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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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던 나는 움칠 놀라 동작을 멈췄다. 흔치 않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창밖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창에 비치는 것은 내 창백한 얼굴뿐이었다. 희미하게 그어지는 비가 보이는 듯도 했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입으로 후, 불며 걸음을 옮겼다.

퇴근을 해 집에 오자 그제야 휴식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키이스의 저택을 나오고 나서는 매일이 전쟁 같았다. 집 밖으로 나갈 때부터 들어올 때까지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뒤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튜어드가 준 약을 먹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도 전보다는 훨씬 안정을 찾은 기분이었다.

키이스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나자 안정을 찾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토록 질질 끌었던 마음이 이렇게 혹독한 경험을 하고 나서야 정리가 된 걸 보면 역시 사람은 매운 교훈이 있어야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약을 완전히 끊어도 될 것이다. 간절히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머그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 전화를 찾아 다음 진료 날짜가 언젠지 확인했다.

내일쯤이면 비가 그치겠지.

낮에 산불이 났던 걸 떠올리며 나는 반쯤 남은 커피를 비우고 대충 컵을 씻어 뒤집어 놓았다. 비가 와서일까, 공기가 차가웠다. 조금 두툼한 이불을 꺼내 어깨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 곯아떨어졌다.

*

*

갑자기 잠에서 깬 것은 난폭하게 두드려 대는 문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다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누구지?

당황해 시계를 보자 벌써 자정이 넘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난폭한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 급하게 방을 나왔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두려움이 일어났다. 이곳에는 나를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만약에 괴한이라도 들어온다면.

총을 사 두지 않은 것이 처음으로 후회가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이라면 범죄자는 아닐 거라는 냉정한 판단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과는 반대로 감정은 여전히 불길한 상상을 일깨웠다.

“누, 누구…….”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렌즈로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키이스?”

당황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잠깐 멈춘 것 같던 그가 또다시 문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도어록을 풀었다. 세 개의 자물쇠와 걸쇠를 푸는 동안 그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마침내 현관문을 열었을 때, 하마터면 나는 그에게 맞을 뻔했다. 문을 때리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주춤했다. 키이스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는 흠뻑 젖어 있었다.

어째서?

뒤늦게 아직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넋을 잃고 나를 내려다봤다. 희미하게 입술을 떨고 있었다. 추운 모양이었다. 나는 길게 생각할 틈도 없이 서둘러 그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이스를 들여놓고 황급히 현관문을 닫았다. 대체 이런 시간에 여길 왜 온 걸까.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피트먼 씨…….”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섰다. 혹시 휘태커가 뒤따라올 수도 있으니 일단 자물쇠는 채우지 않았다. 키이스는 곧 돌아갈 테니 괜찮겠지,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키이스가 나를 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켰다. 순간 환하게 밖을 밝히는 번개에 그의 창백한 얼굴이 깊은 명암을 드러냈다.

“……?”

다짜고짜 키이스가 나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어찌할 틈도 없이 곧바로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순간 사방을 환하게 밝히는 빛에 이어 요란한 천둥소리가 진동했다.

흠뻑 젖은 남자의 몸이 내 몸에 맞닿았다. 나는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키이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내게 바짝 달라붙었다. 연이어 그가 입술을 문지르고 키스를 하려 했다. 나는 안간힘을 써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했다. 비에 젖은 차가운 입술이 내 뺨을 스쳐 아래로 내려가 목을 문질렀다.

“키이스, 무슨…… 그만둬요! 그만두라고!”

나는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문과 키이스 사이에 꽉 끼여 아무 의미 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제발, 왜 이러는 겁니까! 그만두란 말이에요, 그만……. 아아…….”

나는 탄식했다. 대체 이 남자가 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린 전부 끝난 게 아니었나? 키이스도 납득한 게 아니었어? 상대를 그렇게나 바꿨잖아, 나한테 명령해서. 그래 놓고 왜, 이제 와서.

불쑥 눈가가 뜨거워졌다. 역시나 이 남자는 나를 그저 섹스 상대로 생각할 뿐이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나를 안고, 욕구가 충족되기만 하면 다시 나를 버리겠지. 내 의사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지금도 이렇게나 집 안 가득히 페로몬을 쏟아 내고 있지 않은가.

싫다고, 말했는데도.

처음 현관문을 열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전신으로 향기를 흘려 내고 있었다. 이미 나는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이 남자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던 것조차 희미해졌다. 키스가 계속되고 입술이 겹쳐질 때마다 머릿속은 점차 하얗게 비어 갔다.

다시는 이 남자와 자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아직 내게는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억지로 힘을 줘 키이스를 밀어냈다. 간신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실로 달아나려 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구르고, 그 역시 나를 안은 채로 넘어졌다.

“놔, 놓으라고! 놓으란 말이야!”

나는 있는 힘껏 반항했다. 그의 어깨를 때리고 얼굴을 할퀴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을 더듬고 입술을 문지르고 페로몬을 쏟아 냈다.

어째서 이 향기는 이토록 달콤하기만 할까.

정신이 멍해졌다. 앞서 경험했던 대로 나는 결과를 알고 있었다. 나는 지고 말 것이다. 이미 결정 난 패배에 눈물이 났다. 반항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래도 애써 주먹을 쥐어 키이스를 때렸으나 어설프게 투덕거리는 소리만 날 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키이스는 보란 듯이 내게 키스하고 혀를 섞었다. 목을 깨물고 아래를 문질렀다. 어마어마한 페로몬이 계속해서 숨을 쉴 때마다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어렴풋이 나는 눈치챘다. 처음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에 이미 이 남자는 이성이 사라져 버린 거라고. 이 넘치는 페로몬도, 금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도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휘태커가 했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러트가 온 것이다.

결국 나는 항복해 버렸다. 이게 현실이다. 내가 오메가인 이상 이 빌어먹을 페로몬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자포자기해 사지를 늘어뜨리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키이스는 선뜻 내 파자마를 벗기고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흐느낌이 흘러나와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서늘한 체온이 뺨에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키이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을 냈다.

“연우.”

속삭이듯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계속해서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왜 울어?”

순간 눈물이 넘쳐흘러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키이스는 내 손등에 키스하며 중얼거렸다.

“울지 마.”

나는 소리 내어 오열했다.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나 괴로운데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으, 흐으으, 흐으…….”

나는 울며 키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이스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묵직한 압박감이 오랜만에 내 숨통을 막았다. 나는 온몸이 굳어지는 감각에 한껏 입을 벌려 숨을 들이켰다. 키이스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내게 키스했다. 키스 사이마다 그는 속삭였다.

연우.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이토록 달콤하게, 이토록 애달프게 내 이름이 내 귀를 어지럽힐 날이 또 있을까.

그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얽으면서 나는 절망했다. 평생 나는 혼자일 것이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겠지. 설령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내 영혼이 다시 충만할 날이 올까.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바로 그날처럼.

그런 건 결코 있을 수 없어.

그 순간 나는 이 남자가 죽도록 증오스러워졌다.

콰직, 하고 입 안에서 살이 씹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꽃향기가 입 안 가득히 흘러들어 왔다. 내 안에 들어왔던 남자가 굳어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의 귓바퀴를 사납게 물어뜯었다. 달콤한 피가 죽도록 단 향과 함께 스며들었다. 나는 탐욕스럽게 소리 내어 그것을 빨아들였다.

“아……!”

불시에 배 속이 타는 듯이 아파졌다. 키이스와 수없이 많은 섹스를 했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키이스의 성기가 부풀어 올라 내 배 속을 꽉 채웠다. 그 상태로 그는 안을 쑤시며 들이박았다. 그가 드나들 때마다 나는 고통에 찬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아래가 찢어질 것 같았다. 키이스의 성기가 이 정도로 나를 아프게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았다.

키이스는 그 상태로 성기 끝을 부풀린 채 몇 번이고 내 안을 들쑤셨다. 마치 배 속을 짓이기는 것처럼 박아 댔다. 나는 공포와 통증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통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이것은 더 이상 섹스가 아니었다. 그저 나를 정복하고 약탈하려는 행위에 불과했다. 이 남자는 내 모든 걸 소유하려는 것이다. 전부를 가져가 껍질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무서워.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때, 키이스가 악문 잇새로 깊은 신음을 내지르며 내 안 깊숙이 뿌리까지 처박고 사정했다.

흘러들어 오는 체액은 지금까지와는 양도 뜨거움도 모든 게 달랐다. 마치 배 속을 전부 불태울 것처럼 화끈거리며 들어오는 정액은 그러나 아래가 꽉 막혀 조금도 밖으로 흐르지 못했다. 키이스는 연달아 신음하며 내 안에 한참을 쏟아 냈다. 사정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그렇게 키이스는 내 안에 머물렀다. 덕분에 내 배 속에 그의 정액이 모두 흡수될 때까지 나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키이스의 눈동자는 금색이었고, 페로몬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내 아래를 꽉 막은 페니스의 두께도 그대로였다.

그 상태로 그는 다시 몸을 쳐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이 새도록 키이스는 한 번도 성기를 빼지 않고 몇 번이고 내 안에 사정했다. 신기하게도 체액도 정액도 전혀 흐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 안에 쏟아부었다.

간신히 키이스가 멈췄을 때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부옇게 해가 올라왔다. 나는 여명에 비친 키이스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그의 귀가 스쳤다. 명확하게 남겨져 있는 표식은 바로 내가 남긴 것이었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속삭였다.

“내 알파.”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겹치며 나는 눈을 감았다. 키스는 달콤하고 또 달콤했다. 몇 번이나 혀를 섞고 입술을 빨아들이고 다시 겹쳤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사랑스러운 듯이 그렇게 애태우며 키스했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러나 알고 있다. 이 남자는 또다시 나를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에게 표식을 남겼다. 그것은 내게 악의에 찬 만족감을 줬다. 그 순간만큼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키이스는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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