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77)

36

키이스는 그로부터 대략 30분보다 조금 더 지난 뒤 모습을 드러냈다. 낯익은 그의 경호원들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그가 곧 나타날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키이스는 조쉬가 앉았던 자리에 선뜻 앉으며 물었다.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뭘?”

“그냥, 이것저것.”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대화가 끊겨 버리자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뭐야?”

내 옆에 놓인 봉투를 가리키며 그가 다시 물었다. 나는 또 대답했다.

“푸딩요.”

“푸딩?”

의아해하는 그에게 나는 말없이 봉투를 들어 보였다. 건네받은 키이스는 안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게 다 푸딩이었다고?”

“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 안에는 빈 통이 잔뜩 들어 있었다. 키이스는 내가 그 많은 푸딩을 혼자 다 먹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모른 척 말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키이스는 잠시 황당해하며 나를 보더니 애써 화제를 돌렸다.

“의사는 뭐라고 했지?”

“그건 안 물어본 모양이죠?”

빈정거리며 되묻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물어본 건 그저 네 진료가 끝났는지, 그게 전부야. 다른 건 묻지 않았어, 네 사생활이니까. 그리고 제대로 된 의사라면 누가 묻는다고 해서 멋대로 환자의 진찰 기록을 남에게 떠들어 대거나 하지 않아.”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이 남자가 강압적으로 수를 쓴다면 버틸 수 있는 상대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다행히 반응을 보니 의사에게까지 캐묻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키이스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굳이 남의 일을 이리저리 캐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니까.

대신 상대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몰라도.

“별 얘긴 없었습니다. 그냥 간단한 검사 몇 가지랑…….”

나는 말을 멈췄다.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키이스는 기다렸다. 이윽고 나는 무심하게 말을 맺었다.

“별거 없었어요.”

“…….”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이윽고 화제를 바꿨다.

“아직 식사는 안 했겠지? 설마 이게 점심인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죠.”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때마침 키이스가 일어서며 물었다.

“식사하러 가지.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가 스쳐 갔다.

“칼스 주니어.”

“뭐라고?”

키이스가 멈칫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데리야키 버거에 피클과 양파를 추가로 얹어서, 딸기 셰이크에 감자튀김도 먹고 싶어요.”

“…….”

“……안 됩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

*

점심시간이 갓 지난 공원에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경호원이 사다 준 햄버거의 포장을 열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벤치에서는 나와 키이스가 나란히 앉아 햄버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휘태커를 비롯한 경호원들도 마찬가지로 손에 하나씩 햄버거를 들고 점심을 대신했다. 그 와중에도 조를 나눠 몇은 먼저 식사를 하고 다른 몇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까지 굳이 경호를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문득 생각했던 나는 곧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공공연히 테러를 당했던 키이스다. 극알파들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걸 되새기고 나자 마음이 안 좋았다. 갓 만든 따끈한 햄버거의 향기에 입 안 가득히 침이 고였지만 마음이 무거워 선뜻 먹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뭐가 이상한가?”

키이스가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그냥 집으로 갈 걸 그랬나 해서……. 피트먼 씨는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 노출되는 게 좋지 않으니까요. 파파라치라든가 테러도 있을 수 있고…….”

반쯤 포장을 벗긴 햄버거를 만지작거리자 갑자기 키이스가 손을 들었다. 뜻밖에도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놀라 바라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나도 공원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키이스는 평소처럼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광욕을 할 때가 됐어.”

“고작 공원에서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자 그 역시 미소를 지었다.

“마이애미에 갈까?”

거기에는 키이스의 개인 해변이 있었다. 가끔 그곳에서 키이스가 휴가를 보내곤 한다는 걸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곳에 따라가 본 적은 없었지만.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그가 거기에 누군가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만약 내가 가게 된다면 처음인 셈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지만.

나는 잠자코 셰이크를 입으로 가져가 살며시 빨아들였다. 달지만 차가운 음료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마른 목을 축인 후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음.”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키이스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입을 베어 물자, 키이스가 고개를 돌리고 자신도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흠, 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어?

문득 배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씹던 것을 멈추고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벌써 움직이거나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생소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햄버거를 씹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전율은 그대로였다.

문득 눈가가 시큰해졌다.

* * *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난 뒤 키이스가 나를 데려간 곳은 뜻밖에도 명품 숍이 즐비한 거리였다. 키이스의 섹스 상대에게 선물을 할 때 자주 왔던 거리라서 나 역시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가 나를 여기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필요한 걸 사야지.”

키이스는 내 손을 잡아끌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둘 다 사면 되잖아.”

“내가 그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아니라.”

내 경고에 그는 처음으로 멈칫했다.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는 몇 초의 여백을 두고 말했다.

“가져가.”

“그 사람이 원치 않으면요? 직접 사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버려, 망할!”

급기야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놀라 굳어지자 그 또한 흠칫했다. 그의 시선이 곧바로 내 배로 향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쉰 키이스가 말투를 누그러뜨려 말했다.

“그건 나중에 알아서 하고 일단 들어가.”

키이스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피트먼 씨. 연락받고 준비해 놨습니다.”

매니저는 직접 나와 우리를 반기며 인사했다. 동시에 등 뒤로 기계음과 함께 셔터가 내려졌다. 나는 불현듯 달아날 곳 없이 갇혀 버린 기분을 느꼈다.

“벌써부터 이럴 필요 없어요.”

나는 작게 소곤거렸다. 키이스는 흘긋 나를 내려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혹시 이 남자가 알아 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해져 그를 올려다봤다. 표정에 드러나고 말았는지,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마, 너나 그 남자한테 청구서를 보내진 않을 테니까.”

아직 모르는구나.

그나마 안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남자가 나한테 왜 이러지?

“이런다고 당신이랑 잘 거라고 생각한다면…….”

“연우.”

키이스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멈칫한 내게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난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그러면 돼, 알겠어?”

“…….”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키이스가 다시 시선을 향했다. 무언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커피를?”

먼저 소파에 앉은 키이스가 흘긋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키이스가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키이스가 물었다. 시선을 향하자 그가 장난처럼 덧붙였다.

“푸딩?”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만 깜박이자 키이스가 웃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이내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연우에게는 푸딩을 줘, 딸기 셰이크와 함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담배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시가를?”

“아니, 그건 됐어.”

키이스가 잠깐 사이를 뒀다가 말을 이었다.

“니코틴 냄새는 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싫어하니까.”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매니저가 사라진 후 키이스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문득 내려다보니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담배 피우고 싶으신 거라면 굳이 참지 않으셔도…….”

“끊었어. 생각나게 만들지 마.”

키이스가 예민하게 내뱉었다.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그가 참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키이스가 남을 위해, 더욱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이상했다. 나와의 섹스를 그렇게 원한다는 걸까? 결혼은 하되 섹스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도 키스조차 못 하게 하는데.

그런데도 키이스는 여전히 내게 다정했다. 너무나 친절해서 또다시 착각에 빠질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이 남자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확실했다.

나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가 내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잊어버리는 순간 나는 또다시 같은 꼴을 당하고 말 거야.

*

*

매장을 전부 털어 버릴 것처럼 온갖 물건을 다 사들인 후 키이스가 나를 데려간 곳은 또 다른 숍이었다. 거기서 그는 내게 갖고 싶은 걸 사라고 말했다.

“오메가들은 임신을 해도 체형이 별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몇 벌 사 두는 게 좋겠어.”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기세로 푸딩을 먹어 치운다면 조만간 임산부라는 게 티가 날 거야.”

마침 밀크 푸딩을 먹고 있던 나는 당황해 그만 손을 멈추고 말았다.

“농담이야, 먹고 싶은 만큼 먹어.”

키이스는 웃으며 또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 남자가 내게 흠뻑 빠졌다고 착각할 게 분명했다. 나도 전에 그렇게 착각했었지. 나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는 나와 키이스를 번갈아 보더니 재빨리 장삿속을 드러냈다.

“이번에 저희가 새로 내놓은 상품인데요, 임산부를 위해 특별히 가공한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끔 피부가 예민해지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 써서 실은 전부 유기농 면제품을 썼고…….”

유창하게 상품을 소개하는 말에 나는 됐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키이스가 나보다 빨랐다.

“전부 다.”

“감사합니다.”

“저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하나만 입어 보고 그 뒤에…….”

나는 서둘러 말했지만 키이스는 그저 흘긋 나를 쳐다본 게 전부였다. 조용히 하라는 듯이. 어쩔 수 없이 나는 묵묵히 푸딩을 입으로 가져왔다.

그 뒤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매니저는 부산하게 이것저것 가져와 내밀었고, 키이스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수락했다. 도대체 저 물건들을 차 안에 다 실을 수나 있는지 생각하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차라리 매장을 통째로 사 버리지 그러세요?”

나는 금세 지쳐 푸념하듯이 말했다. 나를 핑계로 그냥 돈을 버리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때마침 매니저가 새로운 물건을 가져왔다. 테이블 위에 일렬로 놓인 넥타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그는 이번에도 역시 유창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키이스가 또다시 ‘전부’를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골라도 됩니까?”

키이스를 돌아보자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라는 대로.”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지만 만족해하는 표정이 분명했다. 나는 남은 푸딩을 입에 넣고 넥타이로 시선을 향했다. 화려한 것부터 점잖은 것까지 온갖 디자인의 넥타이들이 한 줄로 놓여 있었지만 무엇 하나 눈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는 건 어쩌면 고문일지도 모른다.

키이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전부 사, 하고 말하겠지.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진지하게 들여다보던 나는 그중 하나를 어렵게 골라 들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키이스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그에게로 가져갔다. 셔츠 위로 반을 접은 넥타이를 대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주세요.”

그리고 나는 키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겁니다.”

순간 키이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닳고 닳은 남자가 저렇게 순수하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뜻밖에도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물건도 사야죠, 내 것만 샀으니까. ……마음에 듭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마음에 안 든다면…….”

“아냐.”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넥타이로 다시 시선을 향한 내게 그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

“아주.”

키이스가 어렵게 넥타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왠지 무안해져 나는 지적했다.

“당신 돈으로 사는 거예요.”

“알아.”

그리고 그는 다시 넥타이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고른 거지.”

한동안 말없이 손에 든 것을 보기만 하던 키이스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뒤이어 그는 내가 준 넥타이를 내게 내밀었다.

“매 줘.”

내가 고른 넥타이는 지금 그가 입은 슈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는 진한 청색의 넥타이와 짙은 갈색의 슈트를 번갈아 보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로 안 어울려요.”

“괜찮아.”

그가 재촉했다.

“빨리.”

나는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고쳐 쥐었다. 키이스의 머리를 넘어 넥타이를 두른 후 익숙하게 매듭을 만드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는 걸 너무나도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천천히 해.”

키이스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서두르다 그만 매듭이 꼬여 버린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풀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간신히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고 끝맺었다. 매듭을 고정한 후 손을 떼려는데, 불현듯 키이스가 내 손을 잡았다. 순간 멈칫한 나를 바라보며 키이스가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숨을 죽이고 말았다. 지그시 눌렸던 입술이 천천히 물러났다.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남자가 이런 말을, 거기다 나한테 하다니.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표식을 남긴 데 대해 처음으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섹스를 하지 않아서 돌아 버린 게 분명해. 거기다 평소에도 페로몬을 억누르고 있으니.

굳이 나와 자겠다고 참을 필요는 없는데, 난 어차피 달아날 거니까. 설마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끝까지 자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면 또다시 강제로 나를 안을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뺐다. 입 안이 말라 서둘러 셰이크를 입으로 가져왔다. 공교롭게도 비어 있었다. 허무한 공기 소리에 매니저가 곧바로 사라졌다 새로운 셰이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배가 부른데도 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가득 찬 셰이크를 입에 물었다. 스트로를 통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음료는 차갑기 그지없었으나 화끈거리는 속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 * *

……?

뭔가 몸이 흔들리는 것 같은 감각에 의식이 깨어났다. 내가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달았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시야가 명확하지 않았다. 무심코 몸을 뒤척였다.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이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더 쉬어.”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지쳐 다시 눈을 감았다. 문득 이마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몸을 늘어뜨렸다. 이내 잠으로 빠져들면서,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다 곧 기억을 되살렸다.

아.

뒤늦게 일어나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달빛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제대로 된 역할을 했다.

어느새 키이스의 저택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놨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배가 고팠다.

나는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한동안은 먹는 걸 상상만 해도 속에서 뭔가가 넘어왔는데 그게 거짓말인 것처럼 지금은 미친 듯이 먹고 싶었다. 원래 이런가? 나는 궁금해졌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은 일단 뭔가를 먹고 난 뒤에 하기로 했다.

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텅 빈 복도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 대충 주방의 위치를 떠올렸다. 혹시 뭔가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 없다면 적당히 재료를 꺼내 뭐라도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거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키이스가 복도에 서 있었다. 이 시간까지 깨어 있었나? 아니면 내가 깨운 걸까? 당황해서 그를 바라봤다. 키이스는 편안한 니트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문득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궁금했다.

“아…… 지금 막 일어나서, 뭐라도 먹을까 하고…….”

“방으로 돌아가.”

키이스는 무심하게 말했다.

“식사를 준비해 오라고 할 테니까.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괜찮습니다, 제가 만들…….”

“들어가라고.”

키이스는 언제나처럼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쩔 수 없이 나는 돌아섰다. 막 문을 여는데, 키이스가 물었다.

“먹고 싶은 건 없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동안 간식이라도 먹어.”

그 말만 하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찰스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얘긴지 궁금했다.

간단히 먹을 걸 갖다 준다는 얘긴가?

의미는 곧 알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소형 냉장고였다. 그것은 몸을 숙이지 않아도 되도록 한쪽 벽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자 그 안에는 온갖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단연코 푸딩이었다.

세상에.

나는 문을 연 채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이게 다 뭐야……?

망설이다 푸딩을 하나 꺼낸 나는 거기에 날짜와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푸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였다. 간단히 주재료도 적혀 있었다. 일단 손에 든 것을 꺼내고 옆에 준비된 스푼 중 하나를 들었다.

직접 만든 푸딩은 사서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질감이 부드럽고 맛이 진했다. 금세 하나를 먹어 치운 나는 망설이다 또 하나를 꺼냈다. 이번에는 초콜릿 푸딩이었다. 입 안 가득히 퍼지는 부드러운 단맛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없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분명히 찰스가 한 일이야.

나는 내 안에서 결론을 지었다. 키이스는 절대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할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내게 이런 배려를 베풀 리가 없다. 분명히 찰스가 알아서 했을 것이다.

어째서 하필 푸딩이 이렇게 가득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저 우연이겠지, 나는 단정 지었다.

세 번째 푸딩을 입에 넣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엉거주춤 일어서자 찰스가 직접 캐리어를 끌고 와 빈 테이블 위에 하나씩 세팅을 했다.

“미안합니다, 늦은 시간에.”

무안해하며 사과하자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이게 제 일인걸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찰스는 뚜껑을 열어 주며 덧붙였다.

“드시고 모자라거나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전화해 주십시오. 늦은 시간이라 조금만 만들었다고 셰프가 말했습니다만…….”

“아, 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찰스는 테이블 위의 빈 푸딩 통을 치우며 물었다.

“간식은 어땠습니까? 푸딩을 더 채워 넣을까요? 아니면 다른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아…… 다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 맛있었어요. 전부 다.”

나는 내친김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만드신 분께도 잘 먹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당신도요, 찰스. 세심하게 챙겨 줘서 고맙습니다.”

덩달아 감사의 말을 하자 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적했다.

“전 지시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감사는 피트먼 씨에게 하는 게 맞습니다.”

표정이 굳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찰스는 여전히 무감정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어제 피트먼 씨가 잠든 연우를 안고 여기까지 데려오셨고 냉장고를 설치하라는 지시도 함께 하셨습니다.”

“…….”

“푸딩을 많이 만들어 놓으라는 지시를 포함해서요.”

나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그랬습니까, 하고 말한 게 전부였다. 찰스는 밖으로 나가려다 아,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DNA를 채취했다고 하더군요.”

“DNA요?”

갑작스러운 얘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찰스가 말을 이었다.

“피트먼 씨에게 표식을 남긴 오메가의 DNA 말입니다. 아주 적은 양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렵게 찾아냈다고 하더군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그때 남은 흔적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옷도, 폐기 처분했다고.”

“네, 그때 전부 버렸었는데 다행히 추적 끝에 피트먼 씨의 옷을 찾아냈습니다. 어느 노숙자가 입고 있더군요. 뒤늦게 수거해서 검사를 맡겼습니다.”

찰스는 불쌍한 노숙자 양반, 하고 동정심을 드러내며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오염되고 비에 씻겨서 성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죠……. 상당히 많은 DNA가 검출되었는데 그중 오메가의 것은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찾았습니까? 누군지.”

찰스가 대답을 하기까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은 온통 전쟁터였다. 침착해, 알았다면 진작 모든 게 다 끝났을 거야. 찰스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숨을 죽인 내게 그는 여느 때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아뇨, 아직. 아쉽게도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DNA랍니다. ……하지만 등록을 해 놨으니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죠.”

안심을 하기엔 일렀다. 나는 간신히 소리를 내어 말했다.

“찾아낸다고 해도, 그 DNA가 표식을 남긴 오메가의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표식이 있으니까 알아내는 건 간단할 겁니다. 그저 며칠 가둬 두고 약을 끊으면 자연스럽게 페로몬 향기가 나올 테니.”

“…….”

“그 오메가의 향기를 피트먼 씨가 맡을 수 있다면 바로 그가 범인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죠.”

어떻게든 태연한 척 꾸미려 애를 쓰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실마리를 찾아서 다행이네요.”

찰스는 짧게 인사를 한 후 방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정신 차려.

최대한 이성을 찾으려 애쓰며 냉정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언제 들통날지 모른다. 어서 빨리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이성은 지금 당장 달아나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감정은 그와 반대였다. 나도 모르게 시선은 냉장고로 향했다.

처음엔 그저 달아날 생각뿐이었다.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감추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자꾸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이대로 달아나도 괜찮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고작 그걸로 만족할 수 있겠어? 내 안의 검은 그림자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저 누군지 모를 상대를 그 남자가 찾아다닌다, 그걸로 되겠느냐고. 나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을 거듭했다. 조만간 흥미가 사라져 그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텐데.

그럼 모든 걸 포기해 버리는 나는 뭐가 되는 거지?

나는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전과 달라진 게 뭘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키이스는 전에도 이렇게 상냥하게 나를 대했었다. 그래서 나는 착각을 했었고,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똑같은 수법을 또 쓸 정도로 아둔한가? 물론 그건 아니었다.

나는 무심코 한쪽에 쌓여 있는 선물 상자를 바라보았다. 키이스가 나를 위해 사 준 물건들이었다. 리본을 풀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인심이 좋았다. 단 하룻밤을 같이 보낸 상대에게도 항상 비싼 보석을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직접 물건을 산 적은 없었다. 내가 아는 선에서라면 이건 분명 이례적이다. 거기다 선물을 사는데 직접 상대를 데려가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까지 하다니.

애초에 오직 잠자리만을 원하는 상대에게 프러포즈를 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만약에.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만약에 이 남자가 내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가 식어 가고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의미 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시험해 보자.

<4권에서 계속>

이클립스 eBook 출간 도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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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스 시그널(Silence Signal) / 니베 지음

가정 폭력을 당하다 ‘문’을 열고 탈출해 말소리가 없는 세계로 넘어온 하경은 검사까지 됐지만 좀처럼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클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뒤를 쫓기 시작하고, 조직폭력배 수한파의 권차훈과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얽히는데…….

「무식한 새끼한테 찍히면 답이 없어요.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니까, 항상 조심해야 해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 마뇽 지음

방출될 위기에 몰린 프로 축구 선수 최이현. 그는 잘나가는 아트 디렉터인 한세준을 만나 묘한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며칠 뒤,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세준에게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마는데…….

“길이…… 너무 복잡하네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화정각 소전(華正覺 小傳) / 일지선 지음

실종된 동생의 행방을 알아보려 현검(玄劍) 백무심이 찾아간 곳은 정보에 능통하다는 귀영곡!

그곳에서 수상하기 그지없는 귀영곡주를 만난 그는 동생에 대한 정보를 얻는 대신 곡주가 원하는 것을 주기로 하는 이상한 계약을 하는데……?

“본 곡주가 원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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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아들로서 가문을 빛내고 싶었던 이연.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잔인했다.

긴 몸살 끝에 음인으로 발현하고 만 것. 그에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간 이연은 절망밖에 없는 황궁 생활을 시작하고, 4황자 해명과 금단의 사랑에 빠지는데…….

“왜 이리 떠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소자는 아바마마와는 다릅니다.”

나는 이물질이다 / bise 지음

3년간 진규와 파트너로서 생활하던 중 자신이 짝사랑 상대의 대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원.

그에 둘을 방해하려 하지만 외려 진규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 한데 위기의 순간, 최형석이라는 남자가 뜻 모를 호의를 베푸는데…….

“난 정원 씨를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 당신이 상처 입게 하지 않아요.”

붉은 이야기꾼 : 기억 사냥꾼 / 한시원(pshaw) 지음

신비를 품은 골동품점의 주인. 소원을 이뤄 주는 물건을 팔며 대가로 상대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는 천사 혹은 악마, 이도.

그런 그에게 반한 도정후는 자신의 접촉 기피증에도 불구하고, 수상한 민화를 핑계로 이도의 뒤를 쫓아다니는데…….

“제 병이 다 나을 때까지 당신 시간을 사겠습니다.”

카주라호의 밤풍경 : 시인 편 (개정증보판) / 한시원(pshaw) 지음

마음속 열정이 사라지고 손에 펜을 들지 못하게 된 순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김형원은 권태로움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추억은 화석이 되고 외로움이 덩치를 키워 가던 때, 그의 앞에 신비한 술집 <카주라호>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는데…….

“원아,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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