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화 (46/77)

1. Kiss Me, Idiot

“응, 으응, 아.”

거친 숨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들뜬 신음을 내뱉으며 키이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살갗에 손가락이 미끄러지자 급하게 손끝을 세웠다.

“하아…… 아.”

힘껏 어깨에 손톱을 박았지만 그대로 긁어 내리고 말았다. 순간 내 위에서 키이스가 깊은 신음을 내질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입술이 겹쳐졌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열렬히 혀를 뒤섞었다. 한층 더 빨라진 움직임에 그만 박자를 놓쳐 버렸지만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마구 흔들리는 몸을 내버려 둔 채 간신히 의식을 붙잡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키이스가 멈추더니 내 안에 사정했다. 하아, 하고 나는 한숨과 함께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

*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몸을 쓰다듬고 깨무는 감각에 눈을 떴다. 키이스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귀와 어깨, 목을 번갈아 깨물며 키스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부끄럽게도 내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자신이 내 안에 쏟아부은 체액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더 해도 돼.”

부끄럽지만 슬쩍 제안했다. 몇 번을 했는데 또 원한다니, 너무 밝힌다고 생각할까?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며 눈치를 보는데, 키이스가 몸을 움직이는 대신 손을 아래로 옮겼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그곳을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깊은 탄식을 뱉었다.

“아……!”

떨리는 어깨에 이를 세워 박으며 키이스가 내 앞을 능숙하게 문질렀다. 다시 몸이 뜨거워졌지만 그곳만은 도통 힘을 찾지 못했다. 조금은 실망해서 눈을 깜박이자 문득 뒤에서 키이스가 웃었다.

“왜 이렇게 작아?”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돌아봤다. 웃는 얼굴이 얄밉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키이스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얕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정색을 하고 쏘아 주었다.

“난 평균이야. 당신들이 큰 거라고!”

“당신들?”

갑자기 키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저러지, 어리둥절해하는데 그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너, 지금 날 네 전 남자들과 비교하는 거야?”

당장 안을 들쑤실 것 같이 흥분한 그것이 아래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서둘러 부정했다.

“그게 아니고, 일반적인 사이즈 말이야. 화장실에 가면 다 보게 되어 있잖아.”

잠시 키이스는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밖에서 화장실 쓰지 마.”

“…….”

지금 억지를 부린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거겠지? 말문이 막혀 그저 바라만 보자 키이스가 내게서 손을 떼고 똑바로 눕혔다. 곧바로 위에 올라온 그가 입술을 겹쳤고, 나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입술이 옮겨 가 뺨과 목, 이어서 귀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귓바퀴에 이를 세워 아프지 않게 지근거린 키이스가 불현듯 물었다.

“묶는 건 언제 할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눈만 깜박였다. 키이스가 입술을 떼고 내려다봤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뒤늦게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그럴 수밖에요. 묶어 놓고 올라탔으니까.>

불현듯 내가 했던 어설픈 거짓말이 떠올라 당황해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게 몇 년 전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이런 건 제발 잊어 줬으면 좋겠는데.

삽시간에 얼굴이 굳어지고 만 내게 키이스가 다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유혹하듯 부드럽고 달큼한 향이 주변을 떠돌았다. 나는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 저기…… 굳이 그런 플레이,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기고 있잖아, 하고 말하려 했지만 키이스의 표정에 그만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다른 놈들하고는 해 놓고 나와는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냐. 당연히 해야지, 응. 왜 안 하겠어!”

나도 모르게 과장스럽게 선언하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준비가 필요하니까…… 저, 사야 할 것들도 있고.”

“…….”

“다른 남자들이 썼던 물건을 쓰고 싶진 않을 거 아냐.”

내 말에 그제야 키이스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다시 입술을 겹친 그가 물었다.

“그래서, 언제 할 거야?”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내, 내일?”

아차, 더 멀리 부를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키이스는 내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기대가 돼.”

하지 말아 줘, 제발.

사색이 되어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뒤에서 키이스가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밀어 넣었다. 젖어 있던 구멍은 부드럽게 열려 그를 받아들였다.

“아, 하아…….”

이내 들뜬 숨소리를 뱉으며 눈을 감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 * *

……세상은 쉽게 멸망하지 않아.

너무나 화창한 푸른 하늘을 보며 나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고작 잠자리 때문에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다니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무척 실례가 아닌가. 내심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저 키이스가 어딘가에 머리를 살짝, 아주 살짝 부딪쳐서 딱 지난밤의 기억만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이왕이면 몇 년 전에 내가 한 얘기도 잊어 줬으면.

열심히 빌고 있는데 마침 휴대 전화의 벨 소리가 들렸다. 번호를 확인해 보니 키이스였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음, 왜?”

불쑥 묻자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점심 식사 했어? 별일 없지?]

“아, 응. ……혹시 늦어?”

왜 갑자기 전화했지? 일말의 기대를 걸고 묻자 건너편에서 그가 짧게 웃었다.

[설마, 당장 들어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키이스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킨 내게 그가 덧붙였다.

[준비는 다 했겠지?]

확인하려고 전화했구나.

더 이상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아니, 이제 나가려고. 스펜서가 낮잠을 자는 시간이니까…….”

[그래.]

그는 더할 수 없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어.]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 전화를 끊었지만 대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이 피할 수 없는 재난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이럴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잘 지냈어요?”

언제나처럼 그는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뒤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물론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 쓸데없는 날씨 얘기를 하고 한 차례 앓듯이 신음 소리를 낸 뒤였다.

“저기, 그러니까, 기구를 사고 싶은데 혹시 아는 게 있나 해서요.”

[기구? 무슨?]

조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해맑게 물었다. 나는 죄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타는 듯이 달아오른 피부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너무나 다행히도 조쉬는 내가 하려던 말을 알아들었다.

[아아, 그 기구. 미안한데 난 그런 취미는 별로 없어서…….]

괜히 망신만 당한 것 같아 더더욱 절망했다. 하지만 뒤이어 조쉬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데인에게 전화해 볼래요? 그 녀석은 잘 알 텐데.]

“……데인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되물었다. 이런 걸로 불러내도 될까? 냉정하게 거절해 버리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조쉬가 팁을 전해 줬다.

[보답으로 달링을 위해 뭐든 사 주겠다고 하면 나올 거예요.]

그리고 데인은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

*

딸랑.

작은 종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금방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짙게 색이 들어간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데인은 헝클어진 머리칼에 낡은 청바지,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 한쪽에 작은 회색 얼룩이 있었는데,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현관에 시멘트를 새로 바르고 있다고 했던 걸 보면 시멘트가 튄 흔적 같았다. 말 그대로 집에 있던 모습 그대로 대충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직원은 숨을 삼키며 멍하니 데인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라면 포대 자루를 걸쳐도 섹시함이 흘러넘칠 것이다.

내심 생각하는데, 가게 안을 한 차례 둘러본 데인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곧바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똑바로 섰다. 나는 나보다 5인치는 커 보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데인. 잘 지냈습니까?”

딱, 하고 그가 입 안에서 풍선을 터뜨렸다. 심드렁한 얼굴로 내 주변을 짧게 훑은 데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플레이를 할 건데?”

“어, 저기,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묶는…… 것을…….”

“또?”

“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데인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밤새 그것만 할 거야? 뭐든 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피트먼은 묶기만 하면 바로 싸?”

“아, 아뇨. 물론 아니죠.”

당황해 부정했지만 그는 ‘그럼?’ 하듯이 나를 내려다봤다. 딱, 또다시 데인이 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데인이 추천해 줬으면 해서…….”

부끄러워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타는 듯한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데인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돌아섰다. 큰 보폭으로 계산대까지 걸어간 그는 주저 없이 비치된 바구니를 들었다. 그리고 진열된 물품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물건을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저렇게 많이?

제법 큰 바구니를 가득 채운 그는 마지막으로 잡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서서 보라는 듯이 표지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거기에는 ‘새로 나온 기구 활용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배려심을 느끼고 안도하는데, 데인이 계산대로 걸어갔다. 나는 황급히 뒤를 따라갔다. 직원은 계산을 하면서도 데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번이나 계산을 다시 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카드를 내밀 수 있었다. 직원이 서둘러 봉투를 꺼내 담아 주는데, 데인이 바구니에 들어 있는 물건 중 두어 가지를 꺼냈다.

“이건 따로.”

그러더니 데인은 그 비닐봉지를 아무렇지 않게 손목에 걸었다. 나도 모르게 올려다보자 그도 역시 나를 내려다봤다. 불만이라도 있냐는 듯이.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또 와 주세요.”

직원이 붉어진 얼굴로 인사를 했다. 데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들이 다가왔다. 들어 주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뒤이어 탄 데인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물을 만큼 여유도 찾았다. 보답으로 선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데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티파니.”

그리고 그는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박힌 고양이 목걸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하루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집 안을 서성거렸다. 카펫 위에 주저앉아 스펜서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꾸만 시계를 보는 바람에 아이는 안달이 나 몇 번이나 내 팔을 잡고 흔들며 주의를 끌려 했다.

“아, 미안, 스펜스.”

나는 아이의 작은 몸을 안아 들고 뺨에 키스를 했다. 스펜서가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을 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나와 스펜서를 바라보며 서 있는 키이스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다음이었다. 곧바로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나의 반응을 전혀 알지 못한 듯 키이스는 선뜻 발을 떼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다녀왔어.”

다정하게 말하며 키스를 한 그는 이내 내 팔에서 스펜서를 데려갔다. 곧바로 높이 아이를 들어 올리자 스펜서는 신이 나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키이스는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스펜서를 바라보다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꼭 끌어안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본 키이스의 두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만 오싹 소름이 돋고 말았다.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스펜서를 재운다는 핑계를 대 자리를 떠났다. 내겐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스펜서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아이는 한 번도 칭얼거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쩍 스펜서를 흔들어 깨우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러나 미처 나쁜 짓을 하기도 전에 먼저 키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연한 듯이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는 스펜서를 확인한 그가 내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머리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켠 키이스가 속삭였다.

“침실로 갈까?”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식도로 넘어갔다. 순간 달아나고 싶어졌으나 마치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키이스가 곧바로 나를 안아 들었다.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나는 차마 마주 웃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미루지 못한 채 끌려가듯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나를 내려놓은 키이스는 가볍게 키스하더니 몸을 일으켜 물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이 남자는 이런 플레이를 해 본 적이 없겠지?

나는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키이스를 묶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때 키이스의 반응도 황당하다는 식이었으니까.

조금 서툴러도 잘 모르겠지.

식은땀이 배는 손바닥을 은근슬쩍 시트에 문지르고 짐짓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누워, 전부 벗고.”

“좋아.”

그는 정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체감상으로는 1초 만에 전부 벗어 버린 것 같았다. 좀 천천히 해, 하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잡지는 외울 정도로 읽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태연하게 넘기면 된다.

나는 모른 척 수갑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곧바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손에서 수갑이 떨어진 것이다.

“아!”

감탄사를 뱉으며 급히 수갑을 주워 들었다. 삽시간에 자신감이 사그라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키이스는 여유 있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워 침대 기둥에 묶어 놓고 달아나 버리고 싶어졌다. 물론 그랬다가는 그 뒤의 일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실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현실의 나는 떨리는 발을 내디뎌 침대로 향했다. 손에 수갑을 든 채.

“묶을게.”

떨리는 것을 감추려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을 보자마자 오히려 내가 그를 유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이스의 흥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선뜻 키이스는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수갑을 채우려 했지만 또다시 그의 가슴에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 오랜만이라.”

황급히 변명을 하자 키이스는 됐다는 듯이 직접 수갑을 들어 자신의 한쪽 손목에 채웠다. 남은 손은 내가 채워 줬다.

키이스의 페로몬이 확연히 진해졌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또 뭘 해야 하지?

간신히 머리를 움직여 공부한 것들을 되새겼다. 동영상도 보고 잡지도 꼼꼼하게 정독했다. 예습은 완벽하다. 억지로 자신감을 북돋우며 키이스의 위로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키이스가 물었다.

“묶는 건 이게 전부야?”

“뭐, 왜?”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런 장난감 같은 건 마음먹으면 금방 풀 수 있잖아. 침대에 묶는다거나 하지는 않는 거야?”

아차.

뒤늦게 깨닫고 나는 허둥지둥했다. 어떡하지, 풀고 다시 묶어야 하나?

“자, 잠깐만.”

머릿속이 뒤엉켜 순서가 제대로 떠오르질 않았다. 일단 저걸 풀자. 그리고 머리 위로 고정하고. 잠깐만, 이 침대엔 묶을 곳이 없잖아? 어디에 묶으라는 거야? 객실 침대 헤드엔 기둥이 있던가? 자리를 옮기자고 할까? 일단 침대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하는 도중에 장소를 바꾸는 게 말이 되나? 그런 커플은 못 봤는데.

드넓은 침대 위에 앉아 이리저리 갈 곳 없는 시선만 배회하는데, 가만히 바라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기 싫어?”

“뭐, 뭐?”

또다시 말을 더듬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닫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키이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풀어.”

순간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키이스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이 심드렁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저기.”

“열쇠 어디 있어?”

키이스는 됐다는 듯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망설이다 한쪽을 가리켰다. 그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가 서랍을 열어 열쇠를 꺼냈다.

나는 돌아서 있는 그의 탄탄한 등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오해한 거 같은데. 이제라도 한다고 할까? 하지만 이미 식은 거 같은데 오히려 지겨워하는 건 아닐까?

“……왜 그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눈 안쪽이 시큰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키이스는 의자에 걸쳐 둔 가운을 입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싫었어?”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믿지 않는 듯했다.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진정해. 다시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키이스는 내 속도 모르고 덧붙였다.

“네가 나와는 이런 걸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았어.”

비꼬는 것도 아니고 실망한 것도 아닌, 그저 사실을 통보하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키이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변명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고개만 젓는 내게 그는 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 쉬어, 무리하지 말고.”

키이스는 내 뺨을 쓰다듬은 뒤 입술에 키스했다. 그것은 너무나 다정했지만 그래서 더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결과는 내가 원하던 대로 나왔다. 키이스는 더 이상 내게 이런 플레이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끌어안았지만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버린 키이스의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 * *

눈을 떴을 때, 키이스는 이미 출근을 하고 없었다. 놀라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힘이 탁 풀렸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탓에 늦잠을 자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 봤자 네 시간도 되지 않은 수면 시간에 머리가 멍하고 속이 좋지 못했지만 더 잘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찰스가 문을 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스펜…….”

“대디!”

찰스의 다리 사이로 작은 몸을 통과시키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 때문에 찰스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뒤뚱거리며 달려오던 스펜서가 이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아이를 일으켰다. 부드러운 뺨에 키스를 하자 아이는 이내 웃으며 마주 나를 끌어안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찰스가 입을 열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침실로 가져올까요?”

그다지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홍차만 달라고 말하려는데, 스펜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홍차와 비스킷에 푸딩을 추가한 후 찰스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찰스는 샐러드와 빵, 오믈렛에 과일까지 가득 담긴 카트를 끌고 돌아왔다.

“전부 드셔야 합니다.”

당부를 남기고 그는 방에서 나갔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입에 넣었지만 맛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간신히 3분의 2가량을 먹었을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모두 지나 있었다.

열심히 놀던 스펜서도 오후가 되자 졸기 시작했다. 나 또한 피곤이 밀려와 아이를 침대 위에 데려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

*

문득 잠에서 깨고 보니 방 안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나는 옆이 비어 있는 것을 깨닫고 순간 사색이 됐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 곧바로 생각지 못한 남자와 눈이 마주쳐 그만 기겁하듯 숨을 삼키고 말았다.

“키이스.”

뒤늦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키이스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의아해하며 입을 여는데, 키이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스펜스는 방으로 옮겼어.”

“아.”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내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푹 잤어?”

“응? 응.”

나는 무안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 ……오늘은, 어땠어?”

“별거 없었어.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불현듯 지난밤이 떠올랐을 때, 키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큰 보폭을 옮겨 테이블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위에는 몇 권의 책자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들고 내게로 향하는 키이스를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무심코 숨을 죽이고 말았다.

마침내 침대까지 다가온 그가 내 앞에 한 무더기의 잡지를 내던졌다. 둔한 소리를 내며 펼쳐지는 망측한 잡지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런 내 위에서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뭔지 설명해 봐.”

물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날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잡지는 여기저기 구겨지고 더럽혀져 엉망이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봤었나? 생각과 함께 주저하며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찌르는 듯한 키이스의 시선과 마주쳤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마른침을 삼킨 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걸.”

생각지 않았던 말이 나와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키이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스펜스가 읽고 있었어.”

“뭐라고?”

순간 기절할 뻔했다.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지르고 만 내게 키이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가지고 놀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침대 밑에서 발견했다고 하던데.”

“이걸 봤다고? 전부?”

“다행히 본 건 이 책뿐이었어.”

키이스가 집어 든 책에는 ‘기구 사용법’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온갖 기구의 사용법이 빼곡하게 글자로 적혀 있는 책자는 다행히 실제 사용한 예를 찍은 사진은 실려 있지 않았다. 후우, 소리 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런 나를 내려다본 키이스가 덧붙였다.

“자, 이제 설명해 봐.”

다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대로 굳어진 내게 머리 위에서 그가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잡지를 쌓아 두고 읽을 정도면서 나와는 안 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니면?”

키이스는 진심으로 불쾌해하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의심이 가득한 시선엔 반문의 여지가 없었다. 키이스의 오해를 풀어 줘야 했지만 딱히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저따위 수갑이 다 뭐라고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갑자기 애초에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뭐였는지 떠올라 서러움이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나도 노력했는데 안 해 본 걸 어떡해!”

“뭐라고?”

키이스가 찌푸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자포자기해 내뱉었다.

“이런 건 안 해 봤다고. 그땐 그냥 둘러댄 거야. 이건 다 연습하려고 산 건데…… 당신이 너무 기대를 해서.”

“…….”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뜸을 들였던 그가 입을 열었다.

“……묶는 건 안 해 봤다는 얘기야?”

평소엔 그렇게 기민한 남자가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둔한 걸까. 나는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안 자 봤어.”

“…….”

“안 해 봤다고, 남자랑은.”

“…….”

“당신이 처음이야.”

키이스는 마치 내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넋을 잃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다물고, 열고, 또다시 다물었다. 한참 만에 키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안 해 봤다니 말도 안 돼, 내가 물었을 때 부정하지 않았잖아.”

울컥 화가 치밀어 나는 내뱉었다.

“멍청하긴! 거짓말인 게 뻔하잖아.”

“멍청하다고?”

키이스 또한 울컥해서 화를 냈다가 이내 멈칫했다.

“잠깐, 거짓말했어? 왜?”

이제 와서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가 경험이 없다고 하면 실망할까 봐…… 당신은 내가 잘한다고 좋아했잖아.”

문득 눈가가 뜨거워졌다. 난폭하게 눈을 문질러 버린 내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처음인데, 그렇게 잘했다고?”

나는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자 친구는 있었는데 남자는 처음이었어. ……오메가가 된 후로는 안 했거든.”

어째서인지 키이스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난잡하게 놀아나던 남자니 내가 괴짜처럼 보이겠지.

키이스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나한테 많이 실망한 걸까? 도대체 어제 종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동영상을 죽어라 찾고 잡지를 외우고.

한참 만에 키이스가 물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다고? 말도 안 돼, 그럼 그게 다 연기였어?”

이 남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당신은 내가 그렇게 대단한 배우로 보여? 그럼 이번 영화에 날 주연으로 써 주지 그래? 엄청나게 대박을 치겠지, 그렇지 않아?”

계속되는 의심에 슬슬 화가 치밀어 한껏 비꼬아 줬다.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키이스의 대답은 칼같이 냉정하게 돌아왔다.

“그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냥 비꼰 거야’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너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놈이랑 베드신을 찍겠다고 말하는 거야? 감히?”

“…….”

그저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민다는 듯이 이를 악문 그를 보자 저러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싶은 생각에 나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냥 한 소리야.”

“당연하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친 키이스는 초조한 듯이 방 안을 서성거렸다.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멋대로 착각한 게 잘못’이라고 얘길 하면 또 화를 낼 테니까.

제대로 정정하지 않은 내 탓도 있고.

내심 반성한 내게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또 있어? 거짓말한 거.”

모든 걸 속죄할 기회였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젠.”

“…….”

“정말로 없어.”

한 번 더 강조하자 그제야 키이스는 하, 하고 막혔던 숨을 뱉어 냈다.

“10년이 가깝도록 안 하다니, 넌 성욕이라는 게 없어?”

“……? 10년이라니?”

키이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늦어도 열여덟 살엔 발현을 했을 거 아냐.”

잠깐 멈칫한 사이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천성이라는 거야? 그것밖에는 답을 모르겠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너무 밝힌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냥 안 했을 뿐이야. 당신도 예전엔 좋아서 한 게 아니었잖아.”

“그래도 하고 싶을 땐 있었을 거 아냐?”

문득 잊고 있었던 지난 일이 떠올라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는.”

떨리는 숨을 사이에 두고 나는 고백했다.

“내가 하고 싶은 상대랑 할 수가 없었어.”

원치 않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문득 떠올리며 말을 멈췄을 때였다. 아무 말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새끼야?”

페로몬 향기가 진해졌다.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여자일 수도 있잖아.”

키이스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정정하지. 네가 뒹굴고 싶었던 화끈한 쓰레기가 누구야?”

‘뒹굴고’, ‘화끈한’, ‘쓰레기’ 어디에 충격을 받아야 좋을지 혼란스러웠지만 키이스가 이런 천박한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 자체가 가장 충격이었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알았으면, 당연히 잤겠지?”

대답할 틈도 없이 키이스가 기가 막혀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어. 하마터면 티켓을 끊고 순서를 기다릴 뻔했다니.”

“왜?”

“몰라서 물어?”

키이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내 몸을 훑어보았다.

“누구든 너하고 자고 나서 네 몸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뒤늦게 깨달은 나는 이번엔 화가 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누구하고 하든 그렇게 느꼈을 거라는 얘기야?”

“뒤는 나하고밖에 안 해 봤다면서? 그런데 넌 내가 오해할 만큼 자지러졌잖아.”

어이가 없는 것을 지나쳐 폭발하고 말았다. 막혔던 숨을 내뱉듯 고함을 질러 버렸다.

“당연하지!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알아듣겠어? 내가 뒹굴고 싶었던 화끈한 쓰레기는 바로 당신이라고,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

키이스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입을 벙긋거리던 그가 쥐어짜듯이 물었다.

“나라고?”

“그래!”

“……언제부터?”

“처음부터!”

멍한 얼굴을 보며 나는 쌓인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 냈다.

“몇 년 동안 짝사랑했던 사람하고 자는데 흥분하지 않으면, 내가 고자야? 그러는 당신은 나하고 할 때 처음부터 흥분했잖아. 나보다 백 배 천 배는 경험도 많으면서 왜 그랬어? 나한테 막무가내로 페로몬을 쏟아부어서 히트사이클까지 오게 만든 주제에!”

처음으로 키이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문이 막힌 것은 고소한 일이었으나 저 정도로 아연실색하는 것은 이상했다. 그저 어이가 없어 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이스?”

나는 의아해져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키이스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나를 내려다봤다. 저런 표정을 짓는 키이스는 처음이었다. 당황해 바라보는데 한동안 미동조차 없던 그가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두 손으로 세게 얼굴을 문지른 키이스가 손을 내리더니 갑자기 내게 덤벼들어 키스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계속해 혀를 문지르고 타액을 섞으며 몸을 겹쳐 온 키이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 무슨 바보짓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굳이 설명하는 대신 다시 입술을 겹쳤다. 길고 진한 키스가 잠시 멈췄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둘 다 남자는 처음이니까 이제 된 거야.”

순간 키이스가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키이스가 황급히 내게 키스했다.

“아니, 오해하지 마. 고작 키스뿐이었어. 그것도 한 명뿐이야. 아주 오래전에.”

그는 후, 하고 고백했다.

“여자로 착각하고 한 거였어. 남자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라고. 나도 남자는 너뿐이야, 정말이야.”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멈칫했다. 그러자 그런 내 반응을 오해한 키이스가 빠르게 덧붙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가 갈려, 내가 속아 넘어갔다니.”

뒤늦게 분한 듯이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나는 망설이다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얼굴이 취향이었어?”

나한테도 그런 얘기를 했었지. 문득 떠올리자 키이스가 난폭하게 내뱉었다.

“얼굴 같은 거 생각 안 나.”

“……그래.”

나는 작게 대답했다. 왠지 화를 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문득 내 얼굴이 정말 이 남자 취향이긴 한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왜 그래?”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시 다른 사람하고 키스하면 죽일 거야.”

키이스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내게 입술을 맞댔다.

“내 오메가에게는?”

나 역시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죽을 때까지 키스해 줘.”

다시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졌다. 이내 키스에 몰두하던 나는 문득 또다시 변이했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게다가 그때 키스한 상대가 나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정말로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키이스를 위해 그 일은 비밀로 하자. 내 알파를 심장 마비로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속으로 다짐하자 키이스가 표식이 새겨진 내 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래?”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작은 웃음소리가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오로지 키스에만 집중했다. 문득 키이스가 물었다.

“그럼 저런 건 다 어떻게 샀어? 경험도 없다면서.”

서랍 안에 넣어 둔 온갖 흉물스러운 기구들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키이스가 화를 내지 않도록 거짓말을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했어.”

“그래?”

키이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의미는 곧바로 알게 됐다.

“그럼 써 볼까? 처음으로.”

“지금?”

사색이 된 나를 보며 키이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다음에.”

다시 입술이 겹쳐지고 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기쁘게 그를 끌어안으며 결심했다. 저 무서운 것들을 내일 날이 밝자마자 버려 버리겠다고.

Short Story

웅성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스펜서는 한참이나 큰 어른들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연우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를 놓쳐 버렸다.

스펜서의 눈을 사로잡았던 알록달록한 풍선은 야속하게도 하늘 저 멀리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연우도 풍선도 없었다.

스펜서는 그 자리에 선 채 두리번거리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사방에 가득한 사람들은 죄다 너무 컸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연우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 어떡하지.

그만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끅, 끅 입술을 깨물고 숨을 들이켰다. 흐느낌과 함께 코끝이 찡해졌을 때,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스펜스, 왔구나. 잘 지냈어?”

뜻밖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동시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시야가 일시에 환해졌다. 고개를 들자 곧바로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위치에 사내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스펜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어?”

“피, 피트.”

낯익은 얼굴을 본 스펜서는 안도감과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대디, 없어졌, 우욱.”

“저런.”

피트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피트의 대디인 조쉬와 연우가 친밀한 관계인 덕에 피트의 동생인 세실을 포함해 셋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종종 만나 함께 놀곤 했다. 형제가 없는 스펜서는 피트를 친형처럼 따랐는데, 이런 상황에서 피트는 그에게 구원이나 다를 바 없는 상대일 것이다. 피트는 스펜서가 울먹이는 모습을 안쓰럽게 내려다봤다.

뒤에서는 사촌들이 소리를 질러 대며 뛰어다녔다. 혹시나 스펜서가 나중에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트는 아이의 머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괜찮아, 스펜스. 울지 마. 내가 찾아 줄게.”

“흐으, 으, 흐으…….”

“그래, 그래.”

피트는 다정하게 스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아 무심코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점차 스펜서의 울음도 잦아들었다. 마침내 스펜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피트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섭섭함을 느꼈다.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은 뒤 놓아주자 스펜서는 곧 뒤로 물러났다. 내심 아쉬워했을 때, 스펜서가 불쑥 손을 내밀더니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무심히 내려져 있던 피트의 손을 꼭 잡았다.

입가에 힘을 줘 짐짓 다부진 표정마저 지어 보이는 스펜서를 보고 피트는 무심코 허리를 숙여 뺨에 키스를 했다. 스펜서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피트는 모른 척 미소를 지은 뒤 스펜서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피트는 갑자기 손을 들더니 지나가던 웨이터를 멈춰 세웠다. 그가 들고 있던 트레이에는 푸딩이 얹혀 있었다.

“자, 이거 좋아하지?”

피트가 다 안다는 듯이 하나를 들어 건네주었다. 곧바로 스펜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갑게 푸딩을 받아 들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한 손으론 피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푸딩을 들고 나니 스푼을 들 손이 없는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스펜서가 또다시 풀이 죽었다.

“괜찮으니까 먹어. 기다려 줄게.”

피트는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결의에 찬 표정으로 피트의 손을 꼭 잡았다. 피트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차라리 빨리 연우를 찾아 주는 게 낫겠다. 생각을 굳히고 그는 발을 뗐다. 스펜서 역시 급하게 그를 쫓아 잰걸음을 옮겼다.

당연하지만 피트의 시선은 스펜서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선뜻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사람들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한편으로는 스펜서를 챙기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여유 있고 차분한 피트의 모습은 마치 어른처럼 근사했다. 스펜서는 동경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어.”

문득 스펜서가 감탄사를 뱉었다. 연우를 찾던 피트가 멈칫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까 스펜서를 홀렸던 화려한 풍선이 높은 나뭇가지에 걸린 채 하늘거리고 있었다.

다시 스펜서를 내려다보자 그는 풍선에 눈을 고정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누구든 그 갈망 어린 표정을 본다면 바라는 걸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피트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유혹을 뿌리치기엔 그도 아직 어렸다.

“잠깐만 기다려.”

피트는 안심하라는 듯이 스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곧 손을 놓았다. 방심하다 그의 손을 놓쳐 버린 스펜서는 금세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그렁거렸다. 하지만 피트는 그가 보는 앞에서 불시에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순식간에 풍선이 걸려 있는 가지에 도착한 그는 걸려 있는 줄을 손쉽게 풀어버렸다. 그리고 스펜서가 미처 울음을 터뜨릴 틈도 없이 피트는 그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황망히 눈만 깜박이는 스펜서에게 피트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여 풍선을 내밀었다.

“자.”

그토록 원하던 풍선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스펜서는 넋을 잃고 피트를 바라봤다. 피트가 멍하니 눈만 크게 뜬 스펜서의 손을 잡아 풍선의 줄을 쥐여 주었다. 스펜서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풍선을 올려다봤다가 피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피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스펜서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피트, 제일 좋아.”

스펜서는 대담하게 고백하며 피트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한 손에는 푸딩, 다른 손에는 풍선이 있었다. 그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순간 당황하는 스펜서를 보고 피트가 허리를 꺾으며 웃음을 터뜨렸을 때, 스펜서가 생각지 못한 행동을 했다.

촉.

뺨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에 피트의 웃음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피트는 놀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스펜서를 내려다봤다. 발돋움을 하고 피트의 뺨에 입을 맞췄던 스펜서가 헤헤 웃었다. 발그레해진 둥근 뺨이 수줍은 듯 빛났다. 무심코 스펜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스펜스, 피트랑 뭐 하고 있어?”

누군가 불쑥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피트는 그제야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세실.”

이름을 부른 것은 스펜서였다. 천진하게 웃는 그는 그러나 세실보다 한 뼘 작았다. 세실은 언제나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스펜스? 잘 지냈니?”

“응.”

고개를 끄덕인 스펜서는 세실을 끌어안으려다 멈칫했다. 아까와 같은 고민으로 두 손을 번갈아 본 스펜서에게 세실은 주저하지 않고 키스했다, 입술에.

쪽, 귀여운 소리가 나자 스펜서는 눈을 깜박였다. 피트는 한쪽 눈썹을 짧게 들어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실은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스펜스. 넌 내가 그립지 않았니?”

“물론 그리웠어.”

세실이 환하게 미소 지으려는 찰나 스펜서가 덧붙였다.

“세실도, 피트도.”

“…….”

“둘 다 너무 좋아.”

스펜서는 해맑게 웃었지만 세실은 웃지 않았다. 피트는 어딘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오직 스펜서만이 불길한 분위기를 깨닫지 못한 채 웃고 있었다. 세실은 흠, 하고 어깨 위에 늘어진 금발을 새침하게 뒤로 넘겼다.

“어딜 가고 있었던 거야?”

“스펜서가 대디를 잃어버려서 찾고 있었어.”

대답한 것은 피트였다. 세실은 흘긋 그를 돌아봤지만 표정은 과히 좋지 못했다. 스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피트가 대디를 찾아 줄 거야. 그렇지?”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피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세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스펜서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 피트가 불길함을 느꼈을 때, 갑자기 세실이 가면처럼 표정을 싹 바꾸며 물었다.

“스펜스, 그건 뭐야?”

“응?”

세실이 가리킨 것은 스펜서가 소중히 들고 있던 푸딩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푸딩을 내려다봤던 스펜서가 그를 올려다봤다. 세실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맛있겠다. 나도 푸딩이 먹고 싶은데.”

피트는 그만 하, 하고 숨을 뱉어 내고 말았다. 하지만 세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짐짓 안타까운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안 되겠지? 스펜스도 푸딩을 아주 좋아하니까……. 하아, 얼마나 달콤할까 저 푸딩은.”

깊은 탄식까지 토해 내는 모습에 피트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스펜서는 이미 그에게 넘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세실과 푸딩을 번갈아 보는 그의 얼굴엔 번민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피트가 나서려던 찰나, 스펜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푸딩을 내밀었다.

“어머, 정말? 나 주는 거야?”

세실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거듭 물었다. 스펜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남자는 여자를 위해 줘야 하니까. 퍼스트 레이디잖아.”

피트는 레이디 퍼스트야, 하고 생각했지만 굳이 바로잡아 주지는 않았다.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부터 잘못된 말이었으니까.

세실은 감동한 듯 “오, 스펜스” 하고 가증스러운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스펜서에게서 푸딩을 가볍게 낚아챘다.

“고마워, 넌 정말 친절하구나.”

세실은 맛있게 푸딩을 떠서 입에 넣었다.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군침만 꿀떡꿀떡 삼키는 스펜서를 앞에 두고 그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유난히 시간을 들여 입에 떠 넣었다. 한 스푼, 또 한 스푼. 푸딩이 세실의 입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스펜서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마지막 한 스푼이 세실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그는 스펜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컵의 푸딩을 모두 먹어 치웠다.

순식간에 비어 버린 컵을 보고 스펜서는 잔뜩 실망했지만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꼭 쥐었다. 차마 여자아이 앞에서는 울 수 없다는 듯이. 그런 스펜서에게 세실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다.”

그리고 그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우아한 몸짓으로 스펜서의 작은 손 위에 빈 컵을 내려놓았다. 스펜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스펜서가 훌쩍 떠올랐다. 놀란 스펜서는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소리쳤다.

“파파!”

반색을 하며 목을 끌어안는 아이의 등을 토닥인 키이스가 한참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피트와 세실은 동시에 움칠했다. 키이스는 평소처럼 서늘한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해 보려는 것처럼. 그때 타이밍 좋게 스펜서가 입을 열었다.

“대디 잃어버려서 피트가 찾아 주고 있었어.”

“……그래?”

키이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곧이어 스펜서가 덧붙였다.

“세실한테 내 푸딩도 줬어.”

“……푸딩을?”

키이스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스펜서는 천진하게 응, 하고 말을 이었다.

“남자는 여자애한테 친절해야 하니까, 내 걸 줬어.”

흠, 하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던 키이스가 다시 세실을 내려다봤다. 세실은 미소와 함께 손가락 끝으로 스커트를 살짝 들고 무릎을 굽히며 공주님처럼 인사를 했다.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잘했구나.”

그 말을 끝으로 키이스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만 가자, 연우를 찾아봐야지.”

“응.”

스펜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남겨진 피트와 세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은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은 키이스와 스펜서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피트가 툭 내뱉었다.

“그 푸딩, 내가 준 거야.”

세실은 목소리를 바꿔 낮게 위협했다.

“조용히 해, 죽여 버리기 전에. 스펜스가 나한테 줬다는 게 중요한 거야, 멍청아.”

하, 피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스펜서를 안고 얼마간 걸어갔던 키이스는 마침 연우를 발견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조쉬와 함께였다.

“키이스.”

반갑게 웃었던 연우가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스펜스! 얼마나 찾았는데.”

“대디!”

우왕, 하고 연우에게 안겨 드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던 키이스가 조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언제나처럼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악수를 나눴다. 인사를 마무리하고 가는 조쉬를 바라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들만 둘 아니었나?”

“아들 둘에 딸 하나. 그런데 딸은 아직 어려서 안 데려왔대.”

가볍게 정정해 준 연우는 스펜서의 뺨에 쪽, 뽀뽀를 한 후 덧붙였다.

“아까 애들을 본 거 같은데.”

“봤어, 나도.”

뭔가 묘하게 사라지는 말끝에 연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때마침 웨이터가 지나가고, 키이스가 선뜻 손을 들었다. 트레이 위에 놓인 푸딩을 들어 건네주자 스펜서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연우에게서 다시 아이를 받아 든 키이스는 열심히 푸딩을 먹는 스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아들은 호구 기질이 있는지도 몰라.”

“응? 무슨 말이야?”

연우가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키이스는 아냐, 하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번민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스펜서는 한 컵의 푸딩을 모두 먹어 치운 뒤 환하게 웃었다. 손목에는 연우가 묶어 준 풍선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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