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8화 (56/77)

8

아침이 되어 전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스펜서는 나름대로 부산하게 움직이며 친구의 집에 놀러 갈 준비를 했다.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끼는 장난감을 챙기는 모습에 지켜보던 연우는 신기해하며 물었다.

“스펜스, 그렇게 좋니?”

다정한 음성에 스펜서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트는 멋있고, 세실은 예뻐. 그리고 조가 만든 푸딩은 엄청 맛있어!”

아들 하나에 딸 하나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불쑥 키이스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오해하지 마. 아들만 둘이야, 그 자식.”

“세실은 예뻐!”

스펜서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금세 홍조를 띤 그가 말했다.

“세실이 나한테 고추도 보여 줬어. 세실은 고추까지 아주 예쁘던데!”

“…….”

“…….”

연우와 키이스는 동시에 침묵하고 말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키이스였다.

“스펜스, 여자에게는 고추가 없어.”

“어?”

순간 당황해 눈을 크게 뜬 아이의 반응을 보고 키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슬슬 스펜스에게 성교육을 시켜야겠어.”

“그래, 맞아. 가르칠 때가 됐어. 저러다 큰일 나겠어.”

옆에서 연우가 동조했다. 그 말에 키이스가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이 한 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키이스는 이미 여러 번 겪은 실망을 또다시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자신에게 서두르지 말자고 타이르며 그는 걸음을 뗐다.

“스펜스, 장난감은 그만 챙기고 이제 옷을 갈아입자. 이걸 다 가져갈 수는 없어.”

“정말? 안 돼?”

“안 돼.”

키이스는 다정하게 아이를 달랬다.

“그 집에도 장난감이 많잖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딱 두 개만 가져가자. 어때?”

“우, 우우.”

아이는 어느 것 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사이 키이스는 메이드가 미리 테이블 위에 챙겨 놓은 옷을 들어 입은 걸 벗기고 새 옷을 하나씩 입히기 시작했다. 연우는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한 마디씩 의미 없는 말을 하는 스펜서를 받아 주며 키이스는 셔츠를 벗겼다.

“팔.”

두 손을 번쩍 든 스펜서의 셔츠를 벗기고 준비해 둔 상의를 입혔다. 바지를 갈아입힐 때는 한 팔로 아이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지퍼를 내리고 허리춤을 잡아당겨 입던 옷을 벗겼다. 이런 일이 익숙한지 스펜서 또한 박자가 딱딱 맞았다.

“오른쪽.”

스펜서가 번쩍 오른 다리를 들자 키이스는 바지 한쪽을 입힌 후 다시 “왼쪽” 하고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스펜서가 왼쪽 다리를 들었고, 키이스는 나머지 한쪽도 끼워 넣은 뒤 허리춤을 잡아당겨 똑바로 입히고 지퍼까지 마무리했다. 이어서 양말 다음에 신발을 신긴 뒤 발등의 벨크로를 잡아당겨 붙이는 것까지 완벽했다.

지켜보던 연우는 새삼 감탄했다. 그때까지 그는 모든 걸 한 손으로 처리했다. 고작 5분도 걸리지 않아 모든 게 끝났다. 자신이 아는 키이스는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남자였다. 수시로 상대를 바꿔 가며 방탕한 삶을 살던 그가 이렇게 돌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시선을 눈치챈 키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눈을 피할 틈도 없이 갑자기 시선이 마주치고, 연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그대로 들켜 버린 연우에게 키이스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반했어?”

그 얼굴에 연우는 또 한 번 넋이 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연우에게 갑자기 키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연우, 페로몬 향이 너무 강해서 러트가 올 것 같아.”

“아.”

순간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연우는 부끄러움에 그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저, 저기, 전 나갈 준비를…….”

“연우.”

황급히 뛰어 나가려는데, 뒤에서 키이스가 그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반쯤 열고 돌아보자 키이스는 상어 인형과 해달 인형 중 뭘 가져갈까 고민하는 스펜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시간은 많으니까.”

“…….”

연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문소리가 들리고, 연우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잠자코 닫힌 문을 바라보던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먹고 있어서 다행이군.

그러지 않았다면 아이 앞에서 연우를 쓰러뜨렸을 것이다. 아직도 주변에는 연우의 페로몬 향기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나 무섭게 흥분한 심장과는 달리 성기만은 잠잠했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게 나쁠 수는 없는 거지.

씁쓸한 생각과 함께 시선을 내리자 스펜서가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는 아이의 뺨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그래, 시간은 많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하듯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는 스펜서를 꼭 끌어안았다.

*

*

덜컥, 난폭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연우는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다급하게 문을 닫은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진정이 됐다.

미쳤어, 어떡해.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예전엔 전혀 들키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키이스의 말대로 자신의 페로몬 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진하게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자신도 이렇게 강하게 느끼는데 키이스는 더할 것이다.

표식이 있으니까.

이렇게 진한 향기를 어떻게 참고 있지? 연우는 당황해하며 자신의 손목과 팔에서 다시금 향을 확인했다. 역시나 그것은 너무나 강렬했다. 키이스에게 제발 나를 덮쳐 달라고 애원하듯.

창피해.

키이스가 참은 게 대단했다. 이 정도로 강한 페로몬 향을 어떻게 참아 냈을까. 그의 인내심이 연우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못 참는 건, 나뿐일까.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를 맡지도 않았는데 흥분해 버린 자신을 깨닫자 더욱 스스로가 뻔뻔하게 느껴졌다.

“파렴치한 음란 요정! 나가, 나가!”

자신의 뺨을 아프도록 찰싹찰싹 때려 댄 연우는 급하게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달려갔다. 찬물을 뒤집어써야 이 파렴치한 요정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샤워기 밑에 선 연우는 아래를 봤다가 기겁을 했다. 벌써 자신의 성기가 반쯤 일어서 있는 것이다.

“으으…….”

목 깊은 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흥분이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잠시 허둥대던 그는 결국 별수 없이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으, 으응…….”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손으로 열심히 자신의 성기를 훑으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키이스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지금 저 문을 난폭하게 열고 들어와 내게 키스를 퍼부었으면. 아, 안 돼.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들킬 순 없어……! 아, 하지만 키이스가 그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다시 해 봐.>

키이스의 음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동시에 손안의 성기가 완전히 일어섰다.

<다시 해 보라고, 처음부터.>

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벽을 짚었던 손을 떼고 자신의 엉덩이로 가져갔다. 기억보다 먼저 본능이 움직였다. 떨리는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에 숨어 있던 구멍에 닿자, 그곳이 소스라치며 전율했다.

쏟아지는 물과는 다른 미끈한 체액으로 구멍이 흠뻑 젖어 있었다. 연우가 조심스럽게 주름을 쓰다듬자 곧바로 바르르 떨며 반응했다. 연우는 참지 못하고 욕실 바닥에 쓰러졌다. 한껏 몸을 웅크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아으……!”

단지 그것뿐인데도 연우는 사정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하얗게 될 정도로 굉장한 쾌감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안쪽을 찌르고 싶었다. 훨씬 더 크고 두꺼운 걸로, 그래, 키이스의 그것으로.

“아, 하아……!”

연우는 길게 신음을 뱉으며 아래를 난폭하게 쑤셔 댔다. 하지만 손가락을 아무리 늘려도 원하는 깊이와 굵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간신히 앞을 난폭하게 문질러 다시 한번 사정을 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아래쪽이 욱신거렸다.

……기구를.

연우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

……살까.

키이스를 생각하며 아래를 쑤시는 상상을 하자 또다시 발기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만족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제일 크고 두꺼운 걸로 주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 것 말고 지금 연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세일러복에 반바지, 발에는 언뜻 구두처럼 보이는 벨크로 운동화를 신고 머리에 보터까지 쓴 스펜서는 자신감이 대단했다. 거기다 가장 아끼는 상어 인형까지 품에 안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그는 무적이었다.

“파파, 난 커서 해군이 될 거야!”

두 팔을 넓게 벌리고 키이스의 다리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들을 보고 키이스는 엷게 웃었다.

“글쎄, 해군은 내가 네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안 되겠는데. 바다에 나가면 몇 달이나 만날 수 없게 되니까.”

“하지만 나, 배를 타고 싶은걸!”

뛰는 걸 멈추고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를 훌쩍 안아 든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자, 파파가 배를 사 줄게. 네가 언제든 원할 때 탈 수 있도록.”

“정말?”

“정말.”

키이스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해군은 안 할 거지?”

음, 하고 잠깐 생각하던 스펜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 옷 좋아하는데.”

“알아.”

“해군이 입는 거잖아.”

“해군이 아니라도 입을 수 있어.”

“가짜잖아.”

아이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키이스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곧 그는 해결책을 내놨다.

“좋아, 그럼 용병을 사 줄게. 그걸로 해군을 만들어.”

“용병이 뭐야?”

스펜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군대야. 대신 스펜스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하는 군대지.”

우와, 하고 스펜서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시키는 거 다 해?”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흥분한 스펜서가 물었다.

“그럼, 나 아침마다 푸딩 열 개씩 달라고 하면 줘?”

멈칫했던 키이스가 잠깐 사이를 둔 뒤 대답했다.

“어른이 되면.”

“그럼, 그럼. 내 머리 하얗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해 줘?”

“염색은 열여덟 살부터 할 수 있어. 열여덟 살이 되면.”

“파파 바보! 머리에 눈을 뿌리면 되잖아.”

까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에 키이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맞아. 스펜스는 천재구나.”

뺨에 소리를 내어 입술을 문지르자 스펜서는 자지러지며 몸을 뒤틀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었다.

*

*

저렇게 밝고 건전한 광경을 보니 정말 죽고 싶어졌다.

연우는 현관에 서서 키이스와 스펜서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했는지를 떠올리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뒷걸음질 쳐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마저 일 정도였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또 자위를 하겠지.

문득 떠오른 현실에 그는 또다시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때마침 키이스가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음란 요정이 달아날 때까지 머리를 박아 댔을 것이다.

“연우.”

“대디!”

뒤이어 연우를 발견한 스펜서 또한 소리치며 한 손을 흔들었다. 연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내려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갈 수가 없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계단에서 참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홀까지 내려오는 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고작 열 개 남짓한 계단이 전부인 현관에서는 계단 외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계속 머뭇거리는 연우의 망설임을 눈치챈 키이스가 갑자기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팔에 걸쳐 있던 아이를 선뜻 어깨 위로 올린 그가 순식간에 연우의 앞에 섰다. 두 계단 밑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키가 연우보다 컸다.

“아!”

주저 없이 연우를 안아 든 키이스가 몸을 돌리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팔에는 연우를 안고 어깨 위로는 아이에게 목말을 태운 채 걸음을 옮기며 그는 찰스에게 말했다.

“계단마다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경사로도 만들고. 아니, 아예 현관에서 바로 2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도 괜찮겠군.”

“알겠습니다.”

“아, 저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연우는 황급히 말했다.

“곧 좋아질 텐데, 일시적인 거니까 거기까지 안 해도…….”

“연우.”

키이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연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집을 전부 다 부숴 버리고 새로 짓는 것과,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빠를까?”

잠시 말문이 막힌 연우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요?”

“그래, 너도 찬성한다니 다행이군.”

찬성한 적 없는데요.

연우는 내심 생각했지만 더 반박을 해 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잠깐의 언쟁을 나누는 새 벌써 그들은 계단 아래까지 도착했다. 이제 내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이스는 그대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재빨리 차의 문을 연 휘태커가 눈치 빠르게 키이스의 어깨에서 스펜서를 떼어 놨다. 곧이어 연우를 안에 내려놓은 키이스가 뒤따라 차에 오르고, 휘태커가 들고 있던 아이를 그의 무릎 위에 올린 뒤 문을 닫았다.

“몸이 안 좋아?”

옆자리에 앉은 키이스가 갑자기 물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연우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어디든 불편하면 얘기해, 바로 스튜어드를 부를 테니까.”

“어, 아뇨. 괜찮은데…… 왜, 왜요?”

무심코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키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뺨이 너무 붉어. 좀 부은 거 같기도 하고…… 설마 네가 누구한테 맞았을 리도 없는데. 내 집 안에서 너를 때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것도 고작 네가 준비를 하러 간 시간 동안, 길어야 두 시간인데. 그럼 몸이 안 좋다는 말밖에 안 되잖아.”

고작 두 시간을 참 알차게도 썼구나.

연우는 자기혐오를 느끼며 키이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냥……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샤워를 너무 오래해서 그런 걸 수도요.”

“…….”

“정말이에요. 불편한 데는 없습니다. 모두 좋아요.”

그 때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 키이스는 어떻게 반응할까.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보자 한동안 말이 없던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넌 정말 오래 씻으니까.”

다행히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연우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장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설마 씻겠다고 들어갈 때마다 자위를 했던 건 아니겠지?

불안한 가운데 차가 출발하고, 연우는 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피트, 세실, 조!”

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구르듯이 뛰어내린 스펜서가 두 팔을 활짝 펴고 소리쳤다. 현관 앞에 나와 있던 아이 둘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온 스펜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스펜스.”

제일 나이가 많은 덕에 아이들 틈에서 훌쩍 큰 피트가 먼저 스펜서를 낚아채 꼭 끌어안았다. 스펜서는 피트를 마주 안고 인사를 했다.

“안녕, 피트. 나 오늘 자고 갈 거야!”

“정말? 내 침대에서 잘까?”

“응, 그러자, 좋아!”

스펜서가 신이 나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피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의 뺨에 키스했다.

“스펜스는 정말 귀여워.”

지켜보던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엔 남자아이끼리 키스하나?”

조용한 물음에 조쉬는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저도 요즘 애가 아니라서.”

잠자코 둘을 지켜보는데, 피트가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스펜서를 바라보며 한 번 더 꼭 끌어안았다.

“이봐…….”

이번에는 입술에 키스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키이스가 제지하려 했을 때, 갑자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긴 금발에 예쁜 리본을 매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세실이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

“세실, 왜 그래? 울지 마!”

자연스럽게 피트에게서 빠져나와 세실 앞에 선 스펜서가 열심히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실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스펜스가 나를 잊어버렸잖아.”

“뭐? 아냐, 내가 세실을 왜 잊어!”

“피트한테만 인사했잖아.”

“아냐, 세실. 세실한테도 인사하려고 했어. 자, 세실! 울지 마!”

스펜서는 짧은 팔을 힘껏 뻗어 세실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실이 스펜서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스펜스, 인사를 하려면 키스를 해야지.”

“응.”

스펜서는 바로 그의 말에 따라 쪽, 하고 입술을 대었다 뗐다.

“이제 안 울어? 안 슬퍼?”

기대에 차 묻는 스펜스에게 세실은 여전히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늘 피트의 침대에서 잘 거잖아. 세실은 혼자 자면 무서운데…….”

“욱.”

뒤에서 피트가 갑자기 구역질을 했다. 조쉬가 황급히 그의 등을 두드려 줬으나 세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펜서를 향해 눈을 깜박여 보였다. 스펜서는 서둘러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세실. 내가 같이 자 줄게. 봐, 내 상어도 가지고 왔어. 같이 괴물을 무찌를 거야!”

“정말?”

세실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말 나랑 같이 잘 거지, 스펜스?”

스펜서보다 어린데 벌써 그의 키를 따라잡은 세실이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스펜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응, 하며 약속을 했다. 그러자 금세 세실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키이스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베일리, 네가 키운 망나니들이 내 아들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는 순간 밀러가는 개박살이 날 줄 알아.”

“입술은 닿아도 됩니까? 키스는 이미 익숙해 보이는데. ……죄송합니다.”

별생각 없이 농담을 했던 조쉬는 곧장 돌아오는 무서운 시선에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사과했다. 조쉬와 함께 일하는 경호 팀이었다면 그의 농담에 껄껄 웃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어차피 애들이지 않습니까? 진지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

게다가, 하고 조쉬가 덧붙였다.

“저희 애들이야 그렇다 치고 스펜스가 좋다고 하면 그땐 어쩔 수 없잖아요?”

조쉬의 말은 그럴듯했으나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 아이를 떼어놓고 싶어졌지만 실망할 스펜서의 얼굴이 눈앞에 선해 포기했다. 조쉬의 말대로 아직 어린애들이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스펜서에게는 여러 가지로 교육이 필요한 게 확실했다.

저러다가 쓰레기 같은 사기꾼한테 걸려서 몽땅 털려도 털린 줄 모를 거야.

최악의 상상을 떠올렸던 키이스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나한테서 저런 아이가 나왔지? ……사랑스럽긴 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키이스는 때마침 시선을 든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고 키이스는 스펜서가 누굴 닮아서 저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지 바로 깨달았다.

“……아주 곤란해.”

키이스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우를 닮았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쓰레기에게 걸릴 것이다. 바로 자신 같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연우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못 본 체하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슬쩍 끼어들어 스펜서를 세실에게서 떼어놓은 키이스가 말했다.

“베일리 씨에게 인사해야지, 스펜스.”

조쉬는 결혼 후에도 이전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스펜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조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조.”

작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악수를 나눈 조쉬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 스펜스. 즐겁게 놀고 가면 좋겠구나.”

“스펜스, 베일리 씨라고 불러야지.”

키이스의 말에 조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발음하기 힘들어해서 그냥 조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안녕, 연우. 잘 지냈어요?”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연우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 햇살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금발 미남이라면 바로 이 남자를 말할 것이다. 뒤에 ‘캘리포니아’라고 써진 거대한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반짝 웃는 사진을 지역 광고로 올려놓으면 방문객이 세 배는 늘 것 같았다.

“어, 안녕하세요. 잘 부탁합니다.”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자 조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이스가 갑자기 그의 어깨를 잡더니 한쪽으로 데려갔다.

“기억 상실이라고요?”

깜짝 놀란 조쉬에게 키이스가 그래, 하고 말했다.

“치료 중이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안정이 제일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스펜스를 감싸다가.”

“저런.”

안타까운 감탄사를 뱉었던 조쉬가 물었다.

“필요하다면 스펜스를 며칠 맡아 줄 수도 있어요. 전 다음 달까지 휴가니까.”

“그렇게 오래 쉰다고?”

무심코 묻자 조쉬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연말과 새해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죠.”

<저 녀석들은 둘이 붙어 있으면 서로 얼굴을 보느라 옆에서 핵이 터져도 모를 거야.>

갑자기 그레이슨의 말이 떠올랐다. 키이스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다시 연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조쉬 역시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시야에 혼자 아이를 보며 서 있는 연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키이스의 걸음이 더 빨라지더니 이내 조쉬에게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조쉬는 생각했다.

만약에 체이스가 나를 잊어버리면…….

결론은 간단했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나만 봐야지.

상상만으로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

*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는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키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웃음을 지었다. 멈칫하는 것 같던 키이스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이제 그만 갈까? 스펜스와 아이들이 사이가 좋은 걸 확인했으니까.”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하나?

내심 판단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바라본 연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스펜서를 향한 애정은 진심이었다. 키이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스펜스, 내일 데리러 올게.”

아이를 안고 키스를 한 연우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졌다. 스펜서를 놓고 간다고 생각하자 고작 하룻밤인데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아이를 안고 움직이지 못하는 연우를 잠자코 지켜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룻밤일 뿐이야, 연우.”

“…….”

연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꼬옥 아이를 안은 뒤 놓아 주자 스펜서는 이내 피트와 세실 쪽으로 달려갔다.

돌아보지도 않다니.

“연우.”

괜히 야속해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키이스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곧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가야지.”

쓴웃음을 짓는 얼굴을 보자 무안해졌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게 두고, 어른은 어른끼리 시간을 가져야지.”

자, 하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연우는 잠깐 망설였다. 고작 손을 잡는 게 전부잖아. 정말 별거 아닌데 선뜻 그것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무슨 짓을 했는지 연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연우?”

키이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연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당황해 황급히 돌아서 차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떡해, 어떡하지.

페로몬을 줄여야 할 텐데,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당연하지, 나같이 평범한 오메가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부끄럽게 페로몬을 줄줄 흘리기나 하지.

“……약이라도 먹을걸.”

작게 중얼거렸을 때, 갑자기 뒤에서 키이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 낚아챘다.

“……!”

놀라 숨을 삼키며 끌려간 연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하얗게 질린 키이스의 얼굴과 마주쳤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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