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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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먼 씨.”

순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나는 마른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본 키이스의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다. 자리를 비운 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불안해져 황급히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저 그럼, 그 건은 제가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만…….”

나는 서둘러 남자를 보내려고 했다. 다행히 그도 눈치가 없진 않은지 곧 내 의도를 파악했다.

“네, 그럼…… 몸조심해요.”

문득 멈칫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웃으며 말했다.

“연우입니다, 연우 서.”

“난 조슈어, 다들 조쉬라고 부르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연우.”

남자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키이스에게 짧은 눈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긴 것만큼이나 매너 또한 몸에 밴 남자였다. 저런 남자는 어떤 여자들과 데이트를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잘나가는 남자를 눈앞에서 보고 나도 저랬으면, 하고 동경하는 마음은 사춘기 때나 생기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내심 그가 부러워졌다. 어차피 난 알파가 아닌 여자와는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못 할 텐데도.

무심코 쓴웃음을 짓는데, 불쑥 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의 편안한 시간은 금방 끝나 버렸다. 나는 곧바로 피곤하고 예민한 신경으로 되돌아갔다.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이스가 먼저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묻고 말았다.

“……시키실 일이라도?”

그때까지 줄곧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키이스가 드디어 반응을 했다. 나는 내심 긴장한 채 말을 기다렸다.

“찰스가 찾던데. 뭔가 물어볼 게 있는 모양이야.”

“아…… 네.”

맥 빠질 만큼 허무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만 어깨의 힘이 쭉 빠졌다.

“저도 마침 확인할 게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그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렸지만 키이스는 도통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바람을 쐬러 나온 걸까? 나는 잠깐 시간을 뒀다 자리를 떠나려 했다. 내심 타이밍을 가늠해 보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말을 꺼냈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저 남자와는.”

너무나 차분한 음성에 감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걸까? 키이스의 성격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쉬고 있었는데 지나가다 보고 괜찮냐고 물어본 게 답니다. 오늘 오신 손님의 보디가드라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누구의 고용인일까? 햇살처럼 상큼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는 궁금해졌다.

“아마 직업이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 상태가 눈에 잘 들어가는 것 같아요.”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자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달려 나가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묘하게 뒤를 끄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를 보고 있었나? 아니면 우연히 보게 된 건가? 아무래도 후자겠지. 단정 지어 생각하고 나니 또 이상해졌다.

설마 날 쫓아 나온 건 아닐 테고.

“어지러워서 달려 나올 정도로 몸이 안 좋은데 남자와 놀아나는 건 잘도 하는 모양이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경멸하듯이.

“들었잖아?”

“하.”

기가 막혀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놀아나다뇨, 제가요?”

“그럼 아냐? 넋을 잃고 쳐다보던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이스는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오는 남자들마다 정신없이 보더라니, 슈가대디를 찾는 거야, 아니면 또 발정기가 온 거야? 경호원까지 손대는 걸 보면 꽤나 급한 모양이지?”

기가 막혀서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키이스가 그런 내 반응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원래 오메가들은 그렇잖아? 길거리 고양이처럼 발정이 나면 참지를 못하지. 또 사이클이 올 때가 됐어? 아니면 미리 상대를 구해 두려고 한 건가?”

키이스는 명백히 나를 모욕하고 있었다. 나를 경멸하면서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급하게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떨리는 손을 모아 쥐고 입을 열었다.

“일하는 도중에 상대를 구하는 짓 따위는 안 합니다. 전 피트먼 씨가 아니니까요.”

순간 키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아주 조금 통쾌해졌다.

“내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그게?”

키이스가 불안할 정도로 조용하게 물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실 텐데 정말 모르시겠다면 말씀해 드리죠. 전 피트먼 씨처럼 난잡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오메가들은 원래 그렇다고요? 러트가 오건 안 오건 상관없이 난잡하게 놀아나는 건 어느 쪽입니까? 상대를 1주일마다 바꾼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뒷정리는 모두 누가 했는지 기억은 하시나 모르겠군요!”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 나갔다. 제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는 멋대로 나를 모욕하고 멋대로 휘둘러 댔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다.

왜 나는 그러면 안 된단 말인가.

“그래서.”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원래 사람은 의표를 찔리면 화를 내는 법이다.

“뭐가 잘못됐어? 그게 네 일이잖아, 내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것.”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아 내질렀다.

“네! 그 대가를 주고 싫은 일을 남한테 떠넘길 수 있는 당신 같은 사람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먹고살 수 있는 거겠죠. 그럼 제가 당신한테 감사해야 하는 겁니까? 엿이나 먹어, 망할! 나도 당신처럼 돈이 많았으면 이런 거지 같은 꼴은 안 당했을 텐데!”

그만 마구 소리를 질러 대 버렸다. 세상에, 사춘기에도 하지 않았던 욕설까지 뱉어 냈다. 나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하아, 하아. 현기증과 함께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고요한 정원에는 잠시 동안 내 숨소리만 어지러이 흩어졌다. 키이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다 했어?”

“아뇨!”

나는 즉시 내뱉었다.

“길거리 고양이처럼 발정이 났다고?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깨끗해서, 고작 1주일도 안 돼서 남의 침대를 전전한 건 당신이잖아! 내가 다른 누구와 몇 번을 자든 당신한테는 댈 것도 아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해? 당신이야말로 난잡한 쓰레기야!”

그동안 맺혔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이걸로 조금은 속이 후련해질까?

갑자기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화를 내고 있던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나를 비웃는 거야?

“오, 신이시여.”

여유 있게 감탄사를 뱉은 키이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군, 내가 미처 깨닫질 못했어.”

뜻밖에도 그는 내 말에 순순히 인정을 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만 깜박였다. 주춤하고 있는 내게 키이스가 흘긋 시선을 향했다.

“너나 나나 발정이 난 건 마찬가지지. 그런데 애써 모른 척할 거 있어? 그냥 인정하자고, 힘들게 피해 다닐 필요 없잖아.”

“뭐, 뭘 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키이스가 선뜻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코끝으로 진한 단내가 흘러들어 왔다.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였다. 화가 났다는 걸 무엇보다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페로몬을 줄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내가 그의 페로몬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테고, 그것은 곧 표식을 남긴 게 나라고 자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뒷걸음질 치며 그에게 경고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잠깐, 가까이 오지 말아요.”

“어째서?”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비웃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서로 좋은 일이잖아, 안 그래? 너도 나와 자는 걸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좋아서 울었잖아, 몇 번이나.”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신에겐, 오메가가 있잖아요. 내가 아닌.”

“그래, 나한테 표식을 새기고 달아난 그 빌어먹을 오메가 말이지!”

키이스가 두 손을 들었다 놓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세상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그게 내가 너와 섹스를 하지 못할 이유라도 돼?”

“하, 하지 말아요. 다신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어!”

그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유쾌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뛰어서 달아날까, 생각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주저앉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게 전부였다.

키이스가 손을 뻗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입술이 닿는 순간 혐오감에 온몸이 굳어졌다. 현기증과 함께 밀려드는 달콤한 향내. 아, 그때도 이렇게 내 온몸을 뒤덮었었지. 나를 내리누르고,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들고. 키이스가 내 다리를 벌리고, 내 안으로 들어와 멋대로 내 안에 사정하고.

다신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때와 다른 점은 키이스가 의도적으로 내게 페로몬을 쏟는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페로몬으로, 지금은 완력으로 나를 꺾으려 한다.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

“하지 마……!”

나는 절박하게 내질렀다. 키이스가 입술을 목으로 옮겨 거칠게 빨아들였다. 성급한 손이 내 바지 위를 더듬어 엉덩이를 붙잡았다. 어깨를 밀어내고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하반신이 완전히 밀착한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어깨에 머물러 있던 내 손목에 이를 세웠다.

“……무슨 짓이야?”

뒤늦게 키이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 손목을 물어뜯었다.

“그만둬, 세상에 이게 무슨……! 그만두라고, 그만하란 말이야!”

키이스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 댔다. 그가 내 팔을 잡아 억지로 떼어 냈지만 벌써 내 팔과 입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키이스는 연이어 신을 찾으며 급히 넥타이를 풀어 내 손목에 감았다. 나는 그의 뺨을 때리고 어깨를 밀어냈지만 키이스는 무시하고 넥타이를 꽉 묶었다.

“의사…… 의사를 불러야 돼. 맙소사, 이게 대체…….”

그가 황급히 나를 안아 들려는 것을 나는 거칠게 뿌리쳤다. 하얗게 질려 나를 응시하는 키이스의 얼굴을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시…… 또, 그렇게 당하느니, 내가 죽어 버리겠어.”

“알았어, 안 할 테니까 진정해! 맙소사,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도대체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걸까? 내가 그를 거절한 게? 키이스와 섹스를 하기 싫다고 죽으려 한 게? 대체 뭐가?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의식을 잃었다.

* * *

정신이 들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다 간신히 초점을 맞췄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처음 보는 방이었다. 대충 분위기로 병원이라는 걸 알았다. 생소한 천장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산한 차가운 공기에 섞인, 변함없이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키이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이렇게 창백한 얼굴의 그는 처음이었다. 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지?

아.

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 시선을 내렸다. 내 손목에는 키이스의 넥타이 대신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덕분에 키이스는 셔츠 위에 노타이로 서 있었다. 상처를 깨닫자 뒤늦게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손가락을 움칠거렸다. 하아, 키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신 그런 짓 하지 마.”

“피트먼 씨야말로 다신 그런 짓 하지 마시죠.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요.”

나는 곧바로 내쏘았다. 키이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기가 막힌 건지 말문이 막힌 건지 모르겠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뜻밖에도 기운 없는 음성으로.

“……네가 그 정도로 싫어할 줄 몰랐어.”

나는 어이가 없어 그냥 헛웃음만 지었다. 키이스는 내가 싫다고 하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거절이라는 걸 당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걸까. 나 또한 이 남자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걸 생각하면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키이스는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타인이 자신을 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문득 눈가가 달아올랐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아, 정신이 들었습니까?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형식적인 대답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가지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했다. 주로 손목의 상처에 관한 얘기였다. 자주 와서 소독을 하라는 당부를 덧붙인 뒤 그가 물었다.

“혹시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좀, 어지러워요…….”

키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심 꺼림칙해하는 내게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뜻 입을 열었다.

“그럴 겁니다. 임신 초기에는 많이들 빈혈을 호소하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내게서 시선을 옮긴 키이스가 의사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가 눈을 깜박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키이스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의사는 선뜻 그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말했다.

“아, 모르셨습니까? 개월 수라든가 자세한 건 더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임신하신 건 확실합니다. 최근 몸 상태가 안 좋았을 텐데, 혹시 첫 임신이시라면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검진하러도 자주 오세요. 여러 가지로 검사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초기엔 더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의사의 말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그냥 떠돌아다닐 뿐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황망히 눈만 깜박였다. 키이스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넋을 잃고 의사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온통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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