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윤 주임과 헤어진 뒤, 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무대의 안팎을 가르는 희미한 경계에서, 나는 관객들 쪽에 동참해 무대의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과거 잠깐 내가 무대에 올라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쏟아지는 수많은 눈동자들 사이에서, 도지윤과 원하지도 않은 호흡을 맞추며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익숙해져서 이제 할 만하다고 생각될 때쯤에, 다른 전도유망한 배우로 교체되어 나는 관객석으로 내쳐진 것이다. 좆같은 일이지만 이것 또한 세상이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무대를 바라보며 팝콘이나 씹고 있었는데, 자꾸 무대 쪽으로 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다른 조연배우들이 나를 이끄는 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지윤은.
무대의 중앙에서 수많은 배우들에게 둘러싸여 나를 바라보는 도지윤의 표정을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다. 원망하는 건지, 잊은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그러나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무대 밖으로 쫓겨나야 하는 나의 황당함을 너는 알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너겠지만, 나 또한 버림받은 자였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무대에 고개를 돌려 멀어지려고 해도 한 발자국 걸어가려 할 때마다 산재해 있는 문제들이 내 발목을 늪처럼 잡아당겼다. 늪은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었다가, 윤 주임의 눈물이었다가, 에스퍼 실장의 호소였다가, 끝내는 내 마음속에 들려오는 뿌리 깊은 자기혐오였다.
나는 왜 언제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해야 하는 것인가.
옴짝달싹 못해 몸부림치고 있는 나는 점점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은 발목만 잡혀 있지만, 곧 빠르게 무릎, 허리, 가슴, 목, 머리끝까지 늪으로 잠길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도지윤이 불태운 정원이 새까맣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모든 좆같은 상황들을 도지윤이 불태워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늪은 불타오르기엔 너무 축축하고 습해서, 불씨가 붙을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력으로 늪을 탈출해야 했다.
퇴근길을 천천히 거닐며 도지윤, 윤 주임, 에스퍼 실장, 가이드 실장을 생각했다.
그러다 이 모든 것이 한군데서 뭉쳐지다 다시 흩어지다, 다시 도지윤으로 뭉쳤다. 나는 어쩌고 싶은 것일까. 내 마음은 왜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늪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일까.
에스퍼 실장과의 면담에서 들었던 도지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다시 가이드 실장의 ‘공과 사를 구분하세요.’란 말이 반대쪽 귀에서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시발. 공과 사가 뭔데.
잠시 가이드 실장에 대한 반발감과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어느새 숙소 앞에 거의 도착을 해서, 땅만 보고 걷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리고 하루 온종일 도지윤에 대한 생각만 해서인지 나는 내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숙소 앞에는 검은 에스퍼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지윤이 서 있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얼굴은 푸석해졌고, 턱은 더 날카로워 보였다.
“도지윤 에스퍼.”
내가 도지윤을 부르는 소리에, 도지윤의 무표정한 얼굴에 설핏 웃음이 맺혔다.
“대리님.”
도지윤은 곧장 나에게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두 발자국 떨어져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이내 도지윤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며, 두 눈의 시선이 빗겨 바닥에 닿았다. 따라가는 긴 속눈썹에 뉘엿뉘엿 지는 해의 주홍빛이 어른거렸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마주 서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
공교롭게도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
“먼저 말씀하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나는 살이 내려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러나 여전히 하얗고 예쁘기만 한 도지윤의 턱선을 살펴보며 말을 했다. 내 말에 도지윤이 저물어가는 해를 속눈썹으로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새 도지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대리님.”
그리고 나를 부르는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대리님이 찾아오지 말라 했는데,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도지윤은 서럽게 울었다.
얼마 전 정원을 불태웠던 자는 이미 도지윤 안에서 사라졌다는 듯이, 온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 도지윤은 가련하게 몸을 떨었다. 정제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원석 그대로 내 안을 뾰족뾰족 굴러다닌다.
“울지 마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움칠거리며 올라가려는 손을 내리누르고 말로만 달래주자 도지윤은 제 두 손을 올려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길고 가느다란 도지윤의 손과 그 끝을 장식하는 분홍빛의 손톱이, 도지윤의 감정을 그 안에 가려 삼켰다.
다시 에스퍼 실장, 윤 주임, 가이드 실장이 머릿속에서 제각기 할 말들을 뱉어냈다. 각각의 위치에서,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말들이 아우성치며 머리 한구석에서 천둥 치듯 울렸다.
나는 내 위치에서 나에게 가장 유리한 말을 선별해야 했다.
가이드 실장이 말한 공과 사는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에스퍼가, 사람이 눈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달래주지도 못하는 게 맞는 것일까.
“대리님….”
윤 주임의 살려달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는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 따위는 욕심도 없다던 그 절박한 눈동자와 같이.
도지윤은 숨을 넘어갈 듯 가냘프게 몰아쉬며 나를 연신 불러댔다.
“대리님. 절 혼자 두지 마세요.”
내 앞의 도지윤은, 어렸을 적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평생을 고통스러운 가이딩에 시달려왔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서툴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에스퍼 실장의 도지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직 생생하다.
“도지윤 에스퍼.”
그들이 내뱉는 주장을 분별력 없이 내 사고 속으로 수납하기 급급했던 나는 여전히 어리석었고 내 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의 끝은 결국, 다시 도지윤이었다.
나는 도지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도지윤이 다시 나를 무대 위로 끌어올리든, 내가 도지윤을 늪으로 끌어내려 같이 가라앉든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라고 묶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도지윤이 좋았다. 도지윤과 함께하고 싶었다. 아직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지만, 항상 내가 선택받아야 하는 이 좆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다.
나는 내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에스퍼 실장 방에서 내 혈관을 타고 돌아다녔던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내 통제를 벗어나 손을 들어 올렸다. 도지윤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도지윤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도지윤이 곧바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울지 마십시오. 도지윤 에스퍼.”
“대리님이, 대리님이….”
도지윤의 흘리는 눈물이 내 목을 적셨다. 그러나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사회적인 동물이었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에서조차 손바닥만 한 변명을 움켜쥐어야 했다.
가이딩은 ‘공’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내가 도지윤을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좋아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건 ‘사’의 영역이니 가이드 실장도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도지윤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도지윤은 숨이 넘어갈 듯이 울기 시작했다.
“대리님. 제 옆에 있어줘요.”
“…….”
“대리님이 필요해요.”
“…….”
나는 여전히 나를 원하는 도지윤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내가 가이드가 아니어도 필요해요?”
나의 질문에 도지윤이 내 목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지윤의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엉켜있었다.
“네. 필요해요.”
“내가 매칭률이 높지 않더라도?”
“네.”
“왜요?”
도지윤은 나를 보며 조심스럽고 깨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대리님만이 절 평범하게 해주니까요.”
도지윤의 입가에 걸려있는 감정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마음이 진심인지 연기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눈물이 거짓일지라도, 나는 이미 도지윤의 모든 연기에 속아줄 준비가 되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가이딩 안 해줄 거예요. 전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가 아니니까요.”
“네.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도지윤이 다시 내 목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도지윤을 사이에 두고 가이드 실장이나 윤 주임과 기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이 변했다. 도지윤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일개 직원이었고, 빽도 능력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이름이 붙여진 알량한 직책과 물질적 풍요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아무도 모르게 작은 도박을 해야 했다.
“가이딩은 안 해줄 거지만… 윤 주임하고 얘기 좀 해볼게요.”
“…네.”
내 말에 도지윤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일단 들어갑시다.”
내가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 도지윤은 분리 불안을 겪는 강아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조차 따라 들어오려고 해, 기겁을 하며 쫓아내었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도지윤 에스퍼. 뭐 합니까?”
“대리님이 안 나와서….”
내가 벗어놓은 가이드복 상의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나오자 가이드복을 소파에 걸어 놓고 냉큼 일어나 다시 나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좀. 떨어지면 안 됩니까?”
“안 돼요.”
다른 말에는 아련한 척, 가녀린 척 잘도 대답하더니 이런 말엔 단호하게 말한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보다, 지는 내가 멍청한 거란 자학을 잠시 했다.
“도지윤 에스퍼.”
“네.”
“일단 내일 내가 윤 주임하고 얘기를 좀 해볼게요.”
“네.”
도지윤이 내 목에 입을 대고 대답을 하자, 웅웅대는 울림이 내 심장까지 느껴졌다.
“결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저 쫓아다니지 말아요.”
“네?”
계속 내 목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도지윤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레이저를 눈으로 쏘고 있었다.
“싫어요.”
도지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도 안 돼요.”
“왜요?”
“그냥. 윤 주임하고 내가 결론지을 때까지만요.”
도지윤이 입을 앙다물고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달래주는 것은 내 쪽이었다. 이 익숙한 상황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표정 펴요.”
미간을 살살 누르며 도지윤을 어르자,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아 손끝에 입을 맞춘다.
“그럼 대리님….”
그리고 나는 익숙한 불안감이 들었다.
“키스해주시면 안 돼요?”
간만에 들어오는 개수작에, 나는 웃음만 나왔다. 말없이 도지윤의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회사의 입장은 분명했다. 회사는 내가 도지윤의 가이드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도지윤의 연인으로서 내 자격은 회사에서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내가 도지윤과 연인이 되는걸, B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의 애인이 되는 걸 가만둘 리가 없으니 머리가 아팠다.
나는 도지윤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깊은 키스를 끝내고 도지윤이 내 뺨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그의 고개를 떼어내어 나를 바라보게 했다.
“혹시나, 윤 주임 선택하면.”
도지윤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대가리 깰 거예요.”
그것도 엄청 세게. 내가 웃으면서 덧붙이자 도지윤은 더 환하게 나를 보며 웃었다.
나를 선택하면,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도지윤.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나는 내 스스로 선택을 했고, 이제 도지윤의 선택만이 남았다. 또다시 잘못된 결말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미래의 걱정은 미래의 이재하에게 넘기기로 했다.
“도지윤 에스퍼.”
“네?”
“손 치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점점 옷 속으로 넘어오는 도지윤의 손에 나는 정색해야만 했다. 시무룩해진 도지윤은 내 눈치를 보며 밤늦게까지 날 끌어안고만 있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 도지윤을 집 밖으로 쫓아내면서 내일 날 쫓아다니지 말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오전, 가장 사람이 없을 시간대를 골라 윤 주임에게 잠시 옥상에서 보자고 문자를 넣었다. 원래 정원을 더 선호하지만 정원은 도지윤이 불태워버려서 매캐한 냄새와 재만 자욱했다. 옥상에서 새까맣게 변해버린 정원을 내려다보니, 시설팀에서 지게차와 사람을 동원해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대리님.”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옥상에서 보자고 한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을 찰나, 윤 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뒤돌아서 보니,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의 윤 주임이 하얀 가이드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검은 에스퍼복의 도지윤이 맹한 미소와 함께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윤 주임. 그리고… 도지윤 에스퍼.”
네가 왜 여기 있어? 라는 눈빛으로 어이없어하며 도지윤을 쳐다보니, 도지윤은 맹하니 웃고만 있었다. 대답을 구하듯 도지윤을 계속 쳐다보자 도지윤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느릿느릿 말을 한다.
“대리님이 쫓아다니지 말라 하셔서. 얘 따라다니고 있었어요.”
도지윤은 마치 물건이라도 되는 듯, 검지로 윤 주임을 가리켰다. 윤 주임은 의례적인 미소도 띠지 못한 채, 다크서클이 드리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갑자기 두통이 생기는 머리에 손을 들어 미간을 누르자, 도지윤이 내 옆에 냉큼 붙어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대리님. 어디 아프세요?”
그러자 윤 주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어깨를 쓰다듬는 도지윤의 손을 잡아 내렸다.
“도지윤 에스퍼. 밖에서는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간신히 웃는 얼굴을 만들었지만,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도지윤은 눈썹을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을 만들어 내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시무룩해진 도지윤을 두고 이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윤 주임을 쳐다보았다.
“윤 주임.”
지그시 윤 주임을 부르자, 윤 주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네. 대리님.”
“그… 제가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하며 일부러 뒤를 흐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아닌, 옆에서 내 손가락을 조물락거리고 있는 도지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 주임은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가 대리님 손가락을 찢어요!”
깜짝 놀라 손을 내려다보자, 그러거나 말거나 도지윤은 내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만져대고 있었다. 윤 주임을 지그시 쳐다보았지만, 윤 주임은 진지했다.
“도지윤 에스퍼는 손가락을 찢지 않습니다. 그냥….”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눈알을 굴렸다.
“그냥 사람의 온기를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이제 황당한 얼굴이 된 것은 윤 주임이었다. 나는 말을 재빨리 돌려야 했다.
“어쨌건 윤 주임. 다시 한번 가이드 실장님에게 말씀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아… 말씀드려도 똑같을 걸요. 절대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어제도 아빠한테 전화해서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윤 주임이 우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윤 주임.”
“네. 대리님.”
“제 방법대로 일단 하시죠.”
“뭔데요?”
윤 주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단, 실장님에게 가서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3주간 해보겠다고 하십시오.”
“싫어요!”
내가 말을 하자, 윤 주임에서는 반사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도지윤도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일단 3주간 노력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임시 전담 가이드’를 해지시켜 달라 하십시오.”
“…….”
“윤 주임. 지금 가이드 실장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도지윤 에스퍼에게도 시달려서 힘든 것 아닙니까. 3주 동안은 도지윤 에스퍼에게만 시달리면 됩니다.”
“그게 제일 힘든 건데요….”
윤 주임이 퀭한 얼굴로 나에게 답해온다.
“전 이 방법밖에 모르겠습니다.”
‘일단 노력은 해보았으나, 내 역량으로는 안 되더라.’ 작전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써먹는 소소한 방법이다. 안 해본 것도 아니고, 해봤는데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가이드 실장님이 넘어가 주실까요?”
“윤 주임. ‘임시 전담’ 계약은 당사자 둘이 원할 경우, 무효화시킬 수 있어요. 지금도 두 분이서 협의되면 취소하면 됩니다.”
나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뜸을 들였다.
“하지만 가이드 실장님이나 윤 주임 아버님의 경우에 그렇게 두지 않을 걸 아니까. 이 방법을 쓰는 거예요. 3주 뒤에 두 분이서 계약 취소하시고, 윤 주임이 가이드 실장님에게 ‘통보’하십시오. 해봤지만 안 되겠다고요.”
“그럼 저만 불려가서 깨지는 거 아니에요?”
윤 주임은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건 윤 주임이 감당해야 합니다. 설득을 하든 배짱으로 나가든 뭘 하든 겪어야 하는 일이고요. 그래도 해 봤는데 안 되겠다고 말하는 게 납득시키긴 편할 겁니다.”
모든 걸 다 내가 떠먹여 줄 수는 없다. 상황을 만들어 줬으면 그걸 이용하는 것은 윤 주임의 역량이다. 윤 주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3주 뒤에, 제가 실장님에게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죠?”
“네. 일단 시도는 해봤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이게 내 스스로 발등을 찍어 윤 주임과 도지윤 사이에 내가 매칭의 다리를 놓아준 것일지 결과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나는 도지윤을 믿었고, 작은 도박을 해보고자 한다.
잘되면 도지윤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고, 잘못되어도 도지윤은 행복해질 것이다. 아마 나는 조금 불행해질 것이고.
“3주만 버텨봐요.”
나는 윤 주임과 도지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윤 주임이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지윤은.
“싫어요.”
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싫다고 대답했다. 예측 못한 도지윤의 대답에 나는 입을 열었지만, 적당히 뱉을 말을 못 찾았다.
“…윤 주임. 도지윤 에스퍼하고 좀 더 얘기해야겠습니다. 먼저 내려가실래요?”
“네! 대리님.”
그러자 윤 주임은 밝은 표정으로 후다닥 사라졌고, 이제 이 시린 옥상에는 도지윤과 나 둘뿐이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왜 싫어요?”
“싫으니까요.”
언제나처럼 제 감정을 당당하게 밝히는 모습에 이젠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본모습을 숨기고 적당히 포장할 줄 알아야 하지만, 도지윤은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내 속만 터졌다.
“도지윤 에스퍼. 지금까지 뭘 들었어요.”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자 도지윤이 멀뚱멀뚱 날 바라보았다.
“윤 주임과 저, 아니 ‘윤 주임과 도지윤 에스퍼는 서로 노력을 해봤지만 안 되더라.’라는 겁니다. 가이드 실장도 윤 주임의 ‘임시 전담’ 계약을 해지시키려면 뭔가 건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그러니까 3주만 둘이 잘 지내는 척이라도 해보라고요. 윤 주임이 가이드 실장에게 닦달 안 당하게요.”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도지윤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제발 말 좀 들어라.
“그냥….”
도지윤이 천천히 말을 내뱉자, 또다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실장 죽이면 안 돼요?”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을 하자 도지윤이 눈동자를 굴린다.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전 아무도 안 죽길 원해요. 조용한 회사 생활, 조용한 월급쟁이. 제가 바라는 겁니다.”
정해진 날짜에 밀리는 것 없이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가끔 지랄거려서 동료들과 함께 시발시발 하며 비위 맞춰야 하는 상사. 내가 이 삽질을 왜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면서도 해야 하는 업무. 폐기될 것 알면서도 작성하는 보고서. 그럼에도 하루하루 굴러가는 일상.
내가 바라는 직장 생활의 모든 것이다.
지금 가이드 실장이 아니어도 어차피 그 자리는, 대부분의 직장 상사는 좆같고 짜증나는 놈이 오기 마련이다. 가이드 실장을 오는 족족 다 죽일 수도 없고.
조용하고 안락한 내 사회생활을 위해, 그저 지금 내 ‘행복’을 막고 있는 가이드 실장의 의지만 꺾고 싶을 뿐이다.
내가 단호하게 말을 하고 도지윤을 바라보자, 도지윤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납치해도 돼요?”
“…누구를요?”
“대리님요.”
이 미친놈이.
“지금 제 납치를 저랑 상의하는 거예요?”
내가 도지윤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도지윤이 날 바라보며 맹하게 웃었다. 저 웃음이 나랑 상의하겠다는 건지, 상의가 필요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범죄를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면 안 되죠!”
상식 없다, 상식 없다 말은 했지만 개념이 이 정도로 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속을 다스렸다.
“내 가이드는 대리님인데, 자꾸 이상한 애랑 친하게 지내라 하잖아요.”
“아니, 그건….”
“난 대리님이 다른 에스퍼랑 같이 서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집히는데.”
우울함이 짙은 도지윤의 말이 가슴을 콕콕 박혔다.
“왜 대리님은….”
“도지윤 에스퍼. 그건, 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예요. 3주만 참으면 내가 다시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 아니 ‘전담 가이드’ 해줄게요.”
나는 이 말을 뱉으면, 도지윤이 환하게 웃으며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도지윤의 얼굴은 오히려 더 우울한 기색이 짙어졌다.
“저번에 매칭 테스트만 하면 ‘전담 가이드’ 해주신다고 했는데….”
순간, 나는 할 말이 턱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의 무너진 신뢰에 책임감을 통탄하며 뭐라 변명을 해야 하나 눈알만 굴렸다.
“미안해요. 도지윤 에스퍼. 이번에는 약속 꼭 지킬게요.”
나는 도지윤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내 진심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도지윤은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집스레 바닥만 내려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네.”
“정원으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슬쩍 도지윤이 불태웠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협박인가 싶어 다시 도지윤을 바라보았지만, 도지윤의 얼굴은 여전히 우울했다.
“아니면.”
도지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눈가가 곱게 접히며 갑자기 기뻐하는 얼굴에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납치할게요.”
“…범죄 예고예요?”
“네.”
“그렇게 당당하게… 아니, 저 도망가야 할 타이밍이에요?”
도지윤의 손에 잡힌 내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도지윤의 강한 힘에 내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리님은 도망 못 가요.”
“그걸 왜 도지윤 에스퍼가 단정합니까?”
슬슬 내가 그냥 미친놈과 대화하고 있는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도지윤은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있었다.
“대리님을 납치하든, 대리님이 스스로 제 옆에 있든 상관 안 해요.”
“아니, 그걸 왜 도지윤 에스퍼가!”
내 몸인데!
“그래도 대리님이 본인 의지로 남아있는 게, 대리님한테도 더 좋으니까 권해드려요.”
오래간만에 말이 통하지 않는 도지윤을 보자니, 다시 위가 쓰리다 못해 위경련이 올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아연해져서 험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이세요?”
“제가 행복하길 바란다면서요.”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도지윤은 맹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저도, 그 누구보다 제가 행복하길 바라요.”
미친 눈깔로 환하게 웃는 도지윤은, 제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를 희생시키겠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고 있었다.
아니.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맞는데. 그래도.
머릿속에서 도지윤 미친개파와 도지윤 귀여운 강아지파가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도지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결국 도지윤 귀여운 강아지파가 근소하게 이겨 승전보를 울렸다.
인정해야 했다. 도지윤은 예쁜 쓰레기였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쓰레기다.
나는 진이 다 빠져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도지윤 에스퍼. 저도 도지윤 에스퍼가 행복하길 바라요. 그럼 3주 동안 윤 주임하고 조용히 잘 지내요. 매일까진 아니지만,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가이딩 받고요. 아, 그리고 윤 주임 괜히 괴롭히지도 말아요.”
기나긴 설득의 시간을 끝내고, 나는 웃으며 도지윤에게 3주 동안 뭘 해야 할지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도지윤은 괜히 또라이가 아니었다.
“제가 왜요?”
“…방금 전까지 우리가 나누던 대화가 뭐였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정색하며 묻자 도지윤이 눈을 깜빡인다.
“3주 동안 조용히 있으라 했지, 유 주임인지 무 주임인지한테 가이딩 받으란 얘긴 아니었잖아요.”
“아니, 가이드랑 조용히 잘 지내란 얘기가, 가이딩 받고 사이좋게 지내란 얘기지. 무슨 의미겠어요!”
“됐어요. 그냥 대리님 납치할래요.”
“그런 범죄 얘기 당당히 하지 말라고요.”
나는 도지윤의 손에 잡혀있던 내 손을 거칠게 빼내어 화딱지가 나 열이 오른 눈두덩이 근처로 가져갔다. 간만에 느끼는 아연함에 눈알이 빠질 것 같다. 그러자 도지윤은 나를 꼭 껴안았다.
“가이딩은 대리님한테만 받고 싶어요.”
“나한테 가이딩 안 받고, 그냥 옆에만 있어도 된다면서요.”
“…….”
이 새끼. 그거 다 연기였어?
나는 어제 도지윤이 우리 집 문 앞에서 서럽다는 듯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이딩도 필요 없이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했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그 순간의 강렬한 감동은 아직도 생생한데,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내 눈을 피하는 도지윤을 보자니 사기당했다는 느낌이 점점 그 감정을 대신해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연기하는 것도 속아주기로 했던 어제의 다짐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 속에서 뒤엉키는 줄다리기를 눈치챈 도지윤은, 이제 내 숨을 끊어먹을 듯 꽉 안았다.
“다른 가이드는 싫어요….”
도지윤은 처연하고 가련한 척하며 나를 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시각을 차단하자, 도지윤의 목소리에서 사탕을 굴리듯 살살 나를 구슬리려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역시 도지윤에게 가장 위험한 건 얼굴이었다.
“안 돼요. 3주만 참아봐요. 아니, 에스퍼가 가이딩을 3주 동안 어떻게 참지?”
규정에 명시되어 있는 물리계 에스퍼의 가이딩은, 아무리 이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2주에 한 번은 꼭 받아야 한다. 도지윤에게 말하다 스스로 자문해본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전 그 규정 지킨 적 없어요! 차라리 3주 참을게요.”
하지만 내 질문에 도리어 도지윤은 생글생글 웃는다.
“지킨 적이 없다고요?!”
“네!”
“…왜죠?”
“그냥 몇 달 참았다 역가이딩 하는 게 좋아요.”
나는 지침과 규정이 통하지 않은 비상식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했다. 이 또한 도지윤이었기 때문이다.
“…도지윤 에스퍼. 윤 주임과 알아서 합의 봐요.”
3주 동안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는 윤 주임이니까. 포기한 채 중얼거리자, 도지윤이 환하게 웃는다.
“3주 뒤에는 대리님 납치해도 되는 거 맞죠?”
“그런 거는 물어보지 말고 하세요… 아니, 가만. 납치 말고 전담 가이드가 되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순간 깨달음에 도지윤에게 다급하게 질문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대리님이 전담 가이드가 되면, 계속 회사는 다녀야 하고. 좆같은 에스퍼 새끼들이랑….”
도지윤은 중얼거리며 전담보다 납치가 더 나은 이유를 내뱉었다. 물론 모든 이유가 나보다는 도지윤 본인에게 좋은 이유였다.
“도지윤 에스퍼. 범죄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도지윤의 얼굴이 대번에 불퉁해진다. 나에게 딱 달라붙어 가깝게 보는 얼굴이 부담스러워 떨어지라 팔을 톡톡 쳤지만, 도지윤은 들어 처먹지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그리고 3주 동안 스킨십도 금지입니다.”
“네?!”
“며칠 잘 참아 놓고 3주 더 못 참아요?”
도지윤의 경악에 찬 표정을 못 본 척하며, 이번에는 진짜 힘을 줘서 손을 풀어냈다.
“저한테 왜 그래요, 대리님?”
“그러는 도지윤 에스퍼는 저한테 왜 그럽니까….”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이런 단어를 사용하긴 미안하지만, 도지윤은 뾰로통하게 나에게 쏘아붙였다.
“3주. 3주만 윤 주임하고 잘 지내봐요. 그리고 저한테 스킨십. 손잡는 것도 머리카락 넘겨주는 것도, 껴안는 것도 그 이상도 다 안 됩니다.”
도지윤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난 냉정히 말했다.
“울어도 안 돼요.”
그러자 도지윤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날 째려보았다. 눈앞의 미인이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도지윤이 저러고 있으니 황당했다.
“대신 3주 뒤에. …가이딩 원하는 만큼 해줄게요.”
차마 도지윤의 눈을 마주하고 말할 수 없어, 그의 입술쯤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잠시 말없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3주.”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도지윤이 이를 악물며 작게 속삭였다.
“정말 3주 뒤에는 제가 원하는 만큼 가이딩 해주실 거예요?”
“…네.”
“의미를 정확히 알고 하는 약속 맞죠?”
좆으로 하는 가이딩이요. 도지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날것 그대로의 말을 듣자니, 수치심은 나만 느끼는 감정인가 보다 싶다. 긍정의 한 단어조차 내 입으로 내뱉으면 입이 오염될 것 같아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3주 뒤에는 대리님이 울고불고, 힘들다고 해도 안 들어 줄 거예요.”
“…….”
“대리님 구멍 헐 때까지 내 좆 박을 거라고요.”
도지윤이 음산하게 중얼거린다.
“…그래요. 3주 뒤에는 남은 연차 몰빵해서라도 같이 침대에서 나가지 맙시다.”
나는 한숨 쉬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두 달 정도만 참으면 연차는 리셋된다. 내 말에 도지윤이 방금 전까지 사나웠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다시 맹한 웃음을 지었다. 습관적으로 내 머리카락을 넘기기 위해 손을 올리다, 조용히 다시 거두어갔다.
“3주 뒤에 각오하셔야 될 거예요. 대리님.”
저 3주 뒤의 각오가, 납치를 말하는 건지 내 구멍의 안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3주 동안 조용히만 지내세요.”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서 다시 내게 돌아와. 도지윤.
도지윤이 이해한 것 같자, 나는 안녕을 고하고 뒤돌아서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런 나를 도지윤이 졸졸 쫓아왔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상황이 점점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도지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쫓아와요. 도지윤 에스퍼.”
“쫓아다니지 말란 말은 안 했잖아요.”
“쫓아다니는 것도 안 됩니다.”
“3주간 스킨십도 쫓아다니는 것도 안 돼요?”
“네. 안 됩니다.”
“그럼 그냥 납치할래요.”
“범죄는 안 된다고요.”
나는 머리가 아팠다.
“그냥 납치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은데….”
너한테나 좋은 방법이겠지.
“납치는 제가 동의 안 했잖아요.”
애초에 내가 왜 ‘납치’에 대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납치는 원래 동의 필요 없어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도지윤을 보자 쌍욕이 치밀어 오른다.
참자. 도지윤의 상식 없음이 하루 이틀인가. 이 아이가 비상식, 반사회적인 이유는 다 어렸을 적의 사정이 있어서다.
“납치하면 가이딩 안 해줄 거예요.”
가이딩은 가이드 고유의 권한이다. 물론 역가이딩 해대는 도지윤 같은 놈도 있지만, 도지윤이 나에게 더 이상 역가이딩은 없을 것이라 약속했으니 믿어야 한다. 내 말에 도지윤의 표정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럼 너는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납치라뇨!”
경악을 해도 내가 백 번을 더해야지, 네가 왜 하는데!
“그냥 가이드 실장을 죽일게요!”
울고 싶었다.
“안 돼요!”
“왜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아요. 대리님?”
“가이드 실장님 죽이는 거 안 되고, 납치는 할 거면 3주 이후에 하세요. 그리고 3주 동안 저 쫓아다니는 거 안 됩니다. 대신에 일주일에 딱 한 시간만 면회 시간 줄게요.”
나는 단호히 말을 했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나의 기백을 느꼈는지 도지윤은 잠시 시무룩하더니 입을 열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건 되죠?”
“그건 허락할게요.”
도지윤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윤 주임에게 3주간의 유예 기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기간 동안 윤 주임은 가이드 실장과 그녀의 아버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얌전한 도지윤도 손에 쥐여 주었다. 이렇게까지 떠먹여주는데도 먹질 못하면, 그건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지윤 또한. 아무리 윤 주임에게 유리한 상황일지라도 홀라당 그녀에게 넘어간다면, 그 또한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거다.
도지윤을 상대하느라 어마어마한 기력을 소진했다. 나는 시무룩한 도지윤에게 진짜 안녕을 고했다.
***
도지윤을 향해 활짝 열렸던 귀에,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문도 다시 시시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귀를 닫으려 했지만, 한번 열린 귀는 쉽게 닫히지 않았다.
가십거리가 넘쳐나는 회사 생활. 도지윤이 없는 회사 생활. 내가 알고 있는 지난 10여 년 겪어왔던 지루한 하루가 오늘도 시작했다.
도지윤은 내 요청대로 나에게 스킨십도 하지 않고, 날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대신 도지윤은 나를 멀리서 쳐다만 보았다.
“대리님.”
바닥을 보며 걷다가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남자답게 생긴, 골격이 다부진 에스퍼가 한 명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스퍼가 가이딩 외에 딱히 가이드에게 말 걸 일은 잘 없어서,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았다. 에스퍼는 까무잡잡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저는 최정훈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가이딩 해주셨던….”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 못 하는 편이었고, 이름 따위 말해줘 봤자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충 기억난다는 듯이 ‘아아’거리자, 최정훈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번에 가이딩 감사했습니다.”
“업무인데요. 뭘.”
“저 대리님….”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해오는 게, 대충 무슨 말을 꺼낼 건지 알 거 같아 ‘미안하지만’으로 시작하는 거절의 말을 내뱉을 준비를 했다.
“이거….”
그러나 최정훈이 나에게 상자를 건네려 했을 때,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최정훈 에스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최정훈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땀을 쏟기 시작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뺨을 붉게 물들였던 최정훈은, 이제 힘을 쓰기 위해 용을 쓰는 듯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손을 들어 그를 만지려 하자, 최정훈의 손에 들려있던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탁 소리를 내며 떨어진 상자는, 다시 줍기도 전에 바닥으로 짓눌려 완전히 압축되었다. 누가 봐도 이능이어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려 초능력의 주인공을 찾았다.
복도의 창을 넘어 건너편 건물에, 누군가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시력으로는 그 누군가의 얼굴이 확인 되지 않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욕을 하고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최정훈 에스퍼한테 이능 쓰고 있죠? 빨리 푸세요!”
받자마자 다다다 쏟아내는 말에,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걔가 좋아요. 대리님?]
“뭔 말 같지도 않은… 얼른 이능 풀어요!”
[나는 접근도 못하게 하더니, 왜 걔하고는 시시덕거려요?]
“누가 시시덕거렸다는 겁니까?!”
최정훈은 이제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며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이능 풀어요! 도지윤 에스퍼!”
내가 다급히 말하자 최정훈을 붙잡은 힘이 사라진 것인지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힘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까. 최정훈 에스퍼?”
“헉… 헉… 네.”
최정훈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한 손을 들어 나에게 괜찮다는 듯이 신호를 주었다.
“의무실로 데려다 드릴까요?”
“그러면 정….”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든 최정훈은, 그러나 다시 무형의 힘에 의해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도지윤 에스퍼.”
나는 한숨을 쉬며 수화기 너머로 다시 말을 걸어야 했다.
[대리님. 왜 걔를 만져요?]
“…아직 접촉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른 힘이나 푸세요.”
나는 최정훈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를 살펴보았다. 몸을 일으킨 최정훈은 부들부들 떨리는 안면 근육을 끌어모아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 대리님.”
그리고서는 만화 속 악당과 같은 대사를 남기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복도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지윤 에스퍼.”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네. 대리님.]
나는 몸을 일으켜 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영을 마주 보았다.
“아니, 나랑 대화하는 모든 에스퍼들에게 이럴 겁니까?”
[네.]
도지윤은 내 따짐에 1초의 고민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을 했다.
“여긴 직장이라고요. 도지윤 에스퍼.”
[저한테는 해주지도 않으면서 왜 다른 에스퍼들한테는 친절해요?]
“제가 3주만 참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못 참겠어요.]
“인내심이란 걸 좀 길러보세요.”
[대리님이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나는 말 걸지도 못하는데, 다른 새끼들은 대리님한테 말 걸고 있고.]
“우리 며칠 전에 봤습니다.”
정확히 오 일 전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아무튼 제가 대화하는 에스퍼, 가이딩 하는 에스퍼, 접촉하는 에스퍼한테 앞으로 절대 이러면 안 됩니다.”
[…….]
“대답이요.”
[접촉하는 에스퍼는 왜요.]
“어쩔 수 없이 접촉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응급상황이라든가.”
나는 도지윤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도지윤에겐 내가 보일 거라 확신하며 얼굴에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대리님. 짜증 나요.]
“원래 직장 생활이란 게 짜증 나는 겁니다.”
[…….]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볼 수 있으니까 오늘 그거 쓰시든지요.”
[아껴놨다가, 정말 못 참을 때 쓸 거예요.]
도지윤이 우울하게 중얼거린다.
“도지윤 에스퍼. 그럼 저 일하러 갑니다.”
[가이딩 가요?]
“네.”
[…정말 짜증 나요. 대리님.]
“참으십시오.”
[대리님. 제가 많이 좋아하는 거 알죠?]
나는 도지윤을 어르고 달래주다, 도지윤의 마지막 말에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알 것 같습니다.”
나는, 나도 좋아합니다. 라는 말을 해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아껴놨다. 나는 아직 겁쟁이였다.
“끊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고, 나는 몸을 돌려 가이딩 지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걸음마다 도지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
가이딩 업무를 끝내고 팀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최 주임과 김 주임이 내 자리로 몰려왔다.
“대리님.”
“네?”
“들었어요?”
“뭘요?”
두 주임은 눈을 빛내고서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몸을 낮춰 나에게 소곤소곤 말을 했다.
“2팀에 윤 주임,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잖아요.”
“네네.”
“둘이 완전 잘돼가고 있다던데요?”
말을 마친 최 주임은 2팀 쪽으로 고개를 빼더니, 윤 주임이 자리에 있는지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예상치 못한 말이 훅 내 명치를 치고 들어왔다.
“에스퍼들 진짜 줏대 없는 거 알아줘야 해요. 이 대리님 쫓아다닌 게 엊그제였는데.”
“그니까요. 진짜 가이딩만 해주는 가이드면 다 좋은 건가?”
“맨날 역가이딩만 해대던 놈이 윤 주임한테는 또 안 그러는 거 보면, 알 만한 거 아니에요?”
두 주임은 도지윤 소새끼, 말새끼, 개새끼 등 온갖 새끼들을 찾으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매칭률은 대리님이 더 높지 않았어요?”
그러다 김 주임이 나를 휙 돌아보며 말을 했지만, 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던 듯 최 주임이 말을 받아 이어갔다.
“윤 주임 등급이 A급이잖아요. 매칭률이 더 우선일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A, B 등급 간의 에너지통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근데 도지윤 에스퍼 가이딩 받을 때, 문제 있다고 하는데….”
김 주임의 말에 두 주임의 눈동자가 나에게 고정되었다.
“아, 개인적인 문제라 발설 못 합니다.”
실제로 도지윤의 개인 정보도 맞고, 어디까지 오픈 가능한 내용인지 파악할 수 없어 일단 한 발 뺐다. 그러자 두 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가 있긴 있나 보네요. 하긴 소문 엄청 돌았잖아요. 가이딩에 원수져서 가이드들 엄청 싫어한다고.”
“전 그게 매칭률 적합한 가이드 없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요즘 세상에 매칭률 의미 있나요. 내가 에스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가이딩 약도 엄청 잘 나오잖아요.”
“맞아요. 중앙에 있는 제 동기한테 들었는데, 요즘 매칭률 높여주는 약이랑 각인 깨는 약도 개발 중이라던데요?”
“헉. 이러다가 우리 다 구조 조정 되는 거 아니에요?”
매칭률에서부터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휙휙 변화하는 대화의 주제를 따라잡기 버거워 눈을 껌뻑이며 귀만 열고 있었다.
“아무튼 요즘 도지윤 에스퍼, 윤 주임한테 가이딩 꼬박꼬박 받고 있다는 거 같아요. 그래서 가이드 실장 지금 입이 귀에 걸렸잖아요.”
“도지윤 에스퍼가 가이딩 잘 받는 거랑 가이드 실장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년에 센터장 나가면 그 자리 공석인데, 가이드 실장 그 자리 노리잖아요. ‘문제아 S급 에스퍼의 가이딩 품질 만족’을 자기 업무실적으로 내려는 것 같던데요?”
“엥? 근데 그건 윤 주임 아니어도 이 대리님만으로도….”
그러면서 다시 나를 흘낏 쳐다보았지만, 난 이미 이 대화에 끼어있는 주체가 아니라 듣고 있는 청자의 입장이었다.
“윤 주임 아버지, 타 센터 가이드 실장이잖아요. 윤 주임 덕으로 우리 가이드 실장 진급하면, 그다음은 누구겠어요. S급 에스퍼의 가이드의 아버지인 그 실장이 진급 노리겠죠. 둘이 동기라는데, 상부상조하는 거죠.”
거기까지 말한 둘은 재빨리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자기들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왜 저러나 싶어 문 쪽을 쳐다보자 윤 주임이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는 훨씬 생기가 돌아 보이는 윤 주임은 살 만해 보였다.
나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 계획에서 도지윤이 나를 택할 확률은 80퍼센트고, 윤 주임을 택할 확률은 20퍼센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령 20퍼센트의 확률로 도지윤이 윤 주임을 선택해도 나는 상처받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도지윤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입 밖으로 꺼내어 궁글려 본 적이 없는 문장이기에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 스스로만 모른 척하면 완벽 범죄를 꿈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물음이 내 가슴속에서 메아리쳐 들려왔다. 진짜 상처 안 받을 수 있어?
윤 주임에게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자, 심각한 표정의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3주 뒤에 저 심약한 윤 주임이 욕망으로 가득 찬 가이드 실장을 이길 수 있을까?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는 윤 주임이 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그리고, 도지윤이 윤 주임의 가이딩을 받아들였을까?
서늘한 얼음 조각이 내 배 속을 돌아다니다, 심장으로 푹 박혀 들어갔다.
***
도지윤과 윤 주임에 대한 생각으로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침에 출근해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셨지만,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카페인이 둘에 대한 생각을 또렷하게만 만들었다.
우글우글 끓는 목마름에 자꾸 입만 축이고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내 속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이딩 패드를 집어 들었다. 내가 아는 것들 중, 잡념을 떨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다.
점심도 거르고 세 건의 가이딩을 소화하고, 네 번째 가이딩을 수락했다. 지친 몸과는 별개로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라고 애써 자위해 보았지만, 나는 이 불안과도 같은 집착증이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
“안녕하십니까.”
가이딩 패드의 인적 사항을 가볍게 확인하며 910호의 문으로 들어섰다. 몸 안의 에너지는 제법 많이 소진되었지만, 쉴 정도는 아니었고 쉴 마음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오랜만이네요. 이승훈 에스퍼.”
방 안의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은 신입 에스퍼 이승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은 여전히 앳되었고, 다만 저번과 달리 머리카락이 좀 더 짧아져 있었다. 익숙한 에스퍼에 나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이승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가이딩 패드를 조작하며 가이딩을 할 준비를 했다.
“훈련을 열심히 참석하네요. 정해진 훈련 시간을 초과했다고 나옵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손 주십시오.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어려서 그런지 따끈한 이승훈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훈련을 제법 격하게 하는 것인지 검게 뭉친 이승훈의 에너지를 부드럽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기성 직원들은 훈련을 대충, 시늉만 하다 마는 경우가 많은데 이승훈은 신입이라 그런지 제대로 임하는 것 같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보기 좋은 법이라,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대리님.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1구역보다 4구역이 겨울엔 좀 더 따뜻한 것 같습니다.”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중, 이승훈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그… 도지윤 에스퍼님과는 정말 끝인 거예요?”
“뭐가 끝입니까?”
“‘임시 전담’ 관계요.”
“아. 네. 끝났습니다. 2팀에 윤민지 주임이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맡기로 했습니다.”
잠시 동안만. 나는 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다른 에스퍼들이 수군거려서요. 전에 도지윤 에스퍼님께서 이 대리님한테 엄청… 집… 착… 하셨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나 싶어서요.”
다시 목이 말라 왔다.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지만, 튀어나온 실밥처럼 거슬림이 존재했다.
나는 가까스로 얼굴에 웃음을 만들어 내었다. 경력 10년에서 우러나오는 비즈니스용 미소였다.
“에스퍼들의 집착은 종잡을 수가 없죠. 저보다 더 적합한 가이드가 나타나면, 당연히 그쪽으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본능이니까요.”
나는 덤덤한 듯, 별일 아닌 듯 말을 했지만 내가 한 말에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
“그래도 대리님. 대리님의 ‘임시 전담’ 계약 해지를 좋아하는 에스퍼도 많아요!”
“그렇습니까.”
나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을 했지만, 이승훈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점점 모든 것이 향하는 방향이, 윤 주임과 도지윤의 매칭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잘못된 도박판을 벌인 것인가 하는 후회가 발끝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또 선택받지 못한 것은 나인가.
“대리님. 괜찮으세요?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제가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피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걱정해오는 이승훈에게 다시 한번 비즈니스용 미소를 깊게 지어 보였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
이승훈과 이런저런 잡담을 하자 40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이딩 패드로 자료를 정리하며 종료를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리님.”
“수고하셨어요. 이승훈 에스퍼. 이제 진짜 에스퍼 태가 나네요.”
부드럽게 웃어주자 이승훈이 씨익 개구지게 웃어 보인다.
“감사합니다. 저 또 훈련하러 가볼게요!”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표정을 썩혔다. 방금 에너지 만땅으로 풀어놨는데, 또 이능을 쓰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가이드는 없을 것이다.
이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방 사라졌고, 나는 가이딩 전용실에 혼자 남아 지친 몸을 소파에 깊게 묻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로감과 도지윤을 생각하느라 딸려오는 정신적 소모가 나를 괴롭혔다.
시간을 보니 거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켜 가이딩 전용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퇴근하고 싶다.’ 하고 중얼거리고 있자니, 다른 방에서 사람이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그 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내 사고 회로가 뚝 멈췄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주인공들, 윤 주임과 도지윤 에스퍼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대리님!”
밝은 표정의 윤 주임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 주임.”
나는 미소 지으려 노력했지만 제대로 지어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개를 조금 움직여 도지윤 쪽을 바라보자 도지윤은 나를 바라보며 특유의 맹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익숙한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안심되어 그제야 제대로 웃을 수 있었다.
“가이딩 하고 나오는 길인가 봅니다.”
“네.”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둘에게 묻자 윤 주임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그 얼굴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무거워진 머리가 사고의 흐름을 방해했다.
“도지윤 에스퍼. 잘 지내셨습니까.”
“네.”
단답형으로 되돌아오는 답에, 나는 심사가 다소 뒤틀렸다.
‘네’밖에 할 말이 없나, 아니면 나랑 대화하기 싫은 건가. 둘이 짜고 내 질문에는 ‘네’라고만 대답하기로 했나.
울컥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고 나는 그 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둘도 나를 마주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려 먼저 타자, 윤 주임이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윤 주임의 어깨를 붙잡아 못 타게 했다.
“먼저 가세요. 대리님.”
도지윤이 나긋나긋하게 특유의 느린 말투로 말하는 동안, 윤 주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한 채 얼어있었다. 나는 뭐 하자는 건가 싶어서 그 둘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 문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내 속을 삐쩍 말려 나를 죽이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와, 씻고 바로 맥주를 땄다. 탄산의 시원함이 목을 지나 빈속을 향해 질주했다. 그럼에도 내 갈증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윤 주임. 도지윤.
둘이 같이 서 있던 장면이 고장 난 영사기처럼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시발. 좆같아서 정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정확히 집어내지도 못한 채, 나는 연신 욕을 중얼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도지윤에 대한 믿음과 불신은 정확히 내 마음의 반을 나눠 차지하고 있다.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불신 쪽에 윤 주임이 붙어 힘을 보태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믿음 쪽에서 안간힘을 써서 줄을 당기려 노력했지만 나의 근력은 윤 주임보다 못했다.
가이딩을 정말 했을까? 윤 주임에겐 가이딩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실장의 말대로 S급 에스퍼에게 걸맞은 가이드는 윤 주임인 걸까?
3주 뒤에 윤 주임이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를 그만두겠다고 말을 할까?
도지윤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이리저리 꼬아진 상념들은 결국엔 다시 도지윤으로 향해간다. 인정해야 했다.
내가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감정은, ‘질투’였다. 나는 성인이고, 침착하게 이 감정에 대해 받아들여야 한다. 시발.
도지윤이 보고 싶었다. 도지윤의 목을 짤짤 흔들어서 나를 좋아하냐고, 윤 주임에게 마음이 돌아선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품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어른스럽게 이 상황을 다스려야 한다.
이미 도지윤을 향한 마음은 바삭 말라버린 숲을 태우는 불길처럼 거세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내 위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코올도 들어갔겠다, 질투에 눈이 멀어 제정신도 아니겠다, 나는 어른스럽게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도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리님.]
“도지윤 에스퍼. 쉬는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어쩐 일이세요?]
“일주일에 한 시간씩, 저 볼 수 있는 거 기억해요?”
[…네.]
“지금 봅시다.”
[네?]
“지금 보자고요. 바쁜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우리 집으로 오세요.”
[…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도지윤 에스퍼.”
[네.]
“올 때 젤 좀 가져와요. 집에 젤이 없네.”
[…네?]
내 말에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도지윤이 의아함을 담아 되물었다.
[가이딩 해주실 거예요?]
잠시 고민을 하던 도지윤이 질문을 했지만, 잘못된 내용이라 나는 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가이딩 안 할 거예요. 전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 아니잖아요.”
[…….]
“섹스할 거예요.”
내가 윤 주임보다 나은 점은, 윤 주임보다 몇 년 전에 어른이 되었고 어른스러움을 잘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저놈의 벨을 다시 살려 놓든가 해야겠다.
문을 열자, 에스퍼의 강인한 체력으로도 서둘렀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에 숨을 몰아쉬는 도지윤이 서 있었다.
“…들어와요. 도지윤 에스퍼.”
집 안으로 들어와서 물을 한 잔 건네주자 도지윤은 바로 받아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쉰 도지윤이 식탁 위에 물컵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대리님.”
“네. 도지윤 에스퍼. 엄청 빨리 왔네요.”
나는 순간 도지윤이 ‘공간 이동’ 능력이라도 사용을 했나 의심했지만, 분명 도지윤의 저 ‘공간이동’ 이능은 가까운 곳으로만 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주 능력’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차 밟았어요.”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지윤이 손에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이거….”
“뭐예요?”
“대리님이 가져오라 하신 거요.”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 도지윤을 나는 멀뚱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점점 길어지자, 나는 이 어색한 상황에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도지윤 에스퍼. 55분 남았어요.”
그러자 도지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간다.
“대리님이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섹스는 어떻게 해요?”
다급히 내뱉는 도지윤의 말에,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귀여운 놈.
나는 도지윤의 두 뺨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러자 곧바로 도지윤이 한 손으론 내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론 내 뺨을 잡아왔다. 도지윤의 아랫입술을 핥아 올린 내 혀가, 너무 뜨거워서 얼음을 무는 것 같았다.
***
차가운 젤이 미끈거리며 내벽에 펴 발라지는 느낌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도지윤의 손가락이 이리저리 쑤셔, 이물감에 바르작대고 있으니 그가 내 유두를 이 끝으로 살짝 깨문다. 이미 괴롭힐 대로 괴롭혀서 퉁퉁 부어버린 유두에 아픔과 같은 쾌감이 피어올랐다.
“아흣.”
도지윤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괴롭히지 말라고 고개를 가슴으로 내리누르자, 그가 혀끝으로 유두와 유륜을 살살 쓸어 올린다. 어느새 늘어난 손가락을 구멍이 빠듯하게 조여 물었지만, 곧 물처럼 변한 젤과 철퍽거리는 액이 나와 쉽게 이완되었다.
“흐… 도. 도지윤 에스퍼.”
신음인지 깊은 숨인지를 몰아쉬며 그를 불렀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도지윤은 연신 내 몸을 개처럼 핥고 내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셨다. 도지윤이 착실히 붙인 불이, 메마른 내 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나는 더 큰 것을 원했다. 손가락으로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쓸고 찌르고 훑을 수 없었다.
“흣. 도. 도지윤. 아아!”
침대 시트를 붙잡던 손을 내려 도지윤의 뺨을 잡아 나를 보게 했다. 잠시 나에게 집중하느라 모든 움직임을 멈춘 도지윤의 검은 눈에, 흥분에 가득 찬 내 모습이 비쳤다.
“너, 넣어줘요.”
단순 명료하고 노골적인 나의 부탁에 도지윤은 맹하니 웃었다.
“뭘 넣어드릴까요.”
“아흣. 아. 흐으.”
그러나 도지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대신 손가락을 처박듯이 쑤셔 넣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도지윤의 손가락의 움직임의 자취를 따라 울려 퍼졌다.
“아. 흐아. 좀!”
내가 신경질을 내자 도지윤이 몸을 아래로 내리더니, 슬슬 발기하고 있는 내 페니스의 귀두를 덥석 물었다.
“핫.”
길고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눈앞이 핑글 돌았다. 안 그래도 살짝 열이 오른 얼굴이, 이제는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워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라 예상되었다.
도지윤이 물컹한 혀로 귀두를 쓸어 올리며 사탕을 굴리듯 달콤하게 맛을 보았다. 아까부터 젖어있는 속눈썹에 뜨거움이 차오르더니 옆으로 주륵 흘러내렸다.
도지윤은 내 기둥을 핥아 올리다, 축축하고 습한 입속으로 내 페니스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시… 싫어. 아.”
목적성이 뚜렷한 도지윤의 혀놀림에 순간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다, 흘러내린 눈물에 다시 선명해졌다. 도지윤은 고개를 움직여 천천히 왕복 운동을 하며 다시 구멍으로 손가락을 처박았다. 도지윤의 입과 내 구멍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엇박자를 내며, 방을 철퍽철퍽 울려댔다. 이미 내 내부는 풀릴 대로 풀려, 더 이상 도지윤의 손가락을 잡는다는 표현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더 큰 것, 내 내부를 꽉 채울 수 있는 것, 더 큰 쾌감을 원했다.
“도. 도지윤 에스퍼. 페니스 넣어, 아흣, 줘요!”
도지윤이 빨고 있던 내 페니스에서 입을 떼자, 이미 완벽하게 발기한 내 페니스가 그의 입에서 튕겨져 나와 내 아랫배로 퉁하고 부딪혔다. 도지윤이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야하게 쓸어 올렸다.
“페니스요?”
이 새끼가. 진짜. 그러나 이 침대 위에서 약자는 나였다.
“흐아. 좆. 앗. 좆 넣어줘요.”
머리 한구석의 ‘도지윤 이 씨발놈’이라는 말이, 쾌감에 밀려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도지윤이 씨발놈이건 미친개이건 상관없다. 얼른 나 좀. 어떻게 좀.
도지윤은 쑤셔 박던 손가락으로 이제는 내부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도지윤의 손목이 한번 돌려질 때마다, 가장 긴 손가락이 내 극점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에 넣어드려요?”
난 도지윤의 말에 진짜, 발을 들어 도지윤의 얼굴을 찰 뻔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도지윤을 표독스럽게 째려보았으나, 눈물에 속눈썹이 젖은 내 얼굴로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도지윤은 그런 내 모습에 다정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 몸을 돌려 엎드리게 만들었다.
두 손과 무릎으로 침대를 밀어내며, 기대감에 입술을 깨물고 있으니 도지윤이 제 페니스, 아니 ‘좆’을 내 엉덩이 사이에 비벼대었다.
“흐으읏.”
그것만으로도 내벽이 확 조여들었다. 도지윤은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벌리더니, 회음부에서부터 도지윤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까지 제 좆으로 천천히 쓸고 다녔다. 고양감에 시트를 그러쥐며 앓는 신음만 울리고 있자, 도지윤은 드디어 내가 원하던 것을 나에게 주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도지윤의 좆이 내 구멍에 닿는 순간 나는 내쉬고 있던 숨도 멈춰야 했다. 내벽은 환영하듯 꿈틀거렸고, 도지윤은 귀두를 넣을 듯 말 듯 앞뒤로 살살 움직였다. 달아오른 건 내 쪽이었다.
“도지…! 아흣!”
내가 도지윤을 재촉하느라 입을 연 순간, 도지윤은 예고도 없이 끝까지 제 좆을 내 구멍으로 처박았다. 눈을 흐릿하게 만드는 쾌감과 충족감이 내 구멍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을 일으키며 솟아올랐다.
“대리님. 넣자마자 가셨어요?”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도지윤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사정 한 것을 깨달았다. 팔 사이로 내 페니스를 내려다보니, 하얀 정액을 줄줄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도지윤이 다시 한번 제 것을 끝까지 뺐다가 쾅 하고 박아대자, 정액이 한 번 더 울컥하고 튀어 올라 엎드려 있는 내 팔목에까지 튀어 올랐다.
탈력감에 한숨을 길게 쉬자니, 이제 도지윤이 내 골반을 부여잡고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쯤 제 것을 뺸 도지윤이 다시 퍽퍽 소리가 나도록 내 안을 쑤실 때마다, 내벽이 꿈틀꿈틀 도지윤을 잡아챘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도지윤의 페니스에 나는 간신히 두 팔로 내 몸을 지지하고 있었다.
“흣. 아흣.”
그러다 힘이 빠져 팔꿈치로 지지하느라 몸이 쑥 내려가자, 도지윤의 페니스가 반쯤 빠져 ‘쯧’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간 내 몸만큼이나, 이제 각도를 달리한 도지윤의 페니스가 내 내부를 쑤셔왔다.
나는 팔꿈치로 내 몸을 기대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세운 채 도지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다 점점 고개를 세울 힘도 없어 팔꿈치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도지윤이 한번 내 극점을 처박을 때마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리다가, 도지윤의 기둥이 내 내벽을 훑어나가면 아쉬움에 손에 힘이 풀렸다.
“대리님. 왜 이렇게 잘 느껴요.”
도지윤이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는 내 귀에 닿지 못했고, 나는 숨만 바르작거리며 겨우 쉬고 있었다.
도지윤은 이제 제 음모가 내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딱 달라붙어, 은근히 허리를 돌렸다. 한 손으론 내 골반을, 다른 한 손으론 내 엉덩이를 잡아 늘렸다.
“대리님 구멍이 내 기둥까지 씹어 먹겠어요.”
저 재앙과도 같은 주둥이 좀 틀어막고 싶은데, 나는 도지윤이 허리를 한번 돌릴 때마다 겨우 얕은 숨만 내뱉을 수 있었다. 내 엉덩이를 잡은 손을 놓고, 도지윤은 손가락으로 접합부를 느리게 문질렀다.
“손가락 넣어도 딱 맞게 들어갈까요?”
성감으로 달아오른 몸에도, 그 말만큼은 귀에 박히듯 잘 들려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의의 표시로 도지윤의 페니스를 씹을 듯이 꽉 조였다.
“읏. 대리님.”
그러자 도지윤은 접합부를 문지르던 손가락을 떼내어, 다시 내 엉덩이를 붙잡더니 숨을 후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몸을 내려 내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며 추삽질을 시작했다.
“흐윽, 훗, 하으윽.”
딱 달라붙은 도지윤의 몸이 방금 이능을 쓴 에스퍼처럼, 너무 뜨거웠다. 쾌감에 몰아붙여진 시야에 도지윤이 제 몸을 버티느라 침대에 박아 넣은 팔이 들어왔다. 팔뚝에 솟아있는 푸른 핏줄을 보는 순간, 왜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내 내벽이 꿈틀거렸고 도지윤이 강하게 내 목덜미를 물었다. 도지윤의 뜨거운 몸만큼이나 뜨거운 정액이 내 안으로 왈칵 터져 들어왔다. 도지윤이 천천히 허리짓을 할 때마다 뜨거움은 더, 더, 도저히 들어올 수 없을 곳까지 제 영역인 양 침범했다.
눈물과 땀에 젖은 얼굴을 침대 시트에 부비고 있자, 도지윤이 느리게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목뒤에서부터 등, 허리까지 닿아있던 열기가 사라지고 곧바로 뜨거웠던 내벽에서도 도지윤이 사라져간다. 도지윤을 붙잡는 듯, 내부를 꽉 채운 정액이 도지윤의 페니스를 따라 외부로까지 영역을 넓혀 따라갔지만 곧 중력에 붙잡혀 내 허벅지만 적실 뿐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한 듯 숨이 벅차올라 그 자세로 굳어 잠시 쉬고 있자니 도지윤이 힘을 줘 내 몸을 돌린다.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시선에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도지윤이 내 다리를 잡아 올렸다.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썩은 눈길로 도지윤을 쳐다보니 도지윤이 눈을 접어 예쁘게 웃었다.
“아직 시간 안 됐어요.”
천천히 내벽을 가르며 다시 도지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는 도지윤에게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도 아직 도지윤이 부족했다.
***
약속된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도지윤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지윤은 나를 씻기고, 더러워진 침대 시트 대신 여름용 얇은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우리는 알몸으로 붙어 그 위에 올라가 나란히 누웠다. 도지윤이 연신 내 목덜미, 귀를 핥아대며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 이상 발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아 내버려두었다.
이른 저녁부터 붙어먹기 시작해서인지, 딱 잠잘 시간이었다. 꿈틀꿈틀 몸을 돌려 도지윤을 마주 보았다. 도지윤의 까만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담고 바라보더니, 내 눈가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네.”
도지윤은 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나는 내 나이에 걸맞게 여러 사람을 만났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확신에 차서 나에게 좋아한다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달콤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 주임에게 가이딩은 받고 있어요?”
“아니요?”
“그럼 아까 가이딩 전용실에서 나온 건 뭔데요?”
“대리님이 가이딩 받는 척이라도 하라면서요.”
“엘리베이터는 왜 나 혼자 가게 하고요?”
“대리님이랑 같이 있으면 입 맞출 것 같아서요.”
도지윤은 나를 보며 막힘없이 대답했고, 그 대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바람난 애인을 추궁하는 듯한 형국에 궁색해진 것은 나였다.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힘을 잃고 중얼거리는 내 말에 도지윤이 맹하게 웃는다.
“전 대리님 말 잘 들어요.”
나는 내 팔을 접어 베고 도지윤을 바라보았다. 나를 직시하는 도지윤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입술을 깨물자 도지윤이 곧바로 손을 올려 내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나는 픽 웃으며 도지윤의 손을 잡아채 그의 손바닥 사이에 입술을 묻고 입을 열었다.
“도지윤 에스퍼가 윤 주임에게 가이딩 받는 거 싫어요.”
도지윤의 손바닥에 내 입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가 부딪히며, 내 말이 웅웅거리듯 진동하며 퍼져나갔다. 그러나 도지윤은 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 곧바로 내 뺨을 붙잡고 입술에 키스해왔다.
“저도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는 거 싫어요.”
마주한 입술을 통해 두근거림이 넘나들었다. 아까보다 두 뼘 더 가까워져 코앞으로 옮겨진 시선이 이제는 녹아 흐를 듯 따뜻했다. 나는 손을 들어 도지윤의 얼굴을 두 뼘보다는 가깝게, 하지만 지금보다는 먼 위치로 밀어내었다.
다시 팔을 고쳐 베고, 이 방엔 아무도 없지만 혹시나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말했다.
“혹시 3주 뒤에. 이제 2주네요. 아무튼 2주 뒤에 가이드 실장이 윤 주임과 ‘임시 전담’ 계약 해지 못 시킨다고 길길이 날뛰면 어쩌죠?”
그러자 도지윤도 소곤소곤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말했다.
“그땐,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낮은 저음으로 도지윤이 내뱉은 문장이 마법처럼 나를 안심시켰다.
도지윤과 만난 이래로, 처음으로 도지윤이 듬직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도지윤이 보여주었던 기상천외한 모습들이 섬광처럼 번뜩여 다급히 말을 붙여야 했다.
“실장 죽이는 건 안 돼요.”
그러자 도지윤이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배시시 웃었다.