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서 오세요, 피트먼 씨, 파트너분. 어서 오렴, 스펜스.”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의 원장은 한껏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원장실로 들어오기 전 휘태커에게 인형을 맡긴 스펜서는 제법 꿋꿋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원장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연우는 뜻밖에도 아이의 의젓한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원장실에 들어오기 직전 인형을 꼭 끌어안고 침울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했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견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 한편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나란히 소파에 앉은 키이스와 연우를 바라보며 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접수하신 서류는 전부 훑어보았어요. 사실 그런 건 모두 형식에 불과하죠.”
원생 수가 정해져 있는 이곳에 아이를 맡기고 싶어 하는 부모는 많았으나 그만큼 기준이 높고 조건 또한 까다로웠다. 서류를 준비하며 연우 또한 상당히 긴장했던 터라 원장의 말을 듣자 조금은 어깨의 힘이 풀어졌다.
“그럼, 입학엔 문제가 없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연우의 물음에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 빈자리도 있어서 바로 입학이 가능합니다. 정말 운이 좋으세요. 몇 년씩 기다려도 못 오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사실 연우는 스펜서를 벌써부터 떼어 놓고 싶지 않았지만 키이스가 더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혼자라면 분명 외로울 테니 친구를 사귀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하에 결심을 한 것이다.
유명한 사립 유치원의 경우는 아이를 갖자마자 신청서를 넣는 일이 다반사인데 원장의 말대로 고작 서너 달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무척 운이 좋았다. 들은 대로 시설도 훌륭하고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어 연우는 안도했다. 여기라면 스펜서가 별 탈 없이 잘 놀 것 같았다.
“이 뒤쪽은 재단의 초등학교와 통해 있어요. 이 유치원을 다녔던 아이들은 대부분 거길 다니죠.”
원장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희 재단의 특징은 어릴 때부터 각별한 교우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유치원에서 처음 만난 상대와 결혼을 하거나, 평생 친구가 되는 일들이 많아요. 사적으로는 물론 그 외에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거죠.”
원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어린 스펜서에게 인맥을 만들어 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좋은 친구를 만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대에 차 키이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만나는 친구가 있어?”
“……뭐, 친구라면 그런 거겠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처럼 사이를 두고 키이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곧 연우를 납득하게 만들었다.
“그레이슨과 이 유치원에서 알게 됐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남자의 어릴 적 모습도 상상하기 어려운데 그레이슨이라니. 물론 그 사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태어났을 때는 아기였을 거고.
연우는 이성적으로 생각했으나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심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느꼈을 때, 원장이 마치 연우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책임지고 아이를 안전하게 보살필 겁니다. 피트먼 씨도 이 유치원을 나오셨으니 여기가 얼마나 전통 있고 훌륭한 곳인지 잘 아시겠죠?”
그 말을 들은 연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키이스가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기억은 거의 안 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연우는 자신이 궁금해하는 건 유치원이 아니라 키이스의 어린 시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키이스의 어릴 적 사진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키이스는 어떤 아이였을까? 뭘 하고 놀았지? 다른 친구는 또 없었을까? 원장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눈치챈 듯 제안했다.
“피트먼 씨의 사진도 있는데, 보시겠어요?”
“정말요?”
뜻밖의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졌다. 민망해져 급히 입을 다문 연우에게 원장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벽을 장식한 책장에서 책자를 하나 꺼냈다.
“오늘 방문 일정을 확인하고 미리 찾아 두었지요.”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자랑스럽게 덧붙이며 페이지를 펼쳐 연우의 앞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펼쳐진 앨범을 확인한 순간 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하아, 하고 탄식과 같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진 속의 아이는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반바지와 구두를 신고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보는 소년의 앳된 얼굴은 지금의 키이스와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게 닮은 구석이 보였다. 발현 전이라 눈의 색깔은 푸른색이었지만 단정하게 넘긴 짙은 머리칼 아래의 서늘한 눈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기 때문일까, 연우는 소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자신도 모르게 옆을 보자 스펜서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몸을 기대고 있었다. 연우는 그를 끌어안아 무릎에 앉히고 사진을 보여 주었다.
“스펜스, 이 사람 누굴까?”
스펜서는 손가락을 물고 빨아들이다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연우는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 주고 미소를 지었다.
“파파야, 스펜스.”
“오아?”
스펜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연우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는 더없이 순하게 생겼는데 신기하게도 언뜻 키이스와 닮은 구석이 보였다. 이런 게 유전자의 힘이라는 걸까? 순간적으로 사랑스러움이 넘쳐흘러 연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팔 안에 감겨드는 작은 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각오를 떠올렸을 때, 키이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잠시 자신이 멍하게 있었다는 걸 깨닫고 연우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그냥. ……스펜스가 당신하고 많이 닮았구나, 하고.”
“나를? 설마, 너겠지.”
가차 없이 부정하는 키이스의 말에 연우는 동의를 구하듯 원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비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 다 골고루 닮았네요.”
물론 연우와 키이스 둘 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 없군, 누가 봐도 연우 그대로잖아.
키이스는 생각했으며.
예의상 저렇게 얘기하신 거겠지? 키이스와 이렇게나 닮았는데 말이야.
연우는 이렇게 수긍했다. 거기에 키이스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날 닮았으면 그렇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빼 줄 리가 없지.
그러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베일리의 아들놈이 여장을 하고 스펜서를 속이는 것에도 부아가 치미는데 거기다 스펜서가 가장 좋아하는 푸딩까지 빼앗아 갔다. 그것을 또 아무렇지 않게 내줬다고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귀여웠지만, 정말로 너무나 귀여웠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사랑스러운 스펜서를 귀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베일리의 그 파렴치한 아들에게는 조만간 잊지 못할 교훈을 새겨 주어야 할 것이다. 감히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아들을 농락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키이스?”
조심스러운 음성에 키이스는 정신이 들었다. 연우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험악한 표정을 지어 버린 걸 안 키이스는 아직 연우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스펜서를 안아 들었다. 키이스가 감정을 가라앉혀야 할 때면 이렇게 스펜서나 연우를 끌어안는다는 걸 아는 연우는 무릎 위가 허전해진 것을 모른 체하고 다시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역시나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키이스가 물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원장이 전화를 받는 사이 연우는 작게 소곤거렸다.
“이 사진 당신도 가지고 있어?”
“왜?”
키이스의 음성에 슬며시 웃음이 서렸다. 연우는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면서도 소신 있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혹시 없다고 하면 사진을 복사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 말을 들은 키이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전화를 받던 원장이 놀란 눈을 하고, 연우 또한 당황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가 아직 웃음기가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넌 나를 너무 좋아해.”
가늘게 접힌 긴 눈매를 보고 연우는 한껏 반항적인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럼 안 돼?”
안 되냐니, 키이스는 그 사실이 언제나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자신을 향해 눈을 치뜨면서도 한껏 달아올라 있는 연우의 얼굴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 말할 것도 없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여 키스하자 연우는 얼떨결에 당해 버렸다.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내준 입술을 부드럽게 빨고 핥았던 키이스는 원장에게 잠시 스펜서를 데리고 가 아이에게 원내를 안내해 달라고 할까, 짧은 순간 고민했다. 30분이면 다소 짧긴 해도 급하게 한 번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해.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건 10대나 하는 짓이야.
자신은 그 시기를 아주 오래전에 지나쳤다. 지금은 열기를 다스리며 기다릴 줄도 알 때가 되지 않았나. 간신히 그렇게 자신을 달래는 대신 연우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놓은 키이스는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면 스펜스를 바로 재우고 연우의 옷을 벗기자.
곧 그는 계획을 수정했다.
재우면서 벗겨도 되지 않을까?
“키이스.”
연우가 부르는 소리에 키이스는 흘긋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연우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기, 페로몬…….”
작게 사그라드는 말끝을 어쩌지 못하고 연우가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연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평소처럼 건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그를 돌아 버리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퍼지던 페로몬 향기가 일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연우의 숨결이 가빠지는 것을 보고 키이스는 재빨리 자신의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표식이 새겨진 탓에 그의 페로몬 향기는 오직 연우만이 맡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흥분한 연우의 모습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한테나 그런 장면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비록 상대가 환갑이 넘은 유치원 원장이라고 해도.
“통화가 길어져 죄송합니다.”
겨우 전화를 끝낸 원장이 자리로 돌아와 양해를 구했다. 키이스는 슬며시 다리를 꼬아 흥분한 자신을 감추며 스펜서에게 그 흉측한 것이 닿지 않도록 아이를 어깨 위로 올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목말을 탄 아이의 다리를 잡아 고정한 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대강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물음에 원장은 오, 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나머지는 차차 다니면서 아시게 될 테니 오늘은 이만 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연우가 작게 떨리는 음성으로 인사를 했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한 키이스는 혹시나 아이가 나가면서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재빨리 내려 품에 안아 들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휘태커가 그들을 보자마자 소중히 맡고 있던 상어 인형을 건네주고, 그걸 본 스펜서는 반색을 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고맙, 습니다.”
연우가 가르쳐 준 대로 잊지 않고 인사를 한 아이에게 휘태커 역시 드물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이어 나온 원장이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고, 그들은 준비된 차를 타고 유치원을 떠났다.
“후우.”
스펜서를 좌석에 내려놓은 키이스가 간신히 한숨을 돌린 연우에게 말했다.
“돌아가면 뭘 할지 생각해 봤어?”
“응.”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를 보고 키이스는 분명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확신했다.
“뭔데?”
아이 앞에서 그걸 말하는 건 부끄러울 테니 얼굴을 붉히며 당황할 게 분명하다. 키이스는 그 반응을 기대하며 짓궂게 물었다. 그런 키이스를 향해 연우는 두 눈을 반짝이며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 앨범을 찾아봐야지.”
“…….”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금세 아이에게 관심을 돌려 스펜서에게 키스하며 꼭 끌어안는 연우의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의외로 자신과 연우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