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정신없이 인수인계를 하고 짐을 정리해서 4구역으로 보냈다. 안전지역에 마련해놓은 집은 정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단 남겨놓았다.
4구역에 부임한 첫날, 형식적으로 센터장 및 실장과 간단한 면담을 하고 지원부서의 사람과 만남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가이드 지원부서 박유리 대리예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해오는 지원부서의 직원은 170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약간 통통해 보이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이재하입니다.”
“이 대리님이라고 부르면 되죠?”
약육강식이 뚜렷한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의 세계는 다르다.
에스퍼들의 세계는 직급 없이 힘의 논리로 잘 굴러가지만, 일부 가이드들은 본인 에스퍼의 힘이 자기에게도 있는 줄 알고 등급이 낮은 에스퍼, 가이드들에게 막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감사 지적 사례에서 본 바로는, 이 때문에 가이드와 가이드 사이에 주먹다짐이 일어난 후에 가이드부서에도 일반부서와 동일하게 직급 체계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에스퍼들은 이름만 붙여 ‘XXX 에스퍼’라고 불릴 뿐이지만, 가이드는 ‘이재하 가이드’, 혹은 ‘이 주임, 대리, 과장’ 등등으로 불린다.
대신 가이드임을 나타내는 유니폼은 꼭 입고 다녀야 한다. 지원부서와 헷갈리기 때문이다.
“초면에 실례긴 한데… 도대체 왜 1구역에서 4구역으로….”
센터 내부를 걸어가며 박유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돈이 필요해서요. 신입 때 현장에 있다가 1구역으로 갔는데,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든 거 같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자 박유리가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1구역이 안전하긴 한데 월급은 쥐꼬리라고 듣긴 들었어요. 아무래도 돈 벌긴 현장이 제격이긴 하죠.”
“여긴 괴물이 자주 나타납니까?”
“출몰지역은 정해져 있어서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주고 있고, 주로 타 지역에서 지원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아시다시피 여기가 좀… 그래서요.”
출몰지역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지만, 좋은 정보였다. 급하게 오느라 4구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뉘앙스가 저 뒤에 뭐가 더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려는 찰나 박유리가 다시 재잘재잘 말을 한다.
“일단 이 대리님은 가이드 1팀에 소속될 거예요. 지금 4구역에는 에스퍼가 약 352명, 가이드가 104명 있어요. 그중에 각인된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을 제외하면 에스퍼는 280명, 가이드는 32명 정도 있고요.”
1구역에서는 가이드 1인당 에스퍼 3, 4명 정도였는데, 이곳은 가이드 1인당 에스퍼 8, 9명이다. 거기다 에너지를 쓸 일이 거의 없는 1구역보다 이곳은… 암울한 미래가 저절로 예상되었다.
“미각인 가이드로 6개 팀이 있고, 이 중에 6팀은 지원 에스퍼 전용 팀이에요.”
“그런데 에스퍼에 비해 가이드 수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우리 센터가 타 센터보다 가이드 수가 좀 많이 부족하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아시잖아요. 에스퍼는 넘쳐나는데 가이드는 부족해요. 가이딩에 미친 에스퍼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이 대리님도 조심하세요.”
가이드 지원팀에 근무하는 일반인 박유리가 무심하게 말을 한다.
저 꿀 부서처럼 보이는 지원 에스퍼 전용인 6팀에 들어가고 싶지만 안 되겠지. 막 들어와서 신입이나 다름없는 나에게는 절대 오지 않을 자리이다. 나한테는 남들이 가장 하기 싫고 제일 까다로운 업무가 주어질 거다.
“일단 소속은 1팀이긴 한데, 에스퍼들과 매칭률을 봐야 해서 당분간은 계속 매칭 테스트만 하실 거예요.”
그건 각오한 일이다. 예전에 신입으로 막 배치받았을 때도, 1구역으로 이동했을 때도 첫 한 달간은 계속 매칭 테스트만 했었다.
가이드 입장에서야 최저 매칭률 30퍼센트만 달성하면 되긴 하지만, 에스퍼 입장에서는 좀 다르다. 매칭률이 높을수록 가이딩 받을 때 느낌, 효율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거야 내가 에스퍼가 돼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일단 이 대리님 등급이 B등급이시니까 에스퍼들도 B등급 위주로 테스트할 거예요. 그 이후에 다른 등급들도 테스트할 거고요.”
그럴 일은 잘 없지만 다른 등급에서 높은 매칭률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으니 규정에 따라 모든 에스퍼들과 매칭 테스트를 해야 한다. 다만 이 경우는 센터에서도 별로 기대를 안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밖에도 박유리는 센터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명을 해주었다. 식당, 의무실, 가이딩 전용실, 훈련실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패에 ‘가이드 1~3팀’이라고 쓰인 사무실에 나를 데려갔다.
팀별로 모여 있는 가이드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에 자리의 컴퓨터와 가이드용 패드가 주어졌다. 자리를 세팅하고 컴퓨터를 켜자마자 울리는 메신저들에 4구역으로 잘 왔다고 인사를 일일이 해주었다.
1구역에서 회사 사람들과 친화적으로 살았던 나지만, 인간관계에 너무 지쳤다. 1구역의 마당발 ‘이재하’는 4구역에 옴과 동시에 죽어버렸다. 이제 4구역 그림자 ‘이재하’로서 살아갈 것이다.
원래 회사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나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전투 구역에서라면 더더욱 중요한 스킬이다.
가이드 1팀은 5명의 가이드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불행히도 4주임과 1대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직급이 가장 높은 1대리의 경우는 안타깝게도 나다.
보통 미각인 에스퍼, 가이드들은 몇 년 센터에서 지내다 각인 상대를 못 찾으면 종종 구역을 바꾸곤 한다. 다만 에스퍼들은 다른 전투지역을, 가이드들은 안전지역을 선호할 뿐. 그것은 이 4구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가이드 팀도 비슷비슷한 구성이지만, 유독 이 1팀의 연차가 낮은 것을 보니 싸한 느낌이 든다. 잡일 처리 부서군.
본능적으로 깨닫고 나자, 가이딩 머신으로 살아갈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20대 초반의 아가들과 즐거운 점심시간을 가지고 나니 더 암울해지는 것 같았지만, 차라리 바쁘게 지내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이후부터는 매칭 테스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사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써먹기 위해서, 에스퍼들과 서둘러 매칭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래도 소요되는 물리적인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아무리 많이 테스트를 해봐야 10명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매칭 테스트를 하자마자, 셋째 날부터 오전에는 가이딩, 오후에는 테스트를 하기로 했다. 매칭 테스트가 끝난 에스퍼들만 가이딩 리스트에 뜨기 때문에 내가 가이딩 해줄 수 있는 에스퍼의 수는 극소수였다. 점점 한 명 한 명 늘어나겠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거의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었던 1구역의 안락한 생활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려고 한다.
***
“형. 1구역은 어때요? 거기 재미없지 않아요?”
가이딩 리스트에 가장 제일 위에 올라온 에스퍼를 가이딩 하기 위해 가이딩 전용실로 이동했다. 양호실처럼 침대 하나가 벽에 놓여있었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 2개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각종 커피와 티, 작은 냉장고가 올라가 있는 테이블이, 그 옆에는 바로 정수기가 위치해 있었다.
그냥 봐도 어려 보이는 에스퍼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있었다. 내가 가이딩을 하기 위해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그놈은 속사포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가이드들은 거길 가려고 안달인지 모르겠어요. 여기가 훨씬 재밌고 돈도 많이 주는데.”
고개를 쉼 없이 까딱거리며 말하는 놈을 보자니 ‘성인 ADHD’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매칭률이 40퍼센트 정도가 되는 이 어린 녀석은 어제 매칭 테스트를 할 때도 쉼 없이 떠들었던 기억이 났다.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나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에 박혔나 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만 내밀자 녀석이 냉큼 내 손을 잡아온다.
“형형. 형 근데 혹시 7팀에 최철민이라는 놈 알아요? 혹시 그놈 가이딩 리스트에 있어도 절대 가이딩 해주지 말아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지만 녀석은 끊임없이 나불대며 이제는 동료 흉을 보고 있었다. 가이딩을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꾸물거리며 흘러들어 간 에너지가 뭉쳐있는 에스퍼의 에너지를 펴가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1구역의 에스퍼들을 가이딩 할 때보다는 많은 집중이 필요하다.
“아. 형이 내 가이드였으면 좋았을 텐데. 도대체 제 가이드는 어디서 뭐 하느라 안 나타나고 있을까요. 다른 에스퍼들이 그러는데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한테 받는 가이딩은 진짜 기분이 좋대요. 형한테 받는 가이딩도 기분이 좋은데 매칭률이 높으면 정말 어떤 기분일까요.”
이제는 점점 음담패설 쪽으로 흘러갈 거 같았다. 한 손으론 어린 에스퍼의 손을 붙잡고 가이딩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 패드를 손으로 훑으며 저놈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주민 에스퍼.”
“네?”
다른 말을 하다가도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바로 대답해온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요.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말을 꺼냈다.
“여기 형이 어디 있어. 호칭 제대로 해주세요.”
회사생활 10년 하면서 느낀 점은, 에스퍼들은 잘해주면 꼭 기어오른다는 것이었다. 꼰대 같은 마인드였지만 에스퍼 지들끼리야 지지고 볶고 하면서 힘으로 서열을 정리하지만, 치고받을 수 없는 가이드들은 그냥 밑으로 본다. 웃으며 잘해줘 봤자 우습게 보이기 때문에 칼같이 선을 그어야 한다.
말을 마치고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가이딩을 했다. 이렇게 말해도 에스퍼 놈이 미쳐서 힘이라도 쓰면 일반인인 가이드들은 꼼짝없이 당해야 한다.
“아… 네….”
조금도 쉴 틈 없이 움직이던 입이 그제야 꽉 다물렸다. 말을 훅 뱉었지만 혹시 놈이 뭐라도 할까 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하지만 김주민은 가이딩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이딩이 끝난 후, 가이딩 완료를 누르며 패드로 서류작업을 하고 앉아있자니 앞에 놈이 쭈뼛거리며 일어서는 게 느껴진다.
“가이딩 감사했습니다. 이 대리님.”
그러고 후다닥 나가버린다. 어린놈한테 좀 심했나 싶지만, 회사에서 형 동생 찾아서 뭐 하겠는가.
***
바쁜 4구역의 센터에 있게 되면서 난 새로운 사실들을 한 개씩 알아갔다. 이 센터가 유독 가이드들의 수가 모자랐다는 것. 그제야 1구역의 센터장이 그렇게 기꺼워하며 발령을 재빨리 내 버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스퍼들은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짐승 같았다는 것.
1구역의 에스퍼들은 물리계보다 주로 정신계가 많았다. 따라서 하는 일도 육체적인 것보다는 주로 서류작업이라든지 설계, 연구 등의 업무였다. 그런 에스퍼들을 담당했던 나도 편하게 일을 했었다.
어쨌든 몸 쓰는 것보다 머리 쓰는 일이 많았던 1구역의 에스퍼들에 비해 4구역의 에스퍼들은 정말 짐승 같았다. 쉼 없이 전투지역을 찾아서 힘을 쓰고, 그마저도 없으면 지들끼리 훈련실에서 치고받고 했다. 덕분에 여러 개의 훈련장들 중 언제나 한 곳 이상의 훈련장은 박살이 나 있었고, 시설팀의 한숨도 끊이지 않았다. 또한 쓸데없이 힘을 쓰는 에스퍼들의 생각 없음에 죽어나는 것은 가이드들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가이딩 리스트를 확인했다.
<긴급><긴급><긴급><긴급>
욕을 안 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살려고 했던 나의 목표가 조금씩 희미해짐을 느낀다. 매칭 테스트가 3분의 1쯤 끝나서 내가 가이딩 할 수 있는 리스트도 늘어났다. 그에 따라 <긴급> 리스트가 계속해서 추가된다. 1구역에서 지냈던 4년 동안 <긴급>으로 들어오는 리스트는 본 적도 없는데, 이곳은 패드를 켜면 항상 <긴급>이 들어온다.
다행히 다른 가이드들이 알아서 가져갔는지 곧바로 <긴급> 중 두 개가 사라졌다.
제일 상단에 올라와 있는 <긴급> 가이딩을 클릭을 하자, 인적 사항이 보였다. 어제 매칭 테스트 62퍼센트를 기록했던 A등급의 지승우였다.
B등급의 나에게 A등급인 지승우와의 매칭 테스트는 그냥 규정에 나와 있는 형식적인 절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높게 나온 매칭률에 센터 측에서는 기뻐했고, 내 입장에서는 떨떠름했다. 등급이 낮기 때문에 나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하려면 조금 힘들기 때문이다.
‘가이딩 수락’을 클릭하며, 그가 대기하고 있는 가이딩 전용실으로 이동했다.
***
그가 대기하고 있는 ‘가이딩 전용실 402호’에 들어갔다. 많은 수의 에스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이곳 4구역에서는 건물 한 동이 통째로 가이딩 전용실이었다.
12층짜리 그 건물을 보며 나는 ‘나라에서 인정한 공식 떡치는 장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각인된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물론이거니와, 미각인된 에스퍼와 가이드들까지 가끔 몸을 섞는다. 그거만큼 효율이 좋은 가이딩은 없으니까.
요즘은 세상이 좋아 약물의 도움과 피부의 접촉으로 하는 가이딩으로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몸을 섞는 가이딩의 쾌락은 비교할 수 없다. 어쨌건 지승우가 대기하고 있는 402호에 들어가기 전부터 들리던 신음소리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좀 더 크게 들렸다.
침대 하나와 마주 보고 있는 소파, 다른 방과 동일하게 생긴 가이드 전용실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원하게 트여 있는 창문 너머로 잘 조경된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지승우가 고개를 들어 나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이 대리님.”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린 에스퍼에게 한 소리했던 것이 소문이 돌았는지. 에스퍼들은 나에게 꼬박꼬박 직급을 붙여 불러주었다. 아니면 내가 계속 예의 바른 에스퍼들만 만난 것일 수도 있지.
“안녕하세요. 지승우 에스퍼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부디 센터에 내 소문이 좋게만 나길 바랐다. 대충 패드를 눈으로 훑으며 인적 사항과 내용들을 확인했다.
“전투는 아니고 훈련하시다가 힘을 다 쓰셨네요….”
괴물 잡는 것도 아니고 훈련 좀 했다고 <긴급>을 띄우다니. 속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 기색이 느껴졌는지 지승우 쪽에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왔다.
“잘 안 이러는데 갑자기 흥분해서 힘을 좀 많이 써버렸습니다.”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자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에스퍼 중에서는 가이딩을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 놈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 반응이면 굉장히 매너 있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긴급이라더니 멀쩡하신데요?”
“그렇게 보이시면 다행인데… 제가 진짜 좀, 급해서요.”
그러면서 가이딩 해달라는 듯이 손을 뻗어 내게 내밀어 온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지승우가 <긴급>을 띄울 정도라는 것은 눈 색깔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에스퍼의 힘이 소용돌이치는 게 눈동자 색깔이 변한 것으로 확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손을 잡아 에너지를 흘려보내자, 왜 <긴급>을 요청했는지 더더욱 느낄 수 있었다.
“와…. 이 정도로 힘을 썼는데, 표정 관리 잘하시네요.”
에스퍼의 내부는 에너지가 엉망으로 엉켜있었다.
“훈련으로 이 정도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내리까는 남자를 나는 천천히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에스퍼들은 잘생겼다. 그것도 등급이 높을수록 더 잘생겼고, 국가에서 홍보로 써먹는 높은 등급의 에스퍼의 경우에는 팬클럽도 거느리고 있었다.
A등급에 걸맞게 지승우도 남자답게 잘생겼다. 살짝 처진 눈꼬리에 시종일관 걸린 그림 같은 미소가 여러 사람 울리게 생겼으나, 다행히도 내 취향의 얼굴은 아니었다.
손을 잡고 지승우의 가이딩을 하고 있자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사이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뻘쭘함에 무언가 말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는 찰나, 지승우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일은 잘 적응되셨어요?”
“적응하고 말 게 있나요. 가이딩만 하면 되는걸요.”
의도치 않게 다시 말을 끊어버렸다.
나는 4구역 사람들에게 벽을 치고 있었다. 물론 내려온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누구와도 사적으로 대화하지 않았고 공적으로도 필요한 얘기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1구역에서는 루머와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에 누구보다 민감했다면, 이곳에서는 누군가 내 앞에서 루머의 루 자만 꺼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런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난 너무 지쳤다. 사람들이 쉽게 소비하고 마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관심 가지는 것에 질렸다.
예전에 그렇게 관심을 가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되자, 나는 겁에 질리고 힘들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 희생양이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벽을 치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 4구역에서는 가이딩 해야 할 리스트들은 차고 넘쳐서, 다른 가이드나 지원부서와 접촉할 일은 최소한이었다. 덕분에 내가 바쁘기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여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입사하신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매칭 에스퍼를 못 찾으셨더라고요.”
“네. 어쩌다 보니….”
“전 입사한 지는 11년 차인데, 아직 제 가이드는 안 나타나더라고요….”
씁쓸하게 말하는 지승우가 순간 안타까워 보였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평생 가이드가 안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요.”
“괜찮을 겁니다. 요즘은 약도 잘되어 있어서 가이드 없어도 폭주할 일은 없을 거예요.”
묘한 분위기이지만 난 회사생활 10년 차이다. 살짝 간 보고 있는 지승우야 급해서 그런 거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칼같이 쳐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루머 없는 조용한 그림자 같은 회사 생활. 그것이 4구역에서의 내 목표다.
앞에 앉아있는 지승우가 은근슬쩍 작업 걸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단호하게 끊어내자 지승우가 묘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안 통하네요.”
“저도 입사 10년 차라서요.”
“아… 안타깝네요. 신입이었으면 넘어왔을 거 같은데….”
동정심을 자아내던 표정에서 지승우가 금방 얼굴을 바꾸어 왔다. 에스퍼들은 가이드들을 꾀어내기 위해 연기를 잘한다. 본인들이 살기 위한 본능적인 능력인 것 같다.
그사이에 옆방의 색사는 끝이 난 것 같다. 지승우의 손으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흘려보내고 있자니 지승우가 손을 흘끔 쳐다보았다.
“혹시 몸으로 하는 대화나 가이딩은 관심 없어요?”
“관심 없습니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해요. 이 대리님이랑 가이딩 궁합도 잘 맞는 걸 보니 속궁합도 잘 맞을 거 같아요.”
높은 등급의 에스퍼들 중에 멀쩡한 놈들이 있을 리가 없지.
“성희롱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죄송해요.”
짓궂게 웃으며 지승우가 사죄를 해온다.
“등급 차가 나는데도 가이딩이 잘되네요. 매칭률이 그나마 좀 높아서 그런가? 그래도 B급 가이드 아니었나요?”
“제가 질보단 양이라서요.”
무뚝뚝하게 말을 하자 지승우가 하하 웃는다. 너 웃으라고 하는 소리 아닌데.
“질 좋은 가이드도 좋지만 양으로 승부하는 가이드도 매력 있네요.”
“가이딩 끝났습니다.”
환하게 웃는 지승우의 손에서 내 손을 떼어내며 얼른 꺼지라는 마음을 담아 말을 건넸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지승우는 가이딩 후 서류작업을 다 끝낼 때까지도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
4구역에 부임한 지 삼 주일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현장이라 그런지 일과 중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고, 업무 중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느라 숙소에 돌아가서는 쓰러지듯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전 애인에 대한 생각이 날 틈도 없었지만 주말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인 듯 1분 1초마다 전 애인과 1구역 사람들에 대해 생각이 났다.
덕분에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다행히 술 처먹고 한 주사라고는 친한 동기들에게 보낸 문자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타이핑되지 않아 내용을 알아볼 수도 없었고, 그 술주정에 대답해준 동기도 아무도 없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출근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이 갑자기 쓰레기가 된 기분이라 홍삼이라도 사 먹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의무실에 들러 진통제를 하나 받아와 조금 늦게 사무실에 도착하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건 1팀에서 담당해야지. 본인들 업무인 거 몰라요?”
“김 대리님. 저희는 못 해요, 이거. 저희 연차가 하기에는 좀….”
1팀에서 입사한 지 3년 만에 최고참 자리를 꿰찬 김하영 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발령받아 오자 최고참에서 벗어난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업무에 연차가 어디 있어, 김 주임. 이러려고 업무분장 나눠놓은 건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저희 의사는 하나도 반영 안 되고, 저희 연차 낮다고 무작정 밀어 넣으신 거면….”
“거참 김 주임. 가이딩에 입사 연수를 왜 따져? 애초에 1팀에서 하기로 한 업무고, A급 가이드가 2명이나 있는데 이걸 왜 못 해.”
“아니. 이건 등급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김 대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무 등급 가이드가 가도 상관없는데 다른 팀에서 가도 되는 거 아니에요?”
현장의 거친 풍파를 3년이나 겪어온 덕분에 김 주임은 따박따박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뭇했다.
“무슨 일입니까?”
내 자리로 가 컴퓨터 부팅을 하며 물어보자 김하영 주임과 옆 팀의 이름 모를 김 대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 대리!”
의외로 좋아한 것은 옆 팀의 김 대리였다.
“아니, 이 대리. 말 좀 들어봐. 업무분장에서 1팀에서 하기로 한….”
“김 대리님. 저 아십니까?”
기뻐하며 말을 다다다 쏟아내는 이 대리의 말을 나는 끊어내었다.
“어? 알… 지? 이재하 대리잖아.”
“아뇨. 저랑 반말할 만큼 아시냐고요.”
가이드팀 통틀어 거의 최고참이라 할 만한 김 대리였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 후배였다. 나이가 나보다 많고 거기다가 A등급으로 등급도 나보다 높아서, 아마 나를 얕잡아 봤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힘의 논리로 노는 것은 에스퍼이고, 가이드들에겐 직급이 있다. 초능력이 없는 주먹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다.
“아. 죄… 죄송합니다. 이 대리님.”
“네. 사과 받아줄게요. 그래서 무슨 일이죠?”
조용히 사는 것이 목표지 호구 잡히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서열을 바로잡은 다음에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김하영 주임이 말을 꺼냈다.
“다른 팀에서 다 하기 싫어하는 가이딩 건이 하나 있는데, 저희 팀 의견도 없이 업무분장을 강제로 해놨어요.”
“그게 어떻게 강제야! 실장님 사인 들어갔으니 공식 문서지!”
“이렇게 강제로 업무분장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등급이랑 매칭률도 싹 다 무시하고!”
“그놈은 그런 거 안 가려!”
내가 등장하기 전까진 그래도 조곤조곤 싸우던 것이 갑자기 큰 목소리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김하영 주임도 내가 나타나니 든든한 아군의 등장이라 여겼나 보다.
“두 분 진정하십시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건인데 그럽니까?”
두 사람에게 물어보자, 갑자기 둘 다 말이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말을 꺼낸 것은 김 대리 쪽이었다.
“좀 높은 등급 에스퍼인데, 까탈스러워서요. 센터 내에 매칭률 나오는 사람도 없고, 본인의 가이딩 거부도 심해서 가이드들이 하기 꺼려요.”
한번 서열을 잡아놨더니 제대로 존대어를 하는 김 대리를 보자 ‘강약약강’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높은 등급이면 그래도 얼추 비슷한 등급으로 맞춰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전에 가이딩은 보통 리스트에 뜨는 사람이 알아서 가이딩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어떤 등급의 가이드가 들어가도 가이딩 퍼센티지는 비슷하고… 좀 특이 케이스입니다.”
김 대리가 주저하며 말을 한다. 대충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에스퍼 본인도 까탈스럽기 그지없고, 가이드들도 다 맡기 싫어하는 케이스인 거 같다. 가이딩 받을 때 욕이라도 하는 건가?
김 주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 주임이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입 모양으로 말을 한다.
‘절대 받으면 안 돼요.’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가이드의 본분은 가이딩인데… 월급쟁이가 일 가려 받을 수 있나. 그보다는 등급이나 매칭률을 고려 안 하다니. 정기 감사라도 받는다면 대번에 지적 건이다.
“일단. 이 가이딩은 오늘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이딩 끝난 후에 실장님에게 정식 건의해서 업무분장 새로 하시죠. 아무리 그래도 1팀에 신입직원만 박아놓고 이런 무책임한 업무 주는 건 아니죠. 제가 있긴 하지만 저도 현장엔 오랜만에 복귀해서 신입이나 다름없습니다.”
현재 실장님 사인이 들어간 공식 문서상으로 업무분장이 1팀이라면 우리 팀 책임인 것이 맞다. 그렇다면 오늘까지는 우리 팀에서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이 문제아 에스퍼를 제대로 된 매칭률과 등급이 되는 가이드에게 배정해야 한다.
“뭐 실장님이 다시 하라고 하면 저희도 불만 없습니다.”
거짓말. 다 하기 싫어하는 업무라서 어떻게든 밀어서 신입한테 시켰던 거면서.
일단 연차는 높은 내가 가서 가이딩을 한번 해보고 어떤 놈인지 파악해본 다음에 업무분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았다. 할 만하면 그냥 내가 받아서 계속하면 되고, 정 안 되면 다른 팀으로 어떻게 해서든 넘겨야지.
김하영 주임 쪽을 돌아보자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별난 놈인가.
로그인도 못한 컴퓨터를 두고 가이딩 패드를 켜서 김하영 주임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아직 매칭 테스트를 안 한 사람이라 리스트에 없을 거라고 하면서, 김 주임이 패드를 조작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가장 상단에 <긴급>이라 쓰여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RED02’가 붙어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어제 술을 하도 많이 처먹었더니 이제 헛것이 보이는 건가?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아도 <긴급> 뒤에 ‘RED02’가 쓰여 있는 게 맞았다. 내가 본 게 맞는지 김하영 주임을 쳐다보자, 김 주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시발.
***
기관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부르고 있다. 그중에 좋지 않은 것들은 다 레드 코드로 통일되어있었고, 그중에서도 최고는 ‘RED01.’ 폭주였다.
‘폭주’. 살 떨리는 단어다. 교육을 통해 이론 및 시청각 자료로 줄기차게 배워왔었다.
예전에는 자주 에스퍼들의 폭주가 일어나, 각 기관별로 가이드에 대한 확보가 엄청나게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괴물이 나타난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그 괴물에게 대적할 건 에스퍼밖에 없었고, 그 에스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건 가이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이드 인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암울한 시기가 있었지만, 가이딩 약을 개발하면서 에스퍼들의 가이딩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덕분에 ‘폭주’란 단어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폭주’라는 단어는 가끔 또라이 같은 에스퍼들이 가이딩 없이 얼마나 버티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 가이딩을 멈추는, 뉴스에서 간간이 터지는 사고 같은 것이다.
그런 단어를 센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놈은 약도 안 먹고 뭐 한 거야?
가이딩 패드에 폭주 예정 표시인 ‘RED02’가 뜬 것은 오랜 가이드 생활 중에서도 처음이다. 하긴 폭주를 나타내는 ‘01’이 아닌 것이 다행인가 싶었지만, 에스퍼가 폭주를 했다면 비상소집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가이딩 전용실이 있는 건물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가이딩 전용실은 모두 지상에 위치해 있었지만, 폭주 예정자의 경우에는 지하의 벙커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새벽에 이 사람이 들어왔더라면 어제 당직자가 가이딩을 했었어야 할 건데, 하필 아침에 들어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1팀에서 맡게 되었다. 아니다. 왠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새벽에 들어왔어도 김하영 주임에게 연락하면 했지 당직자가 가이딩을 하진 않았을 것 같다.
엘리베이터 안에 지하로 내려가는 버튼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걸 누르자 끝도 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천천히 열리자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지옥의 입구인가 싶어 나가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갑자기 불이 하나씩 텅텅텅 소리를 내며 켜지기 시작했다.
공포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장면에, 저절로 침이 꼴딱 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서 갑작스레 사망 플래그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가이딩만 잘하면 되겠지.
긴장으로 땀이 밴 손을 바지에 슥슥 닦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펴며 무섭지 않은 척해 보았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선명히 들렸다. 내 발소리만 터벅터벅 울리는 공간에서 갑작스레 기계음이 들렸다. 눈을 흘낏 돌려보니 내가 걷는 것에 맞추어 CCTV가 목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문명의 흔적이 보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복도의 끝까지 걸어가니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이 또한 교육 자료로만 보던 벙커였다. 지문을 찍고 홍채를 인식하자 문이 철커덩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철문을 지나자 다시 자동으로 철문이 잠기고, 또 다른 철문 앞에 서서 음성인식을 했다. 그러자 거대한 철문이 철컹하고 열렸다.
두 번째 철문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아, 두께만 30cm인 무거운 철문을 온몸을 써서 열었다. 와. 가이딩 하기 전에 문 열다가 죽겠다. 성인 남성이 온 힘을 다해서 간신히 내 몸 하나 지나갈 공간만 열어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규정을 떠올리며 다시 온 힘을 다해 문을 닫았다.
지하 특유의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낑낑대며 힘을 쓰느라 살짝 더웠다. 몸을 돌려 정면을 쳐다보자 그곳엔 다시 전면 유리로 공간이 분리된 방이 보였다. 무슨 센스인지 새하얀 벽면은 병원을 연상케 했지만, 창문은커녕 구멍은 아무것도 없어서 폐소 공포증을 유발했다.
‘와. 여기 공기 순환은 어떻게 시키는 거야.’
공간이 주는 압도감을 무시하고자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안을 살펴보자,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가 보였다. 폭주 예정이라더니 날뛰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잠들어 있나 보다. 그러면 나야 좋지.
누워있어도 꽤 장신으로 보이는 남자를 살펴보며 홍채인식으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텅 하고 울리는 유리문을 다시 낑낑대며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앞의 철문보다는 가벼워서 유리문을 잘 닫고 남자의 앞으로 갔다.
과연 높은 등급의 에스퍼라는 게 맞는 건지 남자는 잘생겼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예뻤다.
작은 얼굴에 날렵한 턱선, 그럼에도 남자임을 주장하는 듯 귀 아래로 턱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높은 라인은 부드러웠고 가느다랗지만 진한 눈썹조차 조화로웠다. 다만 몸 상태가 안 좋긴 한 건지 하얗게 질린 입술이 이 남자의 아름다움을 유일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아니, 방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병약미를 돋보이게 했다. 생각보다 취향을 저격하는 청순한 미인을 만나자 이 위험한 상황마저도 잊게 되었다.
멍하니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가이딩을 하기 위해 그의 손을 찾자, 다행히 배 위에 곱게 포개어 올려져 있었다. 처음 두려움으로 떨리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떨리는 것을 느끼며, 후딱 하고 나가자고 생각했다. 손을 잡고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자, 그의 눈이 뜨여 있었다.
쌍까풀 없이 큰 눈의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 밑에 살짝 진 다크서클이 어느 순간 섹시함을 풍기고 있었다. 순식간에 청순미인에서 섹시미인으로 탈바꿈했다. 표정 없이 나를 응시해오던 그가 돌연 눈을 접어 웃음을 만들어내었다.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천천히 나른하게 말을 해오는 목소리조차 저음으로 이 공간을 웅웅 울리고 있었다.
“아… 삼 주일 전에 배치받은 이재하 대리입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빨리 가이딩을 하고 싶었는데, 내 앞의 에스퍼는 여유롭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었다. 다만 그의 눈을 정통으로 마주 보고 있는 나는 그의 길들이지 못한 에너지가 몸부림치는 게 보였다. 에스퍼들이 본인들의 에너지를 사용하거나, 통제하지 못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변화는 홍채의 색깔이었다. 지금 그의 눈은 빨간색이었다.
“등급은?”
“B등급입니다.”
들어오기 전에 확인한 그의 등급은 S등급이었다. 세상에. S등급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이런 사람이 왜 이런 현장에 처박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S등급 에스퍼가 있으면 전용 가이드를 몇 트럭이나 갖춰줄 만큼 귀한 등급인데 여기서 이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센터 내에서 그에게 가이딩을 해주는 것을 꺼리기도 했고… 등급이 너무 높아서 부담스러워 그런가?
“괜찮겠어?”
“네?”
분명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오는 거 같은데, 묘하게 위압적이다.
“내 가이딩. 할 수 있겠어?”
천천히 나긋하게 말을 하는데도 자꾸 머리 한쪽에서 경보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거슬리게 하는 건….
“저 아십니까?”
“…응?”
“저 아시냐고요.”
“아니?”
“근데 왜 반말이세요?”
에스퍼들에겐 잘해 주면 기어오르고 호구로 보인다. 그래서 딱딱한 철벽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S등급일 때도 통용되는 말이다. 내 아니꼬운 표정에서 진심을 느꼈나 보다.
“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눈앞의 미인이 순간 귀여워 보였지만, 난 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안해요.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며 사과를 하는 예쁜 미인에게 인정사정없이 대할 만큼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괜찮습니다.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누워있는 그의 옆에 살짝 앉으며 가이딩을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에너지를 흘려보내 그의 뭉치고 섞여 있는 에너지에 닿자마자 나는 몸을 떼어내며 헛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 괜찮은 거예요??”
경악에 차서 누워있는 그 사람을 쳐다보자 그 사람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웃을 뿐이었다. 검고 검게 뭉친 광막한 차가움이 내 손끝부터 난도질을 하며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그의 에너지를 생각하며 진저리치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하긴,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깜빡하긴 했지만. 지금 내 눈앞의 이 남자는 ‘RED02’ 코드를 달고 있는, 폭주 예정자였다.
갑자기 놓았던 긴장감이 확 솟구치며 명치가 조여지는 듯했다.
“가이딩. 안 해줄 거예요?”
그래도 가이드 시작한 지 10년 차에, 현장에서 안 굴러본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속내를 쉽게 드러낸 것 같아 민망했다.
알 수 없는 매칭률을 제외하더라도, 등급 차가 너무 크게 나기 때문에 내 가이딩이 남자의 상태를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안 해주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 사람에겐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했다.
비관적인 내 마음은 꾹꾹 눌러놓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눈앞의 이 에스퍼일 것이다. 폭주 직전의 상황일 텐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해드려야죠, 가이딩.”
애써 무표정으로 가장하고, 그래도 월급 값은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집중하기 위해 눈을 꾹 감으며 일을 시작하자, 전이되는 내 에너지가 뭉치고 뭉쳐 어둠뿐인 그의 것에 닿고 속으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꾹꾹 눌러 참고 에너지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조금씩 가이딩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에너지는 너무 크고 거대해서 가늠이 되질 않았다. 바다에 물 한 컵 떨어뜨리는 기분이었다. 암담한 기분이 들어서 흘려보내는 에너지를 조금 더 높였다.
그 순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에너지가 빨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번쩍 뜨자, 나와 눈을 마주치며 에스퍼 녀석이 환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김 대리가 했던 ‘가이딩 하기 꺼려 해요’라는 말이 생각났다.
시발.
가이딩은 일방적이다.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에너지를 ‘흘려보내’줘야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에스퍼가 강제로 가이드의 에너지를 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가이드한테서 에너지를 뺏어가는 에스퍼가 없으라는 법은 없다. 안타까운 점은 그 에스퍼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이다.
중간에 끊으려 해도 끊기지도 않은 가이딩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그만하세요!”
빠른 속도로 흘러 들어가는 내 에너지를 느끼며 분노에 차 소리쳤다. 그의 에너지가 어떻게 풀어지고 있는지 따윈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내 몸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붙잡은 손을 강제로 떼어내려 하였지만, 에스퍼답게 힘이 센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노려보며 속으로 온갖 욕을 하고 있는데, 점점 에스퍼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간다.
이상함을 넘어서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가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보자니 그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완벽한 무표정으로 변하고 나서야 그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미쳤습니까?”
“너 뭐야?”
웃음기도 없이 싸늘하게 말해오는 그에게 기가 찼다.
“가이드입니다. 그럼 댁은 뭐예요. 미쳤어요?”
다른 가이드들이 가이딩 하기 싫어한다는 게 등급 차이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 강제로 에너지를 뺏어가는 놈이라서 그런 거였다니. 김하영 주임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김 대리는 몰라도 넌 알려줬어야지!
분노와 가이딩의 후유증으로 자꾸 위에서 토기가 치밀어 오른다. 어느새 침대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놈을 째려보며 한쪽 테이블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셔 속을 달랬다.
“어떻게 한 거야?”
“야?”
안 그래도 열받았는데 다시 짧아진 말이 더 분노케 한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 놈이라 주먹을 올릴까 고민했지만, 빠른 현실 파악으로 주먹만 꾹 쥘 뿐 움직일 수는 없었다.
에스퍼만 아니면 진짜 한 대 치는 건데.
“어떻게 한 거예요?”
“뭘 어떻게 해요?”
재빨리 존댓말로 바꿔 말을 걸어오는 놈에게 날카롭게 대꾸했다.
“가이딩.”
“가이딩을 그냥 하지 무슨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보다 당신. 이 무슨 개매너입니까. 에너지 뺏어가는 에스퍼야 소문으로 듣기는 했어도 그게 내 앞에 있을 줄은 몰랐네.”
올라오려는 토기를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살짝 역류한 위액 때문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난 당신 같은 가이드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데.”
“댁이 소문을 잘 모르는 건 아니고요?”
절로 빈정거림이 나온다. 그러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환하게 웃는다.
“가이딩. 다시 해줘. 아니 해주세요.”
“미친놈이세요?”
어떤 정신 나간 가이드가 방금 그런 일을 겪고 가이딩을 다시 해준단 말인가. 내가 등급이 낮지만 양이 많은 가이드라 그렇지, 일반적인 가이드였으면 분명 병원에 실려 갈 정도였을 거다.
“폭주 직전이었잖아요. 제정신으로 한 거 아니에요.”
분명 제정신으로 한 거 같은데 놈이 뻔뻔하게 말을 해온다.
“그보다, 가이딩. 이렇게까지 한 거 오랜만이라… 다른 가이드들은 등급 차이 난다고 나를 피하기만 하고….”
우울한 척 눈썹을 내리깐 게 무척 슬퍼 보이지만 내 회사 생활 경력이 저건 연기라고 말해준다. 더군다나 나도 머리란 게 있는 놈인데 저걸 눈치 못 채면 안 되지.
“그쪽을 피한 건 등급 차이 때문이 아니라 가이딩 주도권을 빼앗아 가서 그런 거 같은데요?”
“설마요. 다른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안 해줘서, 항상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을 받아서 그래요.”
살짝 눈치를 보며 말해 오는 게 진짜인가? 싶다. 이건 내가 사전 정보가 없어서 뭐라고 판단을 할 수 없겠다.
“제정신이 아닐 때만 그러는 건데,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돼서… 내가 가이딩 할 때마다 주도권을 빼앗아 가는 줄 알아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는 모습만큼은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 만큼 미인이었다. 얼굴에 속으면 안 되는데….
얼굴에 빠진 감성과 내 머리 한구석의 이성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어쨌건 난 지금 멀쩡하고, 내 앞에는 ‘업무분장’상 해야 할 일이 존재하는데. 내가 쓰러지지 않은 이상 해치워야 할 일이다.
“됐어요. 가이딩 해줄 테니까, 이번엔 주도권 뺏어가지 말아요. 다신 안 할 거니까.”
이번에 주도권 빼앗아 가면 감사실에라도 찌를 것이다. 물론 S등급 정도 되면 내 의견 따윈 무시할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물병을 잡아 물을 꼴깍 삼켰다. 위액이 역류해서 속이 아픈 건지, 아니면 열받아서 속이 탄 건지 구별이 안 된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을 잡아 다시 조금 에너지를 흘려보내자, 처음의 깊고 깊었던 어둠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얼음같이 차갑고 암흑의 벽으로 꽁꽁 감싸진 에너지가 느껴졌다.
“와, 인간이 이 정도 에너지를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에너지 흐름을 끊으며 질린 듯이 말을 하자 앞의 미인이 다시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제가 괴물 같아요…?”
“아니,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빠른 부정과 사과를 했다.
“아, 이거 가이딩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어요.”
주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내었지만, 이것 또한 진심이었다. 보통 <긴급>으로 뜨는 가이딩들도 이거보다는 에너지가 훨씬 적게 뭉쳐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냥 칠흑 같은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막막함에 한숨을 푹 내쉬자 그가 제안을 해온다.
“그럼 저랑 섹스해요.”
황당함에 그를 쳐다보자 그가 환하게 웃는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욕 좀 해도 될까요?”
회사에서만큼은 욕을 하지 말자는, 종종 깨지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방금 저 말은 진짜 쌍욕이 나올 뻔했다.
“왜, 가이딩 효율은 섹스가 제일 좋잖아요.”
그가 손을 들어 흘러내려온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그러면서 귀를 살짝 건드리는 게 선수네. 선수야.
“싫습니다.”
하지만 이런 플러팅은 딱 잘라줘야 한다. 에스퍼들은 또라이들이 많고 자꾸 어장관리같이 받아주다 보면 언젠가 한번 피를 보게 된다. 그것은 신입이었던 시절에 대부분 겪는 필수 코스였다.
“그럼 제 에너지는 어떻게 풀 건데요.”
내 몸에 찰랑거리는 에너지와 앞의 에스퍼에게 풀어야 할 에너지를 가늠해보았다. 아. 될까 안 될까.
“가이딩 약으로 통제가 될 정도까지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다만,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일이다. 이것은 일이다. 라고 최면을 걸며 약간은 사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내가 언제 이런 미인하고 입을 맞대어 보겠나 싶기도 하고, 실제로 손을 통한 것보다 키스가 더 효율이 좋기 때문에 한 제안이다.
그러자 그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답해온다.
“그거, 고백이에요?”
아니야. 이 미친놈아.
“그냥 그만둘까요?”
정색을 하자 그가 도리도리 고개를 돌린다. 20대 중반의 남자가 고개를 흔드는데도 예뻐 보이는 것이 얼굴 버프의 영향이 너무 크다. 한숨을 푹 쉬고 최대한 아무런 표정 없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갯짓을 멈춘 그의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에 그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다가 감는 것이 보였다. 나도 따라서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꺾어 코가 부딪히지 않게 입술을 맞댔다.
꺼끌꺼끌한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아 올리고 아랫입술을 빨았다. 살짝 벌려진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음과 동시에 가이딩은 시작되었고, 가이딩에 집중하느라 느려진 내 혀놀림에 갑자기 내 입안으로 그의 혀가 침범했다.
깜짝 놀라 가이딩이 뚝 끊기자 그가 입술만 맞대고 말을 해온다.
“가이딩. 계속하셔야죠.”
바로 눈앞에 위치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웃음으로 곱게 접힌 눈을 따라 가느다란 초승달처럼 보였다. 동시에 다시 입을 열고 들어오는 혀에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의 혀가 내 혓바닥을 건드리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가이딩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내가 넣을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가이딩에 정신을 집중하랴 들어오는 혀를 받아주랴 점점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내 혓바닥을 건드리던 그의 혀는 갑자기 입천장을 건드리기도 하고 목구멍 깊숙이 들어오기도 했다. 내 입안의 모습을 본이라도 뜨려는 것인지 치아 하나하나를 쓸고 다니다 갑자기 입천장 한가운데를 진득하게 쓸어 올리자 내 목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 손은 어느새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고, 그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고 다른 한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며 고개를 내려 눌러왔다. 코로 숨을 내쉬고 있지만 점점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가이딩은 본능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돼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의 혀놀림에 따라가기 급급했다.
혀뿌리를 간지럽히다가도 강하게 뽑아 올리듯이 잡아왔다. 입안에 고이던 침들이 점점 입 밖으로도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가 위치를 바꾸기 위해 고개를 살짝 떼어내자 그와 나 사이에 가느다란 선이 이어졌다. 잠시 크게 숨을 들이켜자 그가 다시 방향을 바꾸고 입을 붙여왔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올리더니 결국은 피를 보았는지 살짝 비릿한 맛이 느껴졌고, 그가 핥아 올려 따끔거렸다. 살짝 아파 그의 어깨를 세게 쥐자 그가 이번에는 다시 혀를 입안으로 집어넣어 내 혀를 휘감았다. 입안에서 신음이 울렸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모조리 먹혀 들어갔다.
부족해진 숨과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에너지에 조금 위험하겠다 싶어, 그의 어깨를 퍽퍽 쳤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떼어내고 나도 가이딩을 멈추었다. 어질어질한 머리가 숨을 못 쉬어서 그런 건지, 과도한 에너지 사용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약간 헷갈렸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숨만 색색 내쉬고 있자 그가 드러난 내 귀를 핥는 것이 느껴졌다.
키스 이상은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귀에 달라붙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자, 손쉽게 밀려났다.
“가이딩. 다 됐어요?”
“충분히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힘의 불안정함에 빨갛게 변했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 것이 보였다.
“충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질어질한 머리를 똑바로 들고 그에게 들러붙어 있던 몸도 세웠다.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가 내 팔뚝을 잡아 도와주었다. 그도 따라 일어났는데, 장신인 것은 눈치챘지만 나보다 머리 반 개가 더 컸다.
“전 이만 가볼 테니까, 이제 가이딩 약 드시고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으십시오.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 주도권 뺏지 마시고요.”
주절주절 말은 하는데 내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다. 에스퍼 상태를 확인해볼 정도도 안 되었다. 얼른 돌아가서 눕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쓰러지더라도 의무실에서 쓰러질 거라는 일념으로 몸을 바로 세워 한 발자국 내딛자 바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억도 끊겼다.
***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의무실의 천장이었다. 하얀 커튼으로 가림막이 되어있는 침대 위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점점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손을 까딱거리며 움직이자, 다행히도 아무 문제 없이 움직였다. 그다음으로 내부의 내 에너지를 점검해 보는데 거의 바닥이었다.
가이드로 발현을 하고 나서 에너지를 이렇게까지 소모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등급은 B등급이지만, 타고나길 방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다. 센터의 검사로는 등급만 표기될 뿐, 에너지 총량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덕분에 신입 때 넘치는 에너지로 수많은 가이딩을 해결해냈기에 ‘가이딩 머신’이라는 별명도 얻었었다. 주위에서는 몸 사리지 않고 가이딩을 한다고 치켜세워 주었고, 그것은 내 평판으로 직결되었다. 내 몸에는 전혀 무리를 주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남들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 가이드를 시작하던 시절에야 멋모르고 에너지를 펑펑 써댔지만, 점점 수많은 다른 가이드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다른 가이드들도 나와 비슷한 에너지양을 가지고 있지만, 몸을 사리느라 혹은 귀찮아서 가이딩을 적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나의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의 비정상을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양의 가이딩이 가능하다는 것을 남들이 알게 되면 내 앞의 일만 늘어난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적당히 남들과 맞추어 살게 되었다.
처음 신입일 때, 그러니까 1, 2년 차일 때는 가이드 뽕이 머리끝까지 찬 의욕 있는 신입 가이드였기에 어떤 등급의 가이딩이건 성심성의를 다했다.
간간이 있던 A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 할 때였다. 그의 손을 잡고 엉망이 되어있던 내부에 내 에너지를 밀어 넣었다. 매칭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등급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효율은 아주 나빴다. 그래도 있는 힘껏 때려 부어 가이딩을 끝냈다.
그때 가이딩을 받았던 에스퍼가 나에게 말을 해주었었다.
낮은 등급의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주면 목이 탈 때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라고 했다. 목마름은 해결이 되겠지만, 차가운 맥주를 마실 때 기대하는 그 톡 쏘는 탄산의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개새끼가. 목말라서 탈수로 죽기 직전의 사람한테, 물을 줬으면 됐지 무슨 탄산이고 지랄이고 까지를 들어줘야 하나. 그 이후로는 등급 차가 나는 가이딩은 꺼려지게 되었다.
물론 1구역에서야 마음껏 가려 받을 수 있지만, 가이드가 부족한 4구역에서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 할 때는 눈치껏 부족하게 가이딩을 했다. 그래야 날 안 찾지.
하지만 그것은 A등급의 경우고.
난 천천히 기절하기 전에 내가 했던 가이딩을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혀도 밝아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막막함. 외로움. 날카로움. 적대감. 온갖 부정적인 감각들이 서려 있던 에너지가 기억이 난다.
최초로 내가 내 의지에 반하여 완료하지 못한 가이딩이었다.
그때 도지윤 에스퍼는 가이딩에 만족한다고 했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확실히 S급은 다르긴 한가 보다.
창백하게 질려 누워있던 그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가이딩 주도권을 빼앗았던 일과는 별개로 맞는 가이드를 찾기를 바랐다. 그 정도로 예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지구적인 손실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우며 핸드폰을 찾아 가이드 지원부서인 박 대리에게 문자를 넣었다. 에너지가 바닥이라 가이딩을 할 수가 없으니 연차를 낼 생각이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차를 무려 4개나 썼다. 나 대신 가이딩을 더 해야 하는 1팀 직원들이 생각이 났으나, 미안함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를 사지로 밀어 넣으면서 아무런 설명도 안 해줬다. 설마 내가 못한다고 내뺄 거라 생각했나. 이 정도는 고생해도 되겠지.
박 대리의 푹 쉬라는 답장을 받고 숙소로 가기 위해서 의무실을 나섰다.
***
조퇴로 처리한 월요일은 정신없이 잠만 잤다. 과도한 에너지 사용 때문인지, 숙소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잠들었고, 일어난 것은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것도 배가 너무 고파서 일어난 거였기 때문에 냉장고 안에 있던 사과만 우적우적 씹어 먹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하여 말똥한 정신으로 일어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하루가 사라지다니. 배가 등짝에 달라붙는 것 같은 허기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에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쨌건 뭘 먹어야 하니 냉장고까지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멀었다. 걸어갈 수 없는 몸 상태 때문에 기어서 냉장고까지 가, 사과를 꺼내 씻지도 않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래도 당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아 부엌에 대자로 누워 숨만 골랐다.
다시는. 이렇게. 에너지가 바닥나도록. 가이딩 하지 말아야지.
동시에 창백한 미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었다. 진짜 저녁밥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 허기짐이 배고픔인지 외로움인지는 잘 모르겠다.
간만에 한가한 날, 수요일과 목요일은 술에 쩔어 있었다. 날 찼던 전 남친 새끼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면서 울었다. 숙소가 방음이 잘돼서 다행이다.
온갖 욕을 했던 기억도 나지만, 역시나 이성의 끈은 놓지 않았었나 보다. 쓰린 속으로 황급히 핸드폰 통화목록을 확인했을 때 다행히 놈의 이름은 없었다. 흑역사 제대로 쓸 뻔했네. 당분간 술은 자제해야겠다.
4구역으로 와서 바쁘게 생활하는 동안에도 간간이 떠오르는 놈의 모습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린 3년을 함께 지낸 연인이었고, 나는 부정했지만 그를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가끔 조용한 숙소에 혼자 있다 보면 ‘재하야’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물론 환청도 아닌, 내 착각임을 알기 때문에 그때마다 내 뺨을 때리며 정신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숙소에서는 TV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좋아했던 콜라를 무의식중에 사다 놓고 욕하면서도, 차마 버리지도 못했다. 언젠가 내가 마시면 되니까 뭐.
그래도 햇빛이 들어오는 낮이면 덜하지만, 밤이 돼서 사람의 감각이 예민해지면 과거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특히나 그와의 좋았던 기억들. 심지어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기억들마저 미화되어 생각나기 시작했다. 내가 더 잘해줄걸. 그땐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
과거의 후회들을 끄집어 파낼 때면 맨정신으로 있기가 어려워 생명줄을 잡듯 술을 마시게 되었다.
연차를 썼던 게 후회가 될 정도로 과거의 향수에 파묻히자, 목요일 저녁에 결국 금요일에는 출근을 하자고 생각했다. 하루 정도는 연차 취소원 올리면 되겠지 뭐.
센터에 가이드는 부족하고, 연차 올렸던 가이드가 취소하고 일하겠다면 센터 측에서도 반기리라.
금요일 출근을 마음먹고 목요일 저녁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잠에 들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어서 잠이 안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푹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가이딩 패드에서 시끄러운 알림이 울리고 있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화면을 확인하자 ‘RED03’ 코드가 표기된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재빨리 코드 수신을 하고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J07-047 ‘A등급 괴물 출현’ 비상 A조 소집 발령]
‘RED03’ 코드는 괴물이 나타냈을 때 울리는 비상코드이다. 해당코드에 따라 비상소집에 응해야 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1시간 이내에 센터에 소집해야 하고, 그 외의 가이드들은 6시간 내에 센터로 소집해야 한다.
나는 A조에 속해있기 때문에 대충 씻고 가이드 유니폼을 입고 센터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