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77)

30

“으응…….”

나는 가는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시야는 흐릿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누운 채 멍하니 기억을 되새겼다.

키이스?

뒤늦게 정신이 들어 황급히 몸을 일으켰던 나는 비명과 함께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배 속이 죽을 듯이 아파 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밤새 거친 섹스를 나눈 후 아랫도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모아지지 않는 일은 많았지만 이렇게 배 안쪽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건 처음이었다. 뒤늦게 나는 키이스가 지난밤 내게 했던 행위가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히 지금까지 했던 섹스와는 달랐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렸다. 밤새 내렸던 비가 아직도 내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흡!”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던 나는 숨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너무 아파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배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아프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하아, 하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예상했던 대로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의 통증이 아니었다면 전날의 일은 꿈이었다고 믿을 만큼 그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자물쇠조차 채워져 있지 않은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급해서 그렇게 서둘러 가 버렸을까.

뒤늦게 나는 내가 한 짓을 기억해 냈다. 조금씩 현실감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에게 표식을 남겼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 나는 그만 숨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내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무릎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크게 몸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또다시 배 속이 아파졌지만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통증으로 현실을 아예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달아나야 돼.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키이스가 표식을 발견하면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 몸을 숨겨야 한다.

어디로?

생각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일어서려다 비명과 함께 다시 무너졌다. 간신히 기다시피 몸을 움직여 안간힘을 써 짐을 쌌다. 여권, 여권이 어디 있지. 고통과 공포에 질려 눈물까지 고였을 때, 갑작스러운 휴대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힉……!”

나는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벨 소리는 계속됐다. 평소 마음을 편하게 하던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괴기스럽게 들렸다. 나는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벨은 한참 동안 울리다 끊어졌다.

하지만 안도할 틈도 없었다. 곧이어 다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결국 나는 주춤주춤 휴대 전화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간신히 전화를 받기까지 벨 소리는 두어 번 정도 더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여, 여보세요.”

갈라지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자 건너편에서 안도한 음성이 들려왔다.

[연우? 어떻게 된 겁니까?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습니다.]

“찰스.”

누군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늦잠을…… 잤나 보네요. 무슨 일입니까? 지금, 몇 시…….”

[아, 괜찮습니다. 오늘 출근은 늦어도 될 겁니다.]

찰스가 내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실은 지난밤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연우도 알다시피 피트먼 씨가 파티에 가시기로 했는데 도중에 갑자기 차가 고장 났답니다. 수리하느라 다들 내리고 피트먼 씨는 그나마 멀쩡한 차로 이동하기로 해서 조를 나눴는데, 최근 인원이 좀 줄어서 말이죠……. 경호에 차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피트먼 씨가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찾느라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런데 오늘 새벽에 저택 근처에서 엉망이 되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밤새 어디서 뭘 하다 오신 건지 비에 흠뻑 젖으셔서…….]

찰스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럼 어제 키이스는 걸어서 내 집까지 왔다는 건가? 다시 걸어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전날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와 섹스를 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쓰러져 있었다고요?”

네, 하고 찰스가 말을 이었다.

[일단 모셔 와서 씻겨 드렸더니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최근 페로몬을 제대로 빼내지 못했다는데 아마 그게 쌓여서 갑작스럽게 러트가 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닌데 말이죠……. 아무튼 그래서 앞으로 하루나 이틀은 의식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무심코 숨을 죽였다. 아무 말 없는 내 반응을 오해한 찰스가 말했다.

[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저도 그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두 번 정도 깨어나 눈을 뜨셨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으시더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시고 다시 잠드셨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묘한 침묵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런데, 하고 찰스가 입을 열었다.

[기억 장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

[확실한 건 완전히 깨어나셔야 알겠지만 행방이 묘연했던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이 전혀 없으십니다. 의사의 말로는 아마 깨어난 뒤에도 기억해 낼 확률이 아주 낮다고 하더군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스는 멋대로 결론을 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을 했는데 하여튼 별일 없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있으니 참고하라고 전화했습니다.]

“……네.”

나는 꽉 막힌 목구멍을 억지로 비집어 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통화를 끝냈다.

후우.

깊은 한숨 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나는 고즈넉한 방 한구석에 앉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기억이 없다고?

초조함에 손톱을 지근거렸다.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서둘러 달아날 필요는 없다. 주변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주시할 여유도 생긴 것이다.

<별일 없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찰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별일 없는 건 아니지.

나는 악의에 차 내심 덧붙였다. 아직 표식은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귀를 자세히 볼 생각 따위는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키이스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유예 기간을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만일에 대한 대비는 해 놔야 한다. 찰스에게 종종 상황을 확인하는 한편 언제든 행적을 감출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자.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집 안을 돌아다녔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해야 한다. 태블릿을 가지러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결국 나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꼬박 앓기만 했다. 그리고 키이스는 만 하루가 지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 * *

평소와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한 나는 직접 간 커피를 내려 물을 따랐다. 그윽한 향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흘긋 벽의 시계를 보자 점차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키이스는 오늘도 예전과 똑같은 시간에 나타날 것이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아차.”

손이 떨리는 바람에 그만 바닥에 커피를 약간 쏟고 말았다. 다행히 옷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나는 카펫의 얼룩을 티슈로 대충 닦아 내고 허리를 폈다. 문득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최대한 무심한 척 표정을 신경 쓰며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봤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틀 전 불같은 섹스를 나눴던 상대였다.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려던 것을 참고 여느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피트먼 씨, 뭔가 문제라도?”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았다.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써 무표정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은 나를 내려다본 키이스가 입가를 일그러뜨려 짧게 웃었다.

“아아, 어마어마한 문제가 생겼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한쪽 귀를 잡아당기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간 큰 새끼가 나한테 표식을 남겼어.”

나도 모르게 ‘미안합니다’라고 소리치며 엎드릴 뻔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저런”이라는 짧은 탄식을 흘린 것이 전부였다.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키이스는 험악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런? 고작 그게 전부야? 저런?”

급기야 키이스는 펄펄 뛰며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가 감히 저 오만한 남자에게 허락도 없이 표식을 남긴단 말인가. 저토록 당당하게.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애써 꾸며 낸 차분한 음성에 세게 벽을 쳤던 키이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그걸 안다면 지금 여기서 저러고 있지 않겠지. 나는 두려운 한편 조금은 안심했다.

나라는 걸 알면 이 남자는 얼마나 황당할까.

문득 나는 신경질적인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남긴 표식은 너무나 확실히 그의 귀에 남아 있었다. 평생 사라지지 않을 소유의 흔적. 저것은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키이스는 앞으로 절대 나 아닌 누구에게서도 아이를 갖지 못한다. 다른 오메가의 향조차도 맡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향기 이외에는.

악의에 찬 만족감을 감추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몸에 과감히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사라져 버린 범인이 누구인가.

키이스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 하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내게 한차례 분노의 허리케인을 쏟아 냈던 키이스가 후우,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휘태커를 불러.”

키이스가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개인 경호원 팀장의 이름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분을 찾으려고요?”

“아니.”

안심하기도 전에 키이스가 덧붙였다.

“죽일 거야.”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싱긋 웃는 그의 달콤한 킬링 스마일이 그 순간 내게는 사형선고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동시에 내 안에서 솟아오르던 악랄한 희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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