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연우, 어때요. 할 만한가요?”
오전 내내 키이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급하게 몸을 움직였을 엠마가 사무실로 돌아온 연우를 보자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비서실의 직원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연우는 늦게 돌아온 것이 미안해 엠마에게 사과했다.
“네, 미안해요. 식사가 늦어져서…….”
“아니, 괜찮아요. 연우는 정식 직원도 아니고 오늘 잠깐 도와주러 온 거잖아요.”
엠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함께 일할 때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연우는 그런 그녀를 마주하자 아직 남아 있던 긴장이 모두 풀리는 듯했다.
“항상 고마워요, 엠마.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어요.”
진심을 담아 인사를 하자 엠마는 오히려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별말을요. 내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그래도, 하고 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부팀장이 끼어들었다.
“엠마, 잠깐 확인할 게 있는데…… 아, 연우.”
뒤늦게 그를 발견한 것처럼 부팀장은 한 마디를 덧붙이더니 이내 엠마에게 돌아섰다. 가져온 서류를 내민 그가 뭔가를 말하고, 진지한 얼굴로 듣는 엠마를 연우는 잠시 그냥 바라보았다.
……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오래 걸리지 않아서였다. 엠마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변함이 없었으나 부팀장은 달랐다.
얼굴을 저렇게 가까이할 이유가 있나?
의문을 품기 시작하자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희미하게 붉어진 부팀장의 뺨이나, 묘하게 높아진 음성이나, 자꾸만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갑자기 연우는 뭔가를 깨달았다. 혹시 어쩌면, 부팀장이 엠마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고마워요, 엠마. 그렇게 된 거군요.”
부팀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엠마에게 감사의 말을 하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해가 됐으면 자리로 돌아가세요. 난 연우와 할 얘기가 더 있으니까.”
“그래요…….”
부팀장은 묘하게 말끝을 흐리더니 돌아섰다. 자리로 가기 전 연우를 한번 훔쳐본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연우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그에게 엠마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아, 미안해요.”
연우는 서둘러 사과를 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부팀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부팀장요?”
엠마는 한 차례 부팀장이 있는 자리를 돌아보더니 곧 연우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그냥 평범하죠. 처음에는 일을 정말 못했는데 그래도 가르치니까 되긴 되더라고요. 하아, 그땐 정말, 피트먼 씨에게 진지하게 얘길 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죠.”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잊혔던 기억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혹시 그, 예전에…… 새로 들어온 직원인데 자꾸 실수를 해서 골치 아프다고 했던…….”
“오, 맞아요. 기억하고 있었군요, 연우.”
엠마는 반색을 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해요. 일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글쎄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일은 잘만 하면서 내가 뭘 얘기하면 죄다 펑크를 내는 거예요. 이 남자가 지금 나를 엿 먹이려고 이러나 매일 이를 갈았죠.”
그런 경우는 아마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말 일을 못하거나,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의 지시는 곧잘 따랐다고 하니 패스. 상사가 마음에 안 들거나, 하지만 팀장을 콕 집어 골탕 먹이는 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니 패스. 부팀장은 어딜 봐도 흔히 있는 보통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혹시, 엠마, 이런 얘기 불쾌하다면 미안해요.”
조심스러운 서두에 엠마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팀장이 절 좋아한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라면 됐어요, 연우.”
“……네.”
할 말이 없어진 연우는 그래도, 하고 말문을 열었으나 엠마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지 못하니까 그 얘기는 그만해 줘요.”
“……미안해요.”
결국 사과를 하고 만 연우는 이번에는 다른 걸 물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많았나요?”
“이미 한 차례 비서실을 훑고 갔죠.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나한테 얘길 했다니까요.”
곧이어 그녀는 심술궂게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연우, 예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죠?”
“……그랬죠.”
그녀에게서 일 못하는 신입에 대해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연우는 인정했다. 반면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은, 모두가 이렇게 입을 모아 그녀에게 ‘부팀장이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엠마는 이렇게 강하게 부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말할 정도면 가능성 있는 게 아닐까요? 혹시 그걸 받아들이기 싫은 이유라도 있어요?”
“당연하죠.”
엠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 남자는 제 타입이 아니라고요.”
그 말에 연우는 다시 부팀장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마침 자리에서 서서 전화를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운동을 한 적이 있는 듯 넓은 어깨와 근육질의 몸, 키도 큰 데다 얼굴도 제법 준수했다.
그러고 보니 알파라고 했었지.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페로몬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만약 엠마가 오메가였다면 어땠을까?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페로몬을 흘리진 않았을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타입인데.”
무심코 중얼거리자 엠마는 칼같이 냉정하게 말했다.
“저런 근육질은 절대 제 취향이 아니에요. 저는 뭐랄까, 좀 더 선이 가늘고 고운…….”
거기까지 말한 엠마가 입을 다물었다. 연우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으나 엠마는 도무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연우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자포자기한 듯 말한 엠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젠간 내게도 내 몫의 남자가 생기겠죠. 아니면 말고.”
“그래요.”
연우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를 격려했다.
“뭐든 엠마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
그제야 엠마는 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저도 행복해지겠죠, 연우처럼.”
그 말에 연우는 쑥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그 반응을 본 엠마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짓궂게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갑자기 피트먼 씨가 결혼이라니. 그것도 연우와.”
“어…… 뭐…….”
과정을 생각해 보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 연우는 그냥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이번엔 자신이 연우를 공격할 차례라는 듯 엠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여성 편력이 대단하던 피트먼 씨가 말이에요. 하긴, 둘이 결혼한다는 얘길 들으니까 그제야 하나씩 알겠더라고요. 바라보던 뜨거운 눈길이라거나…….”
“그, 그만해요, 엠마!”
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키이스를 좋아하는 티를 냈단 말이야?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엠마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오오” 하고 야유하는 소리를 냈다.
“어디 시선뿐이겠어요? 어디든 수시로 나타나고,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가고, 곤란한 상황이 되면 뭐든 해결해 줬잖아요.”
“그냥, 그게 일이니까…….”
이제 와서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우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런 연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엠마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책상에 기대어 물었다.
“그래서, 프러포즈는 누가 했어요? 뭐 듣지 않아도 알겠지만.”
연우는 귀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키이스가…….”
“역시.”
엠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연우에게 집착을 하더니, 결국 연우도 넘어갔군요.”
“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엠마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이제 와서. 피트먼 씨가 연우한테 내내 반해 있었잖아요? 다 아는 얘긴데.”
“다 안다고요?”
“그래요.”
이번엔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해하는 연우에게 엠마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피트먼 씨가 말을 곱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꽤 기분 나쁜 말들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도 행동은 따로 놀더란 말이에요. 왜, 연우가 한창 페로몬 때문에 고생했을 때도. 생각해 봐요, 정해져 있던 스케줄을 취소하고 달려와서 연우를 찾았잖아요? 그 뒤로도 스케줄을 바꿀 때 보면 항상 거기엔 연우가 있었다고요.”
“아, 아닌, 아닌데. 그럴 리가.”
“아니긴 뭐가 아녜요, 연우야말로 뭘 모르네.”
엠마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선언했다.
“비서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요.”
“알아요? 뭘요?”
“피트먼 씨가.”
일부러인 듯 엠마는 사이를 두고 말했다.
“연우한테 완전히 반해서 쫓아다녔다는 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연우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모두 알고 있었다고? 키이스가 날 좋아하는 걸?
그럼, 나만 몰랐다는 얘기야?
“전혀 몰랐어요?”
엠마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 내 잘못이 아냐. 연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똑같이 생각했을걸. 키이스가 내게 고백하기 전까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그런 거만한 남자가 날 좋아한다니. 연우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자인 내게는 흥미가 없다고 몇 년이나 반복해 말했던 사람인데…….”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인 법이에요.”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 만 연우에게 엠마가 쐐기를 박았다.
“게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일수록 게이의 성향이 강하다고 하잖아요?”
“그렇다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니, 나만 몰랐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연우.”
내가 그 정도로 둔할 리 없어. 세차게 부정하고 있는 연우에게 엠마가 한숨과 함께 말을 걸었다. 연우가 그녀를 바라보자 엠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파티에서 사고가 나서 회사를 그만뒀을 때, 피트먼 씨가 찾아가서 설득하고 다시 돌아왔죠?”
“네, 그랬죠.”
“그때 고용 계약서를 썼잖아요? 연우가 원하는 조항을 몇 개 넣었다고 들었는데.”
“그랬죠.”
이번에도 수긍하자 엠마가 꼬집었다.
“그런데 이상한 걸 못 느꼈어요?”
“뭐를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연우에게 엠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는 자신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무안해졌다.
“위약금 조항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어…… 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가 바로 지적했다.
“계약을 해지할 경우 위약금이라니, 그런 조항이 어디 있어요? 그냥 월급 받는 직원인데, 그만두면 두는 거지.”
어, 하고 잠깐 멈칫했던 연우는 이내 이유를 찾아냈다.
“그거야, 제가 또 멋대로 그만두면 회사 측에 피해가 가니까…….”
쑥스럽지만 키이스가 직접 찾아와서까지 돌아와 달라고 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또다시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면 곤란해서 집어넣은 조항일 것이다. 흔한 건 아니지만, 자신 또한 원하는 조건을 계약서에 넣었으니 마찬가지라고 당시엔 생각했었다.
“연우, 연우…….”
엠마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연우를 돈으로 붙잡아 두려고 일부러 넣은 거잖아요.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내가 너한테 보여 줄 수 있는 건 돈밖에 없어.>
불현듯 키이스의 고백이 떠올랐다. 이어서 또 다른 고백도.
<너와 자고 싶었단 얘기야, 처음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어. 나만 빼고.
연우는 멍하니 엠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