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11/21)

Chapter 11.

매칭률 테스트를 끝낸 도지윤이 좀 늦는다 싶더니, 또 손에 무엇인가 들고 들어왔다. 뒷골을 타고 흐르는 불안감에 나는 도지윤의 손에 들린 쇼핑백에 시선을 고정하고 물어봤다.

“도지윤 에스퍼. 그건 또 뭡니까?”

그러자 도지윤이 예쁘게 웃으며, 나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대리님 선물이요.”

떨리는 손을 들어 도지윤이 준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안을 내려다보니, 빨간색의 케이스가 보였다. 꺼내 들어 케이스를 열자, 옆에서 구경하던 김 주임이 감탄을 뱉었다.

“우와.”

그리고 나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3년은 더 늙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자, 여전히 예쁘게 웃는 도지윤이 보였다.

“이게 뭐예요.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내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빨간 케이스에 곱게 포장이 되어있는 것은, 금괴였다.

“그러니까. 도지윤 에스퍼. 윤리 강령 위반이라니까요….”

내가 빡쳐서 이를 악물고 말하자, 도지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님이 현금만 안 된다면서요.”

시발.

“에스퍼가 가이드한테 줘서 안 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죠. 도지윤 에스퍼. 그중에 하나가 돈이고, 다른 것으로는 폭력, 추행, 유가 증권, 금, 기타 등등이 있어요.”

“금도 안 돼요?”

도지윤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진짜… 에스퍼 지원팀에게 항의라도 해야겠네요. 에스퍼 교육을 어떻게 시키….”

나는 말을 하다 도지윤의 상식이 부족한 이유가 어렸을 적의, 불행한 과거였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래. 나만 참으면 되지.

나는 들고 있는 금괴로 도지윤의 머리를 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담았다.

“도지윤 에스퍼. 가져가세요.”

그러자 도지윤은 내게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도지윤은 계속 징징거렸다. 하지만 내가 대꾸도 안 하자, 도지윤은 ‘그럼 각인할 때 드릴게요!’라며 희망에 찬 눈빛을 반짝거렸다. 난 비웃으며 ‘알아서 하세요.’라고 대꾸해 준 뒤, 집 문을 쾅 닫아버렸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날짜는 지나간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출근하기 싫다. 시발.’이라고 외치던 것이, ‘좀만 있으면!’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고 하니, 일주일의 반이 지나갔다는 의미이다.

“대리님. 이번 주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오전에 도지윤과 함께하는 가이딩 시간에, 도지윤이 나를 끌어안고 들뜬 목소리로 재잘재잘 말을 한다.

“주말은 옳죠. 언제나 옳죠.”

내가 도지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자, 도지윤이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도지윤 에스퍼. 숨 막힙니다. 좀 풀어요.”

요즘의 도지윤은 종종 나에게 살인 욕구가 치미는 것인지, 나를 숨 막히게 꽉 껴안아 압사시키려고 했다.

“죄송해요.”

그러나 내가 힘들다고 하면, 금세 사과를 하고 힘을 풀었다.

“대리님하고 이번 주 토요일에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우리 첫 데이트예요.”

“…그러니까. 숨 막힌다니까요. 도지윤 에스퍼. 힘 좀 푸십시오.”

“죄송해요. 들떠서 힘 조절이 안 돼요.”

오늘 오전 가이딩 시간에, 도지윤은 나에게 사과를 수십 번은 반복했다. 그럼에도 나는 크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도지윤이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여, 나는 조용조용 힘만 좀 풀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내일이 주말이었으면 좋겠어요.”

가이딩이 끝나자 도지윤이 나를 보며 예쁘게 웃으며, 입술에 뽀뽀를 했다.

은근슬쩍 들어오는 개수작에도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지윤의 장단에 맞추어 그래요 그래요 하며 웃어주었다. 그러나 도지윤이 내 귓바퀴를 핥다, 내 뺨으로 입술을 옮기고, 그리고 내 아랫입술을 빨다 혀가 입안으로 넘어와 내 목에서 신음이 나올 때에는 도지윤의 개수작을 밀어내었다.

나는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있었고, 도지윤은 내 위에서 누르듯 안고 있었다. 모자란 숨에 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지만, 도지윤이 날 덮치고 있어서 뿌리치기도 여의치 않았다.

“좀. 떨어져요. 숨쉬기 힘들어요.”

도지윤이 예쁘게 웃으며, 날 일으켜주고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끝까지 중얼거리는 도지윤에게 나도 웃으면서 대꾸해주었다.

“금요일은 시간 안 가는데.”

“너무해요….”

도지윤이 침울한 척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도지윤도 따라 웃었다.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봄처럼 포근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감정의 싹이, 점점 자라고 있었다. 동정인지 애정인지 긴가민가하던 싹이 점점 형태를 드러냈다. 물을 주지도 않았고, 예쁜 화분에 옮길 용기도 나지 않아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제 자신을 보아달라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리님. 식사하러 갈래요?”

내 상념을 깨우며 도지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고개를 들고 웃느라 쏙 들어간 도지윤의 보조개를 쳐다보았다.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온다.

나를 바라보는 도지윤의 행복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붉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내 귓불을 만지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에게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 순간, 나는 긴가민가했던 내 감정의 싹을 올바르게 명명할 수 있었다.

나는 도지윤을 좋아한다.

“가요. 밥 먹으러.”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얼굴에 이 당황스러움이, 깨달음이, 도지윤을 향한 사랑스러움이 보일까 두려워 나는 도지윤을 뒤에 두고 걸으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나는 도지윤을 훈련실로 쫓아내다시피 밀어내었다. 혼자만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왜.

의미 없이 마우스를 왔다 갔다 움직이며 머리로는 도지윤을 생각했다.

오전 가이딩 때마다 나를 향해 접촉해오던 온기 때문에?

나와 눈이 마주칠 때 곱게 접어주던 그 순간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히 넘겨주던 손가락이?

내가 다른 사람, 에스퍼, 물건들에 시선을 줄 때마다 질투를 해오던 그 말이?

괴수에 잡혀갔을 때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다치지 말라며 시무룩한 모습이?

역가이딩 이후 누워있을 때, 나를 지켜주기로 약속하며 내 가슴을 도닥여주던 손길이?

내게 가이딩을 해달라며 눈치 보던 눈동자가?

그 모든 도지윤의 모습이 들숨에 생각났다가, 날숨에 ‘좋아한다’로 치환되어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지막에 생각나는 모습은.

‘대리님이 필요해요.’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던 검은 눈이었다.

나를. 필요로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에스퍼가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가 좋아하는 에스퍼가 있다.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가락도 내쉬고 있던 숨도 멈추고 생각에 전념하고 있을 때, 가이딩 패드가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띠리링 울리는 차가운 기계음에 화들짝 놀라 가이딩 패드를 살펴보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이딩 실장의 호출이었다.

도지윤에 취해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더불어 불안감이 도지윤 대신 스멀스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왜 또 나를 불렀는지, 입술을 깨물며 패드의 호출에 수락 버튼을 눌렀다.

직장 상사를 자주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특히나 만날 때마다 문제가 생겼던 직장 상사라면 꼭, 필수로 피하고 싶다. 하지만 난 일개 월급쟁이였고 특히나 을이었다. 아니, 을도 아니라 갑을병’정’, ‘정’의 위치쯤에 있을 것이다.

언제나 똑같이 나를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주는 비서에게 맞인사를 하고, 나는 실장의 방문을 두 번 두드려 실장의 들어오란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호출을 받을 때부터 자리 잡은 불안감이 이제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부르셨습니까.”

“앉아요. 이 대리.”

실장은 나에게 자리를 권하며, 바로 소파에 앉았다. 나도 실장의 맞은편에 정자세로 앉았다.

“이전에 내 부탁은 들어줘서 고마워요.”

실장이 ‘도지윤과 신입의 매칭 테스트’ 건에 대해 감사를 표하자, 나는 겸손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실장은 소파의 팔걸이에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바쁜 사람 앉혀놓고 말 빙빙 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재주도 없고.”

도대체 무슨 하려고 이렇게 겁을 주는 건지 모르겠다.

“말씀하십시오. 실장님.”

“도지윤과 윤 주임 매칭 테스트 결과가 64퍼센트가 나왔어요.”

“네.”

“윤 주임은 A급 가이드고요.”

“…네.”

그제야, 나는 실장이 하려는 말의 실마리가 잡혔다.

“이 대리는 B급 가이드에, 매칭률이 86.5퍼센트죠.”

“…윤 주임은 70퍼센트를 못 넘지 않았습니까.”

“알아요. 하지만 이 대리도 알다시피, 매칭률은 조금씩 변해요.”

“제가 알고 있기로 70퍼센트 이하에서 70퍼센트 이상으로 변화한 건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지윤 같은 특이 케이스도 있는데, 걔 가이드도 특이할 수 있죠.”

실장이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맥락은 명백했다.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윤 주임이 이 대리보다 매칭률이 크게 떨어지는 건 알고 있지만, 전 윤 주임의 등급과 도지윤의 ‘특이성’에 기대를 걸고 있어요. 도지윤에게 매칭률이 50퍼센트 넘는 가이드가 나온 것, 특히 A급 가이드가 나온 것에 대해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

“회사 입장도 S급 에스퍼에게, 이 대리에겐 미안하지만 B급 가이드보다는 A급 가이드가 옆에 있는 게 보기에도 더 좋고요.”

허. 참.

“제 의사가 반영이 됩니까?”

그러자 실장이 나를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이 대리. 회사 생활 일이 년 한 거 아니잖아요.”

“도지윤 에스퍼와 ‘임시 전담’ 계약을 맺었습니다.”

“네. 이제 ‘임시 전담’ 계약서는 윤 주임과 도지윤 에스퍼가 다시 작성할 겁니다.”

나는 실장의 눈에 띄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콕콕 거슬리듯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 내 감정인지 자존심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아픈 것보다는 차라리 손바닥이 아픈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손바닥에 손톱을 깊숙이 박았다.

“하지만 계약 해지에 관해서….”

“이 대리. 계약서에는 ‘기간’에 대해 명시되지 않았어요. 다만 둘의 합의, 혹은 회사 사정에 의해 해지가 가능하다는 문구가 들어있지요.”

“…도지윤 에스퍼가 원하지 않을 겁니다. 새로 ‘임시 전담’ 계약서를 작성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 부분은 이 대리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실장은 딱 잘라 말하며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미 내가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아니 윤 주임과 도지윤의 매칭률 결과가 나왔을 때부터 정해진 이야기였다.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는 S급 에스퍼예요. 가이드가 누가 되는 것인지, 가이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현재 그의 상태는 어떤지에 우리 센터를 넘어 중앙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네.”

“두 사람의 의견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가이드 실장으로서 도지윤 에스퍼에게 더 나은 등급의, 더 높은 매칭률을 가진 적합한 가이드를 찾아줘야 해요.”

“전 적합하지 않습니까.”

내가 실장을 도전적으로 쳐다보자, 실장은 전혀 타격받은 것이 없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잖아요, 이 대리. 모두에게는 적합한 자리가 있어요. 이 대리에게는 이 대리에게 적합한 자리가 있지요.”

실장은 완곡히 말을 했지만, 결국은 ‘네 자리는 도지윤의 옆자리가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요즘 세상에 매칭률 높다고 다 각인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때야 매칭률 높으면 다 각인해야 하는 줄 알았지.”

실장이 다시 차를 들어 호로록 마신다.

“이 대리도 처음에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맡았을 때, 말했잖아요. B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를 가이딩 하기엔 역부족이라고요.”

“…….”

“동의합니다. 그래서 지금 A급으로 바꾸겠다는 거고요.”

씁쓸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쓸모를 다한 녹차 티백 같은 것이었다. 회사에선 처음 간만 보고 맛이 괜찮은 것 같으니, 고품질의 녹차로 갈아탄 것뿐이다.

“갑작스럽게 이런 통보를 해서 미안하군요. 이 대리. 아마 이 대리도 도지윤 에스퍼에게 정이 많이 들었을 거고, 도지윤 에스퍼도 듣자 하니 이 대리를 많이 따랐다고 하던데.”

나는 실장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가이딩 거부 문제는….”

“이 대리가 도지윤 에스퍼에게 가이딩 거부 문제가 없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윤 주임에게도 없는지는 알아봐야죠.”

“…….”

“이 대리. 윤 주임에게 가이딩 거부 문제만 발생하지 않으면.”

실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

“도지윤 에스퍼는 누구를 선택할까요.”

아득해졌다.

윤 주임은 나보다 어리고, 등급도 높고, 여자였다. 도지윤이 윤 주임과 각인을 할 수는 없지만, 도지윤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전 남친처럼.

실장을 쳐다보던 내 시선이 무거운 추를 매단 듯 점점 내려갔고, 실장은 나의 패배의 기운을 느낀 듯 따뜻하게 말을 했다.

“이 대리. 회사에선, 특히 우리 회사에서는 공과 사를 구별하기가 힘들죠. 가이딩이란 업무가 그런 법이니까요. 하지만 가이딩은 가이딩일 뿐이에요. 신입 시절 교육을 잊지는 않았죠?”

접촉을 기반으로 하는 가이딩, 에스퍼들의 집착, 매칭률 70퍼센트 이상에서 나타나는 각인이라는 요상한 시스템.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회사에서는 공과 사를 구별하기 어렵다.

회사의 잣대는 언제나 제멋대로여서 표면적으로는 공과 사를 구별하라고 외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과 사의 개념은 언제나 왔다 갔다 한다.

나도, 이 회사의 일원이자 부품인 나도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 특히 회사에서 정의하는 공과 사를.

내가 도지윤에게 사적인 감정이 생기더라도, 공을 생각해야 한다. 회사는 개인보다 전체를 끌고 가야 하니까.

“나도, 소싯적에 여러 에스퍼를 만나봤었어요. 에스퍼들은 이기주의에 욕심이 많고, 그런 에스퍼들 때문에 가이드들은 헷갈려 하죠.”

나는 회사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해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도지윤 에스퍼에게는 실장님께서 말씀하십시오.”

이 싸움은 결국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네. 이해해줘서 고맙군요. 이 대리.”

“오늘 오후 조퇴하고, 내일 연차 좀 사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이번 주 안으로 다 정리해서, 다음 주에는 정상 근무 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을게요. 수고했어요. 이 대리.”

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실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내려다본 내 손바닥에, 주먹을 꽉 쥐어서 생긴 손톱 모양의 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괜찮다. 다시 차올라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올해는 삼재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나 보다. 어디 용한 집에 가서 부적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 비참함과 씁쓸함, 자괴감으로 똘똘 뭉친 추가 천근만근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회사다. 이곳은 회사다.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팀으로 돌아왔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내 모습을 본 주 주임이 깜짝 놀라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고 했지만, 지금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을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좀 안 좋네요. 주 주임. 오늘 조퇴하고 내일도 연차 좀 쓰려고요.”

“헉. 많이 안 좋아요?”

나는 주 주임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컴퓨터로 조퇴원과 휴가원을 올렸다.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고… 집에서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는 도지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퇴근하기 전, 주 주임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다른 분들에게 말 좀 잘해줘요. 먼저 간다고.”

“네네.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대리님.”

그제야 나는 작게 웃으며 팀을 나섰다. 그러나 웃음은 수 초도 유지되지 못했다.

좆같아서 퇴사하고 싶다.

***

집에 돌아오자 오후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가라앉아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작은 외부의 힘에도 금세 휩쓸려 불안정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답은 명확했다. 내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나를 지키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내 자리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자리가 없는 사람이라 어느 곳을 부유해도 괜찮을 것이다.

실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 자리가 도지윤의 손바닥이나 어깨이기를 바랐지만,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곳에 안착하지 못했고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씻는 중에도, 커튼을 치고 꾸물꾸물 침대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핸드폰이 지잉지잉 울려대고 있었다. 도지윤이었다.

나는 보지 않았고, 나중에는 너무 시끄럽게 울려대서 그냥 꺼버렸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든 나를 보며, ‘신경줄 질기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단순한 피곤함은 아니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내가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아프다.’였다.

나는 아팠다. 감성적인 의미로 ‘아프다.’가 아닌 물리적으로 ‘아프다.’의 의미였다. 마음의 열병이 주인의 의지에 반하여, 온몸으로 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의 열원은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잃고, 그저 허공에 의미 없이 대류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목구멍에서 뜨거움이 치솟았다. 내가 조금 정신을 차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방 안에서 나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마음도 몸도 너무 추웠다.

시간을 확인할 수 없어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수십 건이 들어와 있었다. 도지윤이었다.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 도지윤에겐 문자도 들어와 있었다.

[대리님. 숙소에요?]

[많이 아파요?]

[주무세요?]

[병원 갈래요?]

수없이 걱정하는 문자들의 끝은 ‘대리님. 약이랑 죽, 문밖에 놔뒀어요.’였다. 내 속에서 울컥, 열이나 뜨거운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 넘어 올라왔다. 입을 열어 토하려고 해도 목구멍에서 꽉 막혀 넘어 올라오지 못한 감정을, 나는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채 식도 한가운데 두고 버텨야만 했다.

어지러운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걸어가 현관문을 열자, 죽과 약이 들어 있는 쇼핑백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는 실장이, 회사가 일개 사원인 나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소모품처럼 사용한 것에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졸렬하게, 역시 나에게는 약자의 입장인 도지윤이 나에게 준 호의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은 쓰레기통을 바라보며, 물 한 잔과 함께 식도 한가운데에 걸려있던 감정을 다시 몸 안으로 꾹꾹 삼켜 넘겼다. 그리고 비척비척 침실로 돌아가 차갑게 식어버린 이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시간이 사라져 있었다. 금요일 낮에는 화장실에 갈 때, 어지러워 쓰러질 뻔했다. ‘이러다가 집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것인가, 내가 죽으면 내 시체는 누가 발견하지? 고독사하는 것인가?’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불쑥 치밀어 오르다 일그러지는 시야 사이로 사라졌다.

회사와 나, 도지윤과 나의 문제보다는 역시 삶에 대한 본능이 우선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도지윤에게서는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다. 문자도 간간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시끄러운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놨다. 그냥 나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또다시 한밤중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전원이 꺼져 있기에 더듬더듬 핸드폰 충전 선을 찾아 연결했다. 낮보다는 살 만해서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섰지만, 머리가 핑 돌아 다시 침대에 털썩 앉았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재빨리 벽을 붙잡고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움직여 방 밖으로 나가자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바라본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리고 있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걸어가서 현관문 앞에 섰다.

“대리님.”

도지윤은 내가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을 안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도지윤은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을까.

내 뜨거운 손에 비해 차가운 금속 재질의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자, 시린 겨울밤의 냉기가 침입했다. 현관문의 자동 센서로 감지된 불빛 아래에 도지윤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갈라지고 찢겨 엉망이 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리님. 인사 발령지 뭐예요.”

“좀. 벨을 누르지 그랬어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문턱에 몸을 기대고 여전히 아름다운 도지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내 시선을 잡아왔던 붉은 입술이, 얼굴처럼 하얗고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대리님 벨 꺼놨잖아요. 인사 발령지 뭐예요.”

말을 돌리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도지윤은 평소의 맹한 웃음도 없이 미친 눈깔을 하고 나를 압박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인사 발령지가 왜요.”

“대리님하고 저하고 ‘임시 전담’ 해지됐다고 뜨던데요.”

도지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관 불이 작은 소음을 내며 꺼졌다.

“가이드 실장님에게 설명 못 들었습니까?”

“이상한 개소리만 하길래 흘려들었어요.”

“그럼 가서 다시 들으십시오.”

나는 내 목소리가 평소와 똑같은 톤과 어조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대리님….”

“네. 도지윤 에스퍼.”

“제 전담 가이드 해주신다고 했잖아요.”

“…….”

“그 좆같은 매칭 테스트 해주기만 하면, 제 전담 가이드 해주신다면서요.”

도지윤은 꺼질 듯이 가냘픈 목소리로 시작해, 점점 화가 난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 안 버린다면서요.”

그리고 다시 도지윤은 울먹였고, 고저가 완전히 뒤바뀌는 그의 감정의 널뛰기를 나는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저 혼자 두지 않는다면서요.”

“…….”

“절 지켜주겠다면서요.”

울먹이던 도지윤은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도지윤의 눈물에 반사되었다. 어둠 속에서 서 있는 도지윤의 검은 그림자가, 온몸을 흔들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위로를 해주려다가, 그냥 주먹을 꽉 쥐고 손바닥에 손톱을 박았다. 이건 공과 사 중 어느 영역에 속해있는 것일까.

나는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대리님….”

이제 도지윤은 엉엉 울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저 버리지 마세요. 대리님.”

“미안해요.”

“제 옆에 있어줘요.”

“미안해요.”

“전담 가이드 안 해주셔도 돼요. 임시로도 만족할 테니까.”

“미안해요.”

나는 도지윤이 울면서 하는 모든 말에, ‘미안해요’라고 답을 해줬다. 도지윤의 옆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한 것은 나였지만, 온몸을 떨며 애정을 구걸하는 것은 도지윤이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 도지윤이 윤 주임과 가이딩을 하기 전의 이야기다. 내가 지금 도지윤을 받아주고, 윤 주임과 도지윤이 가이딩 거부가 없다면, 이제 울면서 날 버리지 말라고 하는 쪽은 내가 될 것이다.

혹은 윤 주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도지윤에게 나보다 더 높은 등급의, 적당한 매칭률의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반복적으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런 좆같은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도지윤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 부끄러움 그리고 애정. 그 모든 마음들을 돌돌 뭉쳐 어둠에 잠긴 신발장 한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도지윤 에스퍼. 그만 울어요.”

“하… 하지만 대리님이.”

도지윤은 헐떡이면서 나를 원망했다.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 실장님의 말 그대롭니다. 회사 사정에 따라, 저와의 ‘임시 전담’ 계약은 해지되었습니다.”

“…….”

“이제 더 이상 우리 집 앞에서 날 기다리지도, 회사 내에서 따라다니지도, 타 에스퍼 가이딩 할 때도 들어오지도 마십시오.”

“…….”

“우리는 이제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까, 앞으로 도지윤 에스퍼가 그런 행동을 하면 추행으로 신고할 겁니다.”

“…….”

“더 높은 등급의, 매칭률의 가이드를 찾아줄 겁니다. 회사에서는.”

이번 회사의 결정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도지윤의 가이드가 아니다. 언젠가 나타날 도지윤의 가이드를 위한 ‘임시’ 전담 가이드일 뿐, 적당한 등급의 적당한 매칭률을 가진 가이드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나는 내쳐질 수 있다.

“제 가이드는 대리님이에요….”

내가 B급 가이드라 S급 에스퍼의 가이딩에 대해 자신 없다 회사에 항의를 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금, 도지윤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달은 지금, 회사는 B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 옆에 있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을 했다.

“확신하지 마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의 가이드를 맡게 된다면 ‘부족’에 관한 꼬리표는 나를 평생 쫓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변수는 많고, 작은 일도 일어날 확률은 있죠.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도지윤 에스퍼의 후회가 될 겁니다.”

그러자 도지윤은 다시 숨이 넘어가라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도지윤 에스퍼. 그리고 미안한데. 내가 지금 진짜 몸이 안 좋아요.”

문턱에 기대, 현관문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달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겨울밤의 차가운 냉기가 내 뜨거운 몸을 넘어 오장 육부를 침범해오는 느낌이었다. 딱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내 말에 숙여져있던 도지윤의 고개가 휙 하고 들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희미한 빛이 도지윤의 젖은 얼굴을 덧그렸다. 예뻤다.

도지윤의 그림자가 내 이마로 손을 올렸다.

“대리님. 많이 아….”

그러나 그림자는 내 얼굴에 닿지 못했다. 도지윤과 감정적, 육체적으로 거리를 둬야 한다는 나의 무의식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도지윤의 손을 쳐버렸다.

도지윤은 허공에 뜬 손을 수습하지 못한 채 잠시 굳어있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도지윤 에스퍼. 행복하길 바라요.”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현관문의 자동 센서에 의해 불이 들어왔다. 그 빛 아래서 도지윤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꺽꺽거리며 운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도지윤의 눈에는 어떤 슬픔이나 원망, 설움의 감정은 한 줌도 보이지 않았다. 도지윤의 짐승처럼 확장된 동공은, 나를 사냥감 보듯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에요?”

도지윤의 붉은 입술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도지윤을 바라만 보았다.

언제부터 나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오싹해졌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 것 같았던 도지윤은, 그러나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독기 가득한 쇠 끓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내 가이드를. 이렇게 포기하라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 밑을 발갛게 물들인 도지윤의 목소리는, 마치 한순간에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자가 내지르는 절규 같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겨울밤의 냉기를 갑옷처럼 두른 도지윤은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처럼, 채울 수 없는 허기짐으로 텅 비어버린 굶주림이 도지윤의 낯을 찢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이 모습이 도지윤의 본모습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문을 천천히 닫았다. 우리의 마지막을 맺으며 닫히는 문 너머로 도지윤이 음산하게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단어를 뱉었다.

“나도, 내가 행복하길 바라요. 대리님.”

잠시 뒤, 도지윤의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복도를 울렸다.

원래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는 도지윤이 일부러 내게 들으란 듯이 내는 발걸음 소리가, 나에게 내미는 도전장 같았다.

***

결국 도지윤이 그렇게 기대하던 주말 데이트는 이뤄지지 못했다. 아마 평생 도지윤과 주말 데이트는 성사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주말 내내 열병과 도지윤 사이에서 앓고 끙끙댔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출근은 해야 한다. 좆같은 직장인의 삶이었다.

“대리님. 몸은 괜찮으세요?”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김 주임이 걱정스레 나에게 물어왔다.

“네. 면역력이 떨어졌나 봐요. 홍삼이라도 챙겨 먹어야겠어요.”

“아. 그리고 인사 발령지….”

“알고 있습니다. 가이드 실장님하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하자, 밝은 목소리의 주 주임이 재잘재잘 말을 했다.

“대리님. 그럼 기념으로 회식이라도 할까요?”

“네. 그것도 좋네요. 그런데 다음에 합시다. 제가 요즘 진짜 몸이 안 좋아요. 주말에도 죽다 살아났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해주자, 주 주임은 다시 연신 내 걱정을 해왔다. 네 명의 주임의 걱정에 나는 간신히 미소 지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가이딩 패드를 확인하자, 언제나 보이던 그린라이트가 사라져 있었다. 씁쓸함을 삼키며 이메일 함을 살펴 급한 일정이 없나 확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큰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들어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옆자리의 김 주임이 나에게 소곤소곤 상황을 설명해줬다.

“2팀 김 대리가 신입 괴롭혀요.”

잠시 김 주임을 흘끗 쳐다보고 몸을 낮춰 물어보았다.

“왜요?”

“박 주임 3팀으로 보내고, 신입이라 지 뒤처리 못한다고 갈궈대는 거죠.”

“귀족 가이드 아니었어요?”

“맞는데… 김 대리 센터 못 옮겨서, 지금 눈 돌았어요.”

졸렬한 놈이 꼭 지 같은 짓만 한다. 그래도 뒷배 있는 신입이라, 못 건들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선 내가 김 대리를 과소평가한 듯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신입, 윤 주임을 쳐다보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인가.

“윤 주임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울면서 화장실로 간 게 두 번이에요.”

김 주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 주임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세 번이네요.”

저절로 ‘쯔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이미 울며 사라져버린 신입에 대한 동정심은 한쪽 구석에 곱게 접어놓고, 나는 나 자신에게 집중했다.

내 자리 뒤에 관상용 화초처럼 앉아있던 도지윤이, 개소리를 지껄여대던 도지윤이, 지 좆대로 행동하던 도지윤이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이 맞고, 익숙한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다시 적응할 것이다.

가이딩 패드를 살펴보자, <긴급> 가이딩이 몇 건 보였다. 도지윤에게 전념해서 가이딩 하기 위해 <긴급>은 최대한 피해왔는데, 이제 해도 될 것 같았다. <긴급>을 클릭하려고 하자, 순식간에 다른 가이드들이 채갔다.

두 눈을 꿈뻑이며 내 생각보다 일을 열심히 하는 다른 가이드들에게 감탄했다. 그리고는 가이딩 리스트 중 가장 상단에 있는 것을 클릭하고 바로 수락을 눌렀다.

가볍게 인적 사항과 에스퍼가 대기하고 있는 룸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걸었다.

내 일상에 한 방울씩 스며들었던 도지윤이, 내 삶과 영혼을 축축이 적셔 두었다. 복도를 따라 걷는 내 그림자의 한 발자국마다 남겨진 물기를 따라 다시 도지윤이 따라올까 두려웠다.

혹은 따라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 도지윤의 부재와 존재, 둘 중 어느 것에 더 상처 입을지 몰라 나는 꼿꼿이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어갔다.

311호라 쓰인 가이딩 전용실 앞에 도착하자,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며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다른 가이딩 전용실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대기하고 있는 에스퍼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앉아서 가볍게 에스퍼의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이상윤 에스퍼.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가벼운 주기 점검이네요. 손 주십시오.”

이상윤이 내미는 손을 잡자, 머릿속에서 들릴 리 없는 도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리님이 다른 에스퍼 손잡는 거 좆같아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내쫓았다.

“괜찮으세요. 대리님?”

“아.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나를 걱정하는 에스퍼에게 담담히 말을 해주었다.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은 다 몸이 안 좋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슬쩍 흘려보내 확인을 해보니, 그다지 가이딩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상태였다.

“굳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해드리겠습니다. 15분 정도 소요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에너지를 흘려보내며, 코딱지만큼 뭉쳐있는 에너지를 풀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도래했다.

“저, 대리님.”

침묵 동안 가이딩 지원실 어느 구석을 쳐다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상윤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 초코파이는…?”

“초코파이요?”

하지만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이상윤에게 나는 눈을 멀뚱거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초코파이 못 받아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러자 이상윤은 충격받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에스퍼라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난 평범한 가이드다.

“괜찮으세요. 이상윤 에스퍼?”

그래서 아까와는 반대로 나는 이상윤의 상태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4구역 에스퍼 놈들은 정신 건강 검진을 어떻게 받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땐 죄다 미통과된 놈들이다.

“아닙니다. 혹시 대리님 초코파이 싫어하거나 하진 않으시죠?”

“네. 저 달달한 거 좋아합니다.”

의아하지만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이상윤은 기쁜 듯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미친놈이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인사 발령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미… 아니. 도지윤 에스퍼가 하도 대리님 싸고돌길래 각인까지 가버릴 줄 알았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주제에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저에게 기회가 안 오는 줄 알고….”

이상윤은 이제 눈물을 글썽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가 미친놈임을 확신했다. 나는 가이딩 패드의 ‘가이드 구조 호출’을 눌러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대리님.”

이상윤이 나에게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띠리리리리리리링.

건물 전체를 진동하며 날카로운 기계음의 알람이 울렸다. 괴수 출몰과는 다른 형태의 소리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빨리 가이딩 패드의 화면을 바라보자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당황해서 이상윤을 쳐다보는데 이상윤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해 서로 허둥지둥하고 있자니, 곧 사내방송이 울렸다.

[시설팀에서 알려드립니다. 방금 화재 경보가 작동했으니, 직원들은 신속히 밖으로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행히 괴수 출몰은 아닌 단순 화재 경보인 듯했다. 나는 이상윤에게 해주던 가이딩을 중간에 끊고, 가이딩 패드를 챙겨 일어났다.

“가시죠. 이상윤 에스퍼.”

이상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섰다. 내가 지원실의 문을 잡으려 하자, 이상윤이 나를 만류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미친놈이지만 그래도 에스퍼라고 가이드에 대한 매너가 제대로 잡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로 물러섰다. 이상윤이 가이딩실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에는 화재 경보를 듣고 대피하려는 몇몇 에스퍼와 가이드가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시설팀에서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방금 화재 경보가 작동했으니… 뭐? 도지윤? ]

복도로 나가자, 시설팀의 방송이 다시 한번 들렸고 끄트머리에 익숙하지만 이상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시설팀에서 알려드립니다. 화재는 정원 쪽에서 발생했다고 하오니, 그 부근으로는 다니지 마시고 건물 내에 계시는 직원들께서는 신속히 밖으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방송이 제대로 꺼지지 않았는지, ‘그 새끼는 왜 또 지랄인데?’ 하는 작은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왔다. 나는 불길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어. 이 대리님? 그쪽 아닙니다!”

이상윤의 뒤를 쫓아가다, 나는 정원을 확인해야겠다 싶어 정원으로 창이 나 있는 복도의 끝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이상윤이 당황해하며 나를 쫓아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창 너머로 검은색의 매캐한 연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지독한 화염과 기름의 따끔한 향취가 진동했다.

유독 가스를 들이마실까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 내려다본 정원에는 붉은 불이 넘실대고 있었다. 센터장이 얼마 전 비싼 돈을 들여 공수해왔다던 소나무도, 곱게 꾸며져 있던 사철나무도, 잔디밭도 모두 활활 타올라 불쏘시개의 용도가 되었다.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정원 위로 검은 연기가 잿더미를 하늘로, 하늘로 날렸다. 종말의 한 자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모두가 그 지옥도를 쳐다보며 얼어있을 때, 한 인영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지윤이었다. 도지윤은 기름으로 추정되는 하얀 통을 아직 타지 않은 정원의 구석구석에 탈탈 털어 붓고 있었다.

“이 시발놈아! 왜 또 미친 짓인데!”

한 에스퍼가 도지윤의 옆에서 악다구니를 써댔지만 도지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에스퍼가 허공에 물을 만들어내 정원 쪽으로 쏘아 보내자 도지윤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물은 날아오던 방향 반대로 처박혀, 센터 건물에 손상을 주었다. ‘악!’ 하는 시설팀의 비명이 들렸다.

정원을 둘러싸고 여러 명이 나와서, 혹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설팀도 에스퍼도 아무도 S급 에스퍼가 지랄하는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기름을 다 부었는지, 도지윤이 기름통을 낼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불 속에서 작게 펑 하는 소리와 기름 냄새가 한 번 더 타올랐다.

도지윤은 분명 제 이능으로 정원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기름을 부어 정원을 방화했다. 예상치 못한 도지윤의 미친 짓에 가슴이 서늘했다.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종말의 배경음이 되었고 흩날리는 불씨들이 지옥에서부터 날아온 씨앗처럼 허공을 부유했다. 천사 같다고 생각했던 도지윤은, 불바다를 배경으로 본인이 천사가 아니라 악마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게 뒷모습만 보였던 도지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던 도지윤은 정확히 나를 쳐다보고서는 언제나 내가 보았던 맹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 웃음을 바라보며, 일전에 도지윤이 했던 ‘다음번에 제 손 피하면, 이 정원 불태워버릴 거예요.’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이 미친 짓이, 누구를 향한 시위인지가 명백해졌다.

***

도지윤을 만난 이후로 ‘아연하다’라는 감정의 역치가 점점 갱신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 정도로는 놀라지 않아’라고 다짐했던 것이, 도지윤 때문에 매번 깨지고 있었다. 신박한 놈이었다.

도지윤의 방화 사건으로 인해 정원은 전소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타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나마 정원 밖으로 불길이 벗어나려고 할 때는 다른 에스퍼들이 진화하는 것을 도지윤이 허락해 주었다. ‘허락’이라는 단어가 미묘하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사용할 단어가 없었다.

도지윤은 정원을 진화하는 것만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센터의 다른 건물과 구조물들은 피해가 없었고, 오로지 정원만 새까맣게 타버렸다.

센터장이 비싼 돈을 들여 구해왔다던 소나무가 장작개비가 되어 그대로 숯이 되어버렸다. 듣자 하니 센터장은 에스퍼 실장과 가이드 실장을 불러 신명나게 지랄을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센터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말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눈 돌아갔다던 김 대리도 눈치 보느라 신입 갈구기를 멈추었다.

다만 김 대리의 마수에서 벗어난 신입은, 이제 실장에게 붙잡혀 들어갔다.

“대리님.”

“네?”

조용한 팀의 분위기를 의식해서 김 주임이 나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신입, 실장한테 불려 들어가서 엄청 깨지고 있대요.”

“왜요?”

“이번에 그 신입이 대리님 뒤 이어서 미… 아니,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 계약 맺었다면서요. 그래서 에스퍼 관리 못하냐고요.”

“아직 발령지 뜬 것도 아닌데도요?”

우리의 소곤거림에 어디서 나타난 건지, 주 주임도 끼어들었다. 나도 의아해서 김 주임을 쳐다보았다.

“저번 주에 도지윤 에스퍼하고 매칭률 결과 나오자마자 바로 실장에게 불려 들어가서 ‘임시 전담’ 계약서 작성했다던데요?”

“도지윤 에스퍼는 사인 아직 안 했잖아요.”

그러자 김 주임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거, 실장이 강제로 발령 낼 거라고 이미 인사 발령지 센터장한테까지 사인 다 받아놨대요. 지금 문서만 등록하면 된다던데요.”

실장이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실장은 왜 그렇게 그 신입, 도지윤 에스퍼하고 연결 못해서 안달이에요? 그 미… 아니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한테 꽂혔는데.”

주 주임이 나를 흘낏거리며 말을 하자, 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러자 주 주임은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 신입, 귀족 가이드잖아요. 다른 센터 가이드 실장이라던 그 아빠가 완전 헬리콥터 파파인가 봐요. 여기로 보낸 것도 일부러 도지윤 때문에 보낸 거라던데요.”

“아….”

“그리고 그 신입 아빠하고, 가이드 실장하고 동기래요.”

“그래서 실장이 신입하고 도지윤 에스퍼하고 그렇게 연결하려고 했던 거군요.”

나는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조금은 파악이 되었다. A급 가이드이자 아는 집 자식이랑 도지윤을 연결해주려고, 내 자존감을 박살내며 날 밀어낸 것이다. S급 에스퍼라면 가이드들, 특히나 지위 좀 있는 가이드라면 탐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금상첨화로 매칭률까지 좋게 나왔으니 더더욱 탐이 났겠지.

회사 내의 정치싸움을 떠올리며, 씁쓸한 속을 달랬다.

가이드 실장, 센터장한테 존나 깨져라. 나는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어쨌건 난 이제 도지윤의 가이드도 아니었고, 일개 직원이었다. 실장의 의지를 보아하니 어떻게 해서든 신입과 엮어줄 것 같고, 난 도지윤을 사이에 두고 실장이나 신입과 기싸움하고 싶지도 않다. 조용한 회사 생활. 조용한 월급쟁이. 그것이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다.

정원이 불에 타든 센터가 부서지든, 그건 실장이나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님께서 신경 쓰셔야 할 문제지 더 이상 내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다만.

다만 나를 보며 맹하게 웃던 도지윤은.

손끝이 움칠거렸다.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튀어 나간 손가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도지윤은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 옆에 내가 없을 뿐이지.

고개를 모니터로 향해, 내가 통제하지 못한 모든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

내가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벗어나면서, 도지윤의 별명이 왜 ‘미친개’인지 드디어 알아냈다. 나는 도지윤이 지 좆대로 행동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고, 말이 안 통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지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도지윤은 내 생각보다 더 지랄맞고, 더 지 좆대로 행동하는 놈이었다. 그런 놈에겐 사람을 지칭한 ‘놈’이란 표현이 아까웠고, 그래서 사람들이 도지윤을 미친‘개’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개가 사람보다 나은데…’ 하는 정신 나간 속삭임이 껌처럼 들러붙었다.

나는 정원 방화 사건 이후, 도지윤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다만 도지윤에 관한 소문만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방화 사건 직후 제멋대로 날뛰는 도지윤을 감당 못한 에스퍼 실장이, 도지윤을 향해 ‘이 새끼! 너 이럴 거면 집에 가!’라고 소리치자 도지윤은 진짜 집에 가버렸다.

그다음 날, 에스퍼 관리 못한다고 센터장에게 졸라 깨진 에스퍼 실장은 직접 도지윤 집에 가서 도지윤에게 어르고 달랬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따라갔던 다른 에스퍼 말에 의하면 둘은 고성이 오갈 정도로 싸웠고, 그 이후부터 도지윤에게 A급 에스퍼 넷이 따라붙었다. 경호 인력인지 감시 인력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훈련실에서 다른 에스퍼들과 훈련을 하던 도지윤은, 훈련실을 말 그대로 개박살 냈다고 한다. 덕분에 훈련실 중 지하 3A, B 구역은 사용 불가 상태였다. 시설팀에서 24시간 공정으로 시설 복구에 들어갈 것이란 얘기가 들렸다. 더불어 시설팀장이 눈물로 읍소하는 바람에 도지윤의 훈련실 출입은 당분간 금지되었다.

또한 에스퍼 지원팀에 가서도 개지랄을 떨었던지, 도지윤을 담당하는 직원이 울면서 에스퍼 실장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달래주는 실장이 그래도 도지윤을 담당하라고 말하자 직원은 실장 면전에 휴직계를 던졌다고 한다.

여기저기 들리는 소문들 중, 가이드 팀에서 가장 화자 되었던 이야기는 가장 최근에 도지윤이 센터장과 했던 면담 이야기였다.

4구역 센터의 방화 사건은 다른 구역의 센터 직원들에게도 스멀스멀 소문이 퍼져나갔지만, 퇴직을 1년 앞둔 센터장이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묻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센터장이 도지윤에게 땀을 뻘뻘 흘리며 무엇이 불만인지, 왜 그러는지 살살 달래자 도지윤이 말했다고 한다.

‘가이딩이 수준 미달이라서요.’

도지윤은 현재 ‘임시 전담 가이드’인 윤 주임과는 단 한 차례의 가이딩도 진행한 적이 없었지만, 센터장 앞에서 뻔뻔하게 입을 놀리는 바람에 가이드 실장은 다시 센터장에게 불려가 개처럼 털렸다. 그래서 열받은 가이드 실장은 다시 죄 없는 윤 주임을 불러 닦달을 해댔다.

행정 업무에 전혀 관심 없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도지윤은 가이딩 품질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불만 및 시정요구 사항을 올리고 있었다. 수치가 독보적인 탓에 중앙 감사팀에서 주시하고 있어, 조만간 감사가 내려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 와중에 가이드 실장은 도지윤과 신입직원의 ‘임시 전담’ 인사 발령을 강제로 내버렸다. 다만 치사하게 공개 문서로 등록하지 않고, 비공개로 등록해놨다. 그렇지만 센터 내의 직원들은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센터장이 가이드 실장에게 강제 발령을 만류했지만, 센터장은 내년에 퇴직이었고 가이드 실장은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이전부터 레임덕 비슷한 소리가 나오던 센터에서, 가이드 실장이 꼭지가 돌아 ‘도지윤 그 새끼한테 끌려다닐 수 없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며 강경하게 밀고 나가자 센터장이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고 한다.

인사 발령이 비공개로 등록된 날, 에스퍼 실장과 가이드 실장은 로비에서 대놓고 언쟁을 높였다.

“박 실장! 일 처리를 이렇게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제가 센터장님 앞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직원들 다 보는데 왜 이러세요?”

“박 실장이야 그 새끼하고 대면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만, 전 죽겠습니다. 좀 살려주세요, 박 실장! 이 개새끼가 와서 계속 개지랄하는데 못 해 먹겠습니다!”

“에스퍼 관리는 에스퍼 실장님께서 하셔야지, 왜 저한테 말씀하시나요?”

“에스퍼가 지랄하는 게 가이드 때문에 이러니 제가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3층 복도를 지나가다 흥미로운 소리에 이끌려, 재빨리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천장이 뻥 뚫려있는 건물 로비는 연극 무대가 된 양,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뛰쳐나와 관람을 하고 있었다. 다들 눈치는 있어서 로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알아서 위치 선정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 업무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에스퍼 실장님께서는 신경 끄시죠?”

“어떻게 신경 끕니까! 그리고 아무리 가이딩 업무가 가이드 권한이라고는 하지만, 에스퍼가 저렇게 원하고 가이드도 별말 없었다는데 그냥 두면 안 됩니까?”

양쪽 실장이 얼굴 붉혀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까지 전해졌나 보다. 최 주임이 잽싸게 내 옆에 붙어 속삭인다.

“에스퍼 실장, 능력은 좋은데 정치력이 없어서 진급 매번 물먹거든요. 그래서 가이드 실장이 개무시해요.”

고급 정보를 머릿속에 박아 넣고 다시 로비로 시선을 고정했다.

“S급 에스퍼에겐 그에 맞는 급의 가이드가 필요한 법이에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도지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S급 본인이 싫다는데, 이것도 직장 내 괴롭힘 아닙니까?”

“직자앙 내 괴로옵힘? 허. 최 실장님.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이게 직장 내 괴롭힘이지, 다른 게 직장 내 괴롭힘입니까? 그럴 거면 그냥 ‘임시 전담’ 풀고, 이전처럼 아무 가이드한테나 가이딩 받게 하시죠!”

에스퍼 실장의 한 방에 나는 입 모양으로 ‘오’를 만들며 최 주임을 바라보았다. 최 주임도 나와 똑같은 얼굴로 ‘나이스 한 방’이라 입 모양을 만들었다.

“최 실장님이 에스퍼들 사정을 다 봐주니까, 에스퍼들이 저렇게 제멋대로인 거 아니에요!”

“도지윤 그 새끼는 내가 사정 안 봐줘도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에스퍼 실장이 에스퍼 애들 얘기 들어주라고 있는 자리지, 그럼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뭘 하겠습니까?”

생각보다 정상적인 에스퍼 실장의 발언에 나는 조금 감동까지 받았다. 그리고 옆에 최 주임이 속삭였다.

“저런 사람이 진급해야 하는데, 절대 못하더라고요. 미스터리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애초에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게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 얘기 하실 거면 저도 할 말은 많죠! 도지윤 그 새끼가 역가이딩 해대서, 내 밑에 가이드 애들 줄줄이 실려 나갈 때도 전 입 다물고 가이딩 지시했어요!”

“그… 그건!”

“도지윤 에스퍼가 날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기 전에, 역가이딩으로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안 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박 실장.”

패색이 짙어진 분위기에, 에스퍼 실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허허. 우리가 지금 같이 4센터를 잘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거 아닙니까. 도지윤이 지금은 개지랄을 나한테만 떨고 있지만, 눈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 못 하지 않습니까.”

“이제 얘기가 통하겠네요. 도지윤 에스퍼를 통제 못하면 4센터는 끝이에요. 끝! 전 가이드 실장으로서 도지윤 에스퍼를 통제할 적절한 가이드를 붙여준 것뿐이에요.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어요. 최 실장님.”

가이드 실장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로비를 벗어나자, 에스퍼 실장의 ‘박 실장!’ 하면서 애처롭게 뒤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종결되는 상황에 로비에 나와 있던 직원들도 서로 수군거리며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이드 실장에게 ‘적절한 가이드’라고 인정받지 못한 내 입장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내가 저 소용돌이 휘말려 있었다면 매일 욕하고, 위경련이 일어나고, 퇴사를 생각했을 것 같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 멀리서 관람하고 있는 내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졸라 재밌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4구역의 모든 사건들을 주변인이 되어 쳐다보니, 예능이 따로 없었다. 팝콘이라도 마련해놔야 하는 고민이 들 정도였다.

이 정도가 되니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였을 때, 주변인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 가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완전 재밌었다.

***

마치 1구역으로 돌아간 듯, 내가 아닌 타인이 주인공인 소문에 하루하루가 흥미로웠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가 터질지, 누가 자극적인 이야기를 뿜어댈지 출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도지윤이 없는 회사생활에서 한 가지 더 변화된 것이 있었다. 어디 숨어있는지 몰랐던 에스퍼들의 플러팅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초콜릿이나 커피를 건네주더니, 얼굴을 붉히며 사라지는 에스퍼들이 늘어났다. 덕분에 나는 복도를 지나가기만 하면 손에 무언가가 생겼다.

마음에 드는 가이드가 있으면 대쉬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너도.

나보다 더 나은 가이드가 나타나면, 날 잊겠지.

‘대리님이 필요해요.’

도지윤 너도. 날 잊겠지.

아무리 초콜릿을 씹어대도, 입안이 달콤해지지 않았다. 자꾸 쓰게만 느껴져서 항상 먹던 아메리카노 대신 카페모카를 마셔 봐도, 더 이상 달달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콤함은 중독이었다. 난 달콤함을 지나치게 복용했었고,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중독은 병이었고, 나는 병을 치유해야 했다.

에스퍼들이 준 초콜릿은 다 주 주임에게 줘버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나는 사람이었다. 점점 도지윤이 없는 삶과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문’의 홍수 속에 나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가이드 1팀 이재하 대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스퍼 실장님 비서 최유리 주임입니다. 실장님께서 잠깐 뵙자고 하시는데요.]

도지윤이 없는 회사 생활 4일 차. 목요일이었다. 도지윤이 크고 작은 사고를 쳐대는 바람에 시간이 꽤 지났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보니 그다지 지나지 않았다.

오늘도 도지윤이 없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하루가 될 것이라 예상이 된 아침이었다. 그러나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에스퍼 실장의 비서는 부드럽게, 하지만 ‘에스퍼 실장이 찾으니 당장 튀어와라’라는 속뜻을 담아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예. 지금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가이드가 에스퍼 실장을 볼 일은 거의 없다. 사내 행사 때나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가끔 에스퍼 실장이 미각인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4구역 센터의 에스퍼 실장은 각인한 상대가 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손끝이 불안감에 술렁거렸다. 얼마 전, 로비에서 가이드 실장과 에스퍼 실장이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날 부른 이유가 짐작이 가면서도, 제발 그 이유로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에스퍼 실장 방 앞으로 가자,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비서가 나를 반겨주었다. 에스퍼 실장의 방문을 두 번 두드리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게.”

50대 초반의 말끔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나를 반겨준다. 나이를 먹어도 에스퍼는 에스퍼인지라 키도 크고 몸도 다부져 보였다. 다만 눈 밑에 거뭇거뭇한 다크서클이, 에스퍼의 괴물 같은 체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재빨리 방 안을 스캔했다. 가이드 실장실과 거의 별다를 것 없는 방 구조였지만, 책이나 서류가 가이드 실장보다 더 적었고 한쪽 구석에는 사무실 골프 매트가 바닥에 곱게 깔려있었다.

“이 대리, 거기 앉게.”

에스퍼 실장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나에게 권했다. 나는 잽싸게 실장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 4구역으로 넘어왔지?”

“이제 4개월 좀 넘었습니다.”

“뭐 힘든 건 없고?”

“네. 이제 거의 적응 다 된 것 같습니다.”

의례적인 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빨리 본론을 꺼내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실장은 내 시그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비서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우리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였었다고 들었네만.”

“네. 잠시 했었습니다.”

본론이 시작되었다.

“흠. 가이딩 할 때 별문제는 없었고?”

“등급 차이가 너무 커서 가이딩을 제대로 만족 못 시켰을 겁니다.”

“도지윤이 가이딩 받을 때, 개지… 아니, 고통을 호소한다던가 하는 건 없었나?”

“없었습니다.”

나는 내 직장 생활 10년 동안 갈고닦은 철벽을 동원했다. 혹시라도 가이드 실장과 에스퍼 실장 싸움 사이에 끼는 건 절대 사절이다.

“이번에 도지윤 ‘임시 전담 가이드’가 바뀌었다고 들었네.”

“네.”

“동의한 건가?”

“네. 가이드 실장님과 상의했습니다.”

내 말에 실장이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에스퍼 실장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 우리 도지윤 에스퍼가 말이야.”

실장이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는다.

“애가 성격이 지랄맞고, 행동을 예측 못하고, 할 말 못 할 말 구별 못하고, 지 하고 싶은 것만 하긴 하는데 나쁜 애는 아니야.”

실장님. 지금 하신 말에 긍정적인 내용은 단 한 토막도 없는데 나쁜 애가 아니라뇨?

“도지윤 에스퍼가 생긴 것도 반반하고, 사지 멀쩡하고, 거기다가 에스퍼는 연봉제인 거 알지? S급이니까 연봉은 또 얼마나 높게요.”

나는 실장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눈으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도 잘 버는 게 도지윤 에스퍼지.”

실장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술 끝의 떨림이 내 눈에 보였다.

“…네.”

나에게 대답을 원하는 실장의 눈초리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긍정의 한마디만 톡 내뱉었다. 그러자 실장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이 대리가 도지윤 에스퍼의 매력을 잘 알아보는구먼.”

나는 언제나 4구역 에스퍼 놈들 중에 제정신인 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내 앞에 앉아있는 실장도 4구역 에스퍼였다. 실장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나는 꿈뻑꿈뻑 눈만 깜빡이고 앉아있어야 했다.

“내가 우리 도지윤 에스퍼를 차암 아껴요. 어디 내어놔도 빠지질 않으니 이 센터, 저 센터에서 서로 데려가겠다고 난리야. 거기다가 가이드들도 어떻게 해서든 도지윤 에스퍼하고 매칭 테스트 해보겠다고 여기저기서 부탁이지.”

그러나 실장은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도지윤 에스퍼 얘기 들었지?”

“…네.”

“그 개자… 아니. 이 대리하고 ‘임시 전담’ 계약이 무효화되면서 상심이 큰 것 같네. 우리 도지윤 에스퍼가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너무 슬퍼서 좀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야.”

정신을 좀 빼놓고 다니는 수준이 아니던데.

그러면서 실장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문들이 많은데 다 진실은 아닌 거, 알고 있지. 자네?”

“…….”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집착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이 대리를 철석같이 믿었는데, ‘임시 전담’ 계약이 해지되어서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실장은 목이 탔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말인데,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하고 ‘임시 전담’ 계약. 계속할 생각 없는가?”

“…….”

“내가 가이드 실장한테는 말을 잘 해보겠네. 도지윤 에스퍼도 이 대리를 원하고 있고, 이 대리도 도지윤 에스퍼의 매력을 알아보는데 서로 윈윈하면 좋지 않은가.”

온화한 척 미소 짓고 있는 실장의 얼굴에 깊게 팬 다크서클이 너무 쉽게 보였다. 도지윤이 에스퍼 실장에게 와서 무슨 개지랄을 떨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에스퍼 실장의 저 ‘윈윈’은 왠지 나와 도지윤의 ‘윈윈’이 아니라, 에스퍼 실장과 도지윤의 ‘윈윈’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입을 떼야,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 세상에 쉬운 거절은 없다.

“이미 가이드 실장님과 얘기는 끝났고, 윤민지 주임에게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넘기기로 얘기가 다 됐습니다.”

“이 대리. 그건 고민하지 말게. 내가 가이드 실장을 설득해 보겠네.”

“아니요. 저는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얘기하자 에스퍼 실장은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흡사 ‘아 시발. 좆됐다’를 형상화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왜. 이 대리. 우리 도지윤 에스퍼가 마음에 안 드는가?”

나에게 질문하는 에스퍼 실장은, 본인의 질문을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 힘이 없었다.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S급 에스퍼에겐 본인의 등급에 맞는 가이드가 있어야 합니다. 단지 제가 B급 가이드라 도지윤 에스퍼를 케어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그의 가이딩도. 그의 행복도 케어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내 말에 에스퍼 실장이 절망적이라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든 실장의 두 눈은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두 손을 다시 꼭 맞잡은 실장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는 말이야. 이런 말하기 좀 뭐하지만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네. 그중에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가이딩이었지.”

실장의 말에 나는 ‘도지윤 아동학대 피해자설’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귓가에 한밤중 날 찾아왔던 도지윤의 엉엉 우는 소리가, 어린 도지윤이 엉엉 우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도지윤 에스퍼는 등급을 가리지 않네. 그냥 ‘가이딩’만 할 수 있으면 돼. 이제껏 두세 달에 한 번씩, 역가이딩을 해서 가이드들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

‘가이드들이 도지윤하고 매칭 테스트 한번 하려고 난리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 오 분도 지나지 않았다.

“에스퍼한테 가이딩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네. 그런데 도지윤은 평생 받아왔던 가이딩이 고통이었어.”

에스퍼 실장의 말에 나는 예전에 삼켜 눌렀던 어떤 감정이 스멀스멀 위로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가 싫은 건 알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에스퍼 한 명 살려준다 생각하고. 도지윤은 항상 제멋대로 행동하는 놈이지만, 그놈이 이렇게 난리 피우는 걸 본 적이 없어. 그것도 가이드 때문에.”

말을 마친 실장은 3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안에서 까끌까끌 넘어오려다 말았던 문장을 결국 내뱉어야 했다.

“싫은 건 아닙니다.”

“그래. 싫은 거 알겠… 뭐라고?”

“도지윤 에스퍼가 싫은 게 아니라고요.”

내 말에 실장의 얼굴이 신을 만난 신도처럼 환하게 빛이 났다.

“그럼 어서 ‘임시 전담’ 계약서를. 아니, 일단 둘이 각인하게.”

실장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실장님. 전 단지 도지윤 에스퍼가 행복했으면 하는 겁니다.”

내 말에 에스퍼 실장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도지윤 에스퍼가 어렸을 적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가이딩 문제도 익히 알고 있고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지 속은 착하고 다정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실장의 표정이 오묘해지고 있었다. 이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조금 들었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전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없을 뿐입니다.”

나의 속마음을 고백하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스퍼 실장이 곧 표정을 굳히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 대리. 내 직책을 걸고 약속하겠네. 자네 말고 도지윤 에스퍼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없어.”

실장의 한마디에, 위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던 감정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돌아다녀서 머리가 핑 돌 것도 같았지만, 차가웠던 내 몸을 따스하게 만드는 것을 손가락 끝, 발끝까지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를 필요로 하는 에스퍼. 나를 필요로 하는 도지윤.

나는 조금 감동받아 실장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러자 실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임시 전담’ 계약을 다시 하는 거지?”

“아… 그건 좀 고민해보겠습니다. 가이드 실장님이나 윤 주임하고 얽힌 문제도 있고.”

완강한 가이드 실장을 생각하면, 에스퍼 실장이 말한다고 들어줄까 의문이다. 나를 불러다 깨면 깼지, 순순히 도지윤을 넘겨주려고 하진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다시 도지윤을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회사와 가이드 실장의 벽은 너무 높았다.

“이 대리. 그럼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오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생각은 빨리 바뀌어야 할 거야.”

“네?”

실장이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도지윤이 곧 개지랄 떨 거거든.”

“…네?”

“이 대리 본인을 위해서도 빨리 결정하게.”

내 참. 남사스러워서 말할 수도 없고. 실장은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지만, 난 그 내용을 물어볼 수 없었다. 표정을 다시 갈무리한 실장은 나에게 나가서 일 보라며 인자하게 웃었다.

에스퍼 실장의 방을 나와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창밖으로 불타 시꺼멓게 변해버린 정원을 바라보며,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겁쟁이였다.

나를 필요로 하는 도지윤이 떠올랐지만, 나는 상처받을 내 자신이 두려워 결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기적이었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도지윤보다는 나였다.

나는 도지윤에게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라고 했지만,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은 나였다.

이기심과 자기혐오 사이에 갈팡질팡하며,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대리님.”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자니, 누군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정신을 퍼뜩 차려 앞을 보니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가이드 2팀 신입직원 윤민지 주임이었다.

내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윤 주임은 나에게 면담 요청을 했다. 나는 그의 사수도 아니고, 같은 팀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윤 주임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회사 로비에 위치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한참 업무 시간 중이라, 카페에는 마침 우리 둘밖에 없었다. 내 몫과 윤 주임의 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우울한 표정의 윤 주임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4구역 센터에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윤 주임의 얼굴은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내가 알기로 4구역으로 배치받은 이래로 윤 주임은 김 대리와 가이드 실장에게 개털리느라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다.

김 대리야 성격도 개차반인 데다, 이번 인사이동에 물먹어서 윤 주임을 달달 볶으면 볶았지 실장을 커버쳐줄 생각도 없어 보였고, 나는 다른 팀의 신입까지 신경 써줄 만한 여력이 없어 윤 주임을 무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껄끄러웠다. 그래서 윤 주임이 나에게 면담 요청을 했을 때는 당황스러운 마음 반, 부끄러운 마음 반이었다.

“요즘 힘들죠?”

“…….”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도 윤 주임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며 윤 주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가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3분의 1쯤 마셨을 때, 윤 주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준 커피를 손에 꼭 쥐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리님.”

“네.”

“저 좀 살려주세요.”

윤 주임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없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윤 주임의 발언에, 의중을 파악하고자 그녀를 잠시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대리님.”

“네.”

“저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윤 주임은 여전히 시선은 테이블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목소리에 전염되었는지, 그녀는 커피잔을 부여잡은 손도 떨고 있었다.

“제 ‘소문’ 아시죠. 아버지가 타 센터 가이드 실장이라는.”

“…네. 어쩌다 보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 그냥 가이드 생활 조용히 하고 싶어요. 야망도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한 윤 주임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들고 와, 윤 주임에게 건네주었다.

“감, 감사합니다.”

호흡이 진정이 안 되는지, 윤 주임은 떨리는 숨을 감추지도 못한 채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뱉었다. 나는 그녀의 앞에 앉아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전, 도지윤 에스퍼가 무서워서 가이드 못하겠어요.”

나는 앳돼 보이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윤 주임이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이지 않습니까.”

“저, 전.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대리님.”

내가 윤 주임의 가이드로서 위치를 자각시켜주자, 그제야 윤 주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눈물로 젖어 빨개진 얼굴의 그녀는, 사회인이 아닌 어린 학생 같아 보였다.

“그래도 가이드 실장님과 이미 다 얘기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실장님에게도 말씀드렸고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직 어린 그녀는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의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 있는 이상 그녀가 평생 분리할 수 있을까.

“대리님이 도지윤 에스퍼의 전 ‘임시 전담 가이드’였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그냥, 대리님이 계속 해주시면 안 돼요?”

윤 주임은 나를 바라보며 다급히 얘기를 했다. 윤 주임의 필사적인 눈빛을 바라보자, 나는 한숨이 나왔다. 에스퍼 실장도 그렇고 윤 주임도 그렇고, 자꾸 내 등을 도지윤에게 밀고 있었다. 하지만.

“윤 주임. 일이란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쉽게 그만두는 게 아닙니다.”

“…….”

“아마 도지윤 에스퍼도 지금 혼란스러워서 잠시 까칠하게 구는 걸 거예요.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잠시 도지윤의 역가이딩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 다시 머리 한구석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아니에요. 대리님.”

윤 주임은 이제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호흡이 부족해 헉헉거리면서도 나에게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지윤 에스퍼는 진짜, 절 죽일 거 같아요. 대리님.”

“…….”

“가이드 실장님이 어떻게 해서든 도지윤 에스퍼를 설득해 보라는데, 말이 통해야 이야기를 하죠.”

물론 도지윤이 지 좆대로 행동하고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동감하는 바이다.

“아버지도 다른 가이드는 도지윤 에스퍼를 통제했는데, 왜 저는 못 하… 하냐고.”

“…윤 주임은 신입이고 저는 그래도 연차가 꽤 되는데, 일하는 것에 차이가 없으면 제가 월급 더 받는 이유가 없죠.”

윤 주임을 위로하고자 하는 말이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호봉 차이가 얼마인데 똑같은 능력을 바라는 것일까.

가이딩 업무에서야 등급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에스퍼를 다루는 것이나 행정 업무를 윤 주임이 나보다 잘할 리가 없다.

“나보고 A급 가이드인데, 왜 B급 가이드가 하는 게 안 되냐고….”

…이건 날 맥이는 건가?

하지만 윤 주임은 그 얘기를 하면서 이제 숨이 넘어가라 울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더 뽑아 윤 주임에게 가져다주었다.

“울지 마세요. 윤 주임.”

“대리님. 저 좀 살려주세요.”

윤 주임은 티슈로 코를 흥 풀며, 너무 울어 뭉개진 발음으로 나에게 애원했다.

“일단 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윤 주임이 살려달라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가이드 실장님에게 가셔서 도지윤 에스퍼 가이드 다시 하겠다고 말씀해 주시면….”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데요? 윤 주임도 실장님에게 이미 여러 번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자 윤 주임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빽도 없는 일개 평사원이라, 실장님은 제 말 안 들어주십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빈정대며 윤 주임을 대하고 있었다. 나의 그릇은 간장 종지만 해서, 잘못이 하나도 없는 윤 주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자 윤 주임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 정말. 퇴사하고 싶어요. 대리님.”

“알잖아요. 윤 주임. 국가기관의 보호를 못 받는 가이드는, 각종 범죄에 쉽게 노출돼요.”

그러자 이제 윤 주임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주위를 슬쩍 돌아보자 몇몇 직원이 가게에 들어왔는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전에 도지윤 에스퍼가 절 죽일 거 같아요.”

“도지윤 에스퍼가 어렸을 때… 좀 사건이 있어서 사람 대하는 게 서툴러서 그렇지, 다른 사람을 쉽게 해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대리님은, 도대체 어떻게 도지윤 에스퍼하고 잘 지낸 거예요?”

코 막힌 소리를 내며 윤 주임은 ‘인간 새끼가 아니던데’라고 중얼중얼거렸다.

“같이 다니다 보면, 나름 친절해요. 처음부터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시간을 들이면서 천천히 녹아가는 거죠. 도지윤 에스퍼가 좀 사회성이 부족한 것 같아도 적응하면 대할 만해요.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자, 윤 주임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쁘잖아요. 관상용 화초라고 생각하면 옆에 둘 만해요.”

윤 주임은 잠시 썩은 표정을 짓다 순식간에 수습하고는, 나를 간절히 쳐다보았다.

“대리님. 전 어쩌면 좋죠? 그냥 도망치고 싶어요.”

정말 한숨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센터에 지랄해대는 도지윤, 그런 도지윤이 무섭다며 ‘임시 전담 가이드’를 하기 싫다 하는 윤 주임. 윤 주임을 도지윤에게 붙이고자 하는 가이드 실장. 도지윤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에스퍼 실장. 그 넷 사이에 케밥처럼 돌돌 말린 내 신세. 시발.

하지만 나에겐 방법이 없었다. 씁쓸하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합니다. 윤 주임. 저도 딱히 방법이 없네요.”

내가 미안하다며 웃자, 윤 주임은 다시 말없이 눈물을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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