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느 날의 오후
“……해서 개봉일은 4월 30일로 확정되었습니다. 각국 프로모션에 관한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관련해서 계약 조건은 이쪽을 보시면 되고 배우들 일정은 여기…….”
말을 하면서 연이어 서류철을 하나씩 책상 위에 내려놓았지만 키이스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연우는 가죽 의자에 깊숙이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깊숙이 연기를 마셨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계속해.”
“……끝났습니다.”
그제야 키이스가 연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연우는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봤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할 말 있어?”
물음에 내심 연우는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아서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죠.”
“좋은 일?”
그가 한쪽 눈썹을 짧게 올렸다 내렸다. 그 반응만으로 할 수 있는 추측은 몇 개 없었다. 연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참고 대답했다.
“어제 데이트가 마음에 드셨다든가.”
전날 키이스는 새로 바뀐 파트너와 함께 저녁을 보냈다. 뭘 했는지는 뻔했다. 그가 상대를 찾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목적이니까.
이번의 상대는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몰라.
타당한 추측이었지만 심장 한구석이 저릿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추측은 틀렸다.
“섹스는 섹스일 뿐이야. 세상에 특별한 섹스가 있어?”
여지없이 되돌아온 빈정거림에 연우는 그만 무안해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자신을 모른 척하며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그럼 뭐 하러 굳이 자는 겁니까? 상대를 그렇게 바꿔 가면서.”
“…….”
심상치 않은 침묵이 흘렀다. 천천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던 키이스가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연우는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내 사생활에 관여하지 마.”
“죄송합니다.”
그에겐 섹스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걸로 방탕함을 합리화하는 거라는 빈정거림도 있었지만 변명만은 아니었다.
연우가 거듭 사과하자 키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책상 위로 시선을 내렸다. 건성으로 서류를 훑는 것 같았지만 키이스는 언제나 짧은 시간 내에 최상의 선택을 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오래 시간을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건 거절해. 이건 진행하고, 이건 새로 플랜을 짜라고 해. 다시 이런 쓰레기를 내 앞에 들이밀 용기가 있다면 사직서도 같이 올리라고 전하고.”
계속되는 말들을 연우는 빠짐없이 기억하려 애를 썼다. 드디어 서류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급하게 외운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서류를 그러모았다.
“더 지시하실 내용은 없으십니까?”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내심 간절히 애원했을 때, 그가 담배를 입에서 떼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커피.”
“알겠습니다.”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연우는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달려들듯이 책상으로 향했다. 키이스가 지시한 내용을 입 밖으로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메모를 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한 차례 꼼꼼히 메모를 확인하고 나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 탕비실로 향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원두커피를 그라인더에 갈던 연우는 문득 이제는 없는 팀장의 말을 떠올렸다.
<무조건 무시하는 게 최선이야, 연우.>
물론 대상은 키이스의 폭언과 빈정거림이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이따금 하는 말이 가끔씩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연우에게 당부했던 팀장도 결국 참다못해 사표를 던졌다. 더해서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을 상대로 소송까지 건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키이스의 화려한 인생에 아주 작은 먼지라도 묻혀 줄 생각이었다면 성공했다.
어마어마한 소송액이 걸린 재판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 얼마나 성질 더러운 보스인가에 대해 팀장은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떠들어 댔다. 안타깝게도 사건은 단 하루 만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인생마저도 바꿔 버렸다. 연우를 포함해서.
입사한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연우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대신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몇 명의 비서가 사표를 내거나 해고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서 팀에서 그나마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연우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키이스가 나를 해고한다면 제발 일하게 해 달라고 빌지도 몰라.
무서운 상상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었다. 키이스가 짜증을 내거나 꼬투리를 잡아 빈정거리는 것은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쉽지 않았다. 어느 때는 잘 넘겼다가도 불쑥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연우는 항상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오던 키이스, 그를 스쳐 가던 달콤한 향기, 자신에게 닿았던 입술. ……구역질을 하던 마지막 모습까지.
연우는 가는 한숨과 함께 생각을 멈춰 버렸다. 키이스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건 착각이었다. 지금이나마 그의 기분이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지.
새삼 다짐하며 필터에 덜어 낸 원두에 뜨거운 물을 조금 따라 습기가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원두가 촉촉이 젖은 다음 다시 물을 따르자 진한 카페인 향기가 그윽하게 퍼져 나갔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숨을 가라앉힌 후 다시 키이스의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은 뒤 돌아섰다. 등 뒤로 짜증스러운 키이스의 음성이 이어졌다.
“대체 엔젤을 감금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망할, 매번 놓치면서 그게 말이 돼? 이건 고의라고밖에는 할 수 없어…….”
탁.
등 뒤로 문을 닫고 나자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저렇게 화를 내다니. 분명 지금 기분이 나쁜 이유와 통해 있을 것이다.
작은 호기심이 머리를 들었으나 이내 무시해 버렸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급히 책상으로 걸음을 향한 연우는 아까 메모해 둔 쪽지를 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오전 중으로 이걸 다 끝내야 한다. 오후에는 또 할 일이 쌓여 있으니까.
* * *
“하아.”
간신히 숨을 돌리고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반이나 지났다. 아직 전화를 걸어야 할 곳이 한 군데 남았지만 다시 근무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키이스는 미리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대로 점심을 하러 나간 참이었다. 오후에 잡혀 있는 일정 중 가장 먼저인 것은 그의 재산 관리인을 만나는 것이었는데, 최근 구입한 거대한 요트의 인수 과정과 세금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었다. 자세한 자료는 그가 가져올 것이지만 비서인 연우 또한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야 불쑥 내려올 지시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연우는 전반적인 상황을 전부 머릿속에 넣고 필요한 자료를 그때그때 바로바로 꺼내 쓸 정도로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키이스의 스케줄에 맞춰 관련 자료들을 미리 확인해 두고 끝난 후 다시 복습하는 매일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미리 정리해 둔 파일을 찾아 당시 구입한 요트에 대한 서류를 확인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항상 준비해 두는 에너지바도 마침 떨어져 홍차에 꿀을 넣어 점심을 대신하고 급히 눈으로 활자를 좇았다.
연우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어?
문득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 둔한 의식 너머로 이 향기가 이렇게 가까이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렸다. 기억 속에 묻어 뒀던 오래전 일이 꿈처럼 몽롱하게 되살아났다.
<아무리 동양인이라도 가슴이 너무 없는 거 아냐?>
쿡쿡거리며 웃는 그의 얼굴이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을 때, 갑자기 연우는 눈을 떴다.
“……!”
화들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자 크게 열린 시야에 예상치 못한 얼굴이 들어왔다. 언제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달콤한 향기의 주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이스.
바짝 마른 입 안으로 이름을 되뇌었지만 막상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직 잠에 취해 정신이 멍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키이스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선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연우의 당황한 시야에 문득 자신을 향해 웃던 아직 앳된 얼굴과 지금 그의 얼굴이 겹쳐졌다. 심장 한구석이 불현듯 욱신거렸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뭔가 흐르는 감각을 느낀 연우는 황급히 콧대를 누르며 고개를 젖혔다.
목 안쪽으로 느껴지는 불쾌한 피 맛과 함께 덩어리진 혈액이 꿀떡거리며 넘어갔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가 손을 뻗었다.
“뭐 하는 거야, 고개 숙여.”
당황해 시키는 대로 머리를 내렸다. 뜨끈한 피가 콧속을 타고 흘러 손을 흠뻑 적셨다. 키이스가 연우의 책상 위에 놓인 티슈 통에서 휴지를 마구 뽑아 내밀었다.
“고, 고맙습니다.”
연우는 콧대를 움켜쥔 채 꽉 막힌 음성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티슈로 코를 꽉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지만 머릿속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쿵쾅거리는 맥박이 코를 쥔 손가락 끝으로 느껴졌다. 도저히 키이스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만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남은 손을 들어 목 뒤를 조심조심 주물렀다. 어디엔가 코피가 나면 목덜미를 주무르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어설프게 드러난 목을 쓰다듬었지만 여전히 키이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득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가 진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서류의 한 귀퉁이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행히도 키이스 또한 그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아.”
극히 일부지만 자신의 피로 더럽혀진 서류가 그의 손안에 들어가자 연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저, 오후에 알베르트 씨가 오시니까요. 그전에 미리 읽어 두려고…….”
“왜?”
“네?”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키이스는 다시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찌푸린 얼굴로 연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연우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미리 읽어 놔야 얘기하실 때 흐름을 놓치지 않을 테고, 그래야 뭔가 지시를 하시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요.”
키이스의 미간에 팬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또다시 ‘왜?’라고 묻는 것은 자제했지만 흔치 않게 표정에 생각이 드러났다. 키이스가 자신의 말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연우는 한층 더 무안해졌다. 그대로 무시하고 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이스는 뜻밖에도 그 자리에 선 채 다시 물었다.
“네가 두 달 넘게 오버타임을 한다고 보고가 들어왔어. 이유가 뭐야?”
너무 당연한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난감해졌다. 연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이 많으니까요……. 당일에 다 못 한 일들을 처리하고 다음 날 할 일들도 필요하면 미리 해 놔야 하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가득히 물음표가 떠올라 있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일에 매달리는 이유를 그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연우 역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왜 그러지 못했냐고 만약에 키이스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많았다. 비자 때문에, 대출금 때문에, 회사의 조건이 좋아서, 아직은 버틸 수 있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라서 등등등.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었다. 결코 키이스에게 그것만은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비록 무슨 일이 있어도 키이스가 그와 같은 의미로 연우를 원할 일은 없을 테지만 하다못해 연우는 마음에 차는 유능한 비서의 자리만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한계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버티고 있는 걸 이 남자는 영원히 모르겠지.
연우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필사적으로 뭔가를 갈구하는 것 자체를 키이스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원하는 건 언제나 간단히 손에 넣어 왔을 테니까. 연우는 어떤 말로 그를 설득해야 좋을지 몰라 암담해졌다.
하지만 불편한 시간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그의 재산 관리인인 알베르트가 찾아온 것이다.
“아, 피트먼 씨. 안녕하십니까,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빨랐다. 연우는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키이스와 먼저 악수를 나눈 후 연우에게 시선을 향했던 그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연우, 무슨 일입니까? 코피예요? 저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비서 팀에 인력이 부족하다는 얘긴 들었지만. 아, 흡연실에서 다른 팀 직원들이 나누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고 가는 잡담에 충분히 섞여 들 만한 뻔한 화제였다. 누구의 험담도 아닌 그저 사실만을 읊조릴 뿐인. 그래서 더욱 간단히 휘발될 만한 얘기인데도 그가 기억을 하다니 신기했다. 수다스러운 남자였지만 어쨌든 걱정해 주는 건 사실이라 연우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다니,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피트먼 씨, 연우에게 줄 산재 처리 비용을 계산해 드릴까요?”
그 말에 연우는 깜짝 놀라 사색이 되어 부정했다.
“아뇨, 병원이라뇨. 고작 코피인데요. 전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다급하게 말을 하고 보니 키이스와 알베르트가 이상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연우는 그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 얼어 버리고 만 연우의 시야에 키이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명백하게 한심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는 키이스를 보자 그만 책상 밑으로 숨어 버리고 싶어졌다. 알베르트는 서둘러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섰다.
“연우는 항상 진지하니까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말을 굳이 돌려서 할 필요는 없어.”
굳이 그렇게 비꼴 필요도 없었다. 굳어지는 얼굴을 차마 감추지 못하는 연우를 내버려 둔 채 키이스가 돌아섰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알베르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연우는 늦게나마 발을 뗐지만 미처 그들을 따라잡기 전에 먼저 키이스가 내뱉었다.
“넌 들어올 필요 없어.”
알베르트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사무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탁, 하고 울린 문소리에 이어 적막감이 내려왔다. 연우는 무너지듯이 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코를 꽉 쥐었다.
코피가 아직 멈추지 않았으니까.
현기증에 눈을 감으며 억지로 자신을 다독였다. 카펫을 더럽힐 수도 있고, 계속 피가 떨어지면 그것도 신경 쓰이니까. ……꼭 내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말도 맞고.
“하아.”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막혔던 숨을 내쉰 후 천천히 손을 뗐다. 코피는 멎었지만 이제 와서 사무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차나 뭔가 필요한 게 생기면 말을 하겠지. 연우는 급히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닦은 뒤 돌아와 다른 일을 하며 틈틈이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는 한 시간여가 흐른 다음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안에서 나온 알베르트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코피는 멎었습니까? 다행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흘긋 그의 뒤를 보자 알베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우가 해 줄 일이 몇 개 있는데 비서에게 말해서 따로 팩스를 보내 주겠습니다. 당장 급한 건 없어요, 피트먼 씨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는 것 말고는.”
그는 농담처럼 짧게 윙크를 하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연우는 급히 커피를 준비해 필기구와 함께 들고 키이스의 사무실로 향했다.
가벼운 노크 뒤에 문을 열자 키이스는 찌푸린 얼굴로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서류가 흩어져 있는 걸 보니 알베르트가 놓고 간 걸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하는 키이스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은 뒤 연우는 허리를 폈다. 이후의 일정을 보고하고 추가로 지시할 일은 없는지 물을 셈이었다.
한동안 메시지를 슥슥 넘기는 것 같던 키이스가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찌푸린 미간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연우에게 키이스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뭐야?”
아직 볼일이 남았냐는 뜻이었다. 연우는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3시에 회의가 있습니다. 앞으로 30분밖에 남지 않아서요……. 또 혹시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신가 하고.”
자신감 없이 흐려진 말끝에 스스로에게 마구 욕을 퍼붓고 싶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잠자코 기다리자 한동안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데이트를 한 지 얼마나 됐어?”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 연우는 눈을 깜박이다 되묻고 말았다.
“네? 저요?”
키이스가 시선만을 올려 그를 바라봤다.
“히트사이클 때만 상대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말을 굳이 돌려서 할 필요는 없어.>
얄궂게도 그 순간 키이스의 말이 연우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왜 저런 걸 묻는 거지? 나 같이 따분한 모범생은 하룻밤을 보낼 상대조차 구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연우는 딱딱하게 되물었다.
“왜 제가 사이클이 올 때마다 남자를 구하러 다닐 거라고 생각하시죠?”
“오메가는 문란하니까.”
“알파는 정숙합니까?”
따지듯이 묻자 담배를 꺼내려던 키이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빤히 연우를 쳐다봤다. 동시에 아침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또다시 그때처럼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연우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려 말을 맺었다.
“서류 확인하시고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시다면 부르십시오. 그럼.”
“기다려.”
그대로 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키이스는 단 한 마디로 연우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마지못해 움직임을 멈추고 서자 그는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어제 데이트를 망치기라도 했어?”
본인이 연우의 기분을 망쳤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우는 할 말을 꾹 참고 냉정하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네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질적이니까?”
놀리듯이 말끝을 올린 키이스가 짧게 웃었다. 전혀 즐겁지 않아 하는 얼굴로.
“하긴 오메가들은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곤 하지.”
모든 오메가들이 다 히스테릭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연우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항상 저에게 오메가를 비하하시는 발언을 하시는데.”
“날 고소하려고?”
기다렸다는 듯이 키이스가 말을 받았다. ‘소송’이라는 단어는 곧바로 전임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키이스 역시 고의로 내뱉은 단어임에 틀림없었다. 너도 하고 싶으면 해 보라는 듯이.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 들어왔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심코 그가 들여다보던 휴대 전화로 시선을 향했던 연우는 급히 키이스의 얼굴로 눈을 되돌렸다.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은 고용 계약서에 적혀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연우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뇨, 월급도 복지도 모두 만족스러운데 그만두고 실업자가 될 순 없죠. 사과하라고 하시면 하겠습니다, 진심은 아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렸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키이스가 짧게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매일 초과 근무를 하는 이유가 그거야?”
해고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라고 키이스는 오해했다. 연우로서는 다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심이 들킬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우는 본심을 숨기고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시키신 일은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찰칵, 작은 금속음에 이어 황금빛의 불꽃이 올라왔다. 그가 한 차례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연우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성실한 비서를 둬서 다행이군.”
비꼬는 건지 진심인 건지 알 수 없는 말투로 키이스는 말했다. 연우는 어리둥절해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모아 연우에게 내밀었다.
“알베르트가 연락할 거야.”
“네.”
그가 팩스를 보내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서류를 받아 든 연우는 항상 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덧붙였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나쁜 습관은 하루라도 빨리 고치는 게 좋다. 그것을 연우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별생각 없이 눈을 깜박이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담배를 피우며 입을 열었다.
“구해 올 물건이 있어.”
“뭡니까?”
‘사 와’와 ‘구해 와’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채 연우는 물었다. 키이스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시계야.”
“시계요?”
자신도 모르게 되묻자 그는 펜을 꺼내 아무렇게나 글자를 휘갈긴 후 메모를 내밀었다. 쪽지를 받아 든 연우는 유명한 보석 브랜드의 이름과 모델명을 확인한 후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키이스는 평소처럼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 수 있겠지?”
“……? 물론이죠, 피트먼 씨. 매장에 들러야 하니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좋을 대로 해.”
“감사합니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동선을 그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누구에게 선물을 하려는 걸까.
문득 떠올렸던 연우는 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하던 일을 어서 끝내고 시계를 사러 가야 한다.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고작 시계를 사는 것뿐.
간단히 생각했던 그 일은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
*
“없다고요?”
매니저의 말에 연우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매니저는 네, 하고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벌써 5년 전 모델이에요. 지금 구하기는 어렵죠.”
“주문을 한다면…….”
당황해 말끝을 흐린 연우에게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한정판이라 아마 다른 매장에서도 판매가 끝났을 거예요. 다른 모델은 어때요? 꼭 그것이어야만 하나요?”
“네…….”
연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른 때는 아무거나 쓸 만한 걸 가져오라고 말하던 키이스가 유독 모델명을 적어 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게 꼭 필요한 게 분명했다. 매니저는 당혹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 필요하다면 다른 매장에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희 매장에서 그 제품을 마지막으로 판 게 벌써 작년 여름이거든요…….”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 * *
머리가 아프다.
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다 간신히 출근을 한 연우는 편두통을 참으며 키이스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렸다. 그가 마실 커피를 미리 갈아 놓고 책상을 정리하고 보고할 준비를 서두르며 바쁘게 움직였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다시 시계로 시선을 향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아.”
탄식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탄사를 뱉어 낸 연우는 키이스의 모습을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는 여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머리칼을 빗어 넘겼고, 슈트는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었으며, 무심한 시선조차 모두 그대로였다.
잠시나마 복잡했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연우가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지만 키이스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의 앞을 스쳐 사무실로 향했다. 연우는 황급히 탕비실로 들어가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렸다.
똑똑.
노크를 하는 손이 가늘게 떨렸지만 다행히 문을 열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키이스는 의자에 앉아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그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그를 마주 보는 연우의 기분은 전혀 평소 같지 않았다. 이제부터 정말 하기 힘든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되뇌었던 말을 막상 꺼낼 때가 되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자 연우는 커피를 내려놓은 뒤 오늘의 일정과 보고를 이어 갔다.
평소처럼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느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대로 빨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우의 얄팍한 수는 곧 바닥이 드러났다. 드디어 말을 해야 할 순간이 오고 말았다.
“저, 피트먼 씨.”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본론을 꺼내는 데는 좀 더 용기가 필요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연우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지시하신 그 시계 말입니다만, 저, 어제 숍에 갔는데…… 그게, 한정 생산이었다고.”
보석이 가득 박힌 화려한 시계를 떠올리며 입을 다물자 곧바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키이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침묵은 버거웠지만 연우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키이스가 이 무거운 공기를 균열 내 주기를.
“그래서.”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못 구한다는 얘기야?”
“어…….”
불현듯 전날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게 대화가 맞는다면 말이지만, 아무튼 시킨 일은 마무리한다고 연우는 말했고 그는 연우가 성실하다고 칭찬했었다.
……칭찬이었겠지, 당연히.
불안하게 덧붙였던 연우는 자꾸만 솟아오르는 불안을 한사코 억누르며 그를 바라봤다. 나쁜 예감이 자꾸만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절, 해고하실 겁니까?”
그만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고 말았다. 곧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키이스가 가는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을 때였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키이스가 덧붙였다.
“다만 실망할 뿐이야.”
“…….”
연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무서운 말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더니 웃기까지 했다. 그저 입가를 비뚤어뜨린 냉소였을 뿐이지만 연우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안 돼.
연우는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현기증으로 눈앞의 풍경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차라리 해고한다고 말했다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매달려서라도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했다는 말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 남자가 나를 인정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시간을, 주시면.”
연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수롭지 않게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키이스가 시선만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어렵게 숨을 억누르며 최대한 냉정한 척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구해 오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
“부탁드립니다.”
연우는 절박한 마음으로 애원했다. 애초에 키이스는 그를 시험하려 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아, 제발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좋아.”
마침내 키이스가 입을 열었을 때, 연우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무심코 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키이스가 덧붙였다.
“내일까지면 충분하겠지?”
불가능하다. 내일이 토요일이라서가 아니었다. 휴무라는 사실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고작 하루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키이스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허튼 시간 낭비를 막아 주려고 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로서는 그냥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실망했어.>
“알겠습니다.”
키이스의 말을 떠올리자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간신히 대답하자 키이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서 있는 비서 따위에게는 이미 흥미를 잃은 게 분명했다. 그것은 더더욱 연우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시계를 찾아야 돼.
그 순간부터 연우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 차 버렸다.
* * *
“없습니까? 어떻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지점에도 없단 얘기시죠?”
몇 번이나 읊었던 말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연우에게 수화기 건너편에서 매니저가 곤란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말했다.
[미안해요, 연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서…….]
그녀는 몇 마디 말을 더했지만 연우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안 된다’라는 말만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상점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매니저는 반가워하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용건을 꺼내자 이내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역시나 대답은 같았다.
[그건 더 이상 구할 수 없어요, 연우.]
한숨에 이어 새로 나온 컬렉션을 소개하려는 그녀를 황급히 제지한 후 전화를 끊었다. 팔자 좋게 말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모든 명품 숍에 전화를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다른 주의 숍에 연락을 해 수소문하기까지 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같은 대답만 주야장천 듣다가 이젠 그나마도 끊어졌다.
침묵하는 휴대 전화를 막막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던 연우는 급기야 짜증스러워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마구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말았다.
찾아야 돼.
어딘가엔 분명 있을 것이다. 몇백 년 전에 생산된 와인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는데 하물며 고작해야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계를 못 구할 리가.
급하게 인터넷의 경매 사이트를 뒤지는 한편 매물이 나온 건 없는지 이리저리 다시 전화를 돌렸다. 반드시 새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꽉 막힌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연우는 마지막 통화를 끝내면서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었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그는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쉰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해 버린다면 난 지금까지 대체 뭘 했던 거지?
죽도록 열심히 했는데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니, 기가 막혀 탁 막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아직 남은 시간이 있어.
벽의 시계를 확인한 연우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거렸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시간만 보낼 수도 없어서, 그는 심각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만에 하나라도 모를 가능성을 찾아 연우는 급하게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입하신 분들의 명단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매니저는 당황해하며 거부했으나 연우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 예약을 걸어 둔 사람은 없습니까? 아직 물건을 찾아가지 않은.”
난감해하는 그녀에게 한번 찾아봐 줄 것을 거듭 부탁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도 몇 통의 전화를 더 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도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통화를 끝낸 연우가 다음 전화를 걸려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부탁을 해 둔 매니저들 중의 한 명이었다.
[연우, 제품이 하나 남아 있는 걸 찾았어요. 저, 그런데 문제가…….]
“어딥니까? 지금 구할 수 있는 겁니까?”
달려들 듯이 묻는 연우에게 그녀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잠깐 진정해요, 연우. 연우가 말한 대로 예약된 물건을 찾은 건데 그 물건의 주인이 문제라서…….]
“알겠습니다,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주인이 누구인지만 알려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망설이던 매니저는 마지못해 매장을 알려 주었다. 그녀가 알려 준 장소까지는 차로 네 시간을 넘게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연우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급하게 왕복 시간을 머릿속에 넣으며 연우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전화를 끊고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핸들을 잡은 손에 식은땀이 배는 것을 느끼며 미친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달려갔다.
*
*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매장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화려한 매장의 내부는 연우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한 남자와 그의 앞에 놓인 시계만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을 뿐이었다.
“저, 손님.”
직원 중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저희 쪽도 무척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설마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만약 연우가 조금이라도 늦었거나 남자가 빨랐다면 바로 눈앞에서 시계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아, 손님!”
매니저가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똑바로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연우의 목표는 명확했다.
마침내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서 우뚝 멈춰 서자 그때까지 미동조차 없던 남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연우는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의 케이스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만 실망할 뿐이야.>
키이스의 단조로운 음성이 머릿속에 되살아났을 때, 연우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시계를 양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딱딱한 어투에 남자는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무거운 침묵이 매장 안에 내려앉았다.
* * *
“오랜만이에요, 키이스. 여전히 멋지군요.”
미소를 지으며 야릇한 눈빛을 보내는 금발의 미인에게 키이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구였더라?
전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 반응에 그녀는 무안해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키이스, 설마 날 모른다는 건 아니겠죠? 기억해 봐요, 우리가 함께 보냈던 V 호텔에서의 밤을.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우리…….”
뒤이어 그녀는 열심히 설명하려 했지만 키이스는 전혀 흥미가 없는 표정이었다.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 만 그녀의 뒤에서 다른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케이,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그레이슨!”
여자는 안도하며 반갑게 그와 비주(Bisous)를 나눴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그레이슨이 말을 이었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전에 프랑스에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돌아온 지 벌써 1년이 지났어요. 당신도 그렇고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키이스에게 냉담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 그녀는 과장스럽게 높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레이슨과 얘기를 나눴다. 키이스는 샴페인을 마시며 지루해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흘긋 그의 뒷모습을 보았던 여자는 실망한 듯했으나 이내 눈앞의 그레이슨에게 집중했다.
“그럼 그레이슨, 다음에 꼭 만나요. 내 번호는 알고 있죠?”
“물론이지. 조만간 보자고.”
간단히 키스를 나눈 후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레이슨이 몸을 돌려 키이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발코니로 나가 샴페인을 마시며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 중인지도 모른다. 그레이슨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나에게 감사할 차롄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키이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뭐를?”
시큰둥한 반응에 그레이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구해 줬잖아.”
“부탁한 기억이 없는데.”
그레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대개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익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인 모양이지.”
“아니.”
그레이슨은 선뜻 대답하더니 히죽 웃었다.
“한 번 잤어.”
글라스를 기울이던 키이스가 멈칫했다. 그레이슨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단 하룻밤 잔 상대까지 전부 기억하다니, 대단하군.”
혼잣말처럼 뇌까린 키이스에게 그레이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야 같은 상대와 또 자는 일이 없을 거 아냐?”
“…….”
그와는 다른 이유로 키이스는 말이 없어졌다. 물끄러미 그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바라봤을 때였다. 저택의 집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피트먼 씨. 실례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손님?”
무심코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레이슨 역시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집사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네, 피트먼 씨의 비서이고 이름은 연우 서라고 했습니다.”
“연우?”
“네.”
뜻밖의 이름에 놀란 키이스에게 집사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쪽으로 안내할까요?”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흘긋 그를 본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줘, 고마워.”
키이스가 그를 돌아보자 그레이슨이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만날 거잖아?”
“굳이 여기로 부를 건 뭐야?”
찌푸린 얼굴로 묻는 키이스에게 그레이슨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나도 궁금하거든.”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샴페인 글라스를 기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반신반의했다. 이름을 잘못 전했다든가, 사람을 잘못 찾았다든가,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 연우가 여기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는 낯익은 얼굴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하아, 하아.
거친 숨결을 몰아쉬는 비서의 창백한 얼굴을 키이스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들었던 일인데도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그의 옆에서 이번에도 역시 그레이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우! 어떻게 된 거야? 여기까지. 키이스가 설마 주말까지 부려 먹는 거야? 정말 나쁜 상사잖아.”
일부러인 듯 험담까지 덧붙이는 그였지만 정작 연우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키이스를 향해 못 박혀 있었다.
그것은 키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란 표정이 어느새 넋을 잃은 듯 멍해졌다.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과 부드러운 턱선,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약하게 들썩이는 어깨까지 그는 빠짐없이 시야에 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을 잠시 고정했던 연우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피트먼 씨.”
겨우 그 말만을 한 후 그는 급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키이스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작게 오르내리는 목울대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한 손에 충분히 잡히고도 남을 것 같은 가늘고 긴 목을 응시했다. 이어지지 않는 말 대신 연우가 내민 것은 작은 쇼핑백이었다.
“……뭐야, 이게?”
그것을 받아 들지도 않은 채로 시선만을 내렸다 다시 올린 키이스에게 연우는 그제야 대답했다.
“찾으셨던 시계입니다.”
“…….”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흔치 않게 불신과 혼란스러움과 당혹감과 그 외 온갖 감정이 일시에 복잡하게 뒤엉켜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그런 그를 신기해할 여유도 없는지 연우는 평소처럼 사무적인, 하지만 거친 숨결 탓에 조금은 흐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시간 내에 가져왔습니다.”
“뭐라고?”
키이스는 고작 그 한 마디를 내뱉은 게 전부였다. 연우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오늘까지 구해 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직 시간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키이스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구했다고? 그 시계를?”
“네.”
연우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는 이 재미없는 비서가 절대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정말로 해냈다는 뜻이었다.
그냥 던진 말이었을 뿐인데.
키이스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연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네?”
“어떻게 구했어?”
다시금 물은 말에 연우는 처음으로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를 키이스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처음엔 매장에 물건이 다 없다고 해서…….”
연우는 평소처럼 차분한 음성으로 자신이 얼마나 고생해 이 시계를 손에 넣었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파티장의 요란한 소음을 완전히 지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키이스는 전혀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따금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마디가 길고 섬세한 손가락과 숨을 고르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슬쩍 내비치는 붉은 혀와 나긋하게 움직이는 작은 입술과 키이스의 시선을 피하는 수줍은 눈짓이 그의 감각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다.
“다행히 예약을…… 해서…… 양보…….”
띄엄띄엄 이어지는 단어를 키이스는 연결하지도 못했다. 그런 키이스에게 연우가 속삭였다.
“제 고용주가, 간절히 원한다고요.”
키이스는 순간 멈칫했다. 멍한 눈을 깜박이던 그가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온 것은 몇 초의 공백이 더 흐른 뒤였다.
“……내가, 뭘?”
연우는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시계죠, 물론.”
“…….”
키이스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제야 그는 연우가 시계의 원주인을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 그만 얼굴을 일그러뜨린 키이스의 반응에 연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찰랑거렸다. 키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코니의 난간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사이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 연우. 그렇게까지 해서 구해 오다니.”
“지시를 하셨으니까요.”
연우는 평소처럼 대답했으나 음성에는 어쩐지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을 뻔했던 키이스는 순간 멈칫했다.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타이밍 좋게 그런 모습을 발견한 그레이슨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혹시 반하기라도 했어?”
“하.”
흠칫 놀랐던 연우는 키이스의 기가 막혀 하는 탄성에 또다시 멈칫했다.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뱉었다.
“눈이 삐기라도 했어? 저 자식은 남자잖아.”
연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감정이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를 무시한 채 키이스는 몸을 움직였다. 연우의 앞을 스쳐 가며 그는 이를 갈며 뇌까렸다.
“페로몬 좀 없애, 망할.”
“네?”
연우가 또다시 바보처럼 되물었다. 키이스는 짜증이 치밀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의 멍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페로몬이라니? 무슨 소리야?”
키이스는 어렵게 시선을 떼 그를 바라보았다. 보란 듯이 연우를 한 손으로 가리킨 키이스에게 그레이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무슨 말이야?”
그 말에 키이스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매서운 시선에 연우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약을 먹고 왔는데요…….”
그레이슨과 연우의 시선이 한번에 키이스에게 쏟아졌다. 키이스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입을 벌린 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급하게 생각을 떠올렸다.
페로몬 향기가 아니라면 왜.
여전히 연우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워하는 표정과 함께 살며시 벌어진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던 키이스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렴풋이 키이스는 자신이 지금껏 이 비서를 노골적으로 무시해 왔던 이유를 떠올렸으나 굳이 그것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가차 없이 망상을 짓밟아 버린 그는 이내 몸을 돌리고 평소보다 거친 음성으로 내뱉었다.
“남자와는 자지 않아.”
“……? 네가 그렇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키이스.”
그레이슨이 그답지 않게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를 무시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남겨진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손안에 든 종이 가방을 맥없이 내려다봤다.
그 뒤로 키이스는 다시는 그에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철저히 사무적으로 연우를 대했을 뿐이다. 이후 몇 년이 흐를 때까지.
* * *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연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말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가늘게 입술을 떠는 그를 키이스는 일부러 외면했다. 그의 시선은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 자신의 옆얼굴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연우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음 얼마간은 불편하시더라도 곧 적응될 겁니다.”
키이스가 그제야 그에게 시선을 향했으나 연우는 여전히 눈을 피한 채로 중얼거렸다.
“유능한 사람은 많으니까요……. 엠마도 이제 많이 익숙해졌으니 이번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거고요.”
짜증이 난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지금 바로 나한테 맞춰서 일을 할 사람은 너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아.
키이스는 생각했다. 이 불쾌감의 원인은 그저 유능하고 손쉬운 비서가 벌써 두 번이나 사직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눈치도 없이 키이스의 기분을 한층 더 상하게 만들었다. 웬만해서는 의지를 꺾지 않을 것 같았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보다 더 쉬운 방법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쓰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
쏟아지는 페로몬 향기에 연우가 놀라 키이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크게 뜬 눈과 벌어진 입술이 키이스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것 봐.
그는 생각했다. 금방 이렇게 무너지잖아.
예상했던 대로 오메가인 비서는 금세 의지를 잃고 멍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 표정은 갈망과 두려움과 혼란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연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뭔지 키이스는 알 수 있었다. 패닉에 가까운 뇌와 반대로 흥분한 하반신까지도.
깊이 들이켠 숨과 함께 갑자기 연우가 숨을 멈추고, 키이스는 그대로 그의 머리를 잡아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아.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황급히 밀어내려는 손을 간단히 낚아채고 키이스는 더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마치 자신의 성기를 그의 몸 안에 쑤셔 넣듯이 강압적이고도 난폭하게. 버둥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연우는 그에게서 달아날 수 없었다. 입 안을 마음껏 탐닉하고 타액을 빨아들이고 혀를 지근거리는 것에 그저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키이스는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멈출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난폭하게 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곧바로 살점이 터지고 뜨끈한 피가 타액과 뒤섞여 입 안으로 들어왔다. 키이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난폭하게 빨아들였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연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였다. 그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숨결이 거칠어 자연스럽게 음성이 평소보다 더 낮아졌다. 키이스는 속삭이듯 선언했다.
“내 집으로 들어와. 그럼 되겠지.”
연우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우의 얼굴은 몇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듯했으나 키이스는 또다시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연우에게 그는 오만하게 선언했다.
“내가 너한테 절대 손대지 않을 거라는 걸 너도 알잖아.”
난 게이가 아냐, 이건 단지 스튜어드의 처방을 시험한 것뿐이야.
키이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연우를 응시했다. 그의 입술은 터지고 찢어져 퉁퉁 부어 있었다. 그 타액의 달콤함과 피의 향이 아직도 입 안에 느껴졌다. 키이스는 자신이 연우의 페로몬 향기에 잠시 홀린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게 아니라면 고작 키스 따위에 이렇게 흥분할 리가 없었다.
마침내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이스는 만족했다. 이로서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자신은 유능한 비서를 계속해서 채용하게 될 것이고, 연우는 원하는 조건에 맞는 직장을 계속해서 다니게 되겠지.
그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연우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연우는 남자니까.
키이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연우가 남자라는 건 자신이 극알파라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현실이다. 그는 게이가 아니고 지금까지 남자에게 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착각한 적은 있지만.
잊고 있던 불쾌한 기억을 언뜻 떠올렸던 키이스는 이내 생각을 접어 버렸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연우와 자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평생.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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