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6화 (67/77)

* * *

모두 미워.

세실은 나무 기둥에 기대어 훌쩍거리며 울었다. 잠깐 잠이 든 사이에 분홍색 옷을 입힌 대디도 싫고, 하필 자신의 편을 들어 줄 타이밍에 함께 있지 않았던 파파도 싫고, 무엇보다 가장 싫은 건 얄미운 피트였다.

아직 아는 단어가 많지 않고 어휘가 짧은 탓에 고작해야 떼를 쓰는 게 전부인 세실을 피트는 매번 현란한 말솜씨로 녹아웃시켰다. 너무너무 분한데도 불구하고 세실은 도무지 말로 그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고, 오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제일 화가 치미는 것은 아무도 자신을 달래려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보란 듯이 휑 하니 달아났는데 슬쩍 돌아보니 글쎄 아무도 세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믿고 있던 조쉬마저도 피트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다 미워.

울컥 눈물이 나와 세실은 무릎을 감싸 안고 훌쩍훌쩍 울었다.

모두 다 나를 싫어하나 봐.

설움이 목을 치받아 끅끅, 억눌린 숨소리가 났다.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뭐 해?”

“으악!”

난데없는 목소리에 세실은 그만 울던 것도 멈추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버렸다. 가득 눈물이 고여 있던 세실의 눈앞에 부옇게 누군가의 형체가 비쳐 들었다. 한 차례 눈을 깜박이자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웬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세실은 아직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고, 스펜서는 그런 세실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겨우 숨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뒤, 세실이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히끅, 하고 딸꾹질이 나오고 말았다. 세실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펜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세실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반대로 기울인 채 눈을 깜박이는 그를 보자 세실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괜찮아?”

기다리다 지쳤는지 스펜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세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그냥 바라만 보았다. 작은 손이 세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아 세실은 와앙, 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끅, 끄윽, 끅, 흐윽.”

섧게 울음소리를 내는 자신보다 작은 아이를 보고 스펜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얼굴을 닦아 줄 손수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잠시 고민했던 스펜서는 그냥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울지 마, 착하지.”

등까지 팔이 닿지 않아 대신 뒤통수를 토닥거리며 말하자 세실은 더 크게 울었다. 누군가 달래 주자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서러움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흐끅, 끅, 흐윽, 윽.”

겨우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게 된 무렵에는 거센 흐느낌만 남았다. 스펜서는 여전히 세실을 토닥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세실은 눈물이 멈추고 나자 자신을 안고 달래 준 소년이 궁금해졌다.

“넌 누구야?”

아직 가라앉지 않은 거친 숨결 사이로 물은 세실에게 스펜서가 대답했다.

“난 스펜스. 너는?”

“세, 실.”

때마침 터진 흐느낌 때문에 이상한 소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스펜서는 용케 그것을 알아들었다.

“세실, 왜 울고 있었어?”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스펜서를 세실은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운 이유를 설명하자니 썩 내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라고 난 뒤에 그는 그때 자신이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당시엔 그 감정의 정체를 알기 어려워서, 세실은 머뭇머뭇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슬퍼서.”

“왜?”

스펜서가 또다시 물었다. 세실은 순간 짜증이 나서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아야!”

무방비했던 스펜서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짧게 소리쳤다. 순간 세실은 죄책감이 들었으나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다행히 스펜서는 울지 않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다행이다, 안도하면서도 사과의 말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망설이던 세실에게 스펜서가 다시 물었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여긴 우리 집인데, 왜 온 거야?”

“어?”

세실은 눈을 깜박이다 더듬더듬 대답했다.

“대디가, 데려왔어. 나 낮잠 자는데…… 일어나 보니까, 차 안에…….”

말을 하다 보니 또다시 울컥했다. 이 사달이 난 이유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문 세실의 반응을 본 스펜서가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갑자기 세실이 화가 치민 음성으로 내뱉었다.

“여자 옷을 입고 있었어!”

“여자 옷?”

스펜서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래, 하고 세실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봤자 자신의 어깨 조금 넘는 키의 작은 아이는 힘껏 몸을 펴며 분노를 쏟아 냈다.

“봐, 분홍색이잖아. 난 여자 옷 싫어, 싫다고!

발로 바닥을 구르며 악을 쓰는 아이를 스펜서는 당황해하며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는 세실이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세실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세실은 급기야 옷을 벗으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스펜서는 급히 그를 말렸다.

“세실, 왜 그래. 옷 벗으면 안 돼.”

“싫어, 벗을 거야! 놔, 놓으라고!”

“그렇지만 세실, 그 옷은 아주 예쁜데.”

스펜서의 말에 곧바로 세실이 소리쳤다.

“예쁘긴 뭐가 예뻐, 그럼 네가 입어!”

“그래.”

“…….”

잠시 세실은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자 스펜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입을게, 바꾸자.”

흔쾌히 말한 스펜서가 먼저 옷을 벗었다. 그 모습을 세실은 그냥 보기만 했다.

뭐야? 얘는.

자신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던 것도 잊고 멍하니 보고 있는데, 셔츠를 겨드랑이까지 올린 채 그 이상 벗지 못해 온몸을 뒤틀며 낑낑거리던 스펜서가 두 팔을 위로 뻗고 허리를 숙였다.

“세실, 도와줘.”

“어? 어.”

얼떨결에 셔츠의 팔을 잡아당기자 스펜서는 그제야 몸을 빼고 홀라당 뒤로 물러났다.

“고마워.”

환하게 웃은 스펜서는 아직 세실이 들고 있던 셔츠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번엔 세실에게 만세를 시켰다. 자신이 한 것처럼 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셔츠를 잡아 뺀 스펜서는 그 자세에서 자신이 벗은 셔츠를 세실에게 입혔다.

“됐다.”

어찌어찌 팔을 끼워 넣고 머리를 쏙 빼는 것까지 성공한 스펜서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며 허리를 폈다. 세실은 어리둥절해져 자신이 입은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에 뒹굴다 온 건지 건초와 먼지가 잔뜩 붙어 있는 셔츠는 그에겐 다소 컸지만 색깔만큼은 남자다운 파란색이었다.

고개를 들자 스펜서가 셔츠를 입으려 낑낑대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세실이 입고 있던 핑크색 셔츠였다. 그는 머리를 넣는 데는 성공했으나 도무지 팔을 끼울 수 없었다. 잠시 고전하던 스펜서는 곧 포기하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같이 간식 먹으러 갈래?”

저택으로 돌아가면 누군가 옷을 바로 입혀 줄 것이다. 스펜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세실에게 제안했다. 세실이 자신보다 어리고 아직 체격도 작아 그의 셔츠가 스펜서에게 맞을 리 없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세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스펜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가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펜서만 나를 달래 줬어.

거기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 주고 위로해 주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는데, 혼자 우는 나를 찾아내고 울지 말라고 말해 주다니.

그 순간 세실의 눈에는 이 작은 소년이 세상의 누구보다 완벽해 보였다.

스펜스는 왕자님 같아.

세실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생각했다. 언제라도 나를 구하러 와 줄 왕자님.

<세실도 대디 같은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잖아.>

불현듯 얄미운 피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재수 없지만 그 말만큼은 사실인 것 같았다. 세실은 완벽한 짝을 만난 것이다. 파파와 대디처럼.

내 왕자님.

세실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스펜서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스펜스.”

“뭘.”

홍조를 띤 채 건넨 말에 스펜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세실은 또 한 번 그에게 반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세실의 울음은 완전히 멈췄고, 눈은 스펜서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가슴 벅찬 기분과 함께 그는 생각했다.

스펜스.

내 왕자님.

그리고 시간은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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