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서 오십시오, 피트먼 씨.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입에 발린 형식적인 인사를 읊으며 사무적인 미소를 짓는 지배인의 얼굴에 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다른 때라면 연우를 팔에 안고 스펜서를 어깨 위로 올려 목말을 태웠을 텐데, 오늘 안고 있는 건 연우뿐이었다. 아직 의사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 나았는데.”
연우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렸다.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달라질 건 없어. 스펜스는 찰스가 돌볼 테니까.”
그 말대로 아이는 찰스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키이스의 전용기에서 내리기 얼마 전에 잠이 든 스펜서는 호텔에 도착한 지금까지 깊은숨을 몰아쉬며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키이스에게 안겨 예약한 방으로 향한 연우는 찰스가 스펜서를 안고 옆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어…….”
“이틀 정도는 따로 방을 쓰는 게 나아.”
‘완전히 바이러스가 없어질 때까지.’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한 키이스는 침대까지 걸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연우를 내려놓았다.
“필요한 건 없어?”
키이스의 물음에 연우는 물을 부탁했다. 물이 담긴 유리컵을 건네받던 연우가 잠깐 움칠했다. 정말 찰나에 가까운 머뭇거림이었지만 키이스는 보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우는 물을 받아 마셨으나 키이스의 마음은 복잡할 뿐이었다.
기억을 희석하려면 오래 걸릴지도.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임에도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서로 표식을 새겼고,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연우는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상처가 너무 커서 자꾸 불안해지는 건가?
어느 쪽이든 연우를 안심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시간이 걸리고 가진 것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하더라도.
“여기서 일할까?”
연우에게서 빈 유리컵을 받아 든 키이스가 불쑥 물었다. 겨우 갈증을 해결한 연우는 뜻밖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서? 어떻게?”
“화상 회의를 해도 되고,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가져오라고 하면 되고.”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잖아.
연우는 생각했다. 일정 중에 도저히 뺄 수 없는 것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연우가 말했다.
“어차피 약 먹으면 종일 잘 텐데…… 일정대로 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벌써 잠이 온다는 듯이 그는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키이스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우의 말을 따라 그를 혼자 두고 나갈 만큼 키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호된 경험은 이미 충분히 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학습 효과가 있어야 사람인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키이스가 갑자기 휴대 전화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엠마?”
귀에 익은 이름에 연우는 잠자코 기다렸다.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자리를 하나 더 준비해 놔. 그래.”
흘긋 연우를 내려다본 키이스가 말했다.
“연우가 있을 거야.”
“뭐?”
- 네?
전화기 건너편에서 엠마의 놀란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연우만큼 엠마 또한 당황한 게 분명했다. 그런 둘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동하는 장소마다 연우의 자리도 함께 만들어. 일정이 길어져도 상관없으니까 여유 시간을 충분히 넣고. ……아니, 연우는 감기에 잘 걸리니까 따뜻한 쪽이 좋아. 그래. 커피에는 우유를 꼭 넣고…….”
몇 마디 더 지시를 내린 뒤 키이스는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연우에게 그가 물었다.
“그럼, 갈까?”
“어…….”
연우는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출장에 따라온 것만 해도 충분한데 일하는 장소마다 따라다니다니, 키이스를 포함해 모두에게 민폐였다.
“아니, 괜찮아, 키이스. 정말로. 난 여기서 쉬고 있을게…….”
연우는 사양하듯 손을 들었으나 키이스는 망설임 없이 그를 안아 들었다.
“키이스…….”
“내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 거야.”
다시 말을 하려던 연우를 키이스가 가로막았다. 멈칫한 연우를 내려다보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만약에 가능했다면 진작부터 널 가는 곳마다 이렇게 데리고 다녔을 거야. 그러니까 놀라워할 것도 없어.”
“그런…….”
당황해 말을 더듬었던 연우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스펜스 때문에……?”
“일부는 그렇지.”
키이스는 짧게 답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른 이유는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키이스가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급히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을 뒤로한 채 연우는 키이스에게 안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른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해졌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 연우는 마음을 접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걸을 수 있어.”
키이스가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에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있는데 왜 네가 걸어야 하지? 말해 봐, 왜 네가 걸어야 하는지.”
“…….”
말문이 막힌 새 엘리베이터가 목적 층에 도착했다.
*
*
“연우!”
반갑게 그를 맞이한 엠마가 이내 키이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피트먼 씨.”
여전히 키이스에게 안긴 채로 차에서 내린 연우는 이 민망한 상황에 일부러 아픈 척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감기 기운은 이미 사라진 지 꽤 됐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다 나았다고 하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인가. 연우는 일부러 콜록, 콜록 하고 두어 번 인위적으로 기침을 한 뒤 슬며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요, 엠마?”
“아직 감기가 남아 있나 보네요. 무리하지 않는 게 좋죠.”
미소를 띠며 연우를 위로한 엠마는 곧 사무적인 태도로 키이스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이쯤 내려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키이스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준비된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뭐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줄 건가?
틀렸다. 도착음이 들릴 때까지 연우는 키이스에게 안겨 있었다.
복도에서?
또 틀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혹시, 사무실에서?
이번에도 틀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책상으로 향했다.
서, 설마.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주저 없이 옮긴 발걸음은 책상을 돌아가고 나서야 멈췄고, 준비된 의자에 키이스는 그대로 앉았다. 연우를 두 팔에 안은 채로.
“자.”
당황한 연우를 고쳐 안아 편하게 자세를 고정한 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시작해.”
연우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멍하니 키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