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77)

42

온몸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앓듯이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급히 눈을 감아 버린 내 위로 누군가 소리쳤다.

“연우, 정신 차려! 눈 뜨라고!”

거듭된 고함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는 키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내가 탄 침대를 급하게 끌고 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

나는 입술만 간신히 움직여 물었다. 키이스가 뚫어져라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다시 속삭였다.

괜찮아?

“망할……. 다친 건 너라고, 내가 아니라!”

키이스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계속해서 침대가 흔들려 현기증이 더욱 심해졌다. 키이스가 급하게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검사를 받아야지, 어딜 다쳤는지 확인하고 치료를 받아야 돼.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아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키이스가 멈칫하더니 잠깐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곧이어 침대가 어느 문을 통과하고, 키이스는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멀어지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온몸이 죽도록 아팠다.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지며 숨이 거칠어졌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의식을 되돌린 나는 생소한 풍경에 잠시 혼란을 느꼈다. 누군가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안 때문인지 숨이 거칠어지며 기계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 간호사가 나타났다.

“어머, 눈을 떴군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그녀는 다정하게 물었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의식을 놓았다 다시 붙잡는 기분이었다. 뒤이어 통증 또한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늘게 신음 소리를 내자 그녀는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좀 더 자요, 편하게 해 줄게요.”

자, 잠깐만.

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 모양만으로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간호사는 손을 멈추고 내게 몸을 기울이며 내가 하려는 얘기를 들으려 애썼다.

키이스는, 아기는, 어떻게.

숨을 쌔근거리며 묻는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피트먼 씨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연우가 깨어났다는 걸 알면 정말 기뻐할 거예요. 실은,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일단 면회를 금지했어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죠.”

“…….”

“아이도 건강해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쉰 내게 간호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강한 아이예요. 위험할 뻔했는데 잘 버텨 줬어요. 아직 안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위기는 넘겼으니 정말 잘됐죠.”

그녀는 미소를 지은 후 덧붙였다.

“연우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예요.”

죄책감과 애틋함에 가슴이 저릿해져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간호사가 나를 위로하듯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연우의 상태도 상당히 좋아졌어요. 처음 왔을 때는 외상보다 폐렴이 생길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고비도 잘 넘겼고요.”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더 쉬어요.”

간호사는 주사를 가져와 내 팔에 연결된 수액 줄에 주입했다. 잠시 뒤 차가운 감각이 스며들더니 곧 전신이 늘어졌다.

* * *

이젠 익숙해진 둔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깼다. 목이 말랐다.

“으…….”

나는 가늘게 신음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바로 누군가가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뜨자 침댓가로 다가온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의식이 흐릿한 데다 어둡기까지 해서 형체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동안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기만 하는 상대의 행동에 불안감이 느껴졌을 즈음, 문득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키이스.

“…….”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희미한 전등을 등지고 서서 키이스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늘진 얼굴을 애써 확인해 보려 하는데, 그가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말을 할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또다시 키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계속 나를 지켜봤을까?

표식이 사라지지 않아서 유감이라고 생각할까.

많은 생각이 느리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지만 여전히 키이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드디어 그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에는 다시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많이 아파?”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여전히 소리가 나오지 않아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키이스는 묵묵히 나를 내려다봤다. 어딘지 넋을 잃은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뒤늦게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다. 눈 밑이 푹 꺼져 창백한 안색에 그늘이 더 깊어졌다. 거기다 표정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며칠을 실컷 앓고 온 것 같았다. 그 증거처럼 키이스는 평소보다 느린 손짓으로 천천히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미 몇 차례나 그렇게 한 듯 머리칼은 이미 처음의 완벽한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멍하니 키이스를 올려다봤다. 나를 찾으러 데인의 집에 왔을 때의 그를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토록 이 남자를 증오했는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가 안쓰러웠다. 그게 전부였다.

어색함을 숨기려 시선을 돌렸던 나는 마침 테이블 위에 놓인 포트를 발견했다.

“……왜?”

내 시선을 눈치챈 키이스가 물었다.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포트를 가리켰다. 키이스는 뒤늦게 깨달은 듯 걸음을 옮겼다. 문득 예전에도 그가 이렇게 나를 위해 물을 갖다준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돌아온 그가 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나를 반쯤 앉혀 주었다. 도움을 받아 물을 마신 후 간신히 나는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고마워.”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뜻밖에도 키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나를 다시 눕혀 준 뒤 몸을 돌려 테이블로 걸어갔다. 컵을 내려놓은 그가 천장을 한 차례 올려다보았다. 많은 감정을 참는 듯이 키이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내심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깊이 심호흡하듯 어깨를 한 차례 들썩였던 키이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신 그런 짓 하지 마.”

나는 그저 눈만 깜박였다. 콜록, 기침이 나왔다. 키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금세 굳어진 그의 얼굴에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저어 보였다. 다행히 기침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던 키이스가 내뱉었다.

“말해.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

“연우.”

경고처럼 낮게 나온 음성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땐 그냥 몸이 움직였어.”

이번에는 키이스가 침묵했다.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다음에도 또 그럴지도 몰라.”

“너……!”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내가 뜻대로 굴지 않자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더는 잃을 것도 없었다.

“당신이 위험해지지 않으면 되잖아.”

“…….”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키이스는 하, 하고 거친 탄식을 뱉어 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나는 묵묵히 그를 지켜봤다. 감정을 억누르듯 잠시 그대로 있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그런 거 없어.”

“말해, 빌어먹을!”

키이스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이 남자가 안심을 할까. 왠지 서글픈 기분이 들어 나는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당신이 무사한 걸로 됐어.”

“하.”

키이스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숨을 뱉어 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나를 응시했다. 입을 열었다 닫고 다시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그가 마침내 소리를 냈다. 잔뜩 억눌린 음성으로.

“……제발.”

“…….”

“제발 더 이상,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 부탁이니까, 제발!”

그는 울분을 쏟아 내듯이 격하게 내뱉더니 곧이어 병실을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닫히는 문 너머로 검은 슈트의 사내들이 언뜻 보였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당연하지만 병실에는 나 혼자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간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문밖에 몇 명의 경호원들이 24시간 밖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도 간호사가 해 주었다.

다음 날 문병을 온 찰스는 여러 가지를 사실을 알려 줬다. 우리를 납치하려고 했던 운전사는 이전에 키이스를 습격했던 남자가 속해 있던 사이비 종교 집단에 속해 있었다. 극알파들을 악마라고 규정하고 수시로 테러를 일으키는 집단이었는데, 정확히는 그곳의 정보원이었다.

키이스에게 달려들었던 괴한은 그러나 팔에 자상을 남겼을 뿐 그리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체포되었다. 그 뒤 어떤 말을 물어도 묵비권을 행사하다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의심쩍은 죽음이었다. 당시 그 소식을 전한 휘태커는 찌푸린 얼굴로 석연치 않다는 말을 했었다. 그 뒤로 더 이상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때 좀 더 신경 써서 뒤를 조사했더라면 좋았을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체포 후 운전사는 모든 걸 자백했는데, 일부러 도로가 통제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호텔에 하루를 묵도록 유도를 한 것이었다. 아마도 시간을 끌어 상부에 보고를 하고 밤 동안 세부 계획을 짠 모양이었다.

이 사건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찰스였다. 평소 그는 까다롭게 사람을 채용하기로 유명했다. 갓 고용된 직원은 키이스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방을 청소하는 것도 몇 년씩 고용되어 얼마간 신뢰를 쌓아야 가능했다. 운전사 또한 벌써 10년 가까이 일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고용주의 생명을 빼앗을 뻔했다니, 당연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딸이 아프기 시작한 후로 그 종교에 빠졌답니다.”

그를 면회하고 왔다며 찰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도중에 그렇게 된 것이니 자신의 책임은 없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하는 듯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차에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큰일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내 말에 찰스는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자부심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지난번 테러를 당한 후 피트먼 씨에게 청해서 차 안에 비밀스럽게 장치를 해 놨었죠. 유용하게 쓰여서 다행입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그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내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가려던 찰스가 아, 하고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피트먼 씨는 급한 출장으로 며칠 자리를 비울 겁니다.”

“……며칠요?”

무심코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일이 해결되고 나서 돌아오실 거라 정확한 일정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군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는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병실을 떠났다. 나는 허전한 기분을 애써 모른 체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을 보냈다.

* * *

엠마가 찾아온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온몸의 통증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지루한 시간을 의미 없이 때우고 있었다. 그날도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계만 쳐다보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고 엠마가 들어왔다.

“엠마!”

“연우!”

그녀는 반갑게 소리치며 서둘러 다가와 나와 허그를 나눴다. 팔을 풀고 나를 내려다본 그녀는 금세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음 다쳤을 때의 나를 봤다면 기절했을지도 몰라, 나는 떠올렸다. 이제 수액도 더 이상 맞지 않는 데다 자기 전에 진통제 주사를 맞는 게 전부인데도 엠마의 눈에는 여전히 내가 중환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긁히고 찢긴 상처 때문에 곳곳에 반창고와 붕대를 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많이 다쳤다고는 들었지만…….”

“보기만큼 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제 많이 나았어요, 엠마.”

나는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거짓말!’ 하고 외치듯이 늑골 쪽이 욱신 아파 왔지만 애써 담담한 척했다. 엠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코를 훌쩍인 후에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그녀는 어머니와 병원에 가느라 하루 휴가를 냈다고 말했다. 그 김에 그동안 벼르던 병문안을 온 것이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일들이 연속으로 터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예요.”

의자를 끌어와 앉은 엠마가 말했다.

“연우가 그만두고 나서 지금 회사가 아주 난리예요. 다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신입은 그다지 도움도 안 되고, 어서 나아서 다시 일을 해 줬으면 모두 바라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 차례 나를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더 기다려야겠네요.”

“엠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용기를 북돋워 주자 엠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저 간신히 버티는 거라니까요.”

“엠마.”

진지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엠마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똑바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난 엠마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맡기고 나온 겁니다. 내 안목이 틀렸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 말에 엠마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상반된 말을 번갈아 한 그녀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 연우가 사라지고 난 뒤부터 피트먼 씨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어요.”

“설마.”

“정말이에요.”

엠마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예사에 수시로 캔슬을 하고, 어떤 날은 출근을 안 해서 확인해 보니 술에 절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더라고요. 오후에라도 나타나면 다행이죠. 수시로 출근을 안 했어요. 그나마 늦게라도 오는 날은 온몸에서 술 냄새가 나서 정말 다른 의미로 힘들었죠.”

금시초문이었다. 뜻밖의 토로에 나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극알파들은 술에 잘 취하지 않을 텐데……?”

표식이 새겨지면 뭔가 다른 걸까?

내심 생각한 내게 엠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얼마나 마셔 댔겠어요? 찰스가 나중엔 저한테 불평을 할 정도더라고요. 피트먼 씨가 저장해 둔 와인을 다 마셔 버릴 기세라 프리미엄급 와인 몇 개를 숨겨 놨다고 말이에요. 거기다 보드카에 위스키에, 어마어마하게 마신 모양이에요.”

“…….”

“알코올 중독으로 죽는 최초의 극알파가 되는 게 아니냐고 제인이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문득 나를 만나러 왔을 때 그가 무척 살이 빠지고 어딘지 초췌해 보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때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내저으며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몇 년을 일했지만 피트먼 씨가 그렇게 망가지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항상 완벽한 모습만 봤었는데. 술에 절어서 넥타이도 없이 출근하거나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서 나타나는 일도 종종 있었죠.”

한숨을 내쉬는 엠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키이스가 헝클어진 머리에 넥타이도 없이, 술에 절어서 출근했다고?

혹시 엠마가 꿈을 꾼 건 아니겠지.

모두가 같은 경험을 했다니 그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키이스는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달아나기 전에도, 돌아온 후에도 그는 언제나 완벽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엠마는 계속해서 푸념했다.

“그런 식이었으니 회사 일이라고 제대로 했겠어요? 몇 번인가 판단 미스를 해서 영화를 다 말아먹고, 듣기로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날렸대요. 파산하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을 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좀 일을 하니 다행이에요. 이번 영화가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거든요. 최근엔 감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대를 하고 있는데……. 잘하면 지금까지 손해 본 금액은 물론이고 몇 배로 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반대로 실패하면 정말 모든 게 끝이죠. 그만큼 투자를 많이 했으니까요.”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가 뭐였지?

기억을 더듬거리는 내게 엠마가 제목을 알려 주었다. 아, 하고 나는 곧 기억해 냈다.

체이스 밀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였다.

지난번 계약을 번복하고 골탕을 먹였던 영화는 현재 촬영 중이라고 한다. 그 영화 역시 모험이었지만 온갖 손해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배역을 바꿨던 실험이 성공하느냐의 여부보다 먼저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의 승패가 더 급했다. 이 또한 체이스 밀러의 주연이니 어느 정도 흥행은 보장하겠지만 ‘어느 정도’로는 안 되는 것이다. ‘대박’이 필요했다.

“잘될 겁니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기필코 잘돼야 했다. 엠마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돼야죠.”

이내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일이 넘치는데 피트먼 씨가 개인적으로 지시하는 일들도 많아요. 어디 땅을 매입해라, 누구한테 지원을 해라, 어딜 공사를 해라, 회사 일에 그런 요구까지 소화하느라 바쁜데 피트먼 씨는 항상 칼퇴근을 한다고요.”

엠마는 금세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었다.

“그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바로 확인해서 처리할 수 있도록 남아서 모두 정리를 해야 해요. 물론 추가 수당이 나오지만 돈보다 먼저 제 인생을 찾고 싶어요.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신입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사람을 더 뽑아 봤자 어차피 가르치는 시간이 드는 건 마찬가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니까요.”

듣고 보니 그녀가 불평을 하는 게 너무 당연했다. 비록 다쳐서라고는 하지만 병원에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내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신입이 그렇게 일을 못합니까?”

걱정스럽게 묻자 그녀는 질린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면접을 볼 때도 썩 좋지 않았어요. 어딘지 맹해 보이더라고요, 뭘 물어봐도 말을 더듬고, 나갈 땐 저한테 인사를 하다가 문에 부딪치기까지 하고요. 저래서 피트먼 씨 밑에서 일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제인이나 레이첼이 괜찮은 것 같다고 하고, 의외로 피트먼 씨와의 면접은 괜찮게 봤나 보더라고요. ……하긴, 그때 피트먼 씨가 제정신이었겠어요? 지금 다시 면접을 본다면 바로 탈락일 텐데.”

다시금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 직원입니까? 베타?”

“남자 맞고 알파예요. 지원 서류로는 경력도 괜찮고 꽤 능력 있어 보였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그녀는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런, 하고 나는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묘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회사 일에 대해 물어보면서 신입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그리고 엠마의 대답을 듣고 난 후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엠마에게 첫눈에 반한 게 아닐까요?”

“뭐라고요?”

그녀는 펄쩍 뛰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가능성 있는 얘기인 거 같은데. 엠마한테 반해서 자꾸 실수하고 말을 더듬는 거 아닙니까? 혹시 그 남자가 그렇게 싫습니까?”

“외모는 나쁘지 않아요. 연우도 알다시피 알파나 오메가들은 대부분 외모가 좋잖아요.”

그렇죠, 하고 나는 수긍했다. 발현 후 외모가 변한다거나 원래 알파나 오메가의 형질을 가지고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베타에서 변이된 나 같은 경우는 예외겠지만. 엠마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냥 멍청한 남자인 거예요. 저한테 반하다니, 말도 안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면, 하고 엠마가 대답했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 저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진심인 건 아니겠죠.”

엠마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엠마는 충분히 미인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인이라고요? 제가요?”

“물론이죠. 조쉬도 그렇게 잘생겼는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혈육이니.”

“조쉬는 잘생겼지만 전 그다지…….”

뜻밖에도 그녀는 그다지 자신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미인인데 이상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엠마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조쉬와 비교를 많이 당했거든요. 조쉬는 미남이지만 전 그냥 평범해서…….”

“조쉬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엠마의 얼굴일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엠마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반신반의하는 그녀에게 나는 확신을 가지고 덧붙였다.

“그러니 당연히 미인이죠.”

그녀는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곧 씁쓸하게 웃었다.

“자꾸 그렇게 설레게 만들지 말아요, 내 남자가 되어 줄 것도 아니면서.”

그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엠마는 선뜻 말했다.

“항상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고백은 몇 번 받아 봤지만 난 근육질에 스포츠맨은 그다지 안 좋아해서……. 언젠가는 나와 맞는 사람이 나타나겠죠.”

후,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고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피트먼 씨가 갑자기 출장을 가서 많이들 바쁘겠군요. 이번 출장은 누가 따라갔습니까? 레이첼? 아니면 제인?”

엠마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이쪽 일이 보통 밀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심 몸이 더 나아지면 나가서 돕겠다고 할까, 생각했을 때 엠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피트먼 씨는 휴가를 가셨는데요.”

“휴가라니, 무슨 소립니까?”

뜻밖의 말에 놀라 나는 물었다.

“찰스의 말로는 출장을 갔다고 하던데…… 그게 아니라 휴가라고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싫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손바닥이 젖어 들었다. 나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나 버렸는지 엠마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어…… 아뇨……. 출장은 없어요, 지금 이쪽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요. 휴가예요, 그것도 갑자기 통보하듯이 찰스가 전화로 알려 와서 비서실 전부가 패닉이었어요. 거기다 최소 일주일은 자리를 비운다고 하니 그동안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엠마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게 고함을 지르던 키이스가 떠올랐다. 대체 이 상황은 뭐지?

“……찰스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찰스에게 연락을 해 주겠습니까……? 제가, 만나고 싶다고. 지금.”

“…….”

“당장.”

엠마는 당황해하며 휴대 전화로 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찰스가 병실에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엠마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돌아간 뒤였다. 혼자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막상 찰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무슨 일입니까, 연우. 필요한 거라도 있습니까?”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의 태도에 나는 순간적으로 엠마가 뭘 잘못 안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찰스의 얼굴에는 꺼림칙한 기색이라거나 뭔가 감추는 듯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저랬다. 뒤늦게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던 찰스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피트먼 씨가 출장을 갔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며칠이나요? 정확한 일정은 모릅니까?”

“네. 나중에 일정을 마치시면 연락이 올 겁니다. 당장은 얼마나 걸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비서실에서는 휴가를 갔다고 하던데요.”

“잘못 안 겁니다. 엠마는 종종 실수를 하죠.”

“고용주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비서가 휴가와 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처음으로 찰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이마 한쪽에 가늘게 흐르는 식은땀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피트먼 씨에게 새로운 상대가 생겼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쯤 자포자기해 말하자 찰스는 즉각 부정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수를 썼다.

“피트먼 씨가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다면 더 잘된 일이죠. 저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연락을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휴대 전화가 없어서.”

제법 대범하게 말하자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뻔뻔하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아무 말 없던 찰스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연우, 그러지 말아요. 피트먼 씨는 만나는 상대가 없어요, ……러트 시기가 왔을 뿐입니다.”

나는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러트라고요?”

“네.”

찰스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섬으로 가셨습니다. 이럴 때 가시는 무인도가 있거든요…….”

“그런 게 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간 겁니까?”

찰스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그야, 그 시기를 보낼 방법이 달리 없으니까요.”

순간 나는 멍해졌다. 어째서? 설마, 나를 피한 건가?

찰스는 반신반의하는 나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뜻밖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래, 섬을 샀다고 했었지. 나 없이 두 번의 러트를 보냈었다고.

거기에 간 거구나.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 나는 급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표식이 있는 극알파라도 이렇게 계속해서 러트를 혼자 보내면 분명 어딘가가 망가지고 말 것이다.

어째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왜 혼자서 가 버린 거야?

나한테 말을 했다면.

문득 나는 떠올렸다.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연우?”

찰스가 의아해하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른 체하는 건 쉽다. 이대로 그를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키이스가 바라는 건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걸 바라지 않았을까? 그에게 표식을 새겼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키이스가 철저히 혼자가 될 거라는 걸 알았잖아.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키이스의 절규가 떠오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게 뭔지.

“어딥니까, 그 섬은?”

내 물음에 찰스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