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77)

39

“머리 숙여.”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납작 엎드렸다. 곧이어 섬뜩한 바람 소리와 함께 건너편 도로에서 차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갔다.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나는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낯익은 몇 대의 세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휘태커와 그의 부하들이 탄 것이었다.

아슬아슬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옆에서 데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안해져 흘긋 눈치를 봤다.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남자는 거의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걸고 대화를 이끌어 내는 조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딱, 하고 소리를 내어 껌을 씹었던 남자가 곧이어 풍선을 만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문득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데인 스트라이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소방관이 맞는다고 했다. 달력의 표지 모델이었던 것도 맞았다. 당시 비서실의 직원들이 사무실에 그 달력을 걸어 놓고 꽤 열렬한 반응을 보인 데다가 비록 지나가며 언뜻 본 거라고는 해도 거의 1년 가까이 걸려 있던 사진의 주인공을 실제로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거기다 조쉬와 지인이라니.

남자가 표지를 장식했던 달력에 대한 얘기를 하자 그는 아, 하고 여전히 귀찮아하며 말했다.

<하도 매달려서 찍었더니.>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때문에 나는 무안해지고 말았다. 마치 유명 선수를 만난 훌리건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인사를 하자 데인은 딱, 하고 소리 내어 껌을 씹은 후 말했다.

“조쉬의 빚을 갚은 것뿐이야.”

그리고 그는 선글라스를 쓰더니 혼잣말을 했다.

“그 자식은 사람이 너무 좋아. 목숨값을 고작 이런 데 쓰다니.”

“네?”

깜짝 놀라 바라보자 데인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부대에 있었어. 수류탄이 터졌는데 그 자식이 날 구해 줬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됐다.

“조쉬와 당신, 둘 다 군대에 있었습니까?”

“그래. 제대 후에 그 녀석은 경호원, 난 이것저것 하다가 소방관.”

거기까지 말한 데인이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 캐냈으면 이제 그 입 좀 다물지 그래? 난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네.”

조쉬의 친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까칠한 남자였다. 나는 급히 입을 다문 후 그 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데인의 집은 번화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0년이 넘었다는 주택은 길을 가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단층집이었다. 그는 차를 차고에 넣고 곧바로 연결된 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발을 들여놓았다.

“잠깐.”

갑자기 그가 나를 제지했다. 멈칫하며 올려다보자 데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고양이 알레르기 있어?”

“……? 아뇨, 없는데요.”

“그럼 들어와.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데인은 선뜻 내뱉고 돌아섰다. 의아해하며 들어갔던 나는 곧 이유를 알게 됐다.

“달링!”

뜻밖에도 데인은 환하게 웃으며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곁들여지자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맙소사, 조쉬와 둘이 길을 걸어가면 여자들이 떼로 덤벼들겠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물며 남자들조차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듯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데인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돌아섰다.

“이쪽은 달링이야. 내가 없을 땐 네가 이 아이를 돌봐 줘야 돼. 그게 네가 여기 머무는 조건이야.”

고양이에게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다른 싸늘한 말투로 그는 내게 경고했다.

“혹시 달링의 털끝 하나라도 손상되면 그때는 네놈을 발가벗겨서 길에 내놓을 거야, 알아들었어?”

의심의 여지 없이 데인은 진심이었다. 나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곧 걸음을 돌려 집 안을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침실은 하나였고 다른 방은 창고 겸 서재로 쓰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욕실은 두 개였다. 그는 바깥쪽의 욕실 겸 화장실을 내게 쓰도록 허락했다. 한쪽에 달링의 모래 화장실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모래는 여기 있으니까 봐서 교환해 주고.”

자신에 대한 것보다 달링에 대한 주의 사항이 더 많았다. 신기하게도 달링은 한 번도 울지 않고 데인에게 얌전히 안겨 있었다. 내게 호기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달링은 한쪽 눈이 안 보이고 귀도 멀었어. 네가 알아서 잘 피해 다녀.”

나는 이번에도 네, 하고 대답했다. 대충 안내를 받았지만 정작 내가 잘 곳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내게 그것을 눈치챈 데인이 빈정거렸다.

“내가 소방관이라고 하면 당연한 듯이 양보를 바라는데 넌 그렇게 뻔뻔한 인간이 아니길 빌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닙니다. 단지, 어디서 자면 될지…….”

그는 흘긋 소파로 시선을 향했다. 보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오래된 싸구려 소파였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조차 감지덕지했다.

“감사합니다…….”

“됐어. 그보다 너, 이제 억제제는 안 먹나?”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라 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어렵게 대답했다.

“아이…… 때문에……. 의사가, 먹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이 남자는 뭘까? 베타인가?

뒤늦게 나는 불안해졌다.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베타인 것 같았다. 설마 이 남자가 오메가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쉬도 오메가였는데.

거기다 아이까지 낳았다. 나는 이 남자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조쉬보다 더 큰 데다 전반적으로 늘씬하긴 해도 제법 근육이 있었다. 거기다 아까 덩치 큰 트럭 운전사들을 혼자서 몇이나 때려눕힐 정도로 대단한 완력의 사내였다. 체지방이라고는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탄탄한 몸에 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러나 데인은 더 이상 설명을 해 주지 않고 달링을 다시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나에게 침대 대신 내준 소파였다. 소파 한가운데에 편안하게 누워 천천히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의 모습에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가더니 곧 침구를 가지고 나왔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데인이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물소리가 났다. 그가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뭔가를 눈치챘는지 달링이 머리를 들었다. 사뿐 소파에서 뛰어내린 달링은 곧바로 데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빈 소파에 간신히 몸을 기댈 수 있게 됐다. 방금 전까지 달링이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아 눈을 감았다.

“……아야.”

또다시 배가 아파 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까처럼 긴장되지 않았다. 그저 조만간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역시 이 아이는 낳을 수 없어.

흐릿한 정신으로 나는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미안해, 하지만 안 돼.

미안해.

나는 거듭 되뇌며 눈을 감았다.

너한테 공평하지 않은 거 알아. 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변명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했다.

* * *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지도 못한 채 며칠이 흘렀다. TV를 켜면 수시로 나오는 내 얼굴에 나는 TV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감금이라도 당한 것처럼 집 안에만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니 용기를 내어 뒤뜰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물론 며칠간 관찰한 끝에 옆집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시도한 바깥출입이었다.

주방과 통해 있는 문을 열고 나가면 작고 아담한 정원이 있었다. 거기에는 라임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매년 열매가 몇 개 열리지 않는다고 데인은 투덜거렸다.

달링은 새로운 사람이 온 데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귀가 안 들리고 눈이 성치 못하더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을 텐데 특별히 나를 경계하지도, 그렇다고 달라붙지도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에게 이방인이기 때문이었다. 달링이 화재 현장에서 구출된 고양이라는 것과, 그 후 장애를 입은 그를 입양해 기르게 됐다는 얘기를 언젠가 술에 취한 데인이 주정처럼 늘어놓았다. 덕분에 그들의 특별한 유대감은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됐다. 언젠가 잠들어 있는 데인의 배 위에 올라가 몸을 말고 자는 모습을 보자 달링이 마음을 여는 것은 오직 데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데인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이따금씩 여자 혹은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대부분은 가벼운 하룻밤 상대로 보였다. 특정하게 연인을 두지 않고 이따금씩 클럽에 가 상대를 구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봤던 얼굴이 또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 봤자 데인은 가벼운 아침을 만들어 먹인 후 문 앞에서 그나 그녀를 배웅했다. 특별 대우는 없었다.

데인은 자신에 대해 묻지 말라고 했지만 타인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에 관한 것도 별다른 걸 묻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지내기가 무척 편했다. 다만 그가 상대를 데려올 때는 어떻게든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시나 알아보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그럴 염려는 별로 없었다. 항상 그들은 만취해 있었고, 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날은 밤이 새도록 온갖 소리를 질러 대며 섹스를 하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데인은 피곤한 얼굴로 냉장고를 뒤져 계란을 부치고 베이컨을 구웠는데, 밑에는 낡은 파자마를 입고 위는 벗은 채였다. 그런 날은 나 또한 어부지리로 아침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그는 2인분의 아침 식사를 침실로 가져가 사이좋게 나눠 먹은 뒤 현관에서 깨끗이 인사를 하고 끝내는 것이다. 가끔은 우버를 불러 주기도 했다.

그는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이었다. 이따금 담배를 피웠지만 골초는 아니었고, 한번 마시면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취했지만 절대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 방탕한가 싶으면 도덕적이었고, 정석적이다 싶으면 일탈을 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쑥 그가 내게 병원에 대해 물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조쉬가 그러던데, 같이 가 주라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엉망으로 뒤집어진 붉은 금발을 아무렇게나 긁적이며 데인이 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잠깐 사이를 두었다 대답했다.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못해서…….”

우버를 부르는 것도 겁이 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인은 그럴 만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물론 그렇겠지. 북미에 네 얼굴이 쫙 깔렸는데. 대통령도 너보단 덜 유명할 거야.”

농담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병원에 가는 날이 언젠지 물어본 뒤 덧붙였다.

“그래서, 아이는 어떻게 할 거야? 없애는 게 확실한 거라면 그 시간도 포함해서 비워 놔야지.”

심드렁한 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기 위해 가는 것인데도 데인의 말에 대답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간을 포함해서…… 비워 주시면.”

“알았어.”

데인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선뜻 대답하더니 곧 냉장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날짜는 이틀 뒤였다. 병원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날 나는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입 안이 마르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 * *

당일 날씨는 언제나처럼 화창했다. 나는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출발 전까지 평소처럼 시간을 보냈다.

데인은 짙은 빨간색의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었다. 나는 그가 사다 준 비슷한 색의 니트와 역시 청바지를 입었다. 데인은 기다리던 나의 전신을 흘긋 훑어보더니 짧게 말했다.

“잘 어울리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선뜻 나를 지나쳐 나가 버렸다. 나는 서둘러 데인의 뒤를 쫓아 나가 차에 올라탔다.

전날 그는 일찌감치 귀가해 뜻밖의 말을 했다.

<염색을 할래?>

직접 사 온 듯 그의 손에는 염색약이 들려 있었다. 놀라 바라보자 데인은 무심히 말했다.

<최소한 머리색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어? 아는 녀석이 영화 쪽 일을 하는데 특수 분장도 도와줄 수 있다던데.>

그가 이런 걸 세심히 챙겨 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 고맙습니다. 하지만 염색은…….>

무심코 배를 만지자 데인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차피 내일 없앨 거잖아.>

순간 멈칫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내일이 되면 모든 건 사라진다.

알고 있는데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주저하는 나를 본 데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염색약을 소파 위에 올려놨다. 생각 있으면 하라는 듯이.

하지만 나는 결국 선택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됐을 때 여전히 검은 머리인 나를 보고서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시큰둥했다. 그저 평소처럼 무심하게 쇼핑백을 내민 게 전부였다. 그 안에는 옷과 가발이 들어 있었다.

<커플인 척하면 시선을 덜 끌 거야.>

<아…… 감사합니다.>

그가 이런 호의를 베풀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얼떨떨했다. 그리고 지금 데인과 나는 커플 룩을 입고 산부인과로 향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커플이 2세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데인의 말이 맞다. 이러면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거기다 얇은 스카프를 둘러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가발에 안경까지 썼다. 시간은 가장 늦게 잡았다. 우리 다음에는 환자가 없다고까지 확인을 받았다. 처음부터 가명을 쓰고 변장을 했으니까 나를 알아보는 건 어려울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다 접수를 받던 직원은 나보다 조쉬에게 훨씬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 내 얼굴 따위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거기다 오늘은 그때보다 더 신경 썼으니까.

나는 데인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가 내게 영수증을 내밀기 전까지는. 거기엔 염색약과 옷 값 및 소소한 변장에 사용한 모든 경비가 정확히 적혀 있었다. 세금을 포함해서.

“……돌아가서 드리겠습니다.”

내게 전기세나 기타 잡비를 받지 않는 게 어딘가 싶었다. 어쨌든 나는 일부라고는 해도 무료로 그의 집을 사용하는 것이다. 차가 신호에 걸린 사이 데인은 껌을 꺼내 입에 넣었다. 딱, 하고 그는 습관처럼 입 안에서 껌을 터뜨렸다.

*

*

“어서 와요…….”

기대했던 대로 병원은 한산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접수계의 직원은 변장한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다 곧이어 나와 함께 들어온 키가 큰 미남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분이 파트너이신가요?”

아이 아빠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내 그녀는 눈치를 채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왔네요. 주의 사항은 모두 들었죠? 더 궁금한 건 없나요?”

“네.”

나는 긴장이 되어 고작 그 한 마디만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지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를 의자에 앉혔다.

“간단히 활력 징후를 체크할게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금방 끝나니까.”

그녀는 기운을 북돋워 주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네, 하고만 말했다. 수술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잘 부탁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문 쪽을 쳐다봤다. 그대로 일어서서 달아나 버릴 것 같아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이제 곧 다 끝나.

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 끝날 거야.

후, 하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문득 배 속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사이 또다시 뭔가가 움직였다.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번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복통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감하지 못했던 아이가 왜 하필 이 순간에 이렇게 내게 말을 거는 걸까.

내 안에 네가 존재하고 있다고.

“이봐.”

갑자기 데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직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비됐나요? 이제 들어가죠.”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 좁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없었다.

태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게 아이가 움직인 건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크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계속되던 복통이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 여기로 들어가세요.”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들어가자 그녀가 옷을 찾아 내주었다.

“갈아입고 나와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곧이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주섬주섬 니트를 벗었다. 시야에 들어온 복부는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오메가들은 그다지 배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임신 말기까지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똑똑, 끝났어요?”

기다리던 직원이 입으로 노크 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나는 뒤늦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곧 나를 건너편 방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수술실인 듯했다. 나는 복도에 멈춰 선 채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모든 게 끝난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복통도, 메스꺼움도, 현기증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내 복수는 모두 마무리될 것이다. 키이스는 이제 결코 어떤 아이도 가질 수 없게 될 테니까.

영원히 그는 혼자겠지. 나처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이 아이마저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직원이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고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가빠져 밭은 숨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그녀가 당황해 내 팔을 붙잡았다.

“어머, 왜 이래. 정신 차려요, 여기 좀 봐요……. 선생님!”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안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내 위로 의사가 놀라 물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간호사, 여기 바이털 체크부터 해 줘요. 휠체어 좀 가져오고.”

이어지는 지시에 직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웅크린 채 숨만 몰아쉬는 내게 의사가 말을 걸었다.

“진정해요, 괜찮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그래요. 오늘 힘들 거 같으면 다음에 스케줄을 다시 잡아도 되니까…….”

의사의 말이 조금씩 멀어졌다. 귓가에는 내 숨소리만이 거칠게 울려 퍼졌다. 마치 심장 소리 같은 둔탁한 울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건 누구의 심장일까.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선생님.”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 그만두겠습니다. 수술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뱉어 내고서야 비로소 자각했다.

“낳겠어요…….”

입 밖으로 그 말을 토해 내자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차마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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