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3/21)

Chapter 3.

센터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팀으로 들어가자 가이드 비상 A조의 다른 조원들이 보였다. 적당히 인원이 모이는 듯하자 가이드지원팀에서 나온 직원이 재빨리 브리핑을 시작했다.

“J07-047 지역에 A등급 괴물 22마리, B등급 괴물 50여 마리, 그 외 C등급 다수가 출몰하였습니다. 1차 정찰로 갔던 에스퍼들의 말이어서 실제 현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소 딱딱하게 말하는 지원팀 직원의 말에 침을 삼켰다. A급 22마리면 대규모 공격이었다. 센터에 있는 352명의 에스퍼들 중에서 A급은 30명도 안 될 것이다. 거기에 에스퍼들도 3개 조로 나눠서 대응하기 때문에 에스퍼 A조에 있는 A급 에스퍼는 약 10여 명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각 팀 대기 위치 확인해주십시오.”

가이딩 패드에 가이드 1~5팀의 대기 위치가 표기되었다.

평소의 가이딩은 팀 구별 없이 등급과 매칭률에 따라 가이딩 리스트에 올라오면 그냥 아무나 해도 된다. 하지만 긴급 상황일 경우 어느 정도 룰이 필요하기 때문에 팀별로 구별해서 에스퍼와 가이드를 배치한다. 긴급이기 때문에 매칭률과 등급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다. 이래서 에스퍼들이 각인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가이드 1팀이 에스퍼 1~5팀을 담당하게 되고, 다른 가이드 팀들도 각각 5개 팀씩 맡게 된다. 다만 가이드 6팀의 경우는 지원 에스퍼 가이드 전용팀이기 때문에 7개 팀의 가이딩을 맡게 된다.

팀은 많아도 업무강도는 가장 낮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공간이동을 시켜줄 에스퍼가 등장하자 곧 순차적으로 현장으로 이동되었다.

1팀이 대기하고 있는 위치에는 각인한 가이드 네 명이 있었다. 이미 괴물들과의 전투는 시작되었는지 저 멀리 공중에서 불꽃이 파르르 타오르는 게 보였다.

미각인 가이드 1팀의 비상 A조는 1년 차 신입인 주진호 주임과 나였다. 짬 좀 찼다고 몇 년 만의 현장에 긴장한 티를 낼 수 없는 나와 달리, 주진호 주임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주 주임과 내가 공간이동을 한 후로, 가이드 보호를 위해 C등급의 에스퍼 한 명이 마지막으로 공간이동을 해왔다. 그는 오자마자 보호막을 쳤다. 물론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는 내용이지 실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각인 가이드들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불길이 간헐적으로 펑펑거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괴물들의 눈에 띌까 봐 가이드들이 있는 곳은 어두웠고, 멀리서 켜져 있는 가로등으로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구분될 정도였다.

“괜찮겠죠. 대리님?”

침묵이 버거웠는지 주 주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갑작스럽게 출몰한 대규모 괴물들이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신입에게 불안감을 줄 수는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괴물이 대규모로 출현하긴 했지만, 저 정도면 뒤의 B, C조도 바로 불러들이겠죠.”

“…네? 제가 걱정한 건 그게 아닌데요…?”

어물쩍 당황해하는 주 주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천천히 되짚어 봐도 내가 잘못 말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런 상황이라면 대규모로 출현한 괴물들 때문에 걱정스러운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머리를 돌리고 있자 의외의 답은 각인 가이드 쪽에서 나왔다.

“저기에 그 미친개가 있잖아요.”

“미친개요?”

“…어디 산골에서 오신 거예요?”

이 4구역 사람들에겐 뭔가 자기들만의 암호가 있는 것 같다.

“제가 1구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

어둠 속에서 ‘1구역에서 여길 왜….’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에스퍼 중에 미친 또라이 같은 새끼가 있는데, 괴물들만 처리하면 될 걸 전투만 하면 같은 편 에스퍼들도 같이 묵사발을 만드는 미친 또라이 같은 놈이에요.”

한 문장에 미친 또라이를 두 번이나 강조하며 말하는 걸 보니, 굉장히 싫어하는 듯했다.

“그렇게 제 잘난 듯이 굴 거면 뭐 하러 다른 에스퍼들을 불러놓는 건지 모르겠어요.”

“다른 데 부숴버릴 바엔 그냥 에스퍼들한테 풀라는 거겠죠.”

그러면서 각인 가이드들은 그 미친 또라이와 센터를 맹렬히 씹어대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이죠. 비상 B조 소집할 때 있었는데, 그 미친 또라이가 소집 조도 아닌데 나타나서 다짜고짜 바위들을 막 떨어뜨리는 거예요. 죽일 거면 괴물들만 죽일 것이지 괜히 근처에 있었던 내 에스퍼도 그 바위에 맞아서 입원했었다고요!”

“그래도 그땐 전투에 참여했었네요. 저번에는 괴물 출몰해서 왔더니만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더라고요. 허 참. 그 미친 또라이가 하면 5분이면 끝날 거를 몇 시간 동안 질질 끌어서 다른 에스퍼들 죽을 뻔했어요. 나도 그날 가이딩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네.”

여기저기 해대는 피해담을 들어보니, 제멋대로 능력을 쓰는 이상한 놈인가 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들 중엔 또라이 같은 놈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정보는 중요하다.

“그 미친개 요즘 가이딩은 제대로 받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폭주해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가이딩 해주는 가이드도 없을 텐데 조만간 벙커에 들어가겠죠.”

“얼마 전에 벙커에 들어갔었다는데요?”

“진짜요? 이번엔 또 어떤 가이드 쪽쪽 뽑아먹었을지 안타깝네요.”

각인 가이드들의 수다를 듣자니, 점점 익숙한 얘기들이 들리는 것 같다. 혹시 이분들이 얘기하는 그 미친개가….

확인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저 멀리 전투지역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큰 폭발이 일어났다. 순간 가스폭발인가 싶을 정도로 대낮처럼 환하더니 그다음 쾅 하는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마자 뜨거운 열기를 품은 강풍이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을 정도였다.

잠깐의 열 폭풍이 가시고 다시 사위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약간 서늘하다고 느껴졌던 밤공기가 순식간에 한여름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주도적으로 말을 꺼냈던 각인 가이드가 욕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한 가이드들이 이 정도 열기를 느낄 정도였으면, 중심부에 위치한 괴물 및 에스퍼들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매뉴얼과 내 경험을 토대로 맹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출력되는 답은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이드들 사이에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있었던 에스퍼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센터로 돌아가기 위한 차가 올 겁니다. 1시간 정도 걸릴 테니 대기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친 에스퍼는 없는 건가요? 아니면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가 있을 텐데요.”

각인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물어보자 에스퍼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가 있으면 별도로 연락이 갈 겁니다.”

융통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에스퍼의 모습을 보자니, 이 새벽에 비상소집을 받아 왔던 모든 상황이 하나의 촌극 같았다.

내 기억 속에 있었던 현장의 전투 모습은 더 긴박하고 더 위험한 모습이었다. 전투지역을 바라보며 각인된 에스퍼가 혹시나 잘못됐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각인 가이드들의 모습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괴물을 빨리 죽이기 위해 힘을 쥐어짜던 에스퍼들. 간간이 힘을 다 쓸 때면 가이딩을 받기 위해 재빨리 가이드 구역에 와서 긴급 가이딩을 받고 바로 다시 현장으로 가는 뒷모습. 이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하던 ‘현장’의 모습이었지만 4년 만에 돌아온 현장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저거 폭발 일으킨 에스퍼. 그 도지윤 에스퍼겠죠?”

의심을 담아 조심스레 물어보자, 다른 가이드 한 명이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을 했다.

“저런 또라이 같은 짓을 할 놈은 미친개밖에 없어요.”

빈정대듯 말하는 가이드는 전투 현장 쪽을 째려보았다. 어느새 상대방의 얼굴선이 구별될 정도로 밝아지고 있었다.

내가 겪었던 과거의 전투와 현재의 차이점은, 그 미친개밖에 없었다.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가이드들이 하나같이 미친개를 욕하고 있었지만, 난 의문점이 든다.

미친개가 에스퍼들에게 해를 끼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살지 않았는가. 그가 없었으면 A등급 괴물 22마리에 의해 어떤 에스퍼는 찢겨 죽었을 것이고, 어떤 가이드는 가이딩 하다가 피를 토하며 병원으로 실려 갔을 것이다.

물론 아직 에스퍼들의 안위가 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각인된 가이드들 중에 쓰러진 사람이 없다면 이 가이드들의 에스퍼는 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이드들은 미친개를 욕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인의 에스퍼가 괴물에게 다쳤어도 미친개를 욕하지 않을까? 사람은 쉽게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만다. 미친개라면 본인의 에스퍼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건데, 하면서 그의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길 것이다.

그냥 이들은 씹고, 물어뜯고 본인들을 똘똘 뭉치게 할 희생양이 필요한 것뿐이다. 미친개가 잘못한 것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지만, 이들에게 이 정도의 적대감을 가지게 할 정도는 아니다. 에스퍼들 사이에 또라이들은 차고 넘치고, 가이딩 주도권을 뺏는 것 이외에 이들이 씹어대는 이야기는 다른 에스퍼들도 종종 해대는 미친 짓이다.

난 갑자기 떠오르는 창백한 미인의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이야기’의 희생자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한 시간 뒤쯤 도착한 차를 타고 센터로 다시 돌아오자, 해는 완전히 떠 있었다. 일단 내 근태는 휴가로 되어있기 때문에 쉴까 고민을 했지만, 오전 근무만 하고 돌아가도 된다는 말에 재빠르게 연차 취소원을 올렸다.

싱겁고 빠르게 끝나긴 했지만 어쨌건 새벽 중에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기 때문에, 가이드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이딩 패드에 올라온 가이딩 리스트들을 살펴보자 역시나 <긴급><긴급>의 향연이었다. 무려 8개나 되는 긴급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다른 가이드들이 채갔는지 순식간에 6개의 긴급이 사라졌다. 두 개 남은 리스트 중에 하나를 클릭하려 하자 그마저도 다른 누가 가져갔는지, 없는 문서라는 알림창이 떴다.

어쩐지 꺼려지는 느낌으로 마지막 하나 남은 <긴급>을 클릭하자, 미친개님의 이름이 떠 있었다.

“…김 주임. 도지윤 에스퍼. 업무분장 넘기지 않았습니까?”

막 출근한 김 주임에게 물어보자 김 주임이 우울하게 말을 해온다.

“그때 대리님이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하고 바로 조퇴하셔서, 실장님한테 말도 못 꺼냈어요. 제가 아직 실장님 상대할 짬은 안 돼서….”

입사 3년 차의 김 주임이 다른 선배들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하러 갈 때, 가이딩 주도권을 빼앗는다는 주요 정보도 안 알려준 앙금이 오래가는 것 같다. 그래봤자 아쉬운 쪽은 내 쪽이라 섭섭한 마음을 재빠르게 접었다.

“김 주임님. 도지윤 에스퍼. 왜 가이딩 하기 꺼립니까?”

이리저리 돌려 물어보려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새벽부터 혹사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서 돌직구로 질문했다.

“…네?”

“아니, 가이딩 주도권 뺏는 건 그때 겪어서 알고 있긴 한데, 그거 외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아… 도지윤 에스퍼는 그게 제일 크죠. 가이딩 주도권… 그래도 가이드가 가이딩으로 먹고사는데 골수까지 뽑히는 기분이라 굉장히 꺼려져요.”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같은 이유로… 가이딩 주도권을 빼앗기니까 다들 가이딩을 꺼려서 폭주 직전에만 가이드가 한 명씩 희생해서 하고 있어요.”

주저하면서 소곤소곤 말하는 김 주임의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내가 아무리 안전한 1구역에서 4년을 띵가띵가 놀다 왔었지만 가이드의 본분은 가이딩이다. 우리가 센터에서 월급을 받아먹는 이유인 것이다.

에스퍼를 폭주 직전까지 몰아붙여서 가이딩을 한다면, 내가 에스퍼 입장이어도 가이드의 골수까지 쪽쪽 뽑아먹을 것 같았다.

“긴급 상황이 아닐 때 가이딩을 해주면, 주도권을 안 뺏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급하면 에스퍼 쪽에서도 본능적으로 살고자 할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김 주임,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해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요.”

“일반 상황일 때도 가이딩 하신 적 없겠네요.”

“…네.”

김 주임은 뭔가 다른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래도 순순히 입을 열어 대답을 해주었다.

결국 다른 가이드들도 ‘소문’으로만 겪어보고 도지윤의 가이딩을 피했던 것이다. 도지윤은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살고자 하는 본능과 가이딩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능력으로 가이드의 에너지를 골수까지 뽑아먹었던 것이겠지.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 받는데 매칭률이고 등급이고 무슨 소용일까. 그냥 되는 가이드 아무나 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김 주임. 꼰대 같은 소리 해서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월급 받고 가이딩 하는데 에스퍼 차별 두면 안 되죠. 에스퍼 본인도 폭주할까 봐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어요. 어쨌건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는 이번에도 제가 하겠습니다.”

센터의 미친개에 대한 동정심이 갑자기 샘솟듯이 생겨나고 있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하니, 이 미친개도 그럴 거라 믿어보자.

가이딩 패드에서 도지윤 에스퍼의 가이딩 수락을 클릭하며 팀을 나서느라, 나는 김 주임의 오묘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

가이딩을 하기 위해 ‘가이드 전용실 903호’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9층에 내리는 순간부터 복도에서는 교성이 가득했다. 각인 에스퍼와 가이드이길 바라지만, 웬만하면 집에서 하지 이런 방음이 취약한 곳에서 하지는 않겠지. 아니다. 세상에 변태는 많으니까.

당장 생각나는 아는 변태 에스퍼들의 얼굴이 몇 떠오르자 기분이 불쾌해졌다.

‘903’이라 쓰인 방의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방과 똑같은 풍경에 도지윤이 그림같이 앉아있었다. 에스퍼 전용 검은색 제복을 입고 소파에 단정히 앉아있는 모습이 금욕적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좋아 보이는 혈색이, 특히 붉은 입술이 그를 눈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화사한 미인으로 보이게 했다.

눈웃음을 치며 도지윤 에스퍼가 나를 반겨주었다.

“다시 뵙네요. 이 대리님.”

낮은 저음이 느릿느릿 말을 해온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가이딩 시작 전 패드에 사전 정보를 입력하느라 집중하는데, 갑자기 소파에서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앞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휙 돌리자 도지윤 에스퍼가 생글거리며 앉아있었다.

“…너무 쓸데없는 데 능력 쓰시는 거 아닙니까?”

“안 썼는데요.”

패드에 집중했지만 앞에 있던 사람의 움직임을 눈치 못 챌 정도라니. 내가 이렇게 둔한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잠깐 들었다.

“꽤 둔하시네요.”

민망함에 패드의 조작에 집중했다. 사전 정보를 다 입력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가이딩 하기 위해 그를 쳐다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맞은편으로 옮기시죠.”

“싫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거부하자, 그의 턱선과 목선이 도드라져 보인다. 살짝 빼앗긴 시선을 갈무리하며 내가 벌떡 일어나 도지윤 에스퍼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미없는 가이드분이시네.”

“칭찬 감사합니다. 손 주십시오.”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내 눈앞으로 뻗어져 나온다. 서늘한 그 감촉을 떠올리면서, 손을 잡기 전에 혹시 몰라 단단히 일러두었다.

“절대 가이드 주도권 뺏지 마십시오.”

“왜요?”

“기분이 더러우니까요.”

“노력해볼게요.”

그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천천히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여전히 어둡고 거대한 단단하게 뭉친 에너지가 나를 반겼다. 폭주 직전의 상태가 한밤중의 칠흑 같은 바다였다면, 지금은 사위 정도는 구별되는 새벽녘의 바다 같았다. 여전히 칠흑 같은 바다인 것은 동일했지만 지금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어렴풋이 될 정도였다.

에너지를 통해 넘어오는 따끔따끔한 적대감, 의심, 공포심, 외로움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번 겪어보았다고 꾹 참고 계속 에너지를 흘려보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순조롭게 에너지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져 눈을 뜨자, 나를 뚜렷이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렇게 급하진 않으셨나 봐요. 눈동자 색이 안 변하셨네요.”

“전 능력을 쓸 때나, 폭주 직전에만….”

그가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조용한 적막 사이를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오는 신음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격하네요….”

“아무래도 새벽에 전투가 있었으니까요.”

심상한 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 너머로 또 다른 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 앙….’

나는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굉장히 난감해하고 있었다. 나는 전 남친과 헤어진 지 거진 2달이 되었고, 그동안 의도치 않게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음소리만으로도 아래에 자극이 갈 것 같았다.

안 된다. 여기서 흥분하면 좆 된다. 몸은 다년간의 훈련으로 알아서 가이딩을 하고, 머리로는 열심히 김강민 씹새끼와의 슬픈 이별이야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과거 남친과의 뜨거운 밤이 연상이 되는 것이 점점 좆 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가이딩 하다 말고 도망가려면 무슨 핑계가 필요할까, 로 다시 고민을 시작할 때였다.

도지윤 에스퍼가 손을 확 빼버렸다.

“무슨 생각 해요?”

도지윤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나른하게 웃고 있는데 기분은 나빠 보였다.

“왜… 그러시죠?”

“왜 내 앞에서 다른 생각 해요?”

“…네?”

“가이딩 중인데 저한테 집중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가이딩 중엔 눈앞의 에스퍼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내가 딴생각하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순간 어이없음에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자 도지윤이 쑥 일어나서 내 옆으로 턱턱 걸어온다.

“가이딩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다른 생각을 하면 가이딩 효율이 떨어지나? 그렇지는 않을 텐데?

의문이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보는데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다.

“난 가이딩을 오래, 많이 받아야 하고 급해요. 그리고 효율이 높은 걸 추구하죠. 나랑 섹스하기는 싫잖아요.”

‘아아앙!’

그렇게 말하는 배경음으로 절정을 맞이하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섹스가 더 좋긴 한데….”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내 턱을 잡더니 입술을 맞붙여 온다.

그리고 그의 혀가 내 아랫입술을 할짝이자 내 몸은 본능적으로 다시 가이딩을 시작했다.

이것은 일이다. 이것은 일이다. 단지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한 일일 뿐이다. 그렇게 되뇌었다.

***

내가 이렇게 쉬운 남자였나.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도대체 난 왜 그 남자와 두 번이나 키스했을까.

가이딩 효율 때문이다. …진짜 가이딩 효율 때문인가?

만약 다른 에스퍼들이 가이딩 효율을 핑계로 나에게 키스를 요구해온다면 나는 응해줄 것인가?

…애초에 그럴 일이 없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옆에 앉은 김 주임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얼굴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밖에 없는데. 내가 그렇게 얼빠였나.

키스할 때 가까이 봤던 그의 기다란 속눈썹, 눈꺼풀에 있던 작은 점. 잠깐 입술을 뗄 때 느껴지던 그의 축축한 호흡, 확 풍겨지던 숲 같은 그의 체향.

점점 붉어지는 얼굴에 잡념은 그만두고 모니터로 집중했다. 오랜만에 메신저에 접속하자마자 정화가 말을 걸어온다.

[재하, 왤케 오랜만에 들어옴?]

[개바쁨]

[현장이 바쁘긴 하지. 별일은 없고?]

[ㅇㅇ]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이메일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다 시답잖은 내용들의 이메일이라 읽어보지도 않고 바로 삭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시계를 쳐다보니 11시 40분이었다.

오전에는 도지윤 한 명의 가이딩을 끝으로 아무도 가이딩 하지 않았다. 그를 가이딩 하고 나자 바닥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서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할 수 없었다. 짬 때문인지 한 명만 가이딩 하고 푹 쉬고 있어도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볼 때마다 다른 가이드들이 괜찮냐고 물어봐서 에너지를 좀 써서 안색이 안 좋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재하. 요즘 센터에 무슨 소문이 도냐면….]

내가 1구역을 떠난 이후로, 1구역의 마당발이 된 정화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려고 슬슬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4구역의 그림자 이재하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살 예정이기 때문에 이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한번 소문을 들으면 더 관심 가지게 되고,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뽐내고 싶어지고, 그렇게 된다.

[ㄴㄴ 관심없음. 것보다 나 퇴근. ㅂㅂ]

퇴근 시간까진 무려 20분이나 남았지만, 옆 팀의 김 대리가 퇴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재빨리 컴퓨터를 정리하고 퇴근했다.

***

황금 같은 토요일에 결국 출근을 하게 되었다.

원래 토요일 당직이었던 주 주임이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나에게까지 전화가 온 것이다. 어차피 주말에 집에 있으면 전 남친 생각에 술만 처마실 게 분명하니 돈도 벌 겸 냉큼 당직을 수락했다. 출근하는 월요일에 밥을 사겠다고 했으나 거절했고, 그러면 커피라도 사겠다며 굉장히 고마워했다.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 로그인을 하니 정확히 9시였다. 4구역에서의 당직은 처음이었지만, 1구역에서의 당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마 여기 에스퍼 놈들은 주말에도 치고받고 하진 않겠지….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며 가이딩 패드를 확인했다. 이제 4구역에 있는 대부분의 에스퍼들과 매칭 테스트를 하였고, 그중 3분의 1정도는 매칭률이 30퍼센트도 되지 않아 나와는 인연도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 9시의 가이딩 리스트는 아무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일없이 한가한 토요일 오전이 지나갔다.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갑자기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져 로비에 있는 자판기를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가이드 팀이 위치한 본관 3층 건물을 나와 중앙까지 걸어가 바로 내려가면 로비가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도 되지만, 고작 3층 높이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느끼며 전면 유리로 이루어진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내 신발 소리가 비어있는 건물을 울리는 것이 한낮의 음악같이 느껴졌다.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 자유로움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유리 너머로 잘 조경된 정원을 무의식적으로 훑어보았을 때, 이 주말에 출근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싫겠다.’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생각을 떠올리며, 불쌍한 영혼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가를 찌푸렸지만. 아쉽게도 떨어진 시력으로 인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장신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안경을 맞추든가 해야지.’

투덜거리며 생각을 하자, 저쪽에서 날 발견한 것 같았다. 손을 흔드는 것 같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차피 누군지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라 신경 끄고 주스나 마시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녕하세요.”

“으아아아아!”

분명 앞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등장해서 화들짝 놀라버렸다. 내 흉한 비명소리에 앞의 미인이 눈을 땡그랗게 떴다. 도지윤 에스퍼였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그… 그, 분명 없었는데. 능력 쓰신 거예요?”

“네. 저쪽에서 손 흔들었잖아요.”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와 함께 손을 들어 정원을 가리켰다.

“아… 그럼 방금 정원에 계신 분이 도지윤 에스퍼였나 보네요.”

“저인 거 알아보신 거 아니었어요?”

“제가 시력이 좀 떨어져서… 사람이 있는 건 아는데 이 거리에서 얼굴은 안 보이더라고요.”

시력이 좋았어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으려나? 거리가 좀 먼 거 보니 에스퍼급이 아니면 확인이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보이지도 않는데 손을 흔드신 거예요?”

“아… 손 흔드신 거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저도 흔들었습니다.”

“저인 줄 몰랐다면서요.”

“…보통 상대방이 손을 흔들면 따라 흔들지 않나요?”

“아니요. 저니까 흔들었다고 하셔야죠.”

항상 웃으면서 느릿느릿하게 말을 하는 도지윤 에스퍼가 무표정하게 말을 하니 묘하게 압박감이 왔다. 내가 왜 이런 거지 같은 질문으로 취조당하고 있어야 하지?

“…제가 잘못한 겁니까?”

“네.”

“뭐를… 요?”

“다른 사람한텐 손 흔들어 주지 마세요.”

“네?”

황당함에 되묻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손에 들고 있던 해바라기를 나에게 건네준다. 얼떨결에 받아들자 그가 다시 환하게 웃어온다. 미친놈인가?

“그런데 회사엔 무슨 일이세요?”

“오늘 당직입니다. 에스퍼님은 오늘 무슨 일로…?”

“오늘. 출근하면 기분이 좋을 거 같아서요.”

미친놈인 게 확실하다.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주말 출근을 하는 직장인은 미친놈인 게 분명하다.

“아…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친놈과 떨어지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여 안녕을 고했다. 잘 가. 다시 보진 말자.

에스퍼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가이딩 패드에서 띠링 하고 알람이 들어왔다.

출근한 에스퍼들이 없어서 들어올 가이딩이 없는데…. 패드를 꺼내 가이딩 리스트를 확인하자 1건의 가이딩 요청이 올라와 있었다.

의아함에 손으로 패드를 조작하며 누구인지를 확인하자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돌리자 다시 깜짝 놀랐다. 소리도 없이 도지윤 에스퍼는 내 뒤 세 걸음 정도 떨어져서 맹하게 웃고 있었다.

“가이딩. 해주세요.”

아무도 없는 토요일 오후. 가이딩을 요청한 에스퍼는 4구역의 미친개. 도지윤이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같이 있는데 무슨 가이딩 요청을 시스템으로 합니까. 그냥 말로 하시면 되죠.”

“…아. 다른 가이드들은 가이딩 부탁을 하면, 시스템으로 요청하라고 하셔서요. 아무리 급해도….”

처연하게 내리깐 속눈썹이 뺨에 그늘을 만든다. 맙소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도 시스템으로 가이딩을 요청받는다고?

“시스템으로 요청하면 아무도 안 받아주시고….”

“다음부턴 그냥 말로 하셔도 됩니다.”

4구역의 가이드들에게 분통이 터진다.

아무리 공무원 사회가 경직되고 쓸모없는 행정업무의 향연이라고 하지만, 에스퍼에게 가지는 가이딩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쓸데없는 소문은 빨리도 돌고 살이 덧붙여 퍼져서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것도 너무 쉬운 조직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앞의 에스퍼도 사실 이상의 루머가 덧붙여 회생 불가능한 쓰레기라는 명찰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가이딩은 받아주지도 않은 채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만 몰아서 가이딩을 하는데 눈앞의 에스퍼가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으로 무슨 짓이든 할 거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거기에 소문이 덧붙여져서 가이딩 해보지 않은 가이드들조차 이 앞의 에스퍼를 피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1구역에서의 거지 같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나의 경험으로 4구역의 미친개를 동정하고 있었다.

“따라오시죠.”

로비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의무실로 향했다. 가이딩 전용실로 갈 수도 있지만, 그곳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가야 하기 때문에 멀어서 가기 귀찮았다. 당직자 전용 키 카드를 키패드에 올리자 굳게 닫혔던 의무실 문이 삑 하고 열렸다.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고 가장 가까이 있는 침대에 도지윤 에스퍼를 앉혔다.

언제나 맹하게 웃고 있는 도지윤 에스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에스퍼를 침대에 앉히고 나는 의자를 끌어다 앞에 앉을 생각이었다. 의자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리자 팔이 휙 잡히더니 도지윤 옆에 앉혀졌다. 황당함에 그를 쳐다보자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건드려온다.

“우리 사이에 무슨….”

나른하게 웃고 있는 게 분명한데 눈빛이 사냥을 앞둔 짐승의 것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그와 했었던 지난 두 번의 키스가 떠올랐다. 서서히 목부터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 해요?”

“…네?”

“얼굴이 빨개지고 있어요. 목부터 볼… 이제 귀 끝까지 빨개졌네요.”

귀엽네요. 속삭이며 내 귀 끝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매만진다.

이 긴장감 넘치는 상황 속에서 이걸 받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계산이 끝나고 1구역에서의 거지 같았던 사내연애의 끝이 기억나 밀어내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가이딩 시작해야죠.”

말과 동시에 그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입술을 붙여왔다.

가이딩이라는 게 원래 키스의 다른 말이던가?

착잡한 생각이 떠오르면서도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맞대고 먼저 내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두 번의 앞선 경험으로 그는 키스를 시작할 때면 아랫입술을 핥는 게 습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름진 내 입술을 뜨거운 혀가 핥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여전히 춥고 어두운 에너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에너지를 밀어 넣어야 저 검고 검은 에너지가 다 풀릴 것인가. 고작 B급 가이드인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였다.

다른 상급의 가이드들이 이 에스퍼를 가이딩 해줘야 할 것인데, 센터 내 가이드들이 슬슬 피하는 이 사람의 잘못된 소문에 머리가 아파진다. 이번 가이딩이 끝나면 도지윤 에스퍼에게 조언을 해줘야겠다.

4구역 내에서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이 불쌍한 사람과는 조금 친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가 내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온다. 아픔에 신음을 내자 그가 내 몸을 침대 위로 넘겨 눕히며 바로 나를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집중.”

내 머리 옆에 팔꿈치로 무게를 지지하고, 다른 한 팔로 내 볼을 연신 쓰다듬으면서 그가 말을 했다. 그 표정이 너무 온화해 보여서 순간 내 처지를 잊고 있었다.

곧바로 맞붙여오는 입술은 처음 시작보다는 격렬했다. 곧바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가 무섭도록 뜨거웠다.

내 혀에 곧바로 맞대어오는 그의 혀가 강하게 혀뿌리를 자극했다. 간지러운 느낌에 발끝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이리저리 혀를 옮겨 입안의 여린 점막들을 쓸고 다니다, 입천장의 유난히 말랑한 부분을 쓸어 올릴 때에는 내 입안에서 신음이 흘렀다.

코로 열심히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입안의 자극에 호흡을 놓치곤 했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내 숨에 그가 잠깐 고개를 떼어내어 숨 쉴 시간을 주었다.

“괜찮아요?”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빌어먹게도 나 혼자뿐이라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헉헉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입술을 맞붙여왔다. 앞선 것이 강렬하게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였다면 이번엔 부드럽고 정중했다.

크게 밀어붙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곳저곳 핥아대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 안쪽에 붙은 여린 살을 이빨을 사용해 살짝 잘근잘근 씹고, 다시 혀로 살살 핥아 올리자 크게 신음이 튀었다.

그가 목 안으로 웃는 게 느껴졌다.

그의 혀가 내 혀 중앙을 느릿느릿하게 훑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의 혀의 어느 부분을 핥아 올렸다. 그가 고개의 각도를 바꾸어 서로의 혀가 더 잘 얽힐 수 있도록 했다.

점점 급해지는 나의 혀와는 달리, 그는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에 넘치는 침이 밖으로 흐를까 봐 크게 한 번 삼켰다.

나는 왼쪽 볼을 씹어대는 버릇이 있어, 그쪽의 살은 여러 번 상처 입고 회복되어 울퉁불퉁했다. 그곳에 그가 혀를 대더니 집요하게 핥아대었다. 입안 깊숙한 곳이기 때문에 그의 몸이 나에게 더 밀착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약간 서 있는 하반신이 내 허벅지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나의 것이 그의 몸 어딘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입안에 있던 침이 잘못 흘러 들어갔는지 기침이 크게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몸을 모로 돌리며 기침을 하자, 오히려 몸은 그의 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저런.”

그가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가이드님. 가이딩 안 해주세요?”

키스에 정신이 뺏겨 가이딩을 할 생각 따위는 못했다는 것이 깨달았다. 미친. 가이드 10년 차의 경력이 부끄럽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의 부끄러움을 눈치챘다.

“귀가. 다시 빨갛게 되었네요.”

그리고 그가 내 귀에 입술을 붙였다.

“가이딩. 하셔야죠.”

그가 내 귓바퀴를 느리게 핥아 올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에게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망했다. 이렇게까지 진도를 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 귀를 핥아 올리는 혀를 느끼며 생각했다.

떼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복잡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내 손은 어느새 그의 어깨와 등을 붙잡고 있었다. 와, 이재하. 나가 죽자.

그렇게 자책하고 있는데, 그가 귓구멍에 혀를 넣는 게 느껴졌다.

“아….”

목구멍에서 신음이 튀어나오고 내 하반신이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귀에서 고개를 떼지는 않은 채 몸은 살짝 띄우더니 그의 무릎을 내 허벅지 사이로 집어넣었다.

나는 두 달간 의도치 않게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또… 원래 자극에 약한 편이다.

그가 입술을 이용해서 귓불과 귓바퀴를 자근자근 씹었다. 그러다가도 혀로 귀를 크게 쓸어 올려 다시 귓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아래로는 그의 허벅지가 느릿느릿 내 하반신을 문지르고 있었다.

신음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듯하여 입술을 깨물며 참았지만, 목 안으로 끙끙대는 소리를 그가 못 들었을 리 없다. 완벽한 에스퍼 제복을 입고 있는 그와는 달리, 나는 가이드 자켓은 사무실에 벗어놓고 안에 받쳐 입었던 셔츠 한 장만을 입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느릿느릿 셔츠의 단추를 푸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짓이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난 말릴 수가 없었다. 내가 욕망에 이렇게 약한 놈이었다니.

그가 귀를 희롱하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내려 목으로 내려왔다. 몸이 전체적으로 내려갔는지 내 하반신을 문지르던 그의 허벅지도 떨어져 나간 것이 느껴졌다. 반대로 내 허벅지에 그의 분신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단단한 것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가 목을 본격적으로 핥아 올리자 그 생각도 희미해졌다. 그는 내 목의 줄기를 따라 혀로 느릿느릿 쓸어 올리면서 동시에 내 허벅지에 그의 것을 은근히 뭉개 비볐다.

이빨은 사용하지 않고 입술로만 자근자근 내 목에 자극을 가하고 있었다.

“자… 자국 남기면 안 돼요.”

헐떡거리며 말을 하자 그가 내 목에 고개를 파묻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조차도 자극이 되었다.

“노력해 볼게요.”

그가 목에 입을 댄 채로 웅얼거리자, 귀가 아니라 목을 통해서 뇌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목을 떠난 그가 점점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정면의 그를 쳐다보자 혀로 내 가슴 한가운데를 길게 그으면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더 붉고 더 긴, 야한 그의 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지켜보고 있는 내 눈을 마주하며 그가 천천히 내 유두로 입을 내렸다. 내 왼쪽 유두를 빨아올리면서, 다른 쪽은 그의 손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자 그가 야살스럽게 웃으며 입을 살짝 떼었다. 그리고 붉은 혀를 길게 빼더니 내 유두를 핥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기 어린 소리가 의무실을 울리고 있었다.

너무 야한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에 그냥 손을 들어 그의 고개를 내 가슴에 푹 묻었다. 그의 눈이 내게서 떨어지고, 그가 웃는 게 내 가슴을 통해서 느껴졌다.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의 말투처럼 모든 것이 느릿느릿했다. 점점 내 몸은 달아올라서 ‘더, 더’를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꾹꾹 내리눌렀다. 흑역사를 더 이상 생성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계속 꼬집고 뭉개고 있던 한쪽 유두는 퉁퉁 부어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아팠고, 그 아픔 뒤로 피어오르는 쾌감에 나는 끙끙댔다.

입술을 깨물며 빨리 하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아함에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난처한 듯이 웃었다.

“죄송해요.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급해서….”

그러더니 그가 그의 바지를 잡고 있던 벨트를 푸는 것이 보였다. 급한 건 나만 아니었군.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그의 바지와 속옷을 벗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난 감탄했다. 와….

“…부럽네요.”

남자로서 부러운 크기였다. 내 말에 그가 애매하게 웃었다. 커다란 흉기가 힘을 바짝 받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박힐 거라고 생각을 하면 얼굴이 찡그려지긴 하지만, 내 거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크기였다.

원래도 끝까지 할 생각이 없던 나는, 그의 것을 보고 절대로 끝까지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지윤 에스퍼.”

“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 하기 우습긴 하지만, 끝까지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나도 내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 중간까지만 내렸다. 그의 우람한 자연산 송이버섯의 모습에 비하면, 비루한 내 것은 초라해 보였다.

“귀엽네요.”

나도 어디 가서 꿀릴 거 같진 않은데, 그의 앞에 서자니 남자로서의 내 자존감이 살짝 뭉개졌다. 이 세상 웬만한 남자들의 것을 가져와도 내 앞의 남자 앞에서는 귀여워 보일 것이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그는 다시 나에게 몸을 붙여왔다.

그가 큰 손으로 나와 그의 완전 발기한 페니스를 한꺼번에 잡으려 노력했다. 뜨거운 두 페니스가 맞붙고, 그보다 더 뜨거운 손가락이 감겨오자 기대감이 확 솟구쳤다.

처음엔 언제나처럼 느릿느릿하게 그가 손을 움직였다. 위아래로 같이 쓸고 내리며 움직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손가락을 이용해 내 요도 쪽의 구멍을 문질렀다. 액이 나온 귀두 위로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가 내 한 손을 끌어와 자신의 것을 잡게 했다. 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큰 페니스에 절로 혀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

페니스에 솟아있는 그의 핏줄을 따라 덧그리며 만지다가, 귀두로 올라가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의 머리를 느릿느릿 문질렀다. 선액으로 금방 미끌미끌해진 그 감촉이 재밌어 좀 더 빠르게 문질렀다.

동시에 그가 다시 입술을 귓가에 붙여왔다. 혀로 할짝거리며 귀 여기저기를 핥아대자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꼼짝도 않는 그의 몸에 짓눌려 위아래로 자극을 당하자 목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 아. 좋아. 더….”

입술을 깨물고 참아보려 했지만 계속되는 자극에 자꾸 목구멍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처음 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가져다줄 쾌락을 기대하며 고양감이 내 영혼을 들어 올렸다. 아니, 이것은 알고 있는 쾌락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두 페니스를 빠르게 왕복 운동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귓가를 핥던 그의 고개도 가만히 멈춘 채 내 귀에 입만 대고 있었다. 축축한 귀로 그의 작은 숨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한껏 고조된 기대감에 나는 그의 머리를 남은 한 손으로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물들이며 사정을 했다.

아래에서 배출되는 느낌에 그를 급하게 떼어내려 하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내 쪽으로 몸을 붙여오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내 정액을 윤활유 삼아 그는 더 쉽게 손을 움직였다.

방금 사정한 내 쾌락 따위는 생각도 안 한다는 듯한 그의 움직임에, 나는 신음을 참던 것 따위는 생각도 못하고 크게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언어가 되지 못해 짧게 앓는 소리의 신음이 의무실에 가득 울려 퍼지고, 생리적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있던 그가 크고 짧게 신음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내 배 위에 뜨거운 것이 흩뿌려졌다.

울컥울컥이며 내뱉고 있는 그의 박동이 그가 감싸고 있는 나의 페니스와 내 손을 통해 느껴졌다. 그것 또한 자극이 되어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한두 번 더 손을 흔들어 완전히 사정한 그가 내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혀로 핥아 올렸다.

탈력감에 꼼짝도 못 하고 숨만 헉헉대며 누워있자 그가 몸을 일으키고 휴지를 가져와 내 배 위에 흩뿌려진 정액을 훔쳐 닦았다.

내 페니스까지 닦아줄 기세여서 그것은 거절하고 내가 처리했다. 어차피 가서 씻어야 한다.

나야 적당히 벗어서 옷에는 튀지 않았지만, 벗지 않은 그의 제복 상의는 하얀 정액이 여기저기 붙어 흐르고 있었다. 휴지로 대충 닦아도, 닦이지 않고 오히려 번들거리며 펴 바른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멀쩡한 얼굴과 정사의 흔적이 펴 발려 번들거리는 제복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에 배덕감이 느껴졌다.

“가이딩. 좋았어요.”

평소와 똑같이 그가 눈꼬리를 내리며 맹하게 웃으며 말해왔다. 그는 웃지 않을 때는 눈꼬리가 올라가 굉장히 사나워 보이고 압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아마 본인도 무표정일 때 무서워 보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웃는 것은 아닐까.

과도하게 친밀한 스킨십 중간에, 내가 정신을 놔버려서 가이딩이 끊겨버렸다. 가이드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디까지 가이딩이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 부분 비어버린 내 에너지를 보아하니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구겨져 있는 내 목깃을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펴주었다.

“월요일에 봐요. 주말 잘 보내세요.”

한결 더 다정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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