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9/21)

Chapter 9.

도지윤과 함께하는 시간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흘러갔다. 4구역 센터에 처음 왔을 때, 나는 하복을 입고 있었고 센터의 정원에는 해바라기가 만발해 있었다. 그러나 해바라기는 이미 져버렸고, 나는 실용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약간은 더 두꺼운 하얀색의 춘추 가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요즘의 날들은 일교차가 꽤 커져 있어서, 아침에 눈뜰 때면 언제나 동복을 꺼내놔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점심때가 되면 에어컨을 켜야 하나 고민하게끔 만들었다.

의식도 못 한 채, 날씨가 주는 시간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체감하듯 도지윤이 나를 향해 보이는 개수작도 시나브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요즘 도지윤은 틈만 나면 나를 핥으려고 해서, 자꾸 사람을 핥아 ‘개’라는 별명이 붙은 것인가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악. 도지윤 에스퍼. 거기는 핥지 말아요.”

가이딩의 기본은 접촉이었고, 솔직히 손만 잡아도 충분했지만 도지윤은 언제나 나를 껴안은 채 가이딩 받기를 원했다. 한 손은 깍지 껴 단단하게 잡고 한쪽 손은 내 등허리를 감싸 안는 자세가 도지윤의 가이딩 기본자세였다.

자세가 자세니만큼 도지윤의 고개가 내 목이나 귓가, 가끔은 입술까지도 넘어오는 것을 허락해버렸다.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지만, 도지윤이 눈가를 촉촉하게 적셔오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시발. 외모지상주의.

여하튼 도지윤은 내가 귀에 특히 약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호시탐탐 내 귀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귀는 건들지 말라고 사정 아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손만 잡은 가이딩보다는 효과가 더 나았기에, 가이드로서의 업무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도지윤과의 가이딩이 점점 강아지와 함께하는 놀이 시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비유적인 문장에서 나는 강아지가 핥고 무는 장난감이었고, 강아지는 말하지 않아도 도지윤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낑낑대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간절히 쳐다보는 눈빛에 심장이 철렁해져 ‘네 맘대로 해라’라는 자세가 된 것도 오래전이었다.

4구역에 임시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인간관계가 생기다 보니, 나를 갑옷처럼 휘감았던 긴장감도 조금 옅어졌다. 비단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 가이드 1팀의 직원들도 나를 보면 가끔 표정이 좋아졌다는 둥 말을 했다.

가이드 팀의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로 행정업무를 하던 중이었다. 내 뒤에 놓인, 어느새 도지윤의 지정석이 돼버린 간이 의자에는 도지윤이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나 신경 쓰이지 이제는 그냥 관상용 화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도 나는 모니터에 열중했다. 그러다 도지윤이 심심했는지 개소리를 했고, 나는 그 개소리를 받아쳤다.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김하영 주임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대리님.”

“네?”

도지윤에게 향했던 시선을 들어 김하영 주임을 쳐다보았다. 김하영 주임은 미간을 구긴 채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향해 뜻 모를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시죠. 김 주임?”

“혹시 연애하세요?”

“네?”

나는 김 주임이 꺼낸 개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마주 미간을 구기며 쳐다보았다.

“요즘 표정이 참… 연애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김 주임은 입사 3년 차라서 그런지 사람 표정 읽을 줄을 모르는 것 같다. 내 단호한 대답에 김 주임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 주임은 가이딩 패드를 챙기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대리님. 연애하시는 건 좋은데….”

말끝을 흐리면서 도지윤을 쳐다보는 것이 ‘저 새끼는 안 돼요. 절대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연애 안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단칼에 자르자, 김 주임은 찝찝한 얼굴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요즘 4구역에 적응 됐다고 표정이 풀어져서 그런가, 단박에 개소리를 들어 어이가 없었다.

김 주임이 자리를 떠나고 다시 컴퓨터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집중하던 차였다.

“대리님. 연애해요?”

잠시 잊고 있었던 도지윤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자, 도지윤이 경악에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내가.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도지윤 에스퍼.”

네 새끼가 더 잘 알지 않니. 이를 악물며 말하는 내 말에도 도지윤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도지윤은 내가 출근하기 전에 우리 집 앞에서 대기를 하다, 나와 함께 출근했다. 9시부터 18시까지 업무 시간 중에 화장실까지 졸졸 쫓아다녔고, 퇴근을 하면 칼같이 숙소 앞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러다 가끔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기도 했다.

내 스케줄 어느 구석에 연애 일정을 넣는단 말인가.

이 정도면 거의 도지윤에게 감시당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일정이었지만, 도지윤은 저 개소리에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도지윤에게 신경을 끄고, 밀린 일을 하기 위해 모니터로 다시 고개를 돌려 퇴근 시간까지 손가락에 부스터를 달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팀의 퇴근 스타터, 주 주임이 6시가 땡 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도 마주 인사를 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보안 서류를 캐비닛에 집어넣고,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도지윤에게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도지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시죠. 도지윤 에스퍼.”

뭐지. 쟤 또 왜 저러지.

내가 가자고 채근했지만 도지윤은 자리에 앉아 꼼짝도 없이 나만 보고 있었다.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도지윤의 팔을 잡아끌고 일으키자, 도지윤은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그… 오늘은 바로 집으로 가시는 겁니까?”

팀 밖으로 나올 때까지 도지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늘은 날 따라 숙소에 오지 않는 건가 싶어 물어보았다. 도지윤은 여전히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 하나 싶던 찰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퇴근을 위해 복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나는 무섬증이 일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지윤 에스퍼.”

이상한 표정의 도지윤과 당황해하는 나를 보면 사내에 드라마 한 편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4구역에서 많이 안정됐다고 생각했지만, 1구역에서 잘못된 소문에 시달려 대인기피증 직전까지 갔던 예전의 경험이 잊히지는 않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도지윤을 보자니, 심장 한구석이 콕콕 쑤셨지만 ‘소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흐릿한 배경 삼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에 등을 돌려 복도를 부지런히 걸었다.

등 뒤에 들러붙은 도지윤의 시선이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아 영 찜찜했다. 그래도 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센터 건물을 벗어나 가이드 숙소로 가는 길에 서서야, 나는 내가 헐떡거릴 정도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느새 손바닥에도 땀이 약간 배어 나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참고 있는 도지윤을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버려두고 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의 실수를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도지윤에게 가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렸다.

“아! 깜짝이야!”

그러나 나는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감시 카메라처럼 쳐다보던 그 복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었다. 도지윤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도지윤 에스퍼! 쫌! 따라올 거면 따라온다 말을 하든가, 아니면 기척이라도 내든가!”

엄청 놀라서 나는 비명을 꽥 지르고 말았다. 팔딱팔딱 뛰고 있는 심장 위를 꾹 누르며 도지윤을 노려보았지만 도지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놀람은 잠시였고, 여전히 망연자실한 도지윤의 모습에 나는 걱정이 되었다.

“도지윤 에스퍼. 괜찮아요?”

대답 없이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원망 섞인 시선에, 이유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외면해 버린 것은 나였다.

“가… 가죠. 집에 가죠.”

아무래도 오늘 집에서 도지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집에 음식이 뭐가 있나 고민을 해봐도, 집에는 과일밖에 없었다. 뭐라도 시켜야 하나. 애 상태가 저런데 심부름 보내는 건 아닌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숙소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기 전에 저녁 먹고 가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 도지윤 에스퍼. 왜요. 왜 울어요.”

도지윤은 눈 밑을 발갛게 물들인 채 표정도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처연하고 슬픈 모습에 나는 완전히 당황했다.

“아니. 도지윤 에스퍼. 울지 마요. 왜 울어요.”

도지윤이 언제나 내 손을 잡아오던 것처럼, 나는 도지윤의 손을 잡고 손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도지윤의 손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도대체 이놈이 어디서 무슨 이유로 우는 것인지 감도 안 잡혔다. 한참을 나를 쳐다보며 눈물만 뚝뚝 흘리던 도지윤은 내가 계속 왜 우냐고 달래주자, 겨우 입을 열었다.

“대리님….”

“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대리님 누구랑 연애해요?”

“…….”

아. 이 미친놈이….

도지윤이 울고 있는 이유는, 오후에 김 주임이 말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급격히 어이없음이 치솟아, 잡고 있던 도지윤의 손을 놔버렸다. 그러자 반대로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저 출근하기 전에 문 앞에서 저 기다리죠?”

“네.”

“같이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계속 붙어있죠? 가이딩 업무할 때조차도 말이에요.”

“네.”

“퇴근도 같이 하죠.”

“네.”

“이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반복하죠?”

“네.”

“도대체 제 일정 어디에 연애할 짬이 있는 거죠?”

내 논리적인 설명에 도지윤은 갑자기 서럽게 눈물을 더 뽑아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애처로웠던 도지윤의 눈물이 더 이상 서러워 보이지 않았다.

“주… 주말엔 저랑 안 만나잖아요.”

아… 그런 방법이….

나는 나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정을 만들어낸 도지윤에게 감탄했다. 주말엔 주로 집에 처박혀 전 남친 생각에 술을 마시거나, 술에 취해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피곤함과 잠에 찌들어 있어서 생각도 못 했다.

그렇다. 연애를 하려면 주말에 하면 되는구나!

“안 해요. 도지윤 에스퍼. 연애 안 합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은 이론적인 것이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런 내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보다는 그냥 도지윤에게 안 한다고 밀어붙이기로 했다. 실제로 하고 있지도 않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하지만 도지윤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어떻게 하면 믿으실래요?”

“저랑 주말에도 만나요.”

이 미친놈이. 주말에 회사 사람을 만나다니 제정신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도지윤은 언제나 꾸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는요?”

“흑….”

내가 다른 제안을 요구하자, 도지윤은 입술을 깨물며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눈물들이 다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울지 마시고요….”

이젠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그래요. 도지윤 에스퍼. 매 주말은 안 되지만, 이틀에 하루쯤은 만나 줄게요.”

그래서 난 큰 결단을 내렸다. 말만 이렇게 해놓고 핑계 대며 안 만나도 되겠지. 도대체 주말에 회사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말을 하자 도지윤이 눈물을 뚝 그쳤다.

“정말이요. 대리님?”

“네. 정말입니다. 주말에 별 일정이 없으면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전 주말마다 일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도지윤이 내 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입으로 때우면 되겠지.

“그리고 대리님….”

이 속 터지는 사건이 일단락되나 싶었더니, 도지윤이 우물쭈물 다시 내 눈치를 보아온다.

“왜요?”

“대리님. 연애 안 하니까….”

“……?”

“키스도 해주시면 안 돼요?”

“안녕히 가세요. 도지윤 에스퍼.”

이 또라이가 정도를 몰라요.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도지윤은 이제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왜 연애를 안 하는데 자기한테 키스를 안 해주냐며, 역시나 도지윤다운 비논리적인 소리를 지껄이면서.

하지만 나는 또다시 우는 그 얼굴에 넘어가 도지윤의 목을 붙잡고 짧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지윤의 엉덩이를 뻥 차버리고,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의 스킨십은 점점 익숙해지고 숨 쉬는 공기같이 당연스러운 것이 되고 있었다.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원래 가이드와 에스퍼가 이랬던가? ‘임시 전담’ 관계는 달랐나?

이전의 내 전 남친과의 관계를 떠올려 보면 당연히 엄청난 스킨십이 동반됐었지만, 연애의 대상이 아닌 에스퍼와의 관계에서도 이랬었나?

하지만 내 머리와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은 불꽃을 피우기도 전에 번번이 도지윤의 개소리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도지윤의 매력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의문 속에서도 도지윤이 말을 하면 그에게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

평화로운 금요일 오전이었다. 도지윤은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있었고, 나는 도지윤의 개수작을 받아주며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에 대해 한창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가이딩 패드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알림을 띄웠고, 동시에 센터 전체에 비상 경보음이 공기를 찢어댈 듯이 울렸다. 가이딩 패드를 확인하자 ‘RED03’ 코드가 징징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괴수 출현 코드였다.

코드를 확인하자마자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지윤은 평소와 똑같이 맹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이딩을 중단하고, 곧바로 비상상황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이미 나와 있는 지원팀의 안내하에 우리가 속한 조를 확인하고 잠시간의 대기 시간을 가졌다. 대기 시간 동안 속속들이 다른 에스퍼, 가이드들도 도착했고 그들과 함께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K04-13 지역에 A등급 괴수 20마리, B등급 괴수 100여 마리 등 출몰하였습니다. 비상소집 명령에 따라 여기 계신 분들이 A조로 투입될 것입니다. B조는 최대 3시간 후에 투입 예정입니다.”

지원팀의 직원은 말을 하면서도 계속 흘낏흘낏 도지윤만 쳐다보았다. 도지윤은 평소와 다름없는 곧고 바른 모습이었지만, 내 가슴속 한구석이 술렁거리며 불안감에 잠식되고 있었다.

“대기 위치 확인해 주십시오.”

직원 뒤에 있는 창에 지형도와 각 팀이 위치해야 하는 장소가 표기되었다. 에스퍼들이야 상관없고, 가이드가 대기할 장소를 알리는 목적이 컸다. 내가 속한 팀의 위치를 대충 눈으로 확인하자, 곧바로 공간 이동 에스퍼가 들어왔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우리를 현장으로 이동시켰다.

“도지윤 에스퍼. 공간 이동할 수 있지 않아요?”

일전에 사용했던 능력을 떠올리며 도지윤에게 물어보자, 도지윤이 선선히 대답해준다.

“장거리는 못해요. 제 주 능력이 아니라….”

맹하게 답해오는 도지윤을 보자니 나 또한 어이없음에 입이 다물렸다.

보통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정도나, 각얼음을 한두 개 얼린다거나 그 정도를 ‘주 능력이 아니다’라고 표현할 때 사용하는데….

항상 까먹고 있다가, 가끔씩 이렇게 드러나는 능력 덕분에 도지윤이 S급 에스퍼라는 사실을 상기해낸다.

발끝에서부터 분자 단위로 스러지는 기분과 다시 재구성되는 느낌이 순식간에 인식되었다. 그러한 감각은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어서 몸 컨디션에 따라 구역질이나 두통과 동반되기도 했다.

대기 장소로 이동 후 어지러워 살짝 비틀대자 도지윤이 옆에서 곧바로 나를 잡아 부축해온다. 재빨리 이동 포인트를 비켜서 옆으로 나오자 곧이어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들도 한 명 두 명 이동해오기 시작했다.

“조심해.”

“응. 그럴게.”

“다치지 말고.”

이동 포인트에서 빠져나온 각인 에스퍼와 가이드가 두 손을 꼭 붙잡으며 걱정 가득한 애정의 말을 속삭인다. 가이드의 눈은 거의 눈물이 흐를 듯이 촉촉했고, 에스퍼는 그런 가이드를 애달파하며 애정이 넘치게 바라보았다. 둘은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며 점점 서로를 가까이하다, 결국 입까지 맞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공간 이동 때문에 속이 안 좋은 것인지, 연인들의 닭살 행각에 속이 안 좋은 것인지 헷갈렸다.

“저 새끼가 좋아요?”

나는 대놓고 애정행각을 하는 둘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도지윤의 한마디에 기겁해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누구를요?”

그러자 도지윤이 나와 각인 에스퍼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도지윤 에스퍼. 저분은 각인 에스퍼잖아요.”

이를 즈려 물며 소곤거렸다. 그들이 애정행각에 집중하느라 우리 대화를 못 듣기를 바라며, 도지윤의 어이없는 질문에 답을 해줬다.

“그래서요?”

나는 도지윤을 볼 때마다 자주 느끼는 ‘아연하다’라는 감정을, 이제는 ‘도지윤하다’라고 바꿀까 싶었다. 도지윤이 비정상적인 놈임을 매 순간, 매초마다 느끼고 있었지만 에스퍼 주제에 ‘각인’에 대해서도 저따위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각인이라고요, 각인.”

도지윤은 ‘그래서, 뭐?’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각인하면 각인 상대만 바라본다고요!”

“대리님이 각인한 건 아니잖아요.”

가끔 도지윤은 창의성이 뛰어난 건지, 상식이 없는 놈인지 헷갈리게 굴 때가 있다. 마치 지금처럼.

“아니, 내가 왜 각인한 에스퍼를 좋아해요.”

“각인은 쟤네가 한 거고, 대리님은 미각인 상태잖아요.”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각인한 에스퍼나 가이드를 상대로 안 좋아해요.”

이 또라이 새끼야.

입 밖으로 같이 딸려가려는 욕을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그러자 도지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각인한 가이드는 다른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네. 그것도 몰랐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유부남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긴 한가요?”

그러자 도지윤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런 또라이 같은 애들 가끔 있잖아요.”

“일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 그럽니다!”

도지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각인, 각인, 각인’이라며 몇 번을 되뇌고 있었다. 저 꼬락서니를 보자니 나한테 각인하자고 달려들 것 같았다.

“얼른 전투 지역으로 가세요. 도지윤 에스퍼.”

저 멀리 있는 전투 구역에서 파르르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니 이미 전투가 시작된 듯했다. 닭살 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명은 여태 붙어있어, 다른 에스퍼 한 명이 슬슬 떼어 내려고 하는 참이었다.

“안 가면 안 돼요?”

“가야죠. 도지윤 에스퍼.”

“왜요?”

“월급 값은 해야죠.”

나의 단호한 말에 도지윤은 잠시 울상을 짓다 나에게 엉겨오려는 개수작을 부렸다. 나는 도지윤의 엉덩이를 손으로 뻥 치며 얼른 가라고 내쫓았다.

도지윤은 내가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며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나는 이제 정말 욕설이 목 끝까지 찬 상태라, 한마디 내뱉어 주려고 하는데 도지윤이 공중으로 천천히 몸을 띄웠다.

“조심하세요.”

도지윤을 향해 예의상 말을 건네자, 도지윤이 나를 보며 빛이 쏟아지듯 환하게 웃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점점 멀어지던 도지윤은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대리님.”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누르고 있자니,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가이드 1팀이자 나와 같은 비상조로 편성된 주 주임이었다.

“주 주임.”

대충 훑어보니 일전에 같이 비상조로 편성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각인 가이드 중에서 몇몇만 바뀌었다. 익숙한 주 주임 옆으로 이동을 하자, 주 주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랑….”

“네?”

주 주임은 뭐라 중얼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말을 하지 않는 주 주임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이미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는 전투 지역을 쳐다보았다.

“비행형이 많이 보이네요.”

전투 지역은 가이드 대기 장소에서 충분히 멀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도 사람의 인영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 괴수들은 크기가 큰 것인지, 괴수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비행형은 다른 괴수보다 더 까다로웠다. 에스퍼들 중에서는 공중을 날지 못하는 에스퍼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타 에스퍼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S급 에스퍼를 걱정하는 것만큼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두근두근했다. 아까 도지윤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생각하자니, 궁금해졌다. 그것도 ‘보조능력’일까?

에스퍼에게 본인 능력을 질문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지만, 이번에 도지윤이 돌아오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도지윤의 능력을 알고 있으면 다음번 전투가 발발하더라도 좀 덜 불안할 것 같았다.

걱정스레 잘 보이지도 않는 전투 지역을 쳐다보고 있자, 각인 가이드 쪽에 몰려있던 한 가이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재하 대리님… 맞죠?”

“아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로 센터 내에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 이정우 주임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정우 주임.”

에스퍼들이 전투에 열을 올릴 때, 대기하는 가이드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난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일부러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을 하자, 이정우 주임 측에서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내 보이지 않는 철벽에 떨어져 나가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이정우 주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나였던 것 같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 맞죠?”

“‘임시 전담 가이드’입니다.”

“도지윤 에스퍼는 어때요?”

다짜고짜 물어오는 이정우 주임을 보자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었다. 그는 소문을 물어가는 촉새처럼 도지윤의 흠집을 잡아내기 위해 눈을 빛냈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가십거리에 미치는 사람들. 입으로 상대방을 죽이는지 모르고, 나불나불 본인이 들은 ‘소문’이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당사자가 아니라고 말을 하면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화를 내? 뭐 찔리는 거 있으니까 화내는 거 아니야?’ 혹은 가만히 있으면 ‘맞으니까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거잖아.’라고 하는 사람들.

“가이딩 순조롭게 되고 있고,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나는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이정우 주임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 혹시 역가이딩이라거나…?”

“그런 일 없습니다. 도지윤 에스퍼가 이제 역가이딩은 없을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내가 딱 잘라 말을 하자, 이정우 주임은 눈을 껌뻑거렸다.

“도지윤 에스퍼가요? 설마 그 미친… 아니. 도지윤 에스퍼가 역가이딩을 안 하겠다고 말을 했다고요?”

“네.”

“…그전에 가이드하고 일반적인 대화가 된다고요?”

“…네.”

‘일반적인 대화’의 기준이 어디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도지윤과 나는 가이딩에서부터 점심 식사 메뉴까지 꽤 폭넓은 주제로 대화하고 있다. 가끔씩 등장하는 속 터지는 이상한 대화 패턴도 포함해서 말이다.

“와… 걔도 에스퍼는 에스퍼였나 봐요. 매칭률 높은 가이드 나타나니까 바로 바뀌는 거 봐봐.”

그러면서 이정우 주임은 약간 떨어져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가이드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이 돌아보았다. 그들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 도지윤한테 속고 있는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그놈이 정상이 아니니까요.”

나는 이정우 주임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왜 도지윤 에스퍼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이정우 주임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이드 역가이딩. 전투 중에 다른 에스퍼들을 공격해대고, 혹은 지 꼴리는 대로 전투에 안 나오질 않나. 시설물 박살에 실험실에서 피해야 될 대상 넘버 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보통 에스퍼들이 통제하기 힘들다는 거 알지 않습니까.”

“그렇죠. 에스퍼들은 통제하기 힘들죠. 그래서 가이드들의 통제는 들어먹는데, 그놈은 가이드의 통제도 들어 처먹질 않으니까요.”

그야 도지윤은 가이딩에 문제가 있어서 가이드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에스퍼니까. 하지만 이걸 쉽게 타인에게 발설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안 섰다.

“그나마 지금 대리님이 계셔서 사고 덜 치는 거지, 그전에는… 아우.”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도지윤이 ‘미친개’라는 데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다지 큰 사고를 친 것 같지도 않은데….

“그거 아세요. 대리님? 4구역의 시설팀의 능력은 전 센터 통틀어서 최고라는 걸요.”

에스퍼, 가이드들을 위한 센터답게 이곳은 훈련실 박살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따라서 시설팀도 대부분 에스퍼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투능력이 부족한 에스퍼들과, 혹은 부상으로 인해 잠시 쉬어야 하는 에스퍼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놈이 가이딩 지원실만 몇 번 부숴먹었을걸요. 덕분에 센터에서 시설팀만큼은 최고의 인재들로 꾸려놨죠.”

순간 얼마 전에 12구역으로 출장을 가, 가이딩 지원실 3개 층을 날려버렸다던 도지윤이 생각났다. 더불어 실장이 시설팀 직원을 파견 보내야 한다는 말도. 이런 뜻이었나.

“…죽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은 없죠.”

이정우 주임은 ‘죽은’에 강조를 하며 말을 했다.

“시설팀 직원이 부족하다고 항의 들어오면, 시설팀으로 에스퍼를 보내주면 되냐고 멀쩡한 에스퍼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놈이라고요!”

아… 그건 좀….

“아무튼 대리님도 조심하세요. 그놈이 언제 훼까닥 돌아 대리님도 당할지 몰라요.”

비록 이미 도지윤의 역가이딩에 두 번이나 당했지만, 도지윤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하지 않기로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맹한 얼굴의 에스퍼는 나를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본인의 기준에서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이 내가 도지윤을 지켜줘야 하는 타이밍이구나.

“도지윤 에스퍼가 그렇게 썩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네?”

“도지윤 에스퍼가 좀 상식이 없고, 과격해서 그렇지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정우 주임이 말하는 그런 일도, 다 의도치 않게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물론 나는 60퍼센트의 확률로 도지윤이 지 좆대로 행동하다가 저런 소문을 달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도 나머지 40퍼센트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었다.

예를 들면 가이딩에 대한 불신, 동료 에스퍼들과의 불협화음 등등 말이다.

나는 뻔뻔한 얼굴로 도지윤을 두둔했다. 말하면서도 양심이 콕콕 쑤셨지만, 내가 안 믿어주면 누가 도지윤을 믿어주겠는가.

입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도지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표정이 이상해진 것은 이정우 주임 쪽이었다. 이정우 주임은 눈을 껌뻑거리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이드들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청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은밀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이정우 주임이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불안했다.

“대리님. 혹시 도지윤 에스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거나….”

“아닙니다.”

나는 딱 잘라 부정했다. 그러자 이정우 주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가스라이팅….”

“아니라고요.”

두 번째 착각도 딱 잘라 부정하자 이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대리님. 제 말 들으세요. 에스퍼의 폭력에 대해 가이드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요. 사내번호로 ‘1234’로 연락하시면…”

“아니에요!”

세 번째에는 나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주임이 생각하는 만큼 도지윤 에스퍼가 쓰레기가 아니라니까요? 좀 사회성이 떨어지고, 상식이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이 좀 안 통할 뿐이에요.”

이 주임의 오해에 도지윤을 두둔하는 말을 다다다 내뱉었지만, 내뱉고 나니 그다지 좋은 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하게 한마디 더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지윤 에스퍼가 쓰레기면 어때요. 그 정도 예쁜 쓰레기면 충분히 쓸 만하지.”

급하게 말한다고 뇌와 입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뛰쳐나가자, 이 주임이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망했다.

이정우 주임은 나와의 대화가 끝나자 다른 가이드들이 뭉쳐있는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괜히 쓸데없는 소문이나 생산해 낸 것 같지만, 도지윤을 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주 주임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 주임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더 진해졌다.

“무슨 문제 있어요. 주 주임?”

“…아닙니다.”

앞서 나를 불렀던 것처럼 몇 번 입을 떼다 붙인 주 주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싱거운 사람인 것 같다.

우리는 다시 자연스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눈길을 돌렸다. 간헐적으로 펑펑 터지고 있는 하늘을 보자니 괜스레 다시 가슴이 술렁였다. 불안한 전투와 함께 쌀쌀해진 날씨가 더해져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따라 괜히 불안해요.”

주 주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주 주임.”

나는 불안해하는 신입을 독려하며 듬직하게 말했다. 신입에겐 사수가 필요한 것이고, 이 자리에서 주 주임의 사수는 나다. 주 주임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꼰대처럼 지난 내 경험담을 말해주려고 입을 떼던 참이었다.

한 명의 에스퍼와 7명의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는 A-1팀의 대기 장소에 갑작스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재잘재잘 대화하던 우리 사이를 감싸는 긴장감이 높아졌다.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알만 떼굴떼굴 굴리며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던 그때.

“아. 씨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같이 동행하고 있던 에스퍼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동시에 에스퍼는 허공을 향해 손짓을 했고, 우리 주위에 얼음의 막이 생겼다. 그 막이 생김과 동시에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3쌍의 거대한 날개를 달고 허공에 떠 있는 괴수의 얼굴에는 6갈래로 갈라진 기다란 입이 있었다. 오징어처럼 흐물흐물 거리며 열리는 입속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빨들이 뾰족뾰족 솟아 있었다. 이미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먹고 왔는지, 이빨 사이에는 살점과 옷으로 추정되는 작은 조각들이 보였다.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괴수에게서 떨어져 나온 짙은 갈색의 깃털이 흩날렸다.

전체적으로 새의 형상을 띤 괴수는 에스퍼가 만들어낸 얼음의 막을 발톱으로 긁어내렸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막에 균열이 생겼다. 너무나 쉽게 금이 간 막에 혼비백산한 것은 가이드들이었다.

“뭐, 뭐야!”

“꺄아아악!”

쩌저저저적.

얼음막에 금이 가 깨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애초에 가이드와 동행하는 에스퍼는 그리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아니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방어막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무는 에스퍼가 보였다.

괴수는 쉽게 깨지지 않는 막에 짜증이 났던지, 허공에 뜬 채로 6개의 징그러운 주둥이를 열어 괴성을 내질렀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익!”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괴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6개의 흐물흐물한 주둥이가 한꺼번에 활짝 펼쳐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세 개의 기다란 보라색의 혀가 보였다.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혐오스러움에 위에서 음식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한번 괴물의 혐오스러움을 인식하니, 괴수의 피비린내와 짐승의 냄새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괴이쩍은 냄새가 후각까지 괴롭혔다.

에스퍼는 최선을 다해 방어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괴물의 강철 같은 발톱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금이 간 채로 유지되던 얼음의 막은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괴수는 피를 토하며 헉헉대고 있는 에스퍼를 향해 다가갔다. 에스퍼가 공격을 하기 위해 다시 자세를 잡는 순간, 에스퍼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무전기가 보였다.

이 멍청이!

“무… 무전기! 무전기 던져요!”

괴물과 대치 중인 에스퍼가 하기엔 무리한 요구였지만, 잠깐의 틈을 보아 던져주기만 하면 된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다른 가이드들도 에스퍼의 허리춤에 매달린 무전기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어느 쪽으로 던지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이드가 무전을 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괴물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는 에스퍼에겐 잠깐의 틈을 내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입술만 깨물며 지켜봐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가이드의 몸이란 가이딩을 제외하곤 일반인과 다름없기 때문에 괴수와의 전투에서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저 멀리 간헐적으로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는 전투 지역을 흘끔 쳐다보았다. 제발 누구라도 눈치채라.

간간이 얼음 창을 만들면서 괴수를 공격하던 에스퍼가 점점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괴수는 징그러운 입 중 한 개를 유연하게 궁글리며 에스퍼의 몸통을 붙잡았다. 동시에 에스퍼는 잽싸게 본인 허리에 있는 무전기를 떼어 던져버렸다.

다만 자세가 흐트어진 채 던졌던 탓인지, 무전기는 괴물의 뒤에 가깝게 떨어져 있었다. 가이드들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그러는 사이 괴수는 에스퍼를 잡고 있던 입에 힘을 주어 압박하고 있었다. 뾰족한 이빨이 에스퍼의 옷을 뚫고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괴물의 혀를 따라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공포스러운 모습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주 주임을 바라보자 이미 굳어 버려 얼굴만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씨발. 씨발!

내가 왜 현장을 떠나 안락한 1구역으로 몸을 의탁했었는지,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주르륵 펼쳐 지나갔다.

약간 쌀쌀하다고 생각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전신에 흘렀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각인 가이드보다 미각인 가이드가 희생하는 것이 회사의 입장에서는 손실이 더 적었다. 각인 에스퍼가 미쳐 날뛰면 곤란하니까.

이 중에 미각인 가이드는 나와 주 주임, 둘뿐이다. 입사한 지 1년을 갓 넘은 주 주임을 사지로 밀어 넣자니, 내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이 콕콕 쑤셨다. 거기다가 나는 그의 사수다.

사수가 부사수를 사지로 밀어 넣다니. 내가 예전에 숱하게 당했었던 사수에 의한 괴롭힘을, 내 부사수에게 되물려 줄 수는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여전히 괴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에스퍼를 지켜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옆의 주 주임이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살금살금 한 걸음씩 발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심장이 방망이질하는 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조금만 더, 한 발자국만 더.

괴수에 다가갈수록 악취는 점점 더 심해졌고, 공포가 나를 뿌리째 씹어 먹을 것 같았다. 무전기에 손이 닿을 정도까지, 괴수의 깃털을 셀 수 있을 정도까지 가깝게 다가갔다. 괴수는 여전히 에스퍼를 괴롭히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제 에스퍼는 정신을 잃고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이미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 조용히 몸을 낮추어 무전기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괴수의 머리가 180도 회전하며 나를 마주했다. 어느새 에스퍼를 붙잡고 있었던 괴수의 입 한쪽은, 죽었는지도 모를 에스퍼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나를 향해 벌름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너무 놀라 혀를 깨물어 버렸다. 그러나 괴수와 마주했다는 공포감에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굽혔던 몸을 펴지도 못한 채, 간신히 손가락만 움직여 무전기를 손에 꽉 쥐었다. 괴수는 약간씩 각도를 달리하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 있었고, 6갈래로 갈라진 입이 내 앞에서 흐물흐물하며 입안의 뾰족한 이빨들을 보여주었다. 괴수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괴물의 입 한쪽이 나를 붙잡기 위해 뻗어져 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잴 것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렀다. 동시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주 주임 쪽으로 힘껏 던졌다.

볼썽사납게 엎어진 몸을 일으켜 도망가려고 하던 찰나, 괴물의 발인지 입인지가 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다행히 괴수가 붙잡은 것은 옷이었기에 나는 이미 먼지로 엉망이 된 새하얀 가이드복을, 단추를 뜯어내다시피 벗어버렸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공포 덕분에 굳어 버린 몸이 내 말을 듣질 않아 결국 다시 땅바닥에 철퍼덕 하고 엎어지고 말았다. 몸을 재빨리 굴려 괴수를 쳐다보자, 괴수가 바로 내 위에 있었다. 더럽고 추악한 입을 크게 벌려 다시 한번,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내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혐오스러운 모습에 팔을 들어 본능적으로 눈을 가리자 괴수의 발톱이 내 팔을 스쳐 지나갔다. 화끈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이를 악물고 괴수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의 굼뜬 움직임보다 괴수가 훨씬 빨랐다. 괴수는 강철같이 튼튼한 발로 나를 낚아챘다. 돌덩이에 맞은 것 같은 아픔에 저절로 ‘억’ 소리가 나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괴수의 발에 붙잡혀 하늘을 날고 있을 때였다.

아… 이재하. 가이드 인생 10년 차. 이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려나 봅니다.

이렇게 갈 거면 모아놨던 돈이라도 펑펑 쓰고 가는 건데. 무엇을 위해 대출금 갚는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썩을 놈의 전 남친 뺨에 주먹이라도 한번 갈겼어야 했는데.

온갖 루머나 생성해내던 1구역 사람들한테 가서 한번 따지기라도 할걸.

한마디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던 가이드 실장한테 반항이라도 한번 해볼걸.

그리고… 맹한 미소로 나만 바라보던 도지윤한테, 좀 더 친절하게 대해줄걸. 가이딩이라도 한 번 더 해줄걸.

하늘을 날아가며 사물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내가 하지 못했던 행동들에 대한 후회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머릿속을 흘러가던 생각들의 마지막 점을 찍는 것은 도지윤이었다. 느릿느릿한 말투로 맹하게 ‘대리님’ 하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대리님.”

그래. 지금 이 목소리처럼.

“대리님. 괜찮아요?”

상상 속의 목소리지만, 너무 현실감 넘치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엎어진 채 괴수의 발에 붙잡혀 있던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는 움직일 수 있었기에 힘을 주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도지윤이 서 있었다.

도지윤의 얼굴에 항상 씌워져 있던 맹한 미소가 사려져 있었다. 대신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멍청해 보일 게 분명한 내 얼굴을 걱정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어…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이상한 상황이었다. 나는 괴수의 발에 붙잡혀 하늘에 떠 있었고, 그런 내 앞에 도지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허공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몸도, 도지윤이 보임과 동시에 가라앉고 있었다. 도지윤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나는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아… 저… 그… 괴수는…?”

결국 내가 꺼낸 말이라고는 멍청한 표정과 시너지를 일으킬 만큼 멍청한 질문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내 모습에도 도지윤은 비웃지 않았다. 흘낏 위를 쳐다본 도지윤은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괴수의 안부를 물어본 건 아닌데….”

“아….”

내 멍청한 표정에 옮은 것인지, 도지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허공에 떠서 도지윤과 눈을 멀뚱대며 이런 멍청한 대화나 하고 있자니, 혹시 내가 이미 사후세계에 와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 못 버틴 것은 나였다.

“도지윤 에스퍼. 얼른 꺼내주세요. 힘들어요.”

나는 엎드려 있는 자세였고, 괴수의 강철 같은 발톱은 내 배를 누르고 있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발톱의 끝이 내 살을 빗겨나갔지만, 하늘을 나는 통에 살짝 베였을 것 같다.

도지윤은 그제야 맹한 미소를 띤 표정으로 돌아와, 나에게 좀 더 다가오려 했다.

“도지윤 에스퍼, 잠깐!”

도지윤과의 멍청한 대화에 잠시 잊었지만, 우리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괴수의 아래에 사이좋게 허공에 떠 있었다. 한 명은 본인 능력으로, 한 명은 괴수에게 사로잡혀서. 괴수가 왜 움직임이 없는지는 의아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하면 우린 사이좋게 저승길 동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괴수, 괴수는요!”

“왜 자꾸 얘 걱정을 하는 거예요? 괴수가 좋아요?”

이 미친놈이.

도지윤은 심통 난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까 지상에서 ‘저 에스퍼가 좋아요?’라고 물어봤던 표정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제가 괴수 걱정을 왜 합니까! 지금 제 목숨이 위험한데! 괴수가 우리를 왜 공격하지 않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난 괴수의 발톱에 잡혀 있다는 것도 깜빡하고, 도지윤의 개소리에 화가 벌컥 치솟아 소리를 치고 말았다. 울컥한 내 표정과 대조적으로 맹한 표정으로 돌아온 도지윤이 천천히 말을 한다.

“얘 공격 안 해요.”

“왜요?”

그러자 도지윤이 잠시 눈알을 굴렸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대리님.”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죽음을 앞뒀던 공포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그리고 도지윤을 상대하느라 나도 스킬이 늘었던 것인지, 예전처럼 위액이 솟구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뭔데요.”

도지윤은 두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눈썹을 내리깔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얘가 괜찮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니까. 전 괴수의 안부 따위는 관심 없다니까요?”

정정해야겠다. 위액이 솟구치려고 한다. 도지윤은 약간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얘 죽었어요.”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표정 관리를 못했다.

“언제요?”

“…음. 아까?”

“…그럼 저, 죽은 괴수의 발톱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나는 괴수가 죽었다는 것보다, 죽은 괴수가 어떻게 허공에 떠 있는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도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생각났다. 이번엔 괴수에게 물어뜯겨 죽는 것보다는, 허공에서 떨어져 추락사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내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지자, 도지윤이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급하게 입을 연다.

“죄송해요.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얘가 대리님을 잡고 있는 게 화가 나서….”

“도지윤 에스퍼, 쟤가 왜 괴수를 죽인다고 화를 냅니까….”

그러자 도지윤이 속눈썹이 팔랑거릴 정도로 빠르게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대리님은 제가 누구 죽인다고 하면 싫어하셨잖아요.”

“…그건 사람이고요.”

나는 내 속을 뒤집는 도지윤에게 화를 버럭버럭 내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퍼, 가이드, 죽은 괴수 중에 누군가를 허공에 떠 있게 만들 수 있는 건 에스퍼밖에 없으니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다.

“그럼 괴수는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분명 나 때는 학창 시절에 윤리를 배웠던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안 배우나?

“됐고, 얼른 꺼내주세요.”

진이 다 빠지고 있었다. 도지윤이 가까이 다가와 괴수와 내 몸통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우악스럽게 힘을 주려 하자 나는 다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깐! 도지윤 에스퍼!”

“네?”

“저는 에스퍼가 아니에요, 하늘을 날 줄 모른다고요!”

물론 괴수를 허공에 띄운 것처럼 도지윤이 내 몸도 허공에 띄울 수 있겠지만, 홀로 떠 있는 건 너무 무섭다.

도지윤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해요?”

“일반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불안한 게 당연합니다!”

도지윤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괴수의 발톱에 끼어있던 내 팔들을 먼저 빼주었다.

“대리님. 일단 제 어깨 잡으세요.”

도지윤이 내 팔을 본인의 어깨를 붙잡게 하자, 나는 아예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 팔 때문에 도지윤의 움직임도 제한이 되어, 풀어야 하나 고민을 잠시 했다. 그러나 도지윤은 오히려 자신의 팔을 들어 내 머리를 제 품에 깊게 묻게 했다. 도지윤의 목에서 도지윤의 시원한 향기가 올라왔다.

도지윤이 이능을 쓰는지, 그의 두 손은 연신 내 머리와 어깨 등을 쓰다듬고 있었지만 내 몸은 착실히 괴수의 발톱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붙잡힌 다리까지 떨어져 나오자, 순간 허공에 떠 있다는 공포에 허둥대었고 도지윤이 곧바로 내 허리를 강하게 붙잡았다.

“대리님. 겁 많네요.”

도지윤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나는, 도지윤이 목을 울려 웃자 통통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무서웠다고요.”

한숨을 내쉬듯 말하자 도지윤이 한 손은 엉덩이께를 붙잡아 지지하고, 한 손으론 내 등을 연신 쓸어주었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두려움과, 괴수를 직면했던 두려움에 취해 두 손이 하얘질 정도로 강하게 도지윤을 껴안았다.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떨고 있어요. 대리님.”

도지윤의 말에 나는 내 몸이 계속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추워서 그래요. 추워서.”

되는대로 개소리를 내뱉었지만, 도지윤은 역시나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춥기는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가이드복 상의는 땅에서 괴수와 뒹구느라 어디론가 사라져 나는 얇은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었다. 거기에 이곳이 상공 몇 미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높이 올라와 있어서 지면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가 느껴졌다.

“그래요. 대리님. 좀 춥긴 하네요. 이제 괜찮아요.”

도지윤은 품에 안겨 달달 떨고 있는 내 등에 온기를 주듯 쓸어내리고 내 귓가에 다정하게 입맞춰주었다.

“땅으로 갈게요. 대리님.”

도지윤의 말에 나는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지윤이 천천히 허공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에 와닿는 바람의 감촉, 소리, 머리카락의 움직임. 모든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도지윤의 품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소근거리며 말했다.

“저… 괴수는 그대로 두는 건가요?”

“아. 처리했어요.”

나는 괴수를 확인하려고 살짝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대리님. 도착했어요.”

도지윤은 느릿느릿 말을 하며 나를 살살 내려주었다. 나는 도지윤의 품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고 주위를 한번 살핀 다음, 조심스레 땅에 발을 디뎠다.

“대리님.”

주 주임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나에게 달려왔다. 긴장감이 풀리자 다리도 같이 크게 휘청거렸고 옆의 도지윤이 강하게 나를 잡아주었다.

괴수와 대치했던 에스퍼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대신 다른 에스퍼 서넛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에스퍼들 중 한 명이 와서 물어봐서 나는 선선히 대답을 했다. 자잘하게 긁힌 상처들은 있지만 크게 다친 것도 없고, 놀라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간 정도이다. 순간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이용해서 어떻게 병휴를 받을 수 없을까 하는 양아치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 정도론 진단서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포기했다.

에스퍼는 무전기로 뭐라 중얼거리며 상황실에 보고를 했다.

“대리님.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주 주임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살폈다.

“아니요. 괜찮아요. 긴장이 풀렸는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내가 간신히 웃으며 답을 하자, 주 주임이 ‘대리님…’ 하며 울먹임과 함께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다만 시도에 그쳤을 뿐이다. 주 주임이 내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지윤이 바로 탁 소리 나게 주 주임 손을 쳐버렸다.

주 주임과 나는 동시에 도지윤을 쳐다보았지만, 도지윤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 주임이 어색하게 ‘하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했고, 나도 이 상황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리님. 대리님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주 주임이 차마 내 손을 잡지는 못하고, 본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목이 메는지 말을 하다 말고 주 주임은 정말 훌쩍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주 주임. 그 상황에 서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게 맞습니다.”

물론 내 영웅적인 행동을 높이 칭송했으면 하지만, 겸손함을 담아 별일 아닌 척 말을 했다. 그러자 나를 잡고 있던 도지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윽. 도지윤 에스퍼. 손에 힘 좀 풀어요.”

나는 도지윤의 품에 거의 기대고 있었고, 도지윤은 한 팔로 내 허리께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도지윤이 너무 강하게 나를 잡아서 그의 팔을 툭 치고 도지윤의 품에서 살짝 몸을 떼어냈다. 온전히 내 두 다리에 힘을 싣자 살짝 후들거리긴 해도 서 있을 수 있었다.

“대리님. 정말 감사해요. 대리님 덕분에 살았어요.”

주 주임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가이드들이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 다만 도지윤 때문인지, 멀찍이 떨어져서 나와 도지윤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며 여기저기에 겸손하게 답사를 하고 있는 동안 도지윤의 표정은 사라지다 못해 냉기가 흐를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도 도지윤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우리를 중심으로 더더욱 멀리 멀어지고 말았다.

주 주임마저 나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 버리자, 나는 도지윤을 향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지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뗀 순간, 도지윤의 귀에 꽂혀있던 인이어로부터 기계의 물리적 한계를 뚫고 나한테까지 소리가 들려왔다.

‘도지윤, 이 시발 새끼야!’

“…도지윤 에스퍼. 누가 찾는데요?”

거참. 사람을 격하게도 부르시네. 인이어로 소통할 정도면 다른 에스퍼들도 듣고 있는 것일 텐데, 우아하지 못한 욕설이 못마땅해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지윤은 미간을 찌푸리다 귀에서 인이어를 빼버렸다.

“도지윤 에스퍼. 그… 구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이제 그만 전투 지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에스퍼 서넛이 자꾸 도지윤을 바라보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달싹대고 있었다.

“안 돼요.”

“…왜요?”

내 질문에 도지윤은 자신의 에스퍼복 상의를 벗어 나에게 둘러주었다. 도지윤이 입을 때는 딱 맞아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입으니 약간 품이 넉넉했다.

“여긴 괴수가 출몰하는 지역이고, 대리님은 또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니까요.”

도지윤이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눈빛이 따가워지는 것은 에스퍼들 쪽이었다. 도지윤에겐 한마디도 못 하면서 눈빛으로 얼른 도지윤을 전투 지역으로 보내라고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난 무언의 시선을 받으며 침을 꼴딱 삼켰다.

“도지윤 에스퍼. 그래도 얼른 전투 지역부터 정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시에 도지윤이 들고 있던 인이어에서 ‘도지윤 이 새끼 어디 갔어!’ 하는 소리도 들렸다. 도지윤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전투 지역은 다른 에스퍼들이 처리할 거예요.”

“아니아니. 도지윤 에스퍼가 가면 좀 더 빠르게 정리가 될 거고….”

뭐라고 설득해야 도지윤이 전투 지역으로 다시 돌아갈까.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제가 지금 여기 있기가 좀 힘들어서,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그런데 전투가 안 끝나면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가서 얼른 정리 좀 해주면 안 될까?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도지윤을 바라보았다. 도지윤은 그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미소를 짓던 내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릴 때쯤에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도지윤 뒤쪽에서 나를 애절하게 쳐다보던 에스퍼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잠시 방심한 사이, 도지윤이 두 손을 들어 내 뺨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도지윤을 쳐다보자 도지윤이 고개를 내렸다. 도지윤의 혀가 내 입안을 가르고 들어와 내 혀를 한번 쑥 훑고 곧바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내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더니 쪽 소리가 나게 떼어내었다.

“대리님이 부탁하셨으니까.”

도지윤이 느릿느릿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가이딩은 달아 놓을게요.”

금방 다녀올게요. 도지윤은 눈만 크게 뜬 채 굳어버린 내 이마에 다시 쪽 소리 나게 키스를 하더니 곧장 공간이동으로 사라져버렸다.

수많은 눈들 앞에서 공개 키스를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쩡 하니 굳어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가이드들이 ‘염병천병하네’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만, 애써 담담한 척 허공 한구석을 노려보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내 얼굴이 붉어진 것이 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뻘쭘히 서 있자 주 주임 쪽에서 나에게 다가와 물병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주 주임.”

“아니에요. 대리님. 제가 더 감사하죠. 대리님. 진짜 멋있었어요.”

주 주임이 두 손의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

“어휴. 대리님 사라지고 무전치고 나서, 진짜 몇 초 만에 도지윤 에스퍼 바로 나타났어요.”

“아….”

나는 내가 사라진 이후의 상황은 당연히 몰랐기 때문에, 주 주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빠른 도지윤 에스퍼는 처음 봤다니까요. 맨날 센터에서 뭐 해달라고 해도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는데.”

“그런가요…?”

나는 도지윤이 그렇게 빨리 와준 것에 뿌듯해졌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에스퍼는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우리를 보호하느라 괴수와 전투를 했던 에스퍼에 관해 물어보자, 주 주임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대충 들었는데, 아무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고 알려오자, 따뜻해졌던 마음이 갑자기 식으면서 무거워졌다.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애도했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에스퍼였다. 잠시간 침묵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각인 상대가 있었을까요?”

“…차라리 없길 바라야죠.”

각인도 살았을 때나 좋은 이야기였다. 만약 그가 각인한 상태라면, 세상에 혼자 남아있을 그의 가이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슬프네요.”

주 주임의 감상에 동감을 표하며 다시 전투가 한창인 곳으로 고개를 들어 도지윤을 생각했다.

“대리님.”

“깜짝이야!”

혹시 내가 생각만으로 도지윤을 소환해 내는 이능을 가지게 된 걸까?

울적한 마음에 도지윤을 생각한 것뿐인데, 바로 뒤에 도지윤이 서 있었다. 내게 에스퍼복 상의를 주고 본인은 하얀 셔츠 차림인 도지윤은 이능을 써서 그런지, 볼이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벌써 끝났어요?”

“네. 대리님이 빨리 끝내라고 하셨잖아요.”

언제나처럼 맹하니 미소를 지으며 도지윤이 나를 껴안으려 하자, 나는 도지윤의 옆구리를 조용히 찔렀다.

“윽. 대리님 아파요.”

“남들 보는 데서 이러지 마시죠.”

아픈 척 울상을 짓는 도지윤에게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시무룩한 도지윤은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아왔다. 넓은 아량으로 허락을 해주자, 도지윤이 다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예쁜 모습에 피식 마주 웃어주었다.

“대리님. 얼른 돌아가요. 피곤하잖아요.”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아끌며 재촉하자, 나는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전투 지역에서 센터로 복귀하는 순서는 부상자, 상태가 좋지 않은 에스퍼들, 그의 각인 가이드, 그리고 나머지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이다. 보통 대부분 미각인 가이드들이나 에스퍼들은 센터에서 제공하는 버스나 타고 돌아가는 게 대부분인데, 오늘의 나는 당당히 공간 이동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된다.

도지윤과 함께 공간 이동을 담당하는 에스퍼 앞에 가서 서자, 온몸이 한 올 한 올 스러지는 좋지 못한 기분에 이어 곧바로 한 뭉텅이로 재구성되는 기묘한 감각이 몰아쳤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있었고, 그런 내 몸을 도지윤이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 남사스러운 자세에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빠져나오려고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지윤은 그런 내 몸을 조심조심 옮기며 느릿느릿 이동 포인트를 빠져나왔다.

“괜찮아요. 대리님?”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도지윤을 안심시키고, 도지윤의 부축과 벽을 손으로 짚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복도로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가이드 지원팀의 박 대리가 서 있었다.

“대리님!”

“박 대리님.”

나를 발견하자 박 대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얘기는 들었어요. 괴수한테 잡혀갔다면서요?”

“네. 좀. 몸이 안 좋네요.”

나는 바로 감이 왔다. 가이드가 괴수에게 납치될 뻔한 일과 대기 가이드 팀을 호위하던 에스퍼 한 명이 거의 사망 직전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4구역 센터의 위신을 땅으로 처박아버리는 이야기였다. 이를 위해서 센터장과 두 명의 실장이 사건의 개요를 초 단위로 기록해오라고 지원팀을 닦달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공간 이동을 하느라 좋지 않았던 상태를 최대한 이용했다. 벽을 짚던 손에 무게를 실어 아예 벽으로 기대려고 하자, 도지윤이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지윤의 품에 폭 안긴 부끄러운 자세가 되었지만, 힘든 척해야 해서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아… 실장님께서 사건 개요를 파….”

“아. 머리가 아파요.”

“이게 좀 급….”

“괴수한테 긁혔던 팔뚝도 쑤시는 거 같아요.”

“…대리님….”

“허벅지도 눌렸나? 왜 이렇게 욱신욱신 아프죠?”

“센터장님이 꼭 받아오라고 했어요. 대리님.”

내가 박 대리의 말을 싹둑싹둑 잘라먹으며, 나 아프니까 일 시키지 말라고 행동으로 보여주니 박 대리가 울상을 지으며 나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센터장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나를 압박하자, 나도 히든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산업 안전사고는 센터 평가에 안 좋게 들어가죠?”

우회한 내 공격이 먹혀 들어간 것인지, 박 대리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린다.

“…대리님. 산재 신청할 거예요?”

“크게 다친 데가 없는데 어떻게 신청하겠어요. 박 대리.”

그러자 박 대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데 이번 평가에 가이드 보호 지수가 새로 신설됐던데, 그거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나는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이번에 신설된 평가 지표를 꿰고 있지만, 대놓고 박 대리를 협박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박 대리는 이미 KO패 당해 ‘저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지, 뭘 새삼스럽게.

난 티끌만큼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뒤돌아서서 삼 초만 있으면 기억도 안 날 만큼의 가책이었다.

회사에 대한 내 책임감은 괴수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대표로 나선 것으로 충분했다. 그 이후의 행정 처리까지 생각할 만큼은 아니었다.

박 대리가 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 어지러워. 박 대리. 미안한데 오후 조퇴로 올려주세요. 몸이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네요.”

실제로 몸에 힘이 안 들어가기도 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도지윤의 몸에 더더욱 기대었다. 그러자 도지윤이 걱정스레 나에게 물어온다.

“괜찮아요. 대리님?”

“몸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도지윤 에스퍼.”

박 대리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도지윤에게 아픈 척을 했다. 박 대리가 꺼지라는 내 뜻을 알아채고 썩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대리님… 일단 푹 쉬고, 다음 주에 다시 얘기하시죠.”

다음 주가 되면, 다른 가이드가 초 단위로 작성한 상황일지를 검토만 하면 될 것이다. 원래 이런 건 처음 하는 놈이 뒤집어쓰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박 대리. 아! 가이드 실장님에게도 못 찾아봬서 죄송하다고 꼭 전해주세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상황 보고를 하러 갈 수가 없네요.”

나는 도지윤이 나에게 지어 보이던 처연한 표정을 따라 하도록 노력했다. 일단 본판이 다르니 내 얼굴은 도지윤의 얼굴만큼의 효과는 없을 테다. 하지만 박 대리에게 토 쏠리는 효과는 주었던지, 박 대리는 바빠서 가본다며 쌩하니 사라졌다.

박 대리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도지윤의 품에서 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도지윤 에스퍼?”

하지만 도지윤이 날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만 놓아도 돼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안 돼요. 대리님. 대리님 지금 머리도 아프고, 팔뚝도 아프고, 허벅지도 아프다면서요.”

“그건, 그냥. 박 대리 떼어내려고 한 말이에요.”

“그럼 대리님 지금 머리도 안 아프고, 팔뚝도 안 아프고, 허벅지도 안 아파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남에게 기댈 만큼 아픈 게 아니라는 거지. 내 대답에 도지윤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리님. 아픈 거 맞잖아요.”

극단적인 도지윤의 선택지에 나는 새삼 황당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난 아픈 것이 아니다. 다만 피곤하고 지쳤을 뿐.

하지만 도지윤에게 지금 내 상태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보다는, 그냥 안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안 아파요. 멀쩡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도지윤의 손길을 쳐냈다. 도지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내 숙소까지 걸어갔다.

숙소 앞까지 와서 도지윤에게 꺼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 했다. 오늘 내가 괴수에게 잡혀 죽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도지윤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도지윤 에스퍼.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도지윤에게 나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작게 웃으면서 내가 입고 있던 자신의 에스퍼복을 자연스레 벗겼다.

“대리님도 고생하셨어요.”

기대한 것보다 상식적인 도지윤의 반응에 얼떨떨했지만, 얘도 점점 나아지는구나 싶어 감동이었다. 하지만.

“도지윤 에스퍼?”

“네?”

“그런데 옷은 왜 벗겨요.”

도지윤이 자연스럽게 내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에 두 손으로 내 셔츠를 부여잡자, 도지윤이 날 보며 맹하게 웃었다.

“대리님. 상처 난 데 확인 좀 하려고요.”

“그걸 왜 도지윤 에스퍼가 확인해요.”

“전 대리님의 ‘임시 전담 에스퍼’잖아요.”

도지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도지윤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대리님. 왜 아까 대리님만 괴수에게 잡혀간 거예요?”

“아. 무전기가 같이 있던 대기 에스퍼에게만 있어서, 그거 받느라고요.”

“그걸, 굳이, 대리님이 받았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도지윤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상한 분위기였다. 나는 여전히 양손으로 내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었고, 도지윤은 웃으며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로서의 본능이 자꾸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각인 가이드가 무전기 받다가 다치면, 각인 에스퍼 쪽에서 난감할 거잖아요. 그 팀에 미각인 가이드는 저랑 주 주임 둘뿐이었는데, 주 주임은 연차가 낮으니 제가 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었죠.”

이성적인 내 말에 도지윤은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는요?”

“네?”

“대리님의 ‘임시 전담 에스퍼’인 저는요?”

나는 내가 말한 상황설명과 도지윤의 질문의 상관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아 멍청하게 되물었다. 두 눈을 껌뻑거리며 도지윤을 바라보고 있자니, 도지윤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각인 에스퍼가 지랄할 거 같아서 대리님이 나선 거라면, 제가 지랄할 건 예상 안 했나 봐요.”

두 눈이 곱게 접힌 도지윤을 바라보며, 나는 멍청하게 입만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리님이, 얼마 전에 ‘임시 전담 가이드’로 존중해달라고 하셨죠?”

“아… 네. 그런 말을 하긴 했죠.”

“그럼 저를 ‘임시 전담 에스퍼’로 존중하는 건 이런 거예요?”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자니, 도지윤이 내 뺨을 잡아온다.

“대리님. 전 대리님을 제 ‘전담 가이드’로 존중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보세요. 현장에서 지랄할 수 있었지만, 대리님이 난감해할 것 같아 여기에서 이러고 있잖아요.”

“…그… 저… 감사합니다?”

도지윤은 만인 앞에 나에게 키스했던 사건은 잊어버렸나 보다. 하지만 나는 도지윤의 웃으면서 조곤조곤 말하는 박력에 밀리고 있었다.

“그러니 벗으세요.”

“네?!”

“저를 ‘임시 전담 에스퍼’로 존중한다면, 벗어요. 제 가이드가 멀쩡한지 확인해야겠어요.”

실은 아까 현장에서부터 옷 찢고 싶은 거 참고 있었어요. 도지윤이 조용히 덧붙였다.

나는 도지윤에게 눈빛으로 열심히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하는 말을 쏘아 보냈지만, 제대로 전달은 되지 않았다. 도지윤은 조용히 웃으며 나를 보고만 있었다. 직접 옷을 벗으라는 듯이.

분위기에 압도당해, 나는 주춤주춤 손을 움직여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속살이 드러났지만, 우리 사이에 성애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단추를 다 풀고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나는 왠지 선생님 앞에서 혼나는 학생의 기분이 되어 눈을 바닥으로 떨굴 수밖에 없었다.

도지윤은 얼굴에 짓고 있던 맹한 웃음을 지우고 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마치 예술품에 흠집이 났는지 안 났는지를 검사하듯이, 솜털 하나하나 멀쩡한지 확인하듯 진중한 눈길로 내 팔을 살폈다. 그러다 팔뚝에 괴수의 손톱이 낸, 가느다란 흉터를 발견하자 엄지로 그 부분을 살짝 쓸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스친 거라 피도 거의 안 났습니다.”

내 말대로 그 상처는 상처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했다. 너무 가늘어서 이미 딱지가 져 있었고, 괴수가 아니라 책상에 긁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흉이었다.

도지윤은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엄지로 연신 그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내려가 괴수를 피해 넘어지면서 쓸렸던 손바닥의 상처도 확인했다. 도지윤은 왼손의 손바닥 상처도, 옆구리에 살짝 긁히고 퍼렇게 올라오고 있는 멍도 꼼꼼히 확인했다.

상처를 확인할 때마다 엄지로 그 부분을 느리게, 여러 번 문질러댔다. 나는 간지럽기도 했지만, 자꾸 두근대는 심장이 들킬까 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지윤은 한참을 내 상체의 상처들을 확인하면서 허리를 굽히더니, 이제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리님. 바지도요.”

옷을 벗으라고 요구하는 도지윤의 얼굴은 매우 담담했지만, 나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도지윤의 차분한 기다림에 나는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내렸다. 드로즈 한 장만 입고 도지윤 앞에 서자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허공만 노려보았다.

부끄러운 내 마음과 대조적으로, 도지윤은 여전히 진지하게 내 몸을 살피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 다리를 살폈다. 허벅지에 멍이 올라오고 있는 부분과 무르팍이 깨진 부분을 상체와 똑같이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도지윤의 몸이 점점 내려가고 급기야 손이 발가락까지 내려가려 하자, 나는 참지 못하고 도지윤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도지윤 에스퍼. 이제 그만….”

그러나 내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도지윤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내 허벅지를 껴안아 고개를 처박았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내려다본 도지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어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도지윤 에스퍼. 미안합니다.”

나는 순간, 현장에서 주 주임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생사가 불분명한, 그러나 죽음이 가까운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차라리 없길 바란다는 내용의 대화가.

도지윤도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섬뜩했을까. ‘각인’만큼은 아니지만, 고작 계약서에 얽힌 ‘임시 전담’일 뿐일지라도, 두려웠을까.

나의 사과에도 도지윤은 움직임도 없이 내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나는 도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벼이 생각했던 ‘임시 전담’이라는 글자가 갑자기 무거워져 심장으로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도지윤 에스퍼.”

그와 동시에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렇게 슬퍼하고 두려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입안이 달콤해졌다.

도지윤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촉촉해진 눈망울이 어여뻤다.

“대리님. 저 버리지 마세요.”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도지윤의 말이 ‘내가 자신에게 등을 돌려 홀로 남겨놓지 말기를, 내가 죽어 저를 혼자 두지 말기를’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입을 몇 번 달싹거렸다. 그리고 한숨같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안 버립니다.”

“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그건 때때로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다치지 마세요.”

“그것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도지윤은 다시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조용한 방 안에 도지윤이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내게 붙어있는 도지윤을 떼어내고, 쪼그려 앉아 도지윤에게 눈을 맞추었다.

“도지윤 에스퍼. 미안해요. 제가 너무 도지윤 에스퍼를 생각 못 했어요.”

그러나 내 말에 도지윤은 처연하게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기죽고 슬픈 도지윤의 모습에 내 심장도 같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내가 도지윤의 고개를 잡아 들어 나를 바라보게 하자, 마주하는 물기 어린 시선에 나는 충동적인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요.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혼자 두고 갈 일은 없을 겁니다.”

“…….”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다치려고 하면 도지윤 에스퍼가 오늘처럼 지켜주면 되잖아요.”

“…오늘 제가 있었지만, 대리님이 다쳤잖아요.”

도지윤이 내 손을 입으로 잡아끌며, 손바닥에 난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도지윤 에스퍼. 더럽습니다.”

도지윤의 고개를 다른 손으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오늘 도지윤 에스퍼가 아니었으면, 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충분히 절 지켜준 거예요.”

“…….”

“지금 제 몸에 있는 이런 상처들은, 아니. 상처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네요. 어쨌든 이런 건 침 한 번 바르면 낫습니다.”

도지윤이 내 옆구리에 살짝 긁힌 상처를 쳐다보며 느리게 문질렀다. 간지러웠지만 심각한 분위기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야 했다.

“그럼 핥아도 돼요?”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개수작을 부리는 도지윤이 조금 귀여웠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핥더라도 씻고 핥으세요.”

도지윤이 내 눈을 마주 보며, 살짝 웃었다. 나는 그 얼굴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아까 가이딩 달아 놓는다면서요.”

그러자 내 말뜻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도지윤이 두 눈을 깜빡이더니, 곧 이해했던지 뒤에서 빛이 쏟아져 내릴 듯 활짝 웃었다. 역시 미인은 웃는 게 어울린다.

나는… 모르겠다. 도지윤에 대한 감정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와 닿아있는 온기가 좋았다.

또한 힘들었지만 좋았던 저번의 가이딩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니,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좋았던 기억만 크게 남아있긴 하다.

내가 다쳐서, 내가 자기를 버릴까 봐 저렇게 침울해하고 슬퍼하는 미인을 그냥 두는 것도 못 할 짓이다. 나는 그저 도지윤을 위로해주고,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어느새, 다시 맹하게 웃음 짓고 있는 도지윤이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귓바퀴를 느리게 문질렀다.

“대리님. 제가 씻겨 드릴게요.”

나는 비웃음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씻는 건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요.”

나는 평소와 똑같이 개수작을 부리는 도지윤을 보며 웃었고, 도지윤도 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 씻기 전이었지만, 가슴에 따뜻한 물이 들어가 찰랑찰랑대며 간지럽히고 있었다.

도지윤은 나를 씻겨준다고 우겼고, 나는 한두 번 거절하는 척만 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넘어가 주었다.

***

도지윤은 욕실에 들어와, 착실히 나를 씻기는 척하더니만 그것은 샴푸까지였다. 아니, 지금도 씻기고 있는 거긴 한 건가.

도지윤은 샤워 볼에 바디워시를 쭉 짜더니 거품을 내어 내 몸을 문질렀다. 거의 애무였다.

“아. 도지윤 에스퍼. 거긴 좀. 아흣.”

샤워 볼이 넓게 내 가슴과 배를 문지르더니, 배에 있던 손이 올라와 젖꼭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유두 주위에 몽글몽글하게 퍼져 있는 거품을 살살 파헤치자, 유두가 금세 꼿꼿하게 섰다.

샤워실에 달콤한 아몬드 향기가 퍼져나갔다.

“이게… 읏. 무슨 샤워예요!”

내가 작게 항의했지만, 도지윤은 말없이 흩어져있던 거품을 모아 다시 가슴 근처를 문질렀다. 흥분해 예민해진 유두는 거품의 폭신하고 작은 자극에도 허리를 뒤틀게 만들었다.

도지윤은 손끝으로 유두를 툭툭 건드리다 간질간질하게 굴리기 시작했다. 귓바퀴를 한참 괴롭히던 혓바닥도 젖은 살결을 따라 내려와,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리님….”

나는 점점 달아오르는 몸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도지윤의 팔만 붙잡았다. 도지윤이 내 유두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자 찌르르 등허리가 떨려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읏. 흐아!”

만질 것 없는 편평한 가슴이 뭐 그리 좋다고, 도지윤은 손바닥으로 연신 쓸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지윤의 손이 유두와 유륜을 간지럽히면 몸이 긴장감에 움츠러들었다. 도지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불을 지필 수 있는지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자기가 가지고 노느라 탱탱하게 불어버린 유두를 도지윤이 세게 비틀자, 아픔 속에서도 쾌감이 느껴져서 뒤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도지윤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

도지윤은 반대쪽 유두로 손을 옮김과 동시에 내 배를 느리게 문지르던 샤워 볼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도지윤은 개처럼 연신 귀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끈질기게 핥았다. 한 손으론 샤워 볼로 내 페니스를 주변을 느리게 문지르며 다른 손으론 젖꼭지를 세게 잡아당겼다.

“읏. 저… 젖꼭지. 당기지. 아흐.”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오는 자극에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끝의 말은 마무리하지 못해 더해달라고 조르는 모양새였다.

욕실이 간간히 흘러나오는 내 신음과 도지윤이 손장난하느라 인해 슥슥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도지윤은 가슴을 만지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턱을 붙잡더니 고개를 돌리게 해 키스했다.

다급하게 붙여오는 입술에 나는 반가이 입을 열어 맞이해주었다. 불편한 자세로 도지윤의 혀를 받자니, 턱을 타고 침이 줄줄 흘렀고 도지윤의 말캉한 혀가 입천장과 혓바닥을 긁을 때마다 내 목을 울리며 신음이 뛰쳐나왔다. 숨이 막혀 도리질하며 도지윤의 입술을 피하자 도지윤이 강하게 내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흣!”

고통에 작게 신음을 흘리자 도지윤은 미안하다는 듯이 다시 눈가에 뺨에 턱에 가볍게 입술을 쪼았다.

이미 완전히 기립한 내 분신이 느껴졌다. 도지윤은 왼손으로 내 페니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내 허벅지를 샤워 볼로 느리게 문질렀다. 내 페니스에서 떨어진 거품이 느리게 내 몸을 타고 흘러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내가 이미 사정을 한 것 같았다.

도지윤이 샤워 볼을 허벅지 안쪽과 페니스 사이의 그 애매한 곳을 문질렀다. 까끌까끌한 샤워 볼의 감촉에 화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도지윤이 내 페니스를 잡고 있던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도지윤의 손가락은 거품 때문인지, 내가 흘린 쿠퍼액 때문인지 미끌미끌 부드럽게 내 귀두를 훑고 있었다.

“읏…! 하으.”

나는 도지윤의 품에 갇혀 한 손은 도지윤의 팔을, 한 손은 욕실 벽을 손끝으로 지지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도지윤의 손이 더 빨리 내 페니스를 흔들자, 욕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뒤로 돌려 도지윤의 페니스를 잡았다.

“아.”

도지윤이 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작은 신음을 뱉었다. 그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도 도지윤의 귀두를 느리게 문질렀다. 이미 완전히 발기해있던 것은 한 손으로 잡기에 버거웠지만 최선을 다해 도지윤의 것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살짝 놓치면, 도지윤의 페니스가 내 엉덩이골을 문질렀다. 그 감촉이 너무 좋아 목을 울리며 신음하자 도지윤이 내 어깨를 깨물며 통통 웃었다.

“넣고 싶어요, 대리님?”

“입. 다물어. 요.”

신음에 헐떡거리며 도지윤을 노려보았지만,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도지윤은 내 회음부와 허벅지 안쪽을 문지르던 샤워 볼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비누 거품이 가득 묻은 손가락 하나를 내 내부로 쑥 밀어 넣었다.

“윽.”

이물질이 들어온 불편감에 미간을 찌푸리자, 도지윤이 애교를 부리듯 고개를 내 목덜미에 부비적대었다.

도지윤의 손가락은 내부를 긁어대며 꿈틀대고 있었다. 좁은 내부는 손가락을 꽉꽉 물어, 도지윤의 검지가 어떻게 생긴지도 나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내부를 휘젓던 손가락에 익숙해지자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그리고 도지윤은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욕조의 턱에 올려놓았다.

“뭐, 뭐.”

깜짝 놀라 미끄러질까 봐 도지윤의 페니스를 잡고 있던 것도 놓치고 다시 욕실 벽에 손을 디뎠다.

“대리님 구멍에 내 손가락이 들락날락하고 있어요.”

도지윤의 말에 순간 고개를 아래로 내렸지만,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내 페니스를 붙잡고 있는 도지윤의 손뿐이었다. 나는 그저 차가운 욕실 벽에 이마를 비비며 도지윤이 손가락으로 내부를 쑤시는 이물감을 견뎌야 했다.

“이따 내 좆도 씹어댈 텐데… 나중에 욕실에 거울 달아 줄게요.”

나만 보기 아까워요. 도지윤이 다정하게 말하며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도지윤은 손가락을 이용해 내 내부를 넓혀나갔다. 뻐끔대며 그의 손짓에 따라 개폐운동을 반복하는 게 느껴질 정도가 되자, 도지윤은 곧이어 손가락 한 개를 더 넣어 쑤셔왔다.

“마음 같아서는 대리님 느끼는 데만 쑤시고 싶은데… 대리님은 너무 잘 느끼고, 너무 빨리 지쳐서….”

평이하게 말하는 도지윤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저 개새끼가. 내가 왜 빨리 지쳐! 네가 날 너무 몰아붙인 거지!

간신히 도지윤의 손가락이 네 개가 들어가자, 위아래로 왕복 운동하듯이 쑤셔댔다. 그 감각만으로도 살살 간지러움이 피어올라 나는 허리를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좀 더 큰 걸 원했다. 내가 느끼는 곳은 더 깊숙한 곳에 있었고, 도지윤의 손가락으로 처박듯이 넣어야 한다. 내가 몸 달아 하자 도지윤은 손가락을 다 빼내었다. 뻐근한 감각들이 사라지고 내 구멍이 스스로 오므려 들며 도지윤을 원했다.

“미안해요. 대리님. 더 풀어주고 싶었는데, 나도 급해서….”

도지윤은 내 구멍에 귀두를 대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가장 두꺼운 부분이 천천히 내 몸을 벌리고 들어오자, 이미 기대에 꿈틀대던 내벽이 도지윤의 페니스를 빨아들였다.

“내 좆 잘 빠네요.”

도지윤이 내 귀에 대고 신음을 내뱉자, 나도 기대감에 급격히 흥분했다.

도지윤과 키 차이 때문에 나는 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었고, 벽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도지윤은 자신의 페니스가 내 안으로 끝까지 들어오자, 벽에 기대고 있던 내 몸을 떼 버렸다.

“헉. 도지윤. 아으! 핫!”

나는 도지윤의 페니스에 내 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내 전립선에 도지윤의 것이 닿아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도지윤의 것은 너무 커서 어떻게 들어오든 나를 흥분시켰다.

도지윤은 내가 욕실 벽에 몸을 기대지 못하게 한 손은 가슴을 지지하고, 다른 한 손은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서는 강하게 추어올렸다.

“아흐! 읏!”

“대리님. 이렇게 빨리 흥분하면 안 돼요.”

도지윤은 한 번에 내가 느끼는 지점을 찔러 올리며, 생각보다 뻑뻑하지 않은 내부에 웃으면서 말을 했다. 도지윤이 얄밉지만 맞는 말을 해서, 나는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어야 했다. 이미 잔뜩 흥분한 탓에, 도지윤이 한두 번 쑤셨을 뿐인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철퍽철퍽 소리가 나고 있었다.

사실은 도지윤과 샤워를 시작했을 때부터, 도지윤의 페니스를 받아들이고 싶어서 몸이 간지러웠었다.

“아흣. 앗. 아아.”

뒤꿈치를 들고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마다, 나는 더 깊숙이 도지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마다 쾌감이 등허리를 타고 북처럼 둥둥 울려대고 있었다. 그 감각이 죽을 것같이 좋아서 목 놓아 신음을 내뱉었다.

도지윤이 쑤셔 박을 때마다 나는 점점 몸에서 힘이 풀렸고, 결국 거의 도지윤에게 뒤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젖혀진 고개를 따라 흐른 눈물을 도지윤이 혀로 핥아 올렸다.

배까지 당겨 올라간 내 페니스가 방출을 원하고 있었다. 도지윤을 붙잡고 있던 손을 힘겹게 떼어내어 내 페니스를 붙잡으려 하자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아 방해했다.

“안 돼요. 대리님. 뒤로만 가야지.”

“으응. 핫. 가. 가고 싶어. 아으.”

도지윤이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아래서 올려치자, 눈에서 하얀빛이 펑펑 터졌다.

“벌이에요. 대리님.”

이제 도지윤은 완전 제 페이스를 되찾았는지, 개소리를 당당히 내뱉었다. 아까의 처연한 모습은 내 상상 속의 사건이었나 보다.

“대리님. 여기 쑤셔주는 거 좋아하죠?”

도지윤은 낮아진 목소리로 평소와 똑같은 호흡으로 말을 했다. 힘든 건 나뿐이지. 시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욕실 벽에 튕겨져 나온 내 신음소리가 웅웅거리고 있었다. 도지윤의 말처럼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쾌락의 끝에 도달하지 못해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갈듯 말듯 가지 못해, 그러나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도지윤만이 구원이라는 듯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먼저 사정한 쪽은 도지윤이었다. 도지윤이 내 내부에 길고 뜨겁게 사정을 하자, 철퍽철퍽 거리던 소리가 이제는 점성을 달리해 들렸다. 찔꺽찔꺽.

“아, 아!”

도지윤이 내 귀에 대고 한숨같이 신음을 내뱉자, 나는 어이없게 울컥하며 사정했다.

“아. 대리님. 너무 조이지 마요.”

도지윤은 내 배를 강하게 잡으며, 사정한 제 성기를 서너 번 더 내 안으로 찔러 넣었다. 길고 긴 쾌감의 해방으로 넋이 나간 나는 입만 멍청하게 벌린 채 온몸을 경련했다.

도지윤이 잡고 있던 내 허리를 놓아주자, 나는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고 도지윤이 나를 강하게 잡아주었다.

그리고 아직 내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던 도지윤의 페니스가, 다시 착실히 크기를 키워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경악에 찬 표정으로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빼!”

“벌 줄 거예요. 대리님.”

도지윤은 맹하게 웃음 지으며 개소리를 지껄였다. 욕을 하기 위해 입을 열자, 도지윤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가이딩 하고 있어요. 대리님?”

나는 도지윤이 느릿느릿하는 질문에 당황하여 ‘시발’이라는 욕설을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올렸다.

신입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는 아까 ‘가이딩 달아 놓는다면서요.’라고 말했던 내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이딩 때문이에요. 딱 한 번만 더하는 거예요.”

“네.”

나의 체념 어린 말에 도지윤은 밝은 목소리로 냉큼 대답했다.

“도지윤 에스퍼. 그런데 서서 못하겠어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침실로 가서 ‘가이딩’ 마저 해요.”

“안 돼요. 아직 안 씻었잖아요.”

이 미친놈이.

“이미 다 씻었잖아요!”

그러자 도지윤이 손을 들어 아직 내 가슴에 흔적을 보이는 거품을 느리게 문질렀다.

“거품 남아 있잖아요.”

“그럼 물로 헹구고. 아흣. 아. 좀!”

도지윤이 거품이 남아 있는 유두를 세게 비틀자 배 속에 벌떼가 웅웅거리는 듯한 감각이 들어, 이리저리 움칠거렸다.

“대리님. 오늘 왜 이렇게 흥분해서 재촉해요?”

나도 모르게 도지윤의 페니스를 꽉꽉 조이자, 도지윤이 신음을 내뱉으며 내 몸을 욕실 벽으로 붙였다.

“도지윤! 힘들다고! 좀 다른 체위로!”

도지윤은 내 말을 들어 처먹지도 않은 채, 내 상체는 욕실 벽에 붙이고 내 허리를 붙잡고 허리짓을 다시 시작했다. 도지윤이 내 안에 싸놓은 정액이 아까 거품이 흘렀던 것처럼 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지윤은 욕조 벽에 기대어 버티는 내 뒷목을 길게 핥았다.

“대리님. 난 대리님한테 너무 약한 거 같아요.”

허리 아래로는 가차 없이 내가 느끼는 데만 찍어 올리는 놈이 개소리를 뱉었다.

“으핫, 야, 약한 건. 아흐읏.”

원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약한 건 주둥이뿐 아닙니까?’였지만 쾌감에 혀가 꼬여 말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벌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지윤은 페니스를 끝까지 뺐다 단숨에 처박아 올렸다. 나는 그 말에 대답도 못 한 채 입만 벌리고 신음했다. 그의 검붉은 페니스가 귀두만을 남기고 쑥 빠졌다가 음모와 불알이 부딪힐 만큼 강하게 밀어 올려졌다.

도지윤이 욕실 벽에 붙잡던 내 한 손을 떼어, 내 배 위로 올렸다. 그가 내 배 속으로 페니스를 처박을 때마다 꿈틀대는 도지윤의 것이 느껴졌다.

“핫. 으앙. 시… 싫어.”

나는 너무 흥분해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마구 질러대고, 자꾸 미끄러지는 욕실 타일을 손가락 끝으로 긁어대었다. 도지윤은 자꾸 무너지려는 내 배를 팔뚝으로 감싸고 얕고 빠르게 쑤셔댔다.

도지윤이 한 손으로 내 유두를 꼬집고 비틀자 내 스스로 도지윤의 것을 더 꽉 무는 것이 느껴지고, 그가 욕설을 내뱉는 것이 들렸다.

“시, 싫어. 아…! 살살, 읏.”

나는 무엇이 싫은지도 모른 채, 열이 오른 얼굴을 차가운 욕실 벽에 비벼댔다. 그리고 도지윤이 다시 한번 크게 쳐올리자, 나는 숨도 못 쉬고 부들부들 떨며 사정했다. 차가운 욕실 벽에 짓눌린 내 성기가 미끈거리는 하얀 액체를 토해내고 있었다. 도지윤의 페니스를 물고 있는 내 구멍은 너무 뜨겁고 욕실 벽은 너무 차가워 그 간극에 몸을 떨고 있는데 다시 도지윤이 퍽하고 쳐올렸다.

“아흣. 아! 우, 움직이지 말… 흐읏.”

사정으로 경련하는 내부에 도지윤이 더 흥분했던지 도지윤은 다시 허리짓을 했다. 나는 사정을 한 후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 주는 쾌락에 눈물만 줄줄 흘렸다. 욕실 벽에 기대고 있던 몸도 다리에도 힘이 풀리자, 도지윤이 날 욕조 바닥에 엎어놓고 엉덩이만 들게 해 박아대기 시작했다.

좁은 욕조 바닥을 긁으며 언어가 되지 못하는 신음만 흘리며 눈앞에 쾌감이 번쩍거리는 것만 속수무책으로 느꼈다. 도지윤이 퍽퍽 박아대는 물기 어린 소리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그 순간 누가 욕실의 전등을 내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처럼, 아니 뇌로 쾌감을 들이붓는 것처럼 눈앞이 온통 새하얘졌다. 동시에 도지윤이 위에서 신음을 흘렸다.

“흣. 싸지도 않고. 가는 거예요?”

나는 도지윤이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고, 온몸이 잘게 떨려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눈만 크게 뜨고 있자 도지윤이 허리를 두어 번 박더니 사정하기 시작했다. 도지윤의 내뱉은 뜨거움 또한 내 몸을 자극해대고 있었다.

“더 쑤셔 박고 싶었는데, 너무 꿈틀거려서 참을 수 없었어요.”

도지윤이 고개를 숙여 내 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잘했어요.”

등 뒤에서 웅얼거리며, 무엇에 대한 칭찬인지 모를 말을 했다. 도지윤이 느리게 빼내는 페니스를 따라 뜨거운 정액이 왈칵 쏟아져 내리자, 도지윤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구멍을 막았다.

“아쉽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에 가까스로 힘을 주는데, 몸이 뒤집혔다. 좁은 욕조에서 몸을 뒤집을 수 있도록 도지윤이 해준 것이다.

“한 번 더 해도 돼요?”

“꺼져. 이 새끼야.”

나는 존댓말도 까먹고 본능이 소리치는 대로 내뱉었다. 내가 이 새끼를 동정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생각했다니. 나 스스로 대가리를 깨야겠다. 도지윤은 그런 내 말에 잠시 시무룩해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순진하게 물어봤다.

“그런데 대리님. 가이딩은요?”

아 씨발. 이 새끼 지능적으로 이러는 건가?

“안 해. 안 해요.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안 해요.”

더 이상 섹스는 못 할 것 같다. 힘들어서 안 되겠다. 드라이로 간 것도 충격인데 이 이상 내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순 없다.

정상위로 딱 한 판만 하자는 도지윤에게 나는 온갖 쌍욕을 하며 꺼지라고 했다.

“그럼 씻겨 드릴게요.”

“너 못 믿겠으니 얼른 꺼져요.”

“대리님 몸에 힘 안 들어가잖아요.”

옥신각신하다가, 도지윤이 정말 씻는 것만 도와주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도지윤이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빼낼 때는 얼굴만 붉게 물들이고 그의 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지윤은 더 이상 개수작 부리지 않고 내 몸과 본인의 몸을 열심히 씻고 좁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같이 몸을 풀었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도지윤은 연신 내 뒷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지분거렸고, 난 모기가 앵앵대는 기분에 매우 귀찮았으나 대거리할 기운도 없어서 내버려두었다.

나른하게 몸이 풀리는 기분에 욕조에서 잠이 들었으나, 다시 일어났을 때는 보송하게 말려져 침대에서 도지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시 잠들었다 눈을 뜨자 새벽이었다.

약간 아릿한 허리를 매만지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두 시였고,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었기에 오늘 늦게 자든 잠을 안 자든 상관은 없었다.

“대리님. 안 자요?”

도지윤이 어둠 속에서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자, 도지윤을 잠시간 말없이 쳐다보았다.

하. 이 새끼.

피곤했던 오늘 하루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괴수에게 잡혀간 나를 구해주던 도지윤. 내 부탁에 전투 현장을 정리하고 왔던 도지윤. 나에게 버리지 말라고 울먹였던 도지윤. 다치지 말라고 눈썹을 내리깔았던 도지윤.

나는 ‘시발!’을 외치며 도지윤과 정상위로 가이딩을 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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