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8화 (69/77)

* * *

희미하게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금씩 잠이 깨면서 소리는 점차 더 명확해졌다.

“……응.”

작은 소리와 함께 뒤척이던 찰나 허리에 얹힌 묵직한 감각에 눈을 떴다. 전날 잠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연한 듯이 연우의 허리를 안고 잠들어 있는 키이스의 얼굴을 보고 연우는 잠깐 놀랐다가 이내 표정이 풀었다. 키이스가 들어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 전혀 몰랐다니 약에 취해 완전히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연우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옷을 입고 있는 연우와 달리 키이스는 전라였다. 그가 잘 때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은 연우와 섹스를 하건 안 하건 변하지 않았다. 익히 아는데도 키이스가 알몸으로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연우는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고 맥박이 빨라졌다.

이 남자가 내 것이라니.

아이를 낳고 벌써 몇 년이나 함께 살았는데도 이따금 그는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다시 잠들었다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꿈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는 그저 평범한 비서고, 이 남자는 내게 관심조차 없던 그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키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흠칫 놀란 순간 그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아!”

당황한 연우의 허리를 잡아 낚아챈 키이스는 그대로 자신의 몸 위로 연우를 올려놓고 눈을 떴다.

“뭘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어?”

깨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은 연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연우를 보고 키이스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연우는 괜히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감이 밀려왔다.

꿈이 아니구나.

“왜 그래?”

그때까지 웃고 있던 키이스의 음성이 돌변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자 뒤늦게 코끝이 찡해졌다. 연우는 심각해진 키이스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미루어 짐작했다.

“아니, 그냥.”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계속하려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연우의 귀를 붙잡았다.

“아야.”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비명이 흘렀다. 키이스는 손의 힘을 느슨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놓아준 건 아니었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표식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손을 내린 키이스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얼굴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설마 또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설마. 아냐.”

급히 부정한 연우는 괜히 민망해져 중얼거렸다.

“그냥…… 믿어지지 않아서, 당신이 옆에 잠들어 있는 게.”

“이제 와서?”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묻는 말에 연우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키이스는 또 오해했다.

“아직 열이 안 내린 거 아냐? 얼굴도 너무 빨갛고,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열에 취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다니 키이스답긴 했지만 연우를 허탈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연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선뜻 일어나더니 허전해할 틈도 없이 전화기를 들어 집사에게 약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더 쉬어, 무리했다가 감기가 심해지면 곤란하니까.”

가볍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가운을 걸친 후 방을 나갔다. 스펜서를 보러 가는 것이다. 평소에는 연우에게 키스를 퍼붓다가 그대로 안아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것이 한 번이 되면 스펜서가 일어날 시간이 되어 키이스가 그를 깨우러 갔고, 두 번이 되면 스펜서가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그럴 때는 대부분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고, 대신 집사가 문 앞에 서 있는 스펜서를 데려가 아침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놀아 주곤 했다.

오늘은 그런 평범한 일상이 모두 생략되었다. 스펜서가 깨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키이스가 어떻게 보낼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는 일찌감치 나가 버렸고, 연우는 집사가 가져온 약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허전한 기분을 느꼈지만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는 식사도 침실에서 혼자 끝냈다. 키이스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몸은 좀 어때?”

반쯤 먹은 식사를 물린 뒤 밀크티를 마시고 있던 연우는 그를 보자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아주.”

물론 키이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연우는 언제나 뭘 물어봐도 괜찮다거나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꼭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체온을 측정해 미열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키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사용한 체온계를 집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쉬어. 감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스펜서는 베일리가 돌봐 주기로 했으니까.”

“조쉬가? 왜?”

의아해하며 묻자 키이스는 집사가 들고 있던 셔츠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출장이야. 2주 정도 걸릴 거야.”

“출장을? 2주나?”

놀란 연우의 물음에 넥타이를 매던 키이스가 대답했다.

“그래, 일정이 애매해서 그쪽에 머무는 게 나아.”

“그렇구나…….”

연우의 말끝이 묘하게 흐려지자 그것을 눈치챈 키이스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아니.”

연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스펜스가 많이 보고 싶어 할 거 같아서.”

“너는?”

갑자기 물은 말에 연우가 눈을 깜박이자 키이스는 집사가 들고 있는 슈트 재킷에 팔을 꿰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내가 안 보고 싶어?”

“그야, 당연히…….”

왠지 부끄러워져 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보고 싶지, 아주.”

대답이 마음에 든 듯 키이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허리를 숙였고, 연우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그를 기다렸다.

입술이 닿기 전부터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살며시 입술을 핥은 혀가 이어서 안으로 들어오고, 입술이 맞물렸다. 들뜬 신음이 입가로 흘러나와 저절로 어깨의 긴장이 풀어졌다. 키이스가 부드럽게 허리를 쓰다듬자 곧바로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맞닿은 입술이 웃음을 짓는다. 연우는 애가 타 그만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으흠.”

뒤에서 들린 헛기침 소리에 키이스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연우 역시 허공에서 두 팔을 어색하게 멈춰 버렸다. 곧이어 찰스가 입을 열었다.

“출근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니면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신다고 전할까요?”

키이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이 떨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연우는 민망해진 두 팔을 내려 등 뒤로 감췄다.

“아니, 됐어.”

다시 허리를 편 키이스에게 집사는 소매의 커프스를 내밀었다. 연우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키이스가 커프스 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준비를 끝낸 키이스는 다시 허리를 숙여 연우에게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마치 혹시나 같은 과오를 저지를까 두렵기라도 한 듯 아주 빠르게 멀어졌다. 대신 그는 연우를 안아 들더니 그대로 침대에 내려놓았다. 목까지 담요를 끌어 올려 준 키이스가 연우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다녀올게. 누워 있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잠깐…….”

미처 일어날 틈도 없이 연이어 말한 키이스는 연우가 일어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집사 또한 그의 뒤를 따르고, 이내 연우는 혼자 남았다. 그를 불러 세우려 했던 연우는 허망한 침묵 속에 잠시 멍해졌다.

괜찮아.

침대 안으로 꾸역꾸역 몸을 가라앉히며 그는 자신을 다독거렸다. 괜찮을 거야, 그때랑은 다르니까. 무심코 귀를 만지작거렸던 연우는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표식의 감촉에 안도하며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후우.”

다시금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을 때였다. 불현듯 눈물이 차올랐다. 감기 때문이야, 그는 생각했다. 열이 나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괜히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것뿐이다. 왜냐면, 그건, 지난 일이니까, 그건, 다시는, 아마도, 결코.

소파에 앉아 여자와 키스를 나누던 키이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히 되살아났을 때,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놀란 연우는 귀를 잡은 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뜻밖에도 선뜻 들어선 것은 키이스였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그의 손으로 향했다. 아직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있던 연우는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더니 이어서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침대맡에 와서 섰다.

“같이 가자.”

불쑥 내뱉은 말을 연우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키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자고, 출장. 너도.”

급하게 이어진 말은 순서가 엉망이었다. 멍하니 키이스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연우의 머릿속에 그의 말은 한 단어씩 서서히 입력되었다. 그리고 겨우 그것을 모두 이해했을 때,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숨을 삼키고 말았다.

“정…… 말?”

자신이 없어 목소리는 어색하게 끊어졌다.

“정말, 나도 가도 돼……? 같이?”

“그래.”

키이스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스펜스도 데려가자. 셋이서 함께 지내는 거야, 좋지?”

“응.”

연우의 얼굴이 환해지며 자연스레 목소리가 높아졌다.

“좋아, 너무.”

감정을 참지 못하고 연우가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키이스가 그를 끌어안고, 연우는 기쁘게 마주 안았다.

“고마워.”

한숨처럼 속삭이자 키이스의 달콤한 향기가 폐 속 가득히 스며들었다. 그러자 안도감과 함께 연우의 페로몬이 흘러넘쳤다. 순간 키이스는 멈칫했으나 연우를 떼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힘을 줘 끌어안는 통에 연우 또한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아마 감기에 걸려 체력이 더 떨어진 탓일 것이다.

연우는 내심 아쉬웠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키이스와 함께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들뜨고 한없이 가벼워졌다. 방금 전 자신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던 기억도 순식간에 퇴색해 버릴 정도였다.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키이스를 배웅할 수 있었다. 키이스는 떠나기 직전에 덧붙였다.

“쉬고 있어, 출장지에서의 일정은 엠마에게 말해 둘 테니까.”

“응.”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얼굴을 붉히며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키이스.”

그 말에 키이스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물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침대에 앉은 채 손을 흔드는 연우를 뒤로하고 키이스는 방을 나왔다.

“……하아.”

문을 닫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간신히 뱉어 낸 그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급히 물었다. 키이스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인 뒤에야 비로소 자세를 바로 했다.

“됐어, 괜찮아.”

“페로몬 향이 아주 심합니다.”

“그래, 연우의 페로몬을 뒤집어썼지. 엄청나게 말이야.”

걱정스러워하는 집사의 말을 받아넘긴 키이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무지의 대가인가.”

“네? 무슨…….”

의아해하는 집사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번엔 모르고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하며 키이스는 생각했다. 연우는 자신이 상처받았던 일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몰랐을 것이다. 그나마 모두 말한 것도 아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연우의 우는 얼굴에 키이스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빨리 알아챘지.

키이스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직전 깨닫고 되돌아가길 잘했다. 연우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자 키이스는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감기에 걸린 사이 출장이라니, 기가 막힌 데자뷔가 아닌가. 혹시 내가 기억해 내지 않았다면,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상상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연우는 키이스를 의심하고 하필 이때 감기에 걸린 자신을 자책했을 것이다. 또다시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키이스는 정말 타이밍 좋게 그 일을 기억해 낸 자신을 마구 칭찬해 주고 싶어졌다.

괜찮아.

준비된 세단의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잘하고 있어. 아주 잘하고 있다고, 나는.

연우의 환하게 웃던 얼굴과 기쁨에 넘쳐흐르던 페로몬을 떠올리자 안도감에 이어 다른 것이 밀려왔다. 고작해야 하루를 참은 것뿐인데 자신이 벌써 안달이 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표식이 있으니 굳이 매일같이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의식적으로 귀를 만져 본 그는 선연히 남아 있는 흔적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의 감기가 나을 때까지 길어야 사흘이다. 가장 오래 감기를 앓았을 때도 나흘을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키이스로서는 정말로 기나길었던 금욕 기간이 끝난 뒤, 대가는 매번 넘치도록 받았다. 연우가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앓아눕는 일이 예정된 수순이긴 했지만.

지금은 출장이 먼저지.

키이스는 생각했다. 엠마에게 연우와 스펜서가 동행할 테니 그에 따른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려야 한다. 연우는 감기에 걸렸으니 누워서 쉴 침대가 필요하다. 엠마에게 지시하면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할 것이다. 연우가 나을 때까지 스펜서는 찰스가 봐야 할 테니 출장까지 따라오라고 해야겠지. 저택을 돌보는 일은 찰스가 대책을 세울 테고.

그의 지시대로 고용인들은 빠르고 확실하게 움직였고, 출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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