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3화 (51/77)

3

한동안 병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내심 초조해졌다. 연우가 반응을 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그리 인내심이 많지 못했다. 침묵이 무한정 길어지면 연우를 윽박지를지도 모른다. 그럼 연우는 겁에 질려 버리겠지.

다행히도 위협을 하기 전에 먼저 연우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제 머리가 잘못되긴 한 모양입니다. 귀가 잘…….”

“네 귀는 멀쩡해, 잘못된 건 머리지. 너와 난 결혼했고, 아이도 있고, 곧 있으면 결혼기념일이야. 넌 매년 내게 새로운 결혼기념일 반지를 선물했었지.”

그 말에 연우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결혼반지가 걸려 있던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키이스가 이를 갈았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반지를 왜 안 낀 거야? 하긴,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

아마 검사를 하면서 뺐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불신에 찬 표정을 짓는 저 연우의 반응이 문제였다.

“집에 가면 스펜스가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인터넷을 확인해 보면 너와 내가 함께 있는 사진이 잔뜩 뜰걸?”

네가 그 망할 소방관과 찍힌 사진이 제일 최신으로 뜨겠지. 엠마가 그걸 전부 삭제했을까?

데인을 떠올리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게 다 그 개자식 때문이다.

“의사의 말로는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더군. 아무튼 내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연우가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고요? 제가요? 피트먼 씨와 결혼을 해요? 제가요? 아이까지 낳았다고요? 제가 말입니까?”

그는 흥분한 듯 다소 격앙된 음성으로 빠르게 내뱉었다. 문득 섹스를 할 때 울며 교성을 지르던 연우가 떠올라 키이스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다리를 꼬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눈에 띌 정도는 아닌 앞섶을 확인한 뒤 다시 연우에게 시선을 향했다. 창백한 안색에 다소 거칠어진 숨결을 몰아쉬며 연우가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아.

키이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연우를 응시했다.

키스하고 싶어.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뜻밖에도 그는 당황해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냥 덮쳐 버릴까 하고 생각했을 때, 연우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황해서 그만 흥분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이해하시죠?’ 하며 그는 슬쩍 키이스의 눈치를 봤다. 여전히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보자 잔뜩 흥분했던 머릿속이 순간 서늘하게 식어 버렸다. 연우가 한 번만 더 ‘피트먼 씨’라고 자신을 부르면 다시는 발기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발기한 걸 알고 정신 차리라고 저러는 건가? 정말 배려가 깊지, 내 오메가는.

키이스는 내심 한껏 비꼬아 줬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이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저렇게 패닉에 빠져 있는데, 키이스 혼자 몸이 단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짐승이었나.

자기혐오와 함께 짜증을 느끼며 키이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정 그러면 의사에게 물어봐. 내가 말하는 건 믿을 수 없다는 거잖아? 그쪽을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거지? 나보다.”

키이스는 연우가 당황해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또다시 틀렸다. 연우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태도로 네, 하고 산뜻하게 대답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키이스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화가 도무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 할 말을 찾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 묻고 싶은 건 없어?”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연우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조차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린 게 전부인, 극히 사무적인 것이었다. 키이스의 속이 뒤틀리는 것 따위야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을 텐데요.”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며 나와 스펜스가 기억하지 않아도 될 하찮은 과거냐고 몰아붙이고 싶은 걸 참느라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런 키이스를 보며 연우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피트먼 씨도 말했잖아요, 저같이 지루한 녀석은 없을 거라고.”

연우는 미소를 지었지만 키이스는 웃지 않았다.

“지금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겠다는 거야?”

“네?”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내지른 말에 연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왜 이게 복수인지 아는 사람은 키이스뿐이었다. 정작 본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별말도 아니었는데 왜 저 남자가 저런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게다가 애초에 키이스가 연우에게 했던 말이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연우가 사과했지만 그것은 그를 더 자극했을 뿐이었다. 키이스는 곧바로 비꼬았다.

“뭐가?”

연우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를 마주 보았다. 키이스는 그런 그를 보며 당치 않은 상상을 했다. 지금까지 전부 다 거짓이었다고 말해, 기억 상실 따위는 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고.

그러면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 테니까.

협박에 가까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연우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어…… 제가 재미없는 농담을 해서요?”

“하.”

키이스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는 모습을 연우는 당혹해하며 지켜보았다.

몇 년 만에 다시 피우게 된 담배가 절실하게 그를 유혹했다. 키이스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갑자기 연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피트먼 씨.”

키이스.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가 떠올라 순간 키이스는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는 데는 몇 초의 공백이 필요했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이 돌아본 그에게 잠시 머뭇거렸던 연우가 입을 열었다.

“어, 전 어쩌다 사고를 당하게 된 건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잔뜩 억눌린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사한테 물어보지 그래?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을 거잖아?”

쾅,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는 것으로 키이스의 인내심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 * *

“……일단은 이렇습니다. 혹시 궁금한 게 있습니까?”

설명을 마친 의사가 연우를 쳐다보았다. 연우는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뇌를 찍은 필름을 바라보며 잠시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현실을 믿기 어려운 듯한 표정이었지만 키이스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신도 마찬가지의 기분이니까.

“……그럼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 외엔 없습니까?”

“현재로선 그렇죠.”

의사가 슬쩍 키이스의 눈치를 봤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진작 키이스에게 털어놨을 것이다. 연우는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아, 하고 감탄사를 토했다.

“다시 한번 머리를 다치면 돌아오지 않을까요?”

“죽으려고 작정했어?”

“어, 뇌에 그렇게 여러 번 충격을 주는 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키이스의 거친 빈정거림에 이어 정색을 하고 뒤로 물러나는 의사를 보고선 연우는 바로 포기했다.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린 그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 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그렇겠죠, 그래야 하고요.”

의사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작게 감사의 말을 했다.

* * *

퇴원 수속을 마친 뒤 집으로 향하자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중간에 키이스가 회사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운 탓에 그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지갑은커녕 간단한 소지품조차 없는 연우로서는 꼼짝없이 키이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간신히 키이스와 함께 병원을 나온 연우는 달리는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창밖을 보고 있던 키이스가 흘긋 그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몇 초의 공백이 흘렀다.

“내 집으로 갈 거야.”

“어…….”

연우는 당황한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묘한 반응에 키이스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잠시 말을 고르는 것 같던 연우가 대답했다.

“제가, 어째서요?”

“…….”

키이스는 성질을 누르기 위해 잠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심호흡하듯 숨을 골랐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친절한 설명보다 먼저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아침의 일도 잊어버렸어? 그 망할 기억 상실은 낫긴커녕 더 나빠지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모르게 벽에 머리라도 박았어?”

쏟아지는 비난에 연우는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듯 눈꺼풀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했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풀이 죽은 음성으로 사과하는 걸 보자 키이스는 금세 후회했다. 이번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 성질머리는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좋아지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지.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연우라면 그저 웃으며 넘겼겠지만 눈앞의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사과를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모습은 비서이던 시절 그대로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키이스는 그와의 거리가 별과 별 사이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는 늦게나마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넌 지금 정상이 아니잖아. 혼자 두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도 있었어.”

물론 방금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의사의 말이라는 데 연우는 멈칫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하고 여전히 망설였다.

“거기까지 신세 지는 것은……. 혼자 지낼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에 거슬렸다. 키이스는 얼마 안 되는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참았다. 슬슬 두통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연우.”

이름을 부르자 연우가 깜짝 놀랐다. 키이스는 한껏 부드러운 음성을 꾸며 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던 거 잊어버렸어? 너와 난 결혼했다고 말했잖아. 당연히 넌 나와 함께 살던 집으로 가야지.”

스펜서를 떠올리며 말하자 한결 쉬워졌다. 아이를 상대로 할 때는 참을성이 많아야 한다. 조금은 인내심이 늘어난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을 때, 연우가 말했다.

“그게 정말이었습니까? 저, 믿기가 어려워서…… 제가 결혼을 했다니, 그것도 피트먼 씨와…….”

“…….”

키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노려보았다. 연우가 깜짝 놀라 말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는 주춤했다. 아차. 키이스는 틈을 두었다가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물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농담이나 지껄일 사람으로 보여?”

웃는 얼굴과는 달리 악문 잇새로 물은 말에 연우는 눈을 깜박이다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자 연우는 슬쩍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소신껏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저한테 화를 내셨을 텐데 참으시는 걸 보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얘기야?”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한 연우는 이내 찌푸린 얼굴로 경계하듯 덧붙였다. 그의 표정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페로몬이 쌓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남자라면 치를 떠시는 분이 저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다니, 망상이 아니고서야…….”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지금은 무엇보다 안정이 중요합니다.>

그 순간 의사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키이스는 정말로 고함을 질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관절이 하얗게 일어날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젖힌 그는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며 어떻게든 화를 삭이려 애썼다. 14782까지 세고 난 후에야 비로소 키이스는 눈을 떴다.

“망상인지 아닌지 가 보면 알 거야.”

간신히 가라앉힌 음성으로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런 키이스를 곁눈으로 훔쳐봤던 연우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상담을 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스튜어드에게 예약을 잡든가, 아니면 다른 정신과 의사를…….”

“연우.”

키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어느 때보다 다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미치지 않았어. 페로몬에 취한 것도 아냐. 괜찮다면 그 예쁜 입 좀 다물어 주겠어? 내가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거든.”

“…….”

“고마워, 아주.”

다행히 연우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키이스는 더욱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사를 한 후 다시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기억을 못 하는 것도 문젠데 연우는 아예 그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키이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연우만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남자와는 자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건 키이스 본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가?

키이스는 어이가 없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내가 남자와 자지 않는다고 한 게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연우는 나와 잔 걸 잊어버리고 내가 한 개소리만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키이스는 주먹으로 뭔가를 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깊이 심호흡을 했다.

이대로 영영 연우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뒤는 차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고집스럽게 차창 밖을 바라보며 키이스는 생각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의사도 말했잖아, 안정을 취하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거라고. 내가 좀 참고 부드럽게 대해 주면 전처럼 잘될 거야.

기억이 돌아오면, 표식도 돌아오겠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연우는 흘긋 키이스 쪽을 훔쳐보았다. 화를 냈다가 심호흡을 했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아주 바쁘게 표정이 변하는 그의 모습에 연우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입원해서 진찰을 받아야 했던 건 내가 아니라 키이스였던 건 아닐까, 하고.

* * *

미리 연락을 받은 듯 저택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는 키이스와 함께 차에서 내린 연우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셨습니까, 피트먼 씨. ……연우.”

조금 시간을 두고 덧붙인 집사는 왜인지 빤히 연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찰스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흔치 않은 탓에 연우는 내심 당혹스러워져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말을 하던 연우가 멈칫했다. 얼굴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연우의 반응을 본 찰스에게서 평소와는 달리 복잡한 감정이 언뜻 엿보였다. 막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아이가 달려왔다.

“대디, 대디!”

연우는 놀랐지만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아이는 그의 다리에 덥석 달라붙었다.

“대디, 으앙!”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보고 연우는 당황해 머뭇거렸다. 달래 줘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낯선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패닉에 빠져 버렸다. 연우가 굳어 있는 동안에도 아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측은한 마음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아파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허리를 숙였다.

“스펜스, 자, 이제 괜찮아. 울지 마.”

들어 본 적이 없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는 아이를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이스는 너무나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 말을 이었다.

“대디가 지금 막 퇴원해서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내일 인사하자. 괜찮지?”

아이는 키이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을 든 스펜서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키이스의 말끔한 슈트는 방금 전까지 얼굴을 문지른 아이의 눈물과 콧물에 침까지 뒤섞여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룩진 슈트에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는 데만 전념했다. 누가 봐도 아이를 돌보는 데 익숙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연우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키이스가 더러워진 손수건을 찰스에게 돌려줬을 때, 스펜서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덩그러니 서서 둘을 지켜보던 연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연우와는 달리 스펜서는 헤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디, 키스.”

당연한 애정을 요구하는 아이의 행동에 연우는 당황했다.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뺨에 키스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연우는 명령처럼 여겨졌다. 전혀 강압적이지 않은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와 곁에 서서 아이에게 키스를 하려는 남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가족으로 보였다. 연우의 어색한 표정만 아니라면 완벽했다.

키이스가 말한 대로 아이의 뺨에 슬쩍 입술을 댔다 떼는데,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연우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연우에게 아이는 수줍게 고백했다.

“대디가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당황해 눈만 깜박이는 사이 키이스가 몸을 돌렸다. 아이에게 뭔가 말을 하며 걸어가는 키이스의 뒷모습에 연우는 잠시 멍해졌다. 입술에 남은 부드러운 감촉에 무심코 손끝을 대 봤지만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다만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만은 확실했다.

“연우, 욕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식사 전에 먼저 씻으시겠죠?”

불쑥 말을 거는 음성에 옆을 보자 메이드가 서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잘 아는 듯싶었지만 여전히 연우로서는 생소할 뿐이었다. 앞장서는 그녀를 뒤따라가던 연우는 순간 멈칫했다. 메이드가 뒤를 돌아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뭔가 문제라도?”

“어…… 아뇨.”

계단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던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 발을 내디뎠다. 왠지 심장 한구석이 떨려 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발을 옮겼지만 계속 어딘지 불안했다.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꾸미고 올라간 그는 계단참에 서자 한층 더 걸음을 빨리해 곧바로 홀에 들어가 버렸다.

후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연우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거대한 저택의 홀은 낯익은 듯 낯선 듯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홀의 끝에 또다시 넓은 계단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멈칫했으나 다행히 메이드는 그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어느 방의 문을 연 메이드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주고 뒤로 물러났다.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기억은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덧붙인 메이드가 밖으로 나가고, 연우는 혼자 남았다.

<대디.>

자신을 향해 달려왔던 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린 결혼했어. 너의 성은 피트먼이고, 나와 함께 가진 아이도 있지.>

급히 거울을 확인했지만 자신의 귀에는 오래된 엷은 흉터 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채로 연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주변은 죽은 듯이 고요해서 숨소리를 내는 것도 두려울 정도였다. 연우는 침대에 누운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키이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찰스는 그가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썰렁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자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키이스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연우는 잘 넘어가지 않는 식사를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안내받은 방으로 향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낯선 환경 탓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를 보는 데 능숙하던 키이스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의 귀에 남아 있는 표식도 선명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라니.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키이스는 연우에게 온갖 기사는 물론 결혼 증명서까지 보여 주었다. 그래도 연우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게 가장 납득이 쉬웠다. 자신이 잊어버린 동안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이 상황은 말이 안 된다.

그게 뭘까.

고민에 빠져 생각을 거듭하다 슬슬 졸기 시작했다. 살품 잠으로 빠져들어 몸의 긴장을 풀었을 때, 불현듯 방문이 열리고 복도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키이스였다.

연우는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렸다. 키이스가 자신이 자는 방에 들어오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등 뒤로 문을 닫은 키이스는 선뜻 방 안을 가로지르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잔뜩 온몸을 긴장시키고 숨을 억눌러 참고 있는 연우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며 천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발소리가 들리고, 키이스가 침대 반대쪽으로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혹시나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두려워 연우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는 사이 키이스는 시트 한쪽을 들추고 들어와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격하게 뛰는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거기다 등 뒤에 있는 남자를 상상하니 더더욱 긴장돼 몸을 펼 수도 없었다. 그런 연우와는 달리 키이스는 잠이 든 듯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어떻게든 자신도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굳어 침대에서 빠져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침이 되면 찰스가 올 것이다. 그럼 다른 방을 달라고 하고, 여기서 나가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그는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양을 세어도 의식은 여전히 또렷하기만 했다.

계속된 긴장으로 온몸이 아파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부터 하나씩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혔던 숨을 들이마신 순간.

아.

무뎌졌던 감각이 불현듯 깨어나고, 뒤이어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키이스의 달콤한 페로몬 향기가 몸속 가득히 퍼졌다. 연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반병 넘게 마신 와인도 효과가 없었는데 키이스의 페로몬만큼은 변함없이 나를 안정시키는구나.

변함없이……?

문득 의아해졌을 때였다. 느닷없이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금세 숨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끓어올라 연우는 당황해 눈을 뜨고 말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며 연우는 허리를 잡혀 그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키이스의 벗은 몸과 닿아 버렸다. 순간 놀라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연우는 숨을 멈춰 버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