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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앞으로 있을 일을 예고하는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질 것처럼 음산한 비구름 밑으로 높이 솟은 빌딩의 최고층에 위치한 사무실 안에서, 엠마는 조마조마해하며 상사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파경! KP, 버림받았나?
본지(本紙)는 지난 8일, 성인 물품 판매점인 모처에서 다정하게 나오는 한 커플을 발견했다. 그중 한 명은 유명인 KP의 파트너 ywoo로, 그동안 아이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종종 매체에 실리곤 했다. 그러나 당일 찍힌 사진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상이한 것으로, 아이 없이 홀로 나온 그는 일반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성인 용품을 구경한 후 함께 차에 오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취재에 의하면 그들은 함께 가게를 구경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물품을 구입했다. 가게 점원은 그들이 무척 친밀해 보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산 물건의 목록은 수갑, 피어싱, 딜도 등등(다른 페이지에서 상세하게 안내하겠다). 쇼핑 목록에는 구입한 물건의 사용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서와 다양한 체위가 소개된 최신 성인 잡지도 있다고.
관계자에 따르면 KP는 최근 파트너와 소원한 관계이며 파트너는 이혼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저 미지의 남자가 원인일지도 모르지만 그럴 경우 KP는 파트너에게 차이는 셈이 된다.
KP가 이혼할 경우 결혼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파트너는 많은 재산을 받기는 어려울 거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결혼 기간을 고려하면 현재 그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는 대략 3억 달러 정도이며, 만약 7년간 더 결혼 생활을 지속한다면 열 배에 달하는 30억 달러까지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덧붙인다. 둘 사이에 있는 아이의 양육권은 ywoo가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ywoo에게 조언하건대, KP의 페로몬 향기가 역겨워진 게 아니라면 7년만 더 기다리는 게 어떨까?
한편 그들은 이후 티파니에 가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가 30만 달러 상당의 고양이 목걸이를 샀다고 한다…….>
“하.”
키이스는 아직 남은 헛소리를 다 읽기도 전에 기가 차 한숨을 뱉어 냈다. 당당하게 1면을 전부 차지한 기사는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개소리였다. 연우가 나를 찬다고? 이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기사랍시고 끼적인 쓰레기를 어떻게 손봐 줄까. 지금까지 적당히 봐줬더니 주제를 모르는군.
“저, 피트먼 씨.”
키이스가 기사를 모두 읽기를 기다리고 있던 엠마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과 기사를 노려보고 있는 상사를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마조마하게 추측해 보는데 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 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한 키이스가 험악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보고 엠마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키이스.]
통화를 연결하자마자 건너편에서 성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키이스는 입을 열었다.
“말해.”
평소처럼 무심한 반응에 연우는 더욱 초조해져 급하게 말을 이었다.
[오해야, 키이스. 전부 설명할 수 있어.]
“아주 잘해야 할 거야.”
문득 이를 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연우는 가슴을 졸이며 서둘러 말했다.
[어, 저기, 지금 사무실로 갈게. 우선 내 얘기를 들어 봐. 다 설명해 줄게. 응?]
통화를 하면서 나올 준비를 하는지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천천히 와, 점심이라도 하면서 얘기하지.”
[아, 응. 미안해, 시간을 빼앗아서.]
“연우.”
[응?]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흘러나온 음성에 연우는 멈칫하고 되물었다. 잠깐 사이를 뒀던 키이스가 물었다.
“하나만 대답해 봐. 설마 사용했던 물건은 아니겠지?”
[뭐…… 설마, 아냐!]
몇 초 뒤에 의미를 이해한 연우가 펄쩍 뛰며 부정했다. 그는 당황스러운 한편 억울함에 화가 치밀 정도였다.
[그런 거 안 해 봤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사용했을 리가 있어? 애초에 당신이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간 거고 얼마나 무안했는데……!]
거기까지 했던 연우가 말을 멈췄다. 몇 초 사이를 둔 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애초에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잘못이니까.]
“알고 있으니 다행이야.”
여지없이 빈정거리는 말에 연우는 또다시 억울해졌다. 멋대로 내가 경험이 많을 거라고 추측한 건 누군데.
하지만 어쨌든 이 상황은 절대적으로 연우에게 불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항의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물었다.
[……많이 화난 건 아니지?]
“물론 화는 났어.”
키이스는 말과는 달리 평온하게 덧붙였다.
“넌 아주 열심히 해명해야 할 거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차마 어떤 방법이냐고 묻지 못한 채 연우는 전화를 끊었다. 키이스는 화면을 잠시 바라봤다가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잔뜩 화가 났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지만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그런 키이스를 보며 엠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상상하는 것을 거부했다.
* * *
후우.
한숨을 내쉬며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던 연우는 결심을 하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앞의 경우보다 좀 더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데인. 잘 지냈어요? 갑자기 미안해요…….”
[어, 그래.]
마침 쉬는 날인지 데인은 자다 깬 듯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우가 막 말을 이으려는데, 데인이 먼저 그것을 가로챘다.
[사진 잘 나왔더라.]
“끅.”
순간 딸꾹질이 나와 연우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해 하려던 말을 깜박 잊어버린 그는 급하게 머리를 굴려 단어를 골랐다.
“어, 저기, 기사.”
[어, 봤지. 주유소에 갔더니 다 그 신문만 보고 있던데.]
여전히 태연한 대답에 연우는 그만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결국 그는 체념하고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다행히 사진이 좀 흐리게 나와서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넘어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처음보다 명확해진 음성으로 데인이 물었다. 당연히 화가 났겠지, 연우는 생각했다. 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터무니없는 사건에 엮여 버린 셈이니……. 다시금 사과하려던 그에게 데인이 덧붙였다.
[나만큼 잘난 남자가 또 있을 리 없잖아.]
“…….”
연우는 잠시 할 말이 없어져 눈만 깜박였다. 데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하고 수긍하면서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 바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렸던 그는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어쨌든 폐를 끼쳐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전화했어요. 별일은 없는 거 같아서 다행인데, 혹시 기자라거나 귀찮은 일이 생기면 얘기해 줘요. 이쪽에서 뭐든 해 볼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는 한숨을 사이에 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런 상황인데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됩니까?”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야말로 데인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내심 각오를 하는데, 건너편에서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뭔데?]
연우는 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급히 대답했다.
“키이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혹시 몰라서…… 그날 별일 없었다는 걸 얘기해 주면 좋겠습니다만…….”
점점 음성이 사그라들고, 곧 침묵이 흘렀다. 건너편에서 끄응, 하고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데인이 몸을 뒤척이는 듯했다.
[오늘은 힘들고, 내일?]
“아!”
귀찮은 듯이 이어진 대답에 연우가 반색을 하며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럼 그렇게, 네. 정말 고마워요, 데인. 잊지 않겠습니다. 뭐든 보답할 수 있으면…….”
[생각해 볼게. 안녕.]
데인은 건성으로 인사를 한 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순간 연우는 당황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폐를 끼쳤으니 식사라도 사겠다는 말을 덧붙인 후 말을 맺었다.
“대디, 뭐 해?”
마침 반쯤 열려 있던 문 사이로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우유를 마시고 온 듯 하얀 수염을 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스펜서를 연우는 웃는 얼굴로 안아 들었다. 냅킨을 꺼내 입가를 닦아 주자 아이는 연우의 뺨에 키스를 하더니 물었다.
“대디, 뭐 해? 어디 가?”
외출 준비를 끝낸 그를 보고 스펜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우는 아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깐 파파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다녀올 거야.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스펜서가 눈을 반짝 떴다. 순간 연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스펜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오.”
연우는 안타까운 탄식을 뱉고 말았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오늘은 타이밍이 영 좋지 못했다. 키이스는 스펜서에게 한없이 무르기 때문에 아이를 보면 화를 억지로라도 누그러뜨릴 게 분명했다.
잠깐의 유혹을 느꼈으나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으로 아이를 방패 삼아 상황을 도피하는 건 좋지 못하다. 제대로 설명하고 사과할 일이 있다면 해야지. 데인도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뒤 연우가 시선을 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 연우를 보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었던 연우는 스펜서의 뺨에 키스했다.
“안 돼, 스펜스.”
“우에…….”
금세 울음을 터뜨리려 바르르 입술을 떠는 아이를 보고 연우는 기껏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모래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같이 가자’라는 말이 막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삼키느라 입을 열고 잠깐 멈춰야 했다.
“울어도 안 돼.”
짐짓 엄하게 이른 연우는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다음에 파파한테 허락받고 같이 가자. 대신 오늘은 일찍 올 테니까, 응?”
달래듯이 뺨에 다시금 키스를 한 후 아이를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출발하기로 한 시간에서 5분이나 지났다. 벌써 현관에는 차가 대기 중이었다.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방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스펜서가 두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뒤를 쫓았다.
“대디, 대디.”
“스펜서, 방으로 들어가.”
뒤돌아보며 손을 저은 연우는 마침 홀에 서 있는 찰스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난간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찰스, 지금 내려가요.”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찰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난간을 따라 걸으며 곧장 계단으로 향했을 때였다. 잠깐 멈춘 사이에 그를 따라잡은 스펜서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대디, 나도 갈 거야!”
“스펜스!”
순간 놀란 연우가 소리쳤다. 신이 나 달려가던 스펜서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문제는 그가 막 계단에 도착한 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펜스!”
연우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아이의 작은 몸이 허공에 날아오르는 것만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연우는 힘껏 몸을 내밀어 아이를 붙잡았다.
어.
갑자기 시야가 크게 반전되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 연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스펜서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스펜스.
아이를 꼭 안은 채 그는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아래쪽에서 지켜보던 찰스가 고함을 지르고, 곧 연우의 의식이 까맣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