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금요일 아침. 여전히 근육통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쓰라림이 있었지만, 절대 연차를 쓸 수는 없었다. 오늘은 양아치같이 대충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출근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보이는 가이드 1팀의 직원들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대리님. 몸은 괜찮으세요?”
그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대고 차마 도지윤과 떡치느라 휴가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네. 요즘 무리했던지 몸살이 온 것 같아요.”
“쉬엄쉬엄 일하세요. 대리님.”
김 주임이 연신 내 얼굴을 보며 안색이 안 좋다는 둥, 조퇴하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호들갑을 떨길래 그 정도는 아니라고 간신히 웃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 때려치우고 집에 누워있고 싶었다. 말할 수 없는 곳의 둔통이 등허리를 타고 징징 울려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며 오늘은 행정업무만 대충 처리하다, 휴게실이나 의무실에 가서 누워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앉아있어도 불편한 이 말 못 할 고통에 다시 한번 도지윤에 대한 욕지거리가 치고 올라왔다.
그때 익숙한 알림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바로 가이딩 패드를 확인했다.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가이드 실장의 호출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오늘 하루도 평온하게 지나가기는 글렀다는 예감이 들었다.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아. 실장님이 호출하셨네요.”
김 주임의 질문에 표정을 재빨리 수습하며 대답했다. 호출의 이유가 짐작도 되지 않아 오히려 불안했다. 호출 수락을 누르고 부지런히 가이드 실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단순 상담 건인가?
아마 S급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맡고 있으니, 경과 등을 질문하기 위해 호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부지런히 굴러가는 머릿속에 갑자기 어제 있었던 도지윤과의 ‘가이딩’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절대, 입이 찢어져도 이건 말 못 한다.
실장실 앞으로 가자 이제는 얼굴이 익은 비서가 날 반가이 맞이해준다. 겨우 입 끝을 끌어올려 인사를 한 뒤, 실장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실장은 책상에 앉아있었고,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보고 있는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연차 썼다면서요.”
나는 소파에 앉으려다 실장의 앉으라는 소리가 없어서 엉거주춤 다시 자세를 바르게 섰다.
“예. 몸살이 와서 하루 연차 썼습니다.”
실장이 빨리 앉으라고 말하길 기다렸으나, 실장은 말 대신 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고 나에게 시선을 들었다.
“이 대리. 내가 이 대리를 부른 이유 알아요?”
단단히 꼬인 실장의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좋은 의도로 날 부른 것은 아니었다.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소파에 1분이라도 빨리 앉고 싶었지만 그른 것 같았다. 나는 소파에 앉는 대신 책상에 앉아있는 실장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 참. 이 대리.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 아니던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왜 도지윤 에스퍼가 12구역에 혼자 출장을 간 거죠?”
아. 씨발. 잊고 있었다.
“그건….”
“뭐죠. 이 대리?”
“…죄송합니다. 실장님.”
“도지윤 에스퍼가 월요일 아침에 12구역으로 갑자기 출장을 갔죠. 그건 알고 있었나요. 이 대리?”
“아니요. 몰랐습니다.”
“이 대리. 어떻게 가이드가 에스퍼의 출장을 모를 수가 있죠?”
말을 안 해줬으니까요…. 굳은 얼굴로 나를 비난하는 실장에게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나는 고개만 숙였다.
“에스퍼가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걸 모를 리도 없고… 도지윤 에스퍼가 폭주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도지윤 에스퍼는 12구역 가서 실컷 잘 놀다 온 것 같더군요.”
실장이 보고 있던 서류철을 탈탈 흔들면서 말을 한다. 보아하니 12구역에서 넘어온 도지윤 출장 보고서인 듯하다.
“A급 괴수 15마리, B급 괴수 22마리 기타 등등. 뭐 여차저차 그쪽 에스퍼들하고 협력해서 전투한 건 괜찮은데, 도대체 도지윤 에스퍼는 12구역 에스퍼들에게 손은 왜 댄 겁니까? A급 에스퍼 2명, B급 에스퍼 5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죠. 실장님…. 실장은 마치 에스퍼들을 부상 입힌 사람이 나인 것처럼 나를 몰아세웠다.
“아니. 그래. 이해할 수 있다 쳐. 전투 중에 에스퍼들 다친 거야 뭐. 죽은 사람 없으니까 그렇다 쳐도, 도대체 12구역 센터는 왜 날려 먹은 겁니까?”
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실장의 말에 죄인처럼 있었지만, 실장의 ‘12구역 센터 파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12구역 센터를 부쉈다구요?”
“이 미친… 아니. 도지윤 에스퍼가 12구역 가이딩 전용실 3개 층을 날려 먹었어요. 건물 안 부서진 게 다행이지. 그거 때문에 지금 우리 쪽에서도 시설팀 직원 파견 보내게 생겼어요.”
어쩐지 목요일 새벽에 찾아온 도지윤의 상태가 이상하더라. 저렇게 힘을 펑펑 써대고 찾아왔으니 애가 폭주 직전이었지.
실장의 말에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전손이 아닌 것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상관없이 실장은 나를 힐난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대리는 뭐 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도지윤이 출장을 간 것도, 출장 가서 에스퍼들을 다치게 한 것도, 12구역 사무실을 부순 것도 지금 알았지만 마치 내 책임인 양 ‘죄송합니다’ 하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않는 에스퍼들에 대한 제어는 주로 가이드, 특히나 ‘전담 가이드’의 몫이다.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공직사회의 책임 돌리기를 잘 이해하고 있는 나는,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씨발.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는 S급으로 귀한 회사의 자산이지만….”
본격적으로 실장의 잔소리 시간이 시작되려는 찰나, 실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열리는 문에, 바깥에서 비서가 ‘들어가면 안 돼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돌아 침입자를 확인하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도지윤이었다.
찰랑찰랑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창백하게 흰 얼굴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맹한 미소를 지으며 실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도지윤은 검게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실장이 ‘뭐야. 이 새끼’라고 말하듯 소리를 버럭 지르자, 도지윤은 실장을 향해 흘낏 시선을 한 번 주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곧바로 내 앞에 온 도지윤은 다정히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몸은 괜찮아요.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네. 얼른 나가요.”
도지윤은 실장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내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잡아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실장은 내 상사였고, 나는 아직 실장과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도지윤과 권력자 실장 사이에 낀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눈치만 요리조리 보고 있었다.
“대리님?”
“이 대리!”
도지윤은 난감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쳐다보았고, 실장은 비난의 대상을 잡았다는 듯이 나를 불러댔다.
씨발.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
절대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 울 것 같은 심정을 도지윤이 알아챘는지, 작게 한숨을 쉬고 실장을 향해 돌아섰다.
“왜 내 가이드한테 지랄이야.”
“뭐?!”
도지윤은 평소와 같이 맹한 표정에 느릿느릿한 말투였지만, 내게 한없이 다정하게 말했던 때와 달리 불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툭툭 내뱉었다. 빈정대며 귀찮다는 듯한 도지윤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내용도 경악을 넘어설 정도로 버릇이 없었다.
직장 상사를 향한 상식을 뛰어넘는 예의 없음에 깜짝 놀라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에스퍼가 출장 가면 지원팀에서 알아서 가이드한테 연락을 줘야지. 에스퍼 지원팀장 잡지는 못하겠고, 화는 풀어야겠어서 지금 내 가이드한테 지랄하는 거 아닙니까.”
“허.”
“왜. 틀려요?”
논리적으로 완벽한 도지윤의 말에 실장은 할 말이 없던지, 의미 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만 몇 번 내뱉었다. 전세는 도지윤 쪽으로 기우나 싶었지만, 도지윤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새끼. 너 12구역 가서 그 깽판은 왜 친 건데?”
“내가 깽판 치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그게 걱정되면 출장을 보내질 말아야지.”
시발. 일은 존나게 시켜 먹으면서 바라는 것은 많아요. 작지만 절대 실장이 못 들었을 리 없는 말을 도지윤이 덧붙이자 실장이 뒷목을 잡는 것이 보였다.
이 문책에 대해 당당하기 그지없는 도지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아연했다. 험악한 분위기에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둘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너… 너… 너 이 새끼! 징계감이야, 이거!”
실장은 비명을 지르며 도지윤에게 삿대질을 했다.
“줘요. 징계. 어디 이번엔 징계 내려오나 봅시다. 어차피 중앙에 말해봤자 징계는 내가 아니라 댁이나 에스퍼 실장이 받겠죠. 밑에 직원 관리 못해서.”
도지윤이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우며 말을 하자, 실장의 얼굴이 벌게지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회사의 소중한 자산이라 중앙에서 징계를 줄 때 나한테 줄지, 실장급한테 줄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S급 에스퍼가 징계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 사람 불편하잖아요?”
빈정대며 도지윤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센터 부숴 먹은 건이면 나보단 위에 급에서 책임지는 게 보기도 좋고.”
도지윤은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아끌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괜히 에스퍼 쪽에 지랄 못 해서 내 가이드 잡지 마십시오.”
우리 다시 보지 말아요. 그렇게 쏘아붙인 도지윤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실장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발에 힘을 주고 버텨볼까 매우 잠시 고민했지만, 도저히 이 폭풍 같은 상황을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도지윤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 나갔다.
도지윤과 실장실 밖을 나가자마자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난 도지윤과 실장 사이에 낀 내 처지가 센터에 어떻게 소문이 날까 걱정되었다.
S급 에스퍼와 가이드 실장 사이의 알력싸움에 등 터진 새우 정도로 소문이 났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를 못 본 척하며 굳은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어갔다.
도지윤은 어느 정도 실장실에서 멀어졌을 때, 내 어깨를 잡아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내 몸을 꽉 껴안았다.
동시에 내 몸이 분자 하나하나 분해되어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듯, 붕 뜨는 기분과 곧바로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도지윤이 나를 강하게 껴안고 있어 넘어지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나는 내 몸을 껴안은 도지윤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서야 순간 이동을 한 것을 깨달았다.
도지윤은 선선히 나에게서 떨어졌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이딩 전용실이었다.
당혹스러움에 눈만 크게 뜨고 도지윤을 쳐다보자, 도지윤이 멀뚱멀뚱 시선을 마주했다. 뭐라 입을 떼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도지윤은 나를 잡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의 손길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침대에 눕자, 옆에 걸터앉은 도지윤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식은땀 흘러요. 대리님.”
실장을 대할 때 그 싹퉁바가지의 모습은 어딜 가고, 도지윤은 맹하게 웃으며 다시 나긋나긋하게 말을 했다.
“도지윤 에스퍼….”
에스퍼들은 본능적으로 가이드 앞에서 연기를 한다. 가이드 기초 교육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이드들은 에스퍼들이 본인 앞에서 하는 행동이 어느 정도 가식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도지윤이 내 앞에서 이렇게 맹하게 웃는 것이 연기일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큰 괴리감에 깜짝 놀랐다.
내가 당황스러움에 입만 벌리고 도지윤을 쳐다보자, 도지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 여기저기를 쓸었다.
“대리님. 많이 아파요? 의무실 갈까요?”
도지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도지윤 때문에 머리도 몸도 아프다. 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원인을 쳐다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빠듯해졌다.
나는 누운 몸을 다시 일으켜 도지윤을 마주 보았다. 도지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도지윤 에스퍼. 아까 실장님이 말씀하신 게 뭡니까.”
“실장, 죽일까요?”
도지윤은 여전히 지 좆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습이 ‘도지윤’다워서, 나는 내가 아는 도지윤이 맞구나 하는 안심이 들었다. 아이러니했다.
“아니요. 그런 끔찍한 소리 입에 담지 마십시오.”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도지윤은 아쉬워했다.
“대답해주세요. 실장님이 하신 말이 뭡니까.”
“실장이 뭐라 했는데요?”
“도지윤 에스퍼가 12구역 가서 다른 에스퍼들에게 부상 입히고, 12구역 센터 사무실 일부분을 파괴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언급해도 살 떨리는 소리에 내 눈이 불안하게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아니지? 약간 과장된 거지?
“네. 맞아요.”
하지만 도지윤은 내 바람과는 다르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의 만행을 인정했다. 오히려 너무 담백하게 인정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큰일이 아닌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리가 있나.
“…왜요? 왜 그랬어요?”
내 질문에 도지윤은 내 손을 잡아 만지작거리며 눈알을 굴려 내 시선을 피한다. 내가 답을 채근하며 말없이 쳐다보자, 도지윤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대리님이 울었잖아요.”
도지윤이 내놓은 의외의 대답이 내 명치를 훅 치고 들어왔다.
그건 모르는 척해 주는 거 아니었나?
“아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요?”
당혹스러움에 날카로운 소리가 뛰쳐나갔다. 도지윤은 예민해진 나를 달래듯이 맞잡은 손을 살살 문질렀다.
“그냥. 대리님이 울어서 화가 났는데 대리님한텐 화낼 수 없으니까, 화풀이하러 간 거였어요.”
도지윤은 마치 우유가 떨어져서 마트에 사러 나갔다고 하는 것처럼 굉장히 평범한 문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도지윤의 사고 논리에 두 손을 든 것은 나였다.
아니, 범인의 상상력으로 도지윤 이해하기를 포기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울음’과 ‘도지윤이 화가 남’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그래. 내가 울어서 화가 날 수도 있는 거고, 화 좀 나서 괴물 잡으러 출장을 갈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는 해도 바로잡아야 할 일도 있다.
“도지윤 에스퍼. 우리가 ‘임시’라는 단어로 묶여있지만 페어라는 자각은 해야죠. 화가 나서 12구역에 출장을 가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저한테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엄밀히 말하면 도지윤이 에스퍼 지원팀으로부터 출장 요청을 받고 나서, 지원팀에서 가이드 쪽으로 통보를 해줘야 하는 사항이 맞다. 하지만 ‘전담 가이드’가 있는 경우라면 에스퍼가 알아서 데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지원팀에서도 신경 안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원인 분석을 해보자면 이번 일은 지원팀의 실수가 맞았기에, 도지윤이 아까 실장한테 지랄했음에도 실장이 입도 뻥긋 못 했던 것이다.
솔직히 좀 고소했다. 상명하복에 따라 나는 실장에게 변명도 못하고 ‘죄송합니다’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는데, 도지윤이 실장에게 한 방 먹여준 것이다.
겉으로는 도지윤에게 무뚝뚝한 척, 화가 난 척 표정을 굳히고 있긴 하지만 지금 마음속으로는 잇몸이 다 보이도록 활짝 웃고 있었다. 상사한테 내가 할 수 없는 지랄을 대신 해준 도지윤의 엉덩이라도 팡팡 두드려주고 싶다.
다만, 이 잠깐의 기분 좋음이 미래의 화를 불러올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회사 내에서 나는 슈퍼 을의 위치였기 때문에, 실장이 맘만 먹으면 엿은 한 트럭으로 줄 수도 있다. 당분간 몸 사리고 살아야겠다.
“죄송해요. 대리님.”
도지윤이 내 눈치를 살살 보며 눈썹을 내리깐다.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지만, 도지윤의 처연한 모습을 보자니 단박에 기분이 풀렸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엄히 말을 하자 도지윤이 배시시 웃어온다.
“대리님도 이제 울지 마세요.”
“그 얘긴 꺼내지 마십시오.”
“아니다. 내 밑에서는 울어도 돼요.”
도지윤이 맞잡은 내 손바닥을 검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순간 어젯밤의 그 민망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얘기도 꺼내지 마십시오.”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말하자, 도지윤이 목을 울려 나지막하게 웃는다. 나는 빨리 주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바로 입에 담았다.
“그런데 도지윤 에스퍼. 전투 때마다 주위 에스퍼들이 부상을 입는 겁니까?”
이전 전투에서도 그렇고, 이번 실장의 말을 들어보니 도지윤의 전투 때마다 주변 에스퍼들이 부상을 입는 것 같다. 도대체 왜?
내 질문에 도지윤이 대답이 없이 내 눈만 빤히 쳐다본다. 나도 마주하며 얼른 대답하라고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도지윤 에스퍼?”
“다른 에스퍼 걱정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표정을 지운 도지윤이 반질반질 미친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 급격한 표정 변화에 팔에 소름이 돋아 다급하게 말이 튀어 나갔다.
“아니요! 다른 에스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도지윤 에스퍼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도지윤 에스퍼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제야 도지윤의 표정이 다시 평소의 맹한 얼굴로 돌아왔다.
난 센터 내에 에스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 건강 검진을 도지윤이 통과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해요?”
“아무래도… 다른 에스퍼들이 동료한테 공격받아서 부상을 입었다는 건 듣기 좋은 얘기가 아니니까요. 혹시 도지윤 에스퍼에게 작은 문제라도 있다면, ‘임시 전담 가이드’로서 같이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만성 가이딩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도지윤이, 이로 인해 컨트롤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고, 만약 도지윤이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임시 전담 가이드’로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물어보자, 도지윤은 이해를 못 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나았을까. 그래도 에스퍼에게 컨트롤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창피할 수도 있는데….
“내가 걔네랑 왜 동료예요?”
하지만 도지윤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는 영 뜻 모를 이야기였다.
“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다시 받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 머릿속에 입력된 내용이 맞는 것인가?
“그… 도지윤 에스퍼. 일반적으로 같은 적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을 동료라고 하지 않나요?”
난 이 미친놈이 ‘동료’란 단어도 모르는 건가 싶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정규 교육 과정을 어떻게 밟으면 이런 상식도 모르는 거야?
도지윤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 그런 의미라면 맞긴 한데….”
질질 끌며 말하는 꼴을 보자니, 또 어떤 신박한 개소리를 할까 이제는 기대도 되었다.
“전투 중에 걸리적거리고, 도움도 안 되고, 자꾸 공격하라는 괴물은 안 잡고 절 잡으려고 하고, 쓸데없이 자기 가이드랑 로맨스물 찍고 있는 애들도 동료라면 동료죠.”
하지만 도지윤이 꺼낸 말은 신랄하고 날카로운 ‘동료’ 에스퍼에 대한 평가였다.
“작정하고 공격한 것도 아니고, 괴물과 전투 중에 공격 범위가 살짝 벗어난 것도 못 피하면 에스퍼라고 칭하기 부끄럽지 않나요.”
상큼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도지윤에게 할 말을 잃은 것은 나였다.
내 예상보다 훨씬 정상적으로 말하는 도지윤을 보며, 나는 그의 평가를 약간 상향 조정해주기로 했다. 도지윤은 에스퍼 정신 건강 검진을 통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럼 도지윤 에스퍼가 공격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주변 에스퍼들이 못 피한 거다?”
내가 짧게 요약하며 말을 하자 도지윤이 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도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도지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도 평소에 개새끼처럼 굴어서 진짜 개인 양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 실수했나 보다. 나의 실책을 빠르게 인정하며 도지윤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도지윤이 재빨리 내 손을 잡아 본인의 머리로 눌렀다.
도지윤이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손을 움직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답이라는 듯 도지윤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 하나를 마저 물어보았다.
“…그런데 12구역 센터는 왜 부쉈어요?”
활짝 웃은 채로 눈알을 굴리고 있는 도지윤을 보자니, 갑자기 불신감이 솟아올랐다. 손을 재빨리 거두자 도지윤이 눈썹을 내리깔며 처연한 척을 한다.
“…가이딩 받고 싶은데 대리님이 없어서요.”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출장 갔으니 제가 없죠.”
“대리님이 울었잖아요.”
도지윤은 정신 건강 검진은 통과했지만 지능검사는 통과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요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내 대화 추론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든지.
“아니. 도대체, 제가 운 거 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빙빙 돌아가는 이 대화에 나는 지금 울고 싶었다.
“대리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도지윤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도지윤을 바라보자 속이 문드러졌다.
“하아. 그리고 도지윤 에스퍼.”
“네?”
“그. 아무리 S급 에스퍼여도 그렇지, 막 실장님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요.”
“그럼… 죽여도 돼요?”
순한 얼굴로 험한 말을 내뱉는 도지윤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에 숨이 턱 막혔다.
“안 된다고요. 아까 말했잖아요. 죽이지 말라고요.”
애초에 사람을 왜 이렇게 쉽게 죽이네 마네 하는 거야. 도지윤의 비정상인 부분들은 언제나 놀라웠지만, 새삼 다시 겪어도 충격이 가득했다.
“도지윤 에스퍼. 그래도 어른이고 상사잖아요. 다음번에 보면 그렇게 막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고 다 하면 안 돼요.”
그러자 도지윤이 다시 눈을 껌뻑거렸다.
“할 말 못 할 말…?”
“…그냥 최소한의 예의로 존댓말이라도 해줘요. 어른한테 그렇게 반말로 섞어 말하면 안 돼요.”
나는 도지윤의 ‘상식’에 대한 업데이트가 단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최소한의 예절교육만 시키기로 했다.
알아먹었는지 못 알아먹었는지 도지윤은 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까는 고마웠어요.”
작게 덧붙인 말에 도지윤이 활짝 웃었다.
“제가 대리님을 지켜준 것 맞아요?”
도지윤의 질문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식 없는 놈이 그래도 내 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길길이 날뛸 것이란 예상과는 다르게 가이드 실장은 조용했다. 나를 다시 불러 지랄하지도 않았고, 혹은 업무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없었다.
그 평온함에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했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S급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의 위력인가 싶었다. 이 불공정한 대우에 있어 다시 한번 조직사회의 부조리함을 엿본 것 같았지만, 일단 내가 그 꿀을 받아먹고 있자니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4구역에 넘어오고 난 후에 요즘같이 평화로웠던 날이 있나 싶었다. 다만 모든 문제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이 도지윤이었다.
에스퍼들은 가이드에게 ‘넌 내 가이드야.’ ‘넌 특별해.’와 같은 이런 남사스러운 말을 내뱉기 주저하지 않는다. 에스퍼에게 있어 가이딩은 생명 유지를 위한 하나의 필수 조건이었고, 가이드는 필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가이딩 약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정신적인 충족감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라 약은 언제나 보조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에스퍼들은 본인 내부의 폭력적인 힘을 가지고도 가이드 앞에서 연약한 척, 가녀린 척을 연기한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특히나 일정 매칭률 이상의 가이드가 나타났을 때, 그들의 연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저럴 거면 차라리 에스퍼가 아니라 배우를 하는 것이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S급 에스퍼인 도지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지윤이 가이딩과 가이드에 대해 가지는 불신과는 별개로, 가이드를 갈구하는 본능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잠드는 것을 싫어하는 어린아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머릿속에서 도지윤의 ‘좋아해요. 대리님.’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순간 어떤 감정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다시 빠져나갔다.
나는 10년의 근무경력 동안 에스퍼들이 내게 했던 수많은 ‘좋아해요’라는 단어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에스퍼들이 ‘살려달라’는 말 대신 외쳤던 단어였다.
과연 너는 나를 진짜 ‘좋아하는’ 걸까? 너 또한 다른 에스퍼들처럼 ‘살려달라’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매칭률이 더 높은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나를 버리고 주저 없이 그 가이드를 선택하지 않을까. 혹시나 갑자기 아이가 가지고 싶다며 일반인 여성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매칭률이 조금 더 낮더라도 여성 가이드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래도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내가 너를 살려줄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지러운 상념들을 고개를 저어 흐트러뜨렸다. 모처럼 평화로운 날들을 지내는데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좋지 않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업무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해야 할 때이다. 가이딩 패드에 떠오르는 그린라이트에 수락을 누르며, 가이딩 전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가이딩 전용실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웃고 있는 도지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 맞은편에 앉으며 평소와 똑같이 딱딱하게 말을 했다.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도지윤이 일어나 내 옆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그리고는 도지윤은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모습이라 다른 한 손으로 능숙하게 가이딩 패드를 조작했다.
“확실히 요즘엔 이능 쓸 일이 없나 봅니다.”
잡힌 손을 통해 도지윤 내부의 에너지를 점검했다. 지난번, 몸으로 하는 가이딩 이후 점검해본 에너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처음 그를 가이딩 했을 때와 비교하면 도지윤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게 호전되어 있었다. 칠흑의 밤에서 새벽녘이 된 것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담담하게 말을 하며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지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그렇죠? 다 대리님 덕분이에요. 몇 번 더 섹스하면 더 좋아질 거 같아요.”
“…떨어지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나도 알고 도지윤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놓는 도지윤을 보니 눈초리가 사나워진다. 이 수치심도 없는 놈.
거기다가 나를 껴안은 도지윤이 은근슬쩍 목에다 자신의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대리님. 대리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떨어지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해야 합니다.”
“가이딩은 이대로 할 수도 있잖아요. 대리님. 말해주세요.”
도지윤은 제 무게를 나에게로 실어 오며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일전의 가이딩을 하며 도지윤이 했던 대화가 초보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했었어야 했던 질문이라면, 이번의 질문들은 온전히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질문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해 가이딩을 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감정의 한편을 나눠주겠냐고 물어본다면,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일반 연인들의 연애의 끝이 결혼이라면, 에스퍼와 가이드의 끝은 각인이다. 나는 각인에 한 번 실패했고, 두 번 실패하고 싶진 않다. 도지윤에게 알맞은 등급의, 알맞은 매칭률의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다.
허락된다면, 나에게도 알맞은 에스퍼가 나타나 그에게 ‘좋아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살려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에스퍼는 나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고, 별다른 방해가 없다면 각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굳건히 버티는 나무처럼 홀로 서서, 내가 은퇴할 때까지 미각인 에스퍼들을 굽어살피는 것도 좋다.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해도 내 미래에 도지윤의 자리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리님은 어떤 음식이 좋아요?”
도지윤의 질문에 나는 단 한 개도 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지윤은 끊임없이 재잘재잘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귀가 따가워질 지경이라, 나는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내 목에 붙어있는 도지윤의 고개를 더 깊숙이 눌러버렸다. 도지윤의 웃음이 목을 통해 내 몸을 통통 울렸다.
도지윤은 내 뜻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내 목에 묻은 고개와 내 등에 두른 팔은 풀지 않았다.
가이딩 내내 도지윤은 조용히 있었다. 가끔 얇은 벽을 통해 다른 방의 소리가 진동하듯 들리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가이딩 환경이었다. 영원히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떨어지세요.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끝났습니다.”
못해도 한 시간은 붙어있었던 것 같다. 내 에너지의 반이 넘게 텅 비었다. 한 시간 동안 도지윤은 나를 껴안고 있었다. 팔이 아팠을 것도 같은데 그거야 내 알 바 아니다.
“벌써요?”
“한 시간이나 지났습니다.”
굳어버린 목과 어깨를 풀며 그에게 말했다. 시무룩한 표정의 도지윤은 끝끝내 잡고 있던 손을 풀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맹한 얼굴밖에 못 봤던 것 같은데 점점 표정이 다양해지고 있었다.
인간을 흉내 내는 인형처럼, 혹은 내 반응을 학습하는 인공지능처럼 점점 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뚱하게 쳐다보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도지윤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예쁘게 생겨서 좋겠습니다.”
나의 뜻 모를 말에 도지윤은 환하게, 정말 빛이 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제가 예쁘게 생겨서.”
그러자 문득, 예전 정화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재하야. 넌 예쁜 쓰레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
왜 지금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의미 모를 기억을 갈무리하며 가이딩 패드로 가이딩에 관한 행정 처리를 한 후, 가이딩 종료를 눌렀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을 먹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 가이딩을 한 건 더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행정 업무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자, 동시에 내 컴퓨터에 쌓여있는 공문들이 떠올라 저절로 인상을 썼다. 그때까지도 내 옆에 앉아있던 도지윤이 곧바로 손을 뻗어 내 미간을 눌렀다.
“도지윤 에스퍼. 왜 이렇게 제가 인상 쓰는 걸 싫어합니까?”
내 질문에 도지윤이 눈을 천천히 껌뻑인다.
“몰라요.”
“네?”
“그냥 싫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대답에 순간 납득이 되었다. 도지윤이 지 꼴리는 대로 하고 싶다는데 이유를 물어본 내가 잘못이었다.
“도지윤 에스퍼. 여기 계속 있을 겁니까? 전 다음 가이딩 하러 갈 겁니다.”
안녕을 고하는 내 말에 도지윤은 맹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한 것 같아 나는 도지윤을 뒤로하고 가이딩 전용실을 나왔다.
그러자 도지윤은 나를 쫓아 나왔다. 나가는 길은 하나니까, 라고 무심히 생각했지만, 내가 가이딩을 위해 다른 층으로 이동하자 도지윤은 거기까지 내 뒤를 쫓아왔다.
설마설마 하며 가이딩을 요청한 에스퍼가 대기한 방문을 열자, 그 안까지 도지윤이 쫓아 들어오려고 해 나는 기겁을 했다. 나는 살짝 열었던 문을 닫아 등으로 막고 도지윤을 돌아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여긴 다른 에스퍼가 기다리고 있는 가이딩실이에요.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규정에 다른 에스퍼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지만, 이것은 매너의 영역이었다.
설마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불안과 불신의 시선으로 도지윤을 쳐다보자 도지윤은 맹하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저리 가요. 도지윤 에스퍼.”
마치 개를 내쫓듯 손을 흔들어 도지윤을 훠이훠이 물러냈지만, 그래도 도지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계약서 기억하죠? 저는 주에 7건의 타 에스퍼 가이딩을 해야 해요.”
나는 표정을 굳히고 도지윤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천천히 알려주었다. 그러자 도지윤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이 안에는 제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가 대기 중이고요. 에스퍼가 가이딩 받는 전용실에는 다른 에스퍼가 들어가지 않아요. 그게 매너고요.”
도지윤은 ‘그딴 건 왜 알려줘?’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덧붙여주었다.
“그러니까 따라 들어오면 안 돼요.”
“싫어요.”
“왜요?”
“싫으니까요.”
기시감이 들었다. 이 비이성적이고 논리라곤 없는 대답에 익숙함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순간 할 말이 없음과 뭐라고 말해서 이 새끼를 납득시키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입을 떼지도 못하고 황망하게 도지윤을 쳐다보고 있자, 의외로 도지윤이 먼저 말을 했다.
“대리님이….”
도지윤은 평소와 똑같이 느릿느릿하게 말을 하다, 나를 꿈뻑꿈뻑 쳐다보았다. 그 거북이 같은 모습에 이 새끼가 또 무슨 말을 해서 내 속을 뒤집으려는 건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도지윤이 느리게 나에게 몸을 기대더니 한 손을 구부정하게 만들어 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대리님이 가이딩 해준다고 저 새끼가 키스하면 어떻게 해요.”
혹은 좆질이라도 하면. 뒤에 말은 자체 필터링으로 걸러 들었다.
가이딩 전용실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지윤의 목소리는 충분히 작았지만 누가 들었을까 봐 화들짝 놀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럴 일 없습니다.”
더불어 나도 속삭이듯이 재빠르게 답변했다. 도지윤은 다시 귓속말을 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대리님.”
“그럴 일 없다니까요!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대리님은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고, 다정한 분이잖아요.”
나는 책임감은 강하지만 다정하진 않다. 다만 모두에게 공평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혹시 저 새끼가 가이딩이 너무 급하고, 대리님을 좋아한다면. 그래서 대리님 앞에서 펑펑 울면서 가이딩 해달라고 하면 대리님은 키스해줄 거잖아요.”
내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말은, 도지윤에게 키스로 가이딩 했듯이 다른 에스퍼에게도 키스 정도는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얼굴이 내 기준을 넘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혹은 분위기에 휩쓸리면 그보다 더한 것을 해줄 수도 있죠.”
도지윤은 오래간만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지윤의 얼굴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라데이션으로 변해가는 그의 표정은 ‘설마’에서 ‘진짜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지윤 에스퍼. 그럴 일은 잘 없습니다.”
“잘 없는 거지 확률이 0퍼센트인 건 아니잖아요?”
“…….”
“그러니 저도 같이 들어갈 거예요.”
도지윤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 박력 넘치는 목소리에 긍정의 답을 내놓을 뻔했다.
“안 돼요!”
“그럼 저 안에 에스퍼한테 허락받으면 되는 거죠?”
도지윤이 타협안을 내놓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고개가 5mm를 채 움직이기도 전에 도지윤은 나를 옆으로 물러나게 하더니, 바로 가이딩실의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문 쪽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에스퍼는 화들짝 놀랐다. 그 에스퍼가 놀라든 말든 도지윤은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 대리님이 가이딩 하는데 나도 들어가도 되지?”
언제나처럼 맹하게 웃으며 천천히, 그리고 생각보다 친절하게 물어보는 도지윤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도지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의 에스퍼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지윤은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싱숭생숭한 내 기분과는 다르게 도지윤은 내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려는 도지윤의 어깨를 잡아 저지하자, 도지윤이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들어가지 마세요. 불안하면 여기 서서 지켜만 보세요.”
나는 가이딩실 안에서 문을 닫고 바로 그 앞에 도지윤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도지윤은 항의를 했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혼자 어색하게 앉아있는 에스퍼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도지윤은 문에 기대서서 그런 우리를 쳐다보았고 나는 가이딩 패드를 조작하며 가볍게 행정 처리를 했다.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손 주세요.”
맞은편 에스퍼가 쭈뼛거리며 나에게 손을 건네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러자 나에게 손을 잡힌 에스퍼의 시선이 자연스레 도지윤을 향했다. 도지윤은 맹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엄지로 본인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나는 못 본 척을 했지만 맞은편의 에스퍼가 딸꾹질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발.
약 한 시간이 안 되는 가이딩 시간 동안,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에 앉은 에스퍼는 도지윤과 나와 내 손을 번갈아 쳐다보며 동공을 불안스레 떨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이 왔다 갔다 했다.
다행인 것은 에스퍼들의 가이드에 대한 집착은 꽤나 유명한 것이라서, 도지윤의 행동도 이러한 관점에서 소문이 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체할 것 같은 시간이 끝이 나고 가이딩 종료를 선언했을 때 에스퍼는 감사의 인사를 우렁차게 외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지윤은 그런 그에게 문까지 활짝 열어 잘 가라고 인사했다. 가이딩 패드를 조작하며 행정 처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도지윤이 가까이 다가왔다. 또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는 가이딩을 했던 내 손을 잡아채더니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물티슈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조각품을 닦는 듯 진지하게 내 손을 주름 하나하나까지 닦는 그를 보자니 기가 찼다.
“도지윤 에스퍼….”
진심으로 한심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의 이름을 꺼질 듯이 불렀다.
“네. 대리님.”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대답해오는 도지윤은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았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나는 이 건에 대해서 다시 날 잡고 얘기하자 마음을 먹었다.
“전 밥 먹으러 갈 겁니다.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 저랑 같이 먹어요.”
점심시간이 되어 말을 꺼내자 도지윤이 냉큼 받아온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 전통적으로 ‘식사’란 에너지를 얻는 행위이자, 사람들과 친교 활동을 뜻하는 말이다. 나는 도지윤과 ‘친교 활동’을 맺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나는 그의 ‘임시 전담 가이드’였고 그는 내 ‘임시 전담 에스퍼’였다. 4구역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이었던 것이다. 나는 도지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당을 향했지만, 도지윤은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도지윤과 식당에 도착하자, 센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 식은땀을 흘렸지만 도지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배식 줄에 도지윤과 나란히 서 있자, 우리를 힐끔힐끔 보던 사람들이 양보를 하기 시작했다.
“머… 먼저 드시죠. 대리님.”
“아니. 괜찮습니다. 줄 서겠습니다.”
나는 학교 시절부터 배웠던 질서의 의미를 떠올리며 꿋꿋이 배식 줄을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지윤과 함께 있는 나에게 자꾸 앞으로 가라며 양보를 했다. 그것도 도지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에게만 말을 걸면서.
그 괴상한 상황 속에서 내가 빨리 배식 줄에서 사라지는 것이 저들을 돕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잠시였고 행동은 신속했다.
내가 앞의 사람에게 양보를 받아 한 걸음 옮기면, 그 앞의 사람이 양보를 해서 또 한 걸음 옮겼다. 그리고 내 뒤의 도지윤은 자석처럼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여러 명의 양보를 거친 이후, 우리는 가장 늦게 들어왔지만 가장 먼저 앞에 서게 되었다.
배식을 받고 최대한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근처의 사람들이 식사를 다 하지도 않은 채 일어나버렸다. 이 기묘한 상황이 잘 입력되지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그래서 나는 짐작이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센터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습니까?”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네 인간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사람들이 저리 행동하냐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도지윤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느릿느릿 대답을 했다.
“잘 모르겠어요. 전 잘못한 게 없는데 사람들이 절 피하더라고요.”
눈썹을 내리깔며 처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전투 중의 오해 때문에 사람들과 틀어진 겁니까?”
“음… 아마도?”
도지윤의 전투 스타일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이 엄청난 것 같다. 아니, 그렇지만 전투 중에는 제 한 몸 챙기기도 바쁜데, ‘동료’가 다칠지 안 다칠지까지도 컨트롤해야 하나. 나는 어느새 마음속으로 도지윤을 두둔하고 있었다.
내 파탄된 회사 생활만큼이나, 도지윤의 인간관계도 만만치 않게 그릇된 것 같아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마 도지윤과 나의 매칭률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 한구석이 파탄된 인생끼리 붙여주려는 하늘의 시도일 수도 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밥을 먹으려는 찰나, 도지윤이 바나나 튀김을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의아함에 멀뚱멀뚱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대리님이 너무 뜨겁게 보시길래….”
도지윤이 많이 먹으라고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영양사가 쓸데없는 도전 정신을 발휘하여 바나나 튀김이라는 괴식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도지윤이 내게 준 호의를 잠깐 말없이 바라보다, 내 식판에 올려진 생당근을 도지윤의 식판에 옮겨주었다.
“대리님….”
도지윤이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는 생당근을 싫어한다.
***
그 후로도 도지윤은 주인을 쫓는 개처럼 나를 쫓아다녔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화장실도 쫓아 들어오는 도지윤에게 기겁했다. 화를 버럭 내자 도지윤은 화장실을 혼자 가게 해준 대신, 아무도 화장실에 못 들어오게 막아버렸다.
개쪽팔렸다.
그 주 내내 모든 가이딩 업무에 도지윤은 나와 동행했다. 매너가 아니라고 누누이 일렀지만, 도지윤답게 들어 처먹질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업무는 쫓아 들어오지 말라니까요? 다른 에스퍼가 불편해합니다!”
“싫어요.”
이 새끼가 진짜.
“도지윤 에스퍼. 저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네. 맞아요. 저 대리님 좋아해요.”
“저를 좋아하면 제가 좋아하는 행동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성인을 두고 얘기하는 건지, 어린아이를 두고 얘기하는 건지 헷갈린다.
차분히 도지윤을 향해 눈높이 교육을 실천하자, 도지윤이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인다.
“대리님은 저 안 좋아할 거잖아요?”
“제가요?”
“그럼 저 좋아해요?”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 에스퍼가 절 좋아하니까 제가 좋아하는 행동만 하라는 거와,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좋아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행동한다고 대리님이 저 좋아할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그래야 하냐고요.”
희망고문도 아니고. 도지윤이 말을 덧붙이며 날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도지윤의 당당한 주장을 듣고 있자니, 내 상식의 기준도 흔들리는 것 같다. 아니, 근데 지금 건 도지윤이 말한 것이 맞는 건가?
“도지윤 에스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할 말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보면 보통은 좋아하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만 주는 게 맞아요.”
도지윤의 얼굴이 불만스러워 보였다.
“상식이면 따라야 해요?”
“…보통은 그렇죠?”
“상식을 따르면, 대리님도 상식적으로 날 좋아해 주는 거예요?”
“그건… 생각을 좀 해 볼게요.”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도지윤의 검은 눈동자를 피해 말을 웅얼거렸다.
“납득은 안 되지만, 대리님이 그렇게 말씀하니까 노력은 해 볼게요. 그럼 대리님, 뭐 좋아하는데요?”
“도지윤 에스퍼가 가이딩실에 안 따라 들어오는 거요.”
“그거 말고요.”
그때 깨달았다. 내가 눈높이 교육을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지윤은 나를 졸졸 쫓아오리라는 걸.
“대리님이 가이딩 해준다고 그 새끼들한테 키스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는 필사적으로 도지윤에게 ‘다른 에스퍼와 너는 다르다. 너는 나의 ‘임시 전담 에스퍼’다. 다른 놈들에게는 그렇게까지 가이딩 안 할 것이다. 아마도.’와 같이 구구절절 말을 했다.
그러자 도지윤은 다시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대리님은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쉽게 해요?”
“도대체 왜 얘기가 거기로 튀어요….”
나는 속이 터지는 것 같아서 두 손에 내 얼굴을 묻었다. 도지윤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제 할 말만 지껄였다.
“내가 다른 에스퍼와 다르다면서요.”
대화의 맥락은 파악할 생각도 없이, 듣고 싶은 것만 쏙쏙 뽑아 듣는 것도 능력이다. 암담함에 손에서 고개를 들어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나 좋아해요. 대리님?”
“아니요.”
“그럼 그런 말 왜 해요. 내가 특별하다느니.”
“도지윤 에스퍼가 자꾸 저랑 다른 에스퍼랑 엮어대니까 그러잖아요.”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침착하게 웃도록 노력했다.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은 그냥 일일 뿐이에요. 거기에 의미 부여하지 말아요.”
“…….”
“에스퍼들과 비교를 하면. 당연히 도지윤 에스퍼가 좀 더 특별하죠.”
눈곱만큼.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다른 에스퍼들과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나한테 해준 가이딩도 일일 뿐이에요?”
도지윤이 무표정하게 나에게 물어온다. 방금 전까지 인간적인 감정으로 뒤덮였던 그의 얼굴은,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완벽하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전에 그와 보냈던 밤을 생각했다. 집착하듯이 ‘도지윤. 내 에스퍼’를 말하라며 나를 몰아붙였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과연 그게 그의 강요로만 이루어진 언어였을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내 오랜 사회생활이 속삭인다. 불리한 대답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 말에 도지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내가, 대리님에게 더 ‘특별’해지려면 뭘 해야 하죠?”
평소처럼 느릿느릿하게 말하는 어투 밑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혹은 알겠다는 듯이, 나를 지켜보겠다는 듯이, 기다려주겠다는 듯이 그가 내뱉지 않은 감정들이 그가 내뱉는 말 사이사이에서 숨 쉬듯이 존재감을 뿜어내었다.
“제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세요.”
나는 그와 기 싸움 하듯 도지윤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간 서로의 의미 모를 시선 교환이 있었고, 그 수초간의 싸움에서 결국 져준 것은 또다시 도지윤이었다.
“대리님. 전 대리님이 말씀하신 대로 대리님이 가이딩 해준 에스퍼를 대상으로 ‘훈련’하는 것도 그만뒀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대리님이 양보하세요.”
“…….”
“대리님이 그 새끼들 손을 잡고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틀리는데, 안 보이는 데서 손잡는다고 생각하면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도지윤은 다시 맹한 웃음을 지어왔다.
“대신 걔네들한테 허락은 받을게요.”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지윤은 본인이 말한 대로 내가 가이딩 할 때마다 동행했고, 에스퍼들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거절한 에스퍼는 단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