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말 괜찮겠어요, 연우?”
비서실에 마련해 둔 의자에 앉은 연우에게 차를 준비해 주며 엠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연우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괜찮아요. 그보다 일하느라 바쁜데 미안해요, 폐를 끼쳐서.”
“아니에요, 이 정도야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줘요.”
미소를 지었던 엠마는 손목의 시간을 확인하더니 급히 서류를 챙겼다.
“미안해요, 곧 회의 시간이라서. 그럼 연우, 이따 봐요.”
“알았어요, 엠마. 고마워요.”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던 연우는 어색하게 팔을 내렸다. 주변에는 모두가 바쁜 사람들뿐이었다. 비서실 안쪽에 마련된 응접실은 만남이 예정된 손님이 기다리는 장소인 듯 불투명한 유리로 반쯤 가려진 벽 안에 있었는데, 덕분에 밖에서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혼자 멀거니 앉아 있자니 무척이나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딱히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있으면 되니까.
스스로를 타일렀던 연우는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키이스는 연우를 무릎에 앉힌 채 한동안 서류를 살피고,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 엠마는 옆에 서 있다가 이따금씩 필요한 서류를 찾아 내민다거나 짧게 코멘트를 하기도 했지만 주로 조용히 있었다.
문제는 사무실에 들어와 보고하는 사람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하나같이 키이스의 무릎에 옆으로 걸터앉아 있는 연우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급히 표정을 감추고 키이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은 최대한 간단히 빠르게 준비해 온 말을 꺼냈으나 문제는 키이스였다. 묵묵히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는가 싶다가도 불쑥 연우의 허리를 쓰다듬거나, 허벅지 안쪽을 잡는다거나, 엉덩이를 더듬는 바람에 방심했던 연우는 기겁을 하며 분위기를 깨기 일쑤였다.
<키이스.>
급기야 네 번째 사람이 나가고 난 뒤 연우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렀다.
<나는 그냥 다른 사무실에서 기다려도 될까?>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연우의 엉덩이를 잡더니 물었다.
<왜?>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만져 대니까! 남들 앞에서!
연우는 소리치고 싶은 걸 참고 애써 웃어 보였다. 아직 엠마가 남아 있는 것이다.
<좀 피곤해서. 당신과 있는 건 좋은데, 정말 좋은데…… 자세도 불편하고, 사람들 보기도…… 민망해서.>
내 기분을 알아주려나?
연우는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키이스의 표정을 보니 그런 일은 없었다. 키이스는 찡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엠마.>
<네, 피트먼 씨.>
<아직 안 끝났나?>
키이스의 물음에 엠마는 잠깐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곧 머리를 들었다.
<한 분 남았습니다. 그러고 회의가 잡혀 있습니다. 지금부터 20분 뒤입니다.>
<회의를 하는 동안에 그럼 쉬고 있을게.>
연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런 연우에게 키이스는 입가를 비뚤어뜨리며 조소를 짓더니 물었다.
<내가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거 아니었어?>
말을 하면서 키이스가 손을 연우의 허리로 옮겼다. 그건 그랬지만, 하고 연우는 내심 생각했다. 굳이 이런 식으로 결백을 증명할 건 없잖아. 속으로나마 야속하게 덧붙였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왜 굳이 이런 식으로.
연우는 슬쩍 엠마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키이스는 엠마에게 내 자리를 준비해 두라고 했었는데. 그러면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설마 그 핑계로…….
퍼뜩 스친 생각을 그는 즉시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키이스가 뭐 하러 일부러 이런 짓을 해, 일을 하기도 불편하게.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과도하게 애쓴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연우는 키이스에게 미안해졌다. 괜한 자신의 의심으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자신은 자세가 불편하다는 둥 무안하다는 둥 불평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자신이 그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사실이라 연우는 죄책감을 안고 입을 열었다.
<난 다른 자리에서 좀 쉴 테니까 당신은 남은 보고를 끝내. 회의도 있잖아, 그렇지? 거기까지 날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그 말에 연우의 셔츠를 바지에서 끌어 올려 맨살을 막 드러냈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반응에 연우는 순간적으로 판단이 흔들렸다.
회의실까지 날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을 리가 없잖아.
……없을까?
자신감이 사라지려는 찰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불편한가?>
<당연하지…….>
대답을 하고 나서 자세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정정할 필요까진 없어서 입을 다물자 키이스는 후, 한숨을 내쉬더니 드디어 연우의 허리를 만지던 손을 뗐다.
<엠마.>
<네, 피트먼 씨.>
<연우를 쉴 만한 장소로 안내해 줘. 만들어 놨겠지?>
<네, 지시대로 준비해 뒀습니다.>
엠마의 빠른 답변에 키이스는 그제야 연우의 허리를 잡더니 그대로 일으켜 주었다.
<보고는 혼자 들을 테니까 연우를 데려가. 회의실에 가 있지.>
<알겠습니다.>
엠마는 주저 없이 돌아서서 먼저 문을 열었다. 서둘러 일어선 연우는 충동적으로 키이스의 뺨에 키스했다.
괜찮겠지, 이 정도는.
내심 쑥스러운 마음을 참고 그는 급히 몸을 돌려 기다리고 있던 엠마에게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 안내받은 휴게실에서 혼자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후우.
무심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던 연우는 벌써 커피가 차갑게 식었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한 기분으로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연우는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차라리 호텔에 있는 게 나았을까? 어차피 스펜서하고 시간을 보낼 수도 없으니 지루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밖에 나온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바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
연우는 잠시 동안 유리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나도 예전엔 저 무리에 있었는데. 연우가 키이스의 비서 일을 그만둔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다. 하지만 바쁘게 일을 하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즐거웠는데.
생각해 보면 자신은 무척이나 일을 좋아했었다. 키이스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고 불쾌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을 완수해 낼 때마다 보람과 긍지를 느꼈었다. 키이스가 자신을 그저 비서로만 보던 시절에도 그는 연우의 비서로서의 능력만큼은 높이 쳐주었던 것이다.
그만두었더니 집까지 찾아왔잖아.
그날 연우의 집으로 와 주식을 대가로 줄 테니 돌아오라고 했던, 키이스의 피곤에 찌든 모습을 떠올리자 재밌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연우는 짧게 웃고 말았다. 지금 그 주식에 대해 말하면 키이스는 뭐라고 할까? 기억은 하고 있을까?
……그립다.
바쁜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일을 하던 때가 연달아 떠올랐다. 엠마나 다른 비서들과 함께 일에 대해 불평을 하기도 하고, 보너스에 기뻐하기도 하고, 휴가에서 돌아오면 선물을 나누기도 하며 평범한 일상에 찾아오는 작은 이벤트들에 즐거워했는데.
하아.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연우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