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5화 (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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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연우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이스와 마주 보며 잠시 동안 어리둥절해졌다. 조급해진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어서!”

키이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조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눈앞을 스쳐 지나간 기억을 간신히 더듬어 찾은 연우가 입을 열었다.

“공항에서, 스튜어디스와 키스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

“그래, 그리고?”

“…….”

“더 기억해 봐, 연우. 어서!”

키이스가 재촉했지만 더 이상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결국 사과를 하고 만 그에게 키이스는 잠시 침묵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나라도 기억했으니 됐어. 다음에는 더 많이 기억이 돌아오겠지.”

연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간 그의 옆얼굴을 보고 키이스가 자신보다 더 실망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뒤엔 어떻게 됐습니까?”

타이르듯 부드럽게 물은 말에 키이스가 멈칫했다. 사실 알고 싶어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을 뿐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괜찮다고 얘기하려는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 뒤엔.”

사이를 두고 그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 뒤에 내가…… 싫다는 널, 억지로 안았어.”

예상치 못한 말에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키이스는 그를 외면한 채 혼잣말처럼 말을 계속했다.

“넌 저항했지만 내가 페로몬을 써서 눌러 버렸어. ……넌, 울었지. 많이.”

그리고 날 떠났어.

키이스는 마지막 말을 삼켜 버렸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연우가 그를 떠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연우가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말문을 열었지만 그 내용은 키이스가 예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전 남잔데요? 남자인 절 안았다고요? 당신이? 억지로 페로몬을 쓰면서까지?”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각오했던 키이스는 전혀 다른 방향에 허를 찔려 그를 돌아보고 말았다. 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 키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거짓이라고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래.”

키이스가 조용히 수긍했다.

“그땐 이미 널 사랑하고 있었거든.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낱 자존심 때문에 부정하고 또 부정했던 결과를 떠올리자 다시금 후회가 밀려왔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끝없이 상처를 줬다. 억지로 그를 안고, 모욕을 주고, 수시로 그를 부정하고, 연우는 그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섹스 상대일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만약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으면, 조금만 더 빨리 인정했으면.

그랬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자기혐오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키이스는 한숨을 사이에 두고 내뱉었다.

“그게 전부야, 고작 키스가 전부였어. 그것도 그게 마지막이야. 너와 자고 난 이후로는 너밖에 없었다고.”

자신이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키이스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데인과 가게에서 나오는 연우의 사진을 봤을 때 피가 거꾸로 솟지 않았던가.

만약 데인과 연우가 키스한다면, 난 고작 키스라고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을까.

답은 바로 나왔다. 데인을 죽이고 연우를 감금했겠지.

“……어쨌든 내 상대는 너뿐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네가 기억을 하든 못 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페로몬이 쌓이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연우가 당혹해하며 물었다. 키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볍게 물었다.

“그럼 자위라도 할 수 있게 네가 도와주면 어때?”

“네?”

“농담이었어.”

연우의 반응을 보고 재빨리 말을 바꾼 키이스가 선뜻 고개를 돌렸다.

“필요한 건 다 골랐나? 다음 가게로 갈까?”

“네…… 또 사는 겁니까?”

놀라 묻자 키이스는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곧 파티에 갈 거니까.”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을 텐데, 연우는 생각했지만 굳이 키이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네, 하고만 대답했다. 막 일어서려던 그에게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올려다본 연우는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긴장한 것 같은데, 당연히 나의 착각이겠지.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앗!”

곧바로 키이스가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연우는 훌쩍 날아오르듯이 그의 품에 뛰어들어 버렸다. 귓가에서 키이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꼼짝없이 그에게 안긴 채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온몸이 키이스를 향해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키이스가 고개를 숙여 연우의 목에 입술을 댔다.

“…….”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키이스가 연우의 페로몬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와 함께 주변을 은은하게 떠돌던 달콤한 향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키이스가 연우를 유혹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키이스가 지금, 날 원한다고 하면.

연우는 패닉에 빠져 버렸다. 키스는 해도 되나? 몸을 만지는 건? 키이스는 우리가 결혼했다고 했지. 함께 낳은 아이도 있어. 다만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럼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거지? 해도 될까?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몸은 경험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한번 외운 악보는 손이 알아서 움직인다고 하잖아? 섹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가만, 섹스와 악기의 공통점이 뭐지? 아, 섹스도 상대의 몸을 연주하는 거니까 둘은 같네. 맞아, 아니, 뭐가 맞아!

쪽,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을 때 연우는 망상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키이스가 그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서 떼어 놓은 다음이었다. 그제야 연우는 그가 자신의 뺨에 키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뺨이라고?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 고작 뺨에 키스를 한단 말이야?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에게 키이스는 다정한 미소를 짓더니 그의 어깨를 안고 말했다.

“갈까?”

매니저를 포함한 직원들이 급하게 그들을 쫓아 나왔다. 얼떨결에 걸음을 옮기면서 연우는 달아오른 얼굴을 급히 아래로 향했다.

남의 매장에서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뒤늦게 생각하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키이스와 자는 상상을 하다니, 정말 파렴치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난잡하다고 비난했던 키이스마저도 장소를 가리는데, 이 무슨 음탕한!

연우는 자책하며 자신의 뺨을 마구 때렸다. 정신 차려, 어디서 이런 음란한 상상을! 나가라, 나가라고!

“왜 그래? 몸이 안 좋은가?”

연우의 뒤를 이어 차에 올라탄 키이스가 물었다. 놀라 손을 멈추고 돌아본 연우의 두 뺨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아뇨…….”

“얼굴이 너무 붉잖아.”

키이스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연우의 이마를 짚었다. 흠칫 놀란 연우의 온몸이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열심히 쫓아냈던 음란 요정이 잽싸게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그런 연우의 속은 전혀 모른 채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열은 없는데. 이만 돌아갈까? 쉬는 게 낫겠어. 필요한 게 더 있으면 집으로 부르지.”

이어 그가 집으로 향할 것을 명령했고, 차는 방향을 바꿨다. 연우는 다행히 그가 오해해 준 것에 감사해하며 몸을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떼어 놨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자 서늘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감고 열심히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키이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나와 단둘이 있는 것도 저렇게 불편해하다니.

충동적으로 키스한 자신에게 또다시 화가 났다. 그 정도도 참지 못하다니. 그나마 입술에 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연우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걸 보며 그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연우는 자꾸만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음란 요정을 온 힘을 다해 쫓아내고 있었다.

“음, 저.”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무거운 정적을 깨고 연우가 입을 열었다. 키이스가 흘긋 그를 바라보자 연우는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파티는 어떤 겁니까? ……저도 가는 거겠죠?”

“그냥 단순한 자선 파티야. 찰스가 알아서 준비할 거야.”

“네…….”

키이스는 연우의 너무나 정중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빌어먹을 피트먼 씨가 안 나오는 것만 해도 어딘가. 물론 피트먼 씨 대신 ‘저기요’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씁쓸한 기분을 느낀 키이스는 별생각 없이 덧붙였다.

“폴로 경기를 한다던데, 그냥 풀이나 몇 번 밟아 주면 돼.”

그 말에 연우가 키이스를 돌아보았다.

“폴로 경기요?”

뭔가 반응이 묘하게 달라졌다. 민감하게 그걸 눈치챈 키이스가 가만히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연우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피트먼 씨.”

“연우.”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은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섬을 생각해.”

“……당신도 경기를 뛰는 겁니까?”

급히 숨을 삼킨 연우가 한 박자를 사이에 두고 물었다. 키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좋겠어?”

“어…….”

연우는 허겁지겁 말을 골랐다.

“저기, 원래 선수로도 뛰셨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경기에 참가해 보시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요. 그, 기분 전환이라든가.”

“…….”

“……아닐 수도 있고요.”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는 연우를 가만히 지켜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선수로 뛴다고 하면?”

“정말입니까?”

반색을 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키이스는 여유를 되찾고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폴로를 좋아하나?”

“네…… 아마도?”

애매하게 대답을 피하며 그는 중얼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네, 음, 선수들이 달리는 걸 보면 재밌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저, 피트, 아니 어쨌든 경기하는 모습이 무척 기대가 돼서요. 음, 그러니까.”

더듬더듬 어떻게든 말을 이었지만 키이스는 그의 속이 빤히 보였다.

요컨대 내가 경기하는 모습이 보고 싶단 말이지.

맬릿을 놓은 게 몇 년 전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아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키이스는 당장 말을 타고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의욕이 넘쳐흘렀다.

“오랜만에 몸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지.”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벌써 훈련 시간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말을 더 사야 할 텐데 훈련이 된 말을 제때 구할 수 있을지, 파티를 여는 그레이슨에게 연락해 선수 자리를 하나 만들라고 요구를 해야 하는지 등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딱!

맬릿에 맞은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러자 선수들이 공을 쫓아 말을 달렸다.

“아!”

다른 선수가 쳐 낸 공이 말을 지나치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어 냈다. 이번에도 선수들은 말의 머리를 돌려 공을 쫓아 달려갔다. 그사이 다른 선수가 공을 쳐 내고, 또다시 말들은 그 뒤를 쫓아 질주했다.

몇 차례 바닥을 구른 공이 야트막한 펜스에 가로막혀 다시 잔디 위로 흘러나왔다. 멀리서 달려온 키이스가 크게 맬릿을 휘둘렀다.

따악!

심장을 때리는 듯한 명쾌한 울림과 함께 공이 일직선을 그리며 비행했다. 탄식과 분노의 외침을 내뱉으며 선수들은 급히 말을 재촉했다.

그 사이를 키이스의 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했다. 그 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순간 급히 방향을 바꾸는 것도, 주저 없이 다른 말을 향해 달려드는 투지도 훌륭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건장한 말을 키이스는 오직 한 손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공의 방향을 쫓아 달리던 말이 순간 그것을 지나치자 곧바로 고삐를 잡아채 그를 멈추게 한 키이스가 다시 방향을 돌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을 죽인 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만 봤다. 품 안에 안고 있던 스펜서의 존재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조차 아까워 온 힘을 다해 부릅떴다.

키이스가 고삐를 거머쥐고 맬릿을 든 손을 아래로 향한다. 상체가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맬릿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쭉 뻗은 우아한 팔의 근육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강인한 목의 선을 따라 혈관이 일어서고, 얇은 셔츠 밑으로 잘 단련된 가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좁은 허리에 이어 긴장해 굳어진 두꺼운 허벅지까지 뚜렷이 시야에 맺혀 들었을 때, 매서운 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갔다.

딱!

“우와!”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심판이 득점을 선언하고, 잠깐이나마 선수들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잔디 위를 서성거렸다. 방금 전 점수를 낸 키이스 주변으로 같은 편의 선수들이 다가오더니 뭔가 말을 주고받았다.

키이스가 마지막으로 폴로 경기를 한 지가 얼마나 됐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햇수를 헤아려 봤으나 곧 포기했다. 연우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벌써 몇 년이나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완벽한 남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본 그날과 마찬가지로.

선망에 찬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키이스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경과 열망으로 들뜬 심장은 뒤이어 차갑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의 귀에 남아 있는 선명한 표식 때문이다.

저게 정말 내가 남긴 거라고?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와중에도 부끄러운 우월감이 솟아올랐다. 그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신 또한 그에 대한 동경과 맹렬한 질투로 애를 태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새삼 연우는 지금의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와 다른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이스와 연우의 아이였다.

생각해 보면 그날과 지금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오메가가 되어 아이를, 그것도 키이스의 아들을 낳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를 향해 타오르는 심장은 여전했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 키스하고 셔츠를 끌어 올려 탄탄한 가슴 근육에 입술을 문지르고 싶었다. 다리를 벌려 젖은 곳을 보여 주고 그대로 그의 단단하게 일어선 페니스를 내 안에 박아 줬으면.

이런 곳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랫도리가 욱신거리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키이스가 고개를 돌려 연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았을까? 내 음탕한 머릿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걸까?

창피해.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헤매는데, 다행히 경기가 속행되어 다른 선수들이 키이스의 옆을 스쳐 말을 달려갔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린 그가 말을 달려 뒤를 쫓아갔다.

“아!”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키이스의 말이 그만 공의 방향을 가로지르고 말았다. 곧 파울 선언과 함께 패널티가 주어졌다. 탄식을 내쉬고 만 연우를 키이스가 다시 돌아봤다. 아직 얼굴의 열기는 그대로였지만 조금은 냉정을 찾은 덕에 이번에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경기에 집중했다. 어느 쪽도 더 점수를 내지 못한 채 추카(Chukka : 폴로 경기의 한 라운드를 이르는 말)가 끝났다.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선수들은 말을 교체하고 사람들은 잔디를 밟으러 바쁘게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연우 또한 아이의 손을 잡고 맨발로 파헤쳐진 땅을 자근자근 밟았다. 조금은 억센 풀을 밟자 보드라운 발바닥이 아픈지 스펜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급히 아이를 안아 드는데, 채 허리를 펴기도 전에 누군가 그대로 스펜서를 빼앗아 갔다.

“피, 아, 키…… 이스.”

놀란 얼굴은 이내 미소와 함께 허물어졌다. 급하게 말을 고치자 키이스는 한 팔에 스펜서를 올려 놓고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연우는 무안해져 뺨을 긁적였다. 마침 스펜서가 키이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까르르 웃었다. 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가족끼리 외출을 해서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가족이었다. 연우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스펜서의 얼굴을 보며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

*

일찍부터 파티에 갈 준비를 하느라 저택 안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날 준비해 둔 옷과 구두를 꺼내고 액세서리를 늘어놓는 고용인들의 모습은 이런 일련의 상황이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스펜서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왔다.

<대디!>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연우에게 뒤뚱뒤뚱 달려왔다. 넘어질 것 같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을 때, 스펜서는 기가 막히게 넘어졌다.

<스펜스!>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자 카펫 위에 얼굴을 폭 박은 아이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급히 다가갔던 연우는 스펜서에게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맨바닥에 넘어진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다칠 리가 없잖아.

두꺼운 카펫의 두께를 실감하며 내심 생각했다. 과보호는 좋지 못한데.

하지만 스펜서는 그런 연우의 갈등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방긋 웃더니 두 팔을 파닥거렸다. 안아 달라는 건가? 연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스펜서는 바로 연우의 목을 껴안았다. 안기는 게 익숙한 행동이었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을 쓰다듬은 연우는 뜻밖에도 아이가 자신의 품에 쏙 안겨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안정감이 느껴져, 처음에 느꼈던 낯선 감정이 의아해질 정도였다.

여전히 자신의 아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펜서는 너무나 귀여웠고, 너무나 귀여웠으며, 너무나 귀여웠다.

결론은 귀여웠다.

<뭐 하고 있어?>

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연우를 보고 마침 방으로 들어온 키이스가 물었다. 이어 그는 연우에게서 스펜서를 선뜻 건네받아 들어 올렸다. 이것 또한 자주 있던 일인지 스펜서도 별다른 반항 없이 얌전히 키이스에게 안겼다. 연우는 허전함을 느끼며 빈 팔을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준비 중이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연우는 피트가 외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펜스도 갑니까?>

<그래.>

선뜻 말한 키이스가 덧붙였다.

<스펜스도 내가 경기를 하는 걸 봐야지.>

맞는 말이라 연우도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셋은 준비를 마친 뒤 함께 출발한 것이다.

*

*

스펜스와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연우는 키이스에게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스펜서는 아직 어린 탓인지 연우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에게 연우는 여전히 사랑하는 대디였고, 언제나 안심할 수 있는 상대였다.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안고 키스하는 아이를 안고 있으면 걱정했던 일들도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무심코 아이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긁자 스펜서가 간지럽다며 몸을 뒤틀었다.

“어이.”

순간적으로 팔 밖으로 빠져나갈 뻔한 아이를 재빨리 제지한 키이스가 스펜서를 어깨 위로 올렸다. 아이는 능숙하게 그의 목을 안고 자세를 잡았다. 곧바로 목말을 탄 스펜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웃었다.

“대디, 작아.”

키이스의 머리보다 더 높은 곳을 차지한 아이는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질을 했다. 신이 나 주변을 돌아보는 아이의 다리를 잡고 고정한 채로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경기는 어땠어? 볼만하던가?”

“아, 네. 아주 재밌었어요.”

연우는 키이스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흙을 밟는 척 시선을 내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이 정도로 격렬한 경기인 줄은 몰랐죠.”

“폴로 경기를 직접 보는 게 처음이야?”

“어…… 아뇨…… 그런가?”

애매하게 말을 흐렸던 그는 민망한 듯 얼버무렸다.

“대학 다닐 때 학교에서 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사고가 생겨서 조금밖에 못 봤어요.”

“저런.”

키이스는 별생각 없이 습관적인 감탄사를 뱉었다. 경기 중에 사고라고 하면 말이 다쳤든가 낙마를 했든가 그런 거겠지.

“폴로 경기를 하는 대학이 별로 없을 텐데, 네가 나온 대학이 어디였지?”

“어.”

연우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노려보던 키이스, 쏟아지던 페로몬, 자신을 때릴 듯이 뻗어 오던 손.

“그게.”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 그게 나라는 걸 알게 되면.

“그러니까.”

어떡하지?

“파파, 말, 말!”

때마침 스펜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키이스가 고개를 돌리고, 연우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우에게 시선을 향한 키이스가 말했다.

“먼저 돌아가 있어.”

갑자기 무슨 얘긴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그런 연우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스펜스는 에이미든 찰스한테든 맡겨 둬, 경기가 끝나면 바로 돌아갈 테니까.”

“……네?”

키이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손을 들어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피곤하잖아.”

간신히 가라앉혔던 열기가 다시 확 솟아올랐다. 연우만이 느낄 수 있는 그의 향기가 한층 진해졌다. 저절로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얼마나 들뜬 표정을 짓고 있을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열어 어렵게 대답했다.

“기다릴 수, 있어요.”

발정을 참지 못해 먼저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키이스의 경기를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른다. 강렬한 염원을 담고 올려다보자 키이스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연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경기를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키이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의 말을 거부해서 기분이 상했을까? 내심 불안해졌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뜻밖에도 키이스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곁들였다. 연우는 새삼 그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잠시 멍해졌을 때, 키이스가 손을 뻗었다.

“……아!”

순간 연우는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키이스는 주저 없이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한 팔에는 스펜서를, 다른 팔에는 연우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부끄러워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자꾸만 가빠지는 숨결을 간신히 억누르는 것만도 힘에 겨웠던 것이다.

키이스가 걸음을 멈춘 곳은 경기장 밖에 있는 관람석이었다. 기대어서 볼 수 있게 허리께보다 좀 더 높게 올라온 울타리 너머로 연우를 데려다준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먼저 돌아가.”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연우에게로 쏟아지는 페로몬은 전혀 다른 걸 의미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진동하는 달콤한 향기에 연우는 멀어지는 이성을 한사코 붙잡으며 숨만 헐떡거렸다.

아.

연우는 그만 넋을 잃고 키이스를 마주 보았다. 지금 키스를 하면 어떨까? 바로 지금이 타이밍인 건 아닐까?

키이스에게 자연스럽게 키스를 할 타이밍.

하지만 연우는 망설였다. 먼저 거절한 것은 자신이다. 이제 와서 키스해도 될까?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잠시 그대로 있던 그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선뜻 돌아선 키이스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이내 저만큼 멀어졌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우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웠다.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던 연우는 팔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키이스가 연우를 배려해 스펜서를 데려간 것이다.

정말로 배려할 생각이 있었다면 페로몬을 쏟아붓지 않았겠지.

멍한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키이스를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열망에 찬 시선으로 시야에 담긴 두 남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평생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려 급기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후우. 후우우.

간신히 숨을 가다듬으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몸을 풀기 위해 서성거리는 말들이 보였다. 잠시 풍경을 훑던 연우는 키이스와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던 순간도 찰나, 얼마 안 가 둘을 발견했다. 말 위에 높이 앉아 있던 키이스가 찰스에게 아이를 건네주고 있었다. 이제 찰스가 내게 스펜서를 데려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그는 몸을 돌리더니 멀어졌다.

의아해하던 연우는 아이가 찰스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늘어지는 것을 모습을 보자 이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펜서가 낮잠을 잘 시간인 것이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라 아이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잠든 아이의 무게는 깨어 있을 때보다 더 무거워지는 데다가 지금 연우의 상태로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키이스는 흘긋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엷은 미소를 지은 것도 같았지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

연우는 문득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가져갔다. 은은한 열감이 느껴졌다.

키이스 때문에 흥분해서 그런 거겠지.

내심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그는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은근하게 몸속에 퍼져나가는 나른함까지도.

* * *

“이야, 키이스. 오랜만인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너스레를 떨며 다가온 남자에게 키이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흘긋 바라본 게 전부였다. 그레이슨은 말을 탈 준비를 하는 키이스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

“네가 갑자기 선수로 뛰겠다고 해서 정말 놀랐지. 경기를 안 뛴 지 오래됐잖아? 연습을 많이 했나 봐? 현역 못지않던데.”

“그냥 몇 번 연습한 게 다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해도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아침마다 승마를 하고 저녁이 되면 맬릿을 들고서 연습 경기를 했다. 태어나 노력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있던가, 키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레이슨은 다 안다는 듯이 묘한 웃음을 짓더니 말을 돌렸다.

“연우가 왔던데,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여. 스펜스도 변함없이 귀엽고. 아, 나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

“결혼해, 그럼.”

무심한 대답에 그레이슨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결혼을 하지. 아, 정말 힘들어.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는 건.”

키이스는 질린 얼굴로 그레이슨을 바라보았다. 마치 성탄절에 제발 선물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악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키이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레이슨이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체이스 따위도 결혼해서 애가 있는데. 봤어? 그 녀석이 애를 둘이나 낳다니, 저러다 약에 절어서 죽거나 병신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말이지.”

“…….”

누가 들으면 빈정거리거나 비난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슨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감탄하는 거라는 걸 키이스는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진심을 몇이나 알아들을지, 알아들어도 이해를 할지가 문제였지만.

“체이스가 왔어? 애들하고?”

“물론 조쉬까지 함께 왔지. 경기를 제대로 봤나 몰라. 저 녀석들은 둘이 붙어 있으면 서로 얼굴을 보느라 옆에서 핵이 터져도 모를 거야.”

이번에는 진심으로 질린 듯한 반응이었다. 때마침 말의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훌쩍 말에 올라 경기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 키이스에게 그레이슨이 행운을 빌어 줬다.

“이기길 빌어, 키이스.”

키이스는 맬릿을 고쳐 쥐고 피식 웃었다.

“당연히 이기지.”

* * *

다시 경기가 시작되고, 이어진 추카에서 키이스의 팀이 2점을 더 얻어 냈다. 선수들이 말을 바꾸고 사람들이 잔디를 밟으러 나갈 타이밍이 되었지만 연우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섣불리 몸을 움직였다가는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흥분을 참지 못해 쓰러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키이스는 연우가 있는 관중석 쪽으로 굳이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서 말을 준비하던 그와 한 차례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얄궂게 웃은 게 전부였다. 연우는 왠지 부끄러워져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다음 추카가 이어졌다. 교체된 말을 타고 달려가는 키이스의 모습에서 연우는 줄곧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키이스가 연우 쪽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연우 또한 웃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떨리는 입술 사이로 들뜬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이스가 속한 팀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

*

하루 중 가장 큰 행사가 끝났지만 같이 뛴 선수들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연우는 그 자리에 선 채 키이스가 그를 데리러 오기만 기다렸다.

문득 잠에 푹 빠져 있을 스펜서가 떠올랐다. 무심코 미소를 지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난폭하게 몸을 부딪쳤다.

“헉!”

자신도 모르게 입 안으로 비명과 함께 날카로운 숨을 삼켜 버렸다. 다행히 펜스에 가로막혀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휴대 전화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미안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사과하더니 연우보다 먼저 몸을 숙여 휴대 전화를 주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입에 밴 인사말을 한 연우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보라색 눈.

의도적으로 페로몬 향을 없앤 건지 달콤한 향기는 풍겨 오지 않았으나 눈동자 색깔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극알파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연우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는 쓴웃음을 짓더니 굳이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시간에 맞춰 오려고 했는데 그만 끝나 버렸군요.”

“……출장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죠.”

어쩔 수 없이 대꾸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몇 년 만에 돌아왔죠. 유럽에서 사업을 하고 있거든요.”

“네…….”

연우는 어색하게 대답을 흐리며 흘긋 시선을 돌렸다. 키이스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먼저 차로 가 있을까?

손안에 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딴생각을 하는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최근에 이쪽에서 있었던 일들은 소식을 접하지 못했는데, 뭐 특별한 사건은 없었습니까?”

아까보다 적극적인 태도에 연우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인터넷이 되는 곳에 계셨다면 전부 알 만한 일들뿐이죠.”

남자는 그의 의도를 눈치챈 듯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극알파들과는 달리 거만하지 않다는 것은 감탄할 만했으나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이 남자도 다른 극알파들과 마찬가지로 눈치가 없었다. 아니면 거절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는 건가. 연우는 내심 생각했다.

“제 손가락에 있는 게 뭔지 몰라서 여기 있는 건 아니겠죠?”

그의 말투를 흉내 내 되물으며 일부러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줬다. 키이스가 어째서 평생 반지를 빼지 말라고 거듭 강요했는지 납득했을 때, 남자가 또다시 웃었다. 물론 연우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무례하게도 손을 뻗어 연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연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피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인사고 뭐고 몸을 돌리려는데, 생각지 못한 향기가 호흡과 함께 연우의 안으로 확 밀려들어 왔다.

키이스가 아닌 다른 극알파의 페로몬 향기였다.

“……!”

그만 무릎이 꺾여 버리고 말았다. 맥박이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 대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잊고 있던 공포가 갑자기 되살아났다. 이상해, 멍한 의식 너머로 연우는 생각했다. 이상해. 몸이 왜 이러지?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남자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연우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왜.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이렇게나 반응하는 걸까.

키이스가, 아닌데.

생각조차 뜻대로 되지 않아 자꾸만 단어가 끊어졌다.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약을 어디에 뒀었지?

연우는 어떻게든 생각을 이어 가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병원에서 받아 왔는데. 아, 욕실에. 욕실 찬장에 뒀었구나. 지금 먹으면 되나? 효과가 있을까?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대로 무너지는 연우를 남자가 서둘러 끌어안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쓰러져 버린 연우를 그는 오해했다.

“꽤 대담하네. 지금 날 유혹하는 게 맞지?”

숨죽인 음성은 의도를 다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틀렸다. 연우는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공포로 숨이 가빠졌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그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반항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허리를 안은 채 연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달콤한 향기가 머릿속을 온통 휘저었다. 숨을 멈춰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거친 숨결과 함께 페로몬이 속수무책으로 그의 안에 흘러들어 왔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불현듯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연우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식으로 날 실망시키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어.>

여기서 이 남자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키이스는 나를 또다시 비난할까?

페로몬 탓인지 연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그는 축 늘어져 버렸다.

그대로 의식을 놓을 뻔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연우를 붙잡아 낚아챘다. 곧바로 남자의 팔에서 벗어나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익숙한 페로몬 향기에 간신히 진정이 됐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페로몬을 들이켰다. 키이스가 연우의 위로 페로몬을 가득 쏟아 내고 있었다. 조금씩 공포가 사라지면서 다시 안정이 찾아왔다. 그때처럼.

공포에 질렸던 연우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던 그때.

문득 그날 밤의 서늘한 공기와 달콤한 페로몬 향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연우는 키이스의 향기를 깊이 들이켜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키이스 역시 그를 힘주어 안았다. 간신히 안정을 찾은 그의 몽롱한 귓가에 키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오메가에게 페로몬을 쏟다니, 네가 이렇게 대담한 줄은 몰랐는데.”

평소처럼 차분한 어조였으나 연우는 어깨를 움칠했다. 남자도 역시 당황한 듯 지금까지와는 말투가 달라졌다.

“아니. 오해야, 키이스. 정말 몰랐다고, 아니, 그러니까 네 오메가인 줄 알았다면…….”

“이 지경이 될 정도로 페로몬을 쏟아부어 놓고 뭐라고?”

키이스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표식이 없잖아.”

그 말에 키이스는 갑자기 침묵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항변했다.

“결혼반지쯤이야 가짜로 끼고 다니는 이들도 수없이 많다고.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는 상대면 당연히 표식을 새겼어야지, 그랬으면 웬만한 페로몬에는 반응하지 않았을 거 아냐? 게다가, 표식이 없다고 해도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반응하는 건 이상하잖아. 난 아주 조금 유혹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정말이야, 아주 조금이었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내 탓이 아니라고…….”

남자는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것은 연우 또한 의문이었다. 키이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말로 미안해, 키이스. 결혼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네 상대인 줄은 몰랐어. 미안해요.”

남자는 연우와 키이스에게 번갈아 몇 번이나 사과하고 황급히 달아나듯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한동안 연우를 안고 있던 키이스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안아 들었다. 연우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키이스, 나, 지금.”

“알아.”

키이스는 조용히 연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편하게 해 줄 테니까.”

그리고 그는 걸음을 옮겨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갔다. 전속력으로 걷고 있는지 온몸이 뒤흔들렸지만 현기증을 느끼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남자의 페로몬에 이어 쏟아진 키이스의 페로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연우를 진정시키려던 키이스의 페로몬은 오히려 역효과로 나타났다. 연우는 익숙한 감각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고 흐느낌과 함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저리치듯 온몸을 떨자 키이스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참아.”

그가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쏟아지던 페로몬 향기가 달라졌다. 연우의 발정에 반응해 키이스 또한 흥분한 것이다. 아랫도리가 흠뻑 젖어 들었다. 최악이었다. 연우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에서 넘쳐나는 진한 페로몬 향기는 키이스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아, 하아…… 응.”

화끈거리는 것은 아랫배만이 아니었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키이스를 올려다봤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을 때, 마치 뛰어들 듯이 키이스가 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으, 으응, 으으응.”

연우는 미친 듯이 그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키이스 또한 더 이상 그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잡아 끌어당기는 손에 황급히 그의 위로 올라갔다. 넓게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흥분한 키이스의 성기가 닿았다. 연우는 격하게 엉덩이를 흔들어 아랫도리를 마찰시켰다. 축축하게 젖어 든 얇은 천 너머로 뜨겁게 일어선 페니스의 형체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키이스, 키이스.”

“안 돼, 기다려.”

당장 안에 넣어 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데 어째서?

‘나를 원하지 않는 걸까?’

“미쳤어? ……아.”

욕설을 내뱉었던 키이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연우는 자신이 마음속의 말을 소리 내어 입 밖에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이스는 이를 갈며 거칠게 내뱉었다.

“여기서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잖아. 참고 있는 거라고. 모르면 닥쳐.”

키이스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것처럼 연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연우는 밤새 차 안에서 그와 섹스를 해도 상관없었다. 당장 그의 것을 자신의 안에 넣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제발.

괴로워하는 연우을 지켜보는 키이스 역시 괴로웠다. 그를 도와줄 방법이 자신에겐 전혀 없었다. 흘러넘치는 연우의 페로몬에 이성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연우를 안을 수도 없었다. 급기야 울며 흐느끼는 그를 키이스는 세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위로하며 페로몬을 쏟아 내는 것뿐이었다. 그때처럼.

예전에 그 방법은 연우의 발작을 가라앉히고 그를 진정시켜 주었다. 이번에도 통할 것이다. 키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우를 내려다봤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이 떨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연우.”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곧 차가 도착할 것이다. 그 이상은 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이건 그저 위로의 키스일 뿐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키이스가 입술을 내렸을 때, 갑자기 연우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

“연우!”

그만 키이스의 무릎에서 떨어질 뻔한 그를 간발의 차이로 붙잡은 키이스가 다급하게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힘없이 키이스의 가슴에 안겨 버린 연우가 다시 빠져나가려 바르작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정해, 연우. 알았어, 키스하지 않을게. 안 할 거니까 진정하라고. 왜 그러는 거야? 나와 키스하는 게 그렇게 싫어?”

초조함에 짜증이 나 키이스는 급기야 거칠게 물었다. 순간 움칠한 연우가 그게 아니라, 하고 중얼거렸다.

“저한테, 키스를 하고 나면…… 항상, 화를 내잖아요.”

당황한 키이스가 그대로 굳어졌다. 크게 뜬 연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주룩 흘러내렸다.

“그건.”

키이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페로몬 때문에 머리가 뒤엉켜 제대로 생각을 하기도 힘든데 이렇게 난감한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다니,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건, 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데, 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키이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연우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이미 연우는 울다 지쳐 탈진한 듯 늘어진 후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페로몬에 취해 계속해서 온몸을 떨었다.

“스튜어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묻자 휘태커가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좋아.”

키이스는 말했지만 정작 자신도 한계였다. 가까스로 준비가 된 입원실에 연우를 내려놓고 물러나면서, 키이스는 그만 탈진해 버렸다.

* * *

머릿속이 온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히트사이클은 혹독해서, 페로몬이 끝없이 혈관을 떠돌며 그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연우는 들뜬 숨을 몰아쉬며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으, 으으…….”

“쉬…… 괜찮아요. 주사를 놨으니 가라앉을 겁니다.”

귀에 익은 음성이 그를 다독거렸다. 키이스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연우는 어렵게 반응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부연 시야에 누군가의 형체가 맺혀 들었다.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흐투, 어.”

“네, 맞아요.”

제대로 혀가 움직이질 않아 간신히 발음하자 스튜어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언제나 그를 돌봐 주던 의사는 이번에도 먼저 원인을 파악해 들려주었다.

“페로몬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진정제를 놨으니까 한숨 자고 나면 좋아질 겁니다. 그동안은 피트먼 씨가 돌봐 줄 테고.”

그가 흘긋 한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제야 연우는 키이스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이스.

입술을 달싹여 그를 부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전혀 웃지 않았다. 몽롱한 상황에서도 그것은 연우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힘없이 내려오는데,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표식이 없어서 이런 건가?”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가 욕설을 뱉더니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기물 파손은 참아 주세요.”

슬쩍 한마디 했던 스튜어드는 키이스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나면 건물 하나둘은 부숴야죠.”

키이스는 스튜어드를 노려보던 시선을 옮겨 다시 연우에게 향했다.

“갑자기 왜 그런 거야?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어?”

가능한 한 연우를 다그치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고작 그 정도 페로몬으로 그렇게 반응할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면 말해, 괜찮으니까.”

당연히 연우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지 않은 건 그 자식뿐이다.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스튜어드가 한마디 했다.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키이스가 곧장 그를 노려봤을 때였다.

“……라고.”

“뭐?”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키이스가 되물은 말에 연우는 다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별거, 아니니까.”

“뭐라고?”

키이스는 흔치 않게 당황했다. 지금 연우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스튜어드 또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연우는 느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적당히 빨아 주고, 원하는 대로 받아 주면, 끝나니까.”

“누가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

키이스가 참지 못하고 내질렀다. 하지만 연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직 남아 있는 페로몬에 진정제까지 뒤섞여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넋두리처럼 그는 다시 속삭였다.

“내가 파티를 망쳐서…… 또 실망시키면…… 안 되잖아요.”

“대체 무슨 소릴…….”

급기야 화를 내려던 키이스가 갑자기 멈칫했다. 뭔가 묘한 데자뷔가 느껴졌다. 뭐였지? 대체 뭐야?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다.

나는 잊어버렸지만, 연우는 잊지 않았어.

내가 했던, 연우를 상처 줬던 말들이 전부 다 내게 돌아오고 있는 거야.

동시에 연우가 속삭였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그냥…… 받아 주면 돼…….”

곧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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