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37화 (3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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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쉬와 얘기는 잘됐어요?”

자리에 마주 앉아 빵을 먹으며 엠마가 물었다. 내 앞에는 푸딩이 놓여 있었다. 나는 무안한 웃음을 지으며 뒤늦은 인사를 했다.

“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도 없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었죠. 경호 중이라 함부로 전화를 하긴 좀 그랬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우연히 그렇게 만났다니 운이 좋네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죠.”

엠마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나는 조퇴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키이스에게는 병원에 간다고 했고, 엠마와는 미리 점심 약속을 해 두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나는 중요한 얘기를 할 예정이었다. 식전 빵을 먹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조쉬가 회사에 대해 물어보던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네? 무슨 말이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엠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빵에 버터를 발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부서에 남자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어보던데, 남자는 저뿐이라고 했더니 굉장히 놀라는 눈치더라고요. 뭔가 당황해하는 것도 같고,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는데 그냥 가 버려서 혹시 엠마한테 뭔가 고민이 있는 건가 생각을…….”

“쿨럭.”

엠마가 갑자기 거친 기침을 해 댔다. 나는 놀라 서둘러 그녀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침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다. 나는 걱정스럽게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후우, 하고 간신히 숨을 가라앉힌 엠마가 입을 열었다.

“조쉬가 그랬어요? 회사 일을 물어봤단 말이죠?”

“네…… 정확히는 우리 부서 멤버에 대해서. 혹시 엠마,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면…….”

“오, 아니에요. 전혀 그런 건 없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연우. 조쉬가 잘못 안 거니까.”

엠마는 곧바로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엠마가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럼 엠마, 언제든 상담이 필요하면 얘기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연우. 하지만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요.”

그녀는 한 번 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연우야말로 별일 없나요? 요즘은 안색도 많이 좋아지고, 식사도 잘하는 것 같던데.”

엠마가 슬쩍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병원은 가 봤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일단 처방은 받았습니다. 약을 먹어서 속은 많이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처방받은 억제제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배가 아팠다. 그나마 속이 덜 메슥거리는 게 어디냐 싶지만 배가 아프면 이내 불안해졌다.

약을 너무 오래, 많이 먹었던 게 아닐까.

무심코 배로 손을 가져가는 나를 보고 엠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몸조심해요, 안 그래도 조쉬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하던데. 병원을 소개해 줬다면서요? 가 봤나요?”

“아뇨, 일단 예약만…… 안 그래도 오늘 갈 겁니다.”

아직 예약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흘긋 시간을 확인한 후 나는 아직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엠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꼭 가 봐요, 연우. 회사는 어떻게, 계속 다니겠죠, 물론?”

“그게…….”

잠시 말을 골랐던 나는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곧 그만두려고 합니다.”

“어머나!”

엠마는 진심으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피트먼 씨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퇴사하려고 해요. 몸도 안 좋고, 곧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엠마도 알겠지만 피트먼 씨는 비서에게 바라는 게 많지 않습니까……?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아이한테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말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겼다. 난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인 건가?

엠마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신경 쓸 것도 많고……. 그럼 연우,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건가요? 아이를 낳고 나서 한동안은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 텐데…….”

그녀가 하려는 말이 뭔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것이 고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당연히 낳지 말아야지.

내심 답답해하며 나는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미리 엠마에게 말해 두는 겁니다. 제가 그만두면 엠마가 팀장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인계라든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엠마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엠마도 물론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그녀에게 일의 전반적인 것을 전부 가르쳤고, 오전에는 앞으로 6개월간 일정을 모두 짜서 전해 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후 변경되는 것은 그녀가 요령 있게 추가하거나 삭제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내가 쉬는 날이면 언제나 도맡아 했던 일들이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엠마에게 더 전해 줄 게 없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그래도, 하며 탄식했다.

“연우가 그만두면 많이 허전할 거예요. 새로 직원을 뽑는 것도 해야 하고요…….”

“공고는 올려놨습니다. 면접 일정을 잡아서 엠마가 마음에 드는 직원을 뽑으세요. 서류는 내 서랍 안에 있습니다.”

엠마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연우, 설마……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언제부터?”

뒤늦게 눈치를 챈 엠마는 당황했다.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피트먼 씨와 얘기를 나눠 봐야겠지만 아마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될 수도 있어요. 미리 인사를 해 두겠습니다.”

“그런…….”

당황해하는 엠마에게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엠마.”

*

*

엠마를 회사까지 배웅한 후 나는 차에 올랐다. 키이스가 사 준 재규어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러운 핸들과 편안한 승차감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아, 이 차를 더 이상 탈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벌써부터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훤히 뚫린 길을 속도를 높여 달려갔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집주인에게는 이사를 가겠다고 말해 놨고, 가구나 물건들은 대부분 정리했다. 당장 내일 떠나도 괜찮을 만큼 어느 정도 현금도 확보한 상태다.

키이스는 전에 말한 대로 대출을 포함해 돈에 관련한 문제는 전부 깔끔하게 해결해 줬다. 덕분에 나는 가장 염려가 됐던 부분을 너무나 손쉽게 정리해 버렸다.

고맙기도 하지.

나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이 상태로 국경까지 달아나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난 미친 게 아닐까?

운전을 하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키이스에게 밝힌 일정대로라면 병원에 가야 했다. 나는 흘긋 계기판을 훔쳐보았다. 분명 도난이나 사고에 대비해 차의 행선지가 기록에 남을 것이다. 게다가 위성을 통해 바로 행적이 전달된다고 들었다. 키이스는 앉은자리에서 내가 어딜 가는지 즉시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그에게는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결코 빠질 수도 미룰 수도 없는 회의였다. 나 대신 엠마가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이다. 나는 병원에 가야 하니까.

차를 세우고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회의가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회의의 내용은 새로운 영화의 개봉 시기를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모든 프로모션을 최종 결정 후 승인하는 것이었다. 오늘 중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황금연휴를 놓치게 된다. 그러면 회사에는 어마어마한 손실이 있을 테고 키이스는 관련자들에게 비난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이것은 도박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었을 때, 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가 남자를 기다렸다.

그는 정해진 시간보다 대략 10분가량 늦게 도착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초조함에 거듭 시계를 확인하던 참이었다. 골목길에 서서 애타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사진으로 봤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멈칫했다. 대충 메일에 써 있던 것과 비슷한 외모였다.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당신 맞아?”

내가 보냈던 메시지를 들어 보이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차는 저쪽에 세워 뒀습니다. 여기 열쇠.”

스마트키를 내밀자 그는 선뜻 그것을 받아 들더니 다시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각오를 했지만 남자가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을 때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

입 안에 한 움큼 핏물이 고였다. 입을 벌리자마자 왈칵 붉은 것이 쏟아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모든 거래는 끝났다. 남자는 곧 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엠마에게 전화를 해야지. 그럼 즉시 키이스가 알게 될 거야…….

“……?”

어질어질한 머릿속으로 이후의 할 일을 급하게 떠올리는데, 갑자기 남자가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다른 손을 높이 드는 것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때, 또다시 그가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몇 대를 더 얻어맞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기어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또다시 남자가 나를 걷어차고, 금세 의식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 * *

귀에서 끊이지 않고 굉음이 들렸다. 나는 가늘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가, 얼굴이, 아니, 온몸이 아팠다.

배는, 배는 어떻게 됐지? 아이는.

손으로 만져 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흐릿한 의식 사이로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 곧 끝날 거야. 조금만 참아 줘. 이제 곧 끝이니까.

“이봐요, 괜찮습니까? 정신 차려요! 이봐요!”

굉음을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거듭된 외침에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부연 시야에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그는 거침없이 내 몸을 두드려 댔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남자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병원으로 갈 겁니다. 이름이 뭡니까? 정신 좀 차려요, 의식을 잃으면 안 됩니다!”

남자가 연거푸 소리쳤다. 아마도 구급차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질문에 어렵게 답을 했다.

“좋아요, 잘했어요. 힘내요, 곧 도착할 겁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연우, 좋아요. 혹시 연락할 가족이라든가 친구라든가, 누구든 괜찮습니다. 있습니까? 누구한테 연락하면 되죠?”

남자의 빠른 물음에 나는 잦아드는 음성으로 휴대 전화,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없어요, 강도가 가져갔습니다. 연우, 정신 차려요! 달리 연락할 방법 없습니까?”

남자는 다급하게 물었다. 내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가? 나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간신히 다잡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피트먼…… 키이스, 피트먼 씨한테…….”

남자가 잠깐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P 엔터테인먼트의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 씨 말입니까?”

나는 네, 하고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남자는 다급하게 나를 깨우려 했지만 더는 눈을 뜰 수 없었다.

*

*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고요했다. 나는 눈을 뜨려다 이내 실패했다.

“으…….”

입가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정적이 사라지고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 괜찮습니까? 정신이 드는 겁니까?”

나는 이어지는 두통에 가쁜 숨을 몰아쉬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제대로 맞지 않던 초점이 몇 번의 노력으로 간신히 맞아떨어졌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찰스였다.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입 모양으로 찰스, 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다 안다는 듯이 물을 가져왔다. 내 어깨를 안고 반쯤 일으켜 앉혀 물을 마시게 해 준 덕분에 나는 입술을 축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 병원이죠?”

“그렇습니다.”

찰스는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강도를 만났었어요, 기억나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아닌 척했을 것이다. 찰스는 내 의도대로 속아 넘어가 입을 열었다.

“차를 빼앗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휴대 전화고 뭐고 다 가져갔어요. 혹시 범인의 얼굴이라든가 뭐든지 생각나면 얘기해 주십시오. ……강간 검사도 했습니다.”

사이를 두었다 덧붙인 말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찰스는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몸에 타액과 정액이 남아 있어서요……. 다행히 범행 도중에 발각돼서 달아난 것 같습니다. 일단 증거물을 넘겼습니다. 곧 범인을 잡게 될 겁니다.”

나는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애초에 거래 조건은 차와 얼굴을 한 대 때리는 게 전부였다. 그 남자는 예정에 없던 보너스를 노렸다가 실패한 모양이었다.

인터넷에서 급하게 구한 건달의 한계란 명백했다. 실제로 대면했을 때 마음이 변하거나 그보다 더한 대가, 이를테면 더 많은 돈을 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나름의 각오는 있었지만 몸을 어떻게 하려고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게 실수였다.

그나마 남자가 보너스를 얻어 가는 데 실패한 데다 어쨌든 나 또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긴 했다. 그러나 그 탓에 일이 급해졌다. 범인이 체포된다면 거래에 대해 털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내 모든 계획은 끝장이었다. 그 전에 모든 걸 마무리해야 했다.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휴대 전화도 가져가 버렸다면…….”

마지막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는 내게 찰스가 대답했다.

“구급 요원에게 신상에 대해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피트먼 씨와 연락이 돼서 피트먼 씨가 직접 병원으로 와 수속을 밟았습니다.”

“……피트먼 씨가요?”

하지만 그는 병실에 없었다. 무심코 시선으로 주변을 훑자 찰스가 말했다.

“중요한 회의 도중에 나오셔서 다시 회사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연우도 알다시피 오늘 회의는 보통 회의가 아니라서 중단하면 안 되는 거였다는데. 뒤늦게 돌아가시긴 했지만 말이죠, 저한테 연락을 하셨으면 제가 왔을 텐데 굳이 직접…….”

찰스는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저런.”

내가 내보인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 * *

전혀 잠이 오지 않았지만 깜박깜박 의식이 사라졌다. 아마 통증 때문에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머리를 다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흐릿해졌던 의식을 되돌린 것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운 채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들어온 사람은 키이스였다. 그는 몸을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멈칫했다.

“……깼어?”

키이스는 조용히 물으며 침댓가로 다가왔다.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는 그를 나는 누운 채로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때?”

그가 손을 들어 붕대를 감은 내 머리로 가져왔다. 두툼한 거즈 위로 그의 차가운 손이 잠시 머물렀다.

키이스는 무척 지쳐 보였다. 원인은 회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일까? 나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피트먼 씨 이름을 댔던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야, 그게?”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었는데,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회의 중이셨는데…….”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하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너한테 책임지라고 안 했어, 망할!”

급기야 키이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급히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과하지 말라니까.”

나는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잠자코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후, 한숨을 내쉬더니 침댓가에 앉았다.

“몸은 어때?”

“괜찮…….”

“사실대로 말해, 거짓말하지 말고.”

키이스가 정색을 하고 내뱉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지금까지 온통 거짓말뿐이었는데. 순간 혀끝까지 올라온 신경질적인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대답했다.

“조금, 어지러워요. 몸도 여기저기…….”

“당연히 그렇겠지.”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문득 그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다녀와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키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자식 얼굴은 봤어?”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기억하나?”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키이스가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저 침묵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였지만 그는 욕설을 삼키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키이스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잊어버려, 그런 건.”

키이스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자식을 잡아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야. 몇 배, 아니, 몇십 배로 갚게 해 주겠어. 그 자식을 몇 번이고 죽여 버릴 거라고…….”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이를 갈았다. 흡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희열을 느꼈다.

내가 이 남자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이 남자는 기억하고 있을까?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유난을 떤다면서 나를 경멸했었지.

그런데 봐, 지금 당신 모습이 이게 뭐야?

마치, 정말로 날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를 다시 사 줄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한결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앞으로는 운전하지 마. 경호원도 새로 뽑아,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망할, 개자식이.”

그는 화를 참으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고 다시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나는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키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뺨을 쓸어내리자 그는 곧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키스했다. 입술이 손목으로 옮겨 와 지그시 낙인을 새기듯 길게 머물렀다. 키이스가 시선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내게 키스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눈을 감아 버렸다.

아.

입술이 닿고, 그의 혀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당연하게 입 안을 애무하는 혀를 받아들이며 나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완전히 내게 속아 넘어갔구나.

* * *

“벌써 퇴원이라니, 괜찮겠습니까?”

수속을 밟기 위해 온 찰스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고가 난 지 만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언제 범인이 잡힐지 모른다. 거기다 키이스의 표식을 남긴 오메가의 DNA가 내 것이라는 사실이 언제 드러날지 알 수 없었다.

사방에서 나를 조여 왔다. 어차피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내가 달아나는 것도 정해진 일이라 나는 굳이 행적을 감추지도 않았다. 내 휴대 전화가 발견이 된다거나 남자를 체포한다거나, 무수한 자취로 인해 내 모든 계획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속마음을 감춘 채 그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으며 대답했다.

“딱히 이상은 없으니까요……. 사건 당시 기억도 명확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찰스는 한 번 더 속을 내비쳤다.

“피트먼 씨는 다르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셔츠의 마지막 버튼을 채운 뒤 그를 바라보았다.

“퇴근 후에 드릴 말씀도 있고, 제가 직접 얘기하겠습니다. 다른 분께 폐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찰스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굳이 더 나를 말리려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남은 절차를 마친 후 나는 그의 차를 타고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다른 때라면 그저 넋을 놓고 풍경이 지나치는 것을 바라봤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대문의 패스워드와 차의 키를 놓아두는 위치, 경호원들의 교대 시간, 저택 내 고용인들이 쉬는 시간까지 전부 다 알아 놓았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끝도 없이 길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인내의 끝에는 달콤한 과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하루가 거의 저물 무렵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

*

*

식사 시간에 맞춰 준비를 하는 동안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머릿속으로 계획은 몇 번이나 검토한 뒤였지만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이토록이나 닳고 닳은 남자였다. 과연 내 서툰 도발이 그 남자에게 통할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키이스가 나한테 빠져 있는 게 아니라면 어쩌지?

해내야 돼.

나는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었다. 조만간 모든 게 밝혀지면 어차피 끝장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새삼 다짐을 되새겼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후우.”

소리 내어 심호흡을 한 뒤 방에서 나왔다. 넓은 복도가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나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몇 배로 하락하는 자신감을 부여잡으며 마침내 식당의 문을 열었다.

키이스는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달아날 뻔했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줘 걸음을 옮기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자리에 앉은 그는 찰스가 자리를 비운 후에야 비로소 말을 꺼냈다.

“말도 없이 퇴원을 하다니, 무슨 생각이야?”

“굳이 있을 필요가 없어서요.”

다행히 평소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이스가 뭔가를 더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피트먼 씨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

“아니,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혼잣말처럼 덧붙이며 은밀히 그를 바라보았다. 키이스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침묵을 깨고 찰스가 들어왔다. 우리 앞에 접시를 하나씩 놓아 준 후 그가 키이스에게는 와인을, 내게는 과일 주스를 따라 주었다.

“고맙습니다.”

입에 밴 감사의 말을 하자 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나가고 키이스와 나는 다시 단둘이 남았다.

잠시 동안 식당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키이스가 와인을 마시는 것을 보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혼잣말을 했다. 그에겐 충분히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임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마실 수 있었을 텐데.”

키이스가 흘긋 나를 보더니 짧게 웃었다.

“안됐군.”

“아이를 가진 건 양쪽의 책임인데 한쪽만 불편을 감수해야 하다니 정말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작은 투덜거림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키이스는 보란 듯이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나는 일부러 비꼬았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오메가가 당신 귀에 멋대로 표식을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요?”

키이스가 멈칫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지만 무척 불쾌해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주스 잔을 건배하듯 들어 보였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죠.”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식사가 계속됐다. 긴장한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나는 씹는 속도도 넘기는 속도도 철저히 계산해서 식사를 했다.

“오메가를 찾는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DNA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묻자 키이스는 짧게 웃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전 세계 어디에 숨는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반드시 대가를 받아 내겠지.

“그렇군요.”

키이스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와인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붉은 액체를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맛은 어떻습니까?”

“궁금해?”

키이스가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물끄러미 빈 글라스를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글라스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서서히 짚어 올라가 키이스의 입술이 닿았던 립까지 도달했다. 나는 느리게 글라스의 립을 쓸었다. 천천히, 엷게 남아 있던 수분이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키이스가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뜬 채 그것을 내 입술로 가져왔다. 가만히 혀를 내밀어 핥았다.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젖은 손가락을 천천히 내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가만히 눌렀다. 글라스를 훑었던 손가락에 타액이 닿아 희미하게 끝이 젖어 들었다. 은밀한 시선이 맞닿았다. 하아, 한숨과 함께 나는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끼익, 의자가 물러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느리게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키이스는 내가 가까이 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내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무너지듯이 그의 품에 쓰러져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나는 눈을 감고 입 안을 휩쓰는 혀를 마음껏 핥고 문질렀다.

“아.”

키이스가 내 허리를 안은 채 일어서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를 테이블에 눕혔다. 나는 무심코 비명처럼 짧은 탄성을 지르며 드러누웠다. 누운 채로 올려다보는 키이스의 얼굴은 어딘지 생소했다.

희미하게 홍조를 띤 채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이토록 나를 원하는 남자에게 상을 줘야겠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 끌어당겨 키스했다.

허리를 만지던 키이스의 손이 셔츠를 끌어 올려 맨살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피부를 훑어 올리는가 싶더니 유두에 그만 손가락이 걸려 버렸다. 엄지와 검지로 작은 젖꼭지를 잡아 희롱하듯 굴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나는 짐짓 괴로운 척 얼굴을 찡그렸다. 키이스는 다 안다는 듯이 소리 없이 웃으며 내 목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프게 유두를 꼬집었다. 나는 흠칫 놀라 굳어졌다. 이내 그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유두를 누르며 어루만졌다.

그는 내 몸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듯이.

키이스가 입술을 내려 내 유두에 이를 세웠다. 이 사이로 젖꼭지를 물고 혀끝으로 핥았다. 허리가 저릿저릿 울려와 나도 모르게 들뜬 신음을 뱉어 냈다. 아래가 점점 젖어 들었다.

“응, 으응.”

부드럽게 핥고 빨아들이다가도 이따금 아프게 깨무는 바람에 나는 절로 흠칫 놀라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럴 때마다 즐거운 듯이 웃으며 내 유두를 입술로 문질렀다.

그는 내 몸 전체에 키스하고 입술을 문지르다가 틈틈이 내 향기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아침에 약을 먹긴 했지만 정량보다 적게 먹었기 때문에 아마도 곧 페로몬 향기가 흘러나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키이스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손을 움직여 스스로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었다.

드러난 아랫도리에 키이스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요구했던 대로. 그리고 그는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내보였다. 가득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키스한 것이다.

아래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바지의 벨트를 푸는 소리였다.

키이스는 너무나 성급했지만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밤은 길었고,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 줄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 될 테니까.

“아…….”

오랜만에 느껴지는 압박감에 목 안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남자의 몸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키이스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가 들어오기 쉽도록. 키이스는 내게 키스하며 몸을 움직였다. 물러났다 들어올 때마다 망설이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퍽, 하고 난폭하게 치고 슬며시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세게 치고 들어왔다. 키이스가 내 아랫입술을 깨문 채 안을 쳐 대는 바람에 그만 입 안으로 피 맛이 번졌다. 그는 내 찢어진 입술을 문지르며 핥았다. 아릿한 통증보다도 더 깊은 무게감이 아래쪽에서 번져 왔다. 키이스가 깊숙이 찔러 넣고 맞닿은 살을 비벼 댔다. 거친 체모가 부드러운 살에 문질러져 아래를 화끈하게 만들었다.

“으, 응, 으.”

목 안쪽에서 애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지만 마땅히 잡을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키이스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리를 들어 허리를 휘감았다. 바짝 끌어당기자 키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슬쩍 물러났다가 곧바로 안쪽까지 삽입했다.

나는 어떻게든 더 깊이 연결되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고 아래를 흔들었다. 맞물린 곳이 지분거리며 구멍을 이리저리 벌려 댔다. 아래가 훤히 열리면서 남자의 굵은 성기를 허겁지겁 배 속 가득히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잡아 고정하더니 곧바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비명처럼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비틀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키이스의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삼켰다.

“하아, 하…….”

키이스의 거친 숨소리가 내 귓가에서 부서졌다. 아래쪽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깊숙이 안을 찌르고 물러나는 페니스를 속살이 움칠거리며 미친 듯이 휘감고 조여들었다. 깊게 빨아들이는 내벽에 키이스의 움직임이 더 급해졌다. 빠르게 쳐 댈 때마다 아래쪽에서 애액이 흘러넘치며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흐트러진 숨결 사이로 키이스가 내뱉었다.

“맙소사, 넌 정말…… 망할!”

갑자기 그가 나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나는 테이블 끝에 걸터앉은 채 그를 온몸으로 마주 안았다. 키이스는 미친 듯이 아래를 쳐 대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넌 내 거야, 그렇지? 말해, 내 거라고.”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이따위 말이 다 뭐라고, 내심 조소하며.

“난, 당신 거예요.”

키이스가 만족한 듯이 웃었다. 짧은 미소 뒤로 입술을 겹치고, 슬쩍 물러났던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한 번에 처박았다.

아.

순간 당황했다. 그때처럼 키이스가 끝을 부풀렸다. 배 속에서 팽창하는 페니스에 공포가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내 허리를 꽉 안고 그대로 안을 밀어붙였다.

“그, 그만, 아파요!”

나는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빠져나가려 버둥거렸지만 키이스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뺨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연거푸 나를 달랬다.

“괜찮아, 놀라지 마.”

“아파, 그만!”

급하게 몸을 빼려 했으나 빠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키이스는 계속해서 내 얼굴 전체에 키스했다. 다정하게 속삭이고, 나를 달래고, 그러면서도 내 안에 고정한 페니스는 결코 빼려고 하지 않았다.

“하아…….”

키이스가 깊은 신음과 함께 내 안에 사정했다. 가늘게 몸을 떨며 정액을 쏟아 냈지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양은 전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키이스는 내 안에 사정했었지. 이렇게 내 배 속을 가득히 채우고서. 넘치던 정액이 모두 내 안에 그대로 고였었다.

그리고 아이가.

“으, 으흐으…….”

아픔에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키이스는 끝까지 했다. 마침내 사정을 모두 마쳤음에도 크기를 줄이려 하지 않았다. 내 관자놀이와 입가에 키스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거절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자 그는 뜻밖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다시 내게 키스한 그가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너도 원한 거야.”

나는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키이스를 바라봤다. 그는 입술로 내 입술을 문지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 너도 원했잖아, 나를.”

그의 말이 맞다. 유혹한 건 나였다. 그를 원한 것도 나였다.

“그래요.”

나는 낮게 속삭였다.

“원했어요.”

그리고 이 남자를 버리는 것도 나다.

키이스가 웃는가 싶더니 깊게 입술을 겹쳤다. 혀를 섞고 입술을 빨아들이는 동안에도 그의 페니스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내 안에 가득히 그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배 속이 그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게끔.

*

*

키이스는 내 바지를 벗긴 채로 나를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작 셔츠만 걸치고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채로 그에게 안겨 이동했다. 그만큼 그는 급했다. 내 바지를 다시 입힐 여유도 없을 만큼.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는 그에게 나는 속삭였다.

“내 방으로 가요, 못 참겠어…….”

키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내 말에 따랐다. 그것 또한 내 예상대로였다. 키이스의 방은 내 방보다 더 멀었으니까.

키이스가 곧바로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 위로 올라왔다. 아랫도리로 손을 가져갔던 그는 흠뻑 젖어 있는 내 구멍을 쓰다듬더니 멈칫했다. 그의 정액이 내 체액과 뒤섞여 키이스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곧바로 아래를 확인한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열려 있는 구멍으로 그가 쏟아 낸 정액이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것을 보자 그는 곧바로 내 안으로 들어왔다.

미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키이스가 또다시 내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의 페니스는 안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빠지지 않았다. 다시 울상이 되어 버린 내게 그는 키스했다. 곧이어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안쪽을 깊숙이 꽉 막고 있는 터라 움직임은 얕고 둔했다.

이건 싫다고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이게 좋은가? 의식이 없을 때도 멋대로 그렇게 내 배 속을 엉망으로 만들더니 지금은 뻔히 알면서도 왜 굳이.

“……왜 이러는 겁니까?”

키이스가 내 안에 페니스를 고정한 채로 두 번째 사정에 도달했을 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데다 숨도 쉬기 어려웠다. 고통에 헐떡거리는 내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너한테 표식을 남기지 못하니까.”

내가 그의 귀에 표식을 새겼듯이 이 남자는 내 배 속에 표식을 새기려는 걸까.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놀란 나를 보며 키이스가 속삭였다.

“내게 표식이 없었다면, 너를 내 걸로 했을 텐데.”

탄식처럼 중얼거리며 그가 내 귀에 키스했다. 순간 온몸이 굳어졌다. 만약 이 남자가 지금 내게 이를 세우면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나는 급하게 아래에 힘을 줬다. 동시에 끔찍한 고통이 배 속을 관통하고, 키이스가 굵은 신음을 뱉어 냈다. 내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 으윽…….”

나는 온몸을 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키이스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헤어지겠지, 물론.”

“…….”

“그 남자와.”

거친 숨결이 뒤섞인 그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속삭여 왔다. 나는 유혹을 뿌리치듯 냉정하게 지적했다.

“우린, 사귀는 게 아니라고, 당신이 말했지 않습니까. 그저…… 섹스를 했을, 뿐이라고.”

내 입으로 그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직도 이렇게 괴롭다니 이상했다. 이제 모두 다 포기했을 텐데도.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오해했다. 미간을 찌푸렸던 키이스가 흘긋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선의 의미는 뒤이어 알게 됐다. 그가 상체를 들고 내 배를 쓰다듬었다.

“이것 때문인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나는 놀라 굳어졌다. 키이스는 여전히 내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만 없으면 되겠지?”

그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식어 버렸다. 냉소를 머금는 얼굴은 익히 보아 왔던 것이었다. 물론 침대에서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키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같이, 키우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의 항의에 키이스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없애도 상관없어.”

“당신에겐, 표식이 있잖아요. ……다른 오메가가.”

키이스는 한숨과 함께 내게 키스했다.

“괜찮아.”

그는 속삭이며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그 오메가를 죽이고 나면 표식도 없어질 거야. ……그럼 넌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거지.”

순간 굳어진 내게 그는 키스를 거듭하며 말했다.

“그때는 네가 싫다고 하면 노팅 같은 건 안 할 거야. 그리고 여기에 표식을 새기겠어, 넌 내 것이라고.”

키이스가 입술을 떼고 내 귀를 쓰다듬었다. 달콤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나는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만약에, 내가 그 남자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하면……?”

잦아드는 음성에 키이스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소리 없이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그 남자도 죽였으면 좋겠어?”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그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키이스를 증오하는 만큼 무서워졌다. 내가 과연 이 남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사이 키이스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정리해. 그리고 넌 내 오메가가 되면 돼.”

그는 흘긋 내 배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이 아이도 책임져 줄 테니까.”

“…….”

“내 아이처럼.”

나는 웃고 싶어졌으나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배 속에 자신의 표식을 새길 때도 이 정도로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출발점을 떠났고, 그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목이 말라요…….”

키이스는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안에서 나가기 싫은 것처럼 주저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페니스가 쑥 빠져나가자 순간 탈력감과 함께 배 속이 아파졌다.

아이는 괜찮을까?

무심코 나는 떠올렸다. 이 아이의 존재조차 부정하던 내가 이런 걱정을 하다니. 당혹스러워졌지만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키이스가 등을 돌리고 물을 가져오라고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미리 베개 밑에 감춰 놨던 물건을 찾아 확인한 후 모른 척 그를 기다렸다.

“와인은 어때요?”

내 물음에 막 전화를 끊으려던 키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찌푸린 얼굴로.

“못 마시잖아?”

“그러니까, 나 대신.”

일부러 그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려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러자 키이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와인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내가 마실 과일 주스도 또한 추가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키이스는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내게 키스를 하는 그를 그냥 내버려 뒀다. 키이스는 당연한 듯이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허벅지를 잡고 가랑이를 넓게 벌렸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다리를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키이스는 고분고분한 내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몇 번이나 키스하고, 이름을 부르고, 몸을 만지고, 내 안에 사정했다. 사정할 때마다 그는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도 끝까지 참았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키이스는 완전히 늘어진 나를 안고 몸 곳곳에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찰스였다.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던 키이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나체인 상태로 남자에게 깔려 있는 모습은 죽도록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찰스는 프로였다. 침대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에 가져온 음료들을 세팅해 놓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렸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 키이스가 불쑥 내뱉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보면 누구든 죽일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았다. 키이스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는지, 키이스는 찌푸린 얼굴로 나를 위협했다.

“여자도 마찬가지야.”

“…….”

나는 납득하려는 노력 대신 그에게 키스했다. 키이스는 내 입술을 핥고 문지르며 천천히 아래를 비비기 시작했다. 배 속에 가득 찬 정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속을 부대끼게 만들었다.

“좀 쉬는 게 어때요……?”

나는 피곤에 지쳐 간신히 말했다. 이대로 한 번만 더 하면 계획을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날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던 걸 떠올려 보면 오늘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내심 절박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내일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잠시라도 쉬게 해 줘요…….”

애원하는 나를 키이스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가 여태 그랬듯이 나를 무시하고 다시 시작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이마에 키스했다. 슬쩍 아래를 빼낸 키이스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나는 온통 저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키이스가 욕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나는 숨겨 두었던 약을 꺼내 손안에 쥐었다. 곧 방으로 나온 그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내게는 크기만 하던 가운이 그에게는 오히려 조금 짧은 것을 보고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그는 능숙하게 와인의 코르크를 뽑았다. 뒤이어 얇은 실처럼 가늘게 와인을 따라 디캔터로 옮겼다. 나는 방 안 가득히 퍼지는 진한 포도주의 향에 잠시 멍해졌다.

“마시고 싶어?”

문득 들린 음성에 눈을 깜박이자 키이스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넋을 잃었다.

이제 다시는 못 보겠지.

“왜 그래?”

키이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기분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복잡한 기분을 느끼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것은 키이스가 했던 말들이었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내 안에 쌓였던 사소한 말들이 내 의지를 일깨웠다. 그리고 나를 가장 상처 입혔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자 나는 곧 지극히 냉정해졌다.

더 이상 이 남자가 나를 상처 입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시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향이 좋은데 마실 수 없구나, 싶어서요.”

“아쉽게 됐지.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몇 달이나 됐지?”

나는 재빨리 개월 수를 계산해 거짓말을 했다.

“석 달 좀 안 됐습니다.”

“……그래?”

달갑지 않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키이스는 중얼거렸다. 곧 그는 와인 병을 내려놓고 이번엔 주스를 따랐다. 내게 주려는 것이다. 나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푸딩도 먹고 싶은데.”

그러자 키이스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아이 이름을 푸딩이라고 짓지 그래?”

나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나쁘지 않죠. 딸이면 밀크, 아들이면 초콜릿이라고 지으면 되겠군요.”

그는 웃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가 좋아?”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캐러멜, 하고 대답했다. 키이스는 푸딩과 함께 스푼을 챙겨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그는 말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키스했다. 곧 키이스가 돌아서서 디캔터의 와인을 글라스에 따랐다. 나는 그가 글라스를 들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실수인 척 푸딩을 침대에 떨어뜨렸다.

“아차!”

순간적으로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봤지만 키이스는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내가 떨어뜨린 푸딩을 정리하더니 물었다.

“다시 갖다줄까?”

나는 기다렸던 질문에 애써 미안한 척 꾸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저 없이 남을 죽인다는 말을 하던 남자가 내게는 이렇게 다정하게 미소를 짓다니 생각할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멍해졌던 나는 그가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뒤적이는 동안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와인글라스에 쥐고 있던 약을 털어 넣었다.

약의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스튜어드에게 물으니 그는 내가 원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의 병원에 있는 실험체는 그야말로 안 먹어 본 약이 없다고 한다. 그중 와인에 타서 먹였을 때 가장 효과를 본 약이 이것이라고 했다.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의사에게 이 약을 처방받았다고 말하니 그는 절대 술과는 먹지 말라고 하면서 당부했다. 물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애초에 내가 먹으려고 받은 약이 아니었으니까.

캐러멜 푸딩은 단 두 개뿐이었다. 나는 일부러 하나를 냉장고 가장 안쪽에 숨겨 놓았다. 덕분에 그는 푸딩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가 냉장고 문을 닫았을 때 캡슐은 벌써 와인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내게 푸딩을 건네준 키이스는 선뜻 와인글라스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푸딩을 먹는 척하며 내리뜬 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별생각 없이 글라스를 기울였던 키이스가 멈칫했다. 혹시 알았을까? 조마조마해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십니까? 문제라도?”

저절로 말투가 딱딱해졌다.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맛이 이상한데, 산화가 된 것 같아. 보관이 잘못됐나? 향은 괜찮았는데……?”

그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 잠시 동안 글라스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키이스가 사이드 테이블 위에 와인글라스를 내려놓는 것을 나는 모른 척 훔쳐보았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수면제는 3일 치였다. 극알파들은 마약류에 대한 내성이 일반인들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술과 함께 그만큼을 먹는다면 아무리 키이스라고 해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선뜻 침대 위에 올라온 그가 내게서 푸딩을 가져갔다. 반도 먹지 못한 푸딩을 빼앗기고 만 나는 순간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진작 먹었어야지.”

곧바로 그가 입술을 겹치고,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또다시 시작할까 봐 지레 겁을 먹었지만 뜻밖에도 그는 내게 넣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입술에, 이마에, 뺨에, 곳곳에 키스했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얼굴은 진심으로 나를 사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또다시 흔들리는 마음에 염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내 목에 코를 묻었던 키이스가 멈칫했다.

“……?”

고개를 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심코 숨을 죽이자 키이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내 쇄골로 코를 가져왔다. 깊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해 굳어진 내게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향이, 나는 것…… 같은데.”

그의 말투가 눈에 띄게 어눌해졌다. 키이스는 머리를 들고 개처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왜 이러지?”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약효는 즉각적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나는 또다시 이 남자에게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키이스는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증세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나는 그의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이스는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 드러누웠다. 그의 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평소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섹스에 미쳐 발정했을 때가 아니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키이스.”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키이스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몽롱하게 눈을 깜박였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과연 기억이나 할까? 내심 생각하며 나는 물었다.

“왜 이런 걸까요? 산화된 와인에 취했습니까?”

키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해. 난 지금까지…… 취한 적이, 없는데.”

“그렇겠죠.”

나는 선뜻 수긍했다.

“거기에 약을 탔거든요, 제가.”

“……뭐라고?”

키이스는 곧바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어 차례 눈을 깜박인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왜냐면.”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당신을 엿 먹이고 싶었거든.”

키이스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 박자씩 늦게 감정을 드러냈다.

“……뭐라고?”

그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어지간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거친 웃음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키이스는 그저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로서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맥없이 누워 있다는 것도, 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도, 감히 내가 그에게 약을 먹였다는 것도.

나는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가 잠에 빠져들기 전에 모두 얘기해 줘야 한다. 그래야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멸감이란 뭔지, 아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뚜렷이 남아 있는 표식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오늘 섹스는 어땠습니까? 마음에 들던가요?”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굳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랬겠죠, 표식을 남긴 오메가와 한 마지막 섹스였으니.”

그가 입을 열었다. 소리를 낸 것은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였다.

“……뭐라고?”

키이스는 고작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나는 무심하게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날 나를 임신시켰지, 당신이.”

“…….”

“그리고 전부 다 잊어버렸어.”

나는 또다시 웃어 버렸다. 키이스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의 의식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목격했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분명히 경고했었지, 또다시 내게 페로몬을 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내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또 내게 페로몬을 쏟아부었어.”

귀를 쓰다듬던 손이 저절로 멈췄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건 그 대가야.”

잠시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약 때문이 아니었다. 입술을 옮겨 그의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난 이 아이를 지울 거야. 내가 죽지 않는 한 당신은 누구와도 아이를 갖지 못해. 당신만의 오메가도 영원히 가질 수 없겠지.”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숨결처럼 작게 속삭였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 우린 공평하게 주고받은 거야.”

키이스는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사라지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눈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부질없는 행위였다. 키이스가 손을 들었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뺨을 스쳤으나 거기까지였다. 곧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키이스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비틀거리며 옷을 입고 미리 준비해 둔 짐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가장 어려울 것 같았던 키이스를 속이는 일보다 막상 더 힘든 일은 저택을 나가는 것이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몇 번씩 넘어질 뻔했다. 벽을 짚고 걸어가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현관까지 가는 길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혹시 찰스와 맞닥뜨릴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겨우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는 급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사람과 부딪치게 된 것은 차고 앞에서였다.

“어, 연우.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경호원이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별다른 건 없죠?”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볼일이라니, 지금요?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절뚝거리는 걸 본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나오다 좀 부딪쳐서…… 어두우니까 잘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요? 찰스가 항상 복도에 불을 켜 두던데, 이상하군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를 보고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집에 가져와야 할 물건이 있어서 나갔다 오려는데, 차를 좀 쓰겠습니다.”

그는 내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었다.

“같이 갈까요? 사고가 난 지 얼마 안 됐지 않습니까? 피트먼 씨가 앞으로 연우를 혼자 두지 말라고도 하셨고…….”

모두들 내가 강도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 착각은 길어야 사흘이면 모두 깨질 것이다. 아마 키이스가 눈을 뜨는 순간 모두가 알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내심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요……. 혼자가 더 편합니다.”

일부러 마지막 말을 덧붙이자 그는 잠시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키이스의 명령에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직 경호원을 추가로 뽑지도 못했는데 저택을 지키는 수도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야간이라 다들 쉴 텐데……. 제 집에 잠깐 다녀올 뿐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땐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그렇게 된 거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했나? 나는 내심 불안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호원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결국 그래요,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반색을 한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밤은 짧다. 나는 조급해져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차고 안에는 키이스 취향의 고급 세단이 가득했다. 한 차례 실내를 둘러본 뒤 그중 그나마 내가 다루기 쉬워 보이는 차를 골랐다.

운전석에 앉는 것은 꽤 힘들었다. 나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마침내 자리를 잡았을 때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마저 흘러나왔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경호원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집에서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오랜만에 가니까 청소도 좀 해야겠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면서 말하자 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되면 찰스에게 말을 전하죠. 조심해서 운전해요.”

당부의 말을 덧붙인 뒤 경호원은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차를 출발시킨 나는 룸미러를 통해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차로는 멀리 못 가.

나는 이내 대문을 통과해 도로를 달려가며 생각했다. 이후의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현금도 어느 정도 준비해 뒀다. 강도가 내 전화기를 가져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쓸모는 없었을 것이다. 카드를 포함해 흔적이 남을 만한 물건은 전부 폐기해야 할 테니까. 새로운 휴대 전화도 선불 전화로 마련해 놨으니 당장 급할 건 없었다.

키이스는 언제쯤 깨어날까?

보통 사람들보다 약효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차가 한 대도 없는 뻥 뚫린 도로를 나는 최대 속도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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