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연우, 어서 와요.”
전날과 마찬가지로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엠마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눈 연우는 멋쩍은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지만 잘 부탁해요, 엠마.”
“저야말로요. 연우가 도와준다니 정말 잘됐지 뭐예요.”
빙긋 웃은 엠마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서류를 챙겨 키이스를 따라갔다.
아침에 눈을 뜬 연우는 전날 있었던 일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현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밤새 키이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돌발사고 또한 언제나 생기는 법이니까.
하지만 키이스의 생각은 그대로였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키이스와 함께 차를 타고 편하게 목적지까지 온 연우는 엠마의 도움을 받아 임시 직원이 되어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얼마 만이지.
양복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스펜서를 떼어놓고 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세상에 그 나이 또래 아이를 가진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로가 됐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 스펜서는 혼자 있어야 하니까…….
마음 한구석이 다시금 아파 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쾌활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제 본 부팀장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은 아무리 적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무방비하게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릴 것처럼 스스럼없었다. 연우 역시 이 남자의 천진한 미소에 쉽게 마음을 열고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많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간단히 악수를 한 뒤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소 들뜬 기분으로 물었다.
“저,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떤 것부터 하면 좋을까요?”
“음, 일단 자리는 여기예요. 오세요.”
먼저 돌아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연우는 내심 긴장했다. 어차피 여긴 본사도 아니다. 잠깐 출장을 온 것이고, 키이스의 볼일이 끝나면 떠날 것이다. 만약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키이스의 회사에선 곤란하고…….
그냥 분위기만 파악하는 거야.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쁜 분위기에 빠르게 동화되었다. 일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서 물어보고 기꺼이 어떤 일이건 도맡아 했다. 그래 봤자 아직 회사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받아들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몇 시간이 지나자 예전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며 일의 진행 상황을 이해하고 나아가 일부는 예측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화 응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자 연우는 자신감이 붙었다.
한 달 정도만 지나면 바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뿌듯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으며 그는 잔뜩 기대에 차 생각했다. 작은 회사라도 좋으니까 어디서든 일하고 싶다.
“연우.”
필요 없는 서류를 파쇄기에 넣어 분쇄하고 있던 연우는 마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이스가 문밖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야.”
“아.”
벌써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그제야 연우는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이유를 깨닫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듯이 그를 안아 들려던 키이스에게 자발적으로 다가간 연우는 바짝 몸을 기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아까 전화를 받았어.”
“전화?”
무슨 소리냐는 듯이 키이스가 되물었다. 연우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소곤거렸다.
“전화받는 게 제일 힘들잖아, 업무 파악이 다 되어 있어야 하고…… 아무튼, 그런데 내가 아까 전화를 받아서 해결했다니까?”
뿌듯한 만족감에 얼굴을 빛내는 그를 보자 순간적으로 키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사무실을 비우고 모두 나가라고 명령을 내릴 뻔했으나 연우를 쓰러뜨릴 마땅한 책상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연우를 화장실로 끌고 가 안을 수도 없었다.
무심코 흘러나오려던 깊은 한숨을 가까스로 삼킨 키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연우를 안아 들었다. 아, 연우는 뒤늦게 자신이 방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탄성을 질렀으나 이미 늦었다. 얌전히 들려 가 식사를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호텔로 돌아가면 연우가 실망하겠지.
키이스는 끓어오르는 배 속을 억누르려 애쓰며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그런 키이스의 속도 모르고 연우는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아까는 C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이번에 오디션에 보낸 배우에 대해서 묻는 거야. 그런데 내가 바로 전에 그 오디션을 찾아봤었거든. 그래서 바로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는데…….”
연우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키이스는 의식적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의지로만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함께 한 시간이 넘는 점심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을 나올 즈음 키이스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환하게 웃고 있는 연우의 얼굴과, 테이블 위에 그를 쓰러뜨리고 엉망으로 범하는 망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