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2화 (6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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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서 연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키이스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귀로 들었는데 뇌로 전달이 되질 않는다. 연우의 말처럼 정말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내가.”

한참 만에 그는 입을 열었다.

“나라고?”

“그래!”

멍하니 중얼거린 키이스에게 연우가 다시 소리쳤다. 그동안 쌓인 걸 쏟아 내듯 그는 울고 또 울었다. 키이스는 뒤늦게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널, 오메가로 만들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럼, 왜 지금까지…….”

“당신이 그때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떨었잖아.”

연우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라는 걸 알면 날 어떻게 생각했겠어? 안 그래도 남자라고 상대도 해 주지 않았는데. 간신히,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물었다 놓은 연우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나를 좋아해 줬는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연우를 키이스는 그저 보기만 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연우가 또다시 그를 끝도 없는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연우.”

간신히 이름을 부른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그만 울어. ……제발, 울지 말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연우를 끌어안았다. 연우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 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지? 왜 연우가 그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까.

이 멍청한, 비슷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하다니.

“연우, 연우.”

그는 속이 타 연거푸 이름을 불러 댔다.

“……미안해, 전부 내 탓이야. 연우, 그만 울라니까, 제발.”

계속해서 달랬지만 연우의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키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과하며 그를 안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한참 만에 겨우 울음이 잦아든 연우가 숨을 몰아쉬며 키이스를 밀어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혼하고 싶으면 해. 하지만 스펜스는 양보 못 해, 내가 키울 거야. 양육비도 위자료도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까 아이만 데려가게 해 줘. 당신이 만나는 건 언제든지 허락할게.”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키이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혼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널 변이시키고 지금까지 몰랐다고 해서 이혼하자는 거야? 연우, 이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혼하고 싶어 하는 건 당신이잖아!”

“누가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

키이스가 더 이상 참지 않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럼 내가 오늘 한 짓은 다 뭐란 말이야? 내가 네 앞에서 광대 짓이라도 한 건가? 말해 봐, 이혼하고 싶은데 널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그 꼴불견을 보였단 말이야? 내가?”

연우는 순간 움칠했으나 물러나지 않고 쏘아붙였다.

“양육권을 가져가려고…… 당신은 스펜스를 포기하지 않을 거잖아.”

“당연하지. 난 너도, 스펜스도 모두 절대 포기하지 않아!”

키이스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게다가 넌, 네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거야? 기억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몸도 안 좋은데?”

“당신은 다 가졌잖아!”

연우는 다시 눈물을 그렁거렸다.

“나한테 스펜스만 달라고 하는 건데 왜 안 된다는 거야?”

“하아.”

키이스도 급기야 감정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너도 같이 떠날 거잖아.”

“…….”

“연우, 너와 스펜스가 없는데 내가 뭘 가졌다는 거야? 말해 봐, 내가 가진 게 뭐지?”

연우는 잠시 코를 훌쩍이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돈도 많고, 집도 많고…… 섬도 있잖아. 비행기에…….”

“연우.”

키이스는 조용히 물었다.

“스펜스와 나를 포기하고 그걸 전부 준다고 하면 넌 그렇게 하겠어?”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얼굴을 본 키이스가 하긴, 하고 씁쓸하게 말했다.

“난 포기할 수 있다는 거군. 이혼은 해도 스펜스는 데려가겠다는 걸 보면.”

순간 흔들렸던 연우의 눈동자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연우는 다시 시선을 떨구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를 모르겠어.”

“간단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야.”

키이스는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자 상처받은 듯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너와 결혼한 건,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었어.”

“…….”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계속, 변함없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연우의 반응에 키이스가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던 손을 내렸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키이스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나는.”

연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는 걸 원하지 않아.”

“어째서?”

키이스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왜냐면, 하고 연우는 속삭였다.

“그냥, 사랑만 하고 싶었어.”

마침내 그는 고백했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어. 당신이 준 아픈 기억 같은 건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눈물이 그렁거리는 연우를 보며 키이스가 물었다.

“내가 너한테, 상처만 줬어?”

“……기억나지 않아.”

“나쁜 기억 때문에 포기하면 좋은 기억도 돌아오지 않게 될 텐데?”

연우가 침묵하자 키이스는 솔직히 말하면, 하고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나에 대한 나쁜 기억은 모두 잊어 주길 바라. 하지만 너와 나, 스펜스가 함께한 행복한 기억까지 사라져 버리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아.”

“…….”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도 좋으니까.”

연우는 망설이는 얼굴로 키이스를 바라봤다. 번민이 가득한 그를 바라보며 키이스는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은 듯 연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왜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는 거야?”

키이스가 멈칫했다. 미처 이건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그 반응을 본 연우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당신한테서 페로몬 향기가 나지 않잖아.”

연우가 계속해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그런 게 아냐.”

“그럼?”

하아, 키이스가 한숨을 사이에 두고 대답했다.

“억제제를 먹었으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눈만 깜박이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설명했다.

“폴로 경기가 끝나고 네가 쓰러졌던 날, 네 상태가 불안정하고 자극을 줄 수 있으니 페로몬을 없애는 게 좋다고 스튜어드가 말했어. 무의식적으로 페로몬을 흘릴 가능성도 크니 아예 약을 먹기로 한 거고…….”

“억제제를 먹었다고? 계속?”

“그래. 그날부터 계속, 오늘 아침까지.”

손목의 시계를 흘긋 본 키이스가 중얼거렸다.

“이제 어제 아침이군.”

그는 다시 연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더 할 얘기는 없냐는 듯이. 연우는 당황해 입만 벙긋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억제제라니, 상상조차 못 했던 얘기였다. 하지만 키이스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스튜어드에게 확인하면 바로 들통 날 게 분명한데 그건 머리가 모자란 바보나 하는 짓이고, 키이스는 결코 그런 바보가 아니었다.

“키스는 왜 안 해……?”

간신히 찾아낸 질문에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날 밀어냈으니까.”

“……아.”

연우는 자신이 변명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했다.

“항상 키스를 하고 나면 날 원망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미안해.”

“결국 내 탓이지.”

키이스는 무심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 하고 키이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오해는 모두 풀린 건가? 이제 날 믿을 수 있겠어?”

“…….”

“연우.”

다시 이어진 침묵에 키이스가 다소 초조해하는 음성으로 재촉했다. 연우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또다시 한숨을 내쉴 뻔했던 키이스는 숨을 참았다가 뱉으며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아직 남은 의혹이 있어? 아니면 내가 또 뭘 잘못했나?”

연우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탓이 아니라…… 내 탓이야. 알고 있잖아, 내가 얼마나…….”

그는 고개를 떨구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스펜스 때문이야.”

“스펜스라니, 스펜스가 왜?”

여전히 키이스는 납득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하고 말을 하려던 연우는 깨달았다. 스펜서에게서 떠나야 하는 건 키이스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하자 키이스의 미간이 한층 더 강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스펜스 옆에 있으면 안 된다니, 왜?”

연우는 어렵게 대답했다.

“당신도 스펜서가 날 닮으면 곤란하다고 했잖아.”

허, 하고 탁 숨이 막힌 소리를 냈던 키이스가 곧바로 내뱉었다.

“그래,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니까!”

“내가 음란하니까!”

그만 둘의 소리가 겹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뭐라고?”

“뭐라고 했어?”

이번에도 동시에 내뱉은 둘은 놀란 눈을 깜박였다. 연우가 주저하는 사이 키이스가 먼저 말했다.

“너도 봤잖아, 베일리의 아이들한테 마구 휘둘리는 스펜스를. 그렇게 순진하게 아무나 믿고 휩쓸리다가 험한 꼴을 당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굴 닮았나 하고 봤더니.”

‘너였어’라고 말하듯이 키이스가 뚫어져라 연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연우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확 달아올랐다. 키이스는 이번엔 네 차례라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연우는 자신이 키이스의 말을 오해해서 그만 곤란한 상황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저기, 그러니까.”

계속해서 말을 더듬고 우물쭈물하던 연우가 마침내 고백했다.

“난, 파렴치해.”

키이스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뭐가?”

연우는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결국 사과했다.

“미안해. ……내, 내가 당신 상대로 더러운 상상하고, 자위하고.”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키이스는 얼마나 기가 막혀 하며 나를 보고 있을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텐데.

속으로 열심히 빌었지만 연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말 없는 키이스의 시선을 받으며 쭈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랬어?”

너무나 조용한 음성에 연우는 오히려 불안해졌다. 내심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의 음성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라니…….”

연우의 음성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주저하며 올려다본 시야에, 키이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말했다.

“해 봐, 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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