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 3권-Chapter 10. (10/21)

Chapter 10.

가이드 1팀의 서열 뒤에서 두 번째인 주진호 주임은 요즘 고민이 생겼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가이드 1팀의 빛과 소금이요, 4구역 센터 미각인 가이드팀을 통틀어서 짬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선배인 이재하 대리님에 관한 일이었다.

이 대리로 말할 것 같으면 고참이 없어 온갖 궂은일, 힘든 일, 남들 하기 싫은 일을 다 떠맡고 있었던 가이드 1팀에 그야말로 보물 같은 가이드였다. 언젠가 가이드 실장과 함께한 가이드 1팀 회식 자리에서 주 주임은 회사 생활에 대한 어려움과, 사수가 없어 힘든 서러운 점을 펑펑 울면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까지 울 생각은 아니었지만, 테이블 아래로 김하영 주임이 주 주임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었기에 안 나오던 눈물도 쏙쏙 나왔다.

그 자리에서 가이드 실장은 네 명의 주임에게 고참급을 꼭 한 명 넣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넷 다 믿지 않았다. 입사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 관리직의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희망이란 없어. 이 쓰레기 같은 회사.’를 입에 달고 다니며 다크서클 가득한 얼굴로 다닌 지 얼마 안 돼서, 가이드 실장은 정말로 대리급을 가이드 1팀으로 발령 냈다. 그것도 1구역 출신의 엘리트를!

그 이후로 가이드 1팀의 위상이 180도로 바뀐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언제나 재수 없고, 일 떠넘기기 전문가에 꼰대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2팀의 김 대리가 1팀 쪽으론 기침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항상 만만한 가이드 1팀이 더 이상 그 지랄 같은 성미를 안 받아주자, 김 대리는 재빠르게 2팀의 박 주임으로 타겟을 변경했다.

“박 주임! 보고서 제대로 쓴 거 맞아?”

“넵. 김 대리님. 뭐 잘못된 게 있나요?”

2팀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 하니, 오늘은 보고서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나 보다.

검은색 결재판에 곱게 끼워진 보고서를 읽던 김 대리는 화를 버럭버럭 내며, 보고서의 작성자 박 주임을 불렀다.

“너 보고서 제대로 검토한 거 맞아?”

“안에 들어간 통계 자료랑 정보들은 지원팀에서 제대로 받아서 작성했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박 주임의 목소리를 듣자니 주 주임은 같이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박 주임과 주 주임은 같은 입사 동기로, 험난하기로 유명한 4구역 센터에 같이 발령받아 여기저기 지랄해대는 김 대리를 씹으며 더욱 돈독한 동기애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그런 거 보고 말하는 건 줄 알어?”

“네? 그럼 뭐가….”

“하. 이놈 자세가 안 되어 있네.”

김 대리는 결재판을 책상에 서너 번 탕탕 내리치며 박 주임을 압박하고 있었고, 박 주임은 자신이 뭘 잘못한지도 모른 채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알려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박 주임의 입에서 잘못을 시인함과 동시에 공손하게 김 대리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김 대리는 박 주임이 쓴 보고서를 펼쳐 눈앞에 들이밀었다.

“봐봐. 잘못한 거 없어?”

박 주임은 빠르게 눈으로 보고서를 훑어 내렸지만, 아직도 본인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박 주임. 입사 몇 년 차지?”

“이제 막 1년 넘었습니다.”

“하. 이래서 신입은 안 된다니까.”

그리고 그 신입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긴 것은 김 대리 본인이었다.

“봐봐. 자간이 왜 여기랑 여기가 달라. 그리고 줄 간격이 너무 넓지 않나? 그리고 문장이 이렇게 중간에 끊어지면 안 되지! 이거 여기로 내려!”

김 대리는 보고서 내용에 대한 검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형식에 대한 지적과 함께 빨간 펜을 죽죽 긋고 있었다. 보고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체, 글자 크기, 자간, 들여쓰기 등등에 대해 지적받은 박 주임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저. 대리님. 혹시 내용에서 말씀해 주실 건…?”

“대충 읽어보긴 했는데, 이런 내용보다는 더 참신한 내용 없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한눈에 딱 들어오면서 전문성 있게! 내용도 좀 더 수정해봐.”

멀리 앉아있는 주 주임은 ‘아니 시발.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쉽게 이해하지만, 전문성 있게는 어떻게 쓰라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김 대리에게 깨지고 있는 박 주임의 메신저에 [ㅠㅠㅠㅠㅠㅠ]만 쳐서 보내고 있었다.

혹시나 욕이라도 써서 보냈다가 김 대리가 보기라도 하면 정말 좆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박 주임. 위에 보고하는데 결재판에 서류를 이렇게 끼워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김 대리의 지랄은 끝나지 않았다. 한참을 김 대리의 지랄을 받아주던 박 주임은 드디어 빨간 펜으로 너덜너덜해진 결재판을 돌려받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박 주임은 굳어진 표정을 두 손으로 매만져 간신히 웃는 얼굴로 만든 다음, 서랍에서 초코파이 두 개를 꺼내 들고 김 대리에게 다가갔다.

“대리님.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시느라 당 떨어지셨을 텐데 이거 드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네는 박 주임을 보며 김 대리는 ‘뭐야. 이 새끼는?’ 하고 떨떠름해했지만, 자신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내오는 후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 어어. 그래. 내가 박 주임이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나중에 연차 더 쌓이면 이게 다 자산이 될 거야.”

본인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김 대리는 박 주임이 주는 초코파이를 받아들고 바로 한 개를 까먹었다.

그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며 비위를 맞춰주다 자리로 돌아간 박 주임을 보며, 주 주임은 자신의 동기가 존경스러웠다. 저런 상황에서 웃으면서 상사에게 간식을 권해야 진정한 사회인이구나!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자신도 나중에 실천하리라 다짐했다.

[ㄱㄱ]

박 주임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주 주임이 보내온 메신저에 답장을 했다. 곧바로 박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자, 주 주임도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박 주임과 주 주임은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접선했다.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넌?”

“카페모카.”

박 주임이 본인의 아메리카노와 주 주임의 카페모카를 주문해서 음료를 받아든 뒤, 주변을 한 바퀴 살폈다.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자 래퍼에 빙의라도 한 듯 김 대리에 대한 욕설과 저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들어 미어캣처럼 주변을 휙휙 살펴, 본인의 안전이 확보되었는지를 확인했다.

한참을 박 주임이 김 대리를 욕하는 것을 들어주다 주 주임은 아까부터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너 김 대리한테 초코파이는 왜 준 건데?”

김 대리를 향한 저주의 깊이를 보니, 박 주임은 김 대리를 확실히 증오했다. 도저히 초코파이를 권해주는 인류애적인 모습을 보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박 주임이 씩 웃었다.

“나 김 대리한테 날마다 초코파이 한 개씩 주는데, 몰랐냐?”

그러자 주 주임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김 대리 졸라 싫어하는데 초코파이를 왜 줘?”

“그 새끼 그거 먹고 고지혈증으로 뒈져버리라고.”

이 대리가 가이드 1팀에 온 이후부터 박 주임을 향한 김 대리의 지랄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박 주임은 특단의 조치로 ‘김 대리 초코파이 암살 작전’을 펼친 것이다. 날마다 초코파이 한 개씩을 줘서 고지혈증으로 뒈지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초코파이뿐만 아니라 달달한 간식이 생기면 모조리 김 대리에게 바쳤다. 작전은 성공적이어서 3개월이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김 대리는 6킬로그램이 쪘다고 한다. 원래는 하루에 한 개씩이지만, 오늘은 김 대리의 지랄이 너무 심해 초코파이를 두 개나 줬다.

김 대리를 향한 박 주임의 존경의 눈빛은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거기까지 듣자니 주 주임은 자신의 몫으로 놓인 카페모카를 바라보다, 옆으로 슥 밀어 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던 박 주임은 그러다가 갑자기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주 주임은 자신의 동기가 드디어 돌아버렸나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 주임은 다시 테이블에 납작 엎드려 주 주임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에 김 대리 다른 센터 간대. 그래서 신입 온다나 봐. 내가 김 대리를 암살하려는 게 들킨 걸까?”

주 주임은 그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며, 입사 때만 하더라도 동기들 중에 에이스였던 박 주임이 왜 이렇게 변해버렸나 세월을 야속해했다. 그래도 막내를 벗어난 것에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씁쓸한 동기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다시 가이드 팀으로 돌아왔다. 가이드 1팀으로 돌아오자 이 대리가 초코파이를 까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요! 대리님!”

주 주임은 존경하는 이 대리님이 고지혈증으로 뒈져버리는 모습은 절대 상상할 수 없기에 몸을 날려, 이 대리 손에 있던 초코파이를 뺏어 버렸다. 당황해하는 이 대리의 얼굴을 보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2팀의 김 대리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주 주임 거였습니까? 제 자리에 있기에 먹어도 되는 건 줄 알았습니다.”

두 눈을 껌뻑이며 사과를 하는 이 대리의 모습에 주 주임은 초코파이가 아니라 초코케이크라도 가져다 바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곧바로 이 대리의 책상에 왜 초코파이가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누군가 이 대리의 암살 작전을 벌이고 있는 건가 의심했지만, 우리 이 대리님에게 감히 그럴 짓을 벌일 놈은 없었다.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 며칠 전부터 이 대리를 사모하는 에스퍼 놈들이 가이드팀을 들락날락했던 것이 기억났다. 인생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우리 이 대리님 건강의 적신호에 불을 켜는지도 모르고, 무식한 에스퍼 놈들이 자기 기분에 취해 아무거나 선물해 주는 것이다. 주 주임은 다짐했다. 앞으로 이 대리님 책상 위에 올라가는 에스퍼 놈들의 선물, 특히 당류는 다 가져다 버리기로.

이 대리님의 혈관 건강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주 주임은 그날 결심했다.

***

주 주임이 걱정하는 것은 이 대리의 혈관만이 아니었다. 실은 이 대리의 건강에 가장 큰 주적은 초코파이 따위가 아니었다. 초코파이야 주 주임이 가져다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저건 버릴 수도 없었다. 주 주임은 어느새 제자리인 양 이 대리의 뒤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지윤은 귤을 까고 있었다. 귤 알맹이에 붙은 하얀색 껍질까지 깔끔하게 떼어낸 도지윤이 이 대리의 입가로 가져다주자, 이 대리는 보고서를 쓰다가 입만 벌려 낼름 귤을 받아먹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고, 위에서 위액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4구역에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우리의 빛인 이 대리님과 저 미친개 도지윤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 말이다. 오전 중에도 가이딩을 하다, 한 에스퍼가 눈가를 벌겋게 물들이고 주 주임에게 물어보았다. 진짜 둘이 연애하느냐고. 자신은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에스퍼는 그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미 실연 모드였다.

왜 하필 미친개냐고 울먹이는 에스퍼를 보며, 주 주임도 같이 울고 싶었다.

왜 하필 미친개야.

미친개는 이 대리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거의 24시간 밀착 감시를 하고 있었다. 타 에스퍼의 가이딩을 따라나서다 못해,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매주 이 대리가 가이딩한 에스퍼들의 목록을 따로 받아보고 있었다. 그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에스퍼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S급 에스퍼와 훈련해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기대감에 흥분해 있었다.

도지윤이 저렇게까지 전담 마크하자 이 대리를 사모하는 에스퍼들은 더더욱 은밀하게 어둠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몰래 이 대리의 책상에 초코파이 같은 간식을 가져다 놓는다든지(물론 주 주임이 다 가져다 버리고 있다), 일부러 이 대리와 자주 마주치기 위해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든지. 혹은 집 앞으로 찾아가려고 하는 에스퍼 놈들도 있었지만, 번번이 도지윤에게 걸려 묵사발이 났다는 소문만 들리고 있었다.

에스퍼들의 얼굴을 기억하기에 이 대리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신경을 안 썼고, 예쁘장한 얼굴의 에스퍼들은 도지윤이 그 에스퍼에게 직접, 그리고 IT팀에게 협박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 주임이 보기에도 이 대리는 엄청난 얼빠였다.

도지윤은 이 대리의 앞에서는 순하게 미소 짓다가, 안 보이는 뒤에선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리를 ‘임시 전담 가이드’에서 ‘전담 가이드’로 만들기 위해, 도지윤이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센터의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가이드 실장이 이 대리에게 화풀이를 해서 도지윤이 맞지랄을 하는 바람에, 가이드 실장과 틀어져 버리고 실장을 통해 ‘전담 가이드’로 올리는 방법은 실패했다.

이 대리를 ‘전담 가이드’로 만들기 위해 센터의 요구에 어느 정도 순응하던 도지윤은 그 이후로는 미련 없다는 듯이 센터의 모든 요구를 개무시했다. 대신 이 대리의 뒤를 개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녀 이 대리를 기겁하게 하고 있었다.

주 주임은 도지윤을 이 대리에게 떼어놓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단 도지윤의 얼굴이 너무 강력했다. 센터 내에 이 대리 얼빠 소문은 유명해서, 누군가 이 대리를 위한 충고로 ‘도지윤 그놈은 핵폐기물도 안 되는 쓰레기예요!’라고 말을 해주었지만 이 대리는 ‘예쁜 쓰레기가 썩지도 않는다니, 참 좋은 일입니다.’라며 무심히 넘겼다. 좆같은 외모지상주의였다.

도지윤의 지랄 맞은 성미를 강조하기엔, 놈은 이 대리 앞에서 너무 순한 척 가련한 척 연기를 잘했다. 물론 이 대리도 눈치는 챈 것 같았지만, 얼굴에 넘어가 적당히 속아주는 것 같았다. 도지윤은 간간이 이 대리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엎었지만 이 대리가 도지윤을 동정하는 한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도지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있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들었어요? 6팀에 김 과장님, 알고 보면 엄청 부자래요. 임대 수익만으로 달에 몇천 받는다는데요?”

김하영 주임이 어디선가 물고 온 소식을 재잘대며 말을 했다. 월말 보고서를 한창 쓰다 잠시 쉬고 있는 이 대리의 손을, 도지윤은 조물조물 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남몰래 째려보자, 도지윤이 주 주임을 향해 비웃음을 지었다.

“저도 입사하자마자 대출 풀로 땡겨서, 안전 지역에 집 한 채 사놨어야 했어요. 아우.”

김 주임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자신의 모자란 선견지명을 탓했다. 3년 전에 비해 집값이 억이 올랐다느니, 이런 소리를 푸념처럼 늘어놓다 이 대리를 향해 김 주임이 물었다.

“대리님은 회사생활 오래 하셨으니까, 돈깨나 모으셨죠?”

“뭐. 돈은 못 모으고 집만 한 채 있어요. 지금도 버는 족족 다 거기 들어갑니다.”

“우와. 1구역 안전 지역에요? 거기 집값 장난 아닐 건데. 알고 보면 대리님도 부동산 재벌 아니에요?”

“부동산 재벌이면 좋을 텐데, 하우스 푸어예요.”

이 대리가 한숨을 폭 쉬며 말하지만, 김 주임이나 주 주임은 둘 다 알고 있었다. 안전 지역, 특히 1구역 안전 지역이면 뉴스에도 몇 번 나왔을 만큼 몇 년 사이에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한 지역이었다.

“부럽다. 나도 1구역 안전 지역에 집 한 채 있었으면… 평생 벌어도 전 거기에 집은 못 살 거예요.”

주 주임이 진심을 담아 말을 하자, 이 대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대리의 열렬한 추종자인 주 주임은, 저 웃음이 진심으로 기분이 좋을 때 짓는 웃음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살 때보다 집값이 많이 올라서, 좀 이득 보긴 했어요. 제 유일한 자산이에요.”

몇 년 치 월급을 더 넣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중얼거리는 이 대리의 얼굴은 빛이 나 보였다.

“와. 그래도 저도 집 있었으면 좋겠다.”

“집만 깔고 앉아 살 수도 없고, 노후 대비를 위해 저축 열심히 해야죠.”

“어디에서 눈먼 돈 좀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김 주임과 주 주임이 로또라도 맞았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자, 이 대리가 덧붙여 조언해 주었다.

“월급 착실하게 모아서 일단 종잣돈을 만들어요. 그리고 대출 풀로 땡겨서 집부터 사고요. 돈 모아서 사겠다는 생각은 안 돼요.”

“하. 어느 세월에 돈 모으죠? 회사 생활 3년밖에 안됐는데 30년은 더 다녀야 해요! 대리님은 10년 차인데 회사 업무 재미없지 않아요?”

“누가 회사 생활을 재미로 해요. 돈 보고 하는 거지.”

이 대리의 말에 두 주임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런 셋의 잡담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지윤이 이 대리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대리님은 돈이 좋아요?”

그러자 셋의 고개가 동시에 도지윤을 향해 휙 돌아갔다. 이 대리에게 항상 보이는 ‘나는 순하고 무해합니다. 맹~’ 미소를 지은 도지윤에게 김 주임이 떨떠름하게 답을 했다.

“돈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그러자 이 대리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도지윤이 다시 입을 뗐을 때였다.

[에스퍼 지원팀에서 알립니다. 도지윤 에스퍼. 훈련 2A-01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도지윤 에스퍼. 훈련 2A-01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안 오시면, 에스퍼 실장님께서 가만 안 있겠답니다….]

경고음도 없이 갑작스레 울리는 사내 방송에 잡담하던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우리의 이 대리였다.

“…4구역은 에스퍼를 찾을 때, 사내 방송을 쓰나요?”

눈동자를 떨며 두 주임에게 물어오는 모습을 보자니, 주 주임은 ‘아니에요. 저 미친놈이 이상해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도지윤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주임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이 대리는 도지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지윤 에스퍼…?”

“제가 핸드폰을 안 받아서 그런가 봐요.”

“에스퍼는 연락할 때, 정신계 에스퍼가 뇌로 직접 컨택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걔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뒀어요.”

저 미친개는 평범하지 않은 문장을, 마치 평범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연락’을 담당하는 정신계 에스퍼 하나가 울면서 에스퍼 실장실을 방문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어디서 개구라를 치는지 모르겠다.

이 대리가 문장의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도지윤이 이 대리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필살기였다.

에스퍼를 소환하는데 정신계 에스퍼도 아니고 공개적인 사내 방송으로, 그것도 ‘실장님이 가만 안 있겠답니다…’를 아련하게 말하는 내용에 이 대리는 아연해 했다. 고백하자면 주 주임은 이 대리가 4구역으로 발령받기 전에, 에스퍼 실장이 사내 방송에 대고 ‘도지윤 이 개새끼야!’라고 소리쳤던 기억도 있었다. 주 주임은 나중에 이 사건은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도지윤 에스퍼. 실장님이 찾으시니 얼른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가도 돼요.”

맹하게 웃으며 도지윤이 대답하자, 가이드 셋은 속으로 똑같이 외쳤다. 미친놈아!

이 대리가 웃으면서, 하지만 부들거리는 입꼬리로 다정하게 도지윤의 손을 잡았다.

“도지윤 에스퍼. 에스퍼 실장님이 찾으시는데 안 가면, 분명 에스퍼 실장님이 저를 불러서 닦달하겠죠? 우리 약속했잖습니까.”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도지윤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자니, 주 주임은 이 대리에 대한 존경심이 한층 더해졌다. 자신이 이 대리의 상황이라면 일단 도지윤의 대가리부터 한 대 치고 시작할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했다.

도지윤은 순하게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 대리에게 말을 했다

“그럼, 저 다녀올 테니까. 오늘은 다른 에스퍼 가이딩 그만해요.”

“네. 어차피 오늘은 행정 업무만 하려고 했습니다. 얼른 가세요.”

도지윤은 이 대리의 설득에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아마 에스퍼 실장한테 가서 지랄하려고 저렇게 맹한 척하는 것일 거다. 벌써부터 훈련실이 박살나는 소리와, 시설팀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도지윤이 가이드팀을 나가는 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 대리는, 곧바로 컴퓨터로 맹렬히 검색을 시작했다.

“뭐 찾으세요. 대리님?”

주 주임이 궁금해서 물어보자, 이 대리가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위염이 도지는 것 같아서, 양배추즙이나 사서 먹으려고요.”

그러나 김 주임이 옆에서 ‘그거 걸레 빤 물 맛이에요. 대리님!’ 하고 말리는 바람에 이 대리는 주문을 하지 못했다.

그날 퇴근을 한 시간 정도 앞두고 돌아온 도지윤은 쇼핑백에 5만 원짜리 묶음을 가득 담아 이 대리에게 주었다.

“이게 뭐예요?”

이 대리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대리님 돈 좋아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한텐 좋아하는 걸 줘야 한다면서요. 예쁘게 웃으며 도지윤이 덧붙였다.

그러자 쇼핑백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이 대리가 도지윤의 뺨을 꼬집어 잡더니, 이를 즈려물며 말을 했다.

“도지윤 에스퍼. 공, 직, 자, 행, 동, 강, 령, 위, 반, 이에요.”

시발이라고 작게 말하는 이 대리를 보며, 주 주임은 더 크게 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윤리 강령 시간에 뭘 했으면 에스퍼가 가이드한테 돈 주면 안 된다는 상식도 모릅니까?”

이 대리는 도지윤에게 공직자의 윤리에 대해 설교와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 대리의 열렬한 팬인 주 주임은 알고 있었다. 이 대리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매우 기뻐하는 표정이라는 것과, 도지윤의 뺨을 꼬집던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는 것을.

그러나 그날 퇴근 직전, 이 대리님은 걸레 빤 물 맛이라는 양배추즙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도지윤은 제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놈이었다. 이전엔 그것이 주로 얼굴이었지만, 이젠 돈도 추가될 것 같아 주 주임은 더 절망스러웠다. 도무지 도지윤을 이 대리에게 떼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

솔직해지자. 나는 도지윤에게 끌리고 있었다. 아직 좋아한다고 확답은 못 해도 당신에게 어떤 감정이 생기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가이딩 지원실에 도지윤과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이 출근하자마자 여지없이 그린라이트를 띄운 도지윤을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가이딩 지원실로 데려온 것이 30분 전이었다.

어젯밤 도지윤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마음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품을 쩍쩍 하는 내게, 도지윤은 가이딩 지원실에 오자마자 드립백으로 커피를 머그컵 가득 내려 가져왔다. 도지윤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느라 입도 대지 못한 커피가 식자, 도지윤은 제 이능을 써 다시 커피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눈빛으로 도지윤의 얼굴에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쳐다보는데도 도지윤은 맹한 웃음을 띠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내 손을 조물락거리며 만지고 있다가, 내가 부르자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해온다. 까맣고 깨끗한 눈동자를 마주하자니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내 쪽이었다. 분명 도지윤에게 내 감정에 대해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인식하고 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이딩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를 치워두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곧바로 나를 끌어안았다. 도지윤의 에너지는 정말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처음의 구역질나던 감정의 쓰레기통에서 이제는 흐릿한 안개가 낀 정도의 에너지 상태를 보였다. 내심 뿌듯하면서도 ‘하니까 되네!’ 하는 꼰대 같은 마음이 생겼다.

“많이 좋아졌죠?”

기쁜 목소리의 도지윤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하고 비교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네요. 이능을 쓸 때도 느끼시죠?”

“네. 이렇게 상쾌한 기분으로 능력 쓰는 건 어렸을 적 이후로 오랜만인 거 같아요.”

흥얼흥얼 기분 좋은 듯한 도지윤의 말에 되물었다.

“…다른 가이드 분에게 가이딩을 받을 때, 그렇게 많이 안 좋습니까?”

원래라면 고통의 크기라든가 느낌 같은 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도지윤에게 직접적인 질문은 상처가 될 듯하여 말을 골랐다. 도지윤은 잠시 고개를 내 뺨에 붙이며 고민을 하다 선선히 답을 해주었다.

“아파요. 많이.”

“아….”

“고통을 잘 참는 편인데, 그건 못 참겠어요.”

도지윤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개수작을 부리는 것에 한마디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고통스러운데 역가이딩은 왜 하는 겁니까?”

“가이드가 가이딩해주면 너무 느려요. 어차피 받아야 할 가이딩이면 제가 짧고 한꺼번에 가져가는 게 낫죠.”

가이드가 보통 가이딩을 해줄 때 아무리 짧아도 15분이고, 평소에는 한 시간 정도 소요가 된다. 하지만 일전의 도지윤이 역가이딩을 했을 경우에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도지윤 에스퍼. 절대, 역가이딩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세요.”

“대리님이 있으면 역가이딩 할 일 없어요.”

도지윤이 내 목에 입을 대고 느릿느릿하게 말을 한다. 애무를 하는 것인지 가이딩을 하는 것인지, 요즘 내 공과 사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도지윤의 행동과 함께 공과 사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은 내 심장이었다. 도지윤의 저런 개수작에 내 심장이 점점 방정맞게 뛰고 있었다.

쿵쿵쿵쿵,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며 뛰는 심장이 어느 순간 도지윤과 시선이 마주치면, 도지윤이 나에게 닿아오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가 그것이 원래 속도인 양 뛰고 있었다. 처음엔 그 속도의 차이가 사소했지만, 이젠 내가 눈치챌 만큼 매우 크게 나고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도지윤도 알아챌까 봐 조금 두려웠다.

나는 도지윤에게 감정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아직 이름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모르는 그 싹을 죽여야 하나, 물을 줘서 자라게 해야 하나 고민 중에 있었다. 현명하게 선택하자면 나는 지금 당장 그 싹을 도려내야 할 테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도지윤을 알고 싶었다.

“가이딩 끝났습니다.”

“벌써요?”

“벌써라뇨. 30분이나 지났습니다.”

“한 시간 채워주세요.”

“싫습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도지윤에게 힘을 주어 거리를 두었다. 그 예쁘장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의도적으로 ‘소문’을 멀리하던 내 삶에 잠시간 유예를 주기로 했다.

“도지윤 에스퍼. 오후에는 꼭, 훈련 가십시오.”

“대리님은 오후에 가이딩 하지 마세요.”

지난번 에스퍼 실장의 사내 방송 호출 건으로, 나는 도지윤에게 훈련 일정은 제발 참석하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또한, 정신계 에스퍼의 ‘연락’도 다시 받으라고 했다. 도지윤은 두 개 다 싫다고 반발했지만, 나의 간곡한 설득과 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타 에스퍼의 가이딩을 한 건 더 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각자의 일을 했다.

도지윤은 훈련 일정을, 나는 도지윤을 뒷조사하는 일정을.

***

몇 번의 신호음이 가자, 곧장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온다.

[어, 왜.]

“배 대리.”

나의 친구이자 동기. 믿을 수 있는 마당발. 정화였다.

[뭡니까. 이 대리. 이렇게 갑자기 전화하시고.]

“우리가 이런 사이입니까. 배 대리.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죠.”

[뭐라는 거야. 망할 놈이. 지 필요할 때만 전화하고 있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화는 깔깔 웃고 있었다.

“정화야. 부탁 하나만 하자.”

[아, 뭔데. 네가 이러면 불안한데.]

“아니, 나도 알아보긴 할 건데 말이야.”

[어어.]

“사람 뒷조사 좀 하자.”

[뒷조사한다고? 왜? 너네 팀에 누구 새로 받어?]

“아니. 가이드 조사는 아니고.”

[그럼 뭐. 일반 직원? 에스퍼?]

“에스퍼.”

[이름이 뭔데?]

“도지윤.”

정화는 사내 인트라넷에서 사원을 검색해 보는 것인지, 핸드폰 너머로 빠르게 타자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이 대리.]

“어. 왜.”

[너 또 예쁜 쓰레기 모으냐?]

“아, 쓰레기 아니라고.”

[사진만 봐도 그냥 네 취향인데?]

“내가 취향이 고급이긴 하지.”

[그럼 쓰레기일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쓰레기보다는… 강아지에 더 가깝지.”

[내가 네 연애사를 아는데….]

“…….”

[너 고르는 것마다 예쁜 쓰레기였잖아.]

나는 입이 있지만 뱉을 말이 없었다.

[너 신입 때 사귀었던 그놈도 얼굴은 청순미인이었는데, 성격은 영….]

“난 과거는 다 잊었다.”

[지랄.]

정화가 낄낄대며 나를 비웃는다.

[그 첫 번째 청순미인은 작년에 각인했더라.]

“어. 너네가 걔 각인하자마자 프로필 사진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줬잖아. 아직도 기억나.”

[그리고 넌 내 첫사랑 결혼사진을 나한테 줬지.]

“당하고만 있을 수 있나.”

오랜만의 친구와의 전화로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너무 전화 통화가 길어지는 것 같자, 나는 아쉽지만 중간에 잘라야 했다.

“야아. 정화야. 아무튼 도지윤 좀 알아봐 줘.”

[내가 니 남친 뒷조사까지 해다 줘야 해?]

“아직 남친은 아닌데?”

[아오.]

“부탁한다.”

[나중에 크게 뜯어 먹을 거야.]

“그래그래. 나 들어간다.”

정화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1구역은 안전한 곳이니만큼 소문이 빠르고, 무성하게 도는 곳이다. 일단 정화에게 맡겨놨으니 알아서 물어올 것이고, 나는 4구역에서 도지윤에 관해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이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줌이니 주변 사람들부터 탐문을 해야 한다.

처음 주인공은 가이드 1팀의 3년 차 가이드, 김하영 주임이었다.

“네? 도지윤이요? 그 미친… 아니. 도지윤 에스퍼는 왜 궁금해하시는 거예요?”

“제가 ‘임시 전담 가이드’이니만큼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솔직히 지금 와서 알아보는 것도 좀 늦은 감이 있죠.”

“영원히 안 알아보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 같은데요….”

김 주임이 딱딱한 얼굴로 단호하게 나에게 권해주었다. 아쉬운 입장은 나인지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김 주임에게 정보를 구걸했다.

“도지윤 에스퍼야, 뭐 도는 소문은 무성하죠.”

“예를 들면…?”

“알고 보면 악마의 자식이라느니, 중앙에서 만들어낸 키메라라든지…?”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김 주임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간다.

“그것도 아니라면 실은 괴수가 인간으로 둔갑한 거라든지, 그냥 센터를 와해시키기 위한 빌런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도움되는 내용이 단 한 토막도 없었다.

“확실한 건 가이드 역가이딩이나 해대는 사이코패스 같은 놈이라는 것과, S급 에스퍼답게 괴물이라는 것? 그리고 제 으응… 대로 행동한다는 것도요.”

김 주임은 차마 ‘제 좆대로’라는 말을 못 하겠던지 자체 묵음 처리를 해서 말을 했다. 영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에,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왜 별명이 ‘미친개’인 거예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센터에 왔을 때부터, 미친개였어요.”

단순히 대답하면서도 김 주임은 ‘그런데 별명을 듣자마자 왜 미친개인지는 납득해서, 어원에 대해 궁금해 본 적은 없어요.’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을 했다.

“왜 미친개일까요… 제가 보기엔 그냥 강아지 같은데.”

“그건 대리님이 그냥 답도 없는 얼… 아니에요. 대리님이 행복하시면 저도 좋아요.”

김 주임이 능숙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나에게 사근사근 말을 한다. 이 아이도 이제 슬슬 신입 티를 벗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예전에 술자리에서 다른 팀 과장님한테서 들은 적 있어요. 도지윤 에스퍼 이야기.”

“뭔데요?”

“10년 전? 7년 전? 아무튼 오래전에 다른 센터에서 아동학대 사건 있었다더라고요.”

김 주임은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괜스레 주변을 슥슥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했다.

“그거 도지윤이래요. 학대당한 아동.”

의외의 말을 들은 내가 충격에 입만 떡 벌리고 있자, 김 주임은 가이딩을 하러 간다며 인사를 꾸벅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 조사대상은 주 주임이었다.

“도지윤이요…? 대리님. 연애하시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주 주임.”

“그런데 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도지윤 에스퍼에 대해서 아는 건 잘 없는데….”

“그렇군요. 그냥 이런저런 소문이라도 들으신 것 없나요?”

“소문… 이라면 도지윤 에스퍼가 실은 빌런이라는 것?”

“…그렇군요. 뭐, 긍정적인 소문은 없습니까?”

“긍정적인 건 없고, 부정적인 건 있어요.”

“뭡니까?”

“대리님하고 연애 중이라는 거요.”

나는 순간, 당황스러움에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하고 말았다. 주 주임이 옆에서 ‘헉! 괜찮으세요. 대리님? 누가 대리님을 암살하려는 건가요?’와 같은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도지윤 에스퍼하고 연애 안 합니다!”

“그렇죠? 역시….”

주 주임이 얼굴을 밝히며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 다른 건 들은 거 없습니까.”

“그거 말고는… 워낙 유명한 에스퍼여서 이런저런 소문이 많죠. 알고 보면 중앙의 암살자라든지, 집에 시체가 걸려 있다든지. 실험을 너무 많이 당해서 훼까닥 돌아버렸다든지….”

역시 일반 신입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퀄리티가 너무 낮았다. 주 주임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가이드 1팀에서 열심히 행정작업을 하고 있는 이 주임을 보았다. 입사한 지 이제 갓 5개월 넘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 알고 있는 것이 있을까?

“이 주임.”

“네! 대리님.”

“신입이라서 잘 모를 것 같긴 한데, 혹시 도지윤 에스퍼 관련된 소문 좀 알아요?”

이 주임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주위를 잠시 휘휘 둘러본 이 주임은 곧바로 내 자리로 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주 주임도 같이 몸을 붙여와 우리는 셋이서 소곤거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도지윤 에스퍼. 어렸을 때 센터로 팔려 왔었대요.”

“네에?”

이 주임의 깜짝 놀랄 발언에 주 주임이 큰소리를 내었다. 이 주임은 급하게 입 앞에 검지를 세워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주 주임은 제 실수를 안 듯이, 입을 틀어막고 몸을 숙였다.

“어디 센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도지윤 에스퍼 모친이 도지윤 에스퍼 센터로 팔아넘겼었대요.”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부모님이 에스퍼, 가이드예요.”

뜻밖의 엄청난 소문과 믿을 수 있는 출처에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와. 귀족 가이드.”

“아니에요. 부모님 그냥 평사원이에요.”

주 주임의 감탄 어린 말에, 이 주임이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그리고는 말을 돌리기 위해서인지 재빨리 도지윤에 관한 소문을 뱉어내었다.

“도지윤 에스퍼, 어렸을 때부터 센터에서 홈스쿨링하면서 실험만 엄청나게 돌렸었대요. 그래서 몇 년 전에 뉴스에서도 에스퍼 인권 어쩌고 하면서 나왔었다고 했어요. 에스퍼 아동학대 사건으로요.”

그 사건이라면 나도 기억한다. 잠깐 떠들썩하다가 곧바로 가이드 인권 운동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내가 신입이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 주임이 했던 말과 이어져서 점점 신빙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정말 도지윤은 아동학대를 당한 것일까?

나는 두 주임과 얘기를 끝내고, 곧바로 인터넷 창을 띄워 검색에 들어갔다. 아동학대와 에스퍼를 조합해서 검색하자, 뉴스가 우르르 떠올랐다.

[정신 나간 에스퍼-가이드협회, 아동학대까지?]

[인권 사각지대: 에스퍼의 인권]

[실험실에 갇힌 어린 에스퍼]

몇 개의 뉴스를 대충 클릭해보자, 비슷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어느 센터인지는 특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피해자는 어렸을 때 센터로 들어와 실험실에서 비윤리적인 실험과 각종 위험 약물에 노출되어 생활했다는 이야기였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죽죽 읽어나가다, 한 부분에서 눈이 띄였다.

‘가이딩 거부 현상을 일으키던 에스퍼 아동은….’

나는 가이딩 거부 현상을 겪어 나에게 집착하는 도지윤의 맹한 미소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순간 도지윤의 비상식적인 모습들도 같이 떠올랐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입을 가렸다. 충격에 탄식이 나올 것 같았다.

도지윤이 또라이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슬프고 동정 어린 이유가.

동정심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모니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어디에선가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가이드 2팀에 배치받은 신입 직원 ‘윤민지’입니다!”

팀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팀 사람들은 뉴페이스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박수를 쳐줬다. 얼마 전에 최 주임이 스쳐 지나가듯 신입이 온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최 주임은 만성 인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4구역 센터에, 꼴랑 가이드 한 명을 주는 것에 분개했었다.

들어와서 여기저기 인사를 열심히 하는 신입을 목을 빼서 한번 쳐다보았다. 자고로 신입은 인사를 잘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나는 모니터 하단에 표시되는 시간을 흘낏 보고 검색창을 껐다. 도지윤이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도지윤은 몇 분 후에 들어왔다. 평소와 똑같이 맹한 미소를 지은 채 내 뒤의 지정석에 착석했다. 내가 일도 안 하고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도지윤은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아서 조물락거렸다.

“도지윤 에스퍼….”

“네?”

“…아닙니다.”

나는 도지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당사자에게 ‘어렸을 때 아동학대 당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오늘 훈련은 어땠습니까?”

적당히 말을 돌리는 내 질문에 도지윤은 잠시 고민을 했다.

“잘 모르겠어요.”

“…왜 잘 모르겠어요?”

“훈련이 훈련이지, 어때야 하나요?”

나는 이제야, 도지윤의 사회성이 결여된 대답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받아들이다 못해 도지윤에 대한 동정심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렇죠. 훈련이 어때야 할 이유는 없죠.”

그의 말에 긍정해주니 도지윤이 생긋 웃는다. 그 모습이 참 예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도지윤이 환하게 웃는다.

어딘가에서 주 주임의 ‘아이고’ 하는 한탄 소리가 들렸다. 눈치를 보며 손을 내리자, 도지윤이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모른 척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뜬금없이 말했다.

“대리님.”

“네?”

“주말에 저랑 영화 보러 가실래요?”

“영화요?”

“네. 주말에 하루는 저랑 보내기로 했잖아요.”

도지윤이 예쁘게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하자, 일전에 도지윤이 숙소 앞에서 펑펑 울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지.

나는 나에게 고정된 도지윤의 곱게 접힌 눈을 바라보며, 너무나도 데이트 신청 같은데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순간 ‘실험실에 갇힌 어린 에스퍼’라는 신문 제목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숙소 앞에서 엉엉 서럽게 울었던 것처럼, 작은 도지윤이 실험실에 갇혀 숨이 넘어갈 듯 우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이 새끼. 친구도 없을 것 같고 애인도 없는데, 영화 보러 갈 사람도 없겠지.

나는 급격하게 차오르는 도지윤에 대한 동정심으로, 주말 하루를 희생하기로 빠른 결단을 내렸다. 직장인에게 주말 하루 희생하는 건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도지윤은 그 애정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요. 주말에 영화 보러 가요.”

고민은 짧았고 대답은 빨랐다. 그렇게 도지윤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자 도지윤은 환하게 웃었고, 어딘가에서 주 주임의 ‘아이고 아이고’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지윤 에스퍼.”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나는 또한, 도지윤에 대한 동정심에 취해 도지윤에게 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묻자, 도지윤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대리님이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리고 대리님이랑 각인하고 싶고, 대리님한테 뽀뽀하고 싶고, 대리님하고 섹….”

나는 사무실에서 울려 퍼지는 도지윤의 남사스러운 말에, 급하게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도지윤의 표정이 불만스러워졌다.

“그냥. 말하지 마요. 도지윤 에스퍼.”

나는 썩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도지윤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고 이해했다. 그러다 도지윤이 혀를 내밀어 내 손을 낼름 핥자, 기겁하며 손을 떼었다. 맹하게 웃은 도지윤은 더 이상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도지윤에게서 몸을 돌려, 일을 하기 위해 모니터에 집중했지만 어지러운 마음이 내 정신을 이리저리 분산시켰다. 마우스를 의미 없이 움직이며, 사내 자유게시판을 클릭했다.

자유게시판에는 온갖 종류의 글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직원 구함’이라는 글들이 수 페이지에 걸쳐 올라와 있었다. 그렇다. 인사철이었다.

주로 에스퍼-가이드가 아닌 일반 직원들을 구한다는 글이 대부분이지만, 가이드를 구한다는 글도 언제나 올라와 있다. 일반적으로 내가 다른 센터로 가고 싶다면, 내 후임은 내가 구해놓고 가야 하는 요상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위에 졸라서 신입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은 이 전통은 언제나 유지되고 있다. 가장 깔끔한 방법은 가고 싶은 센터의 가이드와 맞트레이드하는 방법이다.

별 의미 없이 스크롤을 죽죽 내리며 글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전화가 띠리링 울렸다.

“감사합니다. 가이드 1팀 이재하 대리입니다.”

누군지 확인하자, 거의 신입일 때 같은 센터에서 근무했던 대리, 지금은 과장이 된 김영철 과장이었다.

[이 주임, 오랜만이야. 나 김영철 과장인데, 기억하지?]

거의 몇 년 만에 받는 연락이었다.

“네. 그럼요.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난 비즈니스용 목소리로 김 과장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어, 4센터 가이드들 중에 누가 있나 살펴보는데, 글쎄 이 주임, 아, 지금은 이 대리지? 이 대리 이름이 보이잖아. 반가워서 전화했지.]

어디서 개구라를.

“아, 그래요? 제가 먼저 과장님께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살기 바빠서… 죄송합니다.”

[하하. 연락이야 아무나 먼저 하면 되지. 1구역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또 4구역으로 옮겼대?]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1구역은 사무 쪽이라 돈이 좀 안 돼서, 4구역 현장으로 내려왔습니다.”

[역시 능력 좋아. 이 대리 능력 좋은 거야 예전부터 소문 자자했지.]

“칭찬은 감사한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서로 별 의미 없는 말들이 왔다 갔다 한다.

[원래 이 대리한테 연락해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침 이 대리가 4구역에 있다고 하니까 해서 말이야.]

“네네. 과장님. 말씀하세요.”

[내가 지금 22구역에 있는데, 여기가 가이드가 좀 부족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올 생각 없어?]

“22구역이요?”

머릿속으로 주판이 돌아간다.

[어어. 현장 수당이랑은 4구역하고 똑같이 받는데, 대신 4구역보다 괴수는 덜 출몰해. 전투 수당은 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아….”

[여기 가이드들도 대부분 괜찮아. 4구역은 보니까 거의 신입밖에 없던데, 그래도 여긴 대리급들이 꽤 있어.]

“과장님네 팀 충원하려는 거죠?”

[그렇지.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전화 돌리고 있겠어?]

그럼 안 간다.

“좋은 제의이긴 한데, 제가 4구역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요. 여기도 사람이 부족하기도 하고, 실장님이 허락 안 하실 거예요.”

[실장이야, 잘 얘기해보면 되지. 이 대리가 가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면 실장도 보내줄 거 같은데….]

“아, 22구역에서 땡겨주는 게 아니라, 제가 실장하고 얘기해서 나가야 하는 거예요?”

[으응. 알잖아. 사람 땡기기 힘든 거.]

1구역, 하다못해 더 나은 센터도 아니고 고작 비슷한 급의 센터로 옮기는데 실장하고 싸우기까지 해야 하다니. 나에게 너무 손해다.

“죄송해요. 과장님. 저 요즘 가이드 실장한테 찍혀서 조용히 회사 다녀야 해요.”

[허 거참. 이렇게 좋은 기회를 걷어차다니…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죄송합니다. 과장님.”

[그래그래. 뭐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생각 바뀌면 다시 연락해.]

“네. 센터 옮기는 거 아니어도,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과장은 대꾸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내가 신입이었을 때, 김 과장은 대리였고 옆 팀에 근무했었다. 그리고 나를 졸라 갈구고, 일도 졸라 넘겼다. 지금도 분명 같은 팀으로 ‘일할’ 직원을 구하는 게 아니라 지 수발 들어줄 ‘만만한’ 직원을 구하는 중일 것이다. 절대 안 가야지.

“대리님.”

전화를 끊자마자, 주 주임의 목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주 주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

“대리님. 다른 센터 가요?”

“아. 안 가요. 오라고 제의는 주셨는데,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옮겨요. 불가능이에요.”

“대리님. 다른 데 가지 마요.”

주 주임은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오래오래 같이 일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애매하게 웃으며 있자, 주 주임 옆의 이 주임도 벌떡 일어나 말을 덧붙였다.

“가지 마세요. 대리님.”

“안 간다니까요. 이 주임. 인사이동이 쉬워 보여도, 절대 쉽지 않아요. 지금 저 아무 데도 이동 못 해요.”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다고. 인사이동이 ‘저 갑니다!’ 하면 갈 수 있는 건 줄 아나. 다 시기와 인맥과 운이 동반해야 할 수 있는 거다.

“그냥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가이드 급하니까, 여기저기 찔러보는 전화예요.”

“그래도… 대리님 받으려고 전화하는 거 보면, 타 센터에서 끌고 가버리는 거 아니에요?”

“본인 의사도 없이 그럴 수 없어요. 주 주임.”

나는 불안해하는 두 주임에게 안심하라고 타일러 주었다. 그리고 그때, 내 전화가 울렸다. 누구인지 확인해보니 예전에 같이 일했고 지금은 16구역에 있는 대리였다. 순간 얼굴이 따끔거려 고개를 들어 두 주임을 쳐다보았다. 두 주임은 배신자 보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써 못 본 척하며 전화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가이드 1팀 이재하 대리입니다.”

[이 대리. 오랜만이야!]

그리고 나는 그날, 총 2통의 전화를 더 받았다. 나중에 온 김 주임과 최 주임까지 네 명의 주임은 거의 울 기세로 나에게 다른 센터로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안 간다고 그들을 달래주었다.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에게 다른 센터로 가지 말라고 해줘요!”

김 주임이 도지윤 에스퍼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지정석에 앉아 관상용 화초처럼 가만히 있던 도지윤은 나를 쳐다보며 곱게 웃었다.

“대리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러자 주 주임이 ‘대리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이란 개소리로 분개했다. 나는 도지윤의 말이 의외라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저 다른 구역 가도 돼요?”

“제가 따라가면 되죠.”

도지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 표정에 다른 네 명의 주임이 부럽다고 중얼거리고, 난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

인사철은 인사철이었다. 팀 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누가 떠날 것이고, 누가 남을 것인지에 대해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간간이 자기네 센터로 오지 않겠냐고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일일이 거절하고 네 명의 주임들에게 공유를 했다. 김 주임도 타 센터로 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아 조언을 해주었다. 이번에 인사이동하면 앞으로 3, 4년은 거기 매여 있어야 하니, 한번 이동할 때 좋은 곳으로 가라고. 김 주임은 내 말에 고민해 보더니, 제안을 거절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오전에 도지윤의 가이딩과 타 에스퍼의 가이딩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자 도지윤은 훈련을 갔다. 그리고 나는 가이드 실장의 호출을 받았다.

가이드 실장의 호출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기에 긴장이 되었다. 거기다가 요즘 내 업무 패턴은 규칙적이어서, 아무리 봐도 가이드 실장이 도지윤이 없을 때를 노려 호출한 것 같다.

일전의 도지윤의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가이드 실장도 껄끄러움을 느꼈으리라 예상했다.

가이드 실장실 앞으로 가자, 비서가 나를 보며 반갑게 웃어준다. 나는 방문을 두 번 두드리고 실장의 허락의 목소리를 들은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실장은 내가 들어오자마자 책상에서 보던 서류를 덮고 일어나, 나에게 소파의 자리를 권해주었다. 나는 실장이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은편에 냉큼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이 대리.”

“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똑같지. 이 대리는 별일 없고요?”

실장이 온화하게 웃으며 나에게 물어보았다. 일전의 혈압 올랐던 사건들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한, 내공 백단이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네. 그냥 일이나 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대화를 하면서 얼른 빨리 실장이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실장 알레르기가 생긴 것 같았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하고 목구멍이 텁텁 막히는 것이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타이밍을 맞추어 비서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앞에 놓인 녹차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들어요. 이 대리.”

비서가 차를 놓고 사라지자, 다시 한번 실장이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며,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지윤 에스퍼는 좀 어떤가요?”

역시. 실장이 나를 부를 이유는 이거밖에 없었다.

“많이 안정됐습니다. 이번 주부터 가이딩 약도 병행해 사용하고 있는데, 약도 조금 부작용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부작용인지 아픈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이딩 약을 먹을 때마다 도지윤은 나에게 아프다고 칭얼거리며 안겨왔다. 아무리 봐도 개수작인 거 같았지만, 본인이 아프다는데 뭐라 할 수가 없어 나는 도지윤의 머리나 배, 등을 연신 쓰다듬어줘야 했다.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차를 한 모금 마시던 가이드 실장이 나에게 말을 했다.

“도지윤 에스퍼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는 에스퍼죠. 너무 예민해서….”

실장은 눈을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가이딩 말고도 이것저것 주의해야 할 게 많아요.”

거기에 정신적인 문제도 포함되어 있나요? 나는 실장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꾹 참았다.

“가이딩을 받으면 도지윤 에스퍼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아질 거라고 하는데, 일단 실험실에 오질 않으니 뭘 알 수가 있나.”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닌지, 실장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실장을 멀뚱히 쳐다보자 곧바로 정신을 차린 실장이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매칭률 높은 가이드하고는 접촉만으로도 호전될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네가 책임지고 도지윤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해줘라’라고 하는 듯해 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문제에 정신적인 것도 포함되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내가 이 대리를 부른 이유는.”

실장이 잠시 말을 끊더니 녹차로 목을 축인다.

“이번에 가이드팀에 새로 온 신입이 있어요. 윤민지 주임이라고.”

“네.”

“A급 가이드이고, 여기로 막 발령받은 상태라 지금 매칭 테스트만 하고 있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신입이든 아니든, 가이드가 새로 센터에 오면 매칭률 테스트만 주야장천 한다.

“일단 도지윤 에스퍼가 이 대리와 ‘임시 전담’ 계약을 맺긴 했는데, 그래도 미각인 에스퍼라 매칭률 테스트를 해야 해요. 그런데 거부한다고 하네요.”

실장이 거기까지 말하자, 나는 실장이 나를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가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이긴 한데, 매칭률 테스트까지 관리해야 합니까?”

“물론 이 대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니에요. 가이딩 부분만 신경 쓰면 되는 거죠.”

“네.”

“그런데 도지윤 에스퍼가 하루 종일 이 대리를 쫓아다닌다면서요.”

아. 씨발.

“타 에스퍼 가이딩 할 때도 쫓아 들어가고요.”

“에스퍼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또, 규정에 들어가지 말라는 구절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서류상으로는 이상 없죠. 지금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가이딩 만족도 조사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잖아요?”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 대리. 전 이 건으로 문책하려는 건 아니에요. 도지윤 에스퍼가 통제가 어렵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네.”

“그냥. 도지윤 에스퍼가 이 대리를 졸졸 쫓아다닌다고 하니, 이 대리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도지윤 에스퍼 매칭률 테스트 한 번만 받게 하세요.”

“…….”

“에스퍼에게 매칭률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 대리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눈을 들어 실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실장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놈한테 매칭률이 잘 나올 리가 없어요. 행정 절차를 위한 것이니, 꼭 받게 하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실장은 여전히 온화하게 웃으며, 나에게 나가보라 했다. 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도지윤에게 다른 가이드와 매칭률 검사를 받으라고 말하라. 이 짧은 문장을 떠올리자마자 목구멍이 턱 막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지 확인을 위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내 폐는 오르락내리락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면 유리 너머로 이제 황량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센터장이 비싼 돈을 들여 가지고 왔던 소나무와 사철나무들, 시들어가는 잔디가 보였다.

세상은 조용하고 차분히, 지금 복도에 서서 호흡을 확인하고 있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햇살 같은 깨달음이 나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체 없는 깨달음은, 나를 일깨우지 못하고 다시 연기같이 사라졌다. 나는 내 신경을 자극하는 지각을 애써 무시했다.

나를 보며 맹하니 웃던 도지윤이 보고 싶었다. 색깔로 구별하면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는 도지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도지윤이 행복했으면 한다. 문제는 누가, 무엇이 도지윤을 행복하게 해주냐는 것이었다.

나는 가이드 팀으로 돌아가는 복도를, 늘어지는 내 그림자만큼이나 거대한 상념의 꼬리를 매달며 걸어갔다.

“대리님.”

고개를 숙여 빠르게 걸어가는데, 지금 당장 내가 듣고 싶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익숙하게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도지윤이 서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은 한낮의 볕이 눈부시게 들어온 복도에서, 그림같이 예쁜 얼굴로 맹하게 웃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도지윤의 모습은 그 공간에 박제된 사진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마주치자, 마법이 풀리듯 도지윤의 정지된 시간이 내 초침과 동기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도지윤은 멍하니 정신을 놓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어디 갔다 오세요?”

“아… 잠시.”

왠지 실장과 면담했다는 것은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나는 도지윤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우리, 잠시 걸을까요?”

도지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지윤을 가로질러 걸어갔고, 도지윤이 내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걸어갔고, 복도에는 내 발걸음 소리만 터벅터벅 울렸다. 둘이 걸어도 마치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우리는 로비로 내려와 내가 자주 가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도지윤 에스퍼는 뭐 드실래요?”

“같은 걸로요.”

“두 잔 주세요.”

카드를 꺼내려고 하자, 도지윤이 핸드폰을 꺼내어 재빨리 결제해버렸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

“저 돈 많아요. 대리님.”

일전의 도지윤의 ‘쇼핑백 5만 원권’의 사건이 떠오르자, 표정이 절로 썩어 들어갔다. 그러자 도지윤이 손을 올려 내 입술 끝을 매만져, 썩소를 풀어주었다. 그 모습이 웃겨 피식 웃자 도지윤도 마주 웃었다.

고개를 돌리자 카페에 앉아있던 다른 에스퍼와 눈이 마주쳤다. 충격을 받은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 민망해서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시선을 자연스레 돌렸다.

“커피 나왔습니다.”

도지윤이 커피를 받아들고, 우리는 자리에 대충 앉았다.

“도지윤 에스퍼.”

“네.”

도지윤이 빨대로 커피를 쪽 빨았다. 볼이 움푹 패이면서 빨간 입술이 오물오물하는 모습이 예뻐 눈길이 갔다.

“몸은 괜찮아요?”

도지윤이 눈을 여러 번 깜빡이자, 기다란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 또한 팔랑팔랑 움직였다.

“네?”

그러나 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이, 도지윤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 나는 피식 웃었다.

“역가이딩 말고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면서요.”

정확히 무슨 문제인지는 못 들었지만.

“말해야 하는 거였어요?”

“…아니에요.”

도지윤이 자연스레 내 손을 잡고 조물락거린다. 그 모습을 착잡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지면, 도움이 돼요?”

내 질문에 도지윤이 맹하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순간적으로 도지윤의 눈동자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모았다. 이 새끼. 연기인 것 같다.

“전 대리님만 있으면 돼요.”

“낯부끄러운 소리, 뻔뻔하게 잘하네요.”

“더 할 수도 있는데.”

난 도지윤을 향해 썩은 표정을 짓다, 재빨리 표정을 다시 갈무리했다.

“몸이 어떻게 안 좋아요? 에너지 뭉치는 거 말고, 뭐 또 있나?”

“그냥 좀 둔해지는 거예요. 뜨거운 게 덜 뜨겁고, 차가운 게 덜 차갑고.”

“아픈 것도 덜 아프고?”

턱을 괴고 도지윤을 빤히 쳐다보며 물어보자, 도지윤이 두 눈을 곱게 접어 마주 웃었다.

“네!”

“…좋은 건 아닌 거 같은데요? 가이딩은요? 감각이 둔화되면 가이딩할 때 고통도 좀 줄어들어요?”

도지윤이 눈썹을 내리깔며 잠시 말을 골랐다.

“가이딩 정말 아파요. 이제 대리님의 가이딩으로 제 감각 둔화도 용해되었으니, 다른 가이드한테 받는 가이딩은 더 아프겠죠.”

우울하게 음영진 도지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서 도지윤은 눈치를 보며 내 손을 잡아왔다.

“그래도, 이제 대리님이 있으니까.”

도지윤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도지윤을 보는 나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방금 도지윤의 말이 진실인지 연기인지 정확히 판단되지 않는다. 나는 판단을 보류하고 일단 도지윤에게 걱정을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

“그래요. 혹시 몸에 이상 있으면 재깍 말해줘야 해요.”

혹시 도지윤이 어렸을 때 받았던 ‘학대’ 때문에, 신체적인 문제가 발생했을까. 실험실에서만 처박혀 살았다던데, 정신이고 몸이고 다 망가진 거 아닌가.

나는 도지윤을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그러자 도지윤이 몸을 낮춰 나에게 소근 거렸다.

“대리님.”

“네?”

“남들 앞에서 빨대로 음료수 빨아먹지 마세요.”

“왜요?”

“꼴려서요.”

이 미친놈이. 황당함에 고개를 들어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도지윤은 나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욕을 꾹 눌러 참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이번에 신입 가이드랑 매칭률 테스트 거부하고 있다면서요.”

“아까 실장 만나고 온 거예요?”

도지윤의 표정이 대번 불퉁해진다. 도지윤은 언제나 눈치 없이 행동하다가도, 이런 순간에는 눈치가 빨랐다.

“매칭률 테스트 받으십시오.”

“싫어요.”

얼굴과 시선은 다른 데로 돌리면서도 도지윤은 나를 잡은 손은 빼지 않았다. 나는 그런 도지윤의 손을 다른 손으로 덮어 잡았다. 도지윤이 내 손을 흘낏 쳐다봤다.

“왜 싫습니까?”

“내 가이드는 대리님인데, 왜 다른 가이드랑 매칭률 테스트하라고 해요.”

“별 의미 없습니다. 도지윤 에스퍼. 그냥 행정상, 가이드는 센터 내 모든 에스퍼와 매칭률 테스트를 해야 해서 그런 겁니다.”

“그래도 싫어요.”

검지로 도지윤의 손등을 느리게 긁었다.

“도지윤 에스퍼. 그냥 제 부탁이니까. 한번 해주면 안 됩니까? 행정 절차라 다른 사람들이 난감해해서 그렇습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도지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리님이 원하는 거예요?”

도지윤이 내뱉은 질문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원하는 건가? 입을 몇 번 달싹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회사가 원합니다.”

이상한 표정의 내 얼굴을 보더니, 도지윤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부탁이잖아요.”

도지윤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집스레 커피잔만 내려다보았다. 나는 언제나 도지윤이 나한테 해주었던 것처럼, 도지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자 도지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대신 도지윤 에스퍼 부탁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섹….”

도지윤의 입에서 엄한 소리가 나오자, 나는 바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말고요.”

“그럼 각인이요.”

“…그것도 말고요.”

“동거요.”

“해 줄 수 없는 것만 얘기하네요.”

그러자 도지윤의 얼굴이 다시 불퉁해졌다.

“도대체 안 되는 게 왜 이렇게 많아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걸 말을 해보십시오.”

“그럼….”

도지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열심히 고민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빨대로 커피만 빨아먹고 있었다.

“대리님.”

“네?”

“그럼 제 ‘전담 가이드’ 해주세요.”

도지윤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해오자,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전담 가이드 하면 수당 줄어드는데….”

“지금 저보다 그깟 돈이라는 거예요?”

도지윤이 정색하며 해오는 말에, 나도 맞정색을 했다. 그깟 돈이라니. 내가 왜 일하는데.

그러자 도지윤이 급히 말을 덧붙인다.

“부족한 수당은 제가 지급할게요!”

“도지윤 에스퍼. 그러니까 제가 전에 말했지 않습니까.”

도지윤의 예쁜 얼굴에 손을 올려, 뺨을 죽죽 늘렸다.

“에스퍼는 가이드한테 돈을 주면 안 된다니까요. 윤리 강령 주기 교육 안 합니까?”

“왜 우여아에여(왜 주면 안 돼요)?”

“왜 안 되겠습니까.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의 얼굴에서 손을 떼자, 내 손자국에 눌린 볼이 빨개졌다.

“각인한 애들은 서로 돈 주고 그러던데요?”

“그거야 각인했으니까 그러죠.”

“그럼 대리님도 저랑 각인해요. 제가 돈 줄게요.”

“…각인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도지윤 에스퍼.”

난 이 철없고 어린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모든 게 다 이해가 되었다. 도지윤이니까.

손을 들어 도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자, 도지윤이 내가 쓰다듬기 편하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각인은 나중에 도지윤 에스퍼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십시오. 아껴놨다가.”

“전 대리님 좋아하는데….”

“압니다. 그래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도지윤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나는 내 나이에 맞게 여러 명의 사람을 만났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다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해왔다. 그리고 그중에 그 말을 지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진짠데….”

“됐고, 신입이랑 매칭률 테스트나 받으십시오.”

눈썹을 내리깔고 시무룩해하는 도지윤에게, 나는 따스하게 말해주었다.

너라고 다를까.

남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도지윤은 가이드 지원팀에 연락해서 매칭률 테스트를 받겠다고 말을 했고, 바로 하자고 해서 실험실로 가버렸다.

나는 팀으로 돌아가서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가이드 팀으로 들어가는데, 무슨 일인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어 나는 눈치를 보며 자리로 조용히 가 앉았다.

“오셨어요.”

김 주임이 나에게 소곤거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나도 소곤거리며 김 주임에게 말을 걸었다.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그게, 2팀에 김 대….”

김 주임이 소곤소곤 말을 해주고 있는 중에, 갑자기 탕! 하고 책상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목을 빼 바라보자 2팀의 김 대리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서 있었다.

“아니, 홍 주임. 너무한 거 아니야?”

김 대리는 자리에 일어서서 3팀 쪽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나 인사이동한다고 귀에 인이 박이도록 떠들고 다녔는데, 이렇게 가로채는 건 아니지!”

김 대리가 소리치자 3팀에서 직원 한 명이 조심스레 일어나서 대꾸를 한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이번에 갑자기 각인할 거 같아서….”

“각인한 것도 아니고, 각인할 것 같은데 그걸 벌써 보고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각인 예정이면 빨리 말을 해줘야, 팀에서도 사람을 구하니까요.”

“빨리 말할 거면 더 빨리 말했어야지. 나 이번에 이동한다 해서 신입 받았는데, 홍 주임 때문에 이동도 못 하게 생겼잖아!”

소리를 지르는 김 대리의 말과, 죄인처럼 조아리는 홍 주임의 몸짓에서 나는 전모를 파악했다.

이번 인사철에 김 대리가 타 센터로 이동하려고 작업 다 쳐놓고 신입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다른 팀의 주임이 각인으로 빠질 예정이라고 밝혀서 신입도 뺏기고 이동도 막힌 상황이다.

운이 안 좋았다.

“홍 주임이 잘못한 건 없지 않아요?”

“그렇죠. 김 대리가 운이 안 좋았네요.”

김 주임이 소곤소곤 나에게 동의를 구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었다.

“2팀에 박 주임이 3팀으로 옮겨간대요. 신입은 2팀에 남아있고요.”

“그건 그거대로 신입한테 최악이겠네요.”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김 주임이 주변을 한번 스윽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을 해온다.

“이번 신입, 아버지가 타 센터 가이드 실장이래요.”

아. 귀족 가이드셨고만.

“그럼 김 대리한테 최악이겠네요.”

이동도 못 해, 밑에 일 다 해주고 지 성질 받아주던 직원도 뺏겨. 지랄을 해야 하는데, 새로 온 신입은 귀족 가이드야. 김 대리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근데 별로 동정은 안 가네요. 대리님.”

김 주임은 쌤통이라며 작게 킬킬 웃었다. 나는 말없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인사철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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