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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동안 데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많지 않은 남자였으니 별다를 것도 없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가만히 배를 만져 봤지만 역시나 현실감은 없었다. 내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는 것도. 이제 이 아이가 내 인생을 함께해 줄 거라는 사실도.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데인은 차고에 차를 넣고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는 언제나 그렇듯 달링이 엎드려 있었다. 선뜻 고양이를 안아 든 데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도 먹을까?”
파트너를 데려온 다음 날 아침을 제외하고 집에서 그가 뭔가를 만들어 주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달링을 다시 소파에 내려놓은 데인은 선뜻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꺼내고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뭔가 도울 게 있을까 싶어 주방을 얼씬거리자 그는 흘긋 내 뒤쪽을 보며 말했다.
“달링의 간식을 챙겨 줘.”
그의 말에 따라 나는 캔을 따서 접시에 덜어 주었다. 바닥에 내려놓자 그때까지 한가롭게 꼬리를 흔들고 있던 달링이 두리번거렸다.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훌쩍 소파 밑으로 내려와 어렵지 않게 접시를 찾았다. 작게 소리를 내며 닭고기를 먹는 달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금세 샌드위치를 완성한 데인이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몫으로는 맥주를, 내 앞에는 주스를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데인은 먹기나 하라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인 게 전부였다. 샌드위치는 별 내용물이 없는데도 제법 맛있었다. 나는 묵묵히 주스와 함께 한 개를 전부 다 먹어 치웠다. 그동안 데인은 맥주를 마실 뿐 샌드위치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흘긋 내 빈 접시를 보더니 선뜻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묻지도 않고 주방에 들어가 금세 하나를 더 만들어 왔다.
“고, 고맙습니다.”
나는 무안해하며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금방 다 먹어 버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배가 고팠다. 결국 데인은 손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를 나는 세 개나 먹고 말았다. 겨우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자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거기다 데인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렇게 말랐는데 많이도 먹네.”
나는 대꾸도 못 하고 주스를 홀짝거렸다. 데인은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낳아서 키울 거야?”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무심코 그를 바라보자 데인이 한 번 더 물었다.
“키우다가 아이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언제나 똑같을 수는 없다. 설령 내가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도 다른 감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데인이 흘긋 내게 시선을 향했다. 그의 서늘한 미모에 야유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오메가를 믿을 수 있을까.”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오메가를 믿지 못한다니.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드리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그 자리에 남겨 둔 채, 데인은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잠시 멍해져 있다가 주섬주섬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데인은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여느 때처럼 달링에게 키스하고 몸을 어루만져 준 뒤 출근을 한 것이다. 내게는 별다른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혼자 집 안에 남은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데인의 방에 들어가 대충 정리를 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이 눈에 띄었다. 들어 보니 발송하려고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신호가 울리고 난 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달링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아뇨, 별일은 아니고 청소를 하다가 우편물을 발견해서…… 우체통에 넣어 놓을까요?”
[고작 그걸로 전화를 걸었다고?]
데인은 기가 막힌 듯이 짜증을 냈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메시지를 보냈다가 늦게 확인하면 수거 시간이 지나 버리니까요.”
데인은 허무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그렇게 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우선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해서 보낼 것과 보류할 것을 분류했다. 아직 우체부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게다가 옆집은 비어 있을 시간이었다. 아주 타이밍이 좋았다. 나는 서둘러 봉투 몇 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주택가는 텅 비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고요한 동네인 데다 이 시간에는 특히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현관을 나와 곧바로 우체통으로 갔다. 우편함에 봉투를 넣고 깃발을 올린 뒤 돌아서는데, 아무렇게나 현관 근처에 던져져 있는 신문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 안으로 돌아와 고이 접어 데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문득 아련한 향수가 느껴졌다. 바쁘게 지내던 일상, 키이스의 변덕에 맞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나날들, 불평을 하는 다른 비서들을 다독이고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스케줄을 확인하고…….
뒤늦게 내가 그런 생활들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키이스의 곁에 있는 것이 좋았지만 못지않게 내 일을 사랑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비서라는 직업이 아주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쑥스럽지만 유능하다는 말도 곧잘 들었고, 제법 임기응변도 있는 편이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데인에게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어쨌든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 저 멀리 이름도 안 알려진 마을에 숨어 버리면 전혀 모르지 않을까.
일은 금방 배울 수 있으니 작은 법률 사무소라든가 하다못해 조그만 영세 업체의 사무직이라도 좋았다. 물론 키이스의 비서로 있을 때만큼의 다이내믹한 일상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갑자기 의욕이 솟아올랐다. 나는 급히 컴퓨터를 켰다. 데인은 내가 집안일을 끝내고 난 후라면 뭘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도 물론 허락했다. 그의 모든 자료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지만 어차피 인터넷을 주로 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일자리를 찾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나는 빠르게 화면을 뒤적였다. 어느 주건 상관없었다. 작은 마을일수록 좋았다.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혹시 병원에 다니기 힘들 수도 있으니 출산은 이쪽에서 하고 가는 게 나을까? 데인이 언제까지 나를 머물게 해 줄까? 혹시 데인이 나가라고 할 경우를 대비해 뭔가 대비를 해 놔야 할 것 같은데. 남은 돈이 얼마나 되더라.
“아차.”
실수로 클릭을 잘못해 나는 엉뚱한 화면을 열어 버렸다. 급히 닫고 이전의 화면을 다시 열려고 했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놀란 눈을 그대로 고정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거기엔 키이스의 사진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키이스와 함께였다. 은발의 남자는 키이스보다 작고 몸이 가늘었다. 키이스의 한 팔에 바로 들어갈 정도로 낭창한 허리는 유난히 시선을 끌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키이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기사의 날짜는 바로 어제였다.
*
*
달링이 작게 울며 어슬렁거렸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그런 달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비켜 줘야 하는데.
달링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나 때문에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고양이는 지금 항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코를 킁킁거리며 나를 찾아 손등을 할퀼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건지도.
바보같이, 달링은 그저 간식을 보채는 것뿐이야.
나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면서도 정작 몸을 움직이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아까 기사를 본 게 언제였지? 12시? 1시?
지금은 몇 시쯤 됐을까.
창밖은 어두워져 벌써 집 안이 컴컴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명한 보석 가게에 나타난 키이스에 대한 기사에는 함께 온 남자가 누군지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나와 같이 갔을 때 그랬듯이 매장의 문을 아예 닫은 채 쇼핑을 한 그가 그날 함께 있던 남자를 위해 상점의 보석을 거의 전부 다 사들였을 거라는 추측은 사실일 거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차에 물건을 싣는 직원과 경호원들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찍혀 있었고, 남자는 그들을 배경으로 키이스에게 사랑의 키스를 한 것이다.
드디어 새로운 상대를 찾아낸 걸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저 남자가 그 정도로 내게 집착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저 잠자리가 마음에 들었을 뿐인데.
나보다 더 잘 맞는 상대가 나오면 마음이 식어 버릴 건 당연하잖아.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허망했다. 가슴 한구석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머릿속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어쩌면 저 남자는 혼자라는 사실에 그다지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고독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고, 표식이 있든 없든, 자신만의 오메가가 있든 없든 그의 인생은 이전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여전히 키이스는 잘 살고 있었다, 내가 없이도.
너무나 당연한 건데.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이렇게 점점 마음이 비워져서 아무것도 안 남게 되는 걸까.
이건 그저 그 과정인 것뿐일까……?
아련히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것 같던 그것은 가까운 데서 멈췄다. 차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차의 엔진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차고가 닫혔다.
“……뭐야? 이게.”
차고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 데인은 불쑥 소리쳤다. 갑자기 불이 확 들어와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야가 제대로 사물을 담아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데인이 짧게 혀를 차고 내게 걸어왔다.
“달링, 자리를 빼앗겼구나.”
당연한 듯이 고양이를 안아 든 그는 선뜻 내 옆자리에 앉았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가 이런 걸 묻다니 이상했다. 나는 아뇨, 하고 대답했다.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작 입술만 달싹인 게 전부였지만. 그런 내 반응을 본 데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만.”
그는 갑자기 내 이마에 손을 짚더니 깜짝 놀랐다.
“이런 젠……, 뜨겁잖아!”
급하게 욕을 집어삼킨 데인이 벌떡 일어났다.
“감기면 약을 먹어야지 왜 그러고 있어? 맙소사, 둔해도 정도가 있지! 넌 네가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몰라?”
“……열이요?”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뜻밖에도 내 손은 아주 차가웠다. 서늘한 게 기분 좋아 그대로 멈추자 데인은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한 박자를 쉬고 난 후 그가 내뱉었다.
“그만하고 누워, 열이 나니까 손이 차가운 거야.”
그런가? 나는 정신이 몽롱해 그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 누웠다. 데인은 내게 이불을 덮어 주더니 돌아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돌아온 그는 감기약을 들고 있었다.
“먹어.”
시키는 대로 감기약을 받아 들었던 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왜?”
데인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나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이건 낮에 먹는 건데요.”
그 말에 그는 갑자기 깨달은 듯 깜짝 놀랐다. 나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낮에 먹는 거랑 밤에 먹는 건 봉투 색부터가 다른데 헷갈리다니 이상해요.”
“조용히 해.”
데인은 거칠게 내뱉더니 내게서 약을 빼앗아 갔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시간이 걸렸다. 다시 돌아온 그는 처음 가져왔던 약을 여전히 손에 들고 있었다.
“밤에 먹는 건 없어.”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기운 없이 말한 뒤 약을 받아 들었다. 종이를 찢으려 했지만 어려웠다. 손가락 끝이 저리고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실패하는 나를 보고 데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약을 다시 가져갔다.
“자.”
눈앞에서 봉투를 확 찢은 데인이 직접 약을 물에 털어 넣었다. 그는 빠르게 휘저어 약을 녹이더니 이내 내게 컵을 내밀었다. 나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후 입으로 가져갔다. 데인이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먹기 힘들면 얘기해.”
나는 호기심이 생겨 말했다.
“먹기 힘들어요.”
데인은 잠깐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안됐네.”
그만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다 그만 기침을 하고 말았다. 급하게 콜록거리자 데인은 짧게 혀를 찼다. 뒤늦게 약을 먹으려던 나는 다시 멈칫했다.
“또 왜 그래?”
짜증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 임신 때문에……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데인이 처음으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컵을 돌려주며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데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내게서 컵을 가져갔다. 그가 약을 탄 물을 버리고 컵을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새 쉰 목소리로 인사를 한 후 물을 마셨다. 한 컵을 다 마시고 나자 데인이 나를 다시 눕혀 주었다.
“이제 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뜻밖에도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데인이 방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잠시 그대로 누워 있던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곧바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데인은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왜요?”
데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하아, 하고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반쯤 뜬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데, 불현듯 데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같은 녀석이 제일 질이 나빠.”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놀랐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데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간절한 얼굴을 하고……. 그 피트먼까지 녹여 버렸으니 말 다 했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지만 데인이 갑자기 일어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망할 자식, 나한테 이런 걸 떠넘기다니.”
그 말만 던지고 그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뒤 물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처럼 귀가 후 샤워를 하는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졌으나 오래 버티진 못했다. 얼마 못 가 나는 깊이 잠들어 버렸다.
*
*
서늘한 감촉에 잠에서 깼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데인. 나는 입술을 달싹여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데인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몸은 어때?”
나는 그저 맥없이 웃어 보였다. 그의 차가운 손이 기분 좋았다. 가만히 눈을 감자 데인이 물었다.
“낮에 뭐 좀 먹었어?”
나는 다시 눈을 떴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보는 내게 그는 다시 질문을 했다.
“먹고 싶은 건?”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뭔가를 먹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푸딩.
“푸딩?”
내 입 모양을 읽은 데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기운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러멜.
“캐러멜?”
그는 또다시 내 말을 되풀이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데인이 다시 물었다.
“캐러멜 푸딩 말이야?”
대답 대신 빤히 그를 쳐다봤다. 데인이 황당해하는 게 너무나 이해가 가서 나도 모르게 또 웃어 버렸다. 데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듯했다. 나는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요.
“……먹고 싶은 건 사실이지?”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잠자코 나를 바라보던 데인이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쉬고 있어.”
그가 선뜻 몸을 일으켜 나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잠시 뒤 차의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라졌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굳이 그걸 사러 갈 필요는 없었는데……?
퇴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거기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나 때문에 다시 나간 것이다. 평소 까칠하고 빈정거리기 일쑤였던 데인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나는 당황스러운 한편 미안해졌다. 그가 정말로 그걸 사러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피곤할 텐데…….
나는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무거운 머릿속은 좀처럼 개운해지지 않았다. 얕은 숨을 몰아쉬다 또다시 선잠에 빠져들었다.
*
*
…….
가느다란 기계음에 문득 잠에서 깼다. 나는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또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현관의 벨 소리였다.
꾸물거리는 사이 벨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딘지 조급해하는 것 같았다.
데인인가?
나는 휘청거리며 소파에서 내려갔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벨을 눌렀다. 그러고 보니 왜 차고를 통해서 들어오지 않는 거지? 나는 문득 생각했지만 너무 늦었다. 벌써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
말을 하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열린 문 너머로 서 있는 남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의 그는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짙은 청색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갖춘 슈트 차림이었다. 절대 로퍼는 신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구두끈을 직접 매 본 적이라고는 없는 남자.
키이스.
나는 소리 없이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