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 2권-Chapter 6. (6/21)

Chapter 6.

한가로운 목요일이었다.

여전히 오전에는 다정한 도지윤과 그에겐 도움이 손톱만큼도 되지 않을 가이딩을 해주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가이딩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그냥 나에 대해 궁금한 것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난 간단한 것에만 대답을 해주고 그의 얼굴을 흘낏흘낏 훔쳐보며 손만 맞대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 첫 가이딩은 오랜만에 보는 에스퍼 신입 이승훈이었다.

“대… 대리님.”

내가 가이딩 지원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승훈은 화들짝 놀라더니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의아함에 눈썹만 올리고 그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러자 그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러시죠? 이승훈 에스퍼?”

“아… 저… 그게….”

이승훈은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웃다가 다시 울상을 지으며 좌불안석 몸을 꼼지락댔다. 점점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더 꼼지락대며 입을 뗐다 붙였다 하던 이승훈이 결국 말을 꺼냈다.

“오늘 가이딩. 대리님이 해주시는 거예요?”

“네. 가이딩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데. 이승훈 에스퍼가 신청한 것 아닙니까?”

“아… 네네. 가이딩. 제가 신청한 건 맞는데, 대리님에게 받고 싶었던 건 아니고….”

가이딩 리스트는 매칭률이 일정 이상만 되는 가이드들에게 다 보이는 공통된 리스트이다. 따라서 특정 가이드에게만 가이딩을 받고 싶으면 그린코드 등으로 따로 조치를 해야 한다.

“혹시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원하는 다른 가이드가 있는 겁니까?”

이 어린 에스퍼가 사랑에 빠졌나. 에스퍼 주제에 가이드 가릴 만한 일은 몇 개 없는데.

의아함에 대답을 종용하며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까부터 울상인 이승훈은 진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건 아니고… 소문 때문에….”

“…소문이요?”

“그게… 대리님한테 가이딩 받으면 도지윤 에스퍼님이 훈련 때 작살낸다고 해서….”

“…네?”

“도지윤 에스퍼님과 함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건 영광이고, 또 도지윤 에스퍼님은 잘생겼고, 도지윤 에스퍼님은 몸도 좋으시고 싸움도 잘하고. 거기다가 S급이라서 등급도 범접할 수 없고….”

이상한 말을 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이승훈이 얼굴을 붉히며 도지윤 찬양을 늘어놓는다.

계속 중얼중얼 도지윤의 장점과 훌륭한 점을 열거하는 이승훈의 말을 끊어먹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아니, 이승훈 에스퍼. 저한테 가이딩 받으면 도지윤 에스퍼가 훈련 때 험하게 다룬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직장 내에서 ‘작살’이란 단어는 우아하지 못한 것 같아 돌려 물었다.

그러자 이승훈이 정신을 차리며 눈알을 굴렸다. 말해도 되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곧 그는 포기한 채 말을 해주었다.

“그… 얼마 전부터 소문이 돌았는데, 대리님이 가이딩 해준 에스퍼들 대상으로 도지윤 에스퍼님이 훈련을 봐주고 있어요. 물론 영광이죠. 영광이긴 한데….”

“…그냥 어쩌다 보니 리스트가 겹친 거 아닐까요?”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리님이 도지윤 에스퍼님 전담 가이드가 되면서부터 그냥 대놓고 대리님이 가이딩 했던 에스퍼들만 골라서 훈련 잡고 계세요.”

“…….”

“원래 훈련도 잘 안 나오시는데… 요즘 자주 뵐 수 있어서 좋아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말하는 에스퍼를 보니 머릿속이 차게 식는다.

“좀 격하게 하셔서 부상자가 나오긴 하는데, 에스퍼는 튼튼하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짐작은 간다.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에 대한 집착을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나 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맹한 웃음으로 있길래 그놈은 괜찮은 줄 알았지…. S급은 달라도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었던 내 대갈통을 갈겨야겠다.

“…일단 부담되시면 오늘 가이딩은 취소하시고….”

“저도 대리님에게 가이딩 받으니까 도지윤 에스퍼님이 훈련 상대해주겠죠?”

“…….”

“아… 너무 좋으면서도 너무 무서워요. 도지윤 에스퍼님이 저도 작살내겠죠?”

그래도 다리는 안 부러졌으면 좋겠어요. 중얼거리는 이승훈을 기가 차서 쳐다보았다.

“…제가 가이딩 하는 게 싫었던 거 아닌가요? 이승훈 에스퍼?”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대리님 아니면 언제 도지윤 에스퍼님과 훈련을 해보겠어요. 개처럼 발리겠지만 그래도 손가락 하나 닿을 수 있으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결연하게 눈을 빛내는 어린 에스퍼가, 나에게 손을 건넸다. 나는 썩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가이딩을 시작했다.

이승훈의 가이딩 후, 난 곧바로 훈련실로 내려갔다. 4구역으로 발령받은 첫날, 지원팀 박 대리가 시설 안내를 할 때 딱 한 번 들렀던 곳이다. 입구에서 신원 확인을 하고, 예전 벙커에 내려갔을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꽤 깊이 내려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정면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다시 한번 신원 확인 및 지문 인식을 했다.

“도지윤 에스퍼. 혹시 훈련 참가했습니까?”

내 질문에 데스크 직원은 모니터로 잠깐 시선을 주더니 대답했다.

“3B-04에 있네요. 저 안에 엘리베이터 타고 3B 누르면 됩니다.”

내가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가 아닌, 직원 뒤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갔다. 센터의 훈련실들은 너무 쓸데없이 보안이 철저했다. 직원의 안내로 엘리베이터에 내리자 도착한 장소는 길고 긴 복도였다.

최첨단 기술로 보호된 공간이지만, 훈련이 한창인지 쾅 하는 진동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04번이라는 명패를 찾아 그 훈련실의 관람실 쪽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약간 무거운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관람실 안에서 여러 명의 머리가 나를 훅 돌아보았다. 그렇게 넓다고는 할 수 없는 관람실에는 대충 봐도 열댓 명의 에스퍼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흠칫 놀라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에스퍼들 시선이 느껴졌다.

훈련실은 보통 에스퍼들의 공간이지만, 가이드가 못 올 곳은 아니다. 주로 각인된 가이드들은 에스퍼들과 훈련실로 동행 출근한다.

당당해지려 애썼지만, 남의 공간을 침범하는 느낌에 선뜻 관람실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부담스러움에 인사라도 하면서 들어가야 하는 건가 고민을 했다.

관람실 안의 에스퍼들과 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간 대치하던 그 순간, 갑자기 훈련실 안에서 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에스퍼들은 다시 시선을 관람창 안으로 돌렸다.

무형의 압박감에서 벗어난 나도 얼른 관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에스퍼들이 흘낏 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곧 신경을 껐다. 그래도 검은 에스퍼 제복 사이에 홀로 하얀 가이드복을 입고 있자니, 관람창 앞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에스퍼들이 조금 공간을 터주었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며 훈련실 안의 모습에 집중했다. 훈련실은 지형이나 장애물이 있는 곳도 있는데, 이곳은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 거대한 흰 공간에 두 명이 있었다.

한 에스퍼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고, 도지윤은 그 에스퍼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강제로 들게 했다. 에스퍼는 이마가 찢어졌는지 얼굴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게 도지윤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도지윤은 특유의 맹한 웃음을 지으며, 얼굴이 일그러진 상대 에스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퍼의 얼굴은 이마에서 떨어진 피와 터진 입, 코에서도 흘러내리는 피로 엉망이었다. 도지윤은 잠시간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난 예상보다 과격한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에스퍼들의 훈련을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굳이 피를 보면서까지 훈련할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지윤의 상대 에스퍼가 누군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유리창에 조금 더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도지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관람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쳐 흠칫 놀랐다. 도지윤은 날 쳐다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잠시간의 눈 마주침 끝에 도지윤이 느릿느릿 손을 들어 본인의 미간을 툭툭 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미간을 더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지윤은 조금 더 진하게 웃더니 한 번 더 미간을 톡톡 쳤다.

나는 손을 들어 내 미간을 눌렀다. 잔뜩 찌푸린 내 미간이 느껴졌다. 그러자 나를 쳐다보던 도지윤이 본인의 미간을 문질렀다. 도지윤을 따라 내 미간을 느리게 문지르자, 그의 의도가 느껴졌다. 찌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투 중에 무슨 짓이야. 이 미친놈.

도지윤이 나에게 집중하는 사이, 갑자기 도지윤의 손에 잡혀있던 에스퍼가 그의 손을 쳐서 빠르게 벗어났다. 도지윤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비어버린 손을 쳐다봤다.

도지윤의 손에서 벗어난 에스퍼가 손을 휘젓자 갑자기 허공에서 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지윤은 그 모습을 맹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이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모습에 내가 속이 탔다.

허공에 만들어진 물은 도지윤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도지윤을 뚫어버릴 듯이 쏘아져 나간 물은, 곧바로 도지윤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도지윤은 금세 거대한 물공 안에 갇혔다.

그래도 S급인데. 훈련에서 한눈 좀 팔았다고 진 건 아니겠지?

한참을 그 안에서 가만히 있던 도지윤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그 순간, 갑자기 유리창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쾅 하고 부딪혔다. 강화유리에 금이 갈 정도의 충격에 깜짝 놀라 한두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움직인 것은 나뿐으로, 같이 있던 에스퍼들은 미동도 없었다.

방사형으로 퍼진 금을 따라 물이 스며드는 유리 너머로 다시 훈련실 안을 쳐다보았다. 공간은 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도지윤은 찰랑찰랑한 물 한가운데 멀쩡하게 서 있었고, 상대 에스퍼는 바닥에 대자로 처박혀 있었다.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 에스퍼를 적시고 있는 물 사이로 피가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시설팀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도지윤이 발걸음을 옮겨 그 에스퍼의 옆으로 가더니 쪼그려 앉았다. 뭐라 중얼거리고 다시 일어서서 그의 오른손을 발로 밟아버렸다. 구둣발에 손을 자근자근 밟히던, 아래에 깔린 에스퍼가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다.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났고, 저거 멈춰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거기까지 하세요.]

관리 직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흐르자, 그제야 도지윤은 멈추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관람실에 어느 순간부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관람실의 에스퍼들은 중얼중얼 대며 도지윤을 평했다.

“저 미친개가 웬일이야.”

“가이드 왔다고 봐줬나?”

“그놈이?”

“저 가이드가 그 가이드잖아.”

“아…”

“저 정도면 치유계가 올 일은 아니네.”

“저번 에스퍼는…”

주고받는 말들 중에 호의적인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에스퍼 한 명이 피떡이 되어서 실려 나가는 와중에도 훈련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곧 에스퍼들은 낄낄대며 관람실을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에스퍼들의 훈련 모습이 묘한 감성에 젖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과격하고 잔인한 모습에 예전 내 기억들은 모조리 미화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과거에 비해 요즘 에스퍼들이 더 미친놈들인 것일 수도 있고.

모든 에스퍼들이 관람실을 빠져나가고 나서도, 나는 피가 번져있는 바닥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이제 나가서 도지윤과 대화를 해야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관람실 문을 잡고 열었다. 하지만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눈을 깜빡이며 반걸음 뒤로 흠칫 물러서야 했다. 도지윤이 서 있었다. 분명 물공 안에 갇혀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지만, 그의 몸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언제나처럼 맹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곧바로 관람실 안으로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방금 훈련을 마쳐서인지 몸이 뜨거웠다. 키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가 내 어깨에 턱을 기대는 모습이 되었다. 얼른 몸을 떼어내자 그는 선선히 물러섰다.

“도지윤 에스퍼. 방금 상대한 에스퍼가 혹시 유정환 에스퍼입니까?”

유정환 에스퍼는 내가 어제 가이딩했던 에스퍼다.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왜요?”

“대답해 주십시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아마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기도 해요.”

“제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도지윤 에스퍼.”

밀려오는 두통에 절로 손이 머리를 향한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도지윤 에스퍼가… 제가 가이딩 하는 에스퍼들을 상대로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훈련 에스퍼들은 다들 몸이 성치 못한다 하더군요.”

“어떤 거 같아요, 대리님은?”

도지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왜 중요하지 않아요. 대리님의 의견이 중요한 거지.”

“방금 전 유정환 에스퍼도, 훈련 중에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 가끔 훈련을 하다 보면 격해지기도 하죠.”

맹한 도지윤의 얼굴은 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돌직구로 말하기로 했다.

“하아… 도지윤 에스퍼. 제가 가이딩 하는 에스퍼들만 훈련 상대로 지정하신다는데, 맞습니까?”

“맞다면요?”

“도지윤 에스퍼… 다른 에스퍼들을 괴롭히는 걸 그만두십시오. 특히나 그 원인이 저라면 더더욱이요.”

“싫어요.”

느릿느릿 대답하면서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아 온다.

“대리님은 제 전담 가이드잖아요. 그런데 왜 다른 놈들의 가이딩을 하고 있는 거죠?”

“전 ‘임시 전담 가이드’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7건의 타 에스퍼 가이딩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리님은 7건을 초과해서 하잖아요. 저번 주에도 20건을 넘게 하셨더군요.”

“그런 거까지 보십니까?”

“제 가이드인데 신경 써야죠.”

손가락 사이를 느릿느릿 문지르는 게 간지러워 손을 빼려 했지만, 도지윤은 오히려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었다.

“대리님.”

순간 그가 나에게 훅 다가오더니 다른 한 팔로 나를 껴안았다. 곧바로 내 목에 입술을 묻고 그대로 다시 말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리님이 다른 에스퍼의 가이딩을 몇 건을 하는지 상관없어요.”

“…네?”

“대리님은 책임감이 강한 분이시니, 가이드로서 의무는 다해야죠. 하지만 다른 에스퍼들 가이딩은 해주면서, 제 가이딩은 개판으로 하면 이건 불공정 거래죠. 대리님.”

순간 할 말이 없어서 몸을 굳혔다. 도지윤이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주제로 말을 꺼내니 자동으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대리님.”

“…네?”

“‘대리님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불완전 가이딩으로 발생하는 모든 사건 및 사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면책이 될 수도 있겠죠.”

“…….”

“대리님과 나와의 등급 차이에 대해서는 우리를 포함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

“하지만 적어도 최선은 다하셔야죠.”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말하는 도지윤의 목소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뜨끔거리다 못해 조여 오는 양심에 눈알만 도르르 굴렸다.

“…말. 잘하시네요.”

“대리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죠?”

“…네. 죄송합니다.”

나는 나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했다. 이것은 그 누가 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다.

“기분이 안 좋아요. 대리님.”

“…이렇게 갑자기요?”

“기분은 계속 안 좋았어요.”

“아… 예….”

도지윤은 계속 내 목에 입을 대고 말했다. 웅웅 울리는 느낌이 심장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언제 스킨십에 이렇게 익숙해졌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얼굴에 약한 것 같다.

“기분이 나쁜 건 능력을 쓰셔서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니 일단 가이딩 해드리겠습니다. 만족 못 하시겠지만요….”

그러자 도지윤이 고개를 떼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완전 무표정이었다.

“가이딩. 그렇죠. 그러면 되겠네요.”

도지윤은 곧게 허리를 펴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한 손은 깍지를 끼고 한 손은 내 허리에 두른 채 밀착이 되었다.

“이건. 대리님이 잘못한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지윤의 별명은 미친개가 아니라 외계인이 어울렸다. 도대체 내가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을 해대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빨리 가이딩이나 하고 안정시키자고 생각해 몸속의 에너지를 움직이는 순간. 미친 듯이 방대한 에너지가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역가이딩이었다.

에너지가 강탈당하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한 번 겪었던 느낌이지만, 알아서 그런지 훨씬 더 기분이 좆같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의 흐름에 구역질이 났다.

“도지윤 에스퍼!”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와 팔을 미친 듯이 내리쳤지만 튼튼한 에스퍼에겐 멍조차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품속에서 무력감에 입술을 강하게 깨물자 입안에 비릿한 향이 섞여 들어온다.

“쉬… 쉬… 괜찮아요.”

도지윤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고 있었다. 단시간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몸을 빠져나갔다. 계속된 몸부림에 지친 것은 나였고 도지윤에게 타격은 전혀 없었다.

“도지윤! 이 씨발 새끼! 놔!”

나는 평소에 항상 예의를 지키려 노력해왔지만, 에너지가 점점 바닥을 보이는 비상 상황이 되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이 점멸하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릎이 꺾였지만 도지윤이 강한 힘으로 나를 붙잡았기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도지윤에게 기대다시피 한 몸을 바로 세우며 정신을 차리려 하였지만, 몸과 정신은 내 의지를 벗어났다. 곧 점멸하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목이 말라서 정신이 깨어났다. 몸 어디 한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목이 너무 말라죽을 것 같았다.

손가락 끝에 힘을 바싹 주어 까딱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이 겨우 들어 올려졌다.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벌벌 떨리는 입술에도 힘을 주어 뻐끔 입을 벌렸다. 바싹 마른 입을 벌려 말을 하려 했지만, 목구멍조차 말라버렸는지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그때, 누군가 목을 받쳐 조금 일으키더니 입에 컵을 대주었다. 다디단 물을 벌컥벌컥 마시려고 했지만, 그 누군가는 컵의 각도를 절묘하게 꺾어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 주었다.

“급하게 마시지 마세요.”

어느 정도 갈증이 가시자 나에게 물을 준 고마운 이를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에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앉은 예쁘장한 청년이 맹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도지윤이었다.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끼긱거리며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에서 시작된 기억의 검색은 곧 내가 기절했던 상황을 생각해 내었다. 일단 자꾸 목구멍에서 비집어 나오는 쌍욕을 집어넣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 왜 계십니까.”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적대감을 품고 뛰쳐나왔다.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이 미친개는 정말 말을 지 좆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에스퍼한테 가이딩 하는 거 상관없다고 한 거. 취소할게요.”

“…지금 도지윤 에스퍼가 꺼내야 할 말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대리님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역가이딩 해서 죄송해요.”

“하아.”

“화가 나서 그랬어요.”

이건 각을 잡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자, 도지윤이 나를 도왔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어지러운 머리에 미간을 찡그리자, 도지윤이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살살 내리누른다.

“…물이나 좀 주십시오.”

끙끙거리며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도지윤은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없게도 치솟았던 화가 조금 사그라지는 게 느껴진다.

도지윤이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뚜껑까지 따 나에게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 시원함이 위를 타고 올라와 관자놀이까지 쨍하고 울렸다.

“대리님 하루 동안 주무셨어요.”

“잔 게 아니라 기절이겠죠.”

“…죄송해요.”

내가 물을 마시며 앉으라고 손짓하자, 도지윤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보아하니 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근태는요.”

기절하고 하루가 지났다면 오늘은 금요일이다.

“병휴로 처리됐어요.”

그럼 됐다. 내 피 같은 연차가 까이지 않아 다행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한숨이 나온다. 그럼에도 어지러운 머리와 몸속의 에너지가 잠을 더 원하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심히 가늠해보고 있었다. 도지윤에게 화를 내고 이 상황에 대해서 비난을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그를 설득해야 할지.

고개를 돌려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일단, 제가 먼저 사과드리죠.”

시무룩한 표정의 도지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제가 임시긴 하지만, 그래도 도지윤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인데 너무 무성의하게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나는 화를 내서 회사의 몇 안 되는 S급 에스퍼와 척을 지느니, 타협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에게 ‘임시 전담 가이드’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당한, 그 순간부터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진지했다. 가이드 생활 10년. 내 커리어에 오점은 전 남친 가이딩을 회피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도지윤이 S급인 것은 나에게, 그리고 회사에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도지윤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회사에서 고려할 일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아니다 싶으면 도지윤 본인이든, 회사에서든 조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도지윤과 회사에 끌려다닐 수는 없다. 미친개에게는 목줄이 필요했다.

“앞으로 도지윤 에스퍼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과를 해도 도지윤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이건 그렇다 치고, 도지윤 에스퍼도 저에게 제대로 사과하십시오.”

금세 도지윤은 처량한 얼굴을 해온다. 저 새끼. 연기하고 있다. 도지윤이 우물우물 말을 한다.

“가이딩 주도권 뺏어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그리고요.”

도지윤이 눈알을 굴린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입을 뗀다.

“다른 에스퍼랑 싸운 거?”

“다른 건요.”

“…에스퍼 한 명 손목 부러뜨린 거요?”

“그거 말고요.”

“…그럼 다른 에스퍼 다리 부러뜨린 거요?”

“…아니요. 그거 말고요.”

계속 다른 걸 말해보라는 나의 추궁에 도지윤은 에스퍼들을 작살낸 얘기만 주야장천 하고 있었다. 이 미친놈. 골고루 박살내기도 했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없네요.”

“훈련 중에 죽이면 징계가 좀 커요. 대리님 오래 못 봐요.”

죽일 거면 전투 중에 죽이는 게 좀 더 낫죠. 도지윤이 웅얼웅얼 뒤에 덧붙인 말은 못 들은 척했다.

“…그래서 잘못한 건 더 없으십니까.”

도지윤은 한참을 고민을 하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는 잘못한 게 더 이상 없는데?’를 얼굴로 형상화한 듯했다.

“도지윤 에스퍼. 솔직히 전 에스퍼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건 관심 없습니다.”

“…네.”

“거기에 저만 끼우지 마세요.”

“네?”

“다른 에스퍼가 손목이 잘리고 발목이 분질러지고 배가 뚫리고 허벅지가 썰리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 건 의료팀이나 치유계 에스퍼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지. 제가 거기까지 관여할 주제가 아니니까요. 다만, 저만 끼우지 마세요.”

“…끼우지 말라고요?”

“그 싸움의 원인이 제가 아니면 됩니다.”

내가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할수록 도지윤의 표정이 묘해진다.

“전 사람들의 입에 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딱 질색입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오래 돌았던 것 같다. 원치 않게 자꾸 사람들의 소문에 휩쓸리고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태풍이 자꾸 나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태풍의 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로서 의무를 다할 테니, 도지윤 에스퍼도 제 ‘임시 전담 에스퍼’로서 의무를 다해주세요.”

“…에스퍼의 의무요?”

“저를 지켜주셔야죠.”

가이드와 에스퍼. 상대방의 존재는 절대적인 ‘내 편’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의 공포감과 외로움을 감싸 안아준다. 도지윤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를 품어줄 각오를 했다. 그렇다면 도지윤도 나의 두려움에게서 나를 지켜줘야 한다.

1구역에서 도망친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이 없다. 아니, 또 다른 현장을 찾아 도망을 갈 순 있겠지만 도망쳐 간 그곳에 낙원은 없을 것이다.

나는 4구역에 낙원은 아니더라도, 내 한 몸 편히 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난 이 미친개에게 목줄을 달아야 했다. 날 할퀴고 물고 뜯을지는 몰라도, 어떻게 해서든 접근해서 그의 목에 손을 대야 한다.

내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도지윤이 검은 눈을 번들거리며 나를 올곧게 쳐다본다.

“제가 어떻게 하면 이 대리님을 지켜드리죠?”

“일단. 다른 사람들 입에 제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 입을 찢어버려요?”

이 시발놈이. 얼굴을 굳히며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도지윤의 내뱉은 한마디에 욕설이 뛰쳐나갈 뻔했다.

“도지윤 에스퍼. 그러니까.”

머리가 콕콕 쑤시듯 아파,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절 구설수에, 그러니까 남들에게 제 ‘소문’이 안 생기게 해주세요.”

“소문이요?”

맹한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이 갸웃거려진다.

“하지만 대리님. 전 대리님이 남들에게 뒷얘기 듣게 한 적 없어요.”

이 양심도 없는 새끼.

“…동의할 수 없군요.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어 조곤조곤 말할 수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얼마 전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버리네 마네 하셨잖아요. 둘만의 부끄러운 얘기도 남들 앞에서 하고! 기껏 도지윤 에스퍼 생각해서 변명할 자리까지 마련해줬는데, 뻥하고 차버리더니 저한테 엿까지 주셨어요! 거기다가 도대체 제가 가이딩한 에스퍼들 훈련 때 박살은 왜 내는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그라데이션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아.”

도지윤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뗐다. 평소처럼 느릿느릿 하는 말이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대리님. 대리님이 자꾸 저한테 다른 가이드한테 가라고 했잖아요.”

“그게 뭐요?”

“왜 자꾸 귀찮다는 듯이 다른 가이드한테 가라고 그래요?”

“…그거야 우리 등급 차가….”

“제가 귀찮은 거잖아요. 대리님도. 내가 폭탄이라 부담스러운 거잖아요.”

맹한 얼굴이지만 자꾸 반질거리는 눈이 신경 쓰인다. 예전부터 눈이 반짝거려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저건 맛이 간 눈빛이었다.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전 도지윤 에스퍼가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전 도지윤 에스퍼가 걱정이 돼서 그런 거예요.”

“걱정이요?”

“제가 누누이 말을 했지만 제 능력으로 도지윤 에스퍼를 완벽하게 가이딩 할 수는 없어요. 그게 에스퍼 본인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10년이나 센터에서 일을 하는 동안, 가이딩에 관해 많은 경우들을 보아왔다. 결론은 에스퍼들은 완벽한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늘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눈곱만큼의 능력을 쓰고도 득달같이 달려와서 가이딩을 해놓으라며 닦달해대는 에스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도지윤의 에너지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일반 에스퍼와는 달랐다. 그는 참았다. 그 거대한 온갖 부정적인 에너지를 안고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의 에너지를 막고 있는 방파제가 얼마나 견고한지는 몰라도, 기나긴 세월 동안 조금씩 마모되고 손상되었을 것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등급 차이가 나는 가이딩을 받는 건, 갈증이 심할 때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듯한 기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전 A등급의 썩을 놈이 했던 말을 인용했다.

“도지윤 씨에게 하는 제 가이딩은 미지근한 맥주를 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그냥 소주잔에 맥주 조금 채워서 주는 수준입니다. 저는 도지윤 씨가 목마름에 타 죽을까 걱정이에요.”

도지윤이 까만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아마도 말하자면?”

정확히는 폭주해 죽을까 봐 걱정이지만?

“대리님도 제가 폭주할까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와. 이 새끼. 독심술도 하나.

“절대 아닙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사회생활로 단련된 나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폭주할까 걱정이래요. 그래서 나를 괴물 취급해요.”

시무룩해진 도지윤이 손을 뻗어 내 손을 가져간다. 참 손을 좋아하는 아이다.

“전 일찍 발현했어요. 그래서 센터에 일찍 들어갔는데, 매일 괴로웠어요. 가이딩을 받으라는데, 아프기만 했어요.”

좆같은 가이딩. 도지윤이 작게 덧붙인다. 도지윤의 내리깐 속눈썹이 병원의 형광등 아래서 길다란 음영을 지며 뺨을 우울하게 물들였다.

“아프다고 소리치고, 몸부림쳐도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아야 한대요. 난 계속 가이딩을 받으면서 아파했어요.”

도지윤의 느릿느릿하고 침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도지윤의 감정에 조금 동화되었다.

가이딩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에스퍼가, 가이딩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내가 도지윤이라면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가이딩 받는 것보다 폭주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요.”

S급 에스퍼가 폭주한다면 그건 재앙 급이다. 중앙에서 절대 그렇게 둘 리가 없다.

“분명 센터에서 교육받을 때, 가이드는 에스퍼의 동반자라 했는데. 제 동반자가 절 아프게 할 리가 없잖아요. 전 아픈 게 싫어요. 대리님. 내 가이드도 아닌데, 저한테 가이딩 하는 것도 좆같았어요.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다른 에스퍼들이 가이딩 받을 때 기분 좋다고 하는 것도 짜증났어요. 입을 찢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가이딩은 괴로운 건데. 가이드들은 날 괴롭히는데.”

이 뿌리 깊은 가이드와 가이딩에 대한 불신감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안쓰러움과 착잡함이 바닥에 얇게 자리를 깔았다.

“그런데 대리님이 나타났어요.”

문지르고 있던 내 손에 깍지를 낀다.

“대리님의 가이딩은 아프지도 않고, 기분이 좋았어요. 마치 내가 평범한 에스퍼가 된 거 같았어요. 전 제 가이드를 오래 기다렸어요. 대리님. 나타나면 그냥 죽여 버려야겠다고 수십 번 생각했는데.”

반들반들 거리는 눈빛을 마주 보고 있자니, 지금이 도망쳐야 하는 타이밍인가 싶다.

“못하겠어요. 내가 대리님을 어떻게 죽여요.”

고맙다.

“그런데 내 가이드가 나타났는데 자꾸 나한테 다른 가이드한테 가래요.”

방금 전까지 미친놈의 눈빛을 하고 있던 도지윤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급격한 감정 변화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도지윤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대리님. 왜 자꾸 다른 가이드한테 가라 해요?”

도지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내 심장도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왜 훈련실에서 다른 에스퍼 걱정만 해요? 내 걱정은 안 해주는 거예요?”

“…….”

“대리님 에스퍼는 저인데. 절 걱정해야죠. 제가 다칠까 봐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S급 에스퍼를 센터 어떤 미친놈이 죽일 수 있겠니….

심각한 분위기에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혀 밑을 맴돌았다. 혼자 순정만화처럼 뚝뚝 울던 도지윤은 곧 눈물을 멈추고,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대리님이 등급 차 때문에 걱정된다고 했지만, 전 잘 참아요. 갈증이 심할 때는 맥주보단 물을 선호하고요. 탄산 안 좋아해요.”

“…비유입니다. 비유.”

“물도 너무 차갑거나 뜨거운 물 싫어해요. 미지근한 물 좋아해요.”

“…….”

도지윤이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다시 맹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말갛게 쳐다보더니,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고 눈알을 굴린다.

“아. 물도 잘 안 마셔요.”

“…비유라고요. 비유.”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도지윤이 눈썹을 내리깔며 처연한 표정을 짓는다.

“다른 가이드한테 가라고 하지 말아요. 대리님은 제 가이드고. 난 대리님 에스퍼고. 다른 가이드한테 가라고 하면….”

입을 떼다 말고 나를 보며 힘없이 웃더니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가라앉았고, 나는 말을 골랐다.

“어쨌든. 이 기나긴 말의 요지는, 앞서 했던 그 행동은 내가 도지윤 에스퍼를 버리려고 해서 그런 거라고요?”

처음에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자, 도지윤이 눈알을 요리조리 굴린다.

“…네. 아마도?”

네면 네지, 아마도는 뭐야. 이 새끼. 또 연기한 거 같은데.

“절대. 두 번 다시. 그러지 마십시오.”

“대리님이 저 안 버리시면요.”

냉큼 대답해오는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이건 꼭 물어봐야겠다.

“도지윤 에스퍼. 저 좋아해요?”

내 질문에 도지윤은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고 껌뻑였다. 그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자 바로 대답한다.

“아니요.”

“…저 안 좋아해요?”

“네. 제가 대리님을 왜 좋아해요?”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 도지윤이 날 쳐다본다. 아니 씨바. 방금 고백 분위기 아니었나?

“방금 저한테 버리네 마네 하지 않았어요?”

“…그게 왜 대리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보통 그런 말은 좋아하는 상대한테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요?”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해서 도지윤을 유심히 살펴봐도 진심인 표정이었다. 이 또라이 새끼. 사람 헷갈리게 하고 있어.

“어쨌든. 그럼 왜 제가 가이딩한 에스퍼들만 골라서 훈련하는 겁니까? 그것도 어디 하나 부러뜨려놓는다면서요.”

“아.”

또 불리하니까 눈썹부터 내리깐다.

“걔네가 대리님 만진다고 생각하니까 화나서요.”

“…도지윤 에스퍼.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네. 안 좋아해요.”

“그런데 왜 다른 에스퍼가 저 만진다고 화가 납니까.”

“화내면 안 돼요?”

눈을 땡글땡글 뜨고 물어보자, 할 말이 없었다.

그런가? 날 안 좋아하지만 다른 에스퍼와 내가 접촉한다고 화 좀 낼 수 있는 건가?

말이 안 되지.

“안 돼요. 화내면 안 됩니다.”

그러자 도지윤이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그래요? 다른 에스퍼한테 대리님이 가이딩 해준다고 생각만 해도 열받아서 폭주할 거 같은데, 어떻게 화를 안 내요?”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좋아하면 화내도 돼요?”

도지윤의 질문에 입이 딱 다물어졌다. 이걸 예스라고 해야 해, 노라고 해야 해? 내 침묵을 뭐라고 이해했는지 도지윤이 냉큼 말한다.

“저 그럼 이제부터 대리님 좋아할래요.”

“뭐, 이 또라이 새끼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육성으로 뛰쳐나왔다.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갑자기 지금부터 시작! 하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도지윤은 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5살 어린애와 비슷했다. 그러니 눈높이에 맞추어 차근차근 설명을 하는 게 필요했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설명을 해야 하다니,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도지윤은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좋아한다는 감정 잘 몰라요. 알려주세요.”

“그건 제가 설명한다고 알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에요! 본인이 깨달아야죠!”

“대리님. 전 대리님이 안 보이면 보고 싶고, 옆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어요. 다른 에스퍼랑 가이딩, 아니 손끝이 닿았다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데 대리님 앞에서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대리님을 안 봤으면 좋겠고, 대리님이 저만 보고 웃어줬으면 좋겠어요.”

답지 않게 도지윤이 빠르게 말을 쏟아낸다.

“이건 무슨 감정이에요?”

이 새끼. 다 알면서 저러는 거야?

아무리 들어도 고백에 가까운 말에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이게 좋아한다는 거예요? 저 그럼 대리님 좋아하는 거 맞아요.”

황당함에 입만 벌리고 도지윤을 쳐다보는데, 도지윤이 입으로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하고 몇 번 말하더니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대리님. 좋아해요.”

“와….”

뒷목 잡겠다. 이 또라이 새끼.

“아니. 도지윤 에스퍼. 사람 마음이라는 게….”

“대리님은 가이드잖아요. 가이딩으로 에스퍼의 느낌을 알 수 있다면서요. 지금 가이딩 해보세요.”

채근하면서 그가 내 손을 흔든다.

“가이딩으로 그런 감정은 못 느낍니다.”

“대리님은 저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합니다.”

도지윤의 질문에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하자, 도지윤은 바로 시무룩해졌다. 그리고는 내 손만 살살 흔들었다.

“그래도 대리님은 내 가이드고, 다정하니까.”

또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렵다.

“나를 동정해주겠죠?”

도지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말이었다.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도지윤이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어간다.

“대리님이 그랬잖아요. 가이딩으로 에스퍼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가이드도 사람인데 동정심이라도 든다고.”

“아니. 도지윤 에스퍼. 제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동정이라도 해달라니. 이건 완벽하게 그가 감정적 을로 보이는 말이 아닌가.

안쓰러운 마음이 반, 속 터지는 마음이 반인 채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숨을 골랐다. 그러자 도지윤이 나를 향해 맹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대리님. 아무 말도 안 해도.”

도지윤이 내 손을 꽉 잡자, 입안에서 맴돌던 말들도 그대로 입속에서 꽉 잠겼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도지윤에게 시선을 떼, 시계를 쳐다보았다. 초저녁이었던 바깥은 이제 완연한 밤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기나긴 대화는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일단. 일단 내가 너무 피곤하니, 자고 일어나서 얘기합시다.”

갑작스러운 도지윤의 고백 비슷한 것을 받았지만, 두근거림은커녕 머리에 열만 받은 것 같다. 이 와중에 피곤해 돌아버리겠다. 쉬고 싶었다.

얼른 이 방에서 꺼지라고 돌려 말했지만 도지윤은 알아먹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내가 눕는 것을 도와주며, 이부자리까지 정리해 주었다.

도지윤은 누운 나에게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더니 옆에 앉아 내 가슴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뭔가 싶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뭐예요. 도지윤 에스퍼.”

“어렸을 적에, 저 아플 때 엄마가 옆에서 이렇게 토닥여 줬어요. 대리님도 아프니까 제가 토닥여 드릴게요.”

“…어머니가 힘이 장사셨나 봐요.”

도지윤의 토닥임에는 내 갈비뼈를 부러뜨리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힘이 센 에스퍼가 퍽퍽 내려치니 죽을 것 같다.

한숨을 내쉬고 부지런히 나에게 데미지를 입히고 있는 도지윤의 손목을 잡았다.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도지윤에게 말했다.

“손에 힘 풀어 봐요.”

도지윤은 주인의 말을 따르는 개처럼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 그 손을 잡고 나는 내 가슴 위로 조심조심 토닥이게 했다. 몇 번 반복하자 도지윤도 감을 잡은 듯해서 손목을 놓고 내 손은 이불 속으로 쏙 넣었다.

“잘 거예요. 말 걸지 마세요.”

도지윤은 내가 잠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