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77)

44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파커 씨.”

“연우.”

나오미는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가볍게 어깨를 안은 그녀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다쳤었다는 얘긴 들었었는데 촬영 중이라 못 와 봤어요. 미안.”

“아뇨, 괜찮습니다. 듣자 하니 촬영이 잘 끝났다고요?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피트먼 씨 덕분이죠.”

나오미가 말을 이었다.

“나도 내가 그런 역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좀 있었는데 피트먼 씨의 안목을 믿었어요. 감독이 아주 놀라더군요. 매 신마다 정말 내 전부를 쏟아 넣었거든요.”

“잘될 겁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배역에 꽤 오래 우려의 소리가 나왔지만 촬영은 성공적으로 마친 모양이었다. 명감독에게서 연기력을 칭찬받은 배우는 몇 되지 않았다. 이번을 기회로 나오미는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에 큰 획을 긋게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어서 영화를 보고 싶었다. 조만간 있을 VIP 시사회에 키이스와 함께 가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피트먼 씨에게도 인사를 할 겸 왔는데, 혼자 있네요.”

“키이스는 아기를 데리러 갔어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간호사가 데려다준다는 것을 거절하고 키이스는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하고 싶다는 듯이. 나오미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토닥거렸다.

“고생했죠? 오메가들은 출산이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네…… 조금.”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죽을 뻔했다는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억제제를 오랫동안 과다하게 먹은 탓에 부작용으로 내벽이 약해졌다는 얘기를 임신 말기에 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아이를 낳기 두 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했다. 키이스는 병원의 VIP 병동 전체를 빌려 불필요한 소음이나 접근을 원천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의 각별한 보호로 별 탈 없이 수술 날짜가 되었다.

키이스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침대에서 내려오기만 해도 표정이 굳어지곤 했는데, 한번 현기증이 나 주저앉은 이후로는 아예 휴가를 내어 종일 내 옆에만 있었다. 그동안 회사는 그의 이부형제가 맡아 줬지만 가끔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면 전화를 하거나 화상 회의를 열어 일을 진행하곤 했다. 물론 그럴 때조차도 키이스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술 후 아이의 얼굴을 보기까지 2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출혈이 심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하며 키이스는 창백한 얼굴로 선언했다.

<더 이상 아이는 갖지 않겠어.>

물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의사로부터 아이를 만나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안달을 내며 초조하게 키이스를 기다리던 나는 나오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연신 문 쪽을 흘긋거렸다. 그런 나를 눈치챈 나오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망치면 안 되지.”

“아, 그럴 것까지는…….”

“나도 데이트가 있거든.”

가볍게 윙크를 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문득 그레이슨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나오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 아니에요. 그레이슨과는 더 이상 자지 않아. 그와는 이제 친구일 뿐이죠.”

마지막으로 둘이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그레이슨이 어떤 말을 했는지, 나오미의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졌던지를 떠올린 내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말이 있죠. 친구를 가까이하라. 적은 더 가까이하라.”

나오미는 두 눈을 빛내며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언젠가 그 거만한 남자가 혼쭐이 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날이 되면 난 가장 앞줄에 앉아서 구경을 할 거고요.”

“…….”

“몹시 기대하고 있죠.”

그리고 그녀는 이내 화사한 미소를 짓더니 내 뺨에 가볍게 뺨을 맞대며 인사를 했다.

“그럼 연우, 다음에 또.”

나오미가 병실의 문을 열자 마치 교대하듯 뒤이어 찰스가 들어왔다.

“연우, 마침 일어나 있었군요. 피트먼 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웬일로 자리를 비웠냐는 듯이 묻는 말에 나는 나오미에게 한 것과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그래요?” 하더니 이내 화제를 돌려 말을 꺼냈다.

“에밀리가 아기 방의 커튼을 이것과 이것, 어느 쪽으로 할지 결정해 달랍니다.”

그가 꺼낸 견본 책자에서 하나를 짚자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인테리어를 새로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건 대략 한 달 전이었다. 그는 진행 상황을 술술 읊었다.

“연우의 방은 피트먼 씨의 방과 붙어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문을 통해 바로 들어가실 수 있죠. 아드님의 방은 건너편입니다. 몇 걸음이면 바로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전에 산 것들 외에 몇 가지를 더 구해 놨습니다. 에밀리가 도맡아서 방을 꾸몄는데 나중에 원하는 게 생기면 더 사라고 하셨습니다.”

찰스는 어딘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연우의 방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걸어 놨습니다. 혹시 다른 좋아하는 화가나 가지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얘기해 주십시오. 경매든 뭐든 해서 구해 준다고 하셨으니까요.”

“……괜찮습니다, 미술은 잘 몰라서…….”

“투자 가치가 있는 미술품으로 여럿 걸어 놨습니다.”

찰스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룸도 모두 갖춰 놨는데 다음 주면 보석들도 모두 채워질 겁니다. 커프스 열두 세트, 시계 열두 점, 넥타이핀 열두 개 이렇게 맞춰 놨는데 원하는 게 있다면 추가로 주문해 주십시오. 오셔서 카탈로그를 보고 직접 고르셔도 되고요…….”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조금은 난감한 기분으로 애매하게 웃었다. 한참 늘어놓던 찰스가 화제를 돌렸다.

“아기는 오늘 처음 만나시는 거죠? 정말 사랑스럽더군요. 누구든 보는 순간 반할 겁니다.”

“네, 그렇겠죠.”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만 나는 아이를 보기 전부터 이미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데리러 가도 되는데 기어이 안 된다고 직접 데리러 가 버려서…….”

“왜나면 연우를 걱정하기 때문이죠.”

찰스는 주저 없이 내 말을 받았다.

“연우가 사라졌을 때 피트먼 씨는 폐인이 될 뻔했습니다. 제가 꽤 오래 피트먼 씨를 모셨지만 그때처럼 망가진 건 처음 봤어요. 다들 이러다 장례를 치르는 게 아니냐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 뒤에 연우에게 사고가 났을 때도 그래요, 난리도 아니었죠. 오죽하면 면회를 금지시켰겠습니까.”

“다친 건 저였는데요?”

농담처럼 묻자 그는 정색을 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연우의 상태가 좋아져서 망정이지 장례를 두 번 치를 뻔했습니다. 제발 앞으로는 두 분 다 조심해 주십시오. 고용인의 입장에서는 고용주의 건강이 아주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찰스는 재빨리 덧붙였다.

“더해서 재정 상태도.”

키이스의 회사가 도산할 뻔했다는 얘기를 기억해 낸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았습니까?”

잠시 기억을 되살리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던 찰스가 이내 무심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앞으로는 절대 피트먼 씨 곁을 떠나거나 아픈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연우.”

“…….”

“제발.”

한 번 더 당부한 뒤 그는 내가 누워 있는 침대를 여기저기 정리해 주고 병실을 나갔다. 키이스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이 더 지나서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 드디어 기대하던 얼굴을 발견하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달큼한 향기와 함께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뒤늦게 나는 그것이 향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콤한 페로몬 향기에 섞인 처음 맡는 냄새. 그것은 생소하면서도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아이를 안고 온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인사해, ……우리 아기야.”

그는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키이스가 안고 있는 아기를.

나는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곧바로 두 손을 뻗었다. 아이를 안아 보려 했지만 내 팔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멈칫했다.

이 앙상한 팔은 누구 거지.

생소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이전보다 훨씬 얇아진 팔은 내가 보기에도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이 팔로 아이를 안았다가 떨어뜨릴까 봐 두려웠다. 나에게 아이를 건네주려던 키이스는 내가 공포에 질려 팔을 거두자 곧 눈치를 채고 말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

“안아 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기를 내밀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조그만 생명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키이스의 품에 안겨 있어서 더 작아 보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내 팔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아아……!

드디어 아이를 팔에 안아 들었을 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안에서 북받쳐 올라왔다. 떨리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키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말없이 그저 보고만 있는 내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스펜서라고 이름 지었어.”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남자아이고, 발육은 좋은 편이라고 해. 밥도 잘 먹고 아픈 적도 없었어.”

나는 말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자 키이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눈을 문질렀다.

아기는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신기해하며 바라보자 키이스가 말했다.

“발현 전에 내 눈도 파란색이었어.”

만약에 이 아이가 극알파로 발현하면 보라색으로 바뀔까?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품에 꼭 끌어안고 냄새를 맡자 생소하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향기가 났다. 아기 특유의 향기였다. 언젠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맡아 본 것 같기도 했다. 문득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그때 불쑥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네 가족들에게는 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했어.”

뜻밖의 말에 그를 올려다보자 키이스가 말했다.

“계속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할 거라고 엠마가 그러더군. 가족들하고 사이가 좋다면서?”

그는 잠깐 감정을 내비쳤다.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하고 키이스는 말을 이었다.

“엠마를 시켜서 연락은 했어. 대충 둘러댔다고 하니까 나중에 얘기를 들어 봐.”

거기까지 말했던 키이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가 머뭇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음,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키이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혼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

“나와.”

강조하듯이 덧붙인 말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임신 기간 동안 몸이 좋지 못해 결혼식은 생각도 못 했다. 표식을 새기는 것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커플도 많지만 키이스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프러포즈하는 거야?”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기도 하고 간질거리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떡하려고?”

키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키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문득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시선을 내리자 아기가 나를 보고 있었다. 투명한 파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다.

이 아이를 포기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나는 꼭 아이를 끌어안았다. 점차 팔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이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집을 부리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꾸만 시간을 미루며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침댓가에 앉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

얼떨결에 끌려가자 키이스가 나를 품에 안은 채 내 팔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나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나는 얼떨떨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키이스는 더욱 놀랍게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만 멍해졌다.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키이스 또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우리는 가까웠다. 등 뒤로 키이스의 체온이 여실히 느껴지고, 얇은 환자복 너머로 그의 슈트의 질감은 물론 그 안에 숨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까지 모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키이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 또한 나만큼, 아니면 나보다 더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진해진 것이다. 나만이 맡을 수 있는 그의 향기. 오직 나만을 유혹하는 그의 페로몬.

그의 귀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표식을 봤을 때, 키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나는 눈을 감고 탄식했다. 바로 이 순간을 내내 기다려 왔던 것 같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의 혀를 받아들이려 입술을 연 순간, 키이스가 속삭였다.

“결혼할 거지? 나와.”

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품 안의 아기가 꼼지락거렸다. 당황한 나 대신 키이스가 내 팔을 포함해서 아이를 끌어안았다.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아기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예뻤다.

가만히 뺨에 입을 맞추자 보드라운 살이 맞닿았다. 마음껏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아이는 작고 여렸다.

스펜서.

작게 이름을 되뇌었다. 아이가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다시 미소를 짓는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름으로 지어도 돼.”

무심한 음성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이름이야.”

아이에게 꼭 어울렸다. 나는 다시 뺨에 키스했다. 키이스는 계속해서 나와 아이를 함께 안고 있었다. 문득 그가 내 정수리에 키스했다. 나는 편안하게 그에게 등을 기댔다.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별장을 짓고 있어.”

갑작스러운 화제에 그저 묵묵히 기다리자 그는 말을 이었다.

“길을 내고 있으니까 퇴원할 때쯤이면 가서 쉴 수 있을 거야. 경관도 좋고 주변 공기도 깨끗해.”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길을 내다니?”

그 말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개발 지역이라 그 일대의 숲을 전부 샀어.”

“…….”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뺨에 키스하자 아이는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내가 자신을 낳은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걸까?

“결혼식이 끝나면 가 볼까? 당신이 짓고 있다는 그 별장에.”

나는 슬쩍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난 내 알파와 같이 갈 건데, 당신은 누구와 갈 거야?”

그 말에 키이스가 뒤에서 내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내 오메가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문득 눈가가 달아올랐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므로.

에필로그

시내의 보석상은 그날따라 문을 열지 않았다. 정기 휴일은 물론 아니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던 직원들은 낯선 손님을 보고 실망했으나 이내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휴무입니다.”

문에 걸린 ‘CLOSED’라는 팻말을 가리킨 그녀에게 손님은 아, 하고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매니저는 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 물론 매장 안에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였다. 매니저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을 불러 문밖에 서 있으라고 지시했다.

“들어오려고 하면 오늘은 안 된다고 해요.”

“네, 매니저님.”

직원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한 손님은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정확한 시간, 늦어야 5분 이내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곧 그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데 확신을 가졌다.

무거운 유리문 너머로 직원이 또 다른 손님을 돌려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3분 전이었다. 남자 직원이 긴장한 듯 넥타이의 매듭을 바짝 조였다 다시 내렸다. 드디어 1분이 남았을 때, 바깥의 직원이 급히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검은 승용차가 멈춰 섰다. 뒤이어 몇 대의 차가 줄지어 선 후 한 남자가 뛰어가 뒷좌석 쪽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

*

“안녕하세요, 연우.”

매니저는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다. 연우는 짧게 미소를 짓고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어머나, 그런 말을 연우한테서 듣다니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아하게 웃는 그녀의 반응은 물론 불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침 연우가 안고 들어온 아이를 본 매니저가 다정하게 물었다.

“스펜서, 잘 지냈니?”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 연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연우가 무안해하며 말하자 매니저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저도 아이가 셋인걸요. 이맘때는 그럴 수 있죠. 그나저나 앉으세요. 음료를 드릴까요? 스펜서는 푸딩이죠?”

그녀의 말에 스펜서가 고개를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침이 흥건히 흘러내렸다.

“스펜서!”

연우는 당황해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입을 닦아 주었다. 매니저를 비롯한 직원들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소파에 앉은 연우는 카푸치노를, 스펜서는 밀크 푸딩을 각각 대접받았다. 아이는 스푼을 들고 어떻게든 혼자 먹으려 기를 썼다. 연우는 소파에 얼룩이 지지 않도록 즉석에서 태피스트리를 하나 샀다. 소파에 그것을 깔고 스펜서를 그 위에 앉힌 다음에야 비로소 연우는 안심을 하고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결혼기념일 반지를 사려고요. 디자인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해마다 결혼기념일이 되면 연우는 반지를 사서 선물했다. 그러면 키이스는 전해에 받은 반지를 서랍에 넣고 새로운 반지를 끼는 것이다. 매년 그렇게 반지를 바꿔 끼면서도 새로운 반지를 선물받기 전에는 어떤 상황이 있어도 그것을 빼지 않았다.

올해는 다른 걸 선물할까?

잠시 생각했던 연우가 물었다.

“넥타이핀도 볼 수 있습니까?”

“오, 물론이죠.”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직원이 재빨리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가져온 벨벳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넥타이핀이 일렬로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연우는 그중 하나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스테디셀러예요. 나온 지 10년 됐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죠. 어떤 넥타이에도 잘 어울리고, 디자인도 심플해서 어느 자리에서든 착용할 수 있어요. 이 다이아몬드는 그리스의 섬이 원산지죠. 아주 순도가 높고 질이 좋은 걸로 유명한 제품이에요. 매년 적은 양만 채취하기 때문에 고가에 판매됩니다. 혹시 넥타이핀이 질리면 다이아몬드를 떼어서 반지나 다른 걸로 디자인을 바꿀 수 있어요…….”

연우는 그렇군요, 하며 다른 넥타이핀을 들었다. 그녀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진지하게 매니저의 말을 듣고 있는데, 불쑥 스펜서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만 예기치 않은 사고를 내고 말았다.

“스펜서!”

“어머나!”

여기저기서 놀라 소리쳤지만 벌써 늦었다. 스펜서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넥타이핀이 든 상자를 머리로 박은 것이다. 그대로 굴러떨어지려는 것을 연우는 간발의 차이로 붙잡았다. 스펜서는 무사했지만 보석은 그렇지 못했다. 꺼내 왔던 반지는 물론 넥타이핀까지 전부 바닥에 흩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스펜서가 들고 있던 푸딩 또한 그 위로 낙하했다.

부드러운 카펫 덕분에 찻잔이 깨어지진 않았으나 문제는 보석이었다. 커피와 푸딩이 뒤섞여 엉망이 된 보석을 다급하게 수거하는 직원들을 보고 연우는 난감해졌다. 직원 한 명이 넥타이핀을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당황해하며 매니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미처 직원을 보지 못했다. 연우는 이내 상황을 눈치챘다.

“매니저님.”

“아, 네, 연우.”

황급히 미소를 지어 보인 매니저에게 연우는 말했다.

“전부 다 사겠습니다.”

“어머나!”

직원들이 또 한 번 놀라 소리쳤다. 연우가 말을 이었다.

“깨끗이 닦아서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기스가 났다거나 흠집이 생긴 건 어쩔 수 없고…… 그냥 최대한 수리를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부탁드립니다.”

“어머.”

매니저는 당황해하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꾸만 입이 벌어지는 그녀를 향해 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혹시 커프 링크스를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카푸치노를 다시 드릴까요?”

매니저의 호의에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스펜서, 너도 안 돼.”

엄한 제재에 스펜서는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푸딩으로 향했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 직원이 그것을 휴지에 싸서 걷어 가 버렸다. 스펜서는 빈 스푼을 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푸딩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

입술을 깨물고 끅끅거리는 스펜서의 모습에 연우는 마음이 약해졌다. 후,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말했다.

“죄송하지만 푸딩만 다시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연우는 태피스트리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스펜서를 앉혔다. 그러고 나자 이제 좀 안심이 됐다. 신이 나 다시 푸딩을 먹기 시작하는 아이를 간간이 훔쳐보며 연우는 커프 링크스를 한 세트 골랐다.

쇼핑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것 같았다.

* * *

막 차에 올라탔을 때 마침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 보니 동생이었다.

[오빠, 뭐 해?]

곧바로 묻는 연희의 음성에 연우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잠깐 나왔어. 잘 지내지?”

[당연히 잘 지내지, 우리가 못 지내는 게 말이 돼?]

그렇게 말한다면 다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키이스는 연우가 바라는 것은 모두 해 주는 건 물론이고 가족들에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연우와 결혼 3주년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은 물론 여동생들까지 북극 크루즈 여행을 보내 줬다. 아예 크루즈 하나를 사서 한 달이 넘게 북유럽을 포함해 북극을 보고 오는 장기 휴가였다. 대신 연우와 키이스는 스펜서를 데리고 키이스가 새로 산 프랑스의 성에 머물며 기념일을 축하하고 왔다.

현재 연희는 미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전역을 돌아보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냥 놀고 싶어 하는 것뿐이라는 걸 연우는 모른 척했다. 이번 여행까지는 편하게 놀게 해 주고 일정이 끝나면 한번은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연희는 평소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집에는 전화 드렸어?”

[응. 엄마가 오빠한테 한번 전화 달래. 보고 싶다고.]

“알았어.”

이내 스펜서를 보고 싶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동생을 달랜 후 연우는 당부했다.

“먹는 건 아무 데서나 먹어도 자는 건 꼭 좋은 데 찾아서 자, 아끼지 말고. 필요하면 바로 부쳐 줄 테니까.”

넌지시 걱정을 내비치자 연희는 다 안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잘 조심하고 있지. 그냥 오빠 잘 지내나 궁금해서 걸었어.]

“그래, 잘했다.”

대충 연희가 오늘 머물 지역에 대해 들은 연우는 곧바로 태블릿을 열어 근처의 호텔을 검색했다.

“예약해 둘 테니까 오늘은 거기서 자.”

특급 호텔의 이름을 말하자 연희는 깜짝 놀랐다.

[괜찮아, 나 호텔 예약한 데 있는데.]

“가서 자, 너 예약한 데 찾아보니까 평이 안 좋던데. 일단 호텔 가서 하루 쉬면서 다른 곳 찾아봐.”

[어…….]

말끝을 흐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연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너 설마 알면서 거기 예약한 건 아니겠지.”

[어…….]

이번에도 같은 반응이었다. 연우는 엄하게 말했다.

“서연희.”

[하지만, 계속 특급 호텔에 묵는 건 비싸잖아.]

연희는 변명을 했다.

[크루즈 다녀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거기까지 말하긴 미안하다고.]

“됐으니까 가서 자. 카드도 줬잖아.”

연희는 우물쭈물하다가 고마워, 하고 말했다.

“괜찮아. 식사 대충 때우지 말고 내일 아침까지 먹고 나와, 계산은 안 해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쪽에서 한꺼번에 할 거야.”

[아침까지?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오빠한테 화내면 어떡해.]

깜짝 놀란 동생이 이내 걱정을 덧붙였다. 연우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키이스는 내가 돈을 써야 좋아하거든.”

[정말?]

“정말.”

그 말에 연희가 슬며시 물었다.

[……나 그럼, 호텔에서 쇼핑해도 돼?]

“얼마든지.”

연희가 건너편에서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연우는 잠시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뗐다. 이후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 통화를 끝냈다. 막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니 조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요, 조쉬. 잠깐 동생이랑 통화하느라.”

[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은데.]

잔뜩 기대하던 터라 나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조쉬가 건너편에서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파파라치 개새끼들 때문에.]

조쉬는 욕설을 뱉어 내며 자신의 감금 생활에 대해 한참 동안 분노를 쏟아 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셋째를 임신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이제 더는 안 갖기로 했는데 망할 자식이. ……뭐 어쩌겠습니까, 그 얼굴에 뻑이 간 내 탓이지.]

“네…….”

연우는 무심코 수긍했다. 조쉬의 알파를 떠올려 보면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 남자가 원한다고 하면 세상 누구든지 하늘의 별이라도 따러 갈 게 분명했다. 거기다 연우마저도 기대가 됐다. 그 남자와 조쉬가 낳은 아이니 얼마나 예쁠까.

[대신 애들 사진을 보내죠.]

지금까지 비공개였던 터라 사진을 보내 준다는 건 어마어마한 신뢰의 증거였다. 성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셀레브리티의 아이들이라니.

연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쉬가 보내 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었는데, 한 아이는 아들이고 다른 아이는 딸이었다. 그중 남자아이인 피트는 예상했던 그대로 아주 잘 크고 있었다. 양쪽의 피를 정확하게 절반씩 물려받은 듯 예쁘면서 잘생긴 얼굴이라 파파라치의 표적이 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딸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다. 금발 곱슬머리를 보라색 리본으로 예쁘게 양쪽으로 묶어 고정한 아이는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작은 공주님 같았다. 하얀 양말에 메리제인 슈즈까지 완벽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라니 대단하네.

둘째의 성별은 사진을 보고 알았다. 베이비 샤워도 없이 애를 낳아 버리고 곧바로 침묵하는 바람에 축하할 겨를도 없었다. 언젠가는 대중에 드러나고 말 테지만, 조쉬는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연우는 납득했다. 자신과 키이스의 결혼도 어마어마하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하물며 할리우드 톱스타와 경호원이라니,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고도 남았다. 당시 인터넷이고 TV고 온갖 매체가 거의 한 달여에 가깝게 그들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결혼식은 비밀리에 철저한 통제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헬기까지 동원해 촬영을 해서 방송을 내보냈다. 물론 비난을 받긴 했지만 시청률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거기다 더해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자식들이라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어쩌면 그들의 부모보다 더 유명해질지도 모른다.

……딸이라.

연우는 사진 한쪽의 여자애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빠를 무척 좋아하는지 피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이좋은 오누이의 모습을 보자 더더욱 마음이 동했다.

“대디, 대디.”

스펜서가 그의 팔을 붙잡고 주의를 끌려고 했다. 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부드러운 뺨에 입술을 비비자 스펜서는 이내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스펜서.”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마주 보았다. 연우는 부드럽게 물었다.

“동생이 있으면 어떨까?”

아이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우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키이스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는 연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줬지만 단 한 가지만은 예외였다. 아무리 졸라도 요지부동이었다.

<더 이상 애는 안 돼.>

칼같이 잘라 내던 키이스를 떠올리자 마음이 약해졌다. 거기다 최근에 건강 검진 결과를 거짓으로 만들어 보여 줬더니 키이스는 연우의 눈앞에서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오랜만에 불같이 화를 내며 둘째는 죽어도 안 된다고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키이스에게 작은 소리로 사과를 하면서도 연우는 내심 결과를 너무 좋게 썼다고 후회했다. 조금만 조작할걸, 하고.

……뭐라고 설득을 하지.

연우는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이번 러트에는 같이 자지 않겠다고 할까? 그럼 또 혼자 섬에 틀어박히겠지? 섬이야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 다른 곳을 사서 숨어 버리면 찾을 수도 없을 테고.

차라리 러트까지 못 하게 하다 페로몬이 쌓이면 그때…….

거기까지 생각했던 연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순간 나쁜 생각을 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그는 진지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할 텐데.

연우는 다시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아이 생각이 없던 사람들조차 혹할 만한 사진이었다. 연우부터도 당장 딸을 갖고 싶은 마음이 용암처럼 올라올 정도였다.

방법을 생각해 보자.

최근 키이스를 닮아 손가락을 두드리는 습관이 생긴 연우는 깊이 생각에 잠겨 허벅지 위에서 피아노 건반을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디, 대디.”

스펜서가 연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경호원에게 부탁을 해도 되겠지만 연우는 그냥 차에서 내리기로 했다.

“잠깐 걷고 싶은데, 부탁합니다.”

운전사가 차를 한쪽에 세우자 곧바로 여기저기서 경호원들이 내려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연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스펜서를 안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딸, 기.”

아이는 단어를 끊어서 말했다. 연우는 스펜서의 몫으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하고 경호원들에게도 권했다. 처음에 사양하던 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아이스크림 혹은 음료를 선택했다. 연우는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후의 나른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도 가지 않아 연우는 후회했다. 아이스티를 주문하지 않는 거였는데. 그는 무심코 쓰레기통을 찾았다. 애석하게도 당장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으니 음료를 마실 수가 없었다.

조쉬처럼 한 팔에 번쩍 안아 들 수 있다면 남은 손으로 뭐든 하겠지만 연우는 그 정도의 체력이 되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약을 과용했을 때부터 몸이 나빠지더니 아이를 낳는 수술까지 받고 나자 전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을 스스로 체감할 정도였다.

키이스가 예민해질 만해.

연우 또한 씁쓸해하면서도 그를 이해했다.

건강은 많이 찾았지만 체력이 좋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좀 더 몸이 좋아지면 체력 관리 트레이너를 찾아 달라고 찰스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됐다.

둘째를 가지려면 확실히 몸을 키워야 될 텐데.

태어나면서부터 체력이 다른 조쉬를 떠올리니 곧바로 패배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우는 스스로를 북돋우며 다짐했다.

힘내자, 키이스도 설득하고.

“대디, 저기!”

스펜서가 우체통을 가리키며 반색을 했다. 별것도 아닌 걸 보며 아이는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경험이 흔하지 않으니 당연히 신이 날 만했다. 다만 연우의 체력이 어디까지 버텨 줄까가 문제였지만.

연우는 끙끙거리며 스펜서를 두 팔로 안고 걸어갔다. 아이는 연달아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우 또한 그의 말을 받아 주고 있었지만 어딘지 건성이었다. 벌써 그의 눈은 까맣게 내려앉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블록까지만 가자. 정류장 앞에 작은 벤치가 있는 것을 본 연우는 결심했다. 저기 앉아서 좀 쉬고 차로 돌아가는 거야.

다시 걸어온 만큼 되돌아갈 생각을 하자 곧바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연우의 팔에서 아이를 가져가 버렸다.

“스펜……!”

사색이 되어 소리치려던 연우는 이내 말을 멈췄다. 키이스가 한 팔로 아이를 안아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힘들게 안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가볍게 타박하는 말에 연우는 안심하며 대답했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스펜서가 스스로 걷게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키이스는 아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무게에 해방감을 느끼며 연우는 아이스티를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키이스가 남은 팔로 연우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불시에 끌려가 버린 연우가 위를 올려다보자 키이스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당연한 듯이 그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팔에는 아이를 안아 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더 가야 하잖아? 왜 여기서 걷고 있어?”

“날씨가 좋으니까 걷고 싶었어.”

연우는 궁금해져 물었다.

“지나다가 본 거야?”

“눈에 안 띌 거라고 생각했어?”

키이스가 빈정거리며 되물었다. 연우는 얼굴이 붉어졌다.

“기사에 나오지 않게 연락해 둘게.”

“됐어, 내보내라고 그래.”

키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항상 똑같은 기사인데 귀찮기만 해.”

하긴 그랬다. 다만 각도나 옷이 좀 바뀔 뿐 그들에 관한 건 항상 비슷한 사진들뿐이었다. 셋이 있을 때는 키이스가 연우와 아이를 한 팔에 하나씩 안고 있고, 둘이 있을 때는 키이스나 연우 둘 중 하나가 꼭 스펜서를 안은 사진이었다.

“그건 뭐야?”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음료를 들어 보였다.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연우가 빨던 스트로를 입에 넣었다.

“……설탕이야?”

키이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연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아이스티인데 가루를 탄 거라서 그래, 잎이 아니라. 가끔 이런 걸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

연우는 보란 듯이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키이스는 짧게 맛이 이상하다며 투덜거렸지만 굳이 왜 이런 걸 먹느냐며 연우의 취향을 폄훼하지는 않았다.

“스펜서가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했는데 거기서 같이 팔더라고.”

그들을 포함해 뒤따르는 경호원들까지 모두 같은 가게의 마크가 찍힌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마 기사가 나가면 저 가게의 매출은 몇 배로 뛸 것이다. 항상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연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 없이 고른 가게의 음식이 맛이 없는데 뒤이어 그 가게가 붐빈다는 기사를 보면 좀 안타까운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웬일로 아이스크림이지? 푸딩은?”

스펜서가 하루 한 번은 꼭 푸딩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는 키이스가 의아해했다. 연우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까 세 개나 먹었거든.”

그 말에 키이스는 물끄러미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펜서는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걸로 키이스의 표정은 곧바로 풀어졌다. 비록 슈트에 아이스크림이 문질러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나란히 길을 걷는 동안 연우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평화를 느꼈다.

“저.”

키이스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며 연우가 입을 열었다.

“조쉬가 사진을 보내 줬는데. 그 집 애들.”

“그래?”

키이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연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말을 꺼냈다.

“굉장히 예뻤어. 피트도 잘 크고 있더라고. 둘째는 처음 봤는데 사이가 좋은지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더라. 아들 하나에 딸 하나라니 굉장하지? 딸이 머리에 리본을 묶었는데 굉장히 귀여워. 정말 사랑스럽더라고.”

슬쩍 눈치를 보자 뜻밖에도 키이스가 찌푸린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눈치챘나? 순간 긴장한 연우에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딸이라고?”

“응.”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가 원피스에 구두까지 신고 있던데. 도자기 인형같이 예쁘게 생겼어.”

하지만 키이스의 얼굴은 펴지기는커녕 더욱 찌푸려졌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것처럼.

“……그 녀석은 아들만 둘일 텐데?”

“……뭐라고?”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진 채. 키이스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레이슨이 분명히 말했어, 체이스에게 아들만 둘이라고.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거야, 그 자식은.”

키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지만 연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여 주면서 딸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여 볼 심산이었는데 그냥 말도 못 꺼내고 끝나 버린 것이다. 계획이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연우는 잠시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눈에 띄게 전전긍긍하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본 키이스는 곧 눈치챘다. 연우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저렇게 뜸을 들일 때 꺼내는 말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물론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음, 저, 키이스.”

역시나 연우가 뜸을 들이며 말을 꺼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물론 키이스는 그가 뭘 말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빼놓고.

최근 거듭 방법을 바꿔 가며 조르는 연우 때문에 점차 마음이 약해져 언젠가는 허락하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당장 지난밤에 하마터면 둘째를 만들 뻔했지.

키이스는 흘긋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위험해, 점점 테크닉까지 좋아져서.

그의 그런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연우가 어렵게 운을 뗐다.

“이제 스펜서도 제법 컸고, 내년부터는 나도 일을 하고 싶어. 난 비서 일을 하는 게 무척 적성에 맞으니까, 그와 관련된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생각하는 사업안이 있다면 내놔 봐. 검토해 보게.”

키이스는 언제나처럼 선뜻 말했다. 연우는 음, 하고 다시 뜸을 들였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걸 좀…… 할까 하는데.”

드디어 본론이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키이스가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멈춰 선 연우가 올려다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키스 먼저.”

연우는 당황했지만 곧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파파라치가 잠시 걱정됐지만 곧 무시했다. 상관없다고 키이스가 말했었고, 새로운 사진 하나쯤 뭐가 어떠냐, 싶은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연우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키이스만큼이나.

고개를 들자 키이스가 연우의 허리를 안아 바짝 끌어당겼다. 연우의 입술에서 단맛이 났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싸구려 아이스티의 맛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키이스는 혀를 섞고 입술을 문질러 남김없이 맛본 후 키스를 멈췄다. 입술을 떼고 바라보자 연우는 멍한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키이스는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

“이제 거짓말을 해 봐.”

연우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 저기, 그, 하며 말을 더듬는 그를 키이스는 여유 있게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이 달콤함을 위해서라면.

연우의 귀에는 확실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금 그것을 확인한 키이스는 주저하지 않고 귀에 이를 세웠다. 표식 위에 또다시 자신의 표식을 덧씌운다. 결코 지워지지 않게.

다시 입술을 맞대며 키이스는 속삭였다.

사랑해, 내 거짓말쟁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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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추억은 화석이 되고 외로움이 덩치를 키워 가던 때, 그의 앞에 신비한 술집 <카주라호>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는데…….

“원아,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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