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4/21)

Chapter 4.

토요일 도지윤과 ‘과도한 스킨십’ 덕분에 전 남친과 1구역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대신에 하루 종일 도지윤의 얼굴, 목소리, 그 행위가 떠올라 미친 사람처럼 베개를 퍽퍽 치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며 보냈다.

둘 중 뭐가 더 나은 건지 잘 모르겠다.

직장 동료. 직장 동료.

머릿속에 수백만 번은 새겼다. 그와 나의 토요일의 행위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도지윤 에스퍼가 어딜 가서 말할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묻어두면 될 것 같다.

아니. 난 아직 그의 성격을 잘 모르지 않는가. 그렇게 생기진 않았지만 어딜 가서 나와의 행위를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생각 속에서 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변명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 가이딩이다. 등급 차가 많이 나는 가이드와 에스퍼가 가이딩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나는 비록 폭주 직전도, 긴급 상황도 아닌 일반 가이딩이었지만 ‘등급 차’라는 변명을 동아줄처럼 잡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만나면 눈에 불꽃 좀 붙고, 그러다 보면 사고도 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점점 머릿속에서 합리화를 진행하다 보니, 월요일 출근 직전에는 뻔뻔하게 나가자고 생각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당히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한번 훑어보았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한 건가. 월요일 아침이니까?

가이드와 에스퍼가 불장난을 즐기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어쨌건 가이딩은 신체적 접촉을 기반으로 했고, 자주 마주치다 보면 눈 맞고 몸 맞는 거야 순식간이었다. 어느 센터에서건 가이드와 에스퍼가 눈 맞아서 하룻밤 불사르는 거야 5분 후면 뒤돌아서서 잊힐 만한 가십거리였다.

문제는 나는 그런 가십거리라도 소비되고 싶지 않다는 거다.

괜한 긴장감에 명치가 조여오는 것 같았다.

커피를 한 잔 내려 설탕을 옴팡 넣고 카페인과 당 충전을 같이 했다. 가이딩 패드를 켜고 대충 리스트를 확인하자 주말에 무슨 짓을 했는지 리스트에 에스퍼들이 한두 명씩 가이딩 요청을 하는 게 눈에 보인다. 썩은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김 주임이 나를 부른다.

“이 대리님.”

“네?”

“누가 찾아왔는데요.”

벌레 씹은 표정인 김 주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가이드 1~3팀이 모여 있는 이 공간에 에스퍼 한 명이 서 있었다. 에스퍼가 못 들어올 공간은 아니지만, 대부분 에스퍼들은 가이드 전용실에서 가이드들을 부르기 때문에 이례적인 상황이긴 했다.

특유의 맹한 미소를 지은 장신의 남자가 검은 에스퍼 제복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청순한 얼굴로 한 송이의 꽃처럼 서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였다.

“…날 찾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작은 소망을 담아 말을 했지만, 도지윤 에스퍼의 시선은 줄곧 나만 보고 있었다.

주말부터 출근 직전까지 생각하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자 매우 당황스러웠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마주치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해결해야 할 일을 맞이하여 야근 중인 직장인처럼 결의에 차서 물어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가이딩. 받고 싶으면 말하라면서요.”

평소와 똑같이 느릿느릿하니 말하는 모습에 복장이 터지는 것은 내 쪽인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어!’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토요일 당직 때 그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그건 당직처럼 가이드하고 단둘이 있는 경우였고! 이건 업무시간이잖아!

점잖은 내 이미지를 위해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외침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월요일 아침. 아직 가이딩 리스트가 산처럼 쌓이기 직전이라 가이드들은 대부분 본인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고, 몇몇 가이드들은 대놓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가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며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청순한 미인의 가련해 보이는 미소에 내 마음도 아파졌다. 주위에 있는 가이드들 사이에서 나를 비난하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더 이상 이 사람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이 에스퍼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했다. 임시방편으로 내가 가이딩을 해주고는 있긴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쓴 날에는 나 같은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다.

무슨 감정을 가진 새싹이 자라나듯, 우리 사이에 어떤 감정이 싹을 틔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득이 될 것 없는 관계다.

“도지윤 에스퍼. 안 그래도 저번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가이드 1팀에서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을 전담하기로 했었다는 얘기는 듣긴 했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잘못된 업무분장이라서 실장님에게 정식으로 건의드리려고 했어요. 저번 주에 일이 많아서 제대로 말씀 못 드렸는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

“도지윤 에스퍼는 지금 등급에 맞는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저는 B급이라서 도지윤 에스퍼를 감당하기엔 그릇이 너무 작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눈곱만큼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 이상은 감당할 수 없어요.”

처연하게 내리깐 속눈썹이 이제는 떨리는 것도 같았다.

“도지윤 에스퍼가 가이딩 주도권을 뺏어서 가이드들이 기피하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잘됐네요. 여기 다른 가이드분들이 있는 장소에서 역가이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다른 가이드분들도 기꺼이 가이딩에 응해주실 겁니다.”

난 그의 잘못된 소문들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그의 살이 덧붙여진 루머를 꺼내 들었다. 그가 얼른 자기는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 주도권을 뺏는다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약간의 침묵이 있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

“싫어요.”

“네. 그렇게… 네?”

난 당연히 긍정의 답을 내뱉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의 입에서는 싫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 개소리야?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던 나는 당황스러움에 숨까지 멈추었다. 처연하게 떨리던 속눈썹이 들리고, 나와 똑바로 눈이 마주친 그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를 쳐다보던 가이드들 사이에서도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억울한 듯이 입술까지 깨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도지윤의 모습에 심장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쿵 소리를 냈다.

내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이번에는 도지윤 쪽에서 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절 이렇게 버리시는 건가요?”

“…네?”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죠? 그때 그건 단순히 제 몸만 바라고 하신 건가요?”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뭘 말하는 거야. 토요일? 그건 그냥 가이딩이었고 너도 즐겼잖아. 아직 생생히 남아있는 토요일의 기억 속에서 숨에 헐떡이며 당황하고 있는 것은 나였고, 그런 나를 느릿느릿 농락하던 것은 도지윤이었다.

그 상황에서 주도권은 완전히 도지윤에게 있었고 나는 따라가기 급급했었다.

“저번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래요. 그때. 가이딩 하면서 제 바지 벗긴 건 기억나시죠?”

더 노골적인 발언에 주위 가이드들의 놀라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아니 그건… 그런 일이 있긴 했는데, 말이 좀 이상하잖아!

“아니. 그게 그러긴 했는데 그게….”

“그땐 그렇게 다정히 해주시고, 이제 볼일 끝났다 이건가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 말도 뚝뚝 잘라먹는다. 이 새끼가.

그럼에도 화를 못 내겠는 건 내 앞의 도지윤이 정말 서럽다는 듯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까지 내가 그날 진짜 도지윤을 덮쳤던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가이딩을 핑계로 내 사심을 채우기 위해 먼저 건드렸던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그가 손으로 볼을 거칠게 닦더니 몸을 돌려 팀 밖으로 도망쳐 나간다.

난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고 주위를 휙휙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가이드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함과 동시에 맹렬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아 씨발. 좆 됐다.

이 사건이 4구역 센터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오늘 오전이면 충분하다는 데에 새로 산 내 신형 핸드폰을 걸 수 있다.

***

신성한 직장에서 월요일 아침부터 에스퍼-가이드 치정극이 일어났다는, 그것도 주인공이 나라는 것에 쪽팔림을 참을 수 없어 가이딩 패드를 들고 도망치듯이 팀을 빠져나왔다.

수치스러워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작정 걸어가다, 달리 갈 데도 없어서 그냥 정원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복잡해진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속으로 온갖 욕을 수십 번 외치고 나서야 조금의 이성이 돌아왔다.

일단 도지윤에게 연락해서 우리 사이에 낀, 무슨 오해인지는 나도 잘 모르는 그 오해를 풀고 나서, 실장님에게 업무분장을 새로 요청한 다음, 그 에스퍼에게서는 손을 떼야겠다.

그리고 이 정도 사건이야 사람들에게 금방 잊힐 것이다. 그래야 한다.

스텝 원투쓰리까지 차분히 생각해가며 정리를 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도지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이딩 패드를 조작해 도지윤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핸드폰으로 그에게 전화를 했다. 패드를 연결해서 통화할 수도 있지만, 그가 패드의 번호는 받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전화를 받는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뭐지. 밥 말아 먹은 듯한 전화 예절은? 번호를 잘못 눌렀나?

“아. 안녕하세요. 이재하 대리입니다. 도지윤 에스퍼 전화가 맞나요?”

[아… 대리님?]

“네. 아까… 일을 좀 얘기하고 싶어서요.”

[…….]

“도지윤 에스퍼?”

[이렇게 전화로 목소리를 들어도 좋네요.]

이 에스퍼와의 대화는 약간 엉뚱한 데로 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우리 사이에 쌓인 오해가 있지 않나요?”

[무슨 오해요?]

“그… 그… 아까… 말씀하신 몸만 취한… 이라던가….”

[아… 그 얘기요.]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듯한 도지윤의 목소리에,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 사무실에서는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우리가 토요일에… 음… 아무튼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절대 제가 도지윤 에스퍼의 몸만 바란 게 아니고요.”

[그럼 아니었어요?]

평소엔 느릿느릿 말하던 사람이 이런 상황이 되자 말을 똑똑 끊으며 끼어든다.

“아니. 그건 서로 즐긴 거잖아요?”

[맞아요. 그건 서로 즐긴 게 맞긴 했죠. 그런데 오늘 절 버리시려 했잖아요.]

“네? 아니 그건….”

[가이딩이 필요할 때 언제든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한번 맛보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라고 하셨잖아요.]

“…….”

[이 대리님. 제가 별로였어요? 나름 혀 좀 놀린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니었나 봐요. 다음번엔 더 잘해볼게요]

“아니아니. 도지윤 에스퍼.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시고요.”

[그럼요? 혀가 아니라 손놀림이 별로였나?]

내가 아는 도지윤이 맞나? 느릿느릿한 말투로 심상치 않은 말을 내뱉는 것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지윤 에스퍼.”

[에스퍼 말고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지윤아, 해주세요. 저도 이 대리님 이름 부르고 싶어요.]

머리 한구석에서 밀어내었던 이놈의 별명이 생각났다. 미친개. 말이 안 통해서 미친개인가?

“도지윤 에스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그쪽에게는 더 상급 가이드가 필요하고, 그건 가이드 규정에도 명확히 나와 있는 구절이에요. 실장님께 말씀드리고 알맞은 가이드 찾아드릴 테니 그렇게 아세요. 앞으로 못 볼 거 같으니 잘 지내십시오.”

더 이상 대화하다가는 계속 휘말리기만 할 것 같아서 내 할 말만 다다다 쏟아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쳐다보자, 전화를 끊기 직전에 놈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이따 봬요.’

뭐래. 난 다시 볼 생각 없는데.

***

세 시간 전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전에 가이딩 두 탕을 뛰고 점심을 먹으니 지원팀의 박 대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에스퍼와 매칭 테스트였다.

대부분 에스퍼와는 매칭 테스트를 완료했고, 내 등급과 맞지 않은 남은 사람들과는 설렁설렁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나와 매칭 테스트를 하지 않은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도지윤 에스퍼….”

신음처럼 내뱉은 내 목소리에 오전에 봤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는 예쁜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온다. 그 옆에 서 있는 지원팀 박 대리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맞이해준다.

분명 오전에 있었던 치정극의 소문을 들었던 것이리라.

마인드 컨트롤이란 단어만 되새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네. 덕분에.”

“다음엔 같이 식사해요. 이 대리님.”

도지윤은 나른하게 웃던 평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생글생글한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도지윤의 식사 제안에 응답하지 않고, 매칭 테스트를 하기 위해 얼른 기계 앞으로 나갔다.

가이드 쪽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자, 에스퍼 쪽의 자리로 도지윤이 착석했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나란히 앉아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예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등급 차가 너무 심하게 나기 때문에 어차피 매칭률도 높지 않을 것이다. 물론 등급 차이가 나더라도 매칭률이 높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정말 극악의 확률이기 때문에 별 기대도 안 한다. 차라리 로또가 될 확률이 높으리라.

그래도 가이딩이 어느 정도 되는 걸 보면 40퍼센트 후반, 혹은 50퍼센트 초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도 굉장히 드문 케이스다. 50퍼센트를 왔다 갔다 하는 매칭률이라면, A등급의 가이드 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상황실에서 요구하는 대로 손잡이에 에너지를 흘려 넣었다. 매칭 테스트를 하도 많이 해서 상황실에서 요구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에너지를 흘렸다가 멈추었다가를 적정한 타이밍에 반복하면서 할 수 있었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들어 도지윤 쪽을 쳐다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얼굴이 붉어질 거 같아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그래도 내 뺨에 달라붙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매칭 테스트가 끝나고 스텝 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가이드 실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과거 4년 전, 내가 현장에 있을 때에는 가이드 팀엔 팀장이 있었고 그 위에 실장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이드들은 모두 실장 직속으로 관리되고 팀장 직책이 사라졌다.

가이드 실장은 일신상의 문제나 혹은 팀 간 업무분장 같은 시시콜콜한 일을 중재하고 있지만, 바로 그 부분에서 빅엿을 줄 수 있는 권력자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다.

가이드 실장 방 앞에서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있었다. 비서가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가시라고 말하자 방문을 두 번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땀이 살짝 나온 손바닥을 바지에 한 번 문지르고 방문을 열어 실장실로 들어갔다.

4구역의 가이드 실장은 4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통통한 인상의 여자 가이드였다. 인자하게 생긴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여러 가지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면담 요청한 이재하 대리입니다.”

깍듯한 내 인사에 실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맞아주었다.

“이 대리. 반가워요. 거기 앞에 소파에 앉아요.”

실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왔다. 실장이 소파에 앉자 나도 그제야 맞은편에 앉았고, 바로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와 우리 앞에 차를 한 잔씩 놓아주었다.

“이 대리 한번 부르려고 했는데. 온 지 한 달쯤 되었죠?”

“네. 한 달 좀 넘었습니다.”

“현장은 좀 익숙해졌고요?”

“오랜만에 온 현장이라 아직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틀에 박힌 질문과 틀에 박힌 대답을 하며 내 용건을 언제쯤 말할지 재고 있었다.

“오랜만에 와도 배웠던 게 어디 가진 않았겠죠. 우리도 신입보다야 그래도 한 번 해봤던 사람이 온 게 더 편하고.”

앞에 놓인 차를 호로록 마시며 실장이 여상하게 말을 했다.

“저, 실장님….”

“네?”

“다름이 아니라, 김하영 주임에게 업무분장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업무분장이요?”

“네. 그… S급 에스퍼인 도지윤 에스퍼 말입니다. 그게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팀 전담으로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이드 팀별로 분장할 업무는 몇 가지 없다. 주로 행정 업무로, 가령 내년도 업무 보고 자료를 각 팀별로 내면 누가 취합해서 정리할 것인지,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가이드 팀에서 필요로 하는 사무용품이나 비품 등에 대해 누가 정리할 것인지, 이런 시답잖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이드들이 하고 있는 주요 업무인 가이딩은 딱히 업무분장을 하지 않아도 등급과 매칭률을 고려해서 가이딩 리스트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주마다 몇 명을 가이딩 했는지에 대한 통계가 지원 부서에서 정리되어 실장을 통해 보고가 되고, 미진하다 싶으면 실장과 상담을 하게 된다. 반대로 넘치게 되면, 아무 쓸데없는 말뿐인 경고 같은 걸 받게 된다.

에스퍼 본인이 가이드와 교제를 해서든, 아니면 상성이 맞아서든 특정 가이드에게만 가이딩을 받고 싶으면 에스퍼 지원 부서에 요청을 하고 IT팀에서 가이딩 리스트에 반영을 해준다. 그러면 지명을 받은 가이드에게만 그 에스퍼 이름이 보이고 가이딩 리스트에 Green07 코드가 뜨게 된다.

우리끼리 일명 그린라이트라고 부른다.

어쨌든 특정 에스퍼를 팀에 전담시키는 업무분장이란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사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지만 다른 센터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 없다고 할 수는 없지.

“가이드들이 도지윤 에스퍼의 가이딩을 꺼려서 일부러 한 팀에 배정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실장이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줌마가.

다른 것도 아니고 S급 에스퍼의 일인데 절대 모를 리가 없다. 지금 반응이 연기라는 거에 내 10년 경력을 걸 수 있다.

“아시다시피 저도 1팀에 배정받은 지 얼마 안 되었고 B급인 데다가, 팀의 다른 직원들도 거의 신입입니다. 가장 최고참인 김하영 주임이 3년 차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지윤 에스퍼를 한 번 가이딩 했었는데, 제가 맡을 급은 절대 안 됩니다. 좀 더 상급의 가이드를 붙여줘야 합니다.”

“1팀에 김하영 주임이 A급 가이드 아니었던가요?”

“물론 A급은 맞긴 하지만, 아직 신입입니다.”

“신입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신입을 벗어나야죠.”

여상히 해오는 말에 할 말이 없어서 이번엔 내가 차를 호로록 마셨다.

“실장님. 아시다시피 S급 에스퍼 정도면 센터를 넘어서 국가에서 관리하는 인재일 것 같은데, 그러면 같은 A급이더라도 신입보다는 좀 더 경험 있는 사람이 다뤄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다가 매칭률도 고려해야 하고요.”

“음. 이 대리의 말이 맞긴 한데, 도지윤 에스퍼의 경우 가이드들과 매칭률이 그렇게 잘 나오지 않아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 연결해주는 게 센터나 에스퍼 본인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제 기억에 김하영 주임과 매칭률이 40퍼센트가 안 됐던 걸로 기억하고… 다른 가이드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실장은 기억이 나지 않은 척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들기며 말하고 있지만, 나는 실장이 소수점 자리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 얼마 되지 않은 매칭률 중에서도 그나마 높은 가이드, 연륜 있는 가이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실은 도지윤 에스퍼의 경우 그다지 등급을 따지진 않아요. 본인 선호도가 좀 그래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가이딩에 등급을 따지지 않는다니요?”

“뭐. 개인 선호도라는데 제가 할 말은 없죠.”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실장의 모습은 진심 같아 보였다.

“실장님. 도지윤 에스퍼를 설득해서라도 맞는 등급의, 높은 매칭률의 가이드를 붙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 새… 아니 그놈이 높은 등급의 가이드들은 가이딩이 너무 자극적이라 하더라고요.”

“…네?”

“S급인 데다가 감각도 너무 예민해서 가이딩 받는 것만으로도 따끔따끔한 게, 바늘로 찌르는 거 같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어요.”

못마땅한 얼굴로 남아있는 차를 단숨에 마시는 실장은 박력 있었다.

“몇 없는 S급 가이드 붙여줬더니 칼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라고 가이드를 공격해서 죽을 뻔했어요. 그 이후에는 A급 가이드를 붙여서 가이딩을 해주기는 하는데 그것도 바늘이 찌르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B급으로 가이딩 해주니 아프지는 않은데 에너지 총량 알잖아요. B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 가이딩 하려면 수십 명이 달려들어야 할걸요.”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뀌어서 중얼중얼 거리는 실장의 모습이 일에 찌든 직장인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처음에는 얌전히 A급으로 받는가 싶더니만 이 미친놈이 A급도 본인을 완벽하게 가이딩 하지 못하면서 아프기만 하다고 아예 가이딩 주도권을 뺏어서 가이드 여럿 병원으로 실어 보냈죠.”

“…….”

“그 미친놈에게 역가이딩 능력까지 주다니. 가이드에겐 악몽이에요, 그건. 그 이후로 A급 가이드들이 도지윤 에스퍼를 피하고, 일단 가이딩은 해야 하니까 B급이든 C급이든 되는대로 밀어 넣고. 그러면 또 주도권 뺏어서 골수까지 쪽쪽 뽑아먹고.”

작게 쌍욕이 들리는 듯도 했지만 자체 필터링으로 못 들은 척했다.

“후. 이 대리 앞에서 못 볼 꼴 보여줬네요.”

급하게 감정을 갈무리한 실장은 순식간에 다시 인자한 중년의 가이드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튼 이런 사정 때문에 가이드들이 다 도지윤 에스퍼를 꺼리고 있어요. 하지만 우린 규정에 따라 모든 에스퍼에게 공평한 가이딩을 제공해야 하고… 공평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누군가는 그놈을 가이딩 해야 합니다.”

얼핏 비장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래서 업무분장에 강제로 넣어놓은 거예요. 적어도 책임을 명시해놓으면 누군가는 하더라고요. 의도치 않게 1팀에 업무분장이 되어 있어서 불만이 있는 건 알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1팀 다음엔 2팀이고, 2팀 다음엔 3팀이니까요.”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진 못했지만, S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무슨 폭탄 돌리듯이 처리하는 실장의 모습이 입이 떡 벌어졌다.

“그보다는 저번에 도지윤 에스퍼 레드코드 떴을 때, 가이딩 한 걸로 아는데 몸은 괜찮아요?”

그녀가 선하게 웃으며 물어왔다.

“아. 예. 괜찮습니다. 그때 연차도 써서 회복했었습니다.”

“네네.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도 도지윤 에스퍼가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에너지를 뺏어가지는 않았나 보더라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은 하고 있지만, 난 이것이 일종의 덫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이딩 주도권을 뺏겼을 때, 처음에 정말 당황해서 난리를 좀 쳤더니, 멈춰줬던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실장은 의뭉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도지윤 에스퍼와 매칭 테스트를 했다고 들었어요.”

“아. 네. 아시다시피 등급이 너무 차이 나서 형식적으로 하는 걸 겁니다.”

“전 그 테스트가 너무 기대된답니다.”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실장이 기분 좋다는 듯이 말을 하자, 불안감을 느낀 나는 반항기 섞인 눈으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설명했다시피 도지윤 에스퍼에겐 등급은 의미가 없고, 남은 건 매칭률밖에 없는데 왠지 이 대리가 매칭률이 좋게 나올 거 같아서요.”

“하하하. 설마요.”

등 뒤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다른 A급 가이드들의 경우에도 매칭률이 40퍼센트 전후를 기록한다고 했다. 내가 체감했을 때 도지윤과 나의 매칭률은 50퍼센트 전후이다. 에너지 총량과 등급을 핑계로 삼아,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봤자 B급이라, 가이딩 했을 때 사막에 물 한 컵 떨어뜨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물 한 컵 한 컵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땅이 젖지 않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실장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 대리. 어쨌든 업무분장은 현재 상태대로 1팀에서 하는 걸로 하죠.”

“실장님!”

“물론 내일 매칭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대로 좀 달라질 수도 있긴 한데….”

“아니, 순차대로 가이딩 순번이 넘어가는 거라면 이번에 1팀에서 했으니까, 이제는 2팀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실장이 순간 정색을 했다.

“이 대리. 가이딩 순번이 2팀으로 넘어간다는 건, 도지윤 에스퍼의 역가이딩 때문에 1팀 가이드 중 한 명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뜻이에요.”

태연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의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이 대리는 병원에 실려 가진 않았으니까 1팀이 하는 거죠.”

말을 덧붙인 실장이 이만 자리를 비워줄 것 또한 요구했다. 힘없는 일개 대리인 나는 실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

내가 계획했던 스텝 원투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스텝 쓰리였던 ‘도지윤에게 손 떼기’를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매칭률이 남아있다.

보통은 매칭률이 높은 나만의 에스퍼가 나타나기를 언제나 손 모아 기원했지만, 이번에만은 절대 매칭률이 높게 나오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제발.

간절한 마음에 부정 탈까 술도 안 마시고 잠들었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몸을 정갈히 단장하고 평소보다 20분이나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오던 주 주임과 부딪혔다. 주 주임이 내린 원두커피가 진한 향을 내며 내 새하얀 가이드 정복에 자국을 남겼다.

“헉. 대리님. 죄송합니다.”

주 주임이 크게 사과를 하며 휴지를 찾아 내 가이드복에 꾹꾹 눌러봤지만, 새하얀 옷에 번진 커피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주 주임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를 했지만 난 입을 꾹 다물고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 자국이 오늘 하루를 예고하는 거 같아 암담해졌다.

사과하느라 거의 울기 직전인 주 주임에게 ‘됐다’ 하고 자리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다. 어제부터 부정 타지 않게 몸 안팎을 정갈하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목표를 코앞에 두고 거하게 망치고 말았다.

누군가 보면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할 사고방식으로 난 아침부터 머리를 뜯고 있었다.

규정에 따라 가이드복은 입고 다녀야 했지만, 난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일단 오늘은 벗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가이드복을 벗어 자리에 잘 걸어놓고 커피를 한 잔 내려서 홀짝 마시며 심신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9시가 땡 하자마자 가이드 패드를 켰다.

월요일이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화요일인 오늘은 9시가 되자마자 가이딩 리스트가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가이딩 리스트를 보면서 그래도 아침부터 긴급은 없네, 하는 한가한 생각이 들었다.

날짜와 순번에 따라 자동으로 매겨진 관리번호만 보일 뿐,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은 리스트는 직접 리스트를 클릭해야지만 인적 사항이 나온다. 몇 해 전부터 중앙에 이름도 같이 표기해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예산이 없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거 하나 바꾸는 것도 용역을 줘야 한다니.

경직된 공직사회의 폐해를 다시 한번 느끼며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 리스트를 클릭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리스트가 다시 새로 고침 되면서 가이딩 한 건이 신규 추가되었다.

옆에 Green07 코드를 달고. 그린라이트였다.

Green07.

에스퍼가 원하는 특정 가이드가 있을 때 붙는 코드였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귀는 사이이거나 혹은 에스퍼가 대쉬하는 가이드가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코드였다.

1구역에서 전 남친이 가이드 요청할 때, 줄기차게 봤던 표시이기도 했다.

아무리 계속 노려봐도 그 리스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코드는 에스퍼가 가이드 단 한 명에게만 요청할 수도 있지만, 여러 명의 가이드에게 요청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다른 가이드도 이 에스퍼의 요청이 올라왔을 수도 있으니 그 가이드가 먼저 이 에스퍼의 가이딩을 가져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분이 지나고 슬슬 옆의 김 주임이나 다른 팀의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하기 위해 자리에 일어났지만, 나는 그 리스트만 노려보았다. 하지만 계속 쳐다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리스트에, 나는 내키지 않는 손가락을 들어 그린라이트를 클릭했다.

떠 있는 인적 사항 중 이름이 ‘도지윤’임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가이딩 목록으로 되돌아 나왔다.

나는 못 본 것이다.

가볍게 최면을 걸고 그린라이트 아래에 있는 이름을 클릭했다. 아마 다른 1팀 가이드들에게도 이 그린라이트가 떠 있을 것이다. 이번엔 못하겠으니 김하영 주임에게 넘겨야겠다. 김하영 주임이 온몸 희생해서 병원에 한 번 실려 가기만 해준다면, 2팀으로 넘어갈 테니 만사형통이다.

나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며 가이딩 패드에 떠 있는 이름과 호실을 확인했다.

A급 에스퍼 지승우. 601호였다.

***

“안녕하세요. 대리님. 오랜만에 뵙네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지승우가 인사를 해온다.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자 방 안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하고, 그가 앉아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다행히 아침부터 떡치는 놈들은 없는지 오늘은 건물이 조용하다.

가이딩 패드를 조작하며 간단한 내용을 확인했다.

“따로 능력을 쓰신 건 아니고, 그냥 주기 점검이네요.”

“네. 저번에 대리님이 한 소리 하셔서 한동안 조용히 살았습니다.”

하하하 웃는 소리가 참 호쾌한 것이 시원하다. 픽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곧장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으며 에너지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음. 저번 주에 조용히 사신 거 맞네요. 뭉친 건 거의 없고… 그냥 형식적으로만 해도 되겠네요.”

형식적인 가이딩이어도 최소 5분은 잡고 있어야 한다.

“저번에 크게 한 건 해서, 안 그래도 시설팀이랑 센터장에게도 한 소리 엄청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중하고 있죠.”

에스퍼들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 신경 안 쓰고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이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타입인 거 같다.

“제가 현장에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여기가 유독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훈련장 중 한 개는 무조건 박살이 나 있더라구요. 시설팀이 매일 욕하는 거 같아요.”

센터 규모가 큰 편에 속하다 보니 분명 훈련장의 개수는 20개가 넘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업데이트되는 공지사항에는 온갖 훈련장들이 매일 번갈아가며 시설 점검 중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괴물들 출현이 잘 없어서 그래요.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이 대리님 오신 이후로 괴물 출현이 뚝 끊긴 거 같습니다.”

하하하하 상쾌하게 웃는 미남을 바라보며 내 표정은 오묘해졌다.

그 말은 내 덕분에 괴물이 출현 안 해서 좋다는 거야, 나 때문에 괴물이 없어서 지들끼리 치고받고 하느라 시설팀이 고생한다는 거야.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지승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쓸모없는 가이딩을 하자 5분이 지났다. 내가 시계를 대충 확인하며 손을 떼어내자 지승우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패드로 간단한 서류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지승우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이 대리님.”

“네.”

패드에 고개를 떼지도 않고 대답을 했지만 지승우는 굴하지 않았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저랑 저녁 식사라도….”

“바쁩니다.”

저쪽이 자리를 안 피하니 내가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패드에 내용이 제대로 입력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가이드 종료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바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패드로 가이딩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자 상단에는 역시나 그린라이트를 달고 있는 리스트가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무시하며 그 아래 있는 리스트를 확인하고 가이딩 수락을 눌렀다.

B급 에스퍼. 이승훈. 607호.

다행히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문밖으로 나가서 몇 걸음만 옮기자 금방 607호라고 쓰인 팻말이 눈에 보였다.

손을 들어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네’ 하는 대답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른 방과 똑같은 모습에 역시나 똑같은 포즈로 앉아있는 에스퍼 한 명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이드님.”

엄청 어려 보이는 에스퍼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으나, 신입이려니 하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매칭 테스트를 하면서 한 번 봤을 테지만, 수많은 에스퍼들과 스쳐 갔던지라 이 어린 에스퍼는 머릿속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패드를 조작하며 간단한 내용들을 확인했다.

“입사 1년도 안 되고…지금 OJT(On the Job Training) 기간 중이시네요.”

“넵.”

기합이 잔뜩 들어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패드를 확인해 보니, 나와의 매칭률은 52퍼센트였다. 가이딩을 위해 손을 뻗자 그가 자신의 손을 바지에 슥슥 한 번 닦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귀여운 모습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진다.

“저, 가이드님. 그런데 가이드복은 입고 다니셔야 하지 않아요?”

갓 스물이 넘은 녀석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았다. 땡그란 놈이 땡그란 눈을 뜨고 물어보자 아들 가진 아빠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규정상 당연히 입고 다녀야 하는데… 아침에 커피를 쏟아버렸어요. 아시다시피 가이드복이 좀 새하얗나요. 검게 얼룩덜룩해서 입고 다니면 가이드 품위 손상만 될 것 같아 사무실에 벗어 놓고 나왔습니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게 나는 덧붙였다.

“물론 규정 위반이라… 에스퍼님이 조용히만 해주시면 아무도 모르겠지만요. 어디 가서 말씀하실 건 아니죠?”

물론 이따위 규정 위반 걸려봤자 지원팀에 쓴 소리 한번 듣고 끝나는 게 다지만, 눈앞의 어린 에스퍼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하자 서로 비밀이 생겨서 친밀하다고 느껴졌는지 곧 조잘조잘 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아직 힘을 다루는 게 좀 미숙하긴 한데 그래도 재밌는 거 같아요. 선배들 능력 쓰는 거 옆에서 구경하는 것도 좋고요.”

“에스퍼들이 좀 거칠죠? 가이드로서 에스퍼들을 보면 선배고 후배고 상관치 않고 힘쓰는 거 같던데요.”

“…아무래도 좀 그렇죠? 그런데 뭐라 해야 하지. 점점 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놈이, 쑥스럽게 웃으면서 점점 자신이 짐승의 세계에 익숙해지는 거 같다는 말을 한다.

“어쨌든 괴물들한테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럼 강해져야 하는데. 선배들한테 굴려지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죠.”

의젓하게 말하는 게 기특하기까지 하다.

“가이딩은 어때요? 매칭률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라서 가이딩이 만족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번에 최 주임님한테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랑 비슷한 거 같아요.”

“가이딩 해주는 우리야 등급이랑 매칭률 따라서 좀 힘들다 편하다 이런 느낌만 받지만, 에스퍼들 느낌은 좀 민감하다 하더라고요. 잘 기억해놔요. 나중에 매칭률 높은 가이드 만나면 어떤 느낌인지 꼭 비교해보구요.”

“네. 저도 얼른 제 가이드 만나고 싶어요.”

어리지만 그래도 꼴에 에스퍼라고 가이드에 대한 욕심을 내는 모습조차 풋풋하니 귀여워 보인다.

가이딩이 끝나고도 한참을 앉아 어린 에스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농땡이를 피우자니, 그동안 날카롭게 벼려졌던 신경이 소소한 행복감으로 살짝 무뎌졌다.

에스퍼를 호출하는 소리가 울리고서야 우리는 헤어졌고 녀석은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자기를 찾는 사람을 찾아 뛰어갔다. 나 역시도 607호를 나서며 가이딩 리스트를 재확인했다.

여전히 제일 상단에 올라와 있는 그린라이트를 확인하며 표정이 다시 확 굳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자, 점심을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다른 가이딩을 한 건 더 하고 점심을 먹을까, 점심을 먹고 가이딩을 할까 생각을 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일단 밥부터 먹고 오후에 몰아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눈앞에 올라온 그린라이트는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

신경 쓰인다. 존나 신경 쓰인다.

센터의 점심은 굉장히 잘 나오는 편이다. 가끔 정체불명의 음식이 나오는 때도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복불복 이벤트로 생각될 정도였다. 오늘 점심은 영양사가 쓸데없는 도전정신을 발휘하지 않은 정상적인 식단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의 식당은 한산하기 그지없어서, 난 줄을 설 필요도 없이 음식을 재빨리 받아 식당 한구석에 앉을 수 있었다. 가이드들은 가이딩을 하느라 점심시간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가 많다. 친한 사람이 있으면 시간 맞춰 함께 먹을 수도 있긴 하지만, 4구역에서 내 인맥은 말라버린 샘물과도 같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평소엔 핸드폰으로 뉴스나 유머 글 같은 걸 보면서 식사를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가이딩 패드를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내가 쌀을 집어먹는지 콩을 집어먹는지 못 느낄 정도였다.

가이딩 리스트에 가장 상단에 올라와 있는 그린라이트는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리스트들이 신규로 추가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린라이트는 여전히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차라리 다른 <긴급> 가이딩이라도 들어온다면, 순위에서 밀린 그린라이트가 아래 칸으로 이동을 할 텐데 오늘따라 긴급도 들어오지 않는다.

신경 쓰인다. 신경이 너무 쓰여서 위경련이 다시 한번 올 것 같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1팀의 다른 어린 가이드들을 생각하니 속이 터졌다. 걔네도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이 가이딩을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

어려운 일은 신입이라 핑계 대고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언제 신입 딱지를 떼겠는가.

가이드는 가이딩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이 껄끄러운 미친개를 가이딩 해야 한다.

다만 그게 나만 아니면 될 뿐.

밥을 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는 썩어버린 내 정신세계를 비판하는 자아와 그럼에도 똥은 피해야 하지 않겠냐는 안전제일주의인 자아가 치열하게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에스퍼-가이드를 관리하는 국가기관에 근무하고 있고, 가이딩은 내 의무이다. 우리 조직이 설립된 의의와 그에 따르는 우리가 지고 있는 책임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질식할 것 같다. 공무원은 책임감 없이는 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공직사회의 유구한 전통 속 가장 빛나는 것들 중 하나는, 모두가 하기 싫은 업무는 신입이 한다는 것이다.

식판의 음식들을 절반도 채 비우지 못했지만, 오늘 점심은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넘어가지도 않는 거 억지로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다. 식사를 끝냈음에도 아직 11시 반도 되지 않았다.

1팀의 최고참 김하영 주임을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전통은 따르라고 있는 것이고 김하영 주임은 아직 신입이다.

***

1층 로비 한구석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앉아 김하영 주임을 소환했다. 가이딩 패드를 이용하여 1층 로비에서 보자고 메시지를 보내니, 다행히 시간이 맞았던지 5분만 기다리라는 답변이 왔다.

난 밥을 먹었지만 김하영 주임은 밥을 아직 안 먹었을 듯하여 커피는 내 것만 시켰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넘길까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다.

물론 직위와 선배임을 강조해서 윽박지르다시피 넘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그건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쓰레기 가이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절대 그러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샘솟는다.

커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김하영 주임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대리님. 부르셨어요?”

김하영 주임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맞은편의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3년 차. 정말 한창 일할 때다. 신입의 의욕도 잊지 않으면서 회사 내에서 본인의 능력을 뽐내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사내 정치질은 서툴러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나의 격렬하고 구구절절했던 3년 차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내 앞에 앉은 김 주임이 조금은 불쌍해졌다. 20대 초중반은 됐으려나.

아까 가이딩 했던 이승훈 에스퍼와 분명 한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날 텐데 왜 이렇게 그 에스퍼는 어리게 보이고, 내 앞의 김 주임에게는 칼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동종업계라 그런가.

“대리님?”

“아, 죄송해요. 제가 딴생각 좀 하느라.”

“괜찮습니다. 절 부르신 이유가…?”

순수하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눈망울을 보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약간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저번에 말한 업무분장과 관련해서, 어제 실장님과 얘기를 했었습니다. 일단 김 주임이 최고참이기도 하고 상황을 공유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업무분장에 대해 얘기를 하자 김 주임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실장님께서 1팀에 그런… 업무분장을 하신 건, 1팀이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순번제로 돌리는 의미였다고 하시더군요.”

“…네?”

“그러니까 1팀이 하다가 2팀으로, 그다음 번엔 3팀으로… 이런 식으로요.”

“그럼 저번에 대리님이 가이딩 했었으니까 이제 2팀으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아요. 실장님이 좀 더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2팀으로 넘긴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리 상황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실장이 말한 ‘1팀 가이드 중 한 명이 병원에 실려 가는 때’가 2팀으로 넘어가는 시기라는 건 말 못하겠다.

사실을 모두 공유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가공하고 불리한 내용은 축약해서 전해주면 된다. 이건 앞으로 김 주임도 회사생활을 하면서 배워갈 스킬일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자 김 주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실장님과 얘기해봤는데, 1팀에는 A급 가이드가 김 주임하고 이 주임 2명이 있지 않습니까. 이 주임 쪽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김 주임 쪽에서 맡았으면 한다는….”

실장님의 이름을 팔아 김 주임에게 떠넘기려 한 나의 시도는 나이스였다. 다만 받아들이는 김 주임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는 게 문제였다.

“아, 안 돼요. 대리님. 해보셔서 알잖아요. 그 또라… 아니, 도지윤 에스퍼는 역가이딩 한다고요.”

“그래요. 김 주임 내가 해봐서 아는데, 도지윤 에스퍼도 말로 잘 타이르면 역가이딩 안 하더라고요.”

“아니. 그 사람이 말로 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애초에 들어먹었으면 가이드들이 아무도 피하지는 않죠!”

“하지만 저한테는 안 했잖아요.”

웃음을 가득 띤 내 얼굴과 다르게, 김 주임은 조금만 건드리면 진짜 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 공격에 김 주임이 방어할 수단은 없어 보였다.

“알잖아요. 김 주임. 에스퍼들 중에 또라이들 많은 거. 그래도 말로 부탁했을 때 들어주는 정도면 개중에서는 괜찮은 에스퍼예요.”

나는 승리를 예감하며 얼굴 가득 관록이 묻어나는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그놈은 말을 들어 처먹을 놈이….”

김 주임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웅얼거렸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소문이 나쁘게 나서 그렇지, 직접 대해 보니까 그다지 사람이 나빠 보이진 않더라고요. 역가이딩도 폭주 직전에만 가이딩 하니까 그랬을 뿐이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순종적이었어요.”

얼마 전에 의무실에서 있었던 사고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친절한 선배로 가장하여, 진실된 조언에 살짝 섞은 압박을 김 주임에게 덧붙였다.

“아직 김 주임도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해본 적 한 번도 없다면서요. 회사 생활하면서 알게 되겠지만, 소문에 휩쓸려서 사람 선입견 가지는 거만큼 나쁜 거 없어요.”

“아, 아니. 대리님….”

‘절 이렇게 버리시나요….’ 하고 웅얼거린 김 주임은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이 대화는 내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럼 김 주임. 안 그래도 내가 아침부터 가이딩 리스트에서 너무 거슬려서요. 도지윤 에스퍼가 1팀 가이드 대상으로 그린라이트 띄운 거 같은데, 점심 먹고 나서 그거부터 좀 처리해요.”

승리의 기쁨을 느끼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자 절망에 빠진 김 주임이 갑자기 의아한 듯이 물어보았다.

“그린라이트요?”

“그래요. Green07 코드. 아. 여긴 다르게 말하나 보죠?”

“아니요. 그건 아닌데….”

나는 패드를 김 주임에게 건네며 가이딩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김 주임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지더니 급히 본인의 패드를 꺼내 조작하여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 가이딩 리스트 가장 상단에는 그린라이트를 빛내고 있는 항목이 하나 있었지만, 김 주임의 리스트에는 그린라이트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아. 대리님. 안타깝네요. 도지윤 에스퍼가 대리님을 지목했나 봐요. 전 그럼 이만 식사하러 가보겠습니다.”

내 손에 들린 본인의 패드를 챙겨 김 주임이 잽싸게 자리를 떠나버렸다. 온화한 내 미소가 박살이 났다.

***

김 주임이 떠나고 카페에 혼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손쉽게 김 주임에게 도지윤을 떠넘길 수 있을 것이라 했던 생각이 깨졌다. 그것도 김 주임이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지윤 때문에.

머리를 굴려보자, 이재하.

습관적으로 왼쪽 볼 안을 씹어대니 비릿한 맛이 흘러들어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알량한 상처 따위에 관심 가질 때가 아니다. 왼쪽 볼을 놔두고 멀쩡한 오른쪽 볼 안을 이빨로 잡아 씹었다.

1. 도지윤은 S급 에스퍼다.

2. 그러니 등급에 맞는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맞는 등급 가이드의 가이딩은 그에게 고통을 준다.

3. 낮은 등급의 가이딩은 그에게 고통을 주진 않지만 가이딩 효율 및 효과가 불충분하다.

아니, 애초에 2번부터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왜 가이딩이 에스퍼에게 고통을 줄 수가 있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의문을 던져보지만,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경질적으로 남은 커피를 마시려 했지만, 남아있는 커피도 없어서 컵만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내가 도지윤을 가이딩 못할 이유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내 취향으로 생겼고, 그 정도면 매너도 좋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10년의 내 회사 생활의 짬이, 내 육감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 안 될 게 뭐 있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할 육감 따위 누가 믿는다고?

도지윤은 낮은 등급의 가이드를 선호한다. 나는 B급 가이드다.

낮은 등급의 가이드는 에너지 총량 및 효율 때문에 가이딩 효과가 떨어진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난 B급이긴 해도 비공식적으로 에너지 총량이 많은 편이긴 하니 적절히 조절하면 되지 않을까?

말이 되나. 내가 가진 에너지가 양이 많긴 하지만, A급 하급 정도나 될 정도이다.

등급이 단순히 S, A, B, C 이런 식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등급 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나에겐 문제없는 가이딩이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많이 발생할 가이딩이라는 것이다.

그가 혹시라도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그의 가이딩 내역들이 들춰질 것이고, 맞지도 않는 등급의 가이딩만 주구장창 받았다는 게 보인다면 징계감이다.

공직사회의 또 다른 전통 중 하나인 징계는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는 실장이나 지원부서가 받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가이딩만 했던 실무자인 내가 받는 것이다.

아오, 돌겠네.

도지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회사의 원칙과 규정, 특히 감사를 생각했었을 때 도지윤과 나의 가이딩은 잦아서는 안 된다.

이미 한 번 실패를 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야겠다. 김 주임이 도지윤의 가이딩을 거부하진 않았으니, 도지윤에게 김 주임의 가이딩을 받으라고 하고, 그걸 거부하면 실장에게 얘기하고. 실장도 모르겠다는 태도로 나온다면 감사팀에 찔러야지 뭐.

…감사팀에 뭐로 찌르지? 아. 머리 아프다.

끝없이 이어지는 온갖 상념들을 멈추고 패드에 떠 있는 그린라이트를 누르며 인적 사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S급 에스퍼. 도지윤. 903호.

무거운 손가락을 움직여 가이딩 수락을 누른 후, 축 처진 채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너무 멀어서 투덜댔던 가이딩 전용실이 왜 이렇게 가까운 건지 모르겠다. 노력을 다해 천천히 걸어도 결국 목적지는 나타나고야 말았다.

903호라고 써진 팻말이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로 보이는 듯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얼른 부딪히고 처리하는 것이 현명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후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문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문을 열었다. 가이딩실 소파에는 도지윤이 특유의 미소를 짓고 앉아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듯 도지윤은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고 있었고, 방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돌고 있었다.

단정한 검은색 제복이 그의 하얀 피부를 더더욱 하얗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요즘 몸 상태가 매우 좋은지 피부에서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 같다. 잘 먹고 잘 자는 것 같아 배알이 살짝 꼴렸다.

“오랜만이에요. 대리님.”

나를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자연스럽게 피했다.

“하루 만입니다. 도지윤 에스퍼님.”

“하루나 된 거죠.”

“…크흠. 점심시간인데 식사는 안 하십니까.”

“가이딩 받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최대한 딱딱하게 말하는 나에 비해 도지윤은 느릿느릿 나긋나긋 대답을 해온다. 남들이 우릴 보면 이상한 놈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려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되게, 대리님은 낯을 많이 가리시네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

“뭐, 그것도 매력 있네요.”

그런 매력 몰라줬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가이딩 패드를 조작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지윤 에스퍼. 그린코드 띄우셨더라고요.”

“네?”

“Green07 코드 말입니다. 가이딩 리스트에 그린코드가 떠서 보니 도지윤 에스퍼더군요.”

“아. 그린라이트요?”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요.”

“네. 제가 그린라이트 처음 띄워봐서 좀 떨려요.”

수줍어하는 도지윤을 애써 쳐다보지 않도록 노력했다.

“도지윤 에스퍼. 도무지 제 말은 들어주시질 않네요. 어제도 제가 설명해 드렸다시피 우리 둘의 등급 차가 너무 커서 제 가이딩은 도지윤 에스퍼를 감당 못 합니다.”

“하실 수 있어요.”

“…그걸 왜 그렇게 말합니까. 내가 하는 일인데.”

“대리님은 본인의 역량에 대해 과소평가하시네요.”

“제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튼 그린코드 해제하세요.”

에스퍼가 특정 가이드의 상성 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그린라이트는, 처음의 의도와 달리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에스퍼들이 가이드들한테 껄떡댈 때 그린라이트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내부 지침에 따라 그린라이트를 띄우는 것은 에스퍼 마음이긴 하지만, 특정 사유가 없을 경우 그린라이트를 해제하는 것도 가이드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도지윤이 그린라이트를 가이드 1팀에 다 띄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업무분장상이라면 마땅한 일이었으나 나에게만 띄운 것이라면 특정 사유가 없을 시, 난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린라이트 해제를 위해서는 사유서를 첨부해야 하고, 사유서가 첨부되려면 도지윤과 대화를 해야 한다.

“도지윤 에스퍼. 그린코드 띄우시는 거야 뭐 본인 마음이긴 한데. 특정 사유가 없으면 해제하는 것도 제 권리입니다. 알고 계시죠?”

“사유가 왜 없어요?”

“그럼 사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대리님.”

갑자기 도지윤이 환하게, 정말 빛이 쏟아질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예쁘게 생긴 놈이 작정하고 웃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대리님. 저는 감이 좋은 편이에요. 난 대리님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느꼈는데 왜 대리님은 모르시는 거예요?”

입만 안 열면 완벽할 거 같은데….

“우리 매칭률 확인해 보셨어요?”

“…아니요. 보나 마나”

“86.5퍼센트.”

“…네?”

“어제저녁에 결과 들었어요. 86.5퍼센트라고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왜 거짓말이라 생각하시죠?”

“S급과 B급의 매칭률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습니다.”

“대리님. 역가이딩 하는 에스퍼가 있을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세요?”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도지윤의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

“혹시 대리님. 높은 등급의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고통을 느끼는 에스퍼가 있다는 건 들어보셨나요?”

“…….”

“그런 에스퍼가 있을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요?”

“…….”

“그 둘이 다 존재할 확률도 있는데. 고작 S급과 B급 매칭률이 높을 확률이 뭐가 문제가 되죠?”

답지 않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놈의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주먹을 쥐고 있던 내 손을 가져갔다.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펴면서 도지윤은 평소의 맹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평소 맹했던 모습과 현재의 날카로운 모습. 그 간극에 나는 어느 쪽이 진짜 도지윤의 모습일지 추를 달지 못했다.

“가이드를 갈망하는 다른 에스퍼들을 비웃었는데, 저도 그냥 에스퍼였나 봐요.”

저도 평범했던 거였어요. 작게 덧붙이며 웃는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내가 도지윤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사이 도지윤은 내 손바닥을 마음껏 주무르고 놀았다.

매칭률이 70퍼센트를 넘었다니. 큰일이다.

내 인생에 매칭률이 70퍼센트를 넘었던 사람은 딱 2명이 있다. 전 남친과 바로 내 앞에 앉아계시는 에스퍼님.

가이딩 약이 존재하는 시대에, 가이드의 중요성은 과거보다 많이 흐려졌다. 그래도 에스퍼들에게는 가이드들은 여전히 많은 의미를 가진다.

전장에 서 있는 에스퍼들은 괴물과의 전투에서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본인이 폭주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에스퍼들이라도 반복된 전투에 정신력이 마모되고 점점 비인간적으로 변해가고는 한다.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에스퍼들에게 가이드란 그들을 비인간성을 이해해 줄 단 하나의 내 편인 것이다. 가이딩을 할 때, 가이드들은 에스퍼들 내면의 온갖 부정적인 그들의 어둠을 풀어준다. 괜찮아, 너 혼자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가이딩으로 그들의 불안을 잠재워 준다.

그것은 약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감각이다.

그래서 에스퍼들은 기어코 본인과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아서 각인을 하려고 노력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매칭률이 높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생각보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기가 힘들다. 30퍼센트만 넘으면 가이딩이 가능하지만, 괜찮은 효율이 나오려면 50퍼센트는 넘어야 한다. 거기다가 각인을 하려면 최소 70퍼센트는 되어야 하고.

거기다가 요즘 세상에는 가이드가 부족하다. 에스퍼야 이능을 사용하니 눈에 쉽게 띄고, 또한 가이딩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알아서 센터로 찾아온다. 하지만 가이드들은 발현을 하더라도 특수 검사를 하지 않은 이상은 알 수가 없다. 16세 전후로 발현하기 때문에 그 나이쯤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이드 조사를 하긴 하지만, 성인이 돼서도 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가이드 모두를 알아낼 순 없다.

결론적으로, 에스퍼는 넘쳐나지만 가이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환경에서 에스퍼들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나면 눈이 뒤집힌다.

나는 내 앞에 앉아 내 손톱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도지윤을 바라보았다.

“혹시, 다른 가이드들하고 매칭률 테스트를 했을 때 보통 어느 정도가 나옵니까.”

그가 내 손에서 시선을 떼고 내 눈을 마주했다.

“보통 40퍼센트 전후요. 50퍼센트를 넘은 사람은 대리님이 처음이네요.”

“아… 혹시 현장은 여기가 처음이신 건가요?”

“아니요. 두 번째요. 이전 현장에서 4년 근무했었어요.”

“…그럼 다른 사이트에 맞는 등급에 높은 매칭률을 가진 가이드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발현하자마자 중앙에서 S등급 가이드들하고 매칭률 검사를 해봤어요.”

“A등급이라도….”

“A등급은 다 매칭해 본 건 아니지만, 대리님보다 높게 나올 거 같진 않아요.”

왜 벌써부터 그렇게 단정 지으시죠? 내가 눈으로 열심히 도지윤에게 말했지만, 도지윤이 알아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대리님.”

“…네?”

“아시죠.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들의 집착.”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렸다.

“저도, 그 집착. 생기는 거 같아요.”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는 도지윤 앞에, 나는 쩡하고 굳어버렸다. 도지윤은 이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팔십육점오, 팔십육점오. 대리님. 누가 그러던데. 섹스하면 매칭률 더 올라갈 수도 있다고. 우리 해볼까요?”

아니요. 온 의지를 담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하하. 그렇죠. 천천히 하면 되죠.”

그러면서 그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검지로 느리게 문지른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서 내 손을 휙 잡아 뺐다.

“하… 도지윤 에스퍼….”

두 손에 고개를 파묻는데, 가이딩 패드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얼른 고개를 들어 패드를 확인하니 가이드 실장의 호출이었다.

“실장이네요.”

패드의 내용을 훔쳐본 도지윤이 여상하게 말했다.

도지윤이 주장한 우리 매칭률의 신뢰성은 반반이었다. 도지윤이 나에게 건 질 나쁜 농담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그것도 실장과 면담을 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의 호출은 나의 불안감을 한층 더해 주었다.

순간 어제 실장과의 면담 중 나와 도지윤의 매칭률 결과가 너무 기대된다는 실장의 말이 기억이 났다.

식은땀이 났다.

패드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자, 도지윤이 손을 뻗어 패드의 호출을 수락을 눌러버렸다.

“아니, 그걸 왜!”

“보고만 있는다고 해결되는 건이 아니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말입니다… 항의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상큼하게 웃은 도지윤이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가셔야죠. 실장에게.”

“네네. 가야죠….”

힘없는 일개 대리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죠. 나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어깨를 바닥에 닿을 듯이 축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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