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77)

31

“우욱.”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목 안으로 넘어오는 신물을 간신히 삼켰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몸이 좋지 않았다. 자꾸만 속이 뒤집어져서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물이나 음료 등을 마시며 버텼지만 어쩔 땐 그나마도 역겨워 토해 내곤 했다.

“몸이 그렇게 안 좋아서 어떡해요.”

엠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는 기운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말을 한다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아마도 계속된 긴장 상태에 몸이 망가진 모양이었다. 종일 회사에 있다 보면 키이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나를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다.

키이스는 그날 이후로 줄곧 범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봐야 나오는 게 없었다. 당일 키이스의 행적 자체가 오리무중이었고, 그날 비가 왔던 탓에 더더욱 흔적을 찾는 게 어려웠던 것이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기로 유명한 일대에 어째서 하필 그날 비가 왔는지, 그리고 왜 하필 그날 키이스에게 러트가 와서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았는지 악재가 겹쳤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내게는 호재였지만.

표식이 새겨진 후로 키이스는 더 이상 상대를 찾지 않았다. 이제 그는 즐기지도 않는 섹스를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표식이 있으니까.

표식을 새긴 상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면 더 좋다고 하지만 그저 표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페로몬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반려를 찾아 불특정한 사람들 사이를 헤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는 로맨틱한 말을 누군가는 했었다.

지금은 그저 헛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페로몬이 안정된다는 건 사실인지 키이스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는데도 페로몬이 쌓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휘태커는 더 이상 차가 고장 나거나 향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며 기뻐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이제 키이스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는 누구도 유혹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망할 페로몬으로는.

그의 전부는 완벽하게 내 것이 되었다.

키이스에게 표식이 남은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게 말이 돼?”

키이스는 여느 때처럼 분통을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정해진 답변을 했다.

“비가 와서 흔적이 다 지워졌고, 당일 의식을 잃고 있던 피트먼 씨를 찰스가 모셔 가 몸을 씻긴 데다가 젖고 더러워진 옷은 그대로 전부 폐기 처분되었으니까요.”

키이스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그를 분노케 했다. 그 사실과는 별개로 키이스는 예전보다 한결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았다. 문제는 나였다.

키이스가 화를 내는 동안 묵묵히 서서 끝나기를 기다리던 나는 문득 눈앞이 까맣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먼저 이상을 눈치챈 것은 키이스였다. 순간 무릎이 꺾일 뻔했던 나는 급히 책상을 돌아 나오는 그를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만지지 마십시오.”

순간 키이스는 멈칫했다.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책상을 짚고 서서 잠시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후우, 간신히 한숨을 내쉬고 몸을 추스르자 그때까지 지켜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 가 보지 그래?”

“괜찮습니다. 그냥 좀 피곤할 뿐입니다.”

나는 같은 말로 거절한 후 화제를 돌렸다. 키이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를 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시하실 사항이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겠습니다.”

그럼, 하고 돌아서려는데 키이스가 불쑥 내뱉었다.

“그만 퇴근해.”

“네?”

뜻밖의 말에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키이스는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가라고, 집에 가서 쉬어. 힘없이 비틀거리는 것도 보기 싫으니까.”

“괜찮…….”

“내가 안 괜찮아. 말 좀 들어, 망할!”

키이스가 갑자기 책상을 쾅, 내리치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움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키이스가 나를 노려보는 바람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오는 내 뒤로 그는 경고처럼 내뱉었다.

“10분 후에 네가 퇴근을 했는지 확인할 거야. 그때 내 눈에 띄면 각오해.”

기가 막혀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네,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 *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나왔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다. 한가로이 공원을 걸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이 좋지 않은 데다 거기까지는 내키지 않았다. 나는 차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다 문득 오늘이 스튜어드와 상담을 하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병원에는 휴게실이 있어서 조금 이르게 가더라도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다. 나는 주저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

*

“연우, 어서 오세요. 오늘은 이르네요.”

접수계의 직원이 알은체를 했다. 나는 짧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좀 일찍 끝나서 먼저 왔습니다. 진료는 앞당길 수 없는 거겠죠?”

이미 대답을 예상하고 묻는 말에 그녀는 오, 하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먼저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요. 그분의 상담이 끝나고 나면 가능할 거예요. 대충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원래 예약했던 시간보다 빨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휴게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직원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미 수차례 방문한 터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는 굳이 앞서서 걸어갔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순간 익숙한 단내를 맡고 멈칫했다. 그를 발견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먼저 휴게실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는 홍차의 티백을 찻잔에 넣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로 멈춰 선 내게 그가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야,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근무지 이탈이라니 연우가 이런 대범한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밀러 씨.”

나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레이슨에게 인사를 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갑자기 숨이 꽉 막혔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배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심호흡을 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단내에 더욱 숨이 가빠졌다. 그런 나를 본 그레이슨이 뜻밖에도 페로몬을 감췄다. 나는 한결 줄어든 향내에 안도하면서도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또 나를 두고 달아나 버리면 너무 서운하잖아.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라고.”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는 무뚝뚝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읊조렸다. 그레이슨은 바에 기대어 선 채 한쪽 소파를 가리켰다.

“앉지 그래? 난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여전히 주춤거리는 내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굳이 내가 널 여기서 어떻게 할 이유가 없잖아, 그 정도로 궁하진 않아.”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무안해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인심 쓰듯 내 사과를 받아들인 그레이슨은 내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차를 줄까? 아니면 커피?”

“제가 하겠습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그만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레이슨은 놀란 듯 물었다.

“괜찮아?”

“아, 네…… 요즘 좀, 피곤해서.”

어눌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고 있는데, 불쑥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움츠러들자 그레이슨이 가져온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거기엔 미지근한 물이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침 물이 마시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인사를 했다. 그레이슨이 눈치가 빠르다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놀라웠다. 거기다 나를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유독 다정했다.

다른 때라면 의심을 했을 테지만 몸이 약해진 탓인지 나는 흔들렸다. 이 남자가 난잡하기로 악명이 높은 극알파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난봉꾼이라는 사실이 실감 날 정도였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넘어가지 않을 상대가 있을까?

무심코 납득해 버리고 말았을 때, 그레이슨이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키이스에게 표식을 새긴 간 큰 녀석이 있다면서?”

“…….”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밀러 씨, 혹시 FBI나 CIA에서 근무합니까?”

“응? 무슨 말이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 그레이슨에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고문 없이 상대를 취조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하.”

그레이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미소를 짓는 얼굴이지만 저렇게 소리 내어 허리를 꺾어 가며 웃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생소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내게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가 입을 열었다.

“항상 직업을 가지라고 잔소리를 들었는데 그쪽도 생각해 봐야겠군. 고마워, 연우. 내 인생에 조언을 해 줘서.”

“별말씀을.”

나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을 맺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전부 털어놓을 뻔했다. 혹시나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레이슨이 걸음을 옮겨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티백을 꺼내 테이블 위의 작은 접시에 올려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도 범인은 못 잡은 거야?”

“네, 아직도.”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하며 물을 마시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레이슨은 흐응,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피식 웃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키이스도.”

“…….”

“연우는, 괜찮아?”

슬쩍 떠보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흔치 않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대비를 하고 있던 탓에 나는 평소처럼 반응할 수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키이스를 좋아하잖아.”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그레이슨은 내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오메가들은 정말 잔인해. 단 한 번으로 상대를 영원히 독점하다니, 불공평하지 않아?”

푸념과 같은 말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알파들은 수없이 많은 상대에게 표식을 남길 수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내 표식을 가진 오메가라고 해도 다른 알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거기다 표식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다른 알파가 표식을 덧씌워서 이전의 표식을 없애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지. 난 표식을 한꺼번에 다섯 개나 가진 오메가도 봤어. 다섯 명의 알파가 그 오메가 하나를 공유하는 거라고. 말이 돼? 이러면 표식을 새긴다고 해도 그 오메가를 내 오메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흔치 않게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그레이슨은 말했다.

“그런데 오메가는 단 한 명을, 그것도 평생 동안 소유할 수 있는 거잖아. 죽기 전까지는 결코 표식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공평해.”

그레이슨의 말이 한편으로는 공감이 갔다. 요컨대 알파가 남기는 표식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오메가들은 자유로웠다. 표식으로 인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은 오직 알파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메가가 받는 대가는 혹독하다.

“……그것 때문에 죽는 오메가도 많습니다.”

나는 현실을 지적했다. 사랑해서 서로 표식을 새겼지만 알파의 마음이 변해 표식을 없애려 오메가를 죽인다거나 표식이 멋대로 사라져 진심을 의심받고 살해를 당하는 오메가들은 한 해에도 수십 명이었다. 그들은 평생 단 한 번, 목숨을 걸고 표식을 남기는 것이다.

상대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그레이슨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키이스는 그 오메가를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뛰던데, 찾을 수나 있을까?”

“글쎄요.”

나는 이번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레이슨이 피식 웃었다.

“이제 키이스는 그 오메가의 향기밖에 맡지 못하게 될 테니 범인이 가까이에 있다면 조만간 알 수 있겠지?”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억제제로 향을 감추는 데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만약에 밀러 씨의 오메가가 다른 알파의 표식을 가지고 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왜?”

“그냥, 궁금해서요.”

그레이슨은 흐응,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만약에 내 오메가가 다른 녀석의 흔적을 묻혀 온다면.”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그가 이내 싱긋 웃었다.

“죽여야지, 물론.”

“둘 다요?”

내 물음에 그레이슨은 오히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감히 내 오메가를 넘본 그 새끼만 죽일 거야. 내 오메가를 죽일 순 없지.”

그리고 그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일 순 없는데…… 어떻게 할까.”

한동안 고민하는 것 같던 그레이슨이 이내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생각 안 해 봤는데.”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낯익은 직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밀러 씨,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런, 벌써.”

그는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 연우. 모쪼록 무사하길 빌게.”

그대로 일어나 나가려던 그는 아, 하고 멈춰 섰다. 나를 돌아보는 일련의 동작들이 마치 정해진 연극의 제스처 같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키이스에게,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길 했더니 그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는 빙글거리며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레이슨은 이미 모든 걸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떠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정말 생각도 못 하게 즉석에서 망설임 없이 말하더라고.”

일부러 뜸을 들이며 그레이슨이 말했다.

“그가 말하길, 연우는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대.”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확신에 차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니까. 연우에 대한 신뢰가 어마어마한 모양이야.”

“……제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내 말에 그레이슨은 “그런가?” 하고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또 봐, 연우.”

그는 짧게 웃더니 곧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그제야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한결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댔다. 뒤늦게 현기증과 두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레이슨이 페로몬을 없애 주기도 했지만 어쨌든 같은 공간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히스테리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드디어 나는 모든 공포에서 해방된 걸까?

기쁨과 환희는커녕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다시 숨이 막히고 주저앉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 발작을 일으키면.

키이스가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줄 테니까.

하, 하고 짧은 탄성이 나왔다. 난 정말 구제 불능이다. 아직도 이렇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니.

그레이슨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다. 언젠가 키이스는 알게 될 것이다. 표식을 남긴 게 나라는 걸.

그 순간이 오면 나는 통쾌할까, 아니면 그저 허탈하기만 할까.

*

*

“……우, 연우.”

부드럽게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직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정신없이 자던데.”

나는 무안해져 말을 더듬었다.

“아…… 네, 요즘 좀…… 몸이 안 좋아서.”

“안색이 나빠요. 건강에 신경을 쓰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당부의 말을 한 후 나를 스튜어드의 진료실로 안내해 줬다. 그는 여느 때처럼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그래요? 그레이슨 밀러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10분을 넘게 함께 있었는데도 전혀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이죠?”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페로몬을 줄여 주긴 했습니다만…….”

씁쓸하게 덧붙이자 스튜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이제 약은 끊어 봅시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요…….”

문득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시야가 자꾸만 흐려지는 게 이상했다. 정말 몸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하나……?

“……우, 연우!”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왔다. 크게 뜬 눈을 깜박이자 스튜어드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뒤늦게 그의 뒤로 보이는 천장을 확인했다. 어리둥절해 시선을 배회하는 내게 스튜어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잠깐만, 일어나지 말아요. 천천히, 그래요…….”

그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나는 곧바로 카우치에 길게 누워 버렸다. 현기증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게 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혈압도 낮고, 안색도 너무 창백해요. 최근에 식사는 제대로 합니까? 저번에 봤을 때보다 많이 마른 것 같은데요.”

소리가 귀에서 왕왕 울려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 상태를 눈치챈 스튜어드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좀…… 속이 안 좋아서.”

말끝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의식을 한 탓인지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먹은 게 없으니 나올 것도 없었다. 그냥 쓴 위액만 혀뿌리에서 느껴졌다. 얕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스튜어드가 말했다.

“요즘 피트먼 씨 때문에 여기저기서 난리던데, 아마 그래서 신경을 더 많이 쓴 모양이죠?”

“네…… 뭐.”

나는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상태가 안 좋아 그런 거라고 멋대로 생각한 듯 스튜어드가 말을 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 일은 휘태커 씨가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그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피트먼 씨가 원래 까다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연우가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있어요. 좀 편안하게, 꼭 혼자서 모든 걸 다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은 항상 내가 스스로에게 읊조리던 말이었다. 꼭 내가 아니라도 괜찮아. 나 아니라도 누군가는 내 자리를 채울 거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말자고.

그게 당연한데.

“……연우?”

문득 눈가가 시큰해져 나도 놀랐다. 스튜어드가 급히 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나는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제가 좀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미안해하며 말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연우가 애쓰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범인은 반드시 찾게 될 테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그 전에 나는 여기를 떠나야 할 것이다. 키이스가 눈치채기 전에, 아니, 아무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을 때.

‘다음 직장을 찾고 나서’ 따위의 여유는 없었다. 나는 어서 주변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사라질 만한 타이밍.

그날이 오면 나는 영영 떠날 것이다.

키이스가 결코 날 찾지 못할 곳으로.

* * *

콰당, 하고 뭔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키이스가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그럴 만은 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꼴인데 범인의 정체는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벌써 두 달이 넘었으니까.

잠시 뒤 나온 휘태커의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조만간 실직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 뒤 사무실을 나갔다. 고요 속에서 나는 서류를 정리해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손에 닿는 대로 집어 던진 듯 제자리에 놓인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항상 그가 앉아 있던 무거운 가죽 의자조차 뒤집어져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저걸 집어 던지다니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키이스의 몸 전체에 뒤덮여 있는 날렵한 근육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려운 일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훌쩍 안아 들고 높은 계단을 두 개씩 올라가곤 했다. 그러고도 전혀 숨을 몰아쉬거나 하지도 않았다. 키이스가 숨결이 거칠어질 때는 섹스로 흥분했을 때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키이스가 완력을 쓰려고 했다면 굳이 페로몬을 쓰지 않아도 가능했다. 나 따위는 그냥 힘으로 제압이 가능했을 텐데도 어째서 굳이 내게 페로몬을 쏟아부었던 걸까.

그쪽이 더 손쉽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오메가니까 우습게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나는 바닥에 뒤집어져 있는 가죽 의자를 흘긋 본 뒤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이스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가 라이터를 찰칵거리는 것을 나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 차례 연기를 들이마신 후 깊게 숨을 내뱉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입을 열었다.

“경호팀을 교체하실 거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감마로 경호 인력을 꾸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 교체하진 않을 거야.”

키이스는 이를 갈며 뇌까렸다. 휘태커가 실직을 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고 가져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주말에 있을 파티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체크한 부분 확인해 주시고 추가할 내용이 있으시다면 오늘 중으로 얘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파트너분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추려서 리스트를 올리면 됩니까, 아니면 직접 찾아보시겠습니까?”

키이스는 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빨간 불꽃이 은밀히 피어오르더니 이내 어둡게 점멸했다. 후, 그가 연기를 뱉어 낸 뒤 말했다.

“리스트를 올려.”

“알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키이스가 나를 불러 세웠다.

“거기 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자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까이 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진심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키이스는 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키이스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뺨에 닿는 순간 움칠하고 긴장했다. 키이스 또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묘하게 비껴간 시선에 의아해하던 나는 곧 깨달았다. 키이스는 귀를 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키이스와는 다른 내 귀.

불현듯 키이스가 머리를 기울였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가 내 목에 코를 묻었다. 순간 나는 놀라 숨을 멈추고 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져 서 있었다. 귓가에 키이스가 깊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더운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잠시 멈췄던 그가 다시 냄새를 확인했다. 조금씩 위치를 바꿔 목과 쇄골과 귓불까지 그의 숨결이 이어졌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아…….

이윽고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신기하게도 그는 어딘지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왜 그러십니까?”

짐짓 시치미를 떼고 대담하게 물었다. 키이스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키이스는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그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약, 지금도 먹고 있나?”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알았을까? 뭔가 의심할 만한 빌미를 주고 만 걸까?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키이스의 표정에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뇨, 어차피 제 냄새를 못 맡으실 텐데 굳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죠.”

키이스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깊어졌다. 설마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을까? 아니면 의심하는 걸까?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탐색하듯이 집요한 시선을 나눴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참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가 봐.”

마침내 키이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의자까지 가는 것도 힘에 겨워 숨을 헐떡였다. 마침내 의자에 주저앉자 그만 소리 내어 깊은숨을 내뱉고 말았다. 곧이어 현기증이 일어나 책상에 엎드렸다. 눈을 감았지만 계속해서 어지러웠다.

억제제 때문일까?

계속해서 약을 먹고 있으니 부작용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먹지 않았다면 바로 들켰을 것이다. 키이스가 내 거짓말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러면.

날 의심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식은땀이 배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그전에 자연스럽게 그만둘 방법을 찾아야 돼.

* * *

“네, 꽃은 그 위치에 그대로 두면 되겠습니다. 아, 약간 오른쪽으로. 네, 됐습니다.”

나는 부산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손님들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 특별히 섭외한 파티 플래너와 이런저런 논의를 하며 실수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몇 번을 점검해도 돌발 상황은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내심 불안해하며 이번에는 식단을 확인했다.

파티는 곧 크랭크인할 영화의 홍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행사는 이미 수차례 치러 왔지만 이번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체이스 밀러가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의 흥행 배우이자 극알파였다. 파티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대우하는 것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했다.

배역을 바꾸니 마니 하면서 잠시 골탕을 먹였던 체이스 밀러는 키이스가 테러를 당하고 나자 곧바로 마음을 바꿔 선뜻 계약을 완료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변한 태도에 나는 기가 막혔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키이스의 말대로 그저 심술을 부린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까다로운 상대라는 건 확실했다.

직접적인 영화 관계자들 외에 초대받은 유명인들도 많았다. 따라서 당일 경비를 설 경호원들을 추가로 고용하고 음식이라든가 술도 까다롭게 골랐다. 키이스와 파티에 참석할 상대 또한 이미 거래를 마친 상태였다.

리스트에서 선택된 파트너는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모델로, 이전의 파트너들 또한 대부분 그랬듯이 베타였다. 제법 여기저기에 얼굴을 내밀고 있던 그녀는 아마도 이번 파티가 끝나면 곧바로 인지도가 몇 배로 상승해 분야에서 톱이 될 것이다. 그녀 또한 그것을 기대하는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피트먼 씨에게 표식이 새겨졌다던데, 그래도 파트너가 필요한 건가요?”

표식에 관한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급하게 보도를 막고 최대한 기사를 내리도록 종용했지만 이미 암암리에 퍼진 일인 데다 무엇보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한 표식이 새겨진 귀를 감출 수도 없었다. 결국 세간의 관심은 하나로 집중되었다.

도대체 저 오만한 극알파에게 표식을 남긴 대담한 오메가가 누구란 말인가.

물론 그것이 나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했다. 매일 보는 휘태커조차도.

<참 난감합니다.>

그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면서도 정작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무색무취한 존재라는 현실에 기뻐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키이스가 그 거리를 걸어서 나를 찾아와 섹스하고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날 일이 이따금씩 꿈이었나, 의심이 들었으니까. 왜 하필 나를, 의식도 없는데 굳이 걸어와서 안고 돌아갔을까.

그보다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키이스를 누군가 질 나쁜 오메가가 덮쳐서 표식을 새기고 도망갔다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나 역시 정말은 그런 게 아닐까 때때로 생각했다.

키이스의 귀에 남은 표식만이 그것이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표식을 볼 때면 나는 비로소 실감하곤 했다. 입 안 가득히 퍼지던 달콤한 꽃 내음과 함께.

이 오만한 남자가 내 것이라는 걸.

나는 은밀한 쾌감과 동시에 씁쓸한 허전함을 느꼈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이 그것이라니.

문득 휴대 전화의 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급히 번호를 확인했다.

“네, 휘태커 씨.”

휘태커가 건너편에서 말했다.

“슬슬 차들이 도착하고 있는데요,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저택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기자들과 일반인들이 취재 혹은 구경 삼아 모여든 것이다. 키이스는 오늘 파티에 함께 참석할 파트너와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주방을 확인하고 돌아온 찰스에게 말했다.

“전 그럼 파티 손님들을 확인하겠습니다. 전반적인 관리를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찰스에게 이 정도 파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계적인 대답에 미소를 짓고 돌아서려는데, 불쑥 그가 말했다.

“연우, 어디 안 좋은 겁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더 말랐는데요.”

“네?”

순간 당황해 되묻자 그는 말을 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대충 바쁜 일이 마무리되면 돌아가도 됩니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맙소사, 식사를 아예 안 하고 사는 겁니까?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요.”

찰스가 속을 드러내며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내 몰골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해 얼굴을 더듬었다.

“요즘 잠을 좀 못 자서……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서둘러 말을 맺고 돌아섰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이젠 만성이 되어 버린 탓에 크게 주의하지 않았지만 찰스의 지적에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정말 병원에 가 봐야 할까?

짚이는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억제제를 머릿속에 떠올렸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연우! 오랜만이에요. 이런,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피트먼 씨한테 그만 좀 괴롭히라고 해요.”

가볍게 키이스를 비난한 그는 짧은 악수를 나눈 뒤 파트너를 소개해 주고 곧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손님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번갈아 인사를 하며 빠르게 머릿속으로 명단을 정리했다. 그중 몇몇은 내 안색을 걱정하며 의사를 소개해 준다거나 좋은 약을 구해 주겠다거나 하는 제안을 했다. 물론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진행은 순조로웠다. 나는 긴장을 풀지 않으려 노력하며 빈틈없이 파티장 곳곳을 살폈다. 찰스 또한 손님들 접대에 여념이 없었다. 이따금씩 뭔가를 원하는 손님을 발견하거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면 곧바로 다가가 문제를 해결해 주곤 했다. 덕분에 나는 훨씬 할 일이 줄어들었다. 키이스가 오기 전까지 분위기를 잘 유지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던 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몇 배로 커진 이유가 있었다. 체이스 밀러가 도착한 것이다. 그를 맞이하러 급히 걸음을 옮겼던 나는 막상 체이스 밀러를 눈앞에서 보는 순간 그대로 얼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화려한 금발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배역 때문이겠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썩 좋지 못한 성격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검은 머리 탓일까, 체이스 밀러는 ‘악마 같은’이라는 낡은 수식어가 놀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실제 그가 맡은 배역도 악역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배역에 맞게 안대까지 했다면 정말로 크게 사고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유난히 흰 피부에는 흔한 잡티 하나 없었다. 여배우와 함께 서 있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장한 얼굴에 웃으면 앳된 소년미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면 개가 따로 없었다. 덕분에 그는 ‘미친 개’라는 별명을 공공연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체이스 밀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때라면 마치 환상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미남자라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연기력도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를 보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 바람에 끝까지 극장에 남아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빨개진 얼굴로 나왔던 걸 생각해 보면 아직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영화는 아직도 가끔 찾아보곤 했다. 물론 마지막 장면은 역시나 눈가가 뜨거워졌기 때문에 항상 집에서 혼자 봐야 했지만.

최근 체이스 밀러가 출연했던 방송의 방송국에 팬들이 몰려들어 큰 사고가 날 뻔했다는 소식을 떠올렸을 때, 불쑥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긴 손가락 사이로 검게 염색한 머리칼이 부드럽게 엉켰다가 이내 내려앉았다. 문득 드러난 손목에 걸려 있는 유명 브랜드 시계가 차갑게 빛을 냈다.

아.

나는 그 시계를 알아봤다. 키이스가 내게 선물했던 시계와 같은 브랜드였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 밀러가 저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멍하니 쓸모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불쑥 다른 향기가 끼어들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피트먼 씨.”

뒤늦게 그가 함께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키이스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짜증스럽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러지?

나는 의아해져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는 찌푸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 말이 없었다. 나는 뒤늦게 키이스의 팔에 매달려 있는 이번 상대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의 시선을 모른 척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나를 비웃는 것이다. 언젠가 항상 똑같은 말을 한다고 나를 조롱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정해진 멘트를 애써 바꿀 만큼의 성의는 없었다. 대신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도착하셨습니다. 곧 인사말을 하셔야 할 텐데요, 준비를 할까요?”

슬쩍 손목의 시계를 보자 대충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키이스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나를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에 나는 의아해졌다.

설마 뭘 알아낸 건 아니겠지.

찔리는 바가 있기 때문인지 나는 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대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설프게 빌미를 주느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나는 짐짓 모른 척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무언의 압력을 주며 흘긋 시선을 올리자 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나는 즉시 대답한 후 그의 파트너에게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돌아섰다. 키이스가 계속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괜찮아, 저 남자는 몰라.

나는 생각했다. 약도 틀림없이 먹었고, 페로몬 향기가 났다면 그냥 내버려 뒀을 사람이 아니잖아? 전혀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현기증이야.

나는 생각하며 무심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또다시 배가 아파졌다. 정작 끊어야 할 약은 억제제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끊을 수 없었다. 최소한 그만두고 여길 떠날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키이스는 영영 범인을 찾을 수 없겠지.

나는 씁쓸한 쾌감을 느꼈지만 처음만큼 통쾌한 기분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어서 끝났으면 하는 피로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

*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는 지치기 마련인데 파티를 준비하거나 손님들의 뒤처리를 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그나마 찰스가 있어서 부담을 훨씬 덜었지만 최근 몸이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피로는 배가됐다.

돌아가서 쉬고 싶다.

다른 때라면 저택에서 하는 파티는 찰스가 도맡아 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영화의 크랭크인과 맞물린 파티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에서 문제가 생기면 영화에도 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그래도 그나마 아직까지는 순조로웠다.

……어지럽다.

나는 한쪽 벽에 기대어 서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자꾸만 숨이 찬 건 아마도 현기증 때문일 것이다.

빈혈인가?

최근 어지러움도 심해지고 소화도 되지 않았다. 억제제의 부작용이 심한 모양이야……. 나는 흐리멍덩하게 생각했다.

“……?”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왔다.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떠났다. 화장실까지 찾아갈 여유도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하아, 하아.

나무가 우거져 그늘진 정원 한편에 간신히 몸을 숨긴 나는 그제야 마음 놓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언제나 그렇듯 쓰디쓴 위액뿐이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나는 주저앉았다. 어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빙빙 돌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그대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찰스에게, 말을 해서…… 뒤처리를…….

하아, 하아.

자꾸만 생각이 끊겼다. 밭은 숨이 이어져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일단 이 현기증부터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숨을 죽이고 최대한 몸의 활동을 줄였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이명도 가라앉았다.

조금만 더 쉬었다 들어가자. 파티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 같으면 그만 가도 될지 물어보고…….

…….

생각이 조금씩 끊어지면서 의식이 아련하게 멀어졌다. 문득 멀리서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쏟아지던 햇살, 말 위에 올라 미소를 짓던 키이스.

내게 화를 냈었지…….

“괜찮습니까?”

갑작스러운 음성에 나는 흠칫 놀랐다. 불현듯 의식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눈을 뜨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남자는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 건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내 어깨를 잡고 짧게 흔드는 손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눈을 떴다.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과 함께.

간신히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밝은색 머리칼의 놀랄 만한 미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911을 불러 드릴까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뇨, 괜찮…… 습니다.”

나는 어렵게 사양했다. 남자가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오늘은 미남을 많이 보는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남자가 친절하게 물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저 멀거니 기대어 앉아 있는 나를 본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 주겠다는 건가, 생각했지만 틀렸다. 그는 불시에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나를 들어 올렸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뒤늦게 놀라 소리쳤다. 훌쩍 나를 일으켜 세운 그는 예상대로 키가 컸다. 향기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베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베타 중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왠지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남자의 귀에 걸려 있는 이어폰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아, 직업 때문에.”

시선을 눈치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보디가드거든요. 고용주가 이 파티에 참석하는 바람에 따라왔습니다. 지금은 휴식 시간이나 마찬가지죠.”

귓바퀴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이어폰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성능이 좋아 보였다. 이런 거라면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도 바로 수신이 가능할 것 같았다. 남자의 신원을 대충이라도 알고 나자 마음이 놓였다.

“……고맙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나는 잦아드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했다. 자꾸만 입 안이 말라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더니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마시겠어요? 아, 새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자가 내민 것은 생수가 든 페트병이었다. 다른 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나는 그럴 정도의 판단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맥없이 그것을 받아 들긴 했으나 정작 뚜껑을 열 생각도 못 했다. 남자는 그런 내 상태를 보더니 페트병을 다시 가져갔다.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간단히 뚜껑을 연 그가 내게 다시 병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병에 입을 대고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어느 때보다 맛있었다. 꿀꺽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한 번에 절반 이상을 마셔 버렸다. 하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괜찮아졌습니까?”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나는 홀린 듯이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훤칠한 키와 늘씬하면서도 보기 좋은 근육질의 몸은 경호원이라는 직업에 딱 맞았다. 어쩌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걸림돌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미남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아 버리고 말 테니까. 서글서글한 웃는 얼굴이 잡지 표지에나 나올 법한 인상 좋고 완벽한 미남 스포츠 스타를 떠올리게 했다.

외모라는 게 이렇게 사람의 모든 경계를 풀어 버릴 수도 있구나.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키이스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무표정일 때가 많았고 차가운 인상 탓인지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가끔 웃을 때면 나는 정신없이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그래서 더더욱 반했었지.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자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나서……. 저,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에 얘기해서 간단히 드실 것들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다들 때가 됐는데 싶어서 기웃거리던 참이거든요. 제가 대표로 와 봤죠.”

유명인들을 따라 경호원들이 한 무리씩 오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기 때문에 이럴 때는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샌드위치라든지 간단히 먹을 음식들을 내주곤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마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서둘러 달라고 전하겠습니다. 음료는 물이면 될까요?”

“탄산 마니아가 있으니 적절하게 섞어서 주세요.”

그는 잘생긴 얼굴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좀 성격이 거친 녀석이라서 탄산을 먹이지 않으면 폭발하거든요. 와우, 아주 곤란해요.”

살려 달라는 듯이 엄살을 부리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었을 때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갑작스럽게 질러 온 서늘한 음성에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큰 키의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키이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나와 보디가드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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