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 1권-Chapter 1. (1/21)

Chapter 1.

지금 내 마음속에 끓고 있는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3년을 만나왔던 내 에스퍼 놈이 2주 전에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매칭률이 70퍼센트를 조금 넘긴 하지만 그놈과 그럭저럭 성격도 맞고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놈은 언제나 ‘고작’ 70퍼센트인 매칭률과 내가 남자라는 점을 마음에 걸려 했다. 그럴 거면 잠자리에서도 마음에 걸려 했어야지, 하반신은 좋다고 들러붙은 시발놈이었다.

각인은 안 했지만 우린 3년 동안 서로 충실하게 만남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모니터 화면 오른쪽 아래에 새 메신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창이 올라왔다.

[야, 경조사 게시판 봄? 이 미친놈이, 너랑 헤어진 지 2주밖에 안 됐는데 2주 뒤에 결혼한다고?]

친한 동기인 정화의 메신저를 시작으로 새로운 메신저가 도착했다는 깜빡임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새롭게 올라오는 메신저 창들 사이에서 내 마우스 커서는 무엇을 클릭할지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들끓는 속과 시간차를 두고 머리도 점점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2주란 시간은 3년 만난 전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매일 밤 ‘혹시’라는 마음을 가지고 뜬눈으로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던 때도 있었다. 아니, 어젯밤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연락이 올까 핸드폰을 꼭 쥐고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은 사라져 없어졌다고 느꼈던 내 자존심의 일부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했었어야 할까.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 느끼는 이 비참함을 좀 더 빨리 느꼈을 뿐일 것이다.

지금 목구멍이 타들어 가면서 머리 뒷골에 열이 오르는 이 감정이 슬픔만은 아닐 것이다.

‘난 아이를 가지고 싶어, 재하야.’

만난 지 2년쯤 되었을 때, 그가 술에 진탕 취해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 말 이후, 그에게 진지하게 헤어짐을 이야기했지만,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것도 그였다.

우리가 극복했다고 믿었던 위기였지만, 결국 극복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나 보다.

경조사 게시판에 올라온 글 속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사랑스럽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내 마음을 찢어놓는다.

[야, 너 괜찮아?]

찢어진 마음을 따라 모니터도 같이 찢어버리고 싶다고 생각을 하자, 새로운 메신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다시 깜빡였다. 쏟아진 열댓 개의 메신저를 쳐다보다가 정화의 메신저를 찾아 눌렀다.

[술먹자.]

***

“와 진짜 황당함에 말이 안 나오네. 너하고 떨어지느니 죽는다고 지랄지랄했던 놈이잖아!”

“말이 2주지. 너랑 헤어지고 한 달 뒤에 결혼한다는 거네. 이 새끼 분명 양다리 걸친 거잖아. 결혼이 그렇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도 아니고.”

“사고 친 거 아니야?”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오래간만에 조촐한 동기 모임을 하고 있다. 헤어짐을 당한 것도 나. 전 애인이 한 달 만에 결혼한다는 것도 나. 좆같은 상황은 다 내가 겪고 있는데 내 동기들이 나보다 더 열을 내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묵묵히 소주를 마시며 고기만 죽어라 굽고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야. 이재하. 말 좀 해봐. 너 괜찮아?”

“아니.”

고기를 구우며 담담히 말을 했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놈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 놈이 내가 들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갔다.

“충격받아서 정신 줄 놓은 거야?”

할 일을 빼앗긴 나는 두 손을 들어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에서 고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시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어. 이미 헤어졌잖아.”

“좆같은 상황이지.”

웅얼웅얼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정화가 작게 추임새를 넣어준다.

나와 그 새끼는 유명한 사내 커플로, 곧 각인을 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던 지난 3년을 보내왔다. 에스퍼인 그에게 더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날까 봐 각인을 하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가이드인 나는 상관없지만 에스퍼인 그에게는 매칭률은 절대적인 거니까, 혹시나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그를 보내줄 생각도 있었다. 나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실제로 그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자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가 먼저 각인하자고 했으면 달라졌을까?”

우울하게 소주잔을 비우며 말하자 앞에 있던 놈이 내 잔에 소주를 다시 따라준다.

“야. 병신 같은 생각하지 마라.”

“그래. 그 새끼도 너한테 각인 얘기 안 꺼낸 거는 매칭률 더 높은 가이드 기다리고 있었던 걸걸. 에스퍼들은 그런 씹새끼들이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주위에 듣는 에스퍼가 있을까 봐 슥 훑어본다. 우리 넷은 기관의 가이드 동기들이었다.

보통 가이드들은 16살 전후로 발현한다. 성인이 되기 전 발현한 경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센터에서 비정기 교육만 받게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센터에 입사한다.

별다른 게 동기인가. 같이 입사하고 교육 들었으면 동기지.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동기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지만, 스물 몇 명이 되는 동기들 중에 나이가 같은 우리 네 명은 특히 몰려다녔다.

“근데 그 새끼, 가이드도 아니라 일반인이랑 결혼한다던데?”

“헐. 진짜? 난 당연히 가이드인 줄.”

정식 가이드가 된 지 10년. 사회생활하면서 별꼴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나의 경험치는 아직 부족했던 것 같다.

“가이드랑 결혼했으면 매칭률에 미쳐서 재하를 버렸다고 생각이라도 했을 건데… 그럼 걔, 재하보다 높은 매칭률 기록하는 가이드도 없을 건데 가이딩은 어떻게 할 거래?”

“알아서 하겠지. 그딴 놈까지 신경 써 줘야 하냐.”

“그건 그렇지.”

나 빼고 세 놈이 낄낄대면서 고기를 집어 먹는다. 난 고기를 씹을 기운도 없어서 깡소주만 들이키고 있다. 술이 쓴지도 모르겠다.

“더 좆같은 건 뭔지 아니?”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셋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온다.

“내일부터 회사 쪽팔려서 어떻게 다니냐.”

구질구질한 내 연애사를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소주를 아무리 들이부어도 취할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 내 식도를 뜨겁게 달구는 느낌을 받으며, 난 내 몸이 녹아 흘러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출근 전에 거울을 볼 때마다 ‘뻔뻔함’ ‘뻔뻔하게’ ‘난 아무것도 몰라!’를 외치면서 준비를 해야 했다. 이것이 출근을 하는 것인지, 전쟁터를 나가기 전에 자기암시를 거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출근해서 가이딩 업무를 하는 중에는 상대 에스퍼의 안쓰럽다는 눈빛을 받아야 했고, 사무실을 지나갈 때면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망상이 내 정신을 좀먹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들 나에겐 관심이 없다고 자기최면을 걸어보아도 마음 한구석으로, 머리 한쪽으로 ‘저 사람도 에스퍼에게 차인 내 이야기를 듣고 비웃고 있을지 몰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랑꾼인 척 닭살 떨 때부터 알아봤지.

그 상상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여 이젠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며 나를 비웃을지 대사를 써 내려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가끔 꿈에서는 전 남자친구라고 하기도 싫은 그 새끼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떤 여자와 나타나서 나에게 ‘이쪽은 내 예전 가이드야. 여자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또 어떤 날엔 내가 그에게 매달리자 ‘매칭률이 높든가 애를 낳을 수 있든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며 사라졌다. 혹은 그가 나에게 매달리는 날에는 갑작스러운 분노가 치밀어 그를 다리로 뻥하고 차버리기도 했었다.

이런 개꿈은 그가 결혼하는 날에 최고조에 달했다. 연이은 악몽 때문에 결혼식 당일에는 위경련으로 집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할 수도 없었다.

아니, 무언가를 할 수 있어도 그날은 집에만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 끔찍했던 주말을 보내고 출근을 했다.

이 주간의 신혼여행을 즐기러 사라진 그 새끼가 없는 센터는, 고요한 모습이 마치 폭풍의 눈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 컴퓨터를 켜서 의미 없는 공문들을 훑어보고 이 주 동안 내내 찾아보았던 휴직 규정을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언제나처럼 얼마 전에 구입한 안전지역의 주택 대출을 생각해내고 한숨을 쉬며 창을 닫았다.

가이드들은 일신상의 이유로 관사에 지내는 것이 규정이지만, 각인을 할 경우에는 외부에서 사는 것도 가능하니 혹시 몰라 구입을 해두었다. 그 새끼와 미래를 꿈꾸기 위해 구입을 해두었는데 미래는커녕 현재를 발목 잡힐 줄은 몰랐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1구역은 안전지대와 가깝기도 해서 에스퍼들이 힘을 쓸 일이 잘 없다. 덕분에 가이드들의 업무도 낮은 강도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혼돈과 괴물이 난무한 이 시대에, 이렇게 한가한 구역에 오는 것은 빽이 없는 이상 힘든 일이다.

내가 1구역에 어떻게 해서 들어왔는데….

현장에서 개처럼 구르다가 팀장, 실장, 센터장 각개격파하고 발령받아 온 곳이다. 빽도 돈도 없는 내가 믿을 것은 내 몸뚱어리 하나라,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등에 업고 기회를 거머쥐어 1구역 센터로 입성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나갈 순 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일에 집중하기 위해 금일 가이딩 요청 리스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자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서 새 메신저를 도착하는 알림이 깜빡였다. 이번에도 역시 정화였다.

[재하재하]

[ㅇㅇ?]

[너 충격받을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나도 잘 몰랐는데 이상한 소문이 들더라고….]

보통 앞에 이렇게 변명이 긴 말치고 기분 좋았던 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불안감이 등 뒤를 스쳐 지나간다.

[뭔데?]

[아니 그게 말이야….]

[??]

[아니 그 미친놈이 소문을 어떻게 낸 건지 모르겠는데, 네가 사귈 때 질리게 굴어서 그 새끼가 너를 찼다는 거야.]

[질리게 군다고?]

[뭐 뻑하면 헤어지자고 한다든가… 네가 다른 에스퍼들한테 여지를 남기고 다닌다든가…]

[이 미친놈이….]

[우리야 당연히 안 믿지. 근데 알잖아. 여기 사람들 할 일 없어서 소문도 잘 생기고 빨리 퍼지는 거.]

[피해자는 난데?]

[알지. 근데 그게 다른 놈들이 그런 걸 신경 쓰나. 그냥 자극적인 얘기나 소비하고 마는 거지. 어쨌든 뒤에서 이런 얘기 돌고 있으니까 알고는 있으라고.]

내가 과연 이 뒷얘기를 알고 있는 게 좋은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몰랐던 것이 좋은 것일까. 나는 판단할 수 없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내 얘기를 남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ㅇㅋㅇㅋ]

정화에게 무성의하게 메신저를 남기고 가이딩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머리가 복잡할 땐 일이나 하는 게 최고였다.

***

그 이후, 2주간 정말 정신없이 지냈다. 솔직히 그 새끼가 결혼하고 나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살은 쪽쪽 빠져서 이제 센터 내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첫 인사말이 ‘몸 어디 안 좋아요?’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매하게 웃어넘기고 있지만, 사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칼로리만 섭취 중이다.

매일 밤 이제는 궤도를 달리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전의 악몽이 그 새끼에 대한 미련이 넘치는 악몽들이었다면, 요즘 꾸기 시작하는 악몽들은 대부분 센터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를 가운데에 두고 없는 사람인 척 수군수군 대고 있었다.

‘쟤가 에스퍼들한테 그렇게 흘리고 다닌다며?’

‘그럴 줄 알았어. 생긴 거 봐봐.’

‘인생 펴려고 고위 에스퍼들한테만 잘해준다던데.’

‘그렇게 애쓰다가 이번에 차였잖아. 심지어 쟤 차고 일반인 여자랑 결혼했다며? 세상에. 에스퍼가 가이드 버리고 일반인 여자랑 결혼하다니. 알 만하다.’

‘오죽 못났으면, 얼마나 잘못했으면 저렇게 버림받을까.’

‘쪽팔려서 회사는 어떻게 다니냐.’

깔깔깔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꿈에서조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들을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나의 뿌리 깊은 무서움과 불신에 기름을 부은 것은 어젯밤이었다. 불 꺼진 방에서 멍하니 누워있었던 약간은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암막 커튼을 쳐 더 어두운 방 안에서,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나를 발부터 먹어 치우는 게 아닐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커튼을 조금은 걷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에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과장님.”

[이 대리. 자고 있었던 건 아니지?]

“이제 자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과장님 술 드시고 계세요?”

혹시 긴급 가이딩 요청인가 싶어서 받은 전화였지만, 뜻밖에 배경음으로 왁자지껄 흥겨운 소리만 들렸다.

[아아. 그냥 친한 사람들하고 한잔하고 있었지.]

“네네. 그런데 어쩐 일로…?”

[그게 말이야. 난 아니라고 사람들한테 자꾸 말하는데 같이 술 마시는 애들이 자꾸 맞다고 해서 말이야. 얘네들이 그러는데 이 대리랑 강민이랑 헤어진 게 이 대리가 명품을… 그러니까 사치가 심해서 그랬다던데 맞아?]

“…네?”

[내가 이 대리를 좀 아는데, 이 대리 절대 그럴 사람 아니라고 단단히 일러두긴 했는데. 아무래도 통화를 하지 않으면 믿을 거 같지 않아서 말이야.]

순간 어이가 없어서 이걸 뭐라 대꾸를 해줘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대리. 기분 나쁜 거 아니지? 이미 다 지난 사람이잖아. 그냥 왜 헤어졌는지 이유 정도는 알려줘도 되는 거 아니야?]

주변에서 과장을 말리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까지 들려오는데, 기가 차서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다 하다 이런 술주정까지 받아줘야 하는 것인가. 본인들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남의 상처야 들쑤시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건가.

나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그의 당당한 모습에 인류애가 상실됨을 느끼고 있었다.

“과장님. 이렇게 통화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니까 전화 끊겠습니다.”

냉정하게 딱딱 끊어 말하자 상대편에서 ‘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대답도 안 하고 끊어버렸다. 이 통화로 말미암아 내일 센터에 또 다른 소문이 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이상 떨어질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일하고 싶다. 그냥 기계랑 일하고 싶다.

최근 매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계속 되뇌고 있는 말이었다.

인간관계를 다 끊고 기계랑 일하고 싶다. 그냥 이 센터 사람들하고 인연을 다 끊고 싶다.

***

그 새끼가 신혼여행을 끝으로 복귀하는 날은 아침에 센터장과 가이드들 간에 오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평화로운 1구역에서 하는 회의는 그냥 교장 선생님의 훈화 같은 것이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패기가 없다느니, 자기 때는 온갖 괴물들이 나타나는 현장을 돌아다녀 경험치를 쌓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느니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가이드들이 안전구역인 1구역을 선호하는 것에 비해, 아이러니하게도 에스퍼 중엔 미친놈들이 많아서 괴물들과 치고받고 할 수 있는 위험구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에스퍼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능력을 있는 힘껏 끌어 쓰는 것도 기분이 좋고, 그럴 때 받는 가이딩이 끝내주게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성적이든 말이다.

거기에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에스퍼 놈들은, 본인들은 당연히 자기 가이드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근본 없는 믿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강한 건 알겠지만 그건 에스퍼 니들이구요. 아무런 능력 없는 가이드들이 에스퍼 하나만 보고 위험구역에 있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그나마 각인이나 하면 에스퍼에 대한 믿음이 대폭 상향되겠지만, 미각인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도박 같은 것이다.

본인도 각인된 에스퍼와 현장을 돌아다녔을 센터장은 서너 명 정도 되는 우리 미각인 가이드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위험구역에도 미각인 에스퍼들은 존재하고 그들을 위해서는 미각인 가이드들이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매칭률을 검사해서 확인하고 있긴 하지만, 전원이 다 매칭률 테스트를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또한 에스퍼들이 힘을 사용하면서 그 대가로 쌓이는 몸속의 에너지를 폭주하지 않게 가이딩 해주는 약도 잘되어 있기 때문에, 매칭률이 낮은 가이드들이라도 에스퍼들을 가이딩 해주기엔 충분하다.

다만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에스퍼들 입장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매칭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이드들을 찾아 헤매고, 그들과 각인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요즘 위험구역은 에스퍼는 넘쳐나는데 가이드는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요즘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게 내가 입사했던 10년 전에도 언제나 위험구역에는 에스퍼가 넘쳐나고 가이드는 부족했다. 이를 위해 가이드들의 자발적인 위험구역 지원을 유도하고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고 있다. 덕분에 갓 입사한 신입 가이드들만 줄기차게 위험구역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숙련도가 전혀 없는 신입들만 데려가서 이제 좀 쓸 만하다 싶어질 때쯤 다들 안전구역으로 도망가 버린다.

나도 그랬고, 지금 여기 있는 대부분의 미각인 가이드들이 그러하다. 그러다가 각인 에스퍼를 만나면 다시 현장으로 가기도 한다. 다만 그럴 경우 각인된 상태기 때문에 다른 에스퍼들은 가이딩 해줄 수가 없다.

나를 지켜줄 절대적인 나의 편. 본인은 죽어가도 가이드인 나만큼은 살릴 절대적인 나의 방패막.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각인된 상대에게 절대적인 믿음, 신뢰, 사랑을 준다고 한다.

두 달 전만 해도 난 그가 절대적인 나의 편,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에 따라 나도 내 마지막 정신력, 힘을 쥐어짜 그의 최후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믿음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입으로 내뱉지 못한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씁쓸해지는 입안으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센터장에게 집중했다.

기나긴 연설이 끝나고 ‘혹시 위험구역에 지원할 가이드가 있으면 주저 없이 신청하도록. 바로 발령 내줄 수 있어요.’라는 말을 맺음으로써 아침 회의는 끝이 났다.

그리고 회의를 끝으로 가이드 실장이 나를 호출했다.

실장이 나를 호출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커다란 문을 마주하며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가볍게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드리니, 곧장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의 큰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실장이 보였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큰 창문 너머로는 센터 정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고, 실장의 책상과 내가 들어온 문 사이에는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작은 테이블을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아요. 이 대리.”

엉거주춤 소파에 가서 앉자 푹신한 감촉이 내 엉덩이를 감싸온다. 차마 등까지는 기댈 수 없어서 바른 자세로 앉자, 실장은 곧장 일어나 냉장고에서 유리병 음료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있는 게 이거밖에 없네. 음료수 괜찮죠?”

“괜찮습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음료수를 받아 차마 따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만 있었다. 실장이 맞은편 소파에 앉자 긴장감에 침이 꼴딱 넘어갔다. 실장은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긴장이 되었다.

요즘 지은 죄가 너무 많긴 하지만, 직원 개인의 사생활에 뭐라 개입하는 건 아닌 거 같고…

혹시 심리 상담 권유인가? 그건 필요하긴 하지.

예상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도대체 무슨 얘기를 꺼낼까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김강민 에스퍼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역시 사생활 이야기였나.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직원의 사생활에 대해서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자신은 무해하다’라는 의사를 표하고 있었지만, 그 새끼의 이름이 실장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적색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둘이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서 내심 곧 각인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말이야….”

그 얘기는 2년 전부터 나왔었죠.

“아쉽긴 하지만 이미 끝난 얘기지. 다른 좋은 에스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 대리.”

아니요. 실장님. 당분간은 에스퍼고 지랄이고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야기라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다만… 오해하지 않고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 대리. 김강민 에스퍼의 경우 센터에서 매칭률이 제일 높은 게 이 대리라 말이야.”

설마… 실장님. 절 버리지 말아요.

“다른 가이들과의 경우 매칭률이 50퍼센트도 안 나오고 있어.”

“실장님. 하시려는 말씀이 짐작은 갑니다만, 이 센터에서 에스퍼들이 힘을 극한으로 쓸 일도 없으니 억제제와 매칭률이 낮은 가이드들의 가이딩을 병행 사용하시면 김강민 에스퍼의 가이딩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억제제는 가이딩의 효과를 따라오기에는 부족한 건 알고 있잖아요? 센터에 매칭률이 충분한 가이드가 있는데, 가이딩을 못하게 막기에는 근거가 좀 부족해서….”

“연인이었다가 깨어진 상황이 근거가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 혹시 감사라도 나왔을 때 그런 이유를 들먹이면 비이성적 사유라 변명거리도 안 되지.”

“아니. 실장님. 저 좀 봐주세요. 제가 가이딩 하라 했을 때 한 번이라도 거부한 적 있었습니까?”

울컥울컥하는 속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을 꺼냈지만, 처음의 공손했던 말투 대신 반항적인 말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대리.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니까 왜 그래.”

“이미 센터에 소문 쫙 나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겠는데, 이제 와서 저한테 그놈 가이딩 하라고 하면. 너무 잔혹한 거 아닙니까?”

“회사일을 개인사와 연관 지으면 안 되지. 이 대리.”

시발. 회사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 내 개인사 가지고 잘도 씹어대던데 그거부터 어떻게 막아보시죠.

“실장님. 안 됩니다. 못 합니다. 무슨 극한상황이 와서 폭주 직전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렇게는 하기 싫습니다. 어차피 제가 가이딩 리스트에서 그놈 선택 안 하면 다른 가이드가 알아서 가이딩 해주겠죠.”

“어허. 이 대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가이딩 리스트는 매칭률 높은 순서대로 올라오는 거 알고 있잖아.”

“그건 IT 지원센터에 말해서, 그냥 제 가이딩 리스트에 김강민은 빼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이 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 안 통하네.”

실장 또한 흥분했는지 처음에는 예의상 지켜주던 존댓말이 점점 반말로 바뀌고 있었다.

“이 대리 심정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 끌고 들어오지 말게. 사내연애 한번 그렇게 거하게 했는데 헤어질 때 후폭풍도 예상 못 했어? 김강민 에스퍼 가이딩은 어쨌건 이 대리가 계속하게.”

“실장님!”

“난 분명히 말했네. 이만 나가 보세요. 이 대리.”

실장은 소파에 일어나면서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나를 내쫓았다. 그의 명백한 축객령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이 문을 나섰다.

실장 방을 나와 무슨 정신으로 자리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릿속과는 별개로 다리는 착실히 움직여 사무실의 내 자리에 몸을 안착시켰다.

시발. 이럴 순 없어.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강민의 가이딩을 거부한다. 처음 한두 번이야 넘어가겠지만 계속 거부하다 보면… 김강민만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다. 어차피 지원시스템에 기록이 다 남을 건데 다음번 정기 감사 때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지적을 받으면 인사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고, 내 과거 연애사가 센터를 넘어 중앙지부까지 퍼질 수도 있다. 시발.

김강민의 가이딩을 허락한다. 생각만 해도 좆같다. 그 면상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그 사람을 내가 다시. 아 씨발. 이건 절대 안 된다.

내 머릿속에서는 치열하게 양쪽이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도망갈 길을 찾아가기 위해 모든 경우를 가정해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을 의미 없이 드래그하면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공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재빨리 클릭을 해서 공문 창을 확대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가 켜졌다.

그 새끼의 가이드를 거부하지 않고, 허락도 안 하면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 찾아냈다.

***

과연 잘한 선택인가, 치열하게 고민해봤다. 하지만 다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나는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기 싫다면 험하더라도 길이 없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괴물들의 손에 죽느냐, 김강민의 가이딩을 해주느라 화병으로 죽느냐를 고민하자면 차라리 괴물에게 죽는 게 좀 더 명예로운 죽음이 될 것 같다.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육체가 편안하고 안락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극도의 한계에 내몰렸던 1구역을 포기하고 현장에 자원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자세히 알아보진 못하고 공문에 떠 있었던 4구역으로 바로 자원했다. 1구역에서 충분히 멀기도 하고, 보통 현장은 바빠서 소문 같은 거 잘 모르니까….

가이드 주제에 일반인 여성 때문에 에스퍼에게 차인 ‘이재하’에 대한 소문은 잘 모르겠지. 그래야 한다.

일단 여기에 있다가, 김강민이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는 매칭 가이드를 찾았다는 소문만 들리면 바로 1구역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한 소문은 나의 든든한 아군, 정화가 책임져주기로 했다.

현장에 4년 만에 돌아왔다. 센터에 입사한 지 10년. 첫 6년은 현장에서 개처럼 구르고, 4년은 안락한 1구역 센터 생활을 했다. 첫 현장에서 6년 동안 수없이 많은 에스퍼들과 매칭 테스트를 하였지만, 이상하게 매칭률이 잘 나오는 에스퍼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유일하게 70퍼센트의 최고치가 나온 건 전 남친 새끼였지만, 낮은 매칭률을 난 내 에너지양으로 커버 쳐 왔다.

질보단 양이지.

등급은 B등급이었지만, 다른 가이드들보다 다룰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많았다. 나중에 알기로는, 이 정도면 에너지 품질은 낮더라도 양으로 A등급도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회사생활 3년 차에 알게 된 사실이고, 그때는 사회 물이 들어버려서 ‘내 능력은 다 오픈하는 것이 아니다’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을 때였다.

차라리 몇 없다는 S등급이라도 되면, 중앙에서 귀한 대접 해가며 모셔갔을 텐데… 그럼 나는 숨만 쉬어도 고액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장으로의 지원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지원서에 클릭을 하자마자 한 시간 이내에 센터장의 호출이 왔었고,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나에 대한 칭찬을 30분 정도 늘어놓은 다음, 내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서 그런지 그날 오후에 바로 발령이 났다.

부임일까지 1주일의 여유가 주어졌고, 그사이에 난 1구역과 회사 생활을 정리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에는 가이딩을 하지 않아도 돼서 김강민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꼬리를 만 개처럼 보이질 않길 바랐지만, 내 마음속에 드는 패배감은 화상처럼 당분간 남아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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