튀어나온 코요테 때문에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핸들을 꺾어 끔찍한 상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코요테는 무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워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데 문득 아까 보았던 아이의 사진이 떠올랐다. 혹시 연예인을 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아이였다. 기억에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건 어떤 걸까?

문득 황폐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적당히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 수는 있겠지.

누구와?

나는 멍하니 앉아 한참 동안 끝없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