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뜻밖의 상황에 연우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키이스의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통증이 느껴졌지만 키이스는 그것을 놓긴커녕 더욱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고, 약 먹었어? 억제제?”
연우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는 입을 열었다.
“어, 아뇨…… 아직.”
“아직이라니, 먹을 생각이었어?”
연우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필요하면…….”
“누가…….”
키이스는 고함을 지르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화를 억누른 그가 빠르게 내뱉었다.
“꿈도 꾸지 마. 그걸 먹다니, 미친 짓이야. 죽으려고 작정을 했냐고, 네 몸 상태가 지금 어떤데…….”
점차 높아지던 음성이 갑자기 사라졌다. 역시나 연우는 놀라면서도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제 상태가…… 안 좋습니까? 의사는 별 얘기 없었는데…… 억제제를 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기억이 돌아오는 데 방해가 된다던가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고.”
키이스는 연우의 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넌, 억제제를 먹으면 안 돼. 네가 기억을 잃은 동안 그런 일이 있었어.”
간신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연 키이스는 대한 말을 고르며 조리 있게 연우를 설득하려 애썼다.
“체질이 그렇게 됐으니까, 앞으로 약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억제제만이 아니라 단순한 소화제도 의사와 상의하고 처방을 받아. 알겠어?”
“…….”
“대답해.”
“……네.”
대답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키이스는 그를 놓아주었다. 뒤늦게 어깨가 저려 손으로 주무르는데,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긴 키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 페로몬을 조절하라는 말을 할 사람이 없는데.”
“피트먼 씨요.”
자신도 모르게 연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담배를 꺼내려던 키이스는 그대로 동작을 멈춰 버렸다.
“……뭐라고?”
한참 만에 흘러나온 음성을 받아 연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저한테…….”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던 그가 결심한 듯 덧붙였다.
“페로몬 냄새 안 나게 하라고.”
아, 하고 깨닫는 순간 키이스는 그만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런 망할, 빌어먹을! 이, 이…….
개자식아!
자신에 대한 화가 지나쳐 이젠 허탈해졌다. 키이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런 건 왜 다 기억하는 거야?”
터무니없이 조용한 음성에 연우는 대답을 못 하고 그를 보기만 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또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어떻게 자신이 기억하는 달콤한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면서 정작 본인은 잊고 있던 별거 아닌 쓰레기 같은 것들만 기억하는가 말이다.
그건 내가 쓰레기이기 때문이겠지.
결국 키이스는 애꿎은 방향으로 화살을 돌렸다.
“그건 대체 어디서 구했어? 집 안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먹을 생각이 있었으면, 가지고 있는 게 있다는 거지?”
연우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 저기…… 처음 사고가 났을 때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억제제를 처방해 달라고 하니까 주던데요…….”
“……허.”
키이스는 할 말이 없어져 그저 허무한 탄식만 흘렸다. 연우가 실려 갔던 병원은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 아니다 보니 상황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은 이쪽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걸 처방받을 거라고 누가 예상을 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젖히고 있는 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먹어선 안 되는 거였습니까? 그런데 의사는 별 얘기 없이 처방을 해 주던데요…….”
“……그건 돌팔이야.”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키이스가 말했다.
“앞으로는 내 말만 들어, 알겠어? 무슨 약이고 간에 함부로 먹지 말라고.”
“어…… 네.”
납득하기 어려워하면서도 연우는 그렇게 대답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지?
……이대로는 안 돼.
키이스는 마음을 다잡고 얼굴에서 손을 뗐다.
“연우.”
똑바로 그를 내려다보며 이름을 부르자 연우가 멈칫했다. 조마조마해하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후, 심호흡을 한 키이스가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오늘 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고 나온 거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게. ……그런 나쁜 기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했던 좋은 기억들 말이야.”
키이스가 손을 들었다. 주춤거리며 두어 번 망설이던 손이 조심스럽게 연우의 뺨을 감쌌다.
“그러니까, 너도 노력해 주면 좋겠어. 기억을 찾을 수 있게.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면.”
키이스의 손이 연우의 귀로 옮겨 갔다. 손을 따라 옮겨 간 시선을 고정하고 그가 속삭였다.
“표식을 새기자.”
“…….”
“다신 사라지지 않게.”
마지막 말을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하고 대답하자 그제야 키이스의 표정이 풀리고, 대신 미소가 돌아왔다.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런데, 연우.”
“네?”
갑자기 불길해졌다. 불안해하며 올려다본 연우에게 키이스가 한층 더 달콤하게 속삭였다.
“피트먼이라고 부르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이번에는 연우가 사색이 됐다.
“……섬이요.”
“그래.”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하자 키이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봐주겠지만 다음엔 정말 공항으로 데려갈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마음만 먹으면 바로 띄울 수 있는 비행기가 세 대나 있거든.”
“네.”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죠.”
크기별로 각각 세 대의 전용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연우가 비서이던 시절 주문했고, 나머지 오래된 두 대는 최근 새걸로 교체했다고 들었다. 연우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지난달에 산 건 네가 아직 못 타 봤는데, 그걸 타고 섬에 가면 아주 좋겠지?”
당황한 연우는 차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 음, 저, 하고 말을 더듬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제발.”
전혀 애원하는 게 아닌 말투로 덧붙인 키이스가 화제를 돌렸다.
“식사하러 가지. 예약해 뒀어.”
서둘러 키이스를 쫓아 걸음을 옮기며 연우가 물었다.
“예약요? ……유명한 곳입니까?”
키이스의 스케줄에 맞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기억을 떠올리자 키이스가 흘긋 그를 내려다봤다.
“……가 보면 알 거야.”
기억을 해내면 더 좋고.
키이스는 내심 덧붙였다. 문득 그날의 연우가 떠올랐다. 술에 취해 연신 웃어 대던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그가. 그리고 자신에게 고백하던 그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처음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키이스.>
나도 널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걸.
<좋아해요.>
문득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 * *
차가 도착한 곳은 어느 레스토랑이었다. 화려한 분수와 넓은 정원을 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은 엄격한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본으로 한두 달은 예약이 꽉 찼다.
차에서 내린 연우는 키이스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세워 둔 금속 패널에는 70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옆으로 누운 와인 병이 새겨져 있었다. 현관을 지나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피트먼 씨. 연우.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이어 연우에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아는 것 같은 반응에 연우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먼저 몸을 돌린 매니저가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제법 자리가 찬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고 난 후, 뒤따라온 직원이 물과 와인 메뉴를 키이스에게, 식사 메뉴를 각각 나눠 준 뒤 자리를 떠났다.
여길 많이 왔었나?
연우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어떻게든 기억을 해 보려 애썼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기억나? 여기.”
“……아뇨.”
연우가 고개를 젓자 키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별다른 반응 없이 말했다.
“네가 한동안 점심을 먹지 못해서, 여기로 식사를 하러 왔어. ……네가 와인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흠뻑 취했었지.”
와인 리스트를 건네주며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 앞으로 남은 스케줄이 있으니까.”
“네…….”
남은 스케줄이라니, 뭘까? 연우는 의아해하며 키이스가 준 와인 메뉴를 훑어보았다. 메뉴 너머로 흘긋 쳐다보자 키이스는 식사를 고르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내리고 와인 종류를 들여다보던 연우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여긴, 자주 왔습니까?”
키이스는 여전히 메뉴북을 한 장씩 넘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때 이후론 오지 않았어. 결혼한 뒤에 여기 온 건 처음이야.”
“그런데 매니저도 그렇고 모두 절 아는 거 같아서…….”
말끝을 흐리자 키이스는 피식 웃었다.
“미국에 살면 당연히 알겠지. 넌 내 파트너니까.”
그 말에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가 있었다. 키이스가 누군가와 키스를 하는 모습이 실린 기사였다. 상대방의 얼굴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사진에 실렸던 키이스만은 눈앞에 선했다.
“또 뭔가 기억이라도 났어?”
갑자기 날아든 키이스의 음성에 정신이 들었다. 커다란 테이블 너머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게.”
연우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러니까…… 키스하고 있는, 사진요. 기사에 뜬…… 아, 보석 가게를 전부 털었다고 하던가.”
뒤이어 떠오르는 것을 말하자 키이스는 이내 허탈한 표정이 됐다.
“하아…….”
이제 이런 건 지쳤다는 듯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도 설명했는데…… 그건 엔젤이야, 나를 낳은 오메가라고.”
“…….”
“제발 하나쯤은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떠올려 줄 수 없어?”
왠지 미안해져 연우는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 더 비참해지니까.”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담았던 그는 보던 메뉴북을 옆에 놔 버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던 키이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연우.”
“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대답하자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너와 새로운 추억을 만들려고 온 거야. 그 과정에서 네가 기억을 해낸다면 그것도 좋고. ……가능하면 나와의 좋은 추억으로.”
“제가 일부러 이러는 건…….”
“알아, 그저 내 바람이야.”
연우의 작은 항의를 바로 막아 버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설마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었을 리 없잖아, 안 그래?”
“…….”
“대답해.”
순식간에 엄해진 말투에 연우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렇겠죠.”
당연히 좋은 추억도 있겠지만 지금의 그로선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빈약한 자신감이 사그라들었을 때, 불쑥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괜찮아.>
아.
<괜찮아, 천천히…… 그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코끝으로 달콤한 향기가 흐르는 듯했다. 패닉에 빠져 울먹이던 나를 안고 달래 주던 그가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났다. 폴로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상 거기에 있어 줬어. 내가 힘겨워할 때마다.
계단 위에 멈춰 선 나를 안고 그곳을 지나가게 해 줬지.
<불쌍한 연우.>
그레이슨의 말이 뒤따라 생각났을 때, 키이스가 다시 표정을 풀고 말했다.
“다 잘될 거야.”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이내 화제를 돌려 물었다.
“천천히 골라. 시간은 많으니까. 여긴 와인 종류가 다양해서 특히 인기가 많지.”
연우는 네, 하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몇 번을 다시 봤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어디에도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와인의 제조 연도 외에는.
“……내가 고를까?”
난감해하는 연우를 눈치챈 키이스가 물었다. 연우는 안도하며 재빨리 와인 메뉴를 건네주었다. 테이블 너머에서 그것을 넘겨받으며 키이스가 웃음을 지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얘기해.”
연우는 그 웃는 얼굴에 또다시 마음이 들떠 버렸다. 네, 하고 대답한 그는 남아 있는 물 메뉴북을 들어 물을 고르는 척하며 그는 자신의 페로몬 향이 또다시 흘러넘칠까 내심 걱정이 됐다. 빨리 가라앉혀야 돼. 뭔가 생각해, 다른 얘기를 하자……!
“아, 참. 오늘 본 애들 둘 다 남자아이라고요?”
다행히 무난한 화제를 골랐다. 이런 얘기라면 문제없겠지.
키이스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
“그래, 작은 애는 볼 때마다 드레스를 입고 있더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잘 어울리니까…… 딸을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실제로 모르고 봤으면 누구나 여자아이라고 생각할 텐데. 정말 그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봤거든요.”
키이스는 여전히 와인을 고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체이스 어릴 때와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까. 체이스가 굉장한 미인이거든. 베일리도 뭐…… 괜찮은 편이지.”
평소 남의 외모에 대해 평가가 박한 편인 키이스가 그런 말을 하자 연우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실제로 보면 얼마나 미인이기에, 하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체이스라면, 그 배우죠? 베일리 씨의 상대가 그 체이스 밀러입니까?”
“그래. 그러니 피트나 세실이 그렇게 생긴 것도 이해가 가지. 피트는 벌써 또래보다 키가 두 배 가까이 된다던데.”
“그렇군요.”
연우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열심히 화제를 떠올리는데, 키이스는 속도 모르고 말을 계속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많이 안정이 됐어. 예전에는 손대기도 힘든 망나니였는데, 밀러가의 골칫거리였다고. 고등학교 때는 내 차 타이어에 수시로 펑크를 냈지. 그러고 보니 데뷔를 할 때 그 녀석도 여장을 해서 광고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연우는 일부러 한 귀로 그의 말을 흘리려 애쓰며 다른 생각을 했다. 스펜서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바닥의 헤링본 패턴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여 보기도 하고 괜히 나이프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제법 잘 버텼지만 유독 ‘체이스’라는 단어만 귀에 쏙쏙 들어왔다. 연우의 귀에 박힌 ‘체이스’라는 이름만 다섯 번째가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데 다른 이와 결혼하다니, 안타깝네요.”
전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쌀쌀맞은 말투였지만 그게 연우가 할 수 있는 한계였다. 하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와인 리스트를 내려다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서로 그렇게 사랑한다니 잘된 거지. 체이스를 주워 가다니 베일리도 취향이 독특해. 아니면 어지간히 얼굴을 밝히는 타입이거나.”
“피트…… 아니, 당신도 인정한 얼굴이잖아요?”
연우는 한껏 비꼬아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둬! 내심 또 다른 자신이 당황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키이스는 눈치채지도 못하잖아, 상관없어.
“얼굴이야 그렇지. 하지만 그 성격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베일리 말고 있을까? 지금도 그 자식이 날 골탕 먹이려고 한 짓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거기까지 말한 키이스가 고개를 들더니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질투해?”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눈에 띄게 움칠했다. 그 모습을 본 키이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연우는 뜨끔했지만 이미 늦었다.
“정말이야? 연우,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거야?”
“어, 아뇨. 제가요? 제가 왜요?”
성급하게 묻는 키이스에게 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잘못 보셨습니다. 질투라뇨, 누가 요즘 질투 같은 걸 합니까? 촌스럽게. 절대 전 그런 거…….”
“난 해.”
불쑥 키이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황급히 부정하던 연우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난 한다고, 질투.”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얘기를 나누고 손을 대는 모든 걸 질투해. 웃어 주는 것도 화가 나. 아까 네가 매니저에게 웃었을 때도 질투했어.”
“…….”
뜻밖의 고백에 연우는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그를 보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넌? 연우.”
“…….”
“넌 질투 같은 거 안 하나? 나에 대해서.”
어딘지 그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연우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결국 고백했다.
“……해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지만 벌겋게 익은 귓바퀴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연우는 작게 웅얼거렸다.
“했어요, 많이. ……지금도 해요.”
그 말에 키이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별로 도움되는 건 없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주문이고 뭐고 바로 일어나 당장 마지막 코스로 건너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아침에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덕분에 흥분이 그나마 조정은 되지만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연우가 이런 식으로 자꾸 자신을 자극하면 억제제가 의미 없게 될 것이다.
“너보다 체이스가 좋았으면 그 녀석과 결혼했을 거야, 네가 아니라.”
‘그에겐 베일리 씨가 있잖아요?’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미인이라고 계속 칭찬을 했지 않습니까.”
심통이 나서인지 저절로 말투가 딱딱해졌다. 그러자 키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난 지금 속상한데 웃어? 연우는 화를 낼 뻔했으나 다음 말을 듣자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너만큼 내 취향인 얼굴은 없어.”
“…….”
“정말이야.”
잔뜩 부었던 얼굴이 이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연우는 쉽게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해 버렸다.
“그런 말은 계속 했었죠.”
어차피 그래 봤자라는 생각으로 말하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처음부터 반했었거든.”
……어?
순간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했다. 연우는 놀란 얼굴로 다시 그를 쳐다봤다. 키이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지만 농담을 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저…….”
그 순간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려 다가와 섰다. 덕분에 질문을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연우는 어쩔 수 없이 말을 삼켜야 했다. 웨이터는 키이스의 주문을 받은 뒤 연우에게 주의를 돌렸다. 허탈한 기분으로 연우는 대답했다.
“같은 걸로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키이스가 주문한 와인까지 포함해 메뉴를 확인한 그는 뒤이어 알러지 여부를 묻고 물 주문까지 받은 후 메뉴북을 정리해 자리를 떠났다.
“하려던 얘기가 뭐야?”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마지막으로 했던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연우는 황급히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만약에 기회가 됐다면 체이스 밀러 쪽도 고려하지 않았을까요?”
“전혀.”
대답은 즉시 나왔다.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키이스가 말했다.
“내가 널 두고 그 개망나니를 선택할 일은 결코 없어.”
“개망나니가 아니라면……?”
“연우, 솔직히 말해 봐. 그냥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선택한다는 말이 듣고 싶은 것뿐이지?”
키이스가 다 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다른 때라면 짜증을 내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은 연우가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정곡을 찔린 데다 키이스의 웃는 얼굴을 보자 연우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저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반응에 키이스는 생각했다.
과연 이 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래쪽이 문득문득 뜨거워졌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연우를 차로 끌고 가 덮쳤을 것이다. 아니면 화장실에서 그대로 안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페로몬을 억제해 주는 약이 아니라 짐승을 억제해 주는 약인 건가.
하지만 머릿속의 짐승은 억제할 수 없어서, 키이스는 식사를 하는 내내 연우의 옷을 찢고 테이블에 쓰러뜨려 펑펑 우는 그의 안에 난폭하게 쑤셔 박는 상상만 수도 없이 반복했다.
* * *
평소보다 긴 식사 시간을 끝낸 뒤 둘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별다른 지시 없이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연우는 내심 궁금해졌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어?”
“네? 아, 네. 아주.”
왠지 키이스가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하고 문득 불안해졌을 때, 갑자기 그가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는 네가 취해서 잠들어 버렸었어.”
“아…….”
연우는 무안해져 목뒤를 문질렀다.
“제가 취하면 자는 버릇이 있어서…….”
“자면서 계속 차창에 머리를 부딪치길래 내 쪽으로 끌어당겼더니 무릎 위로 쓰러져 버리더군.”
“……!”
목을 붙잡은 채로 연우는 멈춰 버렸다. 눈을 크게 뜨고 굳어진 그의 반응에 키이스는 재밌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완전히 취해서 정신을 못 차렸지. 전혀 깨지 않고 자길래 내가…….”
말을 하던 키이스는 멈칫했다. 연우가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연우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습니까? 설마 무슨 큰일이라도…… 호, 혹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연우의 머릿속에 음란 요정이 파닥거렸다. 거기서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던 건 아니겠지.
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한꺼번에 떠올렸을 때, 키이스가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아냐.”
“…….”
“넌 아무것도 안 했어. ……한 건 나야.”
괘씸한 음란 요정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연우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키이스는 얘기를 끝내 버렸다.
“재미없군, 그만하지.”
“……네.”
연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 차라리 모르는 쪽이 낫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질 테니까. 당연히 잠겨 있겠지만.
후, 하고 숨을 뱉은 연우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 보려 화제를 돌려 물었다.
“저, 다음은 어디입니까?”
사이를 두고 키이스가 대답했다.
“호텔이야.”
“네?”
연우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 * *
정말 호텔이네.
차에서 내린 연우는 어리둥절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기서 쉬고 가자는 건 아니겠지……?
나가라, 이 발칙한 음란 요정!
몰래 뺨을 찰싹 때렸을 때, 키이스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연우.”
“네!”
급히 대답하고 몸을 돌린 연우는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기까지 기다리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기억해?”
“어…….”
잠시 어리둥절했던 연우는 홀에 들어선 순간 아, 하고 깨달았다. 키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네가 이건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어.”
“네…… 당연히.”
연우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길 잊을 수 있을까. 눈앞에서 키이스가 괴한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는 걸 봤었는데.
“연우.”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이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그제야 연우는 자신이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위로하려는 듯이 팔을 뻗은 키이스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키이스의 품에 폭 안기는 순간 연우의 심장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황해 움칠하자 키이스가 말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괜찮아.”
키이스가 오해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실을 털어놔야 할 것 같아 말할 수 없었다. 연우는 그저 작게 네, 하고만 중얼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피트먼 씨.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넓은 실내에는 손님이라고는 오직 키이스와 연우뿐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까다로운 유명 배우의 비위를 거스를지 몰라 그 날 하루 호텔의 카페를 전부 빌렸던 걸 떠올린 연우는 문득 의아해졌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는 곳이었나?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이니 그럴 수도, 하고 나름대로 납득했을 때, 직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곳이 예전에 키이스가 앉았던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이어 직원이 메뉴북을 건네주고 자리를 떠났다. 연우는 책장을 펴 보고 슬쩍 키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주문을 해야 하나? 비서가 없으니 내가 하는 게 맞겠지?
“저, 뭘 주문할까요?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로 할까요? 아니면…….”
“차가 좋겠어. 네가 블렌딩해서.”
블렌딩?
당연한 듯이 나온 대답에 연우는 책장을 뒤적거리다 아, 하고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찻잎을 배합할 수 있는 서비스를 확인한 후 그는 잠시 고민하다 몇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저도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직원이 메뉴북을 가지고 돌아가자, 키이스가 엷은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저…….”
내가 실수라도 했나? 내심 걱정이 됐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도 넌 나와 같은 걸로 주문을 했었지.”
“아…….”
그제야 깨달은 연우는 어깨의 긴장을 풀고 대신 마주 웃어 보였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아니.”
키이스가 대답했다.
“그냥 기억에 남은 것뿐이야.”
그렇겠지.
괜히 설레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차와 함께 나온 쿠키를 먹으며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하다 일어섰다.
다음으로 키이스가 연우를 데리고 간 곳은 수족관이었다. 역시 이곳도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스펜스와 처음으로 외출한 곳이야.”
고요한 복도를 걸어가며 키이스가 말했다.
“스펜스는 여기를 제일 좋아해. 요즘도 가끔 수족관에 가자고 조르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규모의 거대한 수족관은 건물 아래로 투명한 터널을 만들어 깊은 물 속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덕분에 바다는 생각보다 더 멀리, 깊은 곳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한 무리의 가오리 떼가 물속을 유영하며 스쳐 가는가 싶더니 거대한 상어가 천천히 몸을 흔들며 지나갔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닷물에 흔들리는 해초류가 길게 그를 향해 올라와 있었다. 곧이어 해초 사이로 머리를 내민 오징어가 힘차게 바닷속을 헤엄쳐 달아났다. 거대하고 낯선 생태계를 눈앞에 두고 연우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꼈다.
때마침 떼를 지어 몰려다니던 물고기들이 거대한 호를 그리며 다가왔다. 뜻밖의 장관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키이스가 말했다.
“스펜스도 너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
“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물고기를 아주 좋아하거든.”
“아아…….”
알겠다는 듯이 감탄사를 흘린 연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물고기 떼가 회전을 하며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깜짝 놀란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했다.
“구애 활동을 하는 거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구애요?”
자신도 모르게 묻자 키이스가 그래, 하고 설명했다.
“짝짓기를 하려고 암컷을 유혹하는 거지. 저렇게 많은 수가 한꺼번에 산란을 하면 장관이겠군.”
다큐멘터리 채널의 성우처럼 그의 음성은 극히 사무적이었으나 연우에게는 더없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물고기도 짝짓기를 하는데, 난…….
불현듯 연우는 키이스가 자신을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물론 둘 다 알몸이었다. 저 물고기들처럼. 고개를 들면 그는 나를 내려다본다. 떨리는 숨결이 마주치고, 키이스가 입술을 연다.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연우.>
“연우.”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눈을 번쩍 뜨자 키이스가 의아해하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연우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왜, 왜 그러시죠?”
머릿속으로 한 상상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의 그런 반응을 오해했다.
“그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는데…… 너도 어지간히 물고기를 좋아하는군, 역시 스펜스는 나보다 널 더 많이 닮았어.”
잠깐의 사이를 두고 연우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건 안 돼요.”
“뭐가?”
키이스의 표정이 이내 의아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연우는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저도 단점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게 좀 심각해서.”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리자 뜻밖에도 키이스가 아, 하고 납득을 해 버렸다.
“그건 그렇지. 곤란한 건 사실이야.”
“어…….”
연우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알았지? 하긴, 기억상실에 걸린 건 나뿐이니 키이스는 잘 알겠지, 내 음란함을.
“네가 자각하고 있는 줄 몰랐는데. 그럼 내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군.”
한술 더 떠서 키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말한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지.”
“……네.”
연우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 달아나고 싶어졌다.
“……죄송합니다.”
간신히 사과하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다만 스펜스는 그렇게 키우면 안 돼. 앞으로 잘 가르치자고, 알겠지?”
“네.”
연우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나처럼 음란한 아이로 자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절대로.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우를 내려다보며 키이스는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자신은 마구 간이고 쓸개고 내줘도 자식이 그러는 건 싫을 수 있지.
……본인부터 챙기면 안 되는 건가.
후, 하는 키이스의 한숨 소리를 들은 연우가 움칠했다. 더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연우와 맥없이 물고기만 보고 있는 키이스는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결론은 같았다.
연우가 문제야.
난 정말 문제야.
하고.
* * *
밖으로 나오자 제법 시간이 늦었다. 이제 끝인가, 했지만 아직 남은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연우는 결국 묻고 말았다.
“저,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뭔가요?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겁니까?”
키이스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으로 대답은 이미 들은 듯했다.
“있어, 물론.”
“그럼…….”
뭔지 물으려는데, 키이스가 먼저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기다려.”
거기까지였다. 키이스는 당장 말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연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그래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품은 채 연우는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
*
차가 향한 곳은 웬 저택이었다. 도로를 한참 달려 외진 길을 따라 들어가 한가운데 위치한 저택은 지금 키이스와 살고 있는 저택보다 두 배는 컸다.
차에서 내려 저택의 규모를 보고 놀란 연우는 안으로 들어가서 실내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줄줄이 매달린 홀은 저택의 규모만큼이나 넓었고, 복도에는 화려한 무늬의 대리석 기둥이 열을 지어 늘어섰다. 복도 양쪽에는 섬세하게 깎아 낸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위로 세워진 유리 촛대가 샹들리에에서 빛나는 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주변이 대낮처럼 환했다. 홀의 양 끝에 위치한 계단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웅장한 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바닥부터 이어진 난간은 일정하지 않은 패턴으로 어그러져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계단이 끝나는 위치에는 역시 유리 조각품이 올려져 있었다.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본 연우가 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키이스가 말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어…… 글쎄요, 너무 커서…….”
연우는 당황해 말을 더듬다 물었다.
“이 저택은 뭡니까? 왜 여길 온 건지, 잘.”
“여기에 트리를 놓을 거야.”
키이스가 홀의 한가운데를 흘긋 보며 말했다. 덩달아 시선을 향한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전엔 여기에 다른 저택이 있었어. 너도 와 본 적이 있지.”
“제가요?”
“그래.”
그렇게 말한 키이스가 먼저 몸을 돌렸다. 뒤따라간 연우의 앞에서 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2층에서 내린 키이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별다른 말 없이 그를 쫓아갔다.
복도 끝까지 다다른 그는 닫힌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고 선뜻 밖으로 향했다. 서늘한 공기가 저택 안으로 밀려왔다. 키이스의 뒤를 따라 발코니로 나간 연우는 잠깐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키이스가 곧바로 재킷을 벗었다.
“괘, 괜찮습니다.”
“입어. 난 감기 같은 건 걸리지 않지만 넌 잘 걸리잖아.”
키이스는 사양하는 것을 무시하고 재킷을 어깨에 걸쳐 줬다. 연우는 키이스의 재킷에 폭 감싸여 작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키이스가 입고 있던 재킷은 그의 온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그의 체취를 맡으려 깊이 숨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연우.”
“네, 네?”
부르는 소리에 또다시 망상에 빠질 뻔했던 연우는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키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뭔가 데자뷔가 느껴졌다. 그저 착각인 걸까, 아니면 정말 이런 일이 있었던 걸까?
구분을 하지 못하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
그때까지 은근히 설레던 연우의 심장이 쿵, 하고 갑자기 내려앉았다.
“……할 얘기요?”
지금껏 달아올랐던 박동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우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거창하게 하루를 보낸 걸까. 당연히 시시한 얘기가 아니겠지.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토록 불길한 서두는 다시 없을 테니까.
“연우.”
“네, 네?”
자신도 모르게 더듬고 만 연우에게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나쁜 얘기는 아냐.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커졌다. 관점의 차이라니 무슨 말일까?
문득 서늘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허한 침묵이 왠지 더 서늘하게 느껴졌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여긴 1년 전에 사들였어. 네게 선물하려고 한 건데……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연우는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발코니 주변을 감싸듯이 자란 나무가 한 차례 바람에 흔들렸다.
“부지를 사들이고 저택은 밀어 버렸지. 그래서 예전하고는 달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는 게 나았을 수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연우는 자꾸만 그가 말을 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듣고 있는데, 잠시 멈췄던 키이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난 예전에 널 해고하려고 한 적이 있어.”
“저를요? 어째서?”
죽도록 일했는데!
갑작스러운 배신감에 연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와 함께 처음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키이스가 그를 죽도록 괴롭혔던 과거가 떠올랐다. 수시로 야근을 하고, 새벽에 돌아가는 건 다반사에, 주말까지 반납해서 일을 했었지. 그러고도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고 네가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듯이 무리한 요구를 하기 일쑤였다.
그게 다 나한테 알아서 그만두라는 사인이었다니.
충격을 받은 듯한 연우의 반응을 보며 키이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신포도였으니까.”
“신포도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연우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키이스는 그래,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왜, 왜…… 제가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도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었고, 제 위로 경력자들이 다 나갔기 때문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상대도 없었어요. 피, 아니, 당신은 저한테 제대로 뭘 알려 준 적도 없잖아요? 무조건 제가 스스로 찾아내고 알아내서 처리했지. 저로서는 할 수 있는 이상으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 해고하려고 했었다니…….”
말을 할수록 억울해졌다. 열변을 토하는 연우였지만 키이스는 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했잖아, 신포도였다고.”
“대체 그게 뭡니까? 극알파들만 먹는 암브로시아입니까?”
한껏 빈정거린 연우에게 키이스는 오히려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게 아냐.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거라고, 알겠어?”
“전혀 모르겠는데요?”
계속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고 있었다. 연우가 반항하듯 옆으로 노려보자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너와 자고 싶었단 얘기야, 처음부터.”
“…….”
터무니없을 정도로 담담하게 키이스는 연우를 향해 폭탄선언을 했다. 연우는 그만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