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77)

28

“……아야.”

아침이 되어 습관처럼 억제제를 먹었던 나는 문득 복통을 느꼈다. 무심코 얼굴을 찌푸리며 배를 눌렀지만 날카로운 통증은 몇 초간 더 지속되었다.

뭐지……?

처음 겪는 통증에 나는 당황했다. 억제제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도 모른다. 키이스와 관계를 맺는 동안에는 약을 끊었었지만 다시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줄곧 예전처럼 매일 한계치를 복용하고 있었다. 다시는 누구의 페로몬에도 함락되지 않도록.

설마 부작용은 아니겠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전엔 미친다는 게 더 무서웠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불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

나는 생각하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몸을 움직인 것은 어느 정도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안녕하십니까, 피트먼 씨.”

평소와 같은 시간에 키이스는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키이스는 근래 쭉 그랬듯이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노크를 했다.

키이스는 창가에 서서 밖을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더니 이내 회색으로 탈바꿈했다. 후, 길게 연기를 뱉어 내는 그와 잠시 시선을 마주쳤던 나는 곧 눈을 피하며 책상으로 걸음을 향했다.

“오늘 스케줄입니다. 메모를 첨부해 뒀으니 참고해 주십시오. 점심에 만나시기로 했던 브라이트먼 씨가 급히 약속을 변경하셨습니다. 레스토랑 예약은 취소하지 않았으니 식사를 하시면서 이 기획안을 같이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류를 놓아둔 뒤 허리를 폈다. 그때까지 키이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형식적인 몇 초의 시간을 보낸 뒤 돌아서서 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속으로 10초를 센 뒤에 나가려고 했다.

“……너.”

갑자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나는 멈칫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키이스가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천천히 내뱉는다. 그는 줄곧 나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피트먼 씨?”

슬며시 재촉하자 키이스가 갑자기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그가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사람을 불러 놓고 딴생각을 하다니. 나는 내심 짜증이 났지만 모른 척하고 말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도 될까요?”

정중하게 물었으나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꼬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대체 사람을 세워 놓고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는 대신 나는 나가려고 했다. 그때 키이스가 명령했다.

“그 여자, 정리해.”

곧바로 의미를 알아챘다. 고작 1주일도 되지 않아 또 상대를 바꾸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새 따로 부르지 않았다면 그녀와는 호텔에서 두 번 만난 게 전부였다. 어쨌든 날짜로는 6일이었다.

따로 부를 정도로 좋았다면 정리하라고 하지 않겠지.

나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다가 미국에 사는 여자 전부와 잘 것 같았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나는 내심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하긴 그렇게 진저리 치던 남자하고도 잤는데 누구하고든 못 자겠어?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이번에는 그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에는 남자들도 고려해 볼까, 하고 떠올렸을 때였다.

후우.

문득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담배 연기를 뱉은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어?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고민했던 나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았다.

은은하게 밴 달콤한 향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그저 실내에 남아 있는 잔향에 불과했다. 키이스의 몸에서는 어떤 향기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향을 없앤 걸까?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왜?

거기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 * *

“어머, 고작 1주일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벌써요?”

아쉬움과 충격이 뒤섞인 여자의 반응에 나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말했다.

“6일입니다.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기간이 짧은 만큼 최근에는 선물이 간편해졌다.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보석 세트를 보여 주자 그녀는 감탄했으나 이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의상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꼭 부탁드려요. 피트먼 씨와 좀 더 알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항상 하는 소리일 뿐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겉으로는 네, 하고 웃어 보였다.

*

*

후우.

운전석에 앉아 차의 문을 잠근 뒤 나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아직도 가끔씩 차에 타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온몸이 굳어질 때가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색되면서 숨조차 쉬기 힘든 공포가 전신을 짓누르는 끔찍한 감각.

두려운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때 느꼈던 공포는 다시 그것이 찾아온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나는 황급히 약을 찾아 먹었다. 뒤늦게 최근 이런저런 약을 먹는 횟수가 너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줄이는 건 내일부터 하자.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10분 정도는 쉬었다 가도 될 것이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곧 점심시간이니 한 시간 정도 더해서 쉬어도 돼…….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어느새 나는 선잠에 빠졌다. 그래서 갑자기 사고가 났을 때는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쾅! 하고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온몸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머리를 차의 어딘가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악!”

비명을 지르고 나서도 무슨 상황인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룸미러를 보자 급하게 사라지는 차의 꽁무니가 보였다. 나는 그제야 누군가 내 차를 박고 달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고 상황이 어떤지 살펴봐야 했지만 도저히 내릴 용기가 없었다.

하필이면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은커녕 차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나중에 블랙박스를 확인해 보자. 보험 회사에 전화를 하고…….

“후우.”

깊은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한 후에야 비로소 차에서 내렸다. 차의 뒤가 움푹 꺼져 있었지만 운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봤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일단은 회사에 가야 돼.

시간을 보니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도착할 것 같았다. 뒤를 박고 간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야.”

운전석에 다시 앉고 나니 뒤늦게 이마 한쪽이 욱신거렸다. 룸미러로 얼굴을 확인한 나는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는 부위를 확인했다.

“하아.”

운도 없지. 나는 생각하며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렀다. 다쳤다는 걸 알고 나자 뒤늦게 통증과 현기증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 걸 보면 내 공포증도 그냥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한가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병원을 들를 시간은 없었다. 대충 누르고 있으면 피가 멈출 것이다. 나중에 세수 정도만 하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키이스는 팔에 실을 풀었던가……?

차를 출발시키며 문득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찰스가 알아서 한다고 했었지. 그 뒤의 일도 기억해 냈지만 일단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내 일이니까.

*

*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오는 동안 피는 멎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상처가 난 부위를 대충 머리칼로 가렸다. 다행히 꿰매거나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적당히 마무리를 하고 나자 점심시간이 끝난 것은 물론이고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오늘 키이스의 점심 약속이 뭐였더라.

사무실로 향하며 생각했던 나는 곧 깨달았다. 취소했었지.

“하아.”

저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키이스가 늦게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노크를 한 뒤 조금 시간을 들였다 문을 열자 역시나 그는 담배를 피우며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선뜻 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거리를 두고 멈춰 서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나시던 분과는 정리를 끝냈습니다. 다음 분을 찾아볼까요?”

문득 나는 아침에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취향을 알려 주시면 남자 쪽도 알아보겠습니다.”

키이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재빨리 말을 고쳤다.

“생각 없으시다면 기존에 했던 방식대로 하고요.”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갑자기 그가 몸을 움직였다.

“……?”

키이스는 불시에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끌려갔다. 가까스로 그의 품에 쓰러지는 것을 면한 내가 급히 고개를 들자 곧바로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먼저 그가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건.”

키이스가 짚은 것은 내 와이셔츠 옷깃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는 계속해서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피야? 어떻게 된 거야?”

아,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옷깃에 묻은 걸 미처 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백했다.

“사고가 나서…… 괜찮습니다, 많이 다치진 않았습니다.”

“사고라니, 무슨 사고?”

키이스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자세히 말할 이유도 없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지만 이대로는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짧은 한숨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차에 앉아 있었는데 뒤에서 박는 바람에……. 그냥 운전석에 앉아 있었을 뿐이라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더니 모서리 어디에 부딪쳤습니다. 크게 다친 건 아니고 조금…….”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내 얼굴을 잡고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가 급기야 내 머리칼을 들추고 애써 감춘 상처를 찾아냈다. 곧바로 키이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무안해져 머리칼을 내리려 했다. 그때였다. 키이스에게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화가 난 것이다.

“누구야?”

키이스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누가 이러고 갔어?”

나는 당황하는 한편 의아해졌다. 왜 화를 내지? 다친 건 난데.

키이스가 화를 내는 상황이 이해가 안 갔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페로몬이었다. 억누르고 있던 페로몬이 흘러나오자 효과는 배가됐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달콤한 향이 호흡과 함께 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성적인 흥분과 함께 두려움이 올라왔다. 내게 페로몬을 쏟아붓고 올라탔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음은 삽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나는 본능적인 공포를 억누르려 애써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난 다 나았어.

뒤이어 냉정한 현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이제 이 남자는 더 이상 날 도와줄 수 없어.

……이 남자도 역시 다르지 않으니까.

“놔, 놔요!”

나는 간신히 말했다. 혐오감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페로몬…… 때문에, 괴롭습니다. 페로몬을 없애든가, 놓아주든가, 아니, 나한테, 손대지 마!”

점차 소리가 높아져 급기야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숨을 헐떡이며 이를 악물자 키이스가 주춤했다. 삽시간에 향이 줄어들었다. 호흡을 하기가 한결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를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다친 건 여기뿐이야?”

키이스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됐다. 나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네.”

그는 거듭해서 내 상처를 살펴보았다.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팔의 상처는, 실은 뽑으셨습니까? 병원에 가실 날짜가 지났는데요.”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내질렀던 키이스가 또다시 멈칫했다.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일이라고 생각해서.”

“망할.”

키이스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동안 내 상처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다친 건 난데 왜 이 남자가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걸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병원에 가.”

“네?”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키이스는 여전히 내 팔을 붙잡은 채로 명령했다.

“지금 바로 휘태커와 병원에 가라고. 진찰을 받고…… 차는 어떻게 했어?”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뒤가 좀 망가진 정도라서…… 운전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

말을 하는 도중에 키이스는 남은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단축 번호를 누르자 곧이어 휘태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우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 ……블랙박스는?”

키이스가 시선을 돌려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직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연우 차에 블랙박스 확인해 보고 뺑소니친 자식 찾을 수 있으면 찾아내. 그리고 치료가 끝나면 연우를 집까지 바래다줘.”

뜻밖의 말을 한 그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차는 내버려 두고 새로 사.”

“아직 할부가 남았…….”

“사라고.”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휘태커와 같이 가서 차를 사. 결제는 내 앞으로 하고.”

언제나처럼 그는 인심이 후했다. 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싫습니다.”

“어째서?”

키이스는 그야말로 나를 때릴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용케 페로몬만큼은 자제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냉정하게 지적했다.

“전 이제 피트먼 씨와 섹스를 하지도 않는데 왜 선물을 받아야 합니까?”

“그건…….”

키이스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그가 당황한 듯 잠시 굳어지는 모습을 생경하게 지켜보았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내뱉었다.

“넌 내 비서니까.”

그리고 키이스는 곧바로 덧붙였다.

“출근에 늦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닥치고 받아.”

택시를 타면 된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사실 아직 거기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남자가 선심을 쓰는 이유는 언제나 명확한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싫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내게 키이스가 말했다.

“복지야.”

“…….”

“이건 사원에게 주는 혜택일 뿐이라고, 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억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나는 흔들렸다. 합리화를 할 방법은 많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가 고쳐질 때까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지만 나는 감사의 말을 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들어도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너무나 형식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팔을 잡았던 손의 힘이 약해졌을 뿐이다. 나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병원에 가.”

나가려는 내게 키이스는 다시 명령했다. 나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사무실을 벗어났다.

탁.

등 뒤로 문을 닫고 나는 잠시 기대서 있었다. 저 남자는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내게 다정한 걸까. 그냥 아예 무시해 준다면 좋겠는데.

다시는 그런 착각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켜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남자가 내게 했던 짓은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 * *

“이야, 연우. 차가 아주 화려하게 망가졌던데요. 어떻게 여기까지 운전해서 온 겁니까?”

넉살 좋게 웃는 휘태커의 얼굴에 나는 그제야 쓴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뒤가 망가진 거라 운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주 양심 없는 녀석이던데요. 블랙박스는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갔다가 차를 보러 가면 되는 거죠?”

휘태커는 선뜻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그가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피트먼 씨의 차도 알아봐야 하거든요. 연우가 한꺼번에 결제를 해 주면 되겠군요.”

“피트먼 씨의 차를요?”

뜻밖의 말에 나는 되물었다. 휘태커는 정면을 응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요즘 차가 자주 고장 나서요. 이번에 두 대 정도 새로 구입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장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혹시…….”

지난번 키이스가 당했던 테러를 떠올리고 나는 그만 굳어졌다. 그러자 휘태커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급히 한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페로몬 때문에 이상을 일으키는 것뿐이에요. 이상하죠, 지금까지 피트먼 씨는 페로몬이 쌓인 적이 별로 없는데. 거기다 데이트도 전처럼 하고 계신데 왜 이렇게 페로몬이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나마 저희가 영향을 적게 받아서 다행이지…….”

할 말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던 휘태커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아예 무관한 건 아닌데 말이죠. 혹시나 변이를 해 버리면 큰일이라 다들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대부분 안심해도 된다던데 우린 영향을 거의 안 받는 대신 평생에 걸쳐 가능성이 열려 있으니 좀 곤란해요.”

감마에겐 감마로서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뒤늦게 예상치 못했던 변이를 했던 입장이니 나만큼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더해서 감마는 변이를 하게 되면 생명이 위험했다. 베타에서 오메가로 변이하는 것 정도는 이들에 비하면 그냥 안타까운 해프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겠군요. 피트먼 씨에게서 그렇게 페로몬이 많이 나옵니까? 사무실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던데요…….”

“그래요? 그럼 연우를 생각해서 자제하고 있는 모양이죠. 연우는 오메가니까, 뭐, 이해합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신이여,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측이란 말입니까.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에 힘을 줘 누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게 휘태커가 말을 이었다.

“향이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는데 수시로 차가 멈추더라고요. 알고 봤더니 피트먼 씨 페로몬이 쌓여서 스스로 제지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하게 흘러나오는 모양이에요. 저런 식이면 조만간 러트가 와 버릴 거라고 찰스가 걱정하더군요.”

“상대는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나는 썩 자신감 없는 말투로 지적했다. 휘태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죠. ……뭐, 전보다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긴 했습니다.”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휘태커는 무심히 덧붙였다.

“전엔 두세 시간 정도 소요하고 귀가하셨는데 요즘은 길어야 30분이에요. 실제로 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휘태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서 뇌가 망가질까 봐 저도 걱정입니다. 피트먼 씨 정도로 매너 있는 극알파들은 찾기 어려운데 말이죠.”

그는 대체로 무심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반대로 해야 할 얘기를 안 한다거나 주의해야 하는 일을 안 알려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도 많았지만 수시로 폭행이나 욕설을 퍼붓기 일쑤인 극알파들을 경호하는 입장에서 키이스는 ‘아주 괜찮은’ 고용주였다.

거기다 인심도 아주 후했다. 연봉은 물론이고 보너스에, 수당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대부분 극알파들은 어마어마한 부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비를 깎으려 한다거나 흥정을 하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들을 경호한다고 해서 무조건 높은 수입이 보장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측면에서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을 경호하는 것은 아주 선호할 만했다. 한데 휘태커가 이런 식으로 우려하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예민한 녀석은 페로몬 향기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향이 넘친다고 하더군요. 위험할 것 같아서 일단 급히 휴가를 줬습니다. 당분간은 돌아가며 자리를 비우기로 했어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만큼 좋겠습니까…….”

탄식 같은 휘태커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병원에서는 간단히 소독을 해 준 게 전부였다. 수선을 피운 것 같아서 나는 무안해졌다.

“그러니까 안 가도 된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뭐든 확실한 게 좋죠. 사소한 상처로 죽는 사람도 많아요. 전에 제가 알던 녀석은…….”

휘태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크게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행선지였다.

키이스가 주로 차를 구입하는 매장에 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방문을 하자마자 얼굴을 알아본 매니저가 나와 직접 환대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피트먼 씨에게서 미리 연락은 받았습니다. 다만 출고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대신 그동안 타실 차를 임시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주문하신 차와 같은 종입니다. 정식으로 출고될 때까지 쓰시면 조작에도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차는 키이스가 소유하고 있는 차와 같은 종류였다. 나는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이건 피트먼 씨의 차고…… 제 차는 다른 것을.”

설마 하고 물은 말에 그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쪽이 맞습니다. 같은 차로 두 대, 따로 한 대를 주문하셨습니다. 옵션도 모두 동일합니다.”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또다시 우아한 세단으로 고개를 돌린 내게 매니저가 계속해서 말했다.

“색상은 원하시는 대로 주문하시면 됩니다. 한번 시승해 보시겠습니까? 혹시 더 추가하실 사항이나 변경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제작에 들어갈 테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는 변경이 가능합니다. 제 번호는 알고 계실 테니 따로 연락 주셔도 됩니다.”

매니저는 막힘없이 술술 얘기를 했다.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은 나뿐이었다. 휘태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니저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고, 색깔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피트먼 씨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으셨으니 제 취향으로 골라 봤습니다. 이런 거로라도 기분을 내보는 거죠, 제 차인 것처럼.”

그는 껄껄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 앞에는 맹수의 이름을 딴 세단이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 * *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다. 흔치 않게 비가 올 모양이었다. 그냥 먹구름만 끼다 말 때도 많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오히려 산불이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종종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곤 했다. 오늘도 역시 산불에 대한 보도를 들으며 출근을 한 나는 익숙지 않은 고급 차에 난감해하며 몇 배나 신경을 써서 주차를 했다.

“연우, 좋은 아침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엠마가 말을 걸었다. 나는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이제 출근했습니까? 오면서 보니까 또 산불이 났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수시로 불이 나서 큰일이에요. 비가 올 때도 됐는데.”

벌써 몇 년째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뭔가 기묘한 공기와 함께 희미하게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키이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놀란 엠마를 뒤로하고 나는 무뚝뚝하게 형식적인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피트먼 씨.”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시선은 엠마에게로 향해 있었다. 휘태커를 비롯해 그의 뒤로 줄을 지어 서 있던 경호원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그런데도 키이스는 드넓은 홀에 똑바로 서서 엠마만 바라봤다. 표정이 없는 얼굴은 마치 가면 같아서 섬뜩한 기분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다.

“엠마, 저쪽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겠습니까? 전 피트먼 씨와 함께 사무실에 갔다가 내려가겠습니다.”

일부러 모르는 척 가이드를 주자 그녀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그럼 피트먼 씨, 휘태커 씨.”

번갈아 인사를 한 엠마가 급히 다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키이스를 돌아봤다.

“일찍 오셨군요. 오늘 산불이 났던데 기사 보셨습니까?”

일부러 불필요한 화제를 꺼내 주의를 환기하자 엠마의 뒷모습으로 이어지던 키이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표정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아주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인은 몰랐지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지나쳐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휘태커가 먼저 버튼을 누르고, 곧 문이 열렸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핑계를 댄다는 건 달아나는 것 같아 그 또한 내키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휘태커를 비롯한 경호원들은 로비에 남았다. 문이 닫히자 나는 키이스와 단둘이 남아 버렸다.

넓은 엘리베이터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좁게 느껴졌다. 일부러 숨을 죽이려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페로몬 향기가 없어졌다. 키이스가 의식적으로 향을 없앤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볼 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굳이 그런 걸 물어봐서 어쩌자는 거지? 보나 마나 그냥 변덕일 게 분명한데.

고속 엘리베이터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빠르게 변하는 숫자를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내 앞에 서 있는 키이스의 모습이 엘리베이터의 문에 비쳐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멈칫했지만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키이스 또한 굳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지만 안의 공기는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버거웠다. 급하게 할 말을 찾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으흠, 차 감사합니다. ……잘 쓰고 있습니다. 수리가 끝나는 대로, 반납하겠습니다.”

자꾸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는 간신히 말을 끝맺었다. 어서 빨리 내리고 싶다.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키이스는 흘긋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계속 써. 어차피 남아돌아.”

물론 그럴 것이다. 그의 집에서 봤던 거대한 차고와 수없이 많은 컬렉션을 떠올려 보면 내게 준 재규어 한 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키이스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목적은 항상 똑같았다. 이번만큼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불쾌할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키이스가 무슨 말을 하든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정면을 본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했다. 불현듯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와는, 같이 왔어?”

의미를 알아내는 데는 잠깐 시간이 필요했다. 곧 엠마를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또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평소처럼 매끄럽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뇨,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습니다만.”

말을 하고 나서 나는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엠마와 같이 차를 타고 왔느냐는 물음이었을까?

키이스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나를 직접적으로 응시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엠마와 같이 출근했냐는 의미라면, 아닙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저와 방향이 반대라서 차로 30분 이상…….”

말하다 보니 괜히 덧붙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키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까 내심 불안해하며 기다렸다.

잠시 동안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키이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저…….”

참다못해 막 말문을 열었을 때 엘리베이터의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키이스는 그대로 복도로 나가 버렸다. 나는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에는 그의 발소리와 뒤섞인 내 발소리만이 적막하게 메아리쳤다. 가끔 회사 복도에 음악이 흐른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지금이 딱 그럴 타이밍이었다. 당연한 침묵임에도 나는 버거움을 느꼈다. 키이스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그때였다.

“……?”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한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따라 멈춰 섰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키이스는 그대로 선 채 미동조차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피트먼 씨. 무슨…….”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키이스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

뜻밖에도 키이스는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뭔가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문득 불안해져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고 짧게 흔들었다.

“피트먼 씨, 무슨 일입니까? 피트먼 씨!”

재차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조급해진 나는 그만 소리치고 말았다.

“키이스!”

갑자기 그가 눈을 깜박였다. 불시에 키이스는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잠시 동안 키이스는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더 놀라웠다. 키이스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불과 몇 분이었지만 그는 기억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잠시 동안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키이스가 순간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트먼 씨, 정신이 드십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완전히 의식이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휘태커에게.”

그는 말했다. 평소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오늘 파티에 가겠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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