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키이스는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연우를 데리러 왔다. 오늘은 파티에 참석하기로 스케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연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엠마의 말이 맴돌았다.
<비서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요.>
<피트먼 씨가 연우한테 완전히 반해서 쫓아다녔다는 거.>
지금까지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실제로 그 뒤 엠마는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를 떴지만 정작 연우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다지 도움도 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오후가 흘러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 자리 잡은 엠마의 말은 떠나질 않았다.
혹시 키이스도 알까? 이런 사실을.
흘긋 쳐다보자 곧바로 시선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눈길에 연우는 황급히 고개를 되돌렸다.
몰랐겠지, 당연히. 자기 마음을 인정하지도 않았던 사람인데.
……만약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키이스의 반응이 상상조차 가지 않아 연우는 그냥 생각을 멈춰 버렸다.
“연우.”
“으, 으응?”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키이스의 낮은 목소리에 연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잠시 멈춰 주겠어? 지금 널 안으면 멈출 수 없을 것 같거든.”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자신의 페로몬 향기가 연우의 코끝에 확 느껴졌다. 흥분한 탓에 페로몬이 강해진 것이다.
“미, 미안.”
황급히 사과한 연우는 서둘러 차창을 열었다. 찬 바람을 맞으니 그나마 머릿속이 맑아지고 현실감이 일깨워지는 듯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어쨌든 서로의 마음이 통했으면 됐지.
후우.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연우는 그래, 하고 생각했다. 앞으로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 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곧 호텔에 도착했다.
* * *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호텔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연우는 파티에 들르기 전 스펜서의 방에 가 그와 잠깐 놀아 주었다. 찰스가 낮에 아이를 수영장에 데려가 실컷 놀게 한 덕분에 아이는 일찍 잠이 들었고, 연우와 키이스는 마음 편히 파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감기가 다 나아서 다행이야.”
차를 타고 나서 연우가 말했다. 스펜서를 만나지 못한 며칠간 그는 애가 타 죽을 뻔했다. 오늘도 심란했던 마음이 아이를 안고 잠을 재우자 훨씬 안정이 되었다.
만약에…….
“스펜스 하나로 충분해, 우리는.”
불쑥 키이스가 내뱉었다. 마치 생각을 간파당한 것 같아 연우는 얼굴을 붉히고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자라는 스펜서를 보면 이따금씩 안쓰럽기도 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키이스가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 걸 알면서도 조쉬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는 건 스펜서에게 놀 친구가 딱히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치원에서라도 또 다른 친구를 많이 사귀면 좋겠는데…….
그때, 문득 커다란 손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연우가 돌아보자 키이스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이상한데.”
“응? 아…….”
연우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당연하지, 무슨 말을 하겠어. 연우는 생각했다.
아이를 갖는 걸 당신이 얼마나 반대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난 그때 너에게 반했어.>
문득 떠오른 기억에 연우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만약에 내가 아이를 가져서 또다시 생명의 위기가 온다면 키이스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정리됐다.
“……아냐, 별일 없어.”
연우는 어색하게 웃은 뒤 키이스의 손을 맞잡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
“…….”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연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연우는 기꺼이 눈을 감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어서 오세요, 피트먼 씨, 연우.”
반갑게 그들을 맞이한 주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피트먼과 연우를 번갈아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그녀는 영화에 관심이 많은 노부인이었는데, 자신이 직접 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는 제작자이자 감독이었다. 사실 영화는 졸작이라 평단의 혹평과 관객의 비웃음을 샀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은 대작을 만들 거라며 꿈에 부풀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연우까지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번에 놀라운 소설을 읽었어요.”
언제나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서두를 꺼내는 부인의 얼굴을 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돼요. 날 믿어요, 피트먼. 미국인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다니까, 이런 대작이 묻힌다는 걸 나는 참을 수 없어요…….”
마침 또 새로운 손님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한탄을 하던 부인은 오, 하고 감탄사를 뱉더니 서둘러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요, 잠깐 인사를 나누고 올게요. 피트먼, 이 얘긴 이따 또 하자고요.”
인사를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키이스가 자연스럽게 연우의 허리에 팔을 걸쳤다.
“여기선 안아서 옮기지 않는 거야?”
연우가 짓궂게 묻자 키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원하면 얼마든지. 지금 할까?”
“아니, 미안, 됐어.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곧바로 뻗쳐 온 팔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연우가 황급히 손을 내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도발해 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연우는 아무 일 없었던 척 화제를 돌렸다.
“부인이 얘기한 그 소설은 어때? 영화로 만들면 가능성 있을까?”
“읽어 봐야지. 처음 듣는 제목이야.”
시큰둥하게 말했던 키이스가 짧게 웃었다.
“정말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만 골라서 읽는 것도 재주지.”
“숨은 명작이 많으니까 그것도 괜찮지 않아?”
‘미국인은 책을 너무 안 읽는다.’라고 했던 부인의 말처럼 자신도 그리 독서를 좋아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연우는 괜히 부인을 옹호하고 싶어졌다.
“좋은 작품은 어떻게든 빛을 보게 되어 있어. ……자신이 그 계기가 되고 싶다면야 그럴 수 있겠지만.”
키이스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연우는 곧 다른 화제를 찾아야 했다. 때마침 부인이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와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렇지, 그 책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줬냐면 말이죠…….”
진지하면서도 호들갑스럽게 이어 가는 말을 키이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연우 역시 옆에 서서 귀를 기울이는데, 불현듯 허리를 안고 있던 키이스의 팔이 느슨해졌다.
응?
의아해하며 올려다봤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부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명확했다. 키이스가 연우의 등을 슬그머니 밀었기 때문이다. 어서 가라는 듯.
“왜요? 연우. 뭐 필요한 거라도?”
한창 열성적으로 의견을 쏟아 내던 부인이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말을 걸어 왔다. 순간 당황한 연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핑계를 만들어 냈다.
“아, 네. 죄송합니다. 화장실을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어머, 그래요. 다녀와요, 저 안쪽에 있어요.”
흔쾌히 방향을 가르쳐 준 부인에게 미소를 지은 키이스가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오는 길에 새우 카나페를 가져다주겠어?”
“어?”
연우가 알기로 키이스는 새우 카나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무심코 눈을 깜박이자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보다 조개를 추천해요. 아까 맛을 봤는데 아주 좋았다우.”
“감사합니다.”
키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 뒤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연우, 조개로.”
“아, 응.”
연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키이스에게 부인이 정신없이 말을 이어 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내심 측은한 기분을 느꼈다. 부인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본인의 관심사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는 대신 자신의 말만 하는 게 문제였다.
이번에도 역시 키이스는 맞장구조차 치지 않았으나 부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 많았다. 연우는 키이스의 덕분에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에 감사해하며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아까는 자신이 둔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아마 키이스는 내가 조개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날 것이다. 그럼 이번엔 부인에게 잡히지 않을 장소가 필요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땅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어?
순간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연우!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밀러 씨.”
연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레이슨의 얼굴을 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리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감출 생각도 없었다. 그레이슨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해도.
다행히 그레이슨은 눈에 띄는 냉대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연우에게 다가왔다. 이것 또한 연우가 예상한 바였다. 이 남자는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제멋대로인 남자니까.
“파티에 온다는 얘긴 들었어. 너도 보이드 부인한테서 탈출한 거야?”
낄낄거리며 하는 말에 연우는 무심히 대답했다.
“화장실을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난 방금 전에 다녀왔는데.”
“네, 그럼…….”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갑자기 그레이슨이 연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연우에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딘지 모르잖아? 내가 에스코트 해 주지.”
“괜찮…….”
“사양할 거 없어, 연우. 별거 아니니까.”
별거 아니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연우가 말하려 했으나 벌써 그레이슨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꼼짝없이 연우는 그에게 잡혀 화장실로 끌려갔다.
“자, 여기야.”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간 그레이슨은 연우를 끌어당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연우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해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화장실은 넓은 응접실을 둔 화려한 공간이었는데, 소변기와 개인실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벽 뒤에 있어서 응접실과는 따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그레이슨은 보란 듯이 선뜻 소파로 향하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의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여기 있으면 부인도 널 찾지 못할걸. 일단 남자 화장실이니까 말이야.”
웃음이 서린 음성에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들키는 것은 언제나 무안한 일이다. 특히 마음씨 좋은 부인의 수다를 피해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있었다는 건 더더욱.
“으흠.”
연우는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슬쩍 눈치를 보자 그레이슨은 벌써 그에게서 흥미가 떨어졌는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잠시 뒤 매캐한 담배 향기가 흐르고, 그레이슨이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화장실 안에는 그레이슨과 연우뿐이었다. 뜻밖의 침묵에 연우는 당혹스러워져 잠시 머뭇거렸다. 그레이슨의 말대로 이곳은 좋은 피난처다. 키이스에게 문자를 보내 두면 이쪽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레이슨과 단둘이 있는 건 좀 껄끄러운데…….
내심 생각한 연우는 다시금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저,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레이슨은 간단히 대답했다.
“남을 돕는 건 언제나 내 가장 큰 즐거움이지.”
그리고 그는 연우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는데, 어째선지 연우는 그 미소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웠으나 그것을 분석하기엔 그레이슨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거기다 굳이 그렇게까지 그레이슨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연우는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봉사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속마음을 입 안으로 삼키고 말하자 그레이슨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그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인간적인 행위 아냐?”
연우는 또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하나부터 끝까지 그레이슨과 너무 안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뿐이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걸까?
스스로를 반성하며 연우는 물었다.
“좋은 일이죠. 정기적인 봉사를 하는 단체가 있나요?”
다소 부드러워진 음성에 그레이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굳이? 단체를 거치지 않아도 세상에는 도와줄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 말에 연우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이 사람이 말하면 평범한 말도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 거지? 저것도 그냥 평범한 말이잖아. 굳이 이상할 건 없는데.
“그렇군요…….”
연우는 마지못해 중얼거린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연우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키이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있는 화장실의 위치와, 그레이슨이 함께 있는데 별일은 없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그레이슨과 키이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 사이다. 오싹함을 느끼는 건 연우뿐일 테고, 함께 있다고 하면 키이스는 오히려 안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를 발송한 연우는 다시 휴대 전화를 재킷 안쪽에 넣고 몸을 돌렸다. 가능한 한 그레이슨과 떨어진 자리를 골라 앉았지만 여전히 침묵은 무거웠다.
그레이슨이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었나?
연우는 신기해하며 떠올렸다.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는데, 어쩌면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거기다 이런 어색한 침묵에도 전혀 불편함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상대가 그레이슨인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어떻게든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으흠, 으흠.”
헛기침을 하자 그레이슨이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반응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연우가 입을 열었다.
“밀러 씨는 파트너가 없나요? 여기 혼자 계셔도 되는지…….”
“아, 물론 있지.”
그레이슨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도망갔어.”
“네?”
뜻밖의 말에 연우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레이슨의 반응이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당황해하지도, 민망해하지도 않았다.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눈앞의 사실을 전해 주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가끔 있더라고, 내 페니스를 보고 도망가는 여자가.”
“어…….”
이거야말로 불필요한 정보였다. 연우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군요. 식사는 하셨나요?”
재빨리 화제를 돌린 연우는 그가 더 쓸데없는 얘기를 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전 오늘 키이스의 회사에서 잠깐 일을 했는데 말이죠, 점심에 갔던 식당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음에 스펜스와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군.”
역시나 그레이슨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듣기 싫은 말을 더 이상 안 들어도 된다는 사실에 연우는 안심했다. 영양가 없는 얘기로 화제를 돌리길 잘했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불쑥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키이스는 여전히 너한테 잘해 주네.”
“어…… 네.”
그렇죠, 하고 민망해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겠지. 딴에는 첫사랑일 테니.”
“…….”
내 귀가 잘못됐나?
연우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네?”
한참 만에 반응을 하자 그레이슨이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몰랐어? 키이스가 내내 널 좋아했던 거.”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가?
연우는 무심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그레이슨이 짧게 웃었다.
“카메라는 없어, 연우.”
“그러면…….”
연우는 얼떨떨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그레이슨이 말했다.
“전혀 몰랐어? 키이스가 너한테 홀딱 빠져 있던 거.”
“아니, 그건…….”
“하긴, 본인도 몰랐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레이슨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이질감 또한 여전했다. 저 남자는 지금 진심으로 웃고 있는 걸까?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왜 웃어요?”
연우가 대뜸 묻자 그레이슨이 멈칫했다. 연우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웃을 타이밍인가요? 아니면 그렇게 웃는 이유가 있어요?”
“아냐?”
이번엔 그레이슨이 되물었다. 연우가 눈썹을 찡그리자 그레이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틀렸군.”
낮은 목소리에 이어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완벽하게 무표정이 되어 버리는 그레이슨의 얼굴에 연우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저렇게까지 아무 감정도 없을 수 있을까? 연우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 텅 빈 얼굴이 무서워서, 그는 황급히 말을 지어냈다.
“아니, 맞아요.”
불쑥 꺼낸 말에 그레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유리처럼 차갑고 서늘한 얼굴을 보며 연우는 서둘러 덧붙였다.
“맞아요, 웃는 타이밍. ……재밌잖아요? 키이스가 예전부터 날 좋아했다니. 너무 웃기죠? 하하.”
연우는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그만큼 그레이슨이 무서웠다.
“…….”
그레이슨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연우는 그가 깊이 들이마신 연기를 천천히, 길게 내뱉는 것을 그저 보기만 했다.
“널 좋아하는 게 왜 웃겨?”
갑자기 그레이슨이 물었다. 이번에는 연우가 허를 찔렸다. 자신도 웃으면서 말해 놓고 왜 웃기냐고 되묻다니. 그렇다면 처음부터 웃기지 않았다는 건가? 그럼 왜 웃었어?
대체 이 남자는 뭐야?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연우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것을 그레이슨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관찰하는 듯이, 분석하는 듯이, 기억에 새기려는 듯이.
갑자기 그레이슨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돌연한 변화에 연우는 또 한 번 펄쩍 뛸 듯이 놀랐다. 그는 피우던 담배의 재를 털고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전엔 그런 생각 전혀 안 해 봤어? 키이스가 처음부터 널 좋아했다는.”
연우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항상, 남자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밀러 씨도 들었지 않습니까.”
설마 이 남자도 알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다 아는 얘긴데.>
불현듯 엠마의 말이 머리를 스쳤을 때,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랬지. 그런 멍청한 소리를 했어, 그 녀석이.”
큭큭큭,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연우는 이제 그것조차 그레이슨이 만들어 낸 가짜 웃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는 말했지만…….”
말끝을 흐리자 그레이슨이 물었다.
“그럼 키이스도 말을 했었던 거잖아? 네가 좋다고.”
“달라요, 그건.”
연우는 그를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얼굴이 마음에 드는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르죠. 완전히 달라요.”
“그래?”
그레이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전히 그는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말을 하다 보니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연우는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화제를 이어 갔다.
“오늘은 정말 신기한 날이군요. 회사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비서실 사람들이 모두 키이스가 예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프러포즈를 한 것도 당연히 키이스일 거라고 말하더군요. 아, 키이스가 하긴 했지만…….”
연우는 슬쩍 눈치를 봤다. 이 정도면 무마가 됐을까?
“…….”
그레이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연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하려는 것처럼.
순간 섬뜩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는데, 갑자기 그레이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칫 놀란 연우에게 그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이만 가야겠어. 페로몬이 쌓이지 않게 같이 잘 상대를 찾아야 하거든.”
하루 이틀 건너뛴다고 큰 문제는 없을 텐데.
연우는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참.”
막 나가려던 그레이슨이 문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연우가 시선을 향하자 그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키이스가 너한테 반한 걸 내가 언제부터 알았을 것 같아?”
연우는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글쎄요, 잘.”
“보기보다 둔하구나, 연우는.”
그레이슨이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 시계, 아직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
“…….”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레이슨이 밖으로 나가고,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묻어 두었던 엠마의 말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피트먼 씨가 연우한테 내내 반해 있었잖아요? 다 아는 얘긴데.>
다 아는 얘기? ‘다’라니 누구야? 그레이슨마저 같은 얘기를 하는데.
그럼 도대체 그레이슨은 언제부터 그걸…….
“아.”
연우는 무심코 감탄사를 흘렸다. 잊고 있던 기억이 또 하나 되살아났다.
<불쌍한 연우.>
페로몬을 견디지 못하고 키이스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그는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지? 그 의미는,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동정한 것이 아니었나?
그럼 뭐야? 실제 의미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아.
연우는 불현듯 깨달았다.
정말로 모두가 알고 있었어.
나와 키이스만 빼고.
그 순간 연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