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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부드럽고 관능적인 향기가 본능을 일깨웠다. 눈을 감고 있어도 키이스는 알 수 있었다. 아, 이건 내 오메가의 향기라고.
주저하지 않고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품 안에 들어오는 가는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살갗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켜자 폐 속 가득히 향기가 퍼져 나가며 들뜬 한숨이 흘러나왔다. 품 안에서 굳어 있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맞닿은 몸의 진동에 키이스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연우.”
귓가에서 이름을 속삭이자 페로몬 향기가 더욱 진해지며 그를 유혹했다. 팔 안에서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는 연우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쳐 들었다. 혼란이 가득한 표정을 보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기억나? 우리가 이 침대에서 무슨 짓을 했었는지.”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황한 듯 떨리는 속눈썹을 파닥거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달콤한 페로몬 향기가 진하게 내려앉았다. 키이스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지고, 연우 또한 숨결이 가빠졌다.
키이스가 손을 들어 연우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떨리는 시선을 들어 올리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연우는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연우.”
숨결처럼 낮은 소리로 키이스가 속삭였다.
“키스해도 될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연우 입술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우로부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결이 맞닿고, 아주 조금만 고개를 비틀어도 바로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한층 진해진 페로몬 향기가 숨을 쉴 때마다 몸속 가득히 퍼지는 듯했다. 아랫도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파 왔다. 배 속이 가득 당겨져 뭔가로 안을 깊이 휘저어 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의미 없는 탄성을 약하게 터뜨렸던 연우가 먼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는 데는 아주 약간의 움직임이면 충분했다. 연우의 몸이 덜덜 떨렸다. 흥분한 건지 긴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생각했다.
키스만.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줘 바짝 몸을 붙이며 그는 거듭 자신에게 다짐했다.
키스만 할 거야.
<안정이 중요합니다.>
고작 키스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
막 입술이 닿는 순간, 갑자기 연우가 그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그래 봤자 키이스의 팔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거부의 표시는 확실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한층 더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마른침을 삼킨 연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모…… 못 하겠어요, 도저히.”
죄송합니다, 하고 연거푸 사과하는 연우를 보고 키이스는 아연해졌다.
아.
뒤늦게 정신이 들며 그는 불시에 현실로 돌아왔다. 연우는 자신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당연히 당혹스럽고 패닉에 빠질 만한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걸 해명해야 하다니 어이가 없어졌다.
“……너와 나는.”
결혼했다고 몇 번을 말해, 하는 소리가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다그침은 연우의 우는 얼굴을 보자 그만 입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싶어졌지만 그것 또한 참아야 했다. 수습이 먼저였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훌쩍거리는 연우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그런데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간신히 핑계를 생각해 낸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잠버릇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키이스는 자는 도중 연우를 안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연우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젖은 얼굴을 보자 그가 지금 얼마나 당혹해하고 있는지 너무나 명백하게 전해졌다. 하, 하고 키이스는 탄식했다. 그와 함께 자신이 얼마나 짐승인지도 함께 깨달았다.
저 얼굴을 보고 더 흥분하다니.
“이제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자.”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그의 모습에 연우가 당황해 소리쳤다.
“피트먼 씨?”
키이스는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찬물로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무작정 샤워기 아래로 들어가 물을 틀었지만 정작 아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와중에 그의 성기는 너무나 꼿꼿하게 일어서 있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배에 닿을 정도로 한껏 솟아오른 페니스의 끝이 기대에 차 젖어 있는 것을 보자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빌어먹을!”
그는 화를 내며 자신의 성기를 거칠게 붙잡았다. 피가 잔뜩 올라 요란하게 울리는 맥박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자신이 자위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침대에 혼자 남아 있는 연우와 마찬가지로.
누구든 걸리면 죽여 버리고 싶은 강렬한 살의와 함께 그는 빠르게 그것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정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자위를 한 경험이 까마득했다. 사춘기 시절에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나 상대가 넘쳤었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기를 잡을 일이 없었다.
그저 위아래로 바쁘게 쓸어 대는 손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다못해 연우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기라도 하면 그걸 보면서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키이스는 그런 연우의 모습을 상상으로 때워야 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리를 M 자로 벌린 채 아랫구멍을 자신을 향해 훤히 드러낸 연우가 말했다.
<여기 넣어 줘, 키이스.>
연우의 하얀 손가락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스스로 구멍을 잡아 벌렸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그의 페로몬 향기가 코끝에서 되살아났다.
<키이스, 어서.>
애타는 음성으로 그는 속삭였다.
<내 안에 전부 싸 줘.>
“……하!”
탄식과 같은 깊은 신음을 내뱉으며 키이스는 간신히 사정했다. 거친 숨결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자 손은 물론 벽까지 자신이 쏟은 정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한 번의 사정으로는 부족했다. 연거푸 세 번을 더 쏟아 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좀 진정이 되었다. 뒤이어 후련함보다 더 큰 허탈감이 키이스를 찾아왔다.
내가 왜 자위를 해야 하지.
“……망할!”
홧김에 욕실을 주먹으로 내리친 그는 화를 내며 이를 갈았다.
연우가 기억을 찾으면 그때는 이 모든 걸 갚아 주겠어.
자신이 자위를 하며 떠올렸던 모든 상상을 그대로 실현해 주고 말겠다고 그는 다짐에 또 다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망상을 되살린 순간 성기 또한 되살아나, 키이스는 욕설과 함께 다시 페니스를 붙잡았다.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연달아 두 번 더 자신의 손으로 정액을 뽑아 낸 후 침실로 돌아갔다.
벌컥, 하고 난폭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 한구석에 웅크려 졸고 있던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놀라 반쯤 몸을 일으킨 그를 향해 허리춤에 수건을 두른 게 전부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일은 외출할 거니까 준비해.”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 연우는 당황해 물었다.
“갑자기 외출이라니…….”
연우의 물음에 키이스는 이를 갈며 말했다.
“네 결혼반지.”
무심코 시선을 내렸던 연우는 깜짝 놀랐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키이스는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표식도 없는데 반지까지 없으니까 네가 자각을 못 하는 모양인데, 이제 하나씩 깨닫게 해주겠어. 넌 내 오메가고, 나와 결혼했고, 내 아이를 낳았어.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알아들어? 너와 난, 내일 결혼반지를 사러 갈 거고, 넌 평생, 죽어서도 그걸 빼지 못하게 될 거야. 알겠어?”
“…….”
“대답해!”
“어, 아, 네.”
키이스의 다그침에 연우는 흠칫 놀라 대답했다. 키이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다 갑자기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연우의 주변으로 분노한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만이 은은하게 떠돌았다.
* * *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피트먼 씨, 연우.”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던 매니저는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장의 밖까지 나와서 인사를 했다. 선뜻 걸음을 옮기는 키이스와 뒤를 쫓아간 연우를 번갈아 보며 그녀는 보폭을 맞춰 걸었다.
“직접 오시다니, 부르셨으면 저희가 준비를 해서 갔을 텐데요. 우선 반지 위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들이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잠기고 거대한 진열장 위로 천천히 차양이 드리워졌다. 밖에서 안을 보지 못하도록 완전히 공간을 밀폐한 매니저가 키이스의 옆에 엉거주춤 앉은 연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우, 잘 지냈나요? 그러지 않아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지난번에 주문했던 물건은 시간이 좀 더 걸리는데, 완성이 되면 집으로 보내 드릴까요? 아니면 항상 그랬듯이 직접 찾으러 오시겠어요?”
연우는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눈을 깜박였다.
“직접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인사를 하자 매니저는 마주 웃더니 곧 둘에게 간식을 권했다. 직원이 화려한 초콜릿이 놓인 트레이를 놓고 가자 매니저가 물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음료를 드시겠어요? 뭘 준비해 드릴까요?”
“전 자몽 주스를, 이쪽은 에스프레소 트리플 샷으로 부탁드립니다.”
선뜻 키이스의 몫까지 주문을 하는 연우의 모습에 키이스가 흘긋 시선을 향했다. 아차, 자신도 모르게 술술 읊었던 연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시 다른 걸 드십니까?”
항상 마시던 취향대로 주문을 했던 그는 내심 뜨끔했다. 혹시 그동안 취향이 변했나? 조마조마해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잘했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의 눈가가 가늘게 기울어졌다. 조금은 기분이 풀어진 듯 보여 연우는 안도해 덩달아 마주 웃어 보였다. 손을 뻗어 초콜릿을 입 안에 넣는 그의 옆얼굴을 본 키이스가 생각했다.
나오길 잘했군.
저택으로 물건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굳이 이런 수고를 자처한 것은 연우가 종종 다니곤 했던 상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자연스럽게 키이스의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보자 조금은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하나씩 시작하면 금방 좋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키이스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두 팔을 뒤로 뻗어 등받이 위에 길게 늘여 놓았다. 막 다음 초콜릿을 입에 넣으려던 연우가 멈칫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초콜릿을 든 채 잠시 머뭇거렸던 연우가 물었다.
“……드시겠어요?”
키이스는 가볍게 한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연우는 멈칫했다가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 주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에 초콜릿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은 순간, 손가락 끝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당황해 눈을 크게 뜨고 손을 거둬들였다.
설마, 아니겠지.
연우는 놀란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가 설마 내 손가락을 핥았을 리가 없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산뜻한 음성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덕분에 서로를 향해 뒤엉켰던 시선은 일시에 방향을 잃어버렸다. 연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직원이 가져온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저, 이 중에 어떤 걸 고르면 됩니까?”
열심히 고르는 척 묻자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문득 연우는 장난기가 들었다.
“전부 마음에 드는데요?”
웃으며 옆을 보자 키이스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전부 집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네?”
당황한 건 연우뿐이었다. 매니저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선뜻 대답하더니 연우가 보고 있던 보석 상자를 들고 가려 했다.
“자, 잠깐만요. 저걸 다요? 전부 다 삽니까?”
“전부 마음에 든다면서.”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우가 황급히 물었다.
“결혼반지는 하나면 되지 않습니까?”
“넌 결혼기념일마다 반지를 선물했다고 말했잖아.”
“네, 맞습니다.”
옆에서 매니저가 한마디 거들었다. 커플의 소소한 싸움이라고 생각한 듯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다시 상자를 가져가려는 매니저를 손을 들어 제지한 키이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몇 줄로 진열이 된 반지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그는 하나를 꺼내더니 다른 손을 연우에게 내밀었다.
“왼손.”
무심코 오른손을 내밀었던 연우에게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둘러 왼손을 내밀자 키이스는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아 끌어당겼다.
“다시는 빼지 마.”
방금 자신이 고른 반지를 넷째 손가락에 끼우며 그가 명령했다. 연우는 당황해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현란한 광채를 띠는 다이아몬드가 잠시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에 키이스는 연우의 옷을 주문했다. 이번에도 역시 직원들이 번갈아 몇 벌씩 되는 옷을 들고 나타났다. 구두와 벨트, 시계에 손수건까지 샀다. 가게를 전부 쓸어 담다시피 한 후 키이스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연우는 생각했지만 틀렸다. 키이스는 한 블록 떨어진 또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피트먼 씨, 연우. 오늘은 스펜스가 없네요.”
이번에도 역시 친숙하게 인사를 한 매니저가 아이의 안무를 물어 왔다. 누가 봐도 그들에 대해 잘 아는 듯한 태도였다. 연우는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으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셔 할 만한 물건이 많아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직원들은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키이스는 커피를 마시며 흘긋 연우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좀 더 여유가 생긴 연우가 마침 시선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키이스는 그에게 키스를 하려다 멈췄다.
서두르지 마, 또 일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면 그나마 자제가 쉬워졌다. 시간은 많다. 다만 키이스에게 인내심이 부족한 것뿐이다. 시선을 옮겨 연우의 손을 확인했다. 자신이 끼워 준 반지가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는 걸 확인한 후 그는 고개를 돌리려다 그만 연우의 귀를 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표식까지 사라지다니.
<죄송합니다. 이런 예는 본 적도 없어서…….>
난감해하던 의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신음을 삼켰다. 빈 커피 잔을 내려놓자 연우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더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음료를?”
키이스는 사이를 두고 그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만들어 낸 미소가 가득했다.
“연우.”
“네.”
긴장한 연우에게 키이스는 한껏 다정한 음성을 꾸며 내 말했다.
“넌 내 비서가 아니고 정식으로 결혼을 한 파트너라고 말했잖아. 내가 몇 번을 알려 줘야 하지?”
대화 내용을 모른다면 그가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였다고 생각할 만큼 달콤한 미소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내용을 모르기엔 연우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다.
“어…… 네.”
“비서처럼 행동하지 말고 내 파트너로 행동하라고, 알겠지?”
“…… 알겠습니다.”
연우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바로 저 웃는 얼굴을 지우고 고함을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파트너로 행동하라는 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때마침 직원들이 그들에게 보여 줄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건 이번 시즌의 신상입니다. 이 13은 저희 브랜드의 상징이죠. 거기에 이번 테마인 코르시카 섬의 디자인을 매칭해서 이런 패턴을…….”
이어지는 설명을 연우는 주의 깊게 들었다. 키이스는 연우가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피트먼 씨.”
“연우.”
곧바로 키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연우는 멈칫했다. 키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성을 부르면 그땐 널 내 섬에 감금해 버릴 거야. 다시는 피트먼 씨라고 부르지 못하게, 알겠지?”
연우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키이스는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주저하며 연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우.”
또다시 ‘피트먼 씨’가 나오기 전에 먼저 키이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심스러우면 시험해 봐. 내가 그렇게 못 할 거 같아?”
키이스는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농담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터무니없게도 진심이라는 걸 연우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전 어떻게…….”
“연우.”
이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연우는 움칠했다. 이번에도 역시 깜짝 놀라는 그의 반응을 보며 키이스는 한층 더 다정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이 피트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설마 그것까지 잊어버리진 않았을 거야, 안 그래?”
“어, 음…….”
연우는 또다시 멍한 감탄사를 흘렸다. 마주 보는 표정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뚫어져라 연우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하지만 연우가 졌다.
“그러니까…… 저, 키…… 이스?”
자연스럽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해냈다. 키이스는 만족하지는 않았으나 일단은 넘어갔다.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는데, 슬쩍 눈치를 봤던 연우가 입을 열었다.
“음, 그게, 저기요.”
“…….”
키이스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키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연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중에서 어떤 게 마음에 드십니까? 전부 다는 필요 없을 거 같고, 전 이 가방 쪽이 어떨까 싶은데.”
일부러 자신이 한 말을 무마하려는 듯 빠른 말투로 묻는 연우에게 키이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필요한 것만 사.”
사이를 두고 떨어진 허락의 말에 연우는 네, 하고 몇 개를 골랐다. 그가 여성용 가방을 함께 주문하는 것을 본 키이스가 물었다.
“동생에게 선물할 거야?”
“어? 아뇨. 그걸 왜 여기서…….”
과하게 부정했던 연우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게, 그쪽에 선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항상 제가 골라서 보냈으니까요, 같이 주문을 하면…….”
“연우.”
키이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제지했다.
“누구에게 선물을 한다는 거야?”
엠마인가? 아니면 어머니 쪽? 비서실?
연우가 알 만한 여자들을 이리저리 떠올려 보는 키이스에게 연우가 말했다.
“만나시는 분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분들에게 할 선물을 주문하러 온 게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만나는 사람이라니?”
키이스가 조용히 물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만나는 사람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해?”
“그건……. 들은 게 아니라…….”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던 연우가 솔직히 대답했다.
“페로몬을 풀 상대가 항상 필요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있으실 거고.”
“연우.”
키이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나한테, 널 두고 바람을 피우라는 거야?”
그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돌변했다. 연우가 퇴원을 한 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게 분명한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연우는 당황해 눈을 깜박이며 키이스를 마주 보았다. 키이스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기색이었다.
“어, 저기, 그게…….”
연우는 당황해 말문을 열었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더듬거리는 연우를 보고 키이스가 다그쳤다.
“말해,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묻고 있잖아? 대답 못 해?”
“그, 그러니까.”
키이스가 힘껏 쥔 주먹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날아올 기세였다. 물론 그가 사람을 때리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연우는 성대를 쥐어짜 어렵게 대답했다.
“항상 그런 상대가 있으셨지 않습니까…….”
“너와 결혼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 아니면 내가 너한테 같잖은 농담이라도 한 것 같아? 그도 아니면 지금 내가 쇼를 하고 있는 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공연까지 준비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안 그래?”
거기까지 단숨에 말한 키이스가 거친 음성으로 비꼬았다.
“내가 이렇게나 널 사랑한다는 걸 나도 지금 깨달았는데, 정말 굉장해. 사랑은 정말로 위대하군. 이런 같잖은 쇼까지 벌일 정도라니!”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연우는 당황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우를 보면서도 키이스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연우가 기억을 되찾아 그에게 키스하며 사과하는 것 외에는. 물론 표식도 함께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와 결혼하셨다는 얘기는 그럴 수도 있는데…….”
어렵게 말을 꺼낸 연우가 주저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 상대하셨다고는 믿을 수가 없어서요. 저와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몰라도 항상 여자들을 상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저와는 결혼을 했더라도 페로몬을 푸는 상대는 따로 있으실 거라고…….”
“……허.”
허탈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화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맥이 풀려 버리는 모양이었다. 키이스는 기가 막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연우는 자신이 결혼 생활 내내, 아니 그 전부터도 계속 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상상의 여지가 없었다.
“……네가 생각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키이스가 맥 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분노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후였다. 연우는 당혹해마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연우의 반응이 키이스에게 더욱 확신을 줬다.
“왜 내 상대가 너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뭐가 문제인 거야, 대체.”
낮게 욕설을 삼키는 그의 모습에 연우는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키스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스튜어디스와.”
그 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흘러나왔다. 키이스가 그 말을 알아들은 건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였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