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77)

33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의사가 얼버무리듯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키이스의 반응이었다. 어째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왜 저렇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을까?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정말이야?”

한참 만에 비로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 또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임신이라니.

대체 언제?

머릿속에 번쩍 플래시를 비추듯 그날이 떠올랐다. 내가 표식을 새겼던 날, 키이스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날. 몇 번이고 내 안에 사정했던 그와 배 속을 찢을 듯이 아프게 자리 잡았던 페니스, 다음 날까지도 일어설 수조차 없었던 몸 상태까지.

하,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키이스가 나를 상처 입힐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조용히 사라져 버리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말해 봐, 정말이야?”

키이스의 음성이 불현듯 내 귀를 가로질렀다. 여전히 누운 채로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창백한 얼굴엔 핏기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로, 임신했다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지금 막 알게 된 사실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키이스가 물었다.

“……누구 애야?”

나의 침묵을 그는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키이스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물어보는 걸까.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이라는 게 아예 남아 있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당신 아이일까 봐 묻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물음에 그는 멈칫했다. 나는 히스테릭하게 웃어 버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극알파 몰래 그의 아이를 가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아니면 저와 잘 때 사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설마 그 정도로 정신없이 저한테 빠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키이스 또한 허를 찔린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기억이 끊긴 것은 단 하루였다. 그날이 아니라면 이 아이는 그의 아이일 수가 없다. 그날이 맞는다면 표식을 남긴 것 또한 내가 된다.

키이스는 결코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짧게 숨을 내뱉더니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키이스가 갑자기 병실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범람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키이스에게 흠뻑 빠져 있을 때는 그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애를 태웠는데 마음이 식고 나자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다니.

갑자기 걸음을 멈춘 키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다른 녀석하고 잤어?”

키이스는 급하게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네가 나와 자는 동안에 다른 녀석이랑 잤을 리가 없어. 그건, 말도 안 돼.”

“어째서요?”

“너는 나와 달라,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물론 그랬다. 하지만 온갖 말로 나를 모욕해 놓고서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다니, 저걸 진심이라고 믿을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그가 내 말을 인용했듯이 그의 말을 되돌려 줬다.

“내게 발정 난 고양이라고 한 건 누굽니까?”

싸늘한 지적에 키이스는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든 내 말을 부정하려고 했다. 오, 세상에. 이렇게나 투명하게 저 남자의 머릿속을 볼 수 있다니.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몇 번이나 손을 들었다 놓고 고개를 젓고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던 남자가 절박하게 물었다.

“진심이 아닐 거야, 강간당한 거였겠지? 어떤 자식이야? 누가 너를 그렇게 했어?”

마치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이라면 잡아서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아뇨, 제가 원해서 잤습니다.”

그 순간 키이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렇게 핏기가 가셔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보는 얼굴이라니. 나는 문득 큰 소리로 웃고 싶어졌다.

“……누구와?”

키이스가 악문 잇새로 물었다.

“누구와 잤어? 설마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나는 곧바로 받아쳤다.

“오, 당신의 아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죠.”

키이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사색이 됐다는 표현이 이렇게나 어울릴 수 있을까?

갑자기 키이스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파고들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키이스는 놓아주긴커녕 더 세게 붙잡았다.

“네가 임신했다면 당연히 내 아이여야지.”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내가 네 안에 쏟아부은 게 얼만데 다른 놈의 애를 가져?”

급기야 키이스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처음으로 잔인한 쾌감을 느꼈다.

“내 안에 쏟은 게 당신뿐이라고 어떻게 장담합니까?”

순간 키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팔이 저릴 정도로 아팠지만 그것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낸 것은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였다. 그는 애써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키이스가 넋이 나간 듯 간신히 물었다. 맙소사,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내 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 놓고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내 사랑을 비웃고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린 건 본인이면서.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당신과만 자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망상은 밀러 씨만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키이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충격에 빠진 것처럼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복수란 이토록 감미로운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신이시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표식을 남겼을 때보다 몇 배나 큰 쾌감이 나를 덮쳤다. 공황 상태에 빠진 듯 할 말을 잃은 이 남자의 표정만큼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제야 키이스는 내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안 것이다.

그래, 거기다 이 남자는 절대 자신의 아이를 볼 수 없겠지. 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나는 달아날 것이다. 그럼 이 남자는 절대 내가 표식을 남긴 오메가라는 걸 알지 못하겠지. 평생 동안.

영원히 이 남자를 고독하게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난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다. 이 남자 외에는.

이토록 달콤한 독배라니.

나는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했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인데 오직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 이 남자의 인생을 끌어안고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진실로 이 남자를 괴롭힐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죽어서 이 남자가 괴로워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안타까운 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을 내던져 버린다고 해도 이 남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난 알고 있다. 이 남자는 그저 자신이 놓친 장난감을 그만 다른 이가 낚아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분해하는 것뿐이다.

마음에 든 섹스 상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에 이 남자에게 나보다 더 잘 맞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미련 없이 나 따위는 버려 버리겠지.

그리고 가장 비참한 것은 그 사실에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아파 오는 내 자신이었다.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흐려져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멀어지는 의식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연우?”

키이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렸다.

* * *

……?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 와보는 곳도 아니었다. 방 안의 풍경은 다소 변했지만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키이스의 저택이었다.

어째서?

순간 당황했다. 뒤늦게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키이스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게 분명했다.

황급히 일어나려던 나는 그만 현기증에 다시 드러눕고 말았다. 어지럼증에 더해 두통까지 생겼다. 잠시 동안 숨을 고르다 이번에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나마 좀 나았다.

약을, 먹었던가?

나는 뒤늦게 몸 여기저기를 킁킁대며 확인했다. 희미하게 향이 느껴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분명히 이쪽에 있었는데.

혹시나 내가 나가고 난 뒤 방을 정리했다면 이젠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기다시피 욕실로 향했다. 불안해하며 찬장을 열자 곧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갈하게 채워져 있는 비상약들 사이에 억제제가 있었다. 나는 통을 들어 안의 약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입 안에 털어 넣으려다 멈칫했다.

괜찮을까?

잠시 동안 나는 망설였다. 문득 배가 아팠던 게 생각났다. 또한 약의 과다 복용이 일으키는 부작용도 떠올랐다. 불임을 유발할 정도라면 아이한테도 좋지 못할 텐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사가 오진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미치자 곧 결심이 섰다. 다른 병원에 가서 확인해 봐야 한다. 그 의사는 내가 억제제를 이렇게 많이 먹는 줄 몰랐으니까 엉뚱한 결론을 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임신이 맞는다면.

순간 오싹해졌다.

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어.

나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도저히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고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중에 아이가 커서 자신의 나머지 반쪽짜리 부모를 찾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나는 결심을 하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임신일 리 없고, 설사 그렇더라도 낳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

침대로 돌아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들어온 것은 예상대로 찰스였다.

“일어났습니까? 몸은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고맙습니다. 저, 그런데 피트먼 씨는 어떻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말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나가셨습니다.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오실 겁니다.”

찰스는 잠깐 사이를 뒀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주 들여다봤었죠.”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투였지만 나는 무안해졌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

“아뇨.”

나의 형식적인 인사를 찰스가 가로막았다.

“제가 아니라 피트먼 씨가요.”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남자가 나를 걱정했다고? 왜?

애초에 굳이 날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이상했다. 내 의사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하긴 언제는 그런 걸 물어봤던가?

내심 시니컬하게 웃어 버렸다. 찰스는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사무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전 그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보살펴 주셔서…….”

입에 밴 감사의 말에 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트먼 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어째서요?”

순간 나도 모르게 ‘이젠 그 남자가 나를 개로 기른다고 했나 보죠’ 하고 빈정거릴 뻔했다. 하지만 상대는 찰스였다.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황급히 그 말을 삼키느라 혀를 물어 버릴 뻔한 내게 찰스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런 지시가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다 떠나서 안색도 안 좋고 컨디션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그냥 쉬십시오. 혼자 집에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싫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만 내게 찰스가 경고처럼 덧붙였다.

“이틀이나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하루만 더 지속됐다면 다시 병원에 갔을 겁니다.”

놀라 눈을 깜박이자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틀 맞습니다.”

“그럼, 회사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는 내게 찰스가 말했다.

“주말 동안 내내 누워 있었고 오늘은 공휴일입니다.”

그나마 안심이 됐다. 또다시 결근했다면 비서실의 직원들을 어떻게 봐야 했을지 상상만으로도 무안해졌다. 후우, 하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나는 곧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은 빈말로라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곳에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몸이 안 좋아지면 바로 누군가 도와줄 테니 그것도 안심이 되긴 했다.

키이스의 뜻대로 얌전히 기다린다는 건 정말 화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상황은 어쨌든 객관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 하나만 제외하고는 단점이라고는 없을 정도였다.

일단 오면 얘기를 들어 보자.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침실에 머물렀다. 이건 감금이 아닌가? 찰스가 간단히 준비해 준 식사를 끝마칠 때쯤 문득 생각이 들었지만 식후의 차까지 마시고 나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 * *

“……우, 연우.”

가만히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찰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가 입을 열었다.

“곧 저녁 시간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자는 게 좋겠습니다.”

“어…….”

나는 여전히 몽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 만의 단잠인지 모르겠다. 식사를 제대로 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비록 양은 적었지만 토하지도 않았고 그 뒤에 숙면까지 취했다.

누군가 시중을 들어 준다는 건 좋은 거구나.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때 찰스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곧 피트먼 씨가 귀가하실 겁니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졌다.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자 찰스가 덧붙였다.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시죠. 드시고 싶은 거라도?”

“아뇨.”

나는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최대한 냉정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무거나.”

“그럼 셰프에게 소화가 잘될 만한 음식을 만들라고 하겠습니다.”

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키이스가 오면 바로 왜 날 여기에 붙잡아 둔 건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그전에 먼저 매무새를 정리하고 싶었다.

거지 같은 몰골로 그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키이스가 올 때까지 나는 일단 상황을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이걸 빌미로 그만두겠다고 말해야겠다. 몸이 안 좋은 것도 사실이고 이렇게 자꾸 정신을 잃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다 또 갑자기 결근을 하게 되면 거듭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그전에 그만두는 게 최선이었다.

키이스는 분명 나를 붙잡으려 할 테지만 지금의 나는 그가 만족할 만큼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키이스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게다가 이제 엠마도 이골이 나서 내 빈자리쯤은 쉽게 메꿀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이걸 기회로 삼자.

언제 뭐라고 하면서 그만둔다고 말하고 자연스럽게 떠날까를 계속 가늠하고 있던 나는 지금이 그 기회라고 생각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하니 일단 급한 대로 취직을 하고 천천히 마땅한 곳을 찾아보자. 그러면 일단 비자는 물론이고 급한 돈도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다. 지금보다 훨씬 더 쪼들리는 생활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결심을 하고 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곧바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새로운 일자리는 물론이고 서류도 준비를 해야 했다. 사는 곳도 정리를 해야지.

내 후임에게 인계도 해 줘야 할 테고.

후임으로는 물론 엠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할 테니 한 달이면 대충 정리가 되겠지?

무심코 배에 손을 가져갔다.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오진인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정말이면 어쩌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일단 병원부터 알아보자. 확인을 하는 게 먼저니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간신히 이성을 찾고 엠마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중이었다.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찰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내려오시죠.”

나는 현기증이 일어나지 않도록 느릿하게 일어섰다. 벌써부터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

*

평소에는 계단을 이용했지만 오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물론 찰스가 먼저 권유해 주기도 했다. 어쨌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온 셈이니 나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하기로 했다. 물론 키이스는 내가 뭘 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아침마다 식사를 하러 내려왔던 식당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우아한 샹들리에가 환한 빛을 드리우고, 식탁 위에는 화사한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키이스는 나를 보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반응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내게 키이스는 똑바로 서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와서 앉아.”

조용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키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또다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때 거울처럼 환히 비치던 그의 속내는 어쩌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모든 자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정해진 자리로 갔다. 이 저택을 나가기 전까지 내가 식사를 하던 자리였다.

한쪽에 서 있던 찰스가 소리 없이 걸어와 의자를 꺼내 주었다. 나는 습관처럼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내가 자리에 앉은 뒤에야 비로소 키이스는 의자에 앉았다. 찰스가 각자의 잔에 물을 따라 준 후 자리를 떠났다. 드디어 나는 키이스와 단둘이 남았다.

할 얘기가 잔뜩 있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막한 공기가 온통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키이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몸은 좀 어때?”

조용한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많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뭐가 고마워! 감금당했는데!

입에 밴 영어가 저주스러웠다. 하지만 미처 다른 말을 덧붙일 틈도 없이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스튜어드가, 극알파의 페로몬은 표식이 있어도 다른 오메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더군. 단, 안 좋은 쪽으로.”

그제야 나는 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신기하게도 키이스는 페로몬 향기를 없애고 있었다. 덕분에 숨을 쉬는 것은 한결 편했다. 어차피 내가 표식을 새긴 오메가가 아니라면 페로몬 향기가 나오든 말든 상관없을 텐데, 왜 없앴을까?

왜 굳이 스튜어드를 만나기까지 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났지만 그중 가장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안 좋은 쪽이라면?”

키이스가 흘긋 내게 시선을 향했다.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얘기야. ……특히 임신하고 있으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묵을 오해한 그가 설명했다.

“스튜어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지. 수사자는 다른 수사자의 새끼를 전부 물어 죽인다고 해. 그래야 암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가질 테니까.”

“……그래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산될 수도 있으니까, 페로몬을 없앴단 말입니까? 당신의 아이가 아닌데도?”

“표식이 없을 때보다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는 하지만 조심하는 게 낫지.”

담담한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저 눈만 깜박이는데, 키이스가 긴 손가락으로 따닥, 따닥 하고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문득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깨달았다. 저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없구나. 또 한 번 놀라는 내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대출이 있다고 하던데, 얼마야?”

갑작스러운 화제에 나는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키이스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그를 어떻게든 꿰뚫어 보려 애쓰며 나는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피트먼 씨와 무슨 상관이죠?”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하려던 말을.

이제라도 말을 꺼내려 입을 열자 키이스가 불쑥 선언했다.

“내가 갚아 주지.”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따닥, 따닥,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식당 안에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게 폭탄선언을 했다.

“대신 나와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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