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우욱, 우욱.”
거듭 올라오는 구토로 나는 변기에 머리를 박다시피 하고 연거푸 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올라오는 것은 쓰디쓴 위액뿐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키이스에게서 달아난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남의 눈을 피해 살았다.
그날 끝없이 먼 거리를 달린 후 차는 공항에 세워 두고 우버를 탔다. 내 이름으로 여러 장의 티켓을 끊어 놨으니 아마도 내가 주를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탑승했는지를 확인한다면 페이크라는 걸 곧 알게 되겠지만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다.
혹시 키이스가 잠에서 깨지 않은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함이 없진 않았지만 다행히 그는 만 하루도 되지 않아서 눈을 뜬 것 같았다. 지난 2주 동안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신문 기사에는 키이스의 근황이 적나라하게 내보여지고 있었다. 그중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건 누가 봐도 거짓이었고 어떤 건 그에 대해 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혹할 정도로 그럴듯했다.
이런 지라시 보도는 막으라고 얘길 했었는데.
내심 안타까우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엠마는 지금 급하게 팀장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곧 익숙해질 테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고 나온 내게 이러쿵저러쿵할 권리는 없었다. 거기다 덕분에 내 쪽에서는 키이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어지러워…….
나는 벽에 기댄 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잠시 동안 나는 어둠 속에서 불안으로 눈만 데굴거렸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니 취객끼리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지고 온 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처방받은 억제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입에 털어 넣었다. 이런 곳에서 오메가라는 걸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질 나쁜 알파라도 만나 험한 꼴을 당하면 어쩔 것인가.
다시는 페로몬에 짓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지르며 침대로 향했다. 바깥에는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매일 수면을 방해했다. 고요하던 키이스의 대저택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물론 그렇지, 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장은 어쩔 수 없다. 적당한 직장을 구한 뒤 방을 얻어야 한다.
조만간 이 모텔도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무심코 배에 손을 가져갔다. 날짜가 자꾸 늦어지는 바람에 나는 초조해졌다. 이러다 기한을 놓칠지도 모른다. 수술은 언제까지 가능하지? 혹시 만약에 시기를 놓치게 되면……?
불안해하던 나는 설핏 잠으로 빠져들었다.
* * *
“맙소사, 연우!”
나를 보자마자 조쉬는 거친 감탄사를 뱉어 냈다.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카페 안을 가로질러 걸어온 그는 내 맞은편에 앉더니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엠마에게 들었습니다. 갑자기 퇴사를 했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겁니까? 연락이 닿지 않는다던데. 맙소사, 이 꼴 좀 보라지, 이건 가발입니까? 못 알아볼 뻔했어요! 거기다 이 번호는 또 뭐고?”
나름 변장을 한다고 했는데 그는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리자 조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스팸인 줄 알고 안 받으려고 했어요.”
“미안해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러자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죠. ……하긴, 갑자기 오프를 내서 나오게 만들었으니 사과할 일인 건가.”
턱을 쓰다듬으며 조쉬가 혼잣말을 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저와 만나는 건 다른 사람한테는…….”
“아,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신당부했잖아요? 그렇게 입이 가볍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아요.”
물론 조쉬가 그런 타입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걸리는 것은 그의 혈육이었다. 그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마침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나와 조쉬에게 번갈아 미소 지었던 그녀의 시선은 조쉬를 향해 좀 더 오래 머물렀다. 조쉬는 메뉴도 보지 않고 말했다.
“핫케이크 하나, 커피 하나. 연우는?”
“전 먼저 주문했습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뜻 메뉴 북을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스텔라.”
자연스럽게 명찰에 적힌 이름을 부르며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나는 타고난 바람둥이란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웨이트리스도 환한 미소를 짓더니 메뉴 북을 받아 돌아섰다. 잘생긴 남자가 저렇게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나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왜요?”
내 시선이 이상했는지 조쉬가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쉬가 알파로 발현했다면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서요.”
“지금도 많은데?”
그는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순수한 반응이라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조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굳이 아이를 낳지 않아도 좋다는 상대를 만나면 되죠. 뭐, 마음이 맞는 알파를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난 좋은데?”
씨익 웃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평생 거절이라고는 당해 본 적이 없는 남자의 여유 있는 미소였다. 때마침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나와 그의 앞에 각각 음료를 놓아 주었다. 커피를 주문한 조쉬에게 앞치마에서 한가득 크림을 꺼내 준 그녀가 가볍게 윙크를 했다. 그러자 조쉬는 웃으며 그것을 받아넘겼다.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부러워요, 전 별로 인기가 많아 본 적이 없어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던 조쉬가 멈칫했다. 초록색 눈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바람에 나는 무안해졌다.
“왜…… 제가 뭐,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 별로 인기가 없었을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다 싶어서.”
조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이내 아하,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본인이 잘 몰랐겠죠. 인기가 없을 수가 없는데.”
“어, 아뇨. 전 변이한 케이스라서 그 전엔 베타였거든요……. 사춘기 때 정상적으로 발현한 게 아니라 시기를 지나서 오메가로 변이한 거죠.”
“그 전에 베타일 땐 인기가 없었다고? ……변이했다면 얼굴이 변한 것도 아닐 텐데.”
조쉬는 여전히 의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변이하고도 딱히……. 그 전엔 여자 친구가 둘 정도 있긴 했었지만 두 번 다 잘 안됐습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는 과거죠.”
쓴웃음을 짓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쉬가 불현듯 한숨을 내쉬더니 “엠마, 엠마” 하고 또다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선뜻 말을 이었다.
“자신감이 없는 건지 둔한 건지. 아무튼, 머물 곳은 마련했습니까? 갑자기 왜 그만둔 겁니까? 그 상사랑 싸웠어요?”
“네…… 어쩌다 보니.”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현재 상황을 덧붙였다.
“지금은 근처 모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 엠마에게 아직 연락을 못 해 봤는데…… 회사 일에 대해서 혹시 들은 얘기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냥 사장이 미쳐서 난리 났다는 얘기?”
조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신문 기사만 봐도 대충은 분위기 파악이 될 텐데.”
“네…….”
나는 어색하게 덧붙였다.
“혹시 기사에 안 나오는 얘기가 더 있나 해서요.”
“글쎄요, 저도 집에 자주 안 가니까 엠마한테 그런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가 봤자 피트와 놀아 주기 바쁘기도 하고.”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집 안 수리도 해야 하고, 잔디도 깎아야 하고요……. 집이 오래돼서 매번 갈 때마다 손을 봐야 하거든요. 지난번에 지붕을 고치다 왔는데 그것도 마저 해야지, 엠마와 수다를 떨 시간 따위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그 정도로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않고.”
“아뇨, 당연한 얘기를…… 제가 죄송합니다.”
엠마와 조쉬가 나에 대한 얘기를 할 틈이 없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심 얘기가 새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던 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사과했다. 그러자 조쉬가 아, 하고 덧붙였다.
“당신을 무척 찾고 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침 웨이트리스가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줬다. 또다시 그녀는 조쉬와 눈인사를 나눈 뒤 사라졌다. 우리는 각자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뭘 해 주면 됩니까?”
조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수북했던 핫케이크를 벌써 절반 이상 먹어 치운 상태였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소개해 줬던 그 병원 말입니다, 제가 그만 휴대 전화를 잃어버려서…… 혹시 다시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조쉬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용케 내 번호는 안 잊어버렸군요.”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따로 저장해 뒀거든요.”
“준비성이 있는 건 좋은 일이죠.”
조쉬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칭찬했다. 휴대 전화를 꺼내 뭔가를 확인했던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다시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같이 가 주겠습니다, 마침 시간도 되고 하니까.”
“네?”
깜짝 놀라 묻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다면 됐고요.”
“아니,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왜 갑자기…….”
조쉬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혼자 병원에 다닌다는 건 꽤 두렵고 쓸쓸한 일이니까요.”
나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 남자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만 생각이 표정으로 나와 버렸는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연우 같은 사람은 더하겠죠.”
“……저 같은 사람요?”
대체 무슨 의미일까? 눈을 깜박이는 내게 조쉬는 음, 하고 잠시 말을 고르듯 생각에 잠겼다.
“뭐랄까, 도와주고 싶은 사람?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
“…….”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고도 하죠.”
씨익 웃는 여유 있는 표정에 그러나 나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혼자 잘해 왔습니다.”
다소 딱딱한 말투로 말하자 조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죠. 엠마도 말하더군요, 아주 유능하다고. 듣기로는 피트먼이 회사 지분을 주면서까지 잡으려고 했었다던데.”
굳이 저런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조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과 외모가 그렇게 보이는 건 다른 문제니까.”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조쉬가 덧붙였다.
“어쨌든 오늘은 여유가 되니 원한다면 같이 가 주겠습니다. 예약을 하는 게 원칙이지만 첫날이니까 나와 같이 가면 한 번은 봐줄 겁니다. 어때요?”
선택은 나에게 넘어왔다. 조쉬의 제안은 아주 솔깃한 것이었다. 처음 가는 병원에, 그것도 혼자 가는 것은 무척 두려웠다. 거기다 예약을 하게 되면 언제 날짜가 잡힐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을 급하게 쥐었다 펴기를 두어 번 반복한 후 입을 열었다.
“네…… 혹시 폐가 안 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차는 있습니까? 없다면 내 차를 타고 갈까요?”
나는 반색을 했다.
“고마워요, 우버를 부를까 했었는데.”
“차가 없습니까?”
조쉬가 놀란 듯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중고차를 사 놓긴 했지만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오랜만에 편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마주 웃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내 몫의 팁까지 올려놓는 그를 보고 나는 거절하려 했지만 조쉬는 됐다는 듯이 손을 젓고 그냥 일어나 버렸다. 나는 음식값만을 올려놓고 뒤따라 일어섰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혼자 가는 건 역시 좀 긴장이 됐거든요.”
조쉬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보더니 선뜻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가면서 웨이트리스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요.”
급하게 고용주의 차를 슬쩍 타고 왔다던 그는 보란 듯이 람보르기니의 차 문을 열었다. 나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그 파티에 올 정도면 꽤 유명한 사람의 보디가드인 게 분명하다. 이렇게 멋대로 차를 타고 와도 되는 걸까?
꽤 친한 모양이지.
가끔 고용주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는 사용인들도 있는데 조쉬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친밀감이 넘치는 미남이지 않은가.
나는 내심 생각하며 뒤따라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이후로 그는 너무나 평범한 화제를 이어 갔다. 날씨부터 시작해 산불, 동부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 얘기까지.
“이 지역은 산불이 너무 많이 나요. 비가 좀 와야 할 텐데.”
무심한 조쉬의 말에 나는 문득 그날을 떠올렸다. 그토록 안 오던 비가 쏟아지던 날.
그날 나도, 키이스도 인생이 바뀌어 버렸다.
만약에 그가 그날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표식을 새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 봤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득 조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흘긋 시선을 향하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 할 얘기라도?”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의아해졌지만 그가 이내 눈을 정면으로 돌렸기 때문에 더 물어보는 것은 애매해지고 말았다. 결국 더 이상은 아무런 대화 없이 병원에 도착했다.
“잠깐만요.”
막 차에서 내리려는데, 조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
그것이 이어폰이라는 사실과 함께 나는 조쉬가 그걸로 귀를 감추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귀에 남겨진 표식이 이어폰 아래로 사라지는 것도.
아이의 다른 쪽 부모가 남긴 표식일까?
조쉬의 향이 약한 것은 약을 먹어서가 아니라 표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이어폰으로 귀를 감추는 것은 경호원이기 때문이겠지.
오메가라면 경호를 할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을 텐데.
표식이 있으면 다른 알파의 영향을 덜 받으니까 괜찮을지도.
동시에 나는 떠올렸다.
표식이 있는데 혼자 애를 낳다니, 어떻게 된 걸까.
물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조쉬 역시 마찬가지다.
“연우, 내려요.”
선뜻 문을 열고 내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은 내 일이 우선이었으니까.
*
*
병원이 위치한 곳은 번화가와 꽤 떨어진 한적한 동네였다. 몇 개의 상점이 모여 있는 거리는 다른 곳들이 그렇듯 고요했다.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은 몇 걸음 걷지도 않고 곧바로 세워 둔 차에 올라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기 일쑤였다. 나는 조쉬의 뒤를 따라 낡은 간판이 걸려 있는 산부인과로 들어갔다.
“어머, 조쉬. 웬일이에요? 혹시 둘째?”
접수대에 앉아 있던 직원은 조쉬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제법 살집이 있는 라틴계 여성은 조쉬에 대한 호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조쉬는 이런 반응이 으레 있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녀와 허그를 나눴다.
“잘 지냈습니까? 아쉽게도 내 일은 아니고, 친구를 소개해 주러 왔어요. 예약을 못 했는데 어떻게 안 될까?”
그리고 그는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조차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역시나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쉬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죠. 이 서류를 작성해 주시겠어요? 이다음엔 예약이 있고, 30분 정도 기다리면 될 것 같네요.”
“고마워요, 케이트.”
곧 그는 서류를 받아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그가 건네준 볼펜과 서류를 들고 빈칸을 채워 넣었다.
“이름은 대충 써요.”
조쉬가 소리를 낮춰 슬쩍 조언을 했다. 무심코 본명을 적을 뻔했던 나는 주춤 펜을 멈췄다. 잠깐 고민했다가 마침 TV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제품 이름의 철자를 슬쩍 바꿔서 적어 넣었다. 지켜보던 조쉬가 갑자기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자일리 톨은 뭡니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모른 척하고 묵묵히 계속 글자를 써 내려갔다. 문득 조쉬가 내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더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쉬는 다 적은 서류를 들어 직접 접수에 갖다주었다. 남은 건 이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조쉬의 말에 나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 혼자 왔다면 이 긴장감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같이 와 줘서.”
조쉬는 한쪽 어깨를 으쓱한 게 전부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40여 분이 지난 후 마침내 접수대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
*
진찰을 받는 동안 특별할 것은 없었다. 조쉬가 소개해 준 의사는 아주 친절했고,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다만 수술에 대해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개월 수가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표정이 굳어져 버리고 만 내게 그는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일찍 결정을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수술을 하게 되면 본인한테도 무척 위험할 수 있어요. 괜찮겠습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낳을 수는.”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달력을 뒤적였다. 짧지 않은 시간 고민하던 의사는 날짜를 지정해 줬다.
“도저히 이날 전에는 날짜를 뺄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제일 빠른 날이 이날이니까……. 혹시 가능하다면 다른 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아뇨, 꼭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곳을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이니까. 의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결정인 거 압니다, 힘내세요.”
그는 입에 발린 소리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베타인 그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까, 싶었지만 나는 그냥 네, 하고 말했다.
조쉬와 함께 병원을 나오자 벌써 시간이 꽤 늦어 해가 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혼자 올 수 있겠어요?”
조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이 친절하시네요. 고맙습니다, 좋은 분을 소개해 줘서.”
“별말씀을.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조쉬는 웃으며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라든가, ‘계속 이렇게 지낼 거냐’라든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봤냐’라든가 등등 그 외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머무는 모텔의 주소를 물어본 게 전부였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건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겁니까?”
그 말에 조쉬는 흘긋 나를 보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무례한 말이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연우가 그 정도로 간이 커 보이지는 않아요.”
진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저 쓴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내가 키이스의 귀에 표식을 새기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면 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언젠가 키이스가 내게 재미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천성이 그런 사람이니까.
모험 따위와는 거리가 먼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씁쓸하게 되새겼을 때였다.
“연우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저도 여기까지 도와주진 않았을 겁니다.”
“…….”
“동병상련이지, 뭐.”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작게 고맙습니다, 하고만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줄곧 거의 말이 없던 조쉬는 목적지에 다다랐을 무렵 모텔의 외관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여깁니까?”
그의 반응에 나는 무안해져 변명처럼 말했다.
“임시로 묵는 거니까요……. 조만간 옮길 겁니다.”
“빨리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맙소사, 내가 평생 본 주정뱅이들보다 더 많은 주정뱅이들이 여기 모여 있을 것 같네.”
그의 말마따나 길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몇 명의 남자들이 곧 눈에 띄었다. 한눈에도 질이 좋지 않아 보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막 차에서 내리려는데, 불쑥 조쉬가 말을 꺼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건 힘들어요, 잘 생각해 봐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엠마한테는…….”
“얘기 나눌 시간 따위는 없다니까.”
조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자 조쉬는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람보르기니를 바라보던 나는 곧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남자들의 휘파람 소리와 욕설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물쇠와 걸쇠를 모두 채우고 의자로 문을 막아 두기까지 한 후에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희미하게 곰팡내가 나는 침대에 털썩 눕고 나자 이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당장 억제제를 끊어요.>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처방을 받은 약도 몸에 치명적인 건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아이에게도 안 좋고……. 하긴 낳지 않겠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눈을 감았다. 키이스에게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날짜도 잡았다. 하지만.
무서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배를 만져 봤다. 낳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가발을 벗고 얼굴에 대충 그렸던 점들도 지웠다. 원래 사이즈보다 큰 옷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기름을 채우고 여분의 타이어를 하나 사자. 머릿속으로 내일 할 일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애써 아이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날도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어쩌지 못한 채 선잠에 빠져들었다.
* * *
갑자기 섬뜩한 기분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나는 누운 채 잠시 동안 눈동자만 데굴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들까.
멍하니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불빛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텔의 오래된 간판은 몇 개의 전선이 끊어져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MOTEL’이라는 글자가 ‘MIFI’라고 읽혔는데, 오늘은 왠지 간판이 아예 꺼져 있어 시커먼 글자가 음침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런데도 불구하고 밖이 환하다는 것이었다. 불이 꺼진 간판의 글자가 모두 읽힐 정도였다. 나는 의아해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 나는 순간 놀라 멈칫했다. 이 싸구려 모텔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들이 몇 대씩이나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나는 내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휘태커.
어떻게 알았지? 나는 일순 현기증을 느꼈으나 급히 창틀을 잡고 넘어지는 걸 면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텔을 옮긴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발각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나는 급히 짐을 챙겼다. 벌써 모텔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마 곧 내 방에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황급히 복도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미처 계단을 몇 개 밟기도 전에 먼저 아래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휘태커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뒤로 돌아 다시 위로 올라갔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아, 이쪽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모텔의 주인이었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더 이상 주저할 틈이 없었다. 나는 급히 가까운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세 번째에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미처 잠그지 않은 방에는 술에 취한 남자가 침대에 채 눕지도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급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거친 발소리들이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곧 멀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온몸을 긴장시킨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달아날 곳을 찾았지만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뒤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휘태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래는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잠시 뒤 문을 강제로 연 듯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소란이 일어났다.
“없어? 잘 찾아봐!”
“연우,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일단 나와서 우리와 얘기를 해요!”
“환풍기 쪽을 봐 봐, ……우리야 당연히 못 들어가지, 연우는 말랐으니까 가능할 거 아냐? 떼어서 머리를 넣어 보라고, 혹시 거기 있는지!”
“이쪽에는 없는데요.”
“다시 찾아봐!”
아우성을 치는 사내들의 음성에 각자의 방에서 곯아떨어져 있던 주정뱅이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나는 조마조마해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방의 주인을 훔쳐봤지만 그는 요란하게 코를 골 뿐 미동조차 없었다. 한편 바깥에서는 잠이 깬 투숙객들의 거친 항의가 이어졌다.
“뭐야, 도대체. 이 망할 새끼들아, 잠도 없어?”
“너네 엄마 찾냐? 저기서 몸 팔고 있어, 가서 너도 달라고 해 봐!”
“씨발 새끼들, 들어와서 내 좆이나 빨아!”
“대체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내가 죽기를 원해? 네놈들 다 고소할 거야!”
사방에서 난리였다. 휘태커도 이런 난장판은 그다지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슬쩍 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니 그들도 우왕좌왕하며 난처해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 끝까지 눈치를 살피며 간신히 도착했다. 급하게 뛰어 내려갈 때까지도 운은 따라 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연우!”
모텔의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경호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모텔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왔다. 2층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그들의 모습도 보였다.
서둘러 차를 타고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거기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차를 포기하고 뛰기 시작했다.
훤하게 뚫린 도로변의 모텔은 주변에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기를 쓰고 달려가 마침내 건너편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그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최대한 몸을 숙인 채 숨을 곳을 찾았다. 운 좋게 작은 토끼 굴을 발견했다. 나는 즉시 안으로 기어들어 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연우!”
“연우, 나와요. 제발!”
“얘기 좀 합시다, 망할, 왜 이렇게 골탕을 먹이는 겁니까?”
경호원들이 번갈아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더더욱 작게 웅크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두려워 한껏 작게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밤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때였다.
아.
갑작스러운 복통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는 간신히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했다. 문득 내 몸에서 향기가 느껴졌다. 오메가의 향이었다.
하필 이런 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들은 감마라서 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고 나면 또 은신처를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향이 흘러넘치면 곤란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떠돌이 알파들이 손쉽게 오메가를 납치해 윤간하는 행위였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운 나쁘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살면서 그리 운이 좋은 적이 별로 없었다.
“으…….”
입가로 새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배는 계속해서 저리듯 아파 왔다. 혹시 아이가 어떻게 되려는 걸까?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이상 억제제는 먹으면 안 돼.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하지. 병원에 가 보자. 날이 밝는 대로 진찰을 받고, ……아니지, 난 약을 먹어도 돼. 이 아이는 이제 없어질 테니까. 그러면, 그러면…….
……?
문득 나는 눈을 떴다. 현실을 깨닫는 데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상태로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사방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포기하고 가 버린 걸까?
……아.
움직이자 또다시 배가 아파 왔다. 하지만 아까만큼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은근히 배 안쪽을 잡아당기듯 뻐근한 감각에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 곳곳이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는 듯했다.
“후우.”
나는 간신히 막혔던 숨을 뱉어 냈다. 막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저쪽에 뭐가 있어!”
“뭐? 어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내가 안심하고 모습을 드러내길 그들은 숨죽여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나로 착각하고 쫓아간 것은 뭐였을까. 토끼? 코요테? 어쨌든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에 그 순간 배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게 배를 내려다봤다. 순간 많은 감정이 내 안에서 복잡하게 일어났다.
나는 더욱 깊이 굴속에 몸을 웅크린 채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최대한 조용히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어느새 해가 떠오를 시간이 됐다. 간신히 그들을 따돌렸다는 걸 확신하고 굳어진 몸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날이 밝고 얼마간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아.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밝아진 세상 아래 조심스럽게 주변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달아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려 그만 몸의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발을 떼 숲을 빠져나갔다.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어떻게 알아냈을까.
혹시 몰라 모텔과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직 이 주에 머물고 있다는 걸 들켜 버렸으니 어떡하지.
나는 초조하게 생각을 떠올렸다. 진작에 그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라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예정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순차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수입이 적더라도 안정적인 회사로 이직을 해 조용히 숨어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DNA가 발견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꼬이는 바람에 급하게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덕에 마지막에 그런 짓도 할 수 있었던 거지만.
아직도 그때 본 키이스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표식을 남긴 오메가를 죽이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그게 나였으니 곱게는 안 죽일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어이없게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그 남자 모르게 평생 숨어 지내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판타지였어.
나는 냉정하게 자신을 꾸짖었다. 이젠 차선책으로 구상했던 계획도 아슬아슬했다. 국경을 넘어 멕시코나 캐나다로 가려 했지만 캐나다는 너무 멀었다. 선택지는 멕시코였다. 그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든가 제3국으로 떠나든가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가장 필요한 건 차였다. 놔두고 온 차가 아쉬웠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선 새로 중고차를 사고 위조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 머물렀던 모텔에서 브로커와 만나기로 했었는데 다 틀려 버렸다.
다시 그에게 연락을 해 봐야…….
약속이 깨져 버렸으니 어차피 거래는 끝나 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다 실패해 버렸다.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간신히 도로로 나왔을 때는 벌써 해가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밤새 숲을 헤맨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가까운 곳에 모텔이 있다면 무작정 들어갔을 테지만 주유소조차 없었다. 나는 터덜터덜 기운 없이 걸음을 옮겼다. 휴대 전화를 확인해 봤지만 신호가 뜨지 않았다.
진퇴양난이라는 게 이런 걸까.
나는 비틀거리며 끝도 없는 도로를 걸어갔다.
* * *
몇 시간째 무시무시한 햇볕이 내리쬈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잠시라도 멈춰 서면 다시는 발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현기증이 심해져 밭은 숨을 뱉어 냈다. 목이 말랐다. 입 안이 타들어 가고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이대로 쭉 걸어가다 보면 멕시코가 나올까?
나는 흐린 정신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밴에 밀입국자를 태워 싣고 온다는 업자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반대로 가는 경우도 있을까? 물론 있겠지? 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업자에게 다시 전화를 해야 한다. 멕시코에 가면 이렇게 숨 막히게 쫓기는 일은 없겠지? 멕시코. 그래, 멕시코.
문득 그곳이 지상 낙원처럼 여겨졌다. 멕시코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아무 문제 없이.
목이 말라.
나는 억지로 침을 만들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흐려지는 눈을 깜박이며 억지로 발을 뗐다. 얼마나 걸었을까? 몇 시쯤 됐지? 휴대 전화는, 아직인가……?
기운 없는 손을 들어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통화는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그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계속해서 걸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도주를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체력을 더 키워 놓을 걸 그랬어.
그랬다면.
나는 흐린 눈을 깜박였다.
아, 그랬다면.
♬♪♪♩♬♩♩…….
처음에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들리긴 했는데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내 휴대 전화의 벨 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자 이번에는 놀라서 반응이 늦어졌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역시나 전화가 오고 있었다. 조쉬의 번호였다.
나는 급하게 버튼을 눌렀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통화가 연결되는가 싶더니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당황했지만 곧바로 희망이 생겨났다. 전화가 된다. 근처에 기지국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내게 생각지 못한 힘을 줬다. 지쳐 늘어지던 발걸음이 어느새 빨라졌다. 누구든 좋으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어떤 가게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걸 수 있다면,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아.
마침내 저 멀리 주유소 겸 식당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
*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던 웨이트리스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간단히 알은체를 할 여유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아무 자리나 찾아 앉은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기다렸다. 망설이던 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와 내 앞에 놓아 주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차가운 물 한 잔뿐이었다. 웨이트리스가 테이블에 컵을 놓고 물을 따르는 것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한 잔의 물이 가득 차기가 무섭게 그것을 들어 벌컥거리며 전부 마셔 버렸다. 물을 들이켜는 도중에도 목 안은 계속해서 버석거리며 좀처럼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웨이트리스가 다시 물을 채워 주고, 석 잔을 연거푸 마신 후에야 비로소 나는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당신, 괜찮아요?”
웨이트리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빈 컵을 내려놓고 간신히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더니 내 앞에 메뉴판을 밀어 준 후 돌아섰다. 피로가 밀려왔지만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왔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휴대 전화를 꺼냈다. 분명히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안도감에 울고 싶어지는 것을 참고 번호를 눌렀다. 조쉬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무심코 정면에 놓인 TV로 시선을 향했다.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잠시 뒤 벨 소리가 끊기고 기다렸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우?]
“조쉬.”
나는 막혔던 숨을 내뱉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하려는데, 조쉬가 먼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어딥니까? 무사해요?]
“네? 아…… 네, 일단은. 미안해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자꾸 조쉬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민망했다. 일을 하는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건 실례지만 조쉬가 먼저 했으니 괜찮아, 하는 생각과 함께 이번은 정말 어쩔 수 없으니 마지막이라고 내심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에 신세를 진 건 언제고 꼭 갚겠다고.
일이 생겨 차도 버리고 도망 나왔다는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하고 나는 슬쩍 주변을 훔쳐봤다. 다행히 가게 안은 휑해 손님이 얼마 없었다. 그나마 머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노인 하나가 TV를 보며 커피를 마시는 게 전부였다. 직원들도 한가롭게 수다를 떠는 것을 보고 내가 겪은 일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조쉬가 또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어딘지부터 얘기해요, 내가 일단은…… 아, 더는 못 나가는데. 우선 말해 봐요, 어딥니까? 주변에 사람들 많아요?]
“아뇨, 별로…….”
이상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우선 메뉴판에 적힌 가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조쉬는 받아 적는 것 같더니 곧바로 진지하게 당부했다.
[좋아요, 거기 손님이 없다면 잘됐군요. 거기 그대로 있어요, 가능한 한 구석 자리에 앉고. 어디든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왜 그러는 겁니까? 대체 무슨…….”
그때였다. 무심코 화면을 본 나는 그대로 시선이 정지해 버렸다. 내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눈을 크게 뜬 내 귓가에 조쉬의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키이스 피트먼 그 망할 자식이 당신을 찾겠다고 현상금을 걸었어요. 당신 앞으로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려 있단 말입니다. 알아듣겠어요? 전국에서 당신을 찾겠다고 지금 난리가 났다고. 지금 연우가 슈퍼볼 경기보다 더 핫해요. 수시로 TV를 틀면 나오고 인터넷에 온통 당신 사진밖에 없어요. 이대로라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당신을 찾기만 하면 파워볼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난리예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대체 피트먼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한탄 같은 혼잣말을 마지막으로 조쉬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이미 화면은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
*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기다리는 동안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가게의 안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봤다. 어느새 식당 안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벌써 식사 시간이 된 것이다.
가게 밖에는 장거리를 달리는 트럭들이 몇 대씩이나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도로를 달리는 트럭 운전사들이 가게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려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작은 움직임이 그만 시선을 끌고 말았다. 웨이트리스를 부르려 두리번거렸던 건장한 남자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그러나 예감이 좋지 못했다. 그 남자가 그냥 넘길 것 같지가 않았다.
역시나 남자가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사내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흘긋거렸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조쉬의 말이 되살아났다.
<당신을 찾기만 하면 파워볼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난리예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망설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 화장실에라도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조쉬는 언제쯤 오는 걸까? 슬쩍 벽시계를 보자 통화를 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나는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남자들은 여전히 나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곧바로 남자들이 일어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나는 순간 놀라 멈칫했다. 흔히 볼 수 있는 덩치 큰 사내 둘은 지금 상황에서는 유난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봐, 뭐가 그렇게 급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그쪽도 혼자야?”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두가 구경을 하듯 바라보기만 할 뿐 도와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뇨, 곧 일행이 올 겁니다.”
그러자 남자가 히죽 웃었다.
“언제? 아까부터 계속 혼자 있던데.”
남부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쓰는 그는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다 밥줄을 이어 가려 주섬주섬 운전대를 잡았을 것 같은 거친 용모의 사내였다. 또 다른 남자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식사하는 동안 그냥 가볍게 얘기나 나누자고. 피차 심심하잖아, 안 그래?”
“아뇨, 전 괜찮…….”
“이쪽으로 앉아.”
다짜고짜 팔이 잡혀 억지로 그들의 자리에 앉혀졌다. 나는 일어서려 했지만 곧바로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섭섭하게 왜 이래? 우리가 꼭 뭐라도 할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간절하게 바라봤지만 그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런 일은 으레 있는 것처럼.
사내는 여유 있게 내 어깨를 밀어뜨렸다. 나는 맥없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굳이 가까이 대지 않고도 남자는 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킁킁거리던 그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 자식, 오메가 맞는데?”
그러자 다른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렇게 페로몬이 넘치는데 아닌 게 이상하지. 혹시 너, 사이클이 온 거 아냐? 냄새가 어마어마하다고. 가게 안 가득히 다 네 냄새야.”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봤다.
“너지? 이거.”
남자가 바지 뒤춤에서 주섬주섬 꺼낸 꼬깃한 종이에는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0’이 무수히 찍힌 현상금 또한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공포에 질려 온몸이 굳어졌다. 향기가 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황급히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내 어깨를 잡아 밀어뜨렸다. 나는 그대로 긴 의자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어딜 가려고?”
사내가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공포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은 소동에 다른 남자들이 끼어들었다.
“뭐야? 뭔데?”
“뭐 하는 거야? 너희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누르고 있던 남자 뒤에서 흘끔 시선을 던진 사내가 깜짝 놀랐다.
“이 자식, 지금 한창 난리 난 그 녀석 아냐? 맞지? 현상금이 어마어마하다고.”
“정말이야? 그 파워볼이라고?”
뒤이어 다른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나를 잡은 남자들이 성질을 냈다.
“꺼져, 이 새끼들아. 우리가 잡았다고! 넌 뭐 하고 있어? 어서 전화해, 빨리!”
그들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0’이 수없이 찍힌 수표 한 장이었을 뿐이다.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황급히 번호를 누르는 사내에게서 휴대 전화를 빼앗은 남자가 흘긋 나를 내려다봤다.
“이봐, 돈이 얼만데 그걸 혼자 먹으려고 들어?”
“좋은 건 나눠야지, 안 그래?”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나눴다. 나를 붙잡은 남자들은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냥 끌고 나갔어야지.”
한쪽이 타박을 하자 다른 쪽이 화를 냈다.
“알아본 게 누군데 네놈이 감히 나를 탓해?”
“자자, 다투지 말고 모두 좋게 좋게 끝내자고. 적당히 나눠도 될 만큼 많은 돈이잖아, 안 그래?”
한 남자가 중재에 나섰다. 그래 봤자 그의 얼굴에는 욕심이 가득 차올라 있었지만. 나를 잡은 사내들이 서로 시선을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쪽이 고함을 지르며 남자들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혼자서 그 남자들을 모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안간힘을 쓰며 그가 버티는 사이 나를 잡고 있던 남자가 다급하게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켜 가게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앞을 가로막혔다.
“오, 안 되지, 안 돼.”
서너 명의 사내들에 의해 진로를 막히자 나를 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를 넘기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 봐, 이 자식 목을 비틀어 버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 그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쳤다. 남자가 쓰러지면서 나를 놓치고, 삽시간에 실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다급하게 몸을 굴려 달아나는 나를 잡으려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 댔다. 그 와중에도 서로 상금을 독차지하겠다고 난투극을 벌이고, 또 놓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고, 주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나는 몇 번씩 잡혔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하며 마침내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개인실로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그자 곧바로 내 뒤를 쫓아온 사내들이 아우성을 치며 사방에서 문을 두드려 댔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 냈지만 이미 늦었다. 사방이 꽉 막힌 화장실 안에서 이대로 조쉬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옷 여기저기가 찢겨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남자들은 문을 두드려 댔다. 이러다가 문이 부서지거나 휘태커가 와버릴 것 같았다. 지난밤 내 뒤를 바짝 쫓아왔던 그를 떠올리고 사색이 됐을 때였다.
“……?”
문득 문밖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곤두세우고 들어 보니 비명과 함께 때리고 맞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뭐야, 너는? 억!”
“자, 잠깐! 잠깐만!”
남자들의 아우성 소리와 난투극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는 것 같더니 마침내 잠잠해졌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숨을 죽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으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잠시 뒤 건너편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다 처리했어. 나와.”
딱, 하고 껌을 터뜨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누구지, 이 사람은? 두려움에 떠는 내게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 연우 맞지? 조쉬가 부탁해서 왔어.”
기다리던 이름에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잠긴 문을 열려던 찰나 뒤늦게 경계심이 들었다. 믿어도 될까? 설마 아까 전화를 누가 들었다든가…….
조쉬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전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자 섣불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봐, 난 바빠. 당장 나오지 않으면 혼자 가 버릴 거야, 할 만큼 했으니까.”
“…….”
“좋아,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간다. 하나 둘 셋.”
“자, 잠깐!”
번개처럼 숫자를 세고 돌아서는 남자를 나는 당황해 붙잡았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자 반쯤 돌아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서 있는 사람은 그 남자와 나뿐이었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덩치 큰 사내들이 죄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거나 아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 남자 혼자서 다 해치운 건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남자는 큰 보폭으로 단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섰다. 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첫눈에 알아봤지만 눈앞에 선 그는 놀랄 만큼 키가 컸다. 그만 목을 빼고 올려다보고 만 내게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데인 스트라이커. 조쉬의 친구야.”
“……친구요?”
놀라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귀찮아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뒤늦게 남자가 껌을 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놀랄 만한 미남자가 어딘지 낯이 익다는 사실도. 남자가 헝클어진 붉은 금발을 아무렇지 않게 쓸어 넘기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그를 기억해 냈다.
“달력…….”
남자가 손을 멈추고 찌푸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분명했다. 지난해 소방관 달력의 표지를 장식했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