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0화 (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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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 세포들이 미쳐 날뛰다 못해 모두 정지해 버린 것이 눈으로 훤히 보일 정도였다.

“난 미치지 않았어, 연우.”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럽게 말했다. 연우는 하지만, 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제 얼굴이 마음에 들었단 얘기죠? 처음부터.”

연우의 불신을 깨기란 쉽지 않았다. 키이스는 이것이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순순히 인정했다.

“완벽한 취향의 얼굴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

역시, 하고 생각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굴만으로 잘 수는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난 남자와는 절대 자지 않는다는 주의였고. 실제로 너 외에는 잔 적이 없어, 평생.”

“여자와는 그렇게 많이 잤지만 말이죠.”

“그래. 난 닳아빠진 남자지.”

연우의 비꼬는 말을 가볍게 넘긴 키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져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취향이긴 한데 남자인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해고를 하려다가, 네가 너무 필사적이라서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고 생각했어. 다른 녀석들보다는 버티지만 그래 봤자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잘 버틴 거군요.”

“너무나도.”

연우는 여기서 자신이 화를 내야 할지 뿌듯해해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저렇게 태연하게 일부러 괴롭힌 거라고 자백할 줄이야. 잠자코 입을 다물어 버린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했다.

“그날, 난 네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음성이 기억을 더듬듯이 가라앉았다.

“너에게 시계를 구해 오라고 했지만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 사실 기억도 하지 않았어,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넌 나가떨어질 테니까.”

“…….”

“그런데 네가 나타났어.”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날의 연우를 겹쳐 보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상기된 뺨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었지.”

<피트먼 씨.>

그날의 연우가 숨을 헐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가늘고 긴 목으로 땀이 흐르고, 숨을 쉴 때마다 여린 어깨가 들썩거렸다.

<찾으셨던 시계입니다.>

<시간 내에 가져왔습니다.>

“……라고.”

연우는 그저 크게 뜬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넌 기억나지 않겠지.”

“네…… 아뇨…… 그게, 아니, 그건.”

연우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기억 상실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억에 없었다. 키이스가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나 명령을 내린 게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그때마다 기를 쓰고 어떻게든 해결을 했던 것밖에 기억에 없는데, 시계를 구해 오라고 했었다고? 못 구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키이스가 그를 골탕 먹인 지시 중 하나라는 것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연우의 물음에 키이스는 입을 열었다. 잠깐의 심호흡을 사이에 두고 그는 마치 한 번에 쏟아 내듯이 고백했다.

“난 그때 너에게 반했어.”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우는 그저 얼빠진 되물음을 했을 뿐이었다. 키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별다른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그 전에는 그저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만 생각했어. 그냥 한번 자 버릴까, 얼굴 같은 건 어차피 질려 버리니까, 그렇게도 생각했었지. 처음 봤을 때 네가 여자였으면 바로 침대로 데려갔을 거야.”

언젠가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네가 여자였으면 잤을 거야, 언제 그랬지?

잠시 기억을 더듬는데, 키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엔 네가 남자라는 것만 생각했어. 나와 같은 게 달린 남자 따위는 안고 싶지 않다고. 너한테 이렇게 흔들리는 건 오로지 네 페로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어쨌든 오메가의 페로몬에는 본능적으로 끌리게 마련이니까.”

잠시 할 말이 없었던 연우는 작게 지적했다.

“당신과 같진 않아요.”

“내가 좀 더 크긴 해.”

키이스가 그답지 않게 농담을 했다. 연우는 그가 최대한 분위기를 가볍게 해 보려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말은 그냥 목구멍으로 삼켜 버렸다.

좀 더 큰 게 아니던데. 당신하고 비슷한 크기의 남자가 세상에 있긴 할까요?

“아무튼.”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듯 키이스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부정했지만 넌 언제나 나에게 최선을 다했지. 항상 필사적이었어.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이 쓰였어. 어떻게든 내 마음을 누르려 했는데, 그때 네가…….”

후, 하고 한숨을 사이에 두고 그는 입을 열었다.

“울었어, 내가 다친 걸 보고.”

“…….”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키스했지. 그리고 또 네 탓을 해 버렸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연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이스는 농담처럼 그를 타박했다.

“사실이잖아, 네가 항상 내 앞에서 얼씬거리면서 나를 내내 유혹했어. 몇 년이나 날 고문했다고.”

“……?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 비서였으니까요.”

연우의 지적에 키이스는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난 네가 유혹하는 걸로 보였어.”

연우는 어이가 없어 허, 하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 모습에 키이스가 또다시 웃었다. 짧은 웃음소리를 냈던 그는 곧 진지해졌다.

“사랑해, 연우.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어.”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어.>

어……?

불현듯 들린 음성에 연우는 멈칫했다. 그 말을 한 건 언제야? 오래전부터? 언제부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연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키스하는 그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그리고.

“……!”

순간 귀에 뜨끔한 통증이 느껴져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갔다. 뭐지? 방금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우?”

키이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음성에 정신이 든 연우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 아뇨. 아무것도.”

급히 대답하자 키이스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키이스가 손을 들어 연우의 뺨에 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마.”

그가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도 연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연우는 자신이 키스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전함을 느꼈을 때, 키이스가 그의 뺨에서 손을 뗐다.

“그럼, 갈까?”

선뜻 물러난 그가 몸을 돌렸다. 뒷모습을 본 연우가 뒤늦게 물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그러니까…… 집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

키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곤할 테니 가서 쉬어야지.”

팔을 뻗어 연우의 어깨를 감싼 키이스가 당연한 듯이 그를 안아 들었다. 연우는 깜짝 놀랐지만 이번에는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 연우의 반응에 키이스 또한 멈칫했지만 금세 미소를 짓더니 평소처럼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우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안겨 이동하며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키이스의 달콤한 향기가 자신을 취하게 만들 거라고 기대하며.

……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연우는 무심코 도로 눈을 떴다. 다시 숨을 들이마셨지만 마찬가지였다. 순간 그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슬그머니 키이스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연우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급히 시선을 내려 감정을 감춘 연우는 두근거리는 맥박을 느끼며 생각을 거듭했다.

곧 그들이 저택을 빠져나오고, 기다리던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뜻 열린 차의 문을 통해 연우를 좌석에 내려놓은 키이스가 잠시 휘태커의 보고를 들었다. 키이스가 뒤따라 차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연우는 심호흡을 했지만 차 안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향기뿐이었다.

왜.

곧 키이스가 차에 올라탔다. 뒤따라 차의 문이 닫히고, 둘은 밀폐된 공간 안에 남게 됐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연우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왜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지?

키이스가 일부러 페로몬을 줄인 걸까 생각했던 연우는 혼란에 빠졌다. 키이스에게서 페로몬 향기를 맡은 게 언제였지?

항상 은은하게 주변을 떠돌던 단내가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왜 향기가 나지 않아? 페로몬이 쌓이면 위험할 텐데. 내가 잘못된 건가? 아냐, 사고가 난 후에도 한동안 향기를 느꼈었는데.

대체 왜.

그 순간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연우는 옆에서 키이스가 휴대 전화를 받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전화를 건 상대는 엠마인 듯했다. 잠시 듣고 있던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지금?”

건너편에서 뭔가를 말하는 동안 키이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욕설을 내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지금 가지.”

전화를 끊고, 키이스가 연우를 돌아보았다.

“회사에 잠깐 들러야겠어. 지금 바로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는군. 먼저 집에 가겠어? 데려다줄까?”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키이스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기사에게 회사로 가도록 지시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연우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피트먼 씨, 연우!”

먼저 키이스의 사무실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엠마는 함께 등장한 둘의 모습에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사고 소식은 들었는데, 크게 다치진 않은 거 같아 다행이네요.”

연우도 마주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엠마는 바로 키이스에게 보고를 했고, 잠시 진지한 얘기가 오고 갔다.

“……일단 지금 회의실에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세한 상황 보고는 그쪽에서 다시 할 겁니다.”

“대체 그런 것도 처리를 못 하고 뭘 하는 거야?”

키이스는 짜증스러운 듯 머리칼을 쓸어넘기더니 곧 돌아섰다. 뒤따라 나가려던 엠마가 물었다.

“연우는 여기서 기다릴 건가요?”

멀뚱히 서 있던 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있겠습니다.”

“그래요…….”

엠마가 키이스가 먼저 간 복도 쪽을 흘긋 보더니 다시 연우를 돌아보았다

“피트먼 씨의 책상 위에 서류를 놓아 둔 게 있는데, 휘태커 씨에게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하는 걸 깜박했네요. 미안하지만 연락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부탁했다는 건 비밀로 해 줘요.”

미안한 듯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연우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런 간단한 일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안은 안 보는 게 좋아요.”

슬쩍 덧붙인 그녀가 급히 문을 닫고 복도를 달려갔다. 순식간에 발소리가 멀어지고, 연우는 정적 속에 남겨졌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그는 몸을 돌려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휘태커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책상으로 향한 연우는 수화기를 들었다가 그 위에 놓인 얇은 서류철을 발견했다.

이건가?

별생각 없이 서류철을 집어 든 연우는 휘태커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며 서류철의 앞뒤를 돌려보았다.

<안은 안 보는 게 좋아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마치 꼭 보라는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휘태커가 전화를 받았다. 엠마의 말을 전해 주고 통화를 끝낸 뒤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열어 봐도 될까? 대체 어떤 서류인데 그런 말을 한 걸까? 엠마가 나에게 해가 될 말을 할 리는 없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휘태커가 올라오기까지는 길어야 15분 정도가 다였다. 연우는 망설이며 서류철의 커버를 잡았다가 놓고 다시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키이스가 지시한 내용이 분명했다. 자신도 비서로 일하던 시절 회사 일은 물론이고 키이스의 개인적인 지시도 수없이 많이 처리했다.

그런데 나에게 비밀로 할 만한 일이라면 대체 뭘까.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연우는 조심스럽게 커버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서류철 안의 내용을 보고 말았다.

……어?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서류철을 닫았다 열기를 반복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곳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보고서’라는 제목과 함께.

* * *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엠마는 슬쩍 책상 위를 보더니 모른 척 평소처럼 키이스에게 인사를 하고 연우와 악수를 나눴다.

“잘 가요, 연우.”

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안쓰러워하는 감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연우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뭐라 해도 엠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연우에게 상황을 알려 주려 한 것이다. 연우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쨌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분명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키이스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대학 시절의 일을 왜 굳이 알아내려 했을까.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던 기억밖에 없는 연우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실상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도 별것이 없었다. 키이스가 하루 종일 자신과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엔 사랑한다는 고백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그와 내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던 참인데.

“피트먼 씨.”

연우의 뒤를 이어 키이스가 차에 올라타고 문을 닫기 전, 휘태커가 키이스에게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연우가 이미 보았던 그 서류철이었다. 키이스는 연우를 옆자리에 두고 당당하게 서류철을 열어 안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만약 연우가 그 내용을 몰랐다면 아직도 일거리가 남았다니, 하고 걱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되는 서류를 필요 이상으로 오래 읽은 그가 서류철을 덮었다. 그리고 둘은 돌아가는 차에서 내내 말이 없었다. 덕분에 차 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연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배우자의 뒷조사를 하는 건 어떤 경우일까. 뭔가 의심이 생기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경우겠지. 그럼 그건 대체 뭘까. 그토록 솔직한 고백을 들었는데도 기쁨은 너무나 찰나였다. 행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지금은 불안만 가득하지 않은가. 대체 왜.

아.

갑자기 연우의 머릿속으로 한 단어가 스쳐 갔다.

이혼.

다급하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들은 뭐야? 키이스는 나와의 추억이 있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다 마지막엔 고백까지 했잖아.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설마 그게 전부 다 거짓이었나.

키이스의 고백에 달아올랐던 심장이 삽시간에 얼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해도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결국 지쳐 버린 걸까? 이혼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문제가 생긴 건 나니까. 그렇다면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굳이 날 유혹할 필요가 없는 거지. 내가 발정이라도 나서 쓸데없이 매달리면 곤란하니까. 어차피 상대는 많은데 굳이 나와 잘 필요도 없잖아.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키이스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나한테 얻을 것도 없을 텐데. 키이스가 나한테 가져갈 만한 게 뭐가 있다고? 내가 가진 거라곤…….

그 순간 연우는 깨달았다.

스펜스.

설마, 아이의 양육권 때문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됐다. 스펜서를 아끼는 그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양육권을 갖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거짓으로 다정한 척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지.

갑자기 연우는 울고 싶어졌다.

* * *

서서히 차가 속도를 줄였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연우가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저택이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뒤 저택 앞에 차가 멈추고, 뒤이어 휘태커가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연우.”

키이스가 당연한 듯이 두 팔을 내밀었다. 연우는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자신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향기도 없었다.

주저하며 뻗은 손을 잡아당겨 품에 안은 키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당연한 듯이 연우를 팔에 안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연우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연우를 방까지 안고 온 키이스는 그를 침대 위에 눕혀 주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키지 않는 시선을 들어 올리자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이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아?”

“……?”

의아해하는 연우의 이마에 키이스가 손을 얹었다.

“안색이 아주 안 좋은데. 열은 없는 걸 보니 감기는 아니고.”

왜 이렇게 다정한 거야, 나와 이혼할 생각이면서.

연우는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키이스가 고개를 기울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 입술이 아니라는 사실이 또다시 연우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거부했던 게 자신이므로,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가 말했다.

“다음에는, 스펜스도 함께 휴가를 가자. ……예전처럼.”

예전처럼.

문득 연우는 떠올렸다.

내가 그걸 기억할 수 있을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잊어버리고, 추억도 전부 사라졌다. 이대로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싫어, 그는 생각했다. 아이와의 기억은 너무나 소중했다. 하나하나 전부 다 되돌려 받고 싶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더없는 불행이 될 것이다.

키이스는?

불현듯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눈을 깜박이며 머뭇거렸다.

키이스와의 추억은?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계속되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키이스는.

연우는 어렵게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한동안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연우, 궁금한 게 있는데.”

잠자코 기다리자 그는 침댓가에 앉아 연우를 바라보았다. 입을 연 키이스는 조금 뒤에 소리를 냈다.

“……혹시 좋아하던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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