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손가락을 움직이긴커녕 눈꺼풀을 들어 올릴 기운조차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산소가 모자란데도 불구하고 숨을 멈췄다 몰아쉬는 것을 반복했다.
배 속에는 아직 키이스의 성기가 들어와 있었다. 아니, 침대로 옮겨 오기 전 아주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고 나간 적이 없었다.
아.
등 뒤에서 연우를 안고 있던 키이스가 다시 그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연우는 사정없이 몇 번이나 도달했다. 그러나 이제는 체력적으로 한계였다. 더 이상 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키이스 역시 위기감을 느꼈는지 행위를 멈춰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성기는 연우의 안에 머물고 있었고, 발기는 불가능했지만 자극은 느껴졌다. 내벽의 주름이 오그라들어 품고 있던 성기에 달라붙자 등 뒤에서 키이스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기도 하고, 허리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유두를 집었다가 누르기도 하며 쉴 새 없이 몸을 어루만졌다. 연우 역시 그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숨을 쉬는 게 고작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몸만 내어 줬다. 이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또다시 시작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오늘은, 그만하는 거지?”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하니 가득 찬 정액이 요동을 쳤다. 키이스가 연우의 몸을 끌어안고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그래.”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키이스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배 속이 진동해서, 연우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즐거웠어?”
작은 소리로 묻자 키이스가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래.”
곧이어 그는 짓궂게 덧붙였다.
“연우 선배.”
순간적으로 연우는 아래를 바짝 조이고 말았다. 키이스가 윽, 작게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리고, 연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
황급히 사과하자 키이스는 웃더니 연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제 다른 후배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겠지.
확실하게 목적을 달성한 데다 부수적인 보상도 넘치게 받았기 때문에 키이스는 기분이 좋았다. 연우는 그런 그의 속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만족스럽게 흘러나오는 달콤한 페로몬 향에 취해 하아,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귓바퀴를 물었다 놓으며 키이스가 말했다.
“다음에는 내 차례지?”
잠깐 연우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이번만큼 심하게 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니까, 가끔 이벤트 정도라고 생각하면 괜찮겠지…….
그럼 그때는 내가 후배인가?
문득 떠올렸을 때, 연우의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키이스가 말했다.
“네가 묶이는 거고.”
아, 그쪽이었나.
무심코 납득했던 연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럼 내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이유가.
다음 내 차례가 왔을 때를 생각해서.
오싹 소름이 돋은 연우에게 키이스가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어, 아주.”
“…….”
연우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한 미래를 남겨 둔 채 밤이 지나고, 다음 날 그들은 키이스가 한 약속대로 가구를 사러 나갔다. 어째서 소파와 카펫과 테이블을 전부 다 바꿔야 하는 거냐고 묻는 스펜서에게 둘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은 채.
〈끝〉
키스 미, 슈가티츠(Kiss Me, Sugar Tits)
“싫어, 싫어, 싫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우는 둘째 아이의 모습에 조쉬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에 태워 오는 길에 잠에서 깬 아이는 정신이 들고 난 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자마자 자지러져라 울기 시작했다.
“여자 옷 싫어, 싫다고!”
“여자 옷 아냐.”
조쉬는 아이를 타이르며 말했다.
“세실, 잘 봐. 이게 어디가 여자 옷이라고 그러는 거야? 바지잖아.”
“핑크잖아!”
아이가 빽 소리쳤다. 조쉬는 잠깐 어이가 없어졌다가 다시 그를 설득했다.
“색이 뭐가 중요해, 너한테 잘 어울리면 됐지.”
세실이 조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조쉬 역시 푸른 티셔츠에 검은 진즈를 입고 있었다. 한 번 더 자신의 분홍색 셔츠와 하얀 반바지를 내려다본 세실이 또다시 울어 대기 시작했다.
“나만 분홍색이잖아, 나 여자 아냐, 나 여자 옷 안 해!”
“아, 시끄러워.”
그때까지 말이 없던 피트가 짜증을 냈다. 잠깐 세실의 울음이 멈춘 틈을 타 그는 말을 이었다.
“어때서 그래, 핑크색이면. 너한테 어울리니까 입힌 건데.”
“뭐가 어울려, 난 남잔데!”
그러는 피트는 하얀 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소리친 세실에게 피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어쩔 수 없잖아, 여자애같이 생긴 네 탓이지.”
“뭐라고?”
세실이 비명처럼 내질렀다. 그러자 갑자기 피트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대디, 세실은 파파 어렸을 때랑 똑같이 닮았다면서. 그럼 파파도 저렇게 예뻤다는 말이잖아. 물론 파파는 지금도 예쁘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괜찮은 거 아냐? 파파는 진짜 여자 옷 입고 광고까지 찍었다는데 넌 그 정도까진 아니잖아. 거기다 대디는 파파가 예뻐서 반했다면서. 그럼 세실도 대디 같은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잖아. 그런데 뭐야, 세실은 대디가 싫다는 거야?”
얼굴을 들이대며 말해, 하고 다그치는 피트의 행동에 세실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조쉬는 슬쩍 창밖을 볼 뿐 세실을 도와주지 않았다.
“으…….”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을 때였다. 속도를 줄인 차가 완전히 멈추고,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문을 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조쉬의 뒤를 이어 피트가 내리자 이제 남은 건 세실뿐이었다. 조쉬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리자, 세실. 그만 마음 풀고.”
쓴웃음을 짓는 대디의 얼굴을 본 순간 세실은 갑자기 폭발하고 말았다.
“대디, 미워!”
빽 소리를 지른 세실이 불시에 차에서 뛰어내렸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순발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조쉬조차 그를 놓치고 말았다.
“세실!”
조쉬가 당황해 소리쳤다. 저만큼 달려갔던 세실이 우뚝 멈춰 서더니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피트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제일 미워, 피트!”
“뭐래.”
피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세실은 금세 정원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 한숨을 내쉰 조쉬가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그가 멀어진 방향을 지켜보는데, 미리 나와 서 있던 집사가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정원 안이니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겠죠.”
조쉬는 씁쓸해하며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잘 토라지긴 하지만 금방 풀리니까 괜찮을 겁니다.”
“아이들은 모두 그렇죠.”
집사의 미소 띤 얼굴에 불쑥 피트가 끼어들었다.
“세실은 항상 불평불만이 가득해요. 무슨 말을 해도 삐져요.”
“피트.”
조쉬가 조용히 하라는 듯 두 번째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피트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표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조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피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세실은 지금 세상에 불만이 많을 나이니까 이해해 주자.”
“땅콩만 한 게.”
입을 삐죽거리며 작게 투덜거렸던 피트는 곧 허리를 펴고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계단을 올라가자 집사가 즉시 현관의 문을 열어 주었다. 홀에는 주인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쉬.”
먼저 앞으로 나선 연우가 반갑게 그들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악수를 나눈 뒤 그의 시선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안녕, 피트.”
“안녕하세요, 피트먼 씨.”
예의 바르게 그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한 피트를 보고 연우는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파파라치를 피해서 집에만 숨어 있어야 한다면 평생 어디에도 못 갈걸요.”
대수롭지 않게 웃는 조쉬를 보고 연우는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실은 오지 않은 건가요? 아직 많이 어려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번 찾아가 얼굴을 본 이후로 세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스펜서도 드디어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만나게 된다고 잔뜩 들떠 있었는데, 정작 저택을 방문한 것은 조쉬와 피트뿐이었다. 연우의 물음에 조쉬는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같이 오긴 했는데 좀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서 지금 삐져 있어요. 기분이 풀릴 때쯤 찾으러 가야죠.”
“저런.”
아이가 정원에 숨어 버렸다는 말을 듣고 연우가 감탄사를 흘리자 곧이어 조쉬가 화제를 바꿨다.
“스펜스는 지금 낮잠 잘 시간입니까? 보이질 않는군요.”
“아, 지금 마구간에 갔어요.”
연우는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보게 된 폴로 경기 후 스펜서에겐 말에 대한 흥미가 생겼는데, 그걸 안 키이스가 선물로 작은 조랑말을 사 준 것이다.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스펜서에게 그는 더 자라면 그때는 경주용 말을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부터 스펜서는 생각이 날 때마다 마구간에 가서 조랑말을 타거나 직접 먹이를 주며 함께 놀았다.
“형제가 없다 보니 같이 놀 상대가 부족해서…….”
말끝을 흐린 연우에게 조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형제가 있다고 해서 잘 놀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연우도 동생이 있으니 알겠지만.”
연우 또한 항상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혼자 자라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 조쉬가 말했다.
“좀 더 자라면 유치원에 보내요. 피트도 다니고 있는데, 친구도 생기고 괜찮더군요.”
“유치원에요?”
함께 응접실로 향하며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피트가 조쉬의 손을 붙잡았다.
“왜, 피트?”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자 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 말 보고 싶어.”
“말이라고?”
“아.”
슬쩍 끼어든 연우가 입을 열었다.
“찰스에게 말해서 마구간을 구경시켜 줄까요? 스펜스도 거기 있으니 함께 놀면 좋을 것 같은데.”
“좋죠. 피트, 그렇게 할래?”
“응.”
조쉬의 물음에 피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따르던 찰스가 피트에게 손을 내밀고, 자연스럽게 피트는 조쉬에게서 찰스에게로 옮겨 갔다.
“곧 차와 다과를 준비해 가겠습니다.”
절도 있게 말한 찰스는 연우와 조쉬가 먼저 응접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마침 고용인이 지나가, 찰스는 그를 불러 세워 피트를 넘겨주었다.
“이 꼬마 신사에게 마구간을 구경시켜 주게. 난 손님께 드릴 차를 준비해야겠으니.”
“알겠습니다.”
고용인은 깍듯하게 답한 뒤 피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다음에 피트를 넘겨받은 사람은 마구간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었다.
“어서 오렴. 네가 오늘 온다던 꼬마구나.”
또래보다 키가 큰 피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은 관리인이 말을 이었다.
“마구간에 오는 건 처음이니? 말은 타 봤고?”
피트는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우리 집엔 마구간이 없어요.”
“흔한 건 아니지.”
고용인은 뭐가 웃긴지 껄껄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렴. 지금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말을 소개해 주마. 위험하니까 혼자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그리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시 몸을 돌려 일을 시작했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던 피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어 명의 사람이 더 있었지만 그들 역시 건초를 옮기고 청소를 하느라 부산한 모습이었다. 아무도 피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동안 그들을 지켜보던 피트는 슬그머니 발을 옮겨 한 걸음씩 마구간으로 다가갔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게처럼 옆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역시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 두 걸음이 남았을 때, 피트는 다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헉.”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창고 안으로 들어선 피트는 긴장으로 꽉 막힌 숨을 한 번에 뱉어 냈다. 밖에서는 여전히 부산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피트의 움직임을 알아챈 이는 전혀 없는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피트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우와, 하고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구간 안은 영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두꺼운 기둥과 축대가 지지하는 높은 천장에는 커다란 창이 몇 개나 뚫려 있어 햇살이 가득히 들어왔다. 덕분에 마구간 안은 온도가 적당한 데다 공기까지 상쾌했는데, 흔히 풍기는 동물의 냄새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거기다 말이 들어가 있는 개별 공간도 제법 넓어서, 어떤 놈은 건초를 씹고, 어떤 놈은 천천히 자신의 축사를 거닐고, 또 어떤 놈은 선 채로 졸고 있었다.
평화로우면서도 고요한 분위기 속, 말들은 울타리 너머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피트는 파파나 대디보다 더 커 보이는 말을 올려다보며 경외심에 찬 기분으로 한 걸음씩 옮겼다. 그는 모든 종류의 동물을 좋아했지만 체이스의 공포증 탓에 개는 절대 키울 수 없었고, 다른 동물을 키워도 좋다는 말은 들었으나 내키지 않았다.
피트는 지금보다 어렸을 때, 체이스와 함께 개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체이스는 피트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무리를 했다가 결국 발작을 일으켰고, 그 뒤 피트는 개를 키우고 싶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또다시 체이스가 눈앞에서 쓰러질까 봐 겁이 났다.
어쩌면 고양이도, 햄스터도 무서워할지 몰라.
후, 한숨을 내쉰 피트는 눈앞에 있는 검은 말을 올려다보았다. 이 집 아이가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을 했을 때,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피트는 의아해하며 시선을 향했다.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아직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안에는 피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피트가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스펜스?
연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자 잠시 후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피트는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잠깐씩 사이를 두고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체 뭘 하는 걸까?
마침내 피트는 근원에 도달했다. 그곳은 마구간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이었는데, 지금까지 봤던 크고 우아한 말과는 전혀 다른 조그만 조랑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짧고 두툼한 다리의 절반은 하얬고, 갈기는 검은색에 몸은 윤기가 흐르는 갈색이었다. 신기한 것은 크기는 다른 말들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두 배쯤 되는 듯했다. 아마 두 개의 칸을 하나로 합한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은 뭐지?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말이 움직였다. 고개를 흔들며 또각또각 움직이는 말을 피트는 무심코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트는 움칠 놀랐지만 정작 조랑말은 별 관심이 없는지 느릿느릿 움직이며 주변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조랑말이 뭔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였다. 한쪽에 쌓여 있는 건초더미에 가서 냄새를 맡고 여기저기 살펴보는 것 같던 조랑말은 풀을 한 무더기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냥 배가 고픈 건가 생각했으나 조랑말은 다시 어슬렁거리며 이번엔 다른 쪽 건초로 향했다. 어쩌면 세 덩이로 나뉘어 쌓여 있는 건초를 하나씩 맛보려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조랑말은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대체 뭐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우와!”
갑작스러운 외침에 피트는 놀라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히 주춤거리며 물러나 꼴불견을 면한 피트의 시야에 건초더미로부터 누군가 불쑥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캐러맬! 잘했어, 날 찾아냈구나!”
뭘 찾아내, 자기가 뛰어나오고서.
아직 창백한 얼굴인 채로 피트는 떠올렸다. 머리는 물론 몸 여기저기에 건초가 묻어 있는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집에 돌아간다면 대부분은 등짝을 맞을 것이다. 물론 피트는 지금까지 맞아 본 적이 없지만, 드라마나 유튜브에는 등을 맞는 아이의 모습이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내심 한심해하는데, 허적거리며 건초더미에서 나오던 아이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아!”
비명과 함께 떽데구루루 건초더미 위를 굴러 버린 아이가 바닥에 꿍, 엉덩이를 부딪쳤다. 순간 피트는 어깨를 움칠했다. 분명히 울 것이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나겠지.
바로 세실이 자지러지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주변은 고요했다. 아이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눈만 깜박일 뿐 반응이 없었다.
뭐야, 자기가 다친 걸 모르나?
당황해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으하앗!”
그제야 통증이 느껴졌는지 넘어가는 비명을 지른 아이는 그러나 울지 않았다. 급하게 엉덩이를 토닥거린 그가 조랑말의 몸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괜찮아. 걱정 마, 캐러맬.”
조랑말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아이는 조랑말을 끌어안고 연신 괜찮다는 말을 했다. 문득 심술궂은 말이 떠올랐을 때, 조랑말의 머리에 얼굴을 비비던 아이와 갑작스레 눈이 마주쳤다.
“어?”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피트를 빤히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피트는 즉시 반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누구야?”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갑자기 피트는 마구간의 관리인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혼자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혼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입구에서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놀란 피트가 눈을 크게 뜨고 굳어졌다. 아이가 의아해하며 피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다시 피트의 얼굴로 되돌렸다. 피트는 안절부절못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걸리면 안 되는데.”
그걸 들은 아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내가 숨겨 줄까?”
“뭐?”
자신도 모르게 돌아보자 아이가 손짓을 했다.
“들어와, 여기 숨으면 돼. 내가 감춰 줄게.”
피트는 아이와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안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다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간 피트를 아이는 건초 뒤로 끌고 갔다. 피트가 몸을 웅크리자 아이는 주저 없이 건초를 덮어 버렸다. 덕분에 피트의 시야는 완전히 막혀 버리고, 이어서 남자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까 걔는 어디로 간 거야?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설마 혼자 여기 들어온 건 아니겠지?”
“에이, 위험하다고 했잖아.”
“아이는 잠깐 눈을 떼면 그사이에 사고를 친다니까.”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에 피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걸리면 무척 혼이 날 것 같았다. 내심 긴장하고 있는데, 거친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스펜스, 다 놀았니? 이제 캐러멜의 집을 청소해 줘도 될까?”
사뭇 다정한 말투로 묻는 걸걸한 음성에 바짝 얼어붙었을 때, 스펜스라고 불린 아이가 대답했다.
“나, 조금만 더 놀고 싶어요. 캐러멜은 마지막에 하면 안 돼요?”
어리광을 부리듯 묻는 말에 남자들은 뜻밖에도 껄껄 웃었다. 넘어가려나, 생각했지만 바로 다음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 그럼 저 건초만 좀 치울게. 괜찮지?”
선뜻 가까워진 음성에 남자가 울타리를 넘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렸을 때, 스펜스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 안 돼요! 건초가 없으면 숨바꼭질을 할 수 없잖아요.”
아까 조랑말과 하던 게 숨바꼭질이었던 모양이다. 술래가 찾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것도 숨바꼭질의 일종이라고 말한다면.
아이의 청원은 놀랍도록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남자들은 웃음이 서린 음성으로 그래그래, 하고 말하더니 선뜻 물러났다.
“그럼 다른 말들을 먼저 씻기도록 하지. 스펜스, 혹시 이만한 사내아이를 발견하면 우리한테 얘기해 다오. 어딜 갔는지 안 보여서 말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착하기도 하지.”
남자들은 아이를 칭찬한 뒤 다른 말에게로 향했다. 소음은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동안 숨죽여 웅크리고 있던 피트는 갑자기 건초가 파헤쳐져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더 엉망이 된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갔어.”
머리에 건초가 수북이 쌓인 아이는 피트의 손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피트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으나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은근슬쩍 그의 도움을 받은 척 일어섰다. 헤헤, 웃은 아이가 말했다.
“이제 가도 돼.”
그 얼굴을 보자 피트는 괜히 심술이 났다. 웃는 얼굴도 너무 귀엽지만 당황해하면 얼마나 더 귀여울까.
“아직 못 가. 저 사람들이 마구간 앞을 지키고 있잖아.”
“아.”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스펜스가 입을 벌렸다. 저 동그란 뺨을 잡아당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스펜스가 헤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아저씨들하고 놀고 있을게, 그동안 달아나.”
“뭐라고?”
당황한 것은 피트 쪽이었다. 조금 곤란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벌써 스펜스는 울타리를 건너고 있었다.
“자, 잠깐.”
다급하게 아이를 불러 세운 피트가 물었다.
“저기, 난 피트야.”
그때 지붕 위로 지나던 해가 크게 빛을 드리우고, 스펜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건초를 수북하게 뒤집어쓴 갈색 곱슬 머리칼과,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진한 푸른 눈동자와, 부드럽게 솟아오른 핑크빛 뺨과, 작고 도톰한 빨간 입술이 그대로 피트의 시야에 들이박혔다.
“응, 난 스펜스야.”
피트는 잠시 멍하니 그를 보기만 했다. 마치 느린 화면처럼 서서히 아이가 몸을 돌리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피트가 다급하게 울타리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벌써 스펜스는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타다닥, 타다닥, 부산한 발소리가 덩달아 멀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피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이미 사라진 스펜서의 자취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