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2화 (5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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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안은 고요했다. 연우의 담당 의사는 창백한 안색으로 잔뜩 긴장한 채 키이스를 훔쳐보았다. 키이스는 겉으로 보기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진하게 풍겨 나오는 페로몬 향기는 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맹세코 뇌에는 이상이 없어요.”

주치의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듯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이스는 당장 그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고 싶은 기분을 내리누르며 대신 손가락으로 요란하게 책상을 두드려 댔다.

“그럼 저걸 어떻게 설명할 거지? 연우가 기억을 못 한다고!”

몇 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다. 스펜서도, 자신과 결혼을 했던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키이스는 이런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초조함에 음성이 높아졌다. 의사는 당혹스러워하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뇌에 충격이 가해져 일시적으로 기억 장애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레 돌아올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

집요하게 마지막 말을 되풀이해 묻는 키이스에게 의사는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대부분 이런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 돌아오는데 가끔, 아주 가끔 아닌 경우가 있어서요. 장담을 드리기는 어려운…….”

“그럼.”

키이스는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영원히 연우가 나와 스펜스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 저기, 운이 아주 나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기억이 저절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마시고…….”

어떻게든 의사는 그에게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개소리.

키이스는 이를 갈았다. 그래, 대부분은 돌아오겠지. 하지만 연우가 그 대부분의 경우라고 장담할 수 있어? 혹시나 내가 뽑은 제비가 그 희박한 확률의 당첨 제비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냐고.

거기까지 떠올린 키이스는 당치 않은 상상에 어이가 없어졌다.

축, 당첨이라는 피켓을 든 얼간이가 바로 나라고?

마구 고함을 지르고 싶어지는 자신을 간신히 참아 냈다. 화를 삭이느라 고요해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질 수 있으니까요, 우선은 조심스레 접근을…….”

“그래서, 연우의 상태에 맞춰 주라는 얘기야?”

성급하게 말을 가로막은 키이스에게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추후 상태를 보아 사실을 얘기하는 쪽이 좋겠습니다. 마침 표식도 사라졌으니…….”

“표식이 사라진 원인도 모르겠지?”

다시금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의사가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예는 본 적도 없어서…….”

돌팔이 자식.

저 의사의 목을 졸라서 연우의 상태가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라는 걸 키이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직 화풀이를 위해 기꺼이 그 일을 할까 잠시 생각했을 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휘태커가 들어왔다.

“뭐야?”

날카로운 음성에 그는 무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저, 피트먼 씨. 연우가 이상이 없다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가면 되잖아.”

“저, 그게…….”

휘태커가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고, 키이스 역시 얼마 안 가 깨달았다, 연우가 말하는 집이 어디인지를. 바로 그 토끼장 같은 창고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집이라고 하는. 그래, 연우가 그렇게 말했었지.

기억을 되살릴수록 울화통이 치밀었다. 연우를 그 토끼장에 혼자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분명 지금쯤이면 스캔들 냄새를 잘 맡는 하이에나 떼거리들이 기사를 쓰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것이다. 일단 기사화되는 것부터 막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하루는 병원에서 지내야 한다고 말해.”

키이스의 말에 휘태커가 다시 물었다.

“내일 출근을 걱정하던데요, 그래서 집에 가야 한다고…….”

이어진 말에 키이스는 더 참지 않고 내질렀다.

“내가 쉬라고 했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야 하나?”

“……죄송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화살이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그는 사라졌다. 쾅, 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키이스가 눈을 감고 미간을 문질렀다.

엉망진창이야.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키이스는 찰스에게 병원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비서인 엠마가 미리 스케줄을 조정해 둔 상태라 점심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전날은 의사의 충고에 따라 다시 잠든 그의 얼굴만 보고 귀가해야 했다. 밤이 지났지만 실망스럽게도 기억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다.

아침 일찍 깨어난 스펜서는 키이스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키이스는 넥타이를 매던 것을 멈추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전날 연우가 검사를 위해 입원했다는 말만 들은 스펜서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양 뺨에 격려의 키스를 해 주었다.

“꼭 대디와 함께 와, 파파.”

“그래, 스펜스.”

아이의 사랑에 자신의 희망을 더해 키이스는 그럭저럭 낙관적인 기분이 들었다. 스펜서에게 후식으로 푸딩을 두 개나 주라고 집사에게 지시할 정도였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기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연우가 기억을 찾았으리라는 기대가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예 휴가를 낼까.

그러고 보니 가족끼리 시간을 보낸 게 언제였지? 키이스가 기억을 되짚었다.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니까 남반구로 떠날까. 중동도 나쁘지 않지. 사막에서 별을 보며 밤을 새우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조금 성질을 죽여야 할 필요도 있다. 이번에 연우가 눈을 뜨면 그땐 화를 누그러뜨리고 차분하게 그를 타이를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고.

거기까지 떠올렸던 그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연우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었다.

왜 항상. 어째서.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악물고 키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스펜서의 일을 보면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연우는 몇 번이고 키이스나 스펜서를 위해 몸을 내던질 것이다.

방에 가둬 버릴까.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감금해 버리는 상상을 떠올렸을 때, 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

*

“피트먼 씨.”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휘태커와 다른 경호원들이 키이스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전날보다 한층 어두운 안색이 애써 다독거렸던 기분을 자꾸만 불안하게 만들었다. 키이스는 일부러 못 본 체하고 그를 지나치며 물었다.

“연우는?”

“대략 두 시간 전쯤 일어났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키이스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불현듯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아주 순간의 일이었고, 곧 필요 이상으로 힘을 줘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에 연우는 튀어 오를 듯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키이스에게 향했다. 엉거주춤 선 채 굳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의 반응에 키이스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연우의 입술이 열렸다.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키이스는 결과를 예상했다. 입을 막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찰나, 연우가 소리를 냈다.

“안녕하십니까, 피트먼 씨.”

키이스는 그만 눈을 감아 버리고 싶어졌다.

* * *

몇 년째 끊었던 담배를 오랜만에 피우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키이스는 잠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순간적인 당혹감이 지나가자 미칠 것 같은 불안과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바로 어제까지도 세상 전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잃어버렸다.

단 하루 만에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돌변할 수 있지?

살면서 인생이 불공평하다거나 억울하다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좌절한 경험 또한 없었다. 그는 언제나 가진 쪽이었고, 가질 수 없어서 분하다거나 애타 하는 마음 따위도 그저 남의 얘기였다.

연우에게 사고가 났을 때나 표식이 남지 않았을 때는 얼핏 그런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연우는 예전처럼 그를 넘치도록 사랑했고, 둘 사이에 아끼는 아이까지 있었다. 결론적으로 키이스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가졌고, 항상 승자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우의 표식은 여전히 사라진 채였다. 어이없게도 그가 키이스에게 남긴 표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

기가 막혀 짜증 섞인 한숨을 뱉어 냈던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연거푸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그래, 어디 해보자고. 누가 이기는지.

지금까지 그는 져 본 적이 없었다. 사업도, 폴로 경기도, 연우에게조차 져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연우의 기억을 되돌리고 말 테다. 표식도 물론이다. 자신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

*

혼자 병실에 남아 있던 연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키이스였다. 무심코 안도한 그는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키이스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을 때, 연우는 예전의 빈틈없는 비서로 돌아가 있었다.

“피트먼 씨.”

인사는 아까 했기 때문에 간단히 이름을 부르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했다. 키이스는 그런 연우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연우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사가 아침에 다녀갔는데, 별다른 증상이 없으면 퇴원해도 좋다고 해서요. 오후에 수속을 밟을까 합니다만.”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의견을 묻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실상은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키이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뭔가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지만 연우로서는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 때문에 애매하게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휴가를 주신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일에 복귀해야 비서 팀 직원들도 안심할 테고, 저도 출근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

키이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연우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의사에게 입막음을 시킨 건 키이스였으나 그것은 금방 그의 기억이 돌아올 거란 안이한 희망 때문이었다. 의사의 말대로 이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젠 솔직히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키이스는 먼저 보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그를 보며 연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키이스는 보란 듯이 한 차례 연기를 빨았다 내뱉은 뒤 물었다.

“뭐야?”

“아, 저.”

연우는 어색하게 사이를 뒀다 대답했다.

“병원에서는 금연일 텐데, 괜찮을까 해서요.”

자신이 담배를 끊었었다는 사실조차 그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긴 키이스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쉬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

정확하게 그의 기억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전날 의사가 그에게 ‘오늘이 며칠이냐’라고 날짜를 물어 확인했다지만 정작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키이스가 기억할 리 만무했다. 확실한 건 연우가 비서였던 무렵으로 되돌아가 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차피 일에 관한 얘기뿐이겠지.

그는 안이하게 생각하며 연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우는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항상 주저하지 않고 키이스가 원하는 답을 술술 읊어 대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옆얼굴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연우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미간을 찌푸린 키이스를 여전히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저, 피트먼 씨가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키이스는 담배를 허공에 든 채 움직임을 멈췄다. 연우는 계속해서 시트를 만지작거리는 자신의 손끝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휘태커 씨는 제가 잘 수습했다고 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혹시 피트먼 씨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던 게 아닙니까? 그래서 병원에 있는 게 아닌지…….”

……하.

키이스는 깊은 탄식을 입 안으로 삼켰다. 그 순간 연우를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과 누군가에게 마구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들고 있던 담배가 손안에서 우그러져 한순간 손바닥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연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피트먼 씨, 괜찮으십니까? 왜…….”

급하게 뻗은 손을 키이스는 난폭하게 뿌리쳤다. 연우가 흠칫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내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감정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퉁명스럽게 뱉은 말에 연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신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 깍듯하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키이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그에게 화를 내거나 키스를 퍼붓거나 둘 중 하나를 해 버릴 것 같았다.

……그때도 그랬었지.

키이스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연우는 키이스의 상처를 보고 울었고, 그는 충동적으로 연우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자마자 화가 치밀었지.

이유는 하나였다. 연우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는 설령 오메가라고 해도 남자와 섹스는커녕 키스를 하는 것조차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우에게 키스를 하고 있었던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은 페로몬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었지만 그 뒤 연우가 약을 먹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는 달아날 구멍이 없어져 버렸다. 결국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연우에게 퍼부었다.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하고.

기억을 되짚어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면접을 보러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의 연우를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취향을 눈앞에서 구현한 것 같은 얼굴에 가는 몸까지 전부 완벽했지. 시시한 비서 따위가 아니라 다른 걸 제안하려던 찰나, 남자라는 걸 알고 느꼈던 실망과 분노 역시 되살아났다. 예전에도 완벽한 취향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역시 남자였다. 다만 지금은 기억이 흐릿한 그는 베타였고, 연우는 오메가다.

저 얼굴들은 왜 모두 남자인가.

키이스는 치미는 짜증에 수시로 연우에게 화풀이를 했다. 당시 마땅한 지원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를 채용했지만 몇 번이나 해고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건 오직 자신이 그에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남자라고 무시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절대로 너에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이를 갈았었는데.

처음으로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게 언제지?

문득 떠올렸을 때, 연우가 말을 걸었다.

“피트먼 씨?”

흘긋 시선만을 움직여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끝내야 할 거 같아서요. 이만 퇴원하고 싶은데, 수속을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이어 연우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건지 지갑이나 휴대 전화나 가지고 있는 게 없습니다. 있는 거라곤 제가 입었던 옷뿐이라는데…….”

연우의 말끝이 또다시 흐려졌다. 방황하는 시선과 불안해하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이스가 생각했다.

별거 아니야.

이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안정을 취하도록 돌봐 주고, 조금씩 그간의 일을 알려 주면 기억도 돌아오겠지.

불안해하는 연우를 보자 다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자제심이 생겼다. 일부러 시간을 끌며 다리를 꼬아 앉은 키이스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려다 그때까지 손안에 구겨져 있던 담배를 발견했다.

일어나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리고 돌아선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연우는 잠자코 기다렸다. 내심 그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을지를 상상하며 키이스는 보조 의자에 앉았다. 이번엔 반대쪽으로 다리를 꼰 그는 평상시처럼 입을 열었다.

“약간 문제가 생겼어.”

“문제요? 어떤 문제 말입니까?”

조심스러운 되물음이었지만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키이스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가 테러를 당한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야. 상처도 아물었고, 이젠 흉터도 남아 있지 않아.”

그 말에 연우는 처음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키이스는 그가 시간을 들여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렸다. 두어 번 눈꺼풀을 파닥거렸던 연우가 입을 열었다. 한 차례 숨결이 드나든 후에야 비로소 그는 말했다.

“몇 년 전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더듬거리는 연우에게 키이스는 명쾌하게 답을 내놓았다.

“넌 기억을 잃어버렸어, 머리를 다쳐서.”

“머리를 다쳐요?”

“그래.”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연우를 보며 키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가 잘못됐다는 얘기야. 그래서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전부 잊어버렸어. 그중에서 네가 잊지 말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걸 가르쳐 주지.”

연우는 이번엔 반복조차 못 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키이스는 그런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선언했다.

“그동안 우린 결혼했어. 너의 성은 피트먼이고, 나와 함께 가진 아이도 있지. 아이의 이름은 스펜서야. 남자아이고.”

“…….”

난데없이 터진 폭탄에 연우는 멍한 얼굴로 아예 말문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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