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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5/21)

Chapter 5.

가이딩실을 나와 실장실을 가는 동안 나는 눈뜬장님이었다. 눈은 앞을 향해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리만 눈과 머리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초조함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조여 오는 듯했다.

죽을상을 하고 실장실 앞으로 가자, 비서가 의아해하였지만 그녀는 프로페셔널하게 나를 안내했다.

언제나처럼 문 앞에서 두 번 문을 두드리고, 실장의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긴장하지 않은 척 침을 한번 삼키고 문 안으로 들어서서 실장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가 곧바로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긴장감에 정자세로 굳은 내 앞에 앉으며 실장은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가득 지었다.

“이 대리. 축하해요.”

비서가 차를 내오기도 전에 실장은 나에게 대뜸 축하한다며 말을 꺼냈다.

“…….”

“도지윤 에스퍼와의 매칭률. 86.5퍼센트 나왔더군요.”

도지윤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했던 나의 기대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나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S급 에스퍼와 B급 가이드의 매칭률이 이렇게 높다니. 학계에 보고될 일이네요.”

즐거운 듯이 재잘재잘 떠드는 실장을 앞에 두고 난 점점 영혼이 나가고 있었다.

센터와 실장에게는 정말 기쁜 일이겠지만, 과연 나에게도 좋은 일일까?

“아. 그래서 말인데요. 도지윤 에스퍼에게는 미리 말하긴 했지만, 이 대리. 보직에 ‘임시 전담 가이드’로 발령 내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의견이 반영이 됩니까?”

“하하. 이 대리도 참. 재밌는 사람일세. 당연히 반영 안 되죠.”

“실장님….”

그럼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마치 제 의견은 반영해 줄 듯이….

회사의 섭리를 잘 알고는 있지만 이럴 때면 속에서 천불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전담 가이드가 없던 S급 에스퍼에게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는 가이드가 나타났는데, 이미 중앙에도 보고 들어갔어요.”

“실장님. 제 등급이 S급을 따라갈 수가….

요 며칠 줄기차게 주장하던 나의 말을, 왜 도대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걸까.

S급 에스퍼에겐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가이드의 등급은 품질과 같은 의미였다. 가령 S급의 가이드가 스테이크라면 B급의 가이드는 싸구려 햄인 것이다. 물론 싸구려 햄만 먹어도 허기짐은 채워지고,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스테이크가 에스퍼의 정신적인 만족감이라든가 영양학적인 부분을 싸구려 햄보다 더 훌륭하게 채울 수 있다. 거기다 보통 S급 가이드가 에너지 총량도 많기 때문에 에스퍼는 질 좋은 스테이크를 마음껏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칭률은 바꿔 말하면 효율이다. 가이드가 100개의 스테이크를 에스퍼에게 줬을 때, 에스퍼가 그 스테이크를 몇 개나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평범한 B급 가이드와 S급 가이드를 비교하자면, S급 가이드는 평소에 질 좋은 스테이크를 100개 제공하는 데 비해 평범한 B급 가이드는 싸구려 햄을 20개쯤 제공하는 것이다.

두 가이드의 매칭률이 50퍼센트로 동일하다면, 에스퍼는 S급 가이드에게서는 스테이크 50개를 취하고 B급 가이드에게서는 싸구려 햄 10개를 받는 것이다. 차이는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임시잖아요. 이 대리. 이 대리 등급이 A급이었으면 ‘전담’ 가이드로 발령 냈을 거예요. 전담이 뭐야. 어떻게 해서든 각인까지 시키려고 했겠지.”

“…….”

“이 대리. 회사 생활 일, 이 년 한 거 아니잖아요. 회사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조직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거 알죠?”

‘거부란 없다’는 말을 실장은 빙빙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납득하면서도 납득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나는 10년을 센터를 위해 충성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이드라는 것은 사명감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명감 때문에 난 도지윤이 걱정되어서 계속 항의하는 것이다.

“S급 에스퍼는 귀중한 자산이에요. 이 대리.”

하지만 마지막 어퍼컷을 날린 실장은, 내 전의를 상실케 했다.

귀중한 자산인 줄 알면, 더 맞는 가이드를 구해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알고 있다. 없으니까 지금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갑작스레 지워진 커다란 짐에 몸과 마음이 짓눌리는 것 같다.

“이 대리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저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자신이 없습니다. 실장님….”

눈빛을 빛내는 실장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을 했다. 침울한 내 표정에 실장이 내 진정성을 느끼길 바란다. 그러자 실장은 나의 울적함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이 입을 뗐다.

“이 대리. 실망이네. 사람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요. 해봤어요?”

“네?”

“젊은 사람이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해?”

이 꼰대가!

갑작스러운 실장의 꼰대 발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해봤어?’ 공격을 하다니.

“아니 실장님. 그런 게 아니라, 등급 차가 눈에….”

“어허. 사람이 노력을 해보고 말해야지. 해보지도 않고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떡해요.”

실장이 요즘 젊은것들은 패기가 없어, 하고 중얼거린다.

맙소사. 억울함에 입만 뻐끔뻐끔하고 있는데 실장이 속 터지는 얘기만 계속한다. 잠시간 실장은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둥, 가이드로서 사명감이 어떻다는 둥 훈화 조로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차마 실장의 말을 중간에 끊어먹을 수도 없어서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리며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목을 가다듬고 근엄하게 말을 했다.

“이 대리는 회사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거예요.”

“실장님….”

시발. 내 의견은 들어주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면 노력해보라고 하고. 결과는 좋아야 할 거라고 하고.

시발놈의 회사!

속에다 부글부글 끓는 용암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이건 월급 받는 대가다, 돈이다, 대출금, 이자!’ 이런 생각들을 하며 달래었다.

아무래도 요즘 운이 된통 안 좋은 것이 용한 무당이라도 찾아가 봐야 할 듯하다.

내가 속을 다스리느라 입술을 깨물고 앉아있자, 실장이 살짝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주에 20건 이상 가이딩을 하도록 되어있죠? 전담 가이드는 아니라서, 주에 다른 에스퍼 가이딩 10건과 도지윤 에스퍼 전담 가이딩을 해야 해요. 하지만 제 권한으로 가이딩 7건으로 줄여줄 거예요. 등급 차를 고려한 겁니다.”

끓는 속마음과는 별개로 실장이 내미는 제안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한다. 약간 생각을 하다 혹시나 해서 말을 던졌다.

“…등급 차이를 고려하면 더 줄여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규정에 나와 있어서 안 할 순 없어요. 전담 가이드로 하면 도지윤 에스퍼만 맡아도 됩니다.”

“7건 하겠습니다.”

은근슬쩍 전담 가이드로의 계약을 권하는 말에 나는 재빨리 백기를 들었다.

실장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결재판을 하나 들고 와 내 앞에 들이밀었다. ‘임시 전담 가이드’ 계약서였다. 이미 도지윤은 사인을 완료한 상태였고, 내 이름 쪽의 사인은 비어있었다.

와. 철저하게 준비하셨네.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약간 꼬인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자, 실장의 말대로 주당 7건의 타 에스퍼 가이딩과 도지윤 에스퍼의 전담 가이딩을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장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의 계약서를 나는 세밀히 살펴보았다. 혹시 말도 안 되는 불리한 조항 같은 게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회사에 대한 불신감이 나를 꼼꼼하게 만들었다. 다 읽어보고 계약서를 내려놓자, 실장이 얼른 사인하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준다.

“저, 실장님.”

“네?”

“조항 하나만 추가해도 됩니까?”

실장이 ‘허허, 이 새끼 보소’란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말해보세요.”

나는 혀로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른 다음에 빠르게 내뱉었다.

“‘B급 가이드인 제 능력 부족으로 인한 불완전 가이딩으로 발생하는 모든 사건 및 사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라구요.”

내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던 실장이 떨떠름한 얼굴을 한다.

“그거, 되게… 가이드로서 엄청 무책임한 말 같네요.”

“저도 살아야죠, 실장님.”

실장의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물러설 수는 없다. 실장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넣어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별 의미 없는 조항이란 건 알고 있죠?”

알고 있다. 혹시나 사고가 발생한다면 감사팀에서 이 잡듯이 털 것이고, 저런 조항 따윈 개무시하며 나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저 의미 없는 조항이라도 없으면 맞대항할 아무런 방패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나는 회사에 지속적으로 내 능력 부족에 대해 말을 했고, 그것을 무시한 것은 회사다.

고개를 끄덕이자 실장은 곧바로 계약서에 수기로 그 조항을 슥슥 쓴 다음, 그 옆에 본인의 도장을 꾹 눌렀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나는 실장의 도장 옆과 계약서의 내 이름 옆에 사인을 했다.

내가 사인할 때, 숨도 안 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실장은 사인이 끝나자 온화한 웃음을 되찾았다.

“그 새… 아니. 도지윤 에스퍼가 가이드 내놓으라 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철렁했었는데, 이제 전담 가이드 구해줬으니 나도 어깨 좀 펴고 다니겠네요.”

하하하. 소리 내며 웃는 실장의 표정은 한 달 묵은 변비를 처리한 듯이 상쾌해 보였다.

“실장님… ‘임시’ 전담 가이드예요….”

그녀와 대비되는 내 우울한 표정과 목소리는 실장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실장은 웃으면서 친히 나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래봤자 코딱지만 한 방에서 몇 걸음 안 되지만, 실장의 기분이 그만큼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상을 한 채로 실장의 방에서 나갔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엄청났다. 혼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센터 건물을 나서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벤치를 찾아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한숨을 삼십 번쯤 쉬자 머리가 조금 정리되었다.

실장의 말이 맞다. 일단 해야지. 직장인이란 무엇인가. 좆같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일단 뭐라도 하는 시늉은 해야 한다.

조금 더 마음을 진정시키자, ‘설마 자르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 뛰쳐나왔다.

그래. 설마 자르기야 하겠어. 도지윤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이드가 귀한 요즘, B급일지라도 가이드는 소중한 자산이다.

…아마 소중하진 않고 그냥 자산쯤 될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자 이제야 정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센터 정원에는 해바라기가 피어있었다. 여러 송이의 해바라기들은 자신의 무거운 고개를 이기지 못해 땅으로 처박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도지윤이 나한테 해바라기 줬었지. 여기서 꺾어온 건가.

일전, 아무도 없던 센터 건물에서 도지윤이 나에게 건네주었던 노란 해바라기가 생각이 났다. 그러자 자연스레 해바라기 줄기를 잡고 있었던 그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연상이 되었다. 손가락이 생각나니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모습이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창백한 하얀 얼굴. 그의 에너지만큼 칠흑 같은 눈동자. 무채색에서 유일하게 색을 띠던 붉은 입술.

무표정할 땐 살짝 올라가있지만, 대부분 웃고 있어서 끝이 내려가 있는 그의 눈꼬리.

나른하면서도 맹하게 살짝 입을 벌려 웃고 있는 입술은 모양이 좋았고,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눈꺼풀의 점도 예뻤다.

‘대리님.’ 하면서 날 부르는, 살짝 느릿느릿하면서 끄는 말투와 그의 낮은 저음도 귓가에 웅웅 울리는 듯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문득, 요즘 내가 도지윤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어 ‘허’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한쪽 손을 들어 내 뺨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이 미친 이재하. 병신 이재하. 정신 차려라, 이재하.

거한 사내연애로 그 사달을 낸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실패한 사내연애로 4구역까지 도망 온 것이 누구인가.

No 사내연애. 잊지 말자, 사내연애의 흑역사.

얼빠 이재하. 이 예쁜 쓰레기만 수집하는 이재하.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 손으로 입을 막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끊임없이 중얼중얼 거리며 자기 세뇌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대리님….”

와. 떠올리면 안 된다니까! 어디에선가 환청 같은 도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진정 미친 것 같아서 입을 가리지 않은 손으로 다시 한번 내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는데, 누군가 내 팔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니, 도지윤이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언제나 걸려있던 맹한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걱정된다는 듯이 까만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도, 도지윤 에스퍼.”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 마법처럼 나타나자 나는 당황했다. 내 머릿속에 의식의 흐름을 따라 펼쳐졌던 일련의 생각들을 그에게 들킨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더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얼굴에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대리님… 자학하는 취미가 있나요?”

이런 내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도지윤은 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봤구나. 봤겠지…

자학하는 취미 따윈 없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너 생각하다가 미친 거 같아서 내 뺨을 내려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무난하게 다른 핑계를 댔다.

“아… 그게 아니라, 모, 모기가. 있는 것 같아서요. 하하하.”

“…모기요?”

잠시 그는 뜸을 들이더니 나에게 되물었다. 그의 눈빛은 이제 ‘뭐지, 이 병신은.’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떨떠름한 표정의 그는 금세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 맹한 웃음을 지었다. 도지윤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바뀌는 얼굴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이제 연기하는 걸 숨기지도 않네.

“물렸어요?”

“아니요. 물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모기가 주위에 돌아다니길래….”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그가 넘어가 주기로 했나 보다. 나는 좀 더 당당하게 말을 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모기가 어디로 갔지’ 등등을 중얼거리자 그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아. 여기 계시면 모기 물릴 거예요.”

얼른 꺼져주길 바라며 눈치를 주었지만, 도지윤은 못 알아먹은 척했다.

오히려 그의 기다랗고 하얀 손을 들어 내가 때렸던 부분을 문지르면서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다.

느릿느릿 문지르는 도지윤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부담스러워 몸을 뒤로 젖히자,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뒤통수를 고정해 못 움직이게 한다.

“도, 도지윤 에스퍼.”

당황스러움에 새된 목소리가 나갔지만, 도지윤은 신경도 안 쓴 채 내가 내 손으로 내리친 부분만 쳐다보고 있다.

이 미친개가 왜 또 이러는지 모르겠다.

“좀, 떨어져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에스퍼 아니랄까 봐 힘은 더럽게도 세다.

더 가까워지는 고개에 키스라도 하는 건가 싶어 눈을 확 감았지만, 그의 입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느껴졌다. 내 입술이 아닌 내가 내리쳤던 부분에 입술을 대더니 고양이가 핥는 것처럼 할짝거렸다.

환한 대낮에 남들이 볼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힘을 주자, 도지윤은 서너 번 더 핥아 올리더니 그제야 떨어졌다. 이 수치심도 없는 놈을 경악에 차 올려다보자 그가 맹하게 웃었다.

“모기 물렸어요. 대리님.”

이 미친놈아! 모기 안 물렸어!

속으로는 비명에 가득 차 외쳤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내가 괜히 모기 핑계를 댔구나.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할 말이 속에서 드글드글 끓는 것 같았지만 어이가 없어서인지 목구멍으로 뛰쳐나오지가 않는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소리만 목구멍에서 억억거리고 있었다.

도지윤이 예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

“실장하고 얘기 나눴어요?”

“…네에에.”

막힌 목구멍을 겨우 터뜨리며 소리를 내자 염소 같은 대답이 나왔다. 도지윤은 당황하는 내 모습에 웃으며 손을 잡아왔지만, 나는 탁 하고 소리가 날 만큼 뿌리쳐버렸다.

나도 순간적으로 한 것이라 흠칫 잠깐 멈췄지만, 도지윤은 더 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이제 제 ‘전담 가이드’가 되신 거 아시죠?”

“‘임시’ 전담 가이드죠.”

도지윤이 헷갈리지 않게 ‘임시’라는 글자에 힘을 팍팍 주어 대답했다.

“‘임시’라는 글자는 잊으세요. 형식적인 거니까. 중앙에서 아직 포기를 못 했나 봐요.”

“저도 아직 포기를 못 했습니다. 도지윤 에스퍼.”

중앙에서도 영원히 포기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지윤은 여전히 웃으며 다정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대리님은 제 가이드가 돼서 싫어요?”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하지만 사회생활 짬밥이 있는데 속마음을 쉽게 오픈할 수는 없다.

“부담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싫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대리님.”

도지윤이 처연하게 눈썹을 내리깔자, 내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아니 언제나. 전 짜증이 나요. 짜증을 넘어서 화가 날 때도 많아요.”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나는 오만상을 쓰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의 대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았다.

“왜 에스퍼는 스쳐 지나가는 그 몇 초 사이에도 알아보는데, 폭주 직전에 타들어 가는 그 와중에도 내 가이드는 알아보는데… 가이드는 못 알아보는 걸까요.”

뭐라는 거야.

“왜 언제나 갈망하고 말라가는 건 에스퍼일까요. 왜 맨날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요.”

애처롭게 웃으며 도지윤이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다 찢어 죽여 버렸으면 좋겠는데. 가이드 따위 한 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는데.”

표정과는 다르게 도지윤의 입에서는 자꾸 험한 말이 나온다. 이거 긴장해야 하는 건가. 도망쳐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척추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지윤이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서서히 이마를 맞대온다. 낯부끄러운 행동이었지만 생존본능이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고 해서, 짐승 앞의 사냥감처럼 조용히 있었다.

도지윤은 다시 입꼬리를 올려 다정하게 웃었다. 순간 그 표정이 가면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가면이었다. 다정한 그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 속에서 타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난 내 가이드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타나면 죽여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대리님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느릿느릿 문지른다.

“난 다른 에스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다른 에스퍼들과 다르지 않았어.”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중얼중얼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미친놈 같았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울 것 같아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이 다 그에게 달라붙은 모양새였다.

“가이드를 갈망하는 평범한 에스퍼라니.”

씁쓸하게 웃으며 그가 손가락을 떼고 내 입술에 쪽 소리 날만큼 가볍게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나는 도지윤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숨도 못 쉬고 굳어있었다. 그가 다시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다음번에 제 손 피하면, 이 정원 불태워버릴 거예요.”

다정하게 협박하며 그는 자리를 떴다.

***

4구역 센터의 3년 차 가이드 김하영 주임이 보기에 한 달 전에 1구역에서 4구역으로 발령받은 이재하 대리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일단 가장 안전한 센터인 1구역에서 여기로 온 것부터가 이상하다. 안전하고 일 없는 1구역은 가이드들이 모두 꿈에서도 바라는 자리였다.

웬만한 능력자가 아니면 갈 수 없다는 1구역은, 뒤집어 말하면 1구역 출신은 능력자라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 팀에 ‘대리’가 온다는 말에 김하영 주임 및 그 밑의 3주임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혹시나 다른 구역에서 사고를 친 가이드라든가, 일을 너무 안 해서 센터를 떠돌아다니는 유령 같은 가이드가 온다든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팀 회의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리’, 그것도 1구역 출신이라는 말에 드디어 이 쓰레기 같은 4구역 가이드 1팀에도 한줄기 빛이 내리는구나 하고 기뻐했었다.

이재하 대리는 1구역 출신답게 일을 잘했다. 언제나 가이드 지원팀과 실장에게 까이기 바빴던 주간 보고서 및 업무 자료가 이 대리의 손을 한번 거치면 무사통과가 되었다. 얼마 전에 월간보고 자료를 김하영 주임이 작성하고 있자, 그걸 보고 있던 이 대리가 본인이 쓰겠다며 가져갔다. 월간 보고 자료는 원래 팀의 최고참이 쓰는 거라며 자기한테 넘기라는 말에 김 주임은 감동받아 몰래 울기까지 했다.

얼마 전, 모호한 업무분장으로 인하여 가이드 지원팀에서 해야 하는 일인지 총무팀에서 해야 하는 일인지 헷갈리는 업무가 있었다.

발현이 남들보다 늦어서 입사한 지 아직 1년은 안 됐지만 김하영 주임보다는 나이가 많은 이 주임은 오전부터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공문에 첨부할 자료는 이 주임 작성 및 이 대리 검토하에 완벽했고, 이제 공문 발송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이 공문을 누구에게 송부해야 하는지가 모호했다.

이 주임은 공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아침부터 지원팀과 총무팀 사이를 번갈아가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지원팀 김철호 대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이드 1팀 이선호 주임입니다. 대리님.”

[…아. 네.]

“오전에 말씀드렸던 공문 관련해서요. 말씀하신 대로 총무팀의 김지원 과장에게 말을 해봤는데, 그쪽에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

“공문 내용은 다 작성됐고, 가이드 팀에서는 발송만 하면 되는데요, 대리님. 총무팀과 업무분장 얘기가 안 된 건가요?”

[허 참. 총무팀에서 그렇게 말해요? 말할 것도 없이 중앙에서 공문으로, 전사 공통으로 그 업무는 총무팀으로 이관했는데 얘기할 게 없지. 내가 말했던 그 공문 찾아서 그냥 총무팀에 보여줘요. 그럼 알 거예요. 저 팀장님이 부르셔서 끊습니다.]

무성의하게 공문 제목만 덜렁 말해주고 끊어버린 김 대리에게 신입 나부랭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 대리가 말한 그 공문을 찾느라 다시 20분을 허비했다. 겨우 공문을 찾아 환호성을 지르며 공문의 내용을 잽싸게 확인한 다음, 총무팀의 김지원 과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총무팀 김지원 과장입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가이드 1팀 이선호 주임입니다. 오전에 제가 한 번 전화 드렸는데요, 지원팀에 다시 전화해보니까 중앙에서 공문을 통해 이미 총무팀으로 이관한 업무라고 하네요. 공문도 지금 확인하고 있는데 과장님에게 보내드릴까요?”

닥치고 너네 업무 맞으니까 받아라. 하는 소리를 이 주임은 돌려 말했지만 상대방은 과장이었다.

[이 주임. 내가 중앙에서 하라고 하면 다 해야 합니까? 실무자한테는 한마디도 없이 업무분장을 이따위로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업무분장을 한 것은 이 주임이 아니라 중앙이었지만, 중앙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할 김 과장은 이 주임에게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이 업무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는 말도 못 들었으니까 지원팀이랑 중앙이랑 다시 얘기해보세요.]

전화기가 끊어지는 소리에 이 주임은 황망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오전부터 시작하여 점심시간이 끝나고, 한창 당 떨어질 시간인 오후 세 시까지 이어졌다. 단순 후속처리만 하면 되는 업무를 뭐 이렇게 핑퐁질을 하냐며 이 주임이 팀에서 열불 내던 그 순간, 가이딩 업무 중 시간이 남은 이 대리가 팀으로 들어왔다.

“이 주임. 무슨 일이에요.”

“대리님.”

스트레스를 받아 위가 콕콕 쑤시던 이 주임은 이 대리를 보자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이 대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앞에 서서 무려 십오 분 동안 하소연을 했다.

지원팀과 총무팀의 사이에서 흔들리던 이 주임은 곧 꺾여 넘어질 것 같았다.

묵묵히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이 대리는 이 주임에게 공문을 뽑아오라고 시킨 후, 내용을 가볍게 확인하고 바로 총무팀 김지원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무팀 김지원 과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가이드 1팀 이재하 대리입니다. 이선호 주임과 계속 통화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희가 받은 공문상에는 총무팀에서 하는 업무라고 되어있어서 총무팀으로 발송하겠습니다.”

[허 참. 이 대리. 내가 이 주임한테도 말을 했는데, 우리가 무슨 중앙에서 하라고 하면 다 해야 합니까? 우리 의견은 받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업무 넘긴 건데 이걸 받겠어요?]

“그건 저희 쪽에 말씀하지 마시고, 지원팀과 중앙하고 얘기해보시죠. 저희는 누가 하든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걸 왜 우리가 얘기해. 가이드 팀 관련 얘기니까 그쪽에서 정리해서 넘겨야죠.]

“과장님. 애초에 공문 발송 전에 예의상 전화 드린 거지 이런 거 일일이 허락받아 가면서 보낼 필요도 없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공문은 발송할 거고, 받은 후에 지원팀 업무라고 생각하면 공문으로 다시 회신 주십시오. 바빠서 끊습니다.”

김 과장이 수화기 너머로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대리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주임. 공문 발송해요.”

“…김 과장이 저한테 전화해서 지랄하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저한테 넘겨요.”

저 개싸움 잘해요. 무심히 덧붙이는 이 대리는 당이 떨어진다며 사탕을 꺼내 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주임은 이 대리님과 영원히 같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대리는 행정 업무뿐 아니라 업무 중의 교통정리도 매우 능숙하게 잘했다. 가이드 2, 3팀으로부터 은근슬쩍 넘어오던 잡일들이 이 대리가 오고 나서는 넘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2팀의 김 대리가 가끔 욱해서 ‘주무 부서가 해야죠!’라고 외치지만 이 대리는 ‘주무 부서 2팀에서 하실래요? 우린 필요 없는데.’라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과연 1구역 출신다웠다.

거기다 경력 10년 차의 가이드답게 에스퍼들에게 철벽 치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언제나 성희롱과 성희롱과 성희롱에 시달려 답 없는 감사팀과 상담팀에 쪼르르 달려가기 바빴었던 가이드 1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대리의 철벽 치는 모습을 옆에서 훔쳐보며 모방하고 있었다.

이 대리의 전략은 무시였다. 에스퍼들이 개소리를 하면 대답을 안 해주면 되는 것을, 신입들로 구성된 가이드 1팀은 ‘가이딩은 친절해야 한다’라는 모토로 언제나 다 응대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짬이 좀 찬 이 대리가 하는 만큼의 무시는 잘 안 되지만, 어설프게라도 따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대리의 철벽에도 불구하고, 에스퍼의 서비스 만족도는 최상을 찍고 있었다. 간간이 가이드팀에게 지랄하던 ‘가이딩이 완벽하지 않다’라는 불만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대리는 본업인 가이딩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라서, 어느 날은 에너지를 무리하게 써서 안색이 시체 같을 때도 있었다. 김 주임은 그때 쉬엄쉬엄 대충 하시라고 걱정을 담아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이드의 의무와 에스퍼가 가지는 가이딩의 의미 같은 잔소리였다. 10분간의 잔소리 후, 이 대리는 꼰대 같은 소리를 했다며 바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김 주임은 그런 이 대리의 책임감에 다시 한번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 대리는 본인의 등급과 에너지가 허락하는 한 최상의 가이딩을 제공했다. 에스퍼들 사이에서 이 대리의 가이딩을 받고 싶어 그린코드를 신청한다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하지만 4구역 IT팀의 그린코드 담당자는 융통성 없기로 유명해서 번번이 실패하는 것 같았다.

이 대리는 조용하고 남들에게 무심한 듯했지만 가이드 1팀에게는 달랐다. 가이드 1팀의 신입들이 에스퍼나 지원팀에 당하고만 있으면, 혹은 다른 선배 가이드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시달리고 있으면 조용히 나타나 말로 밟아 놓았다.

특히나 그 특유의 눈빛으로 욕하는 스킬은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분명 이 대리는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데, 대화가 끝나고 나면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이 키는 약간 큰 편이었지만 몸이 말라서 체구가 작아 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다갈색의 눈동자 역시 그를 유약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언제나 가면처럼 쓰고 다니는 무표정이 그를 차갑고 딱딱하게 만들었다. 또한 핏기 없는 색의 입술에는 대부분 각질이 올라와 있어서, 그의 무표정과 어우러져 가끔 병자처럼 보였다. 무표정할 때의 인상으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가이드 1팀은 간간이 보이는 이 대리의 인간적인 표정이 그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할 때는 말 걸기도 힘들었지만 가끔 지어 보이는 웃음이나, 찡그린 표정들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 힘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대리는 4구역에서 에스퍼들 사이에서도, 가이드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가이드였다. 그가 나타나면 이 대리에게 몰리는 시선을 옆에 있는 김 주임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 대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하면서 눈치를 엄청 봤다. 점심 먹고 나서 언제나 로비 카페에 들르는 이 대리 덕분에, 점심시간쯤이면 카페가 에스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대리를 위해 딱 한 테이블은 빈자리로 만들어놓았는데, 이 대리는 그 자리가 본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자리인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나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딘가에서 이 대리의 얘기를 소곤거리고 있으면, 이 대리는 그 얘기를 신경 쓰고 있는 듯하면서도 곧바로 자리를 떠나버리고는 했다. 알기 싫다는 듯이.

그 소곤거리는 대부분의 말들은 에스퍼들이 일부러 이 대리 들으라는 듯이 떠들어대는 ‘이 대리가 좋아. 고백하면 받아줄까? 손잡고 싶어. 저녁밥 같이 먹고 싶어’ 급의 고백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대리는 본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 주임은 이쯤 되면 저 사람은 ‘소문’에 대해 피해 의식이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 대리에 대한 칭찬과 흠모의 시선이 나날이 쌓여갔고, 이 사실을 이 대리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김 주임은 입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려고만 하면 끊어버리거나, 자리를 떠나버리는 이 대리에게 김 주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느라 에스퍼뿐 아니라 가이드들에게까지 철벽을 치고 있지만 다 수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1팀에게는 나름대로 다정함과 가이드 선배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일을 존나 잘했기 때문이다. 자고로 직장에선 일 잘하면 내 편이요, 착한 놈이다.

이 대리가 도지윤 에스퍼와 엮였을 때, 김 주임은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다. 어쩌다가 그 미친개하고 엮여서….

미친개가 팀에 찾아왔을 때는 이 미친놈이 요즘 돌아서 가이드 한 명 직접 족치러 왔나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이 대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길에 떨떠름하지만 깨닫고 말았다.

저 미친개도 이 대리에게 빠졌구먼.

미친개가 개소리를 지껄이며 눈물을 흘리며 쇼를 할 때 가이드 팀에 있던 모두는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미친놈.’

아직 미친개에 대한 ‘소문’을 잘 모르는 이 대리만 당황해서 도망갔을 뿐이다.

김 주임은 유능한 이 대리가 미친개를 다른 팀에 넘길 거라 의심치 않았지만, 실장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팀에 못 넘기고 오히려 자신에게 넘기려고 했을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도 매칭률이 80퍼센트를 넘었다는 말에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동정심에 가슴이 미어질 뻔했다.

미친개한테 물리면 약도 없을 텐데….

이 대리가 임시 전담 가이드가 되고서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이 대리는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행정 업무를 지원하였고, 가이딩 업무 또한 에스퍼들을 만족시켰다.

아, 다른 점이 하나 생겼다면 미친개와의 매칭률이 80퍼센트를 넘었다는 말에 다른 에스퍼들이 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이 대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회화가 덜 된 저 미친개가 저럴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놈은 이 대리에게 꽤 다정한 모습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지도 꼴에 에스퍼라고 각인 대상 가능 가이드가 나타나니 잘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가지는 소유욕과 집착은 소름 돋으니까.

점점 센터에 ‘우리 미친개가 달라졌어요’쯤의 소문이 솔솔 피어나오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역시 사람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

도지윤과 매칭률 테스트 결과는 그날 바로 센터 전체로 퍼졌다. 도지윤이 월요일에 가이드팀에 쳐들어와서 울면서 지껄여댔던 말과 매칭률 결과가 더해져 센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걸어 다니기만 하면 센터 사람들은 나에게 ‘축하… 드려요… 도대체… 왜….’ 같은 축하인지 동정인지 모르는 말을 건네고 사라졌다. 역시 B급 가이드에게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하라는 게 얼마나 부담인지를 알아주는 것 같다.

도지윤 전담 가이딩 및 7건의 타 에스퍼의 가이딩 업무는 널널하다 못해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있으면 자꾸 쓸데없는 상념들이 날 괴롭혔다. 그래서, 그냥 워커홀릭처럼 열심히 일했다.

오전엔 도지윤의 가이딩을 하고 오후엔 다른 에스퍼들의 가이딩을 했다. 지원팀의 박 대리가 나를 걱정하는 말을 건네긴 했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센터는 가이드가 부족했고, 가이드가 일을 더 한다면 지원팀에서는 반길 일이다.

퇴근 때 텅텅 비어버린 에너지는 어차피 그다음 날 출근할 때면 다시 차 있다. 박 대리에겐 적당히 조절하면서 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

내가 직면한 문제는 에너지 문제가 아니다. 아니,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에너지 문제일 수도 있다.

도지윤에게는 의도적으로 적은 양의 에너지만을 가이딩 해주고 있었다. 오후의 다른 에스퍼 가이딩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면 도지윤이 불완전 가이딩으로 인해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도지윤과 같이한 오전 동안 그는 맹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일전에 정원에서의 대화는 다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에게 맞추어 나도 언제나 모른 척했다.

지속되는 일상 동안 도지윤과의 가이딩이 조금 적응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도지윤 에스퍼.”

출근하자마자 올라온 그린라이트에 바로 수락 버튼을 눌러 가이딩 전용실로 왔다. 가이딩이 되고 있는 건지 마는 건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나를 반겼다.

가이딩 전용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도지윤이 앉아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도지윤은 바로 일어서서 내 옆으로 앉았다. 처음에는 마주 보고 앉으려고 옥신각신했지만, 이제는 포기했다. 어떻게 해서든 기어코 내 옆에 앉으려는 그를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가이딩 패드로 가이딩을 시작하기 전 간단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조작했다. 그 모습을 도지윤은 조용히 쳐다보았다.

“손 주세요.”

내 손을 내밀며 도지윤에게 손을 달라고 하자, 도지윤은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럴 때면 이 남자의 별명이 미친개보다는 미친 강아지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도지윤의 손은 하얗고 길었고 내 손보다 더 컸다.

에스퍼들의 피지컬은 대부분 가이드, 일반인들보다 우월했다. 신입직원 때는 키, 손, 어깨 등등 일일이 비교해가며 부러워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열정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다른 종족임을 인정했다.

도지윤은 손은 나에게 맡긴 채, 몸을 아예 내 쪽으로 돌려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는 가이딩 패드를 괜히 손으로 만지작거렸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도지윤 에스퍼.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아무리 가이딩을 대충 한다 하더라도 최소 5분은 있어야 한다. 게다가 난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이기 때문에, 남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30분은 가이딩을 해야 했다.

찔끔찔끔 넘어가는 에너지가 분명 성에 안 찰 텐데도 도지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손만 만지작거렸다.

“대리님. 에스퍼한테 가이딩을 해주는 느낌은 어떤 거예요?”

도지윤과의 대화는 놀랍도록 평범했다. 가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이 튀어나와 내 속이 터지긴 했지만, 그것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음… 몸속에 있는 물이 넘어가는 느낌?”

도지윤은 가이드와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대화를 시도했다. 다른 가이드와 진작에 했었어야 할 이야기들이지만, 아마 도지윤은 가이드와 앉아서 대화를 할 일이 잘 없었을 것 같다. 역가이딩으로 번번이 가이드가 실려 갔을 테니 말이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내 몸에서부터 도지윤 에스퍼로 넘어가서, 도지윤 에스퍼를 느끼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다른 에스퍼가 물어보았다면 ‘아무런 느낌 안 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신입 때는 이런 질문에 성심성의를 다해 대답해 주었지만, 10년의 세월은 날 찌들고 무성의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지윤에게는 다르게 대해주고 싶었다.

도지윤은 이런 질문하는 것 자체가 처음일 테니 알려주고 싶었다.

“에스퍼를 느끼는 거예요?”

“뭐. 일단은요. 에스퍼의 에너지 활동이 어느 정도로 뭉쳤는지를 느끼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에스퍼의 부정적인 감각들도 같이 느끼고요. 가끔 감각이 공유되는 가이드도 있다 하는데, 전 그렇진 않아요.”

“가이딩 받는 에스퍼와 친밀해지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능을 사용하면서 쌓이는 외로움 같은 감정을 끌어안는 게 느껴지는 건데… 가이드도 사람인데 하다못해 동정심이라도 들 수밖에요.”

이건 사실이었다. 에스퍼와의 대화보다는 가이딩을 해주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가끔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에스퍼는 이런 류의 대화 주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럼 절 동정하는 거예요?”

“…그냥 예시입니다.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동정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안 들어요?”

까만 눈을 빛내며 맹하게 물어보는 도지윤에게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냉정하지만 무난한 답변을 내놓았다.

도지윤과의 대화는 나의 신입 시절을 생각나게 하면서도, 이 에스퍼에 대한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좋지 못한 호기심임을 알기에 나는 꾹꾹 눌러 담았다.

가이딩을 하는 시간 동안 대부분 도지윤이 나에게 질문했고, 나는 성심성의껏, 하지만 지나치지는 않게 대답해주었다.

도지윤은 나와 함께하는 오전의 가이딩 시간 내내 즐거워했다. 뚫어져라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활짝 웃었다. 생각과 고민을 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면, 도지윤을 손을 들어 내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서 가끔 얼굴이 붉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도지윤은 눈치챘다는 듯이 더 야살스럽게 웃어대곤 했다.

그는 내 일상과 가이딩이 힘든 건 없는지 물어봐 주었다.

다른 에스퍼들이 괴롭히는 건 없는지,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면 어떤 느낌인지, 다른 에스퍼들이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시발. 매우 신사적으로 맹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듯이 순수하게 물어보자 나는 머리 한구석에서 울리는 경보를 무시하고 병신같이 묻는 대로 대답해줬다.

그에 대한 동정심과 얼굴에 홀라당 넘어간 것이다. 에스퍼와 에스퍼 사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는 가이드 불문율을 어겼다. 1년 차 신입도 하지 않을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의 결말을 나는 며칠이나 지나서 알 수 있었다.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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