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크게 뜬 시야에 환한 빛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한순간 몸이 날아올랐다. 뒤늦게 전신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잠깐 의식이 멀어졌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나마 깨어난 감각은 그것뿐이었다. 눈을 뜨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온통 흐릿한 시야에 총천연색의 빛이 요란하게 오르내렸다.
“…….”
일어나려고 했지만 고작해야 손가락을 어렵게 까닥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열렸던 눈꺼풀도 이내 내려앉았다. 시야와 함께 다시 까맣게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그는 간신히 떠올렸다.
……펜스.
작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넓은 병원의 홀을 가로지르자 지나던 사람들은 흘긋거리며 의아해했다. 그중 앞서서 걷고 있는 남자를 알아본 몇 명이 놀라 수군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 그들을 스쳐 갔다.
“피트먼 씨, 이쪽입니다.”
재빨리 방향을 안내한 경호 팀장 휘태커가 말을 이었다.
“담당 의사가 설명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우는 아직 잠들어 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야지.”
남자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모퉁이를 돌자 때마침 서성거리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몸에 가려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작은 몸이 우왕좌왕하다 갑자기 멈췄다.
“파파!”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에 그때까지 험악하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일시에 풀어졌다. 주저하지 않고 허리를 숙인 남자는 아이를 선뜻 안아 들고 등을 토닥였다.
“파파, 파파.”
“그래, 스펜스. 괜찮아, 울지 마.”
계속해서 다정하게 속삭이는 음성에 스펜서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피트먼 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휘태커가 입을 열었다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는데요. 지금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안내해.”
“끅, 끅.”
스펜서는 키이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그치려 애썼다. 그 탓에 눈물과 콧물과 침으로 슈트가 엉망이 됐지만 키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가 신경 쓰는 건 양복이 망가지는 사소한 일 따위가 아니었다.
연우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하마터면 키이스는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히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받아 꼴불견은 면했으나 무릎에서 힘이 풀린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큰 상처는 없고 즉시 병원으로 이동해 검사를 받는 중이라는 보고가 그를 그나마 안도하게 했다.
<머리 쪽을 부딪혀서 의식을 잃었습니다만 다행히 검사상으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겨우 마음을 놓았으나 다른 걱정이 머리를 들었다. 사고 날 당시 연우는 스펜서와 함께 있었다. 눈앞에서 그 상황을 목격한 아이의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의 설명이 끝나 갈 때까지도 아이의 흐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울다 지쳐 탈진한 듯 졸기 시작한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키이스를 보고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찰스에게 잠든 아이를 맡기고, 키이스는 일단 병원에 남았다. 연우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상처는 크지 않다’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연우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연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심장이 서늘해져서, 키이스는 슬며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끊었던 담배가 피우고 싶어져 그는 무심코 슈트의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가 어색하게 내려놓았다. 마음이 놓이자 이젠 짜증이 치밀었다.
연우가 눈을 뜨기만 기다리며 보조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았다. 키이스의 속마음 따위는 전혀 모른 채 연우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태평한 모습에 더 어이가 없어졌을 때, 갑자기 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걸 보니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키이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연우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눈보다 먼저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연우가 눈을 떴다.
“…….”
천장을 보았던 그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키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그는 잠시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키이스는 긴장이 풀리고 대신 화가 치밀었다.
“푹 잤어? 좋은 꿈이라도 꿨나?”
제어되지 않은 빈정거리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넋을 놓고 키이스를 바라보던 연우가 뒤늦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이스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으나 아직 속이 풀릴 정도는 아니었다.
“스펜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내 울다가 좀 전에 지쳐서 잠들었다고. 엘리베이터를 두고 굳이, 계단에서 뭘 했던 거야?”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화가 올라왔다. 도대체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왜 이리 아무렇지 않게 위험을 무릅쓰는가 말이다.
“스펜스나 네가 위험할 것 같으면 그걸 보호해 주는 게 경호원이야. 내가 네게 경호원을 붙여 둔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 이렇게 네가 다쳐서 드러누울 거라면 경호원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무모한 데도 정도가 있지…….”
가차 없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연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황망해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연우의 넋 빠진 표정을 보자 키이스의 화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앞으론 네 몸 먼저 생각하라는 얘기야. 알아들었어?”
“어…… 네.”
다그치는 말에 연우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언뜻 스쳐 갔지만 키이스는 무시했다.
“하루 정도는 병원에 있는 게 좋겠어. 검사 결과는 괜찮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스펜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게 확인되면 바로 퇴원할 수 있게 해 둘 테니까…….”
“…….”
“연우, 듣고 있어?”
키이스가 다시금 재촉했다. 갑자기 그는 불안해졌다. 연우가 계속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저렇게 이상한 얼굴로 날 보고 있지? 정말 아무 이상이 없는 게 맞나? 내심 초조해졌을 때, 연우가 입을 열었다.
“저, 피트먼 씨.”
처음에 키이스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생각에 골몰했다 보니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넘겨 버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니었다.
“피트먼 씨.”
다시 한번 그의 성을 부른 연우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계속 누워 있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전에 먼저 연우가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병원인가요? 제가 왜 여기 있죠? 피트먼 씨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키이스는 무심코 손목의 시계를 보고 날짜를 확인했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설령 만우절이라고 해도 연우는 이런 질 나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사소한 농담을 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며 쩔쩔매는 게 키이스가 아는 연우였다.
그런데 지금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이번엔 키이스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너 지금, 장난해?”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질렀던 키이스가 순간 멈칫했다.
없어.
“아!”
난폭하게 어깨를 낚아채는 바람에 연우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키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귀를 확인했다.
없어.
눈으로 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있었는데.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연우의 귀는 깨끗했다. 오래전 표식을 남기려다 실패했던 흔적인 희미한 흉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표식이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