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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가 페로몬이 쌓여 미친 걸까?
나는 제일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키이스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농담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나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꿈을 꾸는 게 분명하다. 저 남자가 제정신이라면 내가 미친 거겠지. 그래, 억제제의 부작용 때문에.
나는 슬쩍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을 정도였다.
키이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내가 감격하며 ‘네!’라고 소리치면 갑자기 뒤에서 ‘서프라이즈!’ 하며 광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키이스가 물었다.
“왜 그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농담하신 겁니까?”
키이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농담하는 거 봤어?”
“……아뇨.”
최소한 지금 분위기에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혼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왜 갑자기 저한테 프러포즈를 하신 겁니까? 납득이 되지 않는데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아이를 키워 주겠다고 얘기하는 거잖아, 못 알아들었어?”
따닥, 따닥,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빨라졌다. 나는 흘긋 그의 유려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니까, 왜요? 어째서 저와 결혼해 아이까지 키워 주겠다는 겁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덧붙였다.
“표식을 남긴 오메가는 어떻게 하고요?”
키이스는 대답했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찾아서 죽이면 돼.”
“…….”
말문이 막힌 내 머릿속으로 멋대로 표식을 남겼다가 살해당한 오메가들의 기사가 수없이 많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저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리석게도.
“너만큼 섹스를 잘하는 상대는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난잡하게 놀아나던 남자가 처음이었던 나를 상대로 잘한다고 칭찬하는 거야, 지금? 감사하다고 감격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키이스가 여전히 테이블을 의미 없이 두드리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우린 잘 맞아. 너도 인정할 거야.”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짧게 숨을 뱉어 낸 게 전부였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 주는 게 결혼이죠. 섹스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
“너와 자기 전까지는.”
나는 사이를 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 왔다.
“오직 섹스 때문에 저와 결혼하겠다고요? ……굳이 결혼까지 할 게 있습니까? 그냥 몸만 사면 될 텐데요.”
키이스가 짧게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얼마를 원해?”
이번에도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하. 나는 소리 내어 탄식했다. 모멸감으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와 자겠다고 기껏 생각해 낸 게 저건가.
“당신은 정말, 정말 빌어먹을 개자식이야.”
나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저 무덤덤했다.
“그런 말은 질릴 만큼 듣고 있어. 그래서 대답은? 네, 아니요, 어느 쪽이지?”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그는 내 말을 넘겨 버렸다. 오히려 지루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 남자는 이렇게 끝도 없이 나를 상처 입힐까.
더 이상 키이스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상처받았다. 그에 대한 애타는 마음은 더 이상 없었다. 키이스는 이제 내 마음이 아닌 나 자신을 짓밟고 있었다.
당장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하다못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은 고작 무릎 위에서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는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키이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기색은 아니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대화가 끊긴 사이 타이밍 좋게 찰스가 들어왔다. 어쩌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키이스와 내 앞에 음식을 내려놓는 동안 작게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을 뿐 식당은 고요했다. 찰스는 할 일을 마치고 다시 물러났다. 키이스가 포크를 들었다. 해초로 장식이 된 전복을 나이프로 솜씨 좋게 잘라 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애 아빠는 누구지? 연락해 봤나?”
“아뇨.”
나는 대답했다.
“그는 모릅니다.”
“잘됐군, 굳이 얘기하지 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남의 아이로 알고 자신의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어떤 걸까. 이 남자라면 물질적으로 부족한 건 없이 모든 걸 다 해 주겠지. 다만 어디에도 사랑은 없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내 배 속에 있는 존재가 불쌍해졌다.
나 또한 이 아이를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있다고 해도 없앨 거라고 생각했었다.
만약에 이 아이가 이걸 전부 다 안다면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불현듯 결심이 흔들렸다. 잠깐의 동정심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의미 없이 전복을 뒤적이는 내게 키이스가 불쑥 물었다.
“어떤 사람이야? 애 아빠는.”
“……그런 걸 왜 묻는 겁니까?”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궁금해서.”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입니다. 잠자리도 저와 잘 맞았고요.”
잠깐 키이스가 멈칫하는 것 같았다. 혹시 눈치챘을까?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반응을 기다리는데, 이내 그는 대수롭지 않게 전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키이스는 다시 물었다.
“뭐 하는 남자야?”
나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제가 그 남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는데요.”
예상했던 대로 키이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라든가, ‘얼마나 만났냐’라든가 등등 이어질 곤란한 질문을 원천 차단해 버린 나는 모른 척 전복을 잘라 입에 넣었다.
그 뒤 키이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조용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식당에 울려 퍼졌다.
키이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다.
“그 남자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어째서요?”
내 말에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무심하게 말했다.
“주변을 미리 정리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테니까.”
나는 짧게 기가 막힌 탄식을 내뱉었다.
“전 아직 승낙하지 않았는데요?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만.”
키이스가 내게 시선을 향했다.
“연우.”
순간 멈칫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내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정리해.”
“…….”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안 한다면, 내가 할 거야.”
“……어떻게요?”
나는 바보같이 물었다. 키이스는 짧게 웃었다.
“글쎄, 궁금하면 시험해 보든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설마 애꿎은 사람이 해를 입는 건 아니겠지?
찰스가 디저트를 가져왔지만 키이스는 와인을 한 잔 더 마신 게 전부였다. 내 앞에 있는 건 과일 주스였다. 오렌지 위에 시럽을 얹은 디저트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 안에 넣었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저녁 내내 내가 뭘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대충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는 내 뒤로 키이스가 말했다.
“정리해, 이달 안으로.”
나는 멈칫했지만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내게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했다.
왜 나는 한 번에 거절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내게는 두려움이 존재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눈을 감은 채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모든 걸 던져 버리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바닥으로 떨어질 각오만 있다면.
난 이미 바닥까지 추락했는데 두려울 게 뭐야?
무심코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나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 * *
새벽녘에 메슥거리는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몸 곳곳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기다시피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우욱, 우욱.”
꽉 막힌 소리를 내며 연거푸 구토를 했다. 저녁에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 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어도 속은 그다지 가라앉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가? 나는 머리를 기댄 채 생각했다. 다들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망가질까?
진심으로 아이를 낳으면 죽을 것 같았다. 도저히 열 달에 가까운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남았지……?
대충 개월 수를 가늠해 봤던 나는 대략 넉 달 정도라고 추정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쯤일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려면 진찰을 받아야 한다. 자칫하다간 키이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일단 얘기가 새지 않을 만한 병원부터 알아봐야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있다니.
힘없는 손을 배 위에 얹어 봤지만 여전히 아무 느낌도 없었다.
다른 병원에 가 봐야 돼…….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다시 눈을 감고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아련하게 휴대 전화의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
*
“연우, 괜찮아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엠마는 안색이 창백해져 물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봤을 때 내 얼굴은 그야말로 할로윈 파티에서나 볼 만한 유령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요즘은 좀, 빈혈이 심해져서.”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병원에 가 봤어요?”
걱정스러워하며 끼어든 레이첼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쉬는 날 가 봐야죠. 일단 예약을 해야 하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일을 시작할까요?”
가볍게 덧붙이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책상으로 가 미리 확인해 둔 서류를 출력하고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
*
“……지난달 개봉했던 영화의 수익 및 관객 분석표입니다. 추가로 배급하게 될 국가와 지역은 여기. 이쪽은 아직 승인이 나지 않았는데 보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건 이번 크랭크 인 파티 후 나온 기사들 스크랩입니다…….”
보고를 하는 동안 키이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느리게 두드릴 뿐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가 담배를 참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모른 척 말을 계속했다.
서류를 모두 내려놓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데, 마침내 키이스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걸 멈췄다.
“왜 굳이 출근을 하는 거야?”
“……? 제 일이고 제 직장이니까요.”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키이스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내가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같은 파트의 직원이 계속 결근을 한다면 다른 직원들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느니 그만두는 게 낫죠.”
“그럼 그만둬.”
마침 타이밍이 된 것 같아서 퇴사에 대해 말을 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물론 키이스가 잡을 것에 대비해서 이런저런 말들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예상 못 한 상황에 잠시 반응을 놓친 사이에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몸도 좋지 못하잖아. 새벽부터 거의 못 잤다면서. 출근을 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갔어야 하는 거 아냐?”
“……제가 못 잔 걸 어떻게 아시죠?”
의심스럽게 묻자 키이스는 짧은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찰스가 그러더군.”
곧 납득했다. 간신히 욕실에서 나왔을 때 찰스가 마침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더 지시하실 사항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나는 슬쩍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왔다. 다시 등 뒤로 따닥, 따닥 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은 성급하게 빨라진 소리였다.
문을 닫고 내 자리에 와 앉고 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지럽다. 현기증이 계속되는 것도 정말 괴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이스의 말이 맞다. 우선 병원에 가 봐야 한다. 이 빌어먹을 현기증만 어떻게 해결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
깊은 탄식과 함께 손으로 눈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어둠 속에서도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롭지 않을 텐데.
가만히 손을 배로 가져갔다. 천천히 쓰다듬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만약에.
나는 손을 멈추고 지그시 힘을 줬다.
만약에 이 아이가 없어진다면.
핫.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키이스가 문에 기대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해.”
눈이 마주치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 상태로 있어 봤자 민폐야. 그만 돌아가.”
“일할 수 있…….”
“제발, 말 좀 들어!”
순간 고함을 질렀던 키이스가 멈칫했다. 놀라 그를 바라보자 키이스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그런 상태로 있으면 내가 일을 할 수가 없잖아.”
“……죄송합니다.”
나는 작게 사과했다. 어쨌든 이런 컨디션으로 다른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는 건 무조건 내 탓이다. 일을 하겠다고 나왔으면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말했다.
“그럼, 점심 전까지만 일하겠습니다. 남은 일을 엠마에게 정리해서 인계하고 가야 하니까요…….”
다행히 오늘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회의도 없었고 키이스는 저녁 약속이 있을 뿐이라 그냥 평상시처럼 일을 하며 이따금 키이스의 지시가 있으면 그것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정리하고 가.”
그는 피곤한 듯 내뱉었다. 그대로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키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했던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네.”
그제야 키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섰다. 탁,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던 나는 곧 엠마에게 전할 내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 봐야겠다.
나는 동시에 검색 사이트를 열며 생각했다.
키이스에게 얘기가 들어가지 않을 만한 병원을…….
“아.”
무심코 나는 탄식을 뱉어 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얘기를 했었지.
*
*
조퇴에 대해 얘기하자 엠마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만 들어가 쉬는 게 좋겠어요. 피트먼 씨가 그런 제안을 다 하시다니 참 고맙네요.”
조금이나마 안심한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피트먼 씨는 얘기를 하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가끔 화를 내는 게 무섭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만 제대로 하면 딱히 걸릴 일도 없고 실수를 하면 당연히 혼이 나는 거니까요…….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그의 비위에 맞춰 일을 한다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엠마라면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간단히 할 일을 전해 준 후 슬쩍 주변을 봤다. 벌써 점심시간이 시작되어 제인과 레이첼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 엠마. 혹시 저녁에 시간 됩니까? 괜찮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제인과 레이첼이 번쩍 시선을 향하는 것을 나는 모른 척했다. 엠마는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항상 가던 그 레스토랑에서 만날까요?”
“음, 아뇨. 오늘은 제가 제 집에서 대접을 하죠. 어딜 나갈 컨디션이 안 될 것 같아서……. 괜찮겠습니까?”
“어머나.”
“어멋!”
제인과 레이첼이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엠마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눈을 흘기더니 이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퇴근하고 한 7시 정도에 가면 될까요?”
“네,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번갈아 인사를 하고 비서실을 나왔다. 닫히는 문 너머로 레이첼과 제인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모른 체했다.
문을 닫고 몇 걸음 걸어가자 불현듯 비명소리 같은 게 들린 듯했다. 나는 의아해 돌아봤지만 다시 비서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결국 고개를 갸우뚱하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 * *
밖으로 나오자 키이스의 운전사가 당연한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차에 올라탔다. 파티 때문에 그의 집에 갔다가 줄곧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차를 가지러 돌아가야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행선지를 굳이 묻지도 않고 곧바로 키이스의 저택으로 향하는 데에는 조금 의아해졌다. 내가 당연히 키이스의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혹시 키이스에게서 그런 지시라도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지쳐서 나는 그냥 머릿속을 비워 버렸다. 한낮의 거리는 한가한 햇살이 가득히 길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가늘게 눈을 뜨고 무료한 거리를 감상했다. 세단은 거의 흔들림이라고는 없이 조용히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
묘한 이질감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낯익은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키이스의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몸을 추스르고 내릴 준비를 했다. 잠시 뒤 차가 멈추자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뜻밖에도 찰스가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즉시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나를 불러 세웠다.
“연우, 어딜 가는 겁니까?”
어딘지 급한 물음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제 차를 가지러 갑니다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처음으로 찰스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주말 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하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 차는 전날 세워 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키이스가 선물해 준 재규어를 잠시 내려다봤던 나는 곧 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시간을 들인 것은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잠깐 졸았던 탓인지 현기증도 훨씬 가라앉았고 몸도 많이 나아진 듯했다. 시동을 걸고 정원을 빠져나오는 동안 찰스는 그 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흘긋 룸미러로 확인했을 때, 그는 벌써 아득히 멀어져 사라진 후였다.
* * *
엠마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가량 이르게 도착했다. 반갑게 맞이하자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좀 빨리 도착했는데, 괜찮나요?”
“물론이죠, 들어와요. 오는 데 힘들진 않았습니까?”
“괜찮았어요. 고마워요.”
엠마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와 슬쩍 실내를 둘러보았다. 나름대로 깨끗이 정리를 한다고는 했지만 손님을 들이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쑥스러워졌다.
“간단히 스테이크를 준비했는데, 괜찮겠습니까?”
“오, 좋아요. 무척 배가 고프던 참이거든요.”
굽기를 어느 정도 할 건지를 확인한 후 그녀를 거실로 안내했다. 기다리는 동안 음료수를 내주자 엠마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 미리 준비해 둔 사이드 메뉴를 세팅했다. 자꾸만 긴장이 되는 이유는 앞으로 털어놓을 얘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나는 휴대 전화로 메시지를 확인하는 엠마를 보고 그동안 연습했던 말들을 또다시 되새겼다.
*
*
“음, 아주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만족스럽게 웃는 그녀를 보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이제 디저트와 함께 차를 마시며 말을 꺼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나를 도와 빈 식기를 정리해 주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마주 웃는 그녀의 얼굴이 아주 예뻤다.
“앉아 있어요, 곧 디저트를 가져가죠.”
“네, 기대할게요.”
원두를 갈면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속이 메슥거리지도 않아서 식사도 든든하게 잘했고, 얘기를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어려운 얘기를 꺼내기까지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 정말로 때가 된 것이다.
커피와 함께 에그 타르트와 초콜릿 브라우니를 준비해 가져가자 엠마는 환하게 웃었다.
“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제과점이에요.”
“잘됐군요, 많이 들어요.”
“살이 찔 텐데.”
한숨을 내쉬면서도 디저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보자 내 동생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충분히 날씬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 동생도 항상 그런 걱정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말랐거든요. 지나친 다이어트는 몸에도 좋지 않고…….”
“여동생이 있어요?”
“네, 둘이나.”
자연스럽게 대화는 가족에 관한 것으로 옮겨 갔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나는 마침 다가온 기회에 내심 반갑게 말을 꺼냈다.
“음, 전에 엠마, 오빠가 오메가라고 했었죠? 아이를 낳았다고.”
“네, 그래요. 왜요?”
의아해하며 묻는 엠마의 얼굴에는 아직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음, 저…… 그것 때문에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내 주변에 오메가도 없고 더욱이 출산을 한 오메가는…….”
엠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어볼 순 있지만…… 무슨 일 있어요? 아, 혹시 동생이 아이를 낳았나요? 몇 살이에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때가 와 버렸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동생은 둘 다 베타입니다. 임신을 한 건…… 나예요.”
엠마는 눈을 깜박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네?”
그녀의 반응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다시 말이 없어진 엠마를 보며 나는 무안해져 시선을 이리저리 급하게 배회했다.
“음, 좀……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 몸이 계속 안 좋았던 거고……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달리 상담을 할 데도 없고…… 오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마침 엠마의 오빠 얘기가 생각나서.”
“…….”
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나는 민망해 할 말이 없어졌다.
문득 그녀와 나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엠마를 꽤 친밀하다고 생각해서 고백했지만 그녀에게 나는 그저 단순한 직장 동료였는지도 모른다. 관계의 정의를 먼저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녀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아,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느 정도 충격이 지나간 후 엠마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금씩 안색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미안해요, 엠마.”
“음, 놀라긴 했어요. 엄청나게.”
후, 하고 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온갖 감정이 다 올라와 있었다. 이토록 그녀에게 혼란을 줄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저, 이런 걸 물어도 될지 모르겠는데, 음, 연우가 누굴 사귀고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저기, 그러니까…… 누구의.”
조심스럽게 그녀가 물었을 때, 타이밍 좋게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엠마 또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누구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엠마는 목이 마른 듯 급하게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문을 열 때까지도 나는 방문객이 누구일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몇 걸음 걷는 시간조차 기다리기 힘든 듯 조급한 방문자는 또다시 벨을 눌렀다.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며 현관의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그는 기다렸다.
마침내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희미한 단내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키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