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3화 (64/77)

* * *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는 곯아떨어졌다. 쌔근거리며 잠든 스펜서의 옷을 갈아입힌 키이스가 아이를 침대에 눕히자 연우는 아이의 뺨에 키스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이스가 먼저 돌아서서 방을 나가고, 뒤를 따른 연우는 살며시 문을 닫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이스 역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우린 할 일이 또 있지?”

묘한 미소를 짓는 키이스와 복도에 마주 선 연우가 응, 고개를 끄덕였다.

“앨범을 찾아야지.”

이번엔 키이스의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마음이 통한 건 아니었다. 환하게 웃는 연우의 얼굴에 키이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여기, 전부 가져왔습니다.”

키이스의 지시에 따라 앨범을 모두 가져온 찰스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표지에 기간이 적혀 있습니다. 순서대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찰스.”

두 눈을 빛내며 감사의 말을 하는 연우에게 찰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연우가 아직 카트에 남아 있던 또 다른 앨범을 본 건 그때였다. 찰스는 그가 보는 앞에서 키이스의 것 옆에 예의 다른 앨범을 내려놓았다.

“이건 연우의 앨범입니다.”

“네?”

순간 연우는 깜짝 놀랐다. 결혼 당시 가족들이 자신의 남은 짐을 모두 보내 준 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앨범이라니, 지금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잘됐군. 항상 센스가 좋아, 찰스.”

기다렸다는 듯이 키이스가 집사를 칭찬하자 그가 선뜻 말했다.

“감사합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홍차나 케이크는 어떻습니까?”

“아, 전 밀크티를 부탁드려요.”

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찰스가 키이스에게로 시선을 향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난 홍차로. 케이크를 함께.”

키이스가 케이크를?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생크림을 아주 많이 얹어서.”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영민한 집사가 대답을 하고 방에서 나갔다.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던 연우는 먼저 소파에 앉아 키이스의 앨범 중 제일 위에 얹혀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열고 간단한 기록이 적힌 종이를 넘기자 곧 첫 장이 드러났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연우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기인 키이스라니.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 사진에서는 아이 특유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서툰 시기다. 스펜서가 같은 나이였을 때를 떠올리자 금세 입이 벌어졌다. 곧이어 지금의 스펜서가 아기인 키이스 옆에 서 있는 상상을 하니 더할 수 없이 심장이 뛰어 댔다.

너무 귀여워.

하아, 다시금 들뜬 한숨을 내쉰 그는 생각했다. 둘째가 있었으면…….

“연우.”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음성에 정신이 든 연우가 고개를 돌리자 키이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해서는 안 될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으흠.”

연우는 대답 대신 어색한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이번엔 맞았군. 키이스는 썩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떠올렸다. 어째서 맞아야 할 때는 틀리고, 이럴 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가.

혹시나 몰라 그는 단호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더 이상 애는 안 돼.”

“……응.”

잠시 말이 없던 연우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실망한 스펜서의 얼굴을 겹쳐 보고 만 키이스는 그만 그의 바람을 들어줄 뻔했으나 가까스로 이성을 다잡고 앨범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고 곧 냉정을 되찾은 그는 누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연우는 표정을 풀고 응, 대답했다.

“아주. 신기해, 이런 당신을 보다니. 이렇게 작았구나.”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짓자 키이스 역시 마주 웃었다. 그대로 시선이 얽히고, 키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연우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무심코 입술을 벌렸다. 지그시 붉은 속살로 시선을 향한 키이스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연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연우는 현기증마저 느끼며 눈을 감았다. 숨결이 닿고, 막 입술이 이어지려던 찰나.

똑똑, 규칙적으로 울린 노크 소리에 그만 연우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키이스 역시 커진 눈으로 연우를 내려다봤다. 그대로 서로를 마주 보는데, 이어서 문이 열리더니 찰스가 들어왔다. 카트를 끌고 온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는 연우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키이스를 못 본 체하고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찰스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말하며 테이블 위에 차와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바로 직전까지 둘이 뭘 하려고 했는지 훤히 알 수 있었으나 그걸 민망해하거나 신경 썼다가는 이 저택에서 일하지 못한다. 이들은 연애를 하기 전부터 단둘이 있으면 이렇게 수시로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으니까. 당시엔 누구나 보면 알게 되는 것을 서로만 몰랐으니 그나마 지금이 낫다. 찰스는 가면 같은 얼굴로 그렇게 생각하며 정리를 마치고 허리를 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더 시킬 일은 없으십니까?”

키이스는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 나가라는 듯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찰스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 키이스와 연우는 다시 단둘이 남았다.

괜히 민망해져 급히 밀크티를 입으로 가져간 연우는 조심스럽게 뜨거운 액체를 입으로 흘려 넣었다.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분위기가 되어 버리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는. 진짜 너무 밝혀.

부끄러움에 화끈 얼굴이 뜨거워져 다음 장을 급히 넘기는 연우를 보며 키이스는 내심 의문을 느꼈다. 아직도 이따금 그는 자신이 연우의 첫 상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발현 전에는 사귀던 상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오메가로서는 키이스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달콤한 몸을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흔치 않게도 신에게 감사했다. 만약 연우가 그날 폴로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다면, 키이스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이라 금세 키이스를 단념하고 다른 상대를 찾았다면.

얼마나 많은 알파가 이 몸을 가졌겠는가.

만약에 그랬다면 자신에게는 결코 차례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운 좋게 그런 기회가 왔다고 해도 다시 다른 알파의 품으로 가 버리는 연우를 보고 질투에 미쳐 무슨 짓이든 벌였을 것이다. 감금이든 납치든, 어쩌면 그의 부친들이 하듯이 연우의 다리를 부러뜨렸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키이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내가 그동안 연우에게 해 왔던 짓 아니었나.

그토록 많은 몹쓸 짓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연우는 자신을 감금하지도, 납치를 하지도, 다리를 부러뜨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키이스와 잔 상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리스트를 올리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해 오지 않았던가. 그것도 몇 년이나, 키이스로부터 갖은 모욕과 막말을 들어 가면서.

“귀여워.”

갑자기 들려온 연우의 웃음 서린 음성에 키이스는 정신이 들었다. 연우는 앨범을 보느라 키이스의 동요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키이스는 물끄러미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거지.

두통이 일어나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연우가 기억을 잃었을 때 자신과 있었던 일을 못 믿고 계속해서 엉뚱한 소리를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바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그는 더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레바스조차 이 정도로 깊지 않을 것이다.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연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만큼 나를 좋아했구나.

새삼스러운 죄책감과 무안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치밀어 오르고, 자신이 얼마나 졸렬한 쓰레기인가를 연달아 자각했다. 페로몬을 이유로 자신은 실제 그토록 많은 상대와 놀아난 주제에 연우가 같은 짓을 한다는 상상만으로 이렇게나 속이 뒤집어지다니.

<상대를 1주일마다 바꾼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뒷정리는 모두 누가 했는지 기억은 하시나 모르겠군요!>

잊고 있던 연우의 고함 소리가 불현듯 키이스의 명치를 때리고 지나갔다. 그는 녹아웃이 되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힘없이 신음 소리를 냈다.

연우가 달아날 만하지.

“키이스?”

불현듯 들린 음성에 키이스는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아버지들이 어째서 엔젤의 다리를 부러뜨렸는지 통렬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젤이 왜 아직도 그토록 달아나려 하는지까지. 인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신 또한 인간이므로 다르지 않다. 키이스는 여전히 쓰레기였고,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연우가 언젠가 또 달아난다는 얘기야? 엔젤처럼?

또다시 표식이 사라질지도 몰라. 그러면 또 다른 알파와 나뒹굴겠지?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아무하고나 수시로 상대를 바꿔 가면서.

“키이스.”

연우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다는 사실을 키이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몸에서 넘쳐나는 페로몬 향도.

아차.

키이스는 내심 당황했다. 연우가 다른 알파와 안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끓어올라 그만 페로몬을 쏟아 내고 만 것이다. 열기에 달아오른 얼굴로 들뜬 숨을 내쉬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연우를 보자 키이스는 급히 페로몬을 죽이고 미소를 꾸며 냈다.

“앨범은 다 봤어?”

사뭇 다정한 음성에 키이스는 내심 놀랐다. 내가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내다니. 다행히 효과가 있어서 연우는 안심이 된 듯 표정을 풀고 앨범을 가리켰다. 벌써 그는 다음 앨범을 펼친 상태였다.

키이스는 자신을 타이르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다시 연우가 나를 잊고 표식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연우의 다리를 부러뜨릴 일도 없어.

……없겠지, 절대로.

“이거, 언제 사진이야?”

시선을 옮겨 연우가 가리킨 사진을 확인한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

“교복을 입었어?”

신기해하며 묻자 키이스는 여전히 무심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와아.”

연우는 새삼 감탄사를 흘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교복을 입는 학교가 미국에도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경험자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보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하고 내심 생각하며 그는 웃음을 지었다.

“어떤 학교였어? 규칙이 엄격하다거나 그랬어?”

“지루했어.”

키이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대답과 일치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도 교복을 입었었는데, 그때는 정말 싫었거든.”

연우의 말에 키이스는 곧바로 옆에 놓인 앨범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우는 짐짓 모른 체하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런 학교는 대부분 기숙사제지? 당신도 기숙사에 있었어?”

“그래.”

키이스는 그가 자신의 앨범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지만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단지 유예 기간을 준 것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연우는 안도하며 말했다.

“그럼 주말에만 집에 온 거야?”

“그런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어딘지 대답이 건성이었다. 그 시절의 얘기를 하기 싫은 걸까? 궁금해하며 연우가 물었다.

“재밌는 일은 없었어?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화나.”

“글쎄.”

키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 그 녀석이 그 녀석이라. 대부분 유치원 때부터 아는 얼굴들이거든.”

“그래?”

그 말에 연우는 유치원 원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럼 스펜서도 이 교복을 입게 되는 걸까?

다시 시선을 내리자 교복을 입은 키이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책상에 걸터앉은 옆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속에서 키이스는 짙은 색의 짧은 머리칼은 단정하게 넘긴 채 책상을 짚은 한쪽 손 아래에는 하드커버의 책을 뒤집어 펼쳐 놓고서, 다른 손은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게다가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보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눈동자가 파란색이야.”

“발현 전이니까.”

키이스의 간단한 대답에 연우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아까웠다. 대학에 다닐 당시에도 학비는 물론 생활비조차 아끼느라 허덕거렸고 그동안 끌어 쓴 대출 때문에 키이스가 모두 갚아 주기 전까지 몇 년이나 고생했던 걸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런 사립 학교에 다닌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때의 키이스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를 낙심하게 했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불공평해.”

“뭐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는 걸 연우는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도 같은 학교를 다녔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키이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별거 없었어.”

“그래도……!”

순간 울컥했던 연우는 이내 풀이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잖아.”

다시 앨범으로 눈을 돌린 연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키이스가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진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차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물었다.

“보고 싶어?”

“응?”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왠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가 연우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냐고, 교복 입은 거.”

“응!”

대답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엔 좀 더 확신을 담아 덧붙였다.

“보고 싶어, 꼭!”

그 말에 짧은 웃음소리를 낸 키이스가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글쎄, 어떻게 할까.”

괜히 시간을 끄는 그의 태도에 연우는 금세 애가 탔다. 일부러 뜸을 들이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바심이 나서, 그는 몸을 틀어 키이스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연우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지금껏 여유 있게 웃던 키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연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입술이 맞물려 있었다. 뒤늦게 눈을 감자 곧이어 키이스의 무게가 실려 왔다. 그대로 무너지듯 누워 버린 연우의 위를 차지한 키이스가 입술을 떼는가 싶더니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깃털처럼 내려앉았던 키스는 그러나 이내 집요하게 돌변했다. 으응, 신음 소리와 함께 연우의 한쪽 다리가 소파 아래로 내려가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키이스가 자리 잡았다. 연우는 흥분으로 가빠진 숨결 사이로 하, 들뜬 숨을 뱉어 냈다. 맞닿은 아랫도리가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이 느껴지고, 기대에 찬 배 속이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연우.”

키이스가 속삭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셔츠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쓰다듬던 그가 슬며시 그것을 비틀자 전혀 아프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연우가 숨을 삼키며 허리를 비틀었다.

나뿐이야.

키이스가 입술을 떼고 연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연우에겐 나뿐이야.

상기된 뺨과 젖은 채로 벌어진 입술과 자신에게 향한 몽롱한 시선에 하반신이 즉시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아래를 비비자 연우가 앓는 것처럼 신음 소리를 냈다. 흥분을 참지 못한 그가 키이스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얽으려 들어 올린 순간, 그만 테이블 위에 있던 앨범을 건드리고 말았다.

먼저 떨어진 앨범 위로 연달아 곤두박질친 앨범 몇 권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도 연우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키이스는 달랐다. 반사적으로 연우의 다리를 잡아 끌어 올렸던 그가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으나 활짝 펼쳐진 앨범은 다른 의미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왜…….”

조바심이 나 재촉하듯 물으며 뒤따라 고개를 돌렸던 연우는 잠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앨범에 있는 사진은 낯이 익었으나 키이스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연우는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급히 앨범을 덮으려 손을 뻗었으나 간단히 키이스에게 잡혀 버렸고, 키이스는 버둥거리는 연우의 팔을 잡아 둔 채 몸을 숙여 다른 손으로 앨범을 집어 들었다.

“앗…….”

연우는 체념처럼 안타까워하는 탄성을 내질렀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뻔히 보는 앞에서 키이스가 앨범을 그의 두꺼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사이를 두고 키이스가 덧붙였다.

“교복을 입었군.”

“그래…….”

결국 연우는 포기한 채 사그라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말했잖아, 나도 입었다고.”

“그랬지.”

키이스는 뭐가 재밌는지 웃음을 머금으며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지난 시절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손을 붙잡혀 버려 그러지도 못한 채 연우는 그를 야속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야? 이건.”

여전히 사진을 바라보며 키이스가 묻는 말에 연우는 자포자기해서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 1학년.”

“그래?”

그는 여전히 웃음이 서린 음성으로 덧붙였다.

“중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야.”

발끈할 기력도 없어 연우는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키이스가 손을 놓아줬지만 앨범을 빼앗을 틈은 역시나 없었다.

“에잇!”

급하게 팔을 뻗어도 봤으나 한 손으로 앨범을 들어 올려 가볍게 피한 키이스는 보란 듯이 남은 손으로 연우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섣부른 도발로 어이없이 키이스의 품에 안겨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직면하게 된 연우는 그만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그의 머리에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춘 키이스가 물었다.

“머리는 왜 이렇게 짧아?”

“교칙이었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눈썹보다 훨씬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거기다 앞으로 자랄 것을 대비해 체구보다 다소 큰 교복을 맞춘 탓에 스스로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찰스는 왜 부탁하지도 않은 내 앨범까지 가져와서.

괜히 집사를 원망해 봤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거야. 연우는 새삼스럽게 자신을 타일렀다.

키이스는 여전히 한 팔로 연우의 허리를 안은 채 한쪽 허벅지 위에 그를 올려놓고 당당하게 연우의 두 다리 위에 앨범을 내려놓았다. 바로 코앞에 앨범이 있는데도 허리를 붙잡혀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연우의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키이스가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엔 여전히 짧긴 해도 조금 길어진 머리와, 역시나 더 자란 키 덕분에 약간은 성숙해 보이는 연우가 있었다. 아직 교복은 체격보다 커 품이 넉넉했는데, 지금의 키만큼 자란 건 3학년 중반쯤이었으니 교복이 딱 맞을 때의 사진이라면 좀 더 지나야 나올 것이다.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연우는 수치심을 참고 기다렸다. 이제 곧 저런 어설픈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점점 앳된 모습을 벗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타게 다음 장을 바라고 있는데, 정작 키이스의 손은 느리기만 했다. 예전에 비서로 일을 했을 때도 빨리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습관이 되어 있던 연우는 몸이 약해진 이후로 예전보다 현저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덕분에 예전의 조바심을 내며 초조해하던 습관이 줄어들고 제법 여유를 갖게 됐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동안 쌓아 왔던 인내심을 모두 다 날려 버린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페이지를 넘겨 주고 싶을 정도였으나 키이스는 그런 연우의 속마음과는 반대로 천천히, 너무나 천천히 앨범을 넘기고 있었다.

키스해 버릴까.

저 수치스러운 앨범이 세상에 드러나기 직전까지 그들이 했던 행위를 떠올린 연우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실행에 옮기려 했다. 키스하면서 키이스를 끌어안으면 자연스럽게 앨범이 떨어질 거야. 안 떨어지면 떨어뜨리면 되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며 그는 즉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먼저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손을 멈췄다.

“……이건 뭐야?”

묘하게 가라앉은 음성에 연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대체 무슨 사진이길래?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사진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정도로 반응할 만큼 심한 게 있었던가? 짐작이 가지 않는 게 더 불안했다. 두려움에 주저하는 시선을 어렵게 향한 연우는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사진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아, 하고 표정을 풀었다.

“친구들하고 찍은 사진이야.”

너덧 명이 뭉쳐 있는 사진은 그 나이 또래라면 흔히 찍을 만한 흔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럴싸한 포즈를 잡지만 어째선지 셔터를 누를 때면 대형이 무너지고 마는. 역시나 엉망으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휘청거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립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진을 쓰다듬는 연우의 모습에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의식적으로 연우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줘 바짝 끌어당기자 얼떨결에 끌려갔던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키이스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지금도 연락하나?”

“아니.”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졸업한 뒤에 난 미국으로 왔으니까. 조금씩 연락이 줄어들어서……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몰라.”

그가 친구들과 관계를 끊은 데는 변이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굳이 자신이 오메가가 됐다는 사실을 알리면서까지 만날 생각은 없어서, 연우는 휴학을 하고 한국에 돌아가 쉬고 있을 때도 지인을 만나지 않은 채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 정도의 관계였던 거지.

어차피 그는 이곳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찾았고, 이전과 다른 인간관계가 생겼다. 특히나 소중한 관계가.

굳이 거기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어서, 연우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앨범에 시선을 멈춘 채 물었다.

“이것도 친구인가?”

‘이것’이라는 지칭과 함께 손가락으로 짚은 소년의 얼굴을 보고 연우는 가볍게 그를 타박했다.

“이거라니, 사람한테.”

한 마디 이른 그는 곧 말투를 누그러뜨려 덧붙였다.

“친구 동생이었는데 가끔 같이 놀았어. 두 살 어렸거든.”

고3이 됐을 때 무리 지어 다니던 친구 중 하나의 동생이 같은 학교에 들어왔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녀석은 자연스럽게 형의 패거리에 끼게 됐는데, 연우도 덕분에 몇 번 그와 어울린 적이 있었다. 사진에는 그가 연우의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은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의 존재를 잊었던 연우는 사진을 내려다보며 무심코 웃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꽤나 따랐었다. 실제 형이었던 녀석이 투덜거렸을 정도로.

“……친해 보이는데.”

키이스의 말투가 묘하게 느려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무척 좋아했어.”

“좋아했다고?”

곧바로 따라온 물음에 연우는 아, 하고 그제야 눈치를 챘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선배의 의미로.”

키이스가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뭐지? 애칭인가? 그의 기분이 한층 더 나빠졌다. 키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연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

선배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멈칫했던 연우는 곧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자신보다 높은 학년을 그렇게 불러. 누구나 다 그렇게 부르는 거고, 특별한 의미는 따로 없어.”

그래도 대부분 형이라고 하지 않나?

말을 하고 보니 문득 의문이 생겼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심상찮은 키이스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녀석이 널 ‘선배’라고 불렀다고?”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연우를 바라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연우 선배?”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순간 연우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동공은 환하게 열리고, 숨결은 거칠어졌다. 아직 그는 키이스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온몸의 진동을 키이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키이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느슨해졌다.

“아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 듯 키이스가 감탄사를 길게 늘여 내뱉었다.

“교복, 보고 싶다고 했던가?”

“……!”

연우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칫하다간 그만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연거푸 끄덕이는 그를 보고 키이스의 표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키이스가 연우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약간의 힘을 준 것뿐인데 안간힘을 쓰며 막아섰던 방패가 부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곧이어 드러난 입술에 입술이 겹쳐 오고, 연우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으, 으응.”

입가로 신음이 흘러넘쳤다. 머릿속이 금세 몽롱해지고, 주변에 달콤한 페로몬이 떠돌았다. 키이스가 상체를 숙이는 것을 느끼고 연우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자신을 쓰러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다른 남자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네, 피트먼 씨.”

……어?

여전히 몽롱한 채 늘어져 있는 연우에게서 간신히 입술을 뗀 키이스가 말했다.

“고등학생 때 입던 교복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대답이 들린 후 곧 조용해졌다. 뒤늦게 연우는 그 목소리가 집사인 찰스의 것이었다는 사실과 키이스가 저택 내 전화를 사용해 스피커폰으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자신이 침대도 아닌 소파에 자발적으로 누우려 했다는 것을 자각하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저 키스만 했을 뿐인데 나는 벌써 이 남자와 자는 것까지 생각하다니.

부끄러워.

얼굴이 너무 뜨거워져 이제 따끔거리기까지 하는 연우의 얼굴을 보고 키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내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안절부절못하는데, 키이스가 고개를 기울여 연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어, 저기, 교복이 아직도 있어?”

이번에는 추태를 보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연우가 물었다. 다시 키스를 이어 가려던 키이스는 멈칫했다가 이내 별다른 흥미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이렇게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랬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키이스가 눈앞에서 교복을 입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금세 멍한 표정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우의 모습에 키이스는 엷은 미소를 띠더니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녀석과는 친했어?”

“응? 아아…… 난 여동생만 있어서…… 귀여웠어……. 날 잘 따랐거든.”

건성으로 대답하며 정신없이 키이스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우를 끌어안고, 천천히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키이스가 물었다.

“저 녀석들은 알고 있나? ……네가, 변이했다는 걸.”

“아니…….”

연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몰라. 변이하기 전부터 이미 만나지 않았어.”

“그래.”

키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내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모르겠군.”

자신의 아이를 열 달이나 품고 있었던 연우의 배를 슬그머니 쓰다듬자 이내 연우가 온몸을 떨며 숨을 삼켰다. 그 반응을 보자 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우월감을 느꼈다.

내 것이야.

고개를 기울이자 연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들어 입술을 겹쳤다. 내 오메가다. 키이스는 더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끼며 가는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페로몬으로 변이한, 내 오메가.

몸 깊은 곳에서부터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절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어.

똑똑, 느닷없이 들려온 노크 소리에 겨우 이성이 돌아왔다. 입술을 떼자 연우는 완전히 넋이 나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심장이 저려올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키이스는 또다시 그에게 키스하고 말았다.

“기다려.”

곧이어 연우를 소파에 내려놓고 선뜻 일어난 키이스가 문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차가운 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는데도 뛰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그는 화끈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가라앉히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앨범이 시야에 들어왔다. 키이스의 사진이 엉망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앨범을 정리하던 연우는 마지막 권을 무심코 펼쳤다가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거기에는 높은 말 위에 앉아 한 손으로는 고삐를 쥔 채 맬릿을 든 다른 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키이스의 사진이 있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정신이 멍해졌다. 처음 봤던 그의 모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쩌지.

연우는 설렘과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순간 심장은 여지없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남자는 아마도 평생 날 사로잡겠지.

선뜻 방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그에게 연우는 넋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도 사진 때문에 가슴을 설레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실물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하게 반짝였다.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 숨을 죽인 채 키이스를 올려다보는 사이, 그는 훌쩍 연우의 앞까지 다가왔다. 지척에 오고서야 비로소 연우는 키이스가 뭔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가 가져온 교복이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침을 삼키고 만 연우를 내려다보며 그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시커먼 속을 들켜 버린 것 같아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연우에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갈아입을까?”

연우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란 듯이 소파의 등받이에 옷을 걸쳐 놓은 키이스가 선뜻 슈트의 재킷을 벗었다. 넥타이의 각에 걸쳐진 남자의 길고 강한 손가락을 따라 셔츠에 둘러져 있던 타이가 맥없이 풀어졌다.

연우는 그대로 숨을 멈춘 채 그를 지켜보았다. 크고 억센 손이 아래로 향하고 걸쳐 둔 옷의 가장 위에 있는 타이로 향했다. 사진에 있던 바로 그 교복 타이였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넥타이를 목에 걸치고 능숙하게 타이의 각을 만드는 모습을 연우는 숨죽여 지켜보았다. 사진으로 보았던 키이스의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서 살아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는데.

“……?”

키이스는 타이에서 손을 떼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연우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왜 셔츠를 갈아입지 않았지?

슬쩍 눈을 돌려 확인해 보니 바지에 재킷, 셔츠까지 모두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찰스가 실수를 할 리가 없지. 내심 생각하면서도 의아해졌다.

그럼 왜 넥타이만?

“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연우는 입을 열었다.

“끝이야……?”

“그래.”

왜? 의문을 담고 올려다보자 키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쓸 수 있는 건 넥타이뿐이니까.”

“어?”

여전히 멍한 감탄사를 되돌리는 연우의 모습에 키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연우, 내가 이 교복을 입은 지 벌써 10년이 훨씬 지났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

사진에서 보았던 키이스를 지금의 그와 겹쳐 본 연우는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키이스는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그럼 나머지 교복은, 못 입는 거야?”

고작 넥타이가 전부라니.

아쉬워하는 기색을 비치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모를 설렘과 불안을 함께 느낀 순간, 그가 등받이에 걸쳐 놓은 셔츠를 집어 들었다.

“자.”

“……?”

자신에게 내민 셔츠를 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한 연우에게 키이스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너도 입어야지.”

“뭐?”

갑작스러운 말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런 연우를 바라보며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나만 입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러니까 입으라고, 너도.”

“당신 교복을? 내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면서?”

자신이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입을 벌린 채 말을 찾지 못하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덧붙였다.

“어차피 네 교복은 지금 없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연우는 불안한 시선으로 셔츠와 키이스의 얼굴을 바쁘게 오가며 마른침을 삼켰다.

봐.

연우는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까.

“당신 옷이 나한테 맞을 리가 없잖아.”

작은 부정의 말에 키이스는 간단히 해결책을 내놨다.

“내가 지금보다 작았을 때니까 괜찮아.”

그렇다고 해서 나만큼 작았던 것도 아니잖아.

연우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키고 자신보다 키는 대략 8인치나 크고, 어깨와 가슴은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는 좀 더 체구가 작았다고 해도, 그래 봤자 6피트는 훌쩍 넘었을 것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그의 키가 보통보다 크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거절의 말 대신 고개를 저으며 물러나려는데, 키이스가 그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연우.”

흠칫 놀라 멈추고 만 연우에게 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입혀 줄까?”

“…….”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경계는 허물어지고, ‘괜찮지 않은가?’ 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한발 더 나아가 키이스의 말이 맞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에 다닌 것 같은 기분을 느껴 보는 것도 좋잖아? 좀 안 맞으면 어때, 어차피 내 몸에 맞는 교복을 입은 적도 별로 없잖아.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키이스가 페로몬을 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넋이 나갔던 건지 자신을 비난했지만 이미 늦었다.

미소를 지은 키이스가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연우는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살며시 닿았던 키스가 멀어지자 키이스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입술을 열어 그것을 핥자 키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좀 더 용기를 내어 두꺼운 손가락의 끝을 머금고 빨아들였다. 키이스는 한 손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을 뻗어 연우의 셔츠 깃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셔츠 깃 안쪽에 자리 잡은 넥타이를 따라 이동하고, 목의 중심에 단정하게 매듭지어져 있는 타이의 각으로 흐르듯 내려왔다.

실크가 미끄러지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목이 허전해졌다. 키이스가 연우의 넥타이를 벗긴 것이다. 그대로 타이는 키이스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아이처럼 키이스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던 연우는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어 엄지손가락의 안쪽을 슬며시 핥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디의 선을 따라 혀끝을 옮기자 키이스가 연우의 재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어깨에 크고 단단한 손의 열기가 전해지고,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재킷을 벗기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그대로 어깨를 따라 손을 밀어 넣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연우가 걸치고 있던 슈트의 재킷이 등 뒤로 넘어가 이내 아래로 흘러내렸다. 연우는 자발적으로 손을 빼 재킷을 벗었다.

키이스는 아직도 연우가 핥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굽혀 그의 입 안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아래를 물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키이스는 자신의 모든 인내심을 쏟아부어야 했다.

바지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연우의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에게는 꼭 연우에게 하고 싶은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뭘 하려고 했었지?

정작 연우는 이런 상황이 된 이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키이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잔뜩 달아오른 몸을 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쓰러뜨리면 기쁘게 다리를 벌려 몸 안 가득히 키이스의 정액을 받을 기대로 가슴을 부풀리며.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키스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눈꺼풀을 내렸다.

“연우.”

키이스가 속삭였다. 숨결이 입술에 느껴졌다. 마지못해 슬며시 눈을 뜨자 키이스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셔츠를 갈아입어야지.”

“응?”

멍하니 눈을 깜박인 연우는 흘긋 시선을 향한 키이스를 따라 눈동자를 옮겼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교복이 보였다.

……아.

그제야 연우는 지금껏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던 건지를 깨달았다. 곧이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정말. 교복을 보고 싶다고 한 건 나면서.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그만 연우를 놓친 키이스는 그의 입 안을 애무하던 손을 허공에 그대로 멈춘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남고 말았다. 연우는 괜히 무안해져 허겁지겁 말했다.

“셔, 셔츠 말이지? 갈아입으라고, 응.”

이어지지 않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키이스는 친절하게도 직접 셔츠를 들어 연우에게 건네주었다. 다급하게 셔츠의 단추를 푼 연우는 무심코 그것을 벗으려다 멈칫했다. 키이스가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 저기…….”

머뭇머뭇 입을 열었지만 차마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키이스에게 연우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옷, 갈아입고 있잖아.”

“알아.”

“……그럼, 눈 좀 돌려 주겠어?”

뻔히 알면서 굳이 연우가 여기까지 말하게 만드는 키이스를 얄밉게 여기면서도 그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키이스가 피식 웃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우.”

“응?”

화들짝 놀라 대답한 연우에게 키이스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네 벗은 모습을 지금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고작 옷을 갈아입는 게 전부라고.”

“어…….”

그렇지, 하고 연우는 내키지 않지만 수긍했다. 그의 말이 맞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쪽이 더 이상하다.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키이스 쪽을 볼 수가 없었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셔츠를 벗고,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키이스가 준 옷을 팔에 뀄다. 단추를 후다닥 여미고 나자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셔츠는 예상대로 상당히 컸고, 소매가 손가락까지 내려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벗은 것보다는 나았다.

키이스가 고등학교 때 입었던 셔츠.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표정이 풀어졌다. 작게 미소 지은 연우에게 키이스가 뭔가를 내밀었다. 교복 타이로 바꿔 매기 전 하고 있었던 넥타이였다.

“대용이야.”

“고마워.”

그의 말에 납득한 연우는 곧 그것을 받아 목에 둘렀다. 어쨌든 키이스가 하고 있었던 거니 마찬가지다. 교복의 재킷을 받아서 입었을 때까지도 연우는 만족하고 있었다. 내심 들뜨기도 했다. 자신이 정말 키이스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현실처럼 실감 났다. 옷은 터무니없이 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같은 교복이니까.

내심 뿌듯해하며 연우는 키이스를 돌아봤다. 이제 남은 건 바지뿐이었다. 키이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흘긋 던져진 시선에 연우는 아, 깨달았다. 먼저 벗으라는 얘긴가?

이미 한번 겪어서인지 셔츠보다는 조금 덜 무안했다. 빨리 끝내기 위해 서둘러 바지를 벗어 버린 연우는 다시 키이스를 돌아봤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 뒤로 보이는 바지를 건네줄 거라 기대하며.

“…….”

한동안 연우는 그대로 그를 보고 있었다. 키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기다리던 연우는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키이스?”

슬그머니 이름을 부른 연우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의 뒤쪽에 있는 옷을 가리켰다.

“바지, 줘야지.”

키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연우의 전신을 훑어볼 뿐이었다.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재킷까지 걸친 연우는 정작 아랫도리가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체격보다 큰 셔츠 밑으로 하얗고 부드러운 허벅지가 이어지고, 쭉 뻗은 종아리 밑으로는 수수한 양말과 잘 닦은 수제화를 신은 발이 보였다.

다시 키이스의 시선이 반대의 순서로 밑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되짚어 와 마침내 얼굴로 돌아왔을 때, 연우는 불이 난 것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이스.”

“연우.”

이번에는 좀 더 정색을 하고 이름을 부르자 거의 동시에 키이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움칠 놀란 연우가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고 키이스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기울였다.

“연우.”

“응.”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작은 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 연우에게 키이스가 속삭였다.

“우리, 게임을 하나 할까?”

“게, 게임? 무슨?”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묻자 키이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불길한 설렘을 느꼈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나이가 많으면 선배라고 했지?”

“응.”

연우의 대답에 키이스가 물었다.

“반대의 경우는?”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연우는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학년이 낮으면 후배라고 해.”

“그렇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연우에게 마침내 키이스가 말했다.

“선배, 후배 놀이 어때?”

“선배, 후배 놀이?”

연우는 키이스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런 개념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키이스니까 새롭고 신기한 기분을 느낀 걸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재밌고 그런 건 아닌데.

연우는 의아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어울려 줘도 나쁘지 않지, 그냥 재미로 해 보고 싶어 하는 거니까.

“그래, 하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연우는 곧 떠올렸다. 당연히 내가 후배인 거겠지? 선배인 키이스를 떠올리며 가슴을 두근거렸을 때, 불현듯 그가 입을 열었다.

“연우 선배.”

“……!”

낮게 울린 목소리가 바로 연우의 심장을 두들겨 패고 지나갔다.

뭐, 뭐라고?

연우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내가 선배야?

키이스가 후배라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연우에게 키이스가 물었다.

“후배는 선배가 시키는 건 뭐든 하나?”

“아마…… 대부분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연우는 대충 대답했다. 그런 연우를 보며 키이스가 한층 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

쿵쾅거리는 맥박이 관자놀이에서 느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만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했다.

“다리가 너무 야해요.”

말과 함께 키이스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연우는 그만 숨을 삼키며 펄쩍 뛰고 말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천히 피부를 어루만지며 그가 물었다.

“이 야한 다리를 몇 명이나 이렇게 만져 봤는지 말해 줄래요?”

지금껏 키이스에게서는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는 너무나 정중한 말투에 연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거기다 영국식 발음과 악센트까지.

아.

그 순간 연우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한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는 어째서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지금 이 순간 키이스가 연우에게 벌거벗고 창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넋을 잃고 키이스를 바라보며 연우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아무도?”

키이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연우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넓고 두꺼운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가지런한 이가 슬그머니 드러났다. 연우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춘 키이스는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선배의 정숙함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군요.”

연우는 그런 그를 보며 넋을 잃은 한편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히 키이스가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말투도 억양도 모두 너무나 달랐다. 이 모습이 키이스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모습일까?

“당신이 그런 표현을 쓰다니 믿어지지 않아…….”

멍하니 중얼거린 연우에게 키이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상한 언어는 세인트 도미니크 고등학교 학생이 갈고닦아야 할 첫 번째 소양이죠, 선배님.”

그는 여전히 같은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그것에 익숙해진 연우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정말, 내가 선배고 당신이 후배야?”

“네.”

대답은 주저 없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숨 막히게 단정한 얼굴을 마주 보며 연우는 한층 녹아든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뭐든지?”

연우의 음성에 키이스가 소리 없이 웃더니 고개를 기울여 연우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키스에 연우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키스하라고 하지 않았어.”

“이런.”

안타까운 감탄사를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한 키이스가 자신의 두 손목을 들어 보였다.

“벌을 주셔야겠군요, 선배.”

그 순간 연우는 설령 키이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용서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이스를 용서하고 싶은 충동과 벌을 주고 싶은 충동은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격렬한 전투 속에서 후자가 승리했다.

아.

키이스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뜨렸던 연우의 넥타이를 주워 내밀었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들이 상대를 묶고 싶어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

순순히 자신의 손목을 내어 주는 키이스의 모습에 연우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연우는 명령에 따라 두 손목을 뒤로 묶인 채 소파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키이스를 마주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키이스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들던 커다란 손도, 강한 팔도 지금은 모두 얌전히 뒤로 돌려져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처음으로 연우는 자신이 키이스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굉장해.

설레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기쁜 순간은 정말 짧게 지나갔다. 곧이어 연우는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이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도 못 한 상황이라 이 뒤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신은 상상력이 떨어진다고 종종 생각했는데, 이렇게 전혀 예상치도 않은 상황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일을 할 때는 제법 순발력이 있었는데, 왜 이쪽으로는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걸까.

〈끝이야?〉

언젠가 키이스에게 수갑을 채웠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번뜩 스쳐 갔다. 이번에는 실망시키면 안 되는데.

불안한 마음 탓인지 작은 용기가 생겨났다. 연우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살며시 키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뜻밖에도 키이스는 전혀 불쾌해하는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연우는 그만 심장이 멎어 버릴 뻔했다.

키이스의 정수리를 만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스펜서의 머리카락과는 또 다른 감각에 연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천히 손을 움직이자 풍성한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가락에 휘감겼다. 단정히 넘겨져 있던 머리칼은 연우의 손에 의해 어지러이 헝클어졌지만 그것은 뜻밖에도 키이스의 얼굴을 평소보다 어리게 만들었다.

관계를 가지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매번 있었는데 이렇게 얌전히 자신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무심코 한숨을 내쉬는데, 키이스가 눈꺼풀을 들었다.

불시에 눈이 마주치고,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춰 버렸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진한 보라색 눈동자에 잠시 그는 넋을 잃었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연우는 한쪽 구두를 벗었다. 슬그머니 올린 발이 향한 곳은 키이스가 성기를 주로 두는 방향인 오른쪽 허벅지였다.

……하아.

연우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게 달아오르고, 키이스의 숨결 또한 거칠어졌다. 살며시 쓰다듬은 발 아래로 길고 두꺼운 성기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급히 팽창한 성기가 바지의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윤곽이 드러내는 것을 연우는 눈으로 확인했다.

천천히 발을 미끄러뜨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성기를 쓰다듬자 거세게 펄떡대는 맥박이 그대로 느껴졌다. 연우는 가쁜 숨을 참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키이스가 아무리 평온한 척하고 있어도 이것만은 감추지 못한다. 지금껏 혼자만 달아오른 것 같아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던 자아가 자신감을 가지고 작게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었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연우는 달뜬 시선으로 키이스를 내려다보았다.

흥분했어.

키이스가 연우를 응시했다. 연우와는 달리 그는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입을 벌린 그가 대답했다.

“처음부터.”

키이스의 얼굴 또한 핏기가 올라 다소 붉어졌다.

“선배가 그 예쁜 엉덩이를 살랑거리면서 내 앞을 얼씬거릴 때마다 고추가 터질 것 같았죠.”

이건 언제적 얘기인 걸까?

어렴풋이 아주 오래 전, 미처 연우가 깨닫지도 못했던 그 시기가 아닐까 떠올렸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선배.”

느리게 흘러나온 음성은 연우의 등줄기를 애무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핥아도 됩니까?"

“……!”

숨결이 뒤섞인 낮은 목소리에 연우는 마치 머릿속에 전기가 통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막자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연우가 허락하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이 상황에서 내가 버틴다면 손해를 보는 건 누굴까?

몽롱한 의식 속에서 연우는 떠올렸다. 배 속은 쿵쾅거리고, 머리는 흐리멍덩하고, 손가락은 차갑게 식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연우의 발바닥 아래로는 키이스의 단단하게 굳어진 성기가 강하게 맥박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키이스 역시 참지 못하고 그에게 덤벼들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는 바로 눈앞이었다.

하아, 하아.

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막고 있던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의 일부를 덮고 있던 커다란 셔츠 자락으로 향한 손가락이 살며시 끝을 움켜쥐었다.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셔츠를 들어 올렸다. 넓게 벌어진 무릎이 덜덜 떨려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닫을 뻔했지만 키이스의 몸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키이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고 선언하는 듯한 웃음이었지만 연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온몸을 가늘게 떨면서 셔츠를 움켜쥔 채 지켜보는 연우의 앞에서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연우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온 그의 머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에 귀가 먹어 버릴 것 같았다. 키이스가 고개를 돌려 연우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은 순간, 연우는 그만 기겁을 하며 숨을 삼키고 말았다.

지금껏 자신이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실감했다. 맨살에 닿은 남자의 입술은 뜨거웠고, 마치 그 자리에 화인(火印)을 남기는 듯했다. 연우는 쥐고 있던 셔츠를 입에 물고 어떻게든 신음을 참으려 했다.

키이스의 입술이 점차 안으로 이동했다. 연우는 천천히 자신의 성기로 향하는 그의 머리를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대에 찬 자신의 페로몬이 제어할 수 없이 넘쳐흘러 향기가 주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키이스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숨결이 거칠어졌다.

하아.

한숨 같은 옅은 숨소리가 어렴풋이 아래쪽에서 들린 순간.

“……으으!”

셔츠를 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꽉 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얇은 속옷에 감싸여 있던 성기를 그대로 입술에 머금은 키이스가 세게 그것을 빨아들였다. 타액에 금세 젖어 버린 아랫도리가 움칠거리며 일어선다. 연우는 그만 허리가 무너져 내려 소파 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

다급하게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소파의 등받이를 간신히 붙잡았지만 잠깐의 해프닝으로 그는 그만 거의 눕다시피 한 채 가랑이를 크게 벌리고 소파 끝에 간신히 걸쳐진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 입에는 여전히 셔츠 자락을 물고 있어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응, 으응.”

손을 놓치면 그대로 굴러떨어져 버릴 테고, 다시 몸을 끌어 올려 자세를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우는 속수무책으로 아래쪽을 내준 채 있는 힘껏 소파의 등받이를 붙잡고 버텨야 했다. 고작해야 급히 손을 움직여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잡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으브, 으…….”

입에서는 연신 제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훤히 드러나 버린 고간과 회음을 키이스는 주저 없이 핥고 빨아들였다. 거친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올 때마다 연우는 배 속이 달아오르고 허리가 뒤틀려 미칠 것 같았다. 혀를 내밀어 회음을 눌렀던 키이스가 입술을 옮겨 음낭을 머금고 그대로 빨아들였다.

“으으읍…….”

연우의 목 깊은 곳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비명처럼 질러 나왔다. 그래 봤자 그것은 고작 셔츠를 꽉 물고 있는 잇새로 새어 나와 맥없이 사라졌을 뿐이다.

“선배.”

혀로 음낭을 굴리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타액과 체액으로 젖은 얇은 천에 차가운 습기가 감돌았다.

“그만할까요?”

난데없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넓게 벌어진 가랑이 너머로 키이스가 보였다. 들뜬 시선으로 바라보며 헐떡이는 연우에게 그는 말했다.

“이 조그만 천이 무척이나 방해가 돼서요.”

네 손으로 벗어.

키이스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에 연우는 멍해졌다. 당연한 것이다. 지금 키이스는 묶여 있지 않은가. 바로 내 손으로 묶었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 버린 걸까.

연우는 밀려드는 후회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키이스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이 묶여 있다는 핑계인 건지 진실인 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에 연우는 결국 안간힘을 써서 등받이를 잡고 있던 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허리 밴드에 걸린 손가락이 주춤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불편하게 허리를 비틀어 천 조각을 밀어내는 모습을 키이스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간신히 골반 아래로 한쪽을 내리는 데 성공한 연우가 손을 바꿔 다른 쪽을 내리려 했을 때.

“……!”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이스가 드러난 연우의 구멍을 핥은 것이다. 어정쩡하게 속옷을 걸쳐 아래쪽을 전부 벗은 것도 아닌데 키이스는 기다리지 않고 간신히 드러난 속살로 입술을 밀어붙였다. 어설프게 달아올라 있던 입구에 숨결이 닿아 부딪치고, 곧이어 부드러운 입술이 문질러졌다.

저절로 눈이 커지고,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움칠거리는 주름을 천천히 애무하며 쓰다듬는 혀의 움직임에 뇌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금세 허물어진 구멍 위로 혀를 지그시 누른 키이스가 그대로 핥아 올렸다.

흘러나온 애액에 혀가 미끄러지는 감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회음에서 멈춘 혀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아직 닫혀 있던 구멍을 두드리고, 연우가 잠깐 숨을 내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완된 입구로 들어왔다.

하, 날카로운 숨소리와 함께 연우는 그만 물고 있던 셔츠를 놓쳐 버렸다. 급하게 다시 그것을 물었지만 거친 숨결은 연거푸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길고 유연한 혀가 여린 주름의 안쪽을 쓰다듬고 밀어붙인 입술이 예민한 주름 전체를 감싸 문질렀다.

어느새 연우는 두 손으로 등받이를 움켜쥐고 소파에 누워 스스로 엉덩이를 들고 있었다. 반쯤 걸쳐진 속옷 사이로 키이스의 날이 선 콧대가 언뜻 내비쳤다. 얼굴이 절반 가까이 가려진 채 자신의 엉덩이에 입술을 묻고 혀로 핥아 올리는 모습을 보자 회음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거리고 배 속이 요동을 쳤다.

엉덩이의 골을 따라 흐른 타액에 뒤섞인 애액이 등줄기를 흠뻑 적시고,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찌걱거리는 거친 소리가 연우의 심장을 터질 듯이 뛰게 만들었다.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 것은 심장만이 아니었다. 빳빳하게 머리를 세운 성기 끝에서 맑은 액체가 구슬처럼 맺히더니 곧 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사정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마지막 순간에 주저했다. 지금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키이스의 성기를 품고 가득히 그의 정액을 받고 싶었다. 이토록 저리는 배 속을 휘저어 줬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그만하고 어서…….

“으이스…….”

셔츠를 문 채 뭉개진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 봤지만 키이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애가 타 무릎을 세워 소파 끝에 발뒤꿈치를 간신히 올리고 있던 한쪽 발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이 쓰다듬었던 키이스의 성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도 나만큼 흥분하면 더는 참을 수 없게 될 거야…….

녹아내린 머릿속으로 용케 그럴싸한 생각을 해냈지만 안타깝게도 연우는 키이스보다 한 수 아래였다. 이미 그런 도발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연우가 주저하며 다리를 내린 순간 키이스는 입술을 밀착하고 그대로 아래를 빨아들였다.

“……히익!”

순간 저절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쓰읍, 소리를 내며 강한 압력으로 맞닿은 입술이 문질러질 때마다 구멍이 움칠거리고 흘러넘친 애액이 카펫 위로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연우는 헐떡거리며 급하게 다리를 끌어 올렸다. 어떻게든 미끄러지지 않도록 버티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소파 등잡이를 힘껏 붙잡고 무릎을 세워 소파 끝에 걸친 채 엉덩이를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으, 으으, 으.”

헐떡이며 허리를 들썩이는 연우의 아래에 얼굴을 묻은 채 키이스는 계속해서 아래를 핥고 빨아들였다. 등 뒤로 손목을 묶여 그가 연우를 만질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입술과 혀뿐이었다. 그리고 키이스는 그 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하으!”

연우가 진저리를 치며 숨을 삼켰다. 길게 뻗은 두꺼운 혀가 여린 구멍을 열어젖히고 안쪽을 휘저었다. 혀를 밀어 넣을 때마다 빈틈없이 밀착한 입술은 어김없이 떨리는 주름을 문질러 대더니 급기야 그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탕을 빨듯 탐욕스럽게 젖은 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지고, 연우의 성기에서 흐르던 투명한 체액이 부옇게 변했다.

“아, 아으, 으, 아!”

어느새 연우는 셔츠를 놓고 벌어진 입으로 연신 탄성과 비명을 번갈아 내지르고 있었다. 안쪽을 간질이는 키이스의 혀에 뱃속이 가려워 미칠 것 같았다.

“키이스, 잠깐만, 그만, 잠깐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연거푸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와중에도 바짝 일어선 성기에서는 계속해서 정액이 흘러내렸다. 혀보다 더 길고 두꺼운 걸로 안을 쑤셔 줬으면 좋겠다. 끓어오르는 배 속을 휘젓고 눌러서 가득히 정액을 쏟아 줬으면. 아, 제발, 제발…….

“아아아…….”

결국 연우는 탄식과 같은 긴 신음을 내지르며 어정쩡하게 절정에 도달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눈을 떠 보니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주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아마 사정으로 인한 탈력감 때문일 것이다. 배 속은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욱신거리는데, 억지로 밀어내듯 쏟은 정액은 그에게 만족감보다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슬그머니 아래로 손을 향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무릎을 잡았다. 맥없이 쓰러져 있던 무릎은 간단하게 열리고, 가랑이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놀란 연우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키이스가 자신의 훤히 열린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어, 어떻, 무슨.”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키이스의 손목을 묶었던 넥타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자유로운 두 손이 자신의 양쪽 무릎을 잡아 크게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에게 남은 건 손목을 묶었던 타이의 엷은 흔적뿐이었다.

어떻게?

소리 없는 물음에 키이스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선배, 아직 만족을 못 했어요?”

짓궂은 물음에 즉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키이스가 시선을 내려 그의 아래쪽을 응시했다.

“여기, 배고프다고 난린데.”

그가 긴 손가락 끝으로 닫혀있던 주름을 건드리자 그곳이 즉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애액이 넘쳐흘러 엉덩이의 골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감각에 연우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를 모아 숨기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키이스가 급히 들어 올리려던 무릎을 잡아 고정했기 때문이다. 움칠 놀라 떨고 있는데, 불현듯 아래쪽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자 하얀 크림을 덜어 낸 키이스의 손이 보였다. 뒤늦게 케이크에 크림을 많이 넣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으…….”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림을 잔뜩 묻힌 길고 두꺼운 남자의 손가락이 입구에 닿았다. 떨고 있던 주름을 슬며시 눌러 문지르는 손길에 연우는 발작처럼 숨이 가빠졌다. 키이스 역시 거친 숨결 사이로 속삭였다.

“이 입은 뭐든 잘 먹는군.”

“아, 아으, 으…….”

연우는 애가 타 온몸을 떨었다. 조급한 구멍이 헐떡거리며 오므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크림을 잔뜩 발라 문지른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선배의 구멍은 정말이지 탐욕스럽군요.”

“……하!”

불쑥 손가락 하나가 들어와 연우가 놀라 숨을 삼켰다. 긴 손가락이 안쪽에서 구부러져 내벽을 문지르자 배 속이 따끔거리며 진동했다. 하, 키이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다니.”

갑자기 오금을 잡혀 허리가 위로 들렸다. 허공에 뜬 엉덩이가 키이스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깝군.”

“키이스, 그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연우는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나 키이스는 오히려 그를 비웃었다.

“네가 직접 볼 수 없으니까 말해 주는 거잖아.”

“듣고 싶지 않다니까.”

연우는 급하게 히든카드를 꺼냈다.

“내 명령에 따라야 하잖아.”

키이스가 멈칫했다. 어느새 말투가 바뀌어 있었던 것을 그도 역시 깨달은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타이밍이었지만 안심할 틈도 없이 그는 입가를 비뚤어뜨리며 조소를 지었다.

“부당한 명령에는 따르지 말라는 교칙을 잊으셨나 보군요, 선배.”

“부당하다니……!”

부당한 건 당신이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 순간 키이스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으읍……!”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켠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아래는 이렇게 맛있게 껄떡거리면서, 입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니 부당하지 않습니까.”

보란 듯이 그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세 개의 손가락이 각기 움직이며 안쪽을 쓸었다. 생크림과 애액으로 흠뻑 젖은 내벽이 그의 손가락에 다급하게 달라붙는 것이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선배의 안이 내 손가락을 핥고 있어요.”

“알아…….”

연우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발기한 것도 알고 있어요?”

그의 말이 맞았다. 어느새 연우의 앞은 힘을 되찾아 바짝 곤두서 있었다.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안쪽을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관절이 굽었다 펴질 때마다 내벽이 움츠러들고, 애액이 찌걱거리며 흘러내렸다.

“으으으응……!”

울먹이듯 꽉 막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가락 전체가 안을 드나들며 쑤셔 댈 때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엉덩이가 저릿거렸다. 내벽의 주름이 아우성치며 손가락을 감싸고, 젖은 소리가 난폭하게 이어졌다.

연우의 넘치는 페로몬 향기가 키이스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곧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크게 벌린 입 안 가득히 연우의 한쪽 가슴을 머금자, 연우가 자지러져라 비명을 질렀다. 달아오른 유두를 깨물고, 세게 빨아들이며 아래를 빠르게 들쑤셨다. 급기야 흘러넘친 애액이 키이스의 손목까지 적셨을 때, 연우가 고개를 젖히고 긴 신음을 내질렀다.

“하아아아…….”

탄식에 가까운 울림과 함께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발작처럼 온몸을 떨며 늘어진 연우에게서 키이스가 몸을 뗐다. 철컥거리는 소리에 연우는 몽롱한 시선을 향했다. 급하게 벨트를 푼 키이스가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렸다. 곧이어 커다란 키이스의 손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묵직한 성기가 드러났다.

그것은 수없이 그의 물건을 받았던 연우조차도 놀랄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손안에 쥔 페니스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단단하게 발기해 혈관이 확연히 두드러질 정도였다. 귀두에는 언뜻 맑은 체액이 맺힌 듯도 했다.

하지만 연우가 그것을 머릿속에 인식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두 번째인 데다 간격이 길지 않았던 만큼 사정량은 아까보다 현저히 줄었으나 충족감은 훨씬 컸다. 여운으로 축 늘어져 있던 연우의 다리를 잡아 벌린 키이스가 딱딱하게 일어선 성기를 단번에 쑤셔 박았다.

“……아윽!”

불시에 일어난 상황에 연우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사정을 해 한껏 녹아든 몸 안으로 한껏 부피를 부풀린 페니스가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왔다. 더 이상은 키이스 역시 인내의 한계였으므로, 애를 태우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하아, 하, 하아.

거친 숨소리가 연우의 위에서 쏟아지고 퍽, 퍽, 연속해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 속을 꽉 채운 성기는 끓어오르는 내벽을 비비고 문지르고 박아 대면서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묵직한 페니스가 안을 쑤시고 나갈 때마다 연우의 뱃가죽이 위로 들렸다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연우의 배를 찢고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그만큼 크고, 뜨겁고, 단단했다.

“아파, 아, 잠깐…… 좋아…… 아파!”

연우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끝내지 말라고 매달리고도 싶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흥분했다. 타이밍을 놓친 데다 키이스가 너무 빨라서, 연우는 그만 안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문득 키이스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하더니, 곧이어 키이스가 연우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철썩, 매서운 소리와 함께 연우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저절로 아래쪽이 움츠러들자 키이스가 끓어오르는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하아아…… 그렇게 세게 물지 마, 끊어지겠어.”

그의 말투가 현재의 그것과 뒤섞여 생소하게 들렸다. 악센트도 엉망이었다. 키이스 역시 연우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연우는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래쪽이 완전히 맞물리며 묵직한 고환이 닿았다. 키이스가 연우의 허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는가 싶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훌쩍 날아오르다시피 연우는 키이스의 위에 주저앉았다.

“아!”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래서부터 쳐올린 성기가 뿌리까지 꽉 들어차 왔다. 동시에 배 속이 찌르르 저려 오며 생소한 감각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키이스가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아래를 쳐 대기 시작했다. 짧고도 강하게 안을 드나드는 성기는 정확하게 내벽의 가장 약한 곳을 비벼 댔다.

“아, 안 돼…… 그만, 키이스!”

연우는 울 것처럼 애타게 소리쳤다.

“금방 했단 말이야…… 이상해, 잠깐, 나 잠깐만.”

배 속이 이상했다. 방금 전 남은 정액마저 쏟아 낸 터라 나올 게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건 사정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키이스, 그만, 잠깐만, 나, 나 화, 화장실…….”

연우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키이스의 팔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안간힘을 써 봤자 오히려 배 속에 품고 있는 성기를 흔들어 자극을 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연우의 노력은 키이스의 흥분을 더 부채질했다. 그 증거로 깊은 신음 소리와 함께 키이스가 연우의 목에 이를 박더니 한 팔로 그의 허리를 안고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더 크게 벌렸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애쓰던 연우는 허벅지를 잡아 누른 커다란 손 때문에 그마저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하아, 네가 날, 안 놔주잖아.”

키이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우의 목과 어깨를 지근거렸다.

“뺄 수가 없다고, 네 입이 내 걸 물고 안 놔줘서. 걱정 마, 싸고 싶으면 싸라고. 뭐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안 돼……!”

다급한 비명에 이어 키이스가 세게 아래를 쳐올렸다. 그와 함께 연우의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잠깐 의식이 멀어졌다.

“으, 아으, 으…….”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저절로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머릿속이 텅 비고 이어서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배 속에 흩뿌려진 정액이 흘러넘치고 달콤한 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그리고 연우는 맥없는 시선으로 자신의 성기에서 쏘아져 나오는 황금색의 액체를 지켜보았다.

“아…….”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훌쩍, 숨을 삼키며 연우가 한탄했다.

“화장실, 간다고 했잖아…….”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연우의 복잡한 마음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키이스는 여전히 그의 허리를 안은 채 자신이 잇자국을 남긴 목과 어깨에 번갈아 키스했다.

“괜찮아, 버리면 돼.”

그는 항상 제시하는 해결책을 이번에도 내놓았다.

“내일 사러 갈까? 스펜스도 같이.”

“하아…….”

연우는 한탄스러운 한숨만 내쉬었다. 가구와 카페트를 더럽혔다는 사실도 문제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아직 엉덩이에는 키이스의 성기가 들어와 있었다. 그것 역시 심란한데, 키이스가 갑자기 일어섰다.

“아!”

속이 비어 버렸다는 허전함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그는 이번엔 연우를 마주 보고 품에 안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묵직한 성기를 받아들였던 구멍은 무리 없이 열리고, 다시 꽉 차 들었다.

얼굴을 마주 본 키이스가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자신이 보인 추태가 한층 더 부끄러워졌을 때,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허리에 다리를 감은 연우를 안은 채 키이스는 선뜻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이제 그만해.”

침대에서마저 그런 꼴을 보인다면 정말 달아나 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다급하게 제지한 연우에게 키이스가 말했다.

“이제 더 나올 것도 없잖아.”

“그래도…….”

망설이는 연우의 입술에 키이스가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건 오줌이 아냐, 연우.”

“그럼?”

불안해하며 묻자 짧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키이스는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을 맞물렸다. 천천히 그가 허리를 움직이고, 깊이 들어왔던 성기가 앞뒤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연우의 배 속에서 팽창하고, 또다시 정액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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